새해, 웹진 <제3시대>에 바란다


 

이상철
(본지 편집인, 한백교회 담임목사)


 

프롤로그 : 나와 <제3시대> 


          웹진 <제3시대>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2009년 6월이었다. 당시 나는 시카고 신학대학원박사과정 코스웍 학생이었다. 미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연구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내게 어느날 김진호 목사가 제3시대그리스도교에서 웹진을 발행하니 필자로 들어와 줄 것을 제안하였다. 나는 공부가 급하고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사양했고, 그 후 2009년 2월에 웹진 <제3시대>(이하 웹진) 첫 번째 호가 발행되었다. 첫 웹진이 발행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그해 5월에 운명을 달리했다. 비록 내가 노무현의 지지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의 자살정국은 나와 웹진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었다. 시카고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끼리 고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맞춰 추모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에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 영정 앞으로 나와 헌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고 나중에 한장한장 다시 돌려보면서 그 날밤 김진호 목사에게 웹진에 글을 기고하겠노라고 말해버렸다. 지금 회상해보니 아마도 당시 내 마음에서 일말의 시대를 향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격하게 일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여태 공부를 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함과 무책임함, 그리고 무능함이 뒤섞인 화학반응이었고, 그것은 또한 유학하는 나의 제한된 상황속에서 최소한의 실천의 방도를 마련하기 위한 궁색한 자기변명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2009년 6월부터 2015년 1월까지 만 5년이 넘게 한 달에 한 편씩 꼬박고박 웹진에 원고를 보냈다. 그 글들이 쌓여 책으로 출판되는 소득을 얻었고, 그것보다 더 소중한 여러 인연들과 연결되는 계기를 웹진은 내게 허락하였다. 2014년 5월, 나는 10년 동안의 시카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변화된 한국 상황과 그 변화에 맞게 순응해버린 사람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느낄때가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를 바라보면서 위안을 느낀다. 이런 사연과 시간들이 쌓이면서 내게는 연구소를 향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고, 하여 별다른 고민과 망설임 없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웹진 <제3시대> 편집장 역할을 하겠노라고 말해버렸다.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잠시 미쳤었나보다. 


<제3시대>에 대한 사후적 구성


          미국에서 세미나 시간에 제일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이 있다. So What? “그래서 뭘 하겠다는 건데?” 잠시 동안 웹진에 대한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가 문득 미국 학생들이 세미나 시간에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체 어깨를 들썩이며 So what? 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냉혹한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웹진 <제3시대> 뭘 하겠다는 거니? 갑자기 이 기본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김대중-노무현 민주정권이 막을 내리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던 그 무렵에 <제3시대>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을 걸고 웹진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 이심전심으로 공명했던 무엇인가가 웹진 출범의 원동력이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 당시에 나는 한국 땅이 아닌 미국 땅 시카고에 있었던 관계로 그것을 매끄럽게 설명해내지 못하겠다. 과연 웹진을 가능하게 했던 중핵은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어쩌면 그 중핵을 찾아 떠나는, 마치 잃어버린 나의 반쪽을 찾아 길을 떠나는 패크맨 이야기가 될 런지도 모르겠다.  

         2009년 웹진이 발행되던 당시 한국 사회는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여 신자유주의가 삶의 원리가 되어 혈관을 타고 막 흘러다니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물론,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던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계기를 마련하긴 했으나, 그것이 이토록 잔인한 시스템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사람은 이명박이다. 이명박은 앞선 지도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다. 그의 대의와 명분은 오로지 자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개발 독재시대 스티그마라 할 수 있는 인권과 자유와 정의에 대한 원죄의식을 말끔히 지웠다. 김대중-노무현이라는 통과의식을 거치면서 죄의식에서 해방된 한국 유권자들은 그로부터 10년 후에 자본을 케츠프레이즈로 내건 이명박에게 몰표를 던졌다. 군사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가졌던 원죄의식을 김대중-노무현 시기를 거치면서 씻어버렸기에 이명박을 찍으면서도 그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더 이상 대의와 명분, 의리와 도덕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그 후 우리는 다같이 우리의 체면과 양심, 대의와 수치심과 윤리를 바닥에 내려놨다. 나는 그것이 바로 2009년 웹진 <제3시대>가 시작되던 당시 한국사회를 감싸고 있었던 파국의 지형학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 지점이 우리로 하여금 웹진 <제3시대> 깃발을 들게 했던 시발점 아니었을까?

            우리는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에게 신학은 무엇인가?’ 신학을 시작한 이래로 수 천번도 더 물어왔던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여전히 우리가 처해있는 역사적 전환기마다 되돌아오는 가장 유의미하고도 애절한 질문이다. 웹진은 다양한 형태의 말걸기로 시대의 요청과 질문에 답을 하려고 노력했고, 혹 우리의 내공이 부족할 때면 다른 친구들을 월례포럼 혹은 각종 강연회 형태로 초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찾으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웹진 <제3시대>,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지니는 방향성에 관한 몇 번의 지적과 우리는 직간접으로 마주하기도 했다. 그 기억은 비록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현재를 점검하고 과거를 뒤돌아보게끔 하는 기회가 되었다. 비판자들이 던지는 <제3시대>를 향한 지적의 적합성 내지 유의미함을 떠나서, 그것은 신학(함)에 대한 우리 자신의 근성과 점성을 더 끈적하고 치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결론적으로 연구소가 추구하는 신학운동의 조타수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웹진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추구하는 신학 작업의 마당이고 실험장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시대와 신학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고 공명하며 저항했다. 그리고 다시 또 우리는 묻는다. ‘2016년 한국 땅에서 신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제3시대>, 파국을 향한 오늘의 변증법


          2016년 한국사회를 서사하고 묘사할 때 가장 적절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파국’이라는 말을 선택하겠다. ‘파국’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 ‘재앙. 참사’의 뜻을 가진 catastrophe이다. 세계 곳곳에서 발발하는 기상이변, 각종 예상치 못하는 테러들, 연쇄적으로 물결치면서 전 세계를 유랑하는 경제침몰의 뉴스들, 이런 흐름 속에서 갈수록 파편화된 채로 파멸되어가는 개인들에 대한 뉴스가 파국의 현상학을 드러내는 단적인 표식이겠지만, 더 문제적이고 암울한 파국의 현상학은 이런 파국의 일상화로 인한 전망의 부재, 혹 어떤 전망이 있다손 치더라도 디스토피아적 미래만을 예측해야 한다는 무력감 내지 절망감 아닐까 싶다. 이것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사회만 잠시 둘러봐도 그 증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연속되는 재앙과 참사의 현장을 살아가는 한국민들에게 어쩌면 파국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한해만 보더라도 풀리지 않는 세월호 문제, 메르스사태, 성회장 리스트, 국정교과서 문제, 백남기 농민, 마지막으로 터진 정신대 졸속 타결과 소녀상 철거문제까지... 굳이 하나하나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땅이 한국사회 아닌가?  

          하지만, 진정한 파국의 모습은 현재 펼쳐지고 있는 파국의 현상학보다는 ‘곧 그날이 올 것!’ 이라는 파국의 공포술로 유지되는 매커니즘 그리고 그로 인한 효과들이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세계 최고의 자살률, 노동시간, 삶에 대한 만족도, 여성의 사회참여도, 비정규직 비율, 노인들의 자존감, 다음세대인 청소년. 청년들의 미래전망도, 이민가고 싶은 사람들의 비율 등의 수치를 조사할 때 OECD 가맹국,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최하위 혹은 최상위권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수치들과 전망들은 한국사회에 임박할 파국을 예감케 함으로써 우리를 얼어붙게 만든다. 그것을 이용한 공포와 기만의 정치술이 가장 큰 파국의 효과이고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이러한 파국의 지형을 어떻게 거슬러서 올라가야 하는가? 차라리 신학을 때려 치고 교회를 불태워야 하는 것이 이 땅에서 능욕당하는 신과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양심은 아닐까? 이렇듯 현상에서 일어나는 파국(catastrophe)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명 절망적이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고 신학이 주장하는 파국(apocalypse; 아포카립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포카립스적으로 파국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종말인 동시에 창조이고, 절망인 동시에 희망이다. 아포카립스를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식으로 표현하면 치유와 독약의 뜻을 동시에 가졌던 ‘파르마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유토피아이면서 동시에 디스토피아적인 성격을 지닌다. 어쩌면 성서가 증언하고 신학이 풀이하는 파국(apocalyse)은 해체(deconstruction)에 가깝다. 해체론에 따르면 어떤 사물의 질서와 본질은 안과 밖의 경계가 명확한 지점에 위치하지 않는다. 안이 어느덧 밖이 되고 밖은 별안간 안으로 변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파국이라는 말속에는 의미에 대한 영토화를 반대하는 해체적 성격이 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보이는 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처럼,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하면서 의미화되는 것에 대한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였던 그것처럼 성서는 제도화된 신과 이름 붙여진 신에 대한 해체의 작업을 미리 우리보다 앞서 선행하고 있었다.  

          웹진 <제3시대>는 이러한 파국의 상상력, 해체론의 수사학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부연하자면 그것은 다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확신과 선(善)에 대한 믿음이 굳게 자리하는 경이적이고 매혹적인 순간이 도래할 지라도, 그 사유속에는 언제나 독(毒)이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파국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는 것이 해체론적 사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태와 현상을 흠없이 바라보는 완벽한 조감도가 아니다. 오히려 익숙한 대상들을 향한 낯설게 하기와 박제화되고 굳어버린 대상들을 향한 치기어린 시선, 그리고 엄숙하고 근엄한 목소리를 향한 딴지와 그것들에 대한 비틀기이다.  

          이런 원칙에 입각해 웹진을 구성한다면, <제3시대>는 매끈하게 일필휘지로 완성되는 그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어 균열과 얼룩이 남아있는 그림이 되는 것! 하지만 그 균열과 얼룩이 파국(catastrophe)의 지형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그 균열과 파국으로 인해 진정한 파국(apocalyse)의 도래를 예감할 수 있는 웹진이 되는 것! 그리하여 오늘 이 땅에서 여전히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판본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 이것을 2016년이 시작되는 이 순간 웹진 <제3시대>에게 요구한다면 너무 큰 바람일까?  


에필로그 : 편집자의 變


          웹진을 꾸준히 보아왔던 독자들은 이미 감지하셨겠지만, 지난 67호(2015.8.17)부터 웹진은 운영 시스템을 달리하고 있다. 종전 월 1회 발행하던 웹진을 격주(1,3주 월)로 발행하고 있고, 필진들도 크게 4개조로 나누었다. 각 조마다 6-7명의 필자들을 확보한다는 미션 아래 신학뿐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걸쳐 필자들을 수소문 중이다. 여성 필자의 비율도 차차 늘여 가급적 남녀 필자가 동수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고, 국내필진과 해외필진간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긴장도 도모하고 싶다. 아울러 영상, 사진, 미술 등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숨은 필자들에 대한 발굴에도 주력하여 자칫 웹진이 퍽퍽한 이론 취향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고자 한다. 아직 시행은 하고 있지 않으나 학문후속 세대 양성을 목표로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따로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코너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도 있다. 이러한 컨텐츠 변화에 맞게 웹디자인도 새롭게 단장을 해야할 것이다. 조만간 시행할 <제3시대> 팟캐스트와도 연동이 될 수 있도록 조치를 할 것이다. 시의적절한 대담 프로나 기획기사를 분기별로 제작하고 싶으나 아직 거기까지는 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시스템이 안정되면 도모해볼 생각이다. 예산이 허락되면 연구소 회원들이나 열독자들에게 웹진기사를 타블로이드판으로 재편집해 선물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그것은 빠듯한 연구소 사정상 현재로는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날이 도적처럼 올지 말이다.  

          2016년이 끝날 때 쯤이면 웹진은 100호를 눈앞에 두게 된다. 이번 웹진이 76호니까 한 달에 2회씩 업데잇되면 올 12월 마지막 웹진은 99호다. 한낱 웹진이 100호를 채울 것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 이겠냐마는, 미리 그날을 예상하면서 지난 과거를 회상할 때 우리 스스로를 향한 정체 모를 묵직함과 자부심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현재 웹진 필진들의 면면이나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종. 다성. 다국의 성격을 지닌 다양한 이력의 필자들이 진보적 신학의 전문화, 현장화, 대중화를 견지하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 말과 글로 힘을 보태고 있다. 독자들 역시 교회와 신학의 테두리를 넘어선지 오래다. 간학문적, 혼융합적 글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신학 이외의 영역에서 웹진 기사에 접속하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주례사적인 자기비평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격려와 위안의 메시지를 던지고 나니, 아마도 지금이- 그것은 웹진이 더 이상 우리만의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을 말하는데 - 웹진 <제3시대>의 진정한 출발점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새해인사


          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 전개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행보와 웹진 <제3시대>가 그려나갈 포물선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신학을 사랑하고 올바른 신학이 있어야 교회와 사회가 건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어떤 권위와 전통 앞에서도 쫄지 않는 저희가 될 것이고, 어떤 편견과 그 어떤 대타자의 목소리와도 맞짱 뜨는 저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의가 우리만의 도그마가 되지 않도록, 자칫 이러한 호기가 우리만의 최면과 객기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에 대한 감시 역시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성원과 지지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Remember You are the reason I am!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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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하라, 로자바(Rojava)를! 


ISIS와의 전쟁 최전선에 서 있는 저 유토피안적 사회 공동체를! 

 



서명삼

(University of Chicago, 종교사회/인류학 박사과정수료)




    0. 먼저 양해부터 구하고 싶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라면, 이번엔 1920년대 미국에서 (정치)지도자(the elite)와 대중(the public)간의 바람직한 관계설정 문제를 둘러싸고 존 듀이 (John Dewey)와 월터 리프만 (Walter Lippmann)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을 되짚어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난 몇 개월 사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연달아 벌어진 테러리즘과 그에 대한 반발로 다시금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반이슬람주의의 광풍을 접하면서, 기존의 계획에서 다소 벗어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이슬람 극단주의와 서방세계에서의 뿌리깊은 오리엔탈리즘을 소재로 글을 써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 말 뉴욕타임즈 매거진에 게제된 “ISIS의 뒷마당에서 피어나고 있는 세속적 유토피아의 꿈 (A Dream of Secular Utopia in ISIS’ Backyard)[각주:1]”이라는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르포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루어진 내용이 다분히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알린스키의 주민조직운동이나 급진적 실용주의 전통과도 어느정도 상응하는 면이 있다는 판단하에, 이번에는 저 기사를 길잡이 삼아 시리아 북부 로자바에서 탄생한 이 이상적 정치-사회 공동체에 대해 소개해볼까 한다.



    1. 우선 로자바의 지정학적 위치부터 확인하고 넘어가자.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로자바는 시리아 북동부 끝단에 동서로 가늘고 길게 뻗어있는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터키와 그리고 동쪽으로는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로자바’는 원래 쿠르드어로 ‘서쪽’을 뜻하는 단어다. 정확한 역사적 연원은 불분명하지만 쿠르드족은 천년의 세월 넘도록 오늘날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그리고 이란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뿔뿔이 흩어진 채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쿠르드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시리아 북동부는 ‘로자바예,’ 즉 ‘서쪽에 있는’ 쿠르드족 영토에 해당하는 곳이다. 하나 이런 지리학적인 용어상의 혼란이 시사하듯이 쿠르드족은20세기 들어 탈식민지 시대를 거치는 중에도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달리 끝내 자신들만의 독립된 민족-국가 (nation-state)를 건설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쿠르드족은 각종 차별과 견제와 탄압을 받으면서 ‘국가’없는 소수 ‘민족’으로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날 로자바에 거주하는 시리안 국적의 쿠르드족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힘겨운 상황에 처해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로자바의 주민들은 아사드 (Assad)가의 세습 독재 정권에 반대해 시리아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반군 연합에 가입해 정부군과 내전을 진행중이다. 또, 이라크에 뿌리를 둔 ISIS 세력이 이 혼란을 틈타 시리아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로자바는 ISIS와도 크고 작은 게릴라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자국의 쿠르드 소수 민족을 억압해온 터키 정부 역시 로자바에게 적대적이긴 마찬가지다. 시리아 내전이 터지고 ISIS가 기승을 부려 시리아 난민이 급증하는 상황에서도 터키는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경계 태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2. 그런데 이러한 전쟁통 한가운데서 선뜻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몇년 사이에 로자바 지역에서,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PYD (Partiya Yekitia Demokrat; 민주연합당)의 주도하에 시리아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여러 집단이 연합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아프린 (Efrin), 코바니 (Kobane), 그리고 자지라 (Cizire) 이 세 행정구역(canton)에서, 성별, 민족, 종교, 계급에 관계없이 일정한 나이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급진적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험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슬람 근본주의와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사회문화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걸로 잘(못) 알려져 있는 중동 지역의 한복판에서, 게다가 국제사회에서 테러리스트 관련 집단으로 분류되어 군사적-경제적 제제를 받고 있는, 그리고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터키의 아르도간 정권, 그리고 무엇보다도 ISIS와 상시적으로 교전 상태에 있는, 바로 그 로자바에서 말이다.


    3. 워낙 최근의 일인 데다가 서로 상충하는 내용의 보고들이 떠돌아 다니는지라 다소 조심스러운 면이 없진 않지만, 지난 2014년 1월 공식 발표된 로자바의 <사회계약헌장>[각주:2]을 토대로 거기서 시행되고 있는 급진 민주주의 제도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이 ‘계약’에 참여하고 있는 복수의 민족들이 — 쿠르드인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아랍인, 앗시리아인, 그리고 아르메니안인 등 여러 다른 민족도 그 구성원에 포함된다고 한다 —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보다는 오히려 반국가주의, 반중앙집권주의, 그리고 정교분리의 원칙에 입각해 각 지역사회에 조직된 민회 혹은 평의회 (municipal councils)를 기본단위로 한 연합체 (confederation) 구성을 그 정치적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국가의 모델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시각에서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인데, 아무튼 로자바의 헌장은 입법-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모든 기구는 물론이거니와 민병대와 민간치안부대의 권한과 의무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국가 체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로자바의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시리아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지역 내에서 아사드 정권에 충성하는 집단과도 긴장 속에서 불안정한 동거를 하고 있다. 굳이 설명을 시도해보자면, 로자바는 ‘국가’라는 제도가 가진 현실적 힘을 어느정도 인정해주고 있긴 하나 궁극적으로는 없어져야 할 것 혹은 자치권만 획득하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4. 이밖에 로자바의 사회-경제적인 정책도 눈여겨 볼 지점들이 많다. 일단 성평등 측면에서, 로자바의 사회헌장은 모든 정치 단위에서 (지방 평의회에서부터 연합 행정위원회까지) 남녀 어느 한쪽이든 최소한 40%이상의 지분을 확보하도록 명시해 놓았다. 더불어 ‘공동통치 (co-governance)’라는 개념을 도입해 모든 정치 직책을 여성과 남성이 한 짝을 이루어 맡는 방식도 제도화해 놓았다. 이러한 철저한 양성평등주의는 사방 (社防; 국방이 아니라)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로자바의 여성주의자들[각주:3]은 가부장적 위계질서와 성적 차별이 가정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 무력 분쟁에서도 똑같이 발현된다고 보기 때문에 진정한 여성 해방을 위해선 자신들이 직접 총을 들고 종종 남성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전쟁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YPJ (로자바의 민병대) 내에서 여성으로만 구성된 부대[각주:4]는 ISIS와의 전투에서 중요한 전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성의 경우 ISIS에게 포로로 잡히면 성적노예로 전락되기 쉽상이라 이들 여성부대원들은 정말 생사를 가리지 않고 — 대부분 잡히기 전에 스스로 자결을 택한다 — 전투에 임한다고 한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유명한 ISIS의 전투원들은 자신들이 여성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차별적 신념[각주:5]을 갖고 있어 로자바의 여성민병대와 맞닥뜨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로자바의 경제 정책을 짧게 언급만 하자면, 로자바에서는 개개인의 사적 재산을 인정하지만 모든 토지와 건물, 그리고 천연자원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공개념을 적용해 전 사회의 공동재산으로 규정해 두었다. 또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로자바는 자본논리에 따른 개발지상주의에 반대하면서 생태주의와 지속가능한 개발 방식에도 큰 관심을 기울인다.



 

    5. 그렇다면 로자바의 이 유토피아적 사회에 대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이를 제대로 설명하자면 따로 긴 얘기를 풀어놓아야 할 테지만, 간단히 줄여 말하면 이렇다. 이 실험의 주체인 로자바의 PYD (민주연합당)는 이웃나라 터키에서 활동하고 있는 PKK (Partiya Karkerên Kurdistanê; 쿠르드 노동자당)의 시리아측 파트너라 할 수 있다. 70년대 말부터 2천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PKK는 맑스-레닌-마오이즘의 영향 아래에서 터키 정부를 상대로 게릴라전와 테러리즘을 동원해 가열찬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다가 1999년 당의 최고 지도자인 압둘라 외잘란 (Abdullah Öcalan)이 체포되어 터키에 있는 이므라레 (Imrali) 섬 한복판의 감옥에 수감된 이후 PKK는 급격한 노선변경을 하게 된다. 외부 세상과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외잘란은 오직 독서를 통해 앞으로 쿠르드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서 다시금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와중 2002년 경 우연히 미국의 좌파 유대인 지식인 머레이 북친 (Murray Bookchin, 1921~2006)의 저작들을 접하게 된다. 그때부터 북친의 사상에 매료된 외잘란은 기존의 맑시즘 전통에서 탈피해 사회 생태주의, 여성주의, 급진 민주주의, 코뮌주의 (communalism), 그리고 민주적 연방주의 (Democratic federalism) 등의 사상들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외잘란은 (변호사를 통해) 감옥 밖에 있는 자신의 동지들에게 PKK의 운동 노선을 북친의 사상에 비추어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2004년에는 미국의 버몬트주에 거주하고 있던 북친과 접촉해 중동의 한복판에서 그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공동체가 탄생중에 있음을 알리기까지 한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지금 로자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토피아적 정치-사회적 실험은 외잘란을 매개로 해서 북친의 사상이 중동의 땅 한가운데서 마침내 실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로자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점차 외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최근에는 슬라보예 지젝[각주:6]이나 데이비드 그래버[각주:7]같은 서구의 여러 좌파 지식인들도 이 쿠르드계 시리아인들의 투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아사드 정부는 러시아와 (같은 시아파 이슬람 국가인) 이란이라는 든든한 우방을 갖고 있고, 터키는 EU의 일원으로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ISIS는 (구체적인 확증은 없으나) 터키를 비롯한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얘기가 떠돈다. 이 막강한 정치-군사 세력들 틈바구니 속에서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홀로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인류의 고귀한 이상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고 있다. 물론 빛이 있으면 그늘이 생기기 마련이듯, 로자바에 대해 몇가지 우려할 만한 지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권단체들[각주:8]은 쿠르드족 중심의 민병대나 민간치안부대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나 ISIS와 전쟁 중인 상태에서 정부나 ISIS의 끄나풀들을 색출하거나 그들이 은신하고 있는 마을을 공격할 때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폭력을 사용한 사례들과 18세 미만의 어린 소녀/소년들이 성인과 함께 종종 총을 들고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사례를 들어 로자바 역시 인권침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 왔다. 또한 외잘란에 대한 쿠르드족의 절대적 신뢰도 다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근 15년 넘게 감옥에 정치범으로 갇혀있는 상황에서 외잘란은 끊임없는 집필 활동을 통해 터키와 시리아에 있는 PKK와 PYD 세력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질적인 지도자로 군림해왔다. 그래서인지 로자바에 관련된 기사를 찾다보면 공식 행사장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집에서도 거의 예외없이 외잘란의 그림 혹은 사진이 벽의 한 복판에 걸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외잘란에 대해 갖고있는 존경심이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나, 그에 대한 경외감이 자칫 개인숭배 (cult of personality)로 흐르게 될 경우 로자바가 내걸고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원리마저 적잖게 그 빛이 바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분명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지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염려가 되는 건, 국제적으로도 거의 고립되어 상황에서 게다가 다양한 적들과 힘겨운 싸움들을 이어가면서 로자바가 과연 얼마나 자신들이 세운 고귀한 이상을 스스로 지켜나가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야멸찬 소리로 들릴 지 모르겠으나) 피와 살덩이로 이루어진 외부의 적과 싸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자본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에 대항해서 이들 로자바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적들과도 어쩌면 ISIS를 상대로 한 싸움보다 훨씬 더 어려운 전쟁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기대와 염려를 가득담아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7. 주목하라, 로자바를!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 웹진 <제3시대>

  1. http://www.nytimes.com/2015/11/29/magazine/a-dream-of-utopia-in-hell.html?_r=2 [본문으로]
  2. http://peaceinkurdistancampaign.com/charter-of-the-social-contract/ [본문으로]
  3. https://cambridge.academia.edu/DilarDirik [본문으로]
  4. https://www.facebook.com/Kurdish-Female-Fighters-YPJ-1814267612131127/?fref=photo [본문으로]
  5. http://www.mirror.co.uk/news/world-news/angels-death-isis-savages-fear-6275913 [본문으로]
  6. http://www.newstatesman.com/world/middle-east/2015/12/slavoj-zizek-why-we-need-talk-about-turkey [본문으로]
  7. http://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4/oct/08/why-world-ignoring-revolutionary-kurds-syria-isis [본문으로]
  8. https://www.hrw.org/sites/default/files/reports/syriakudrs0614webwcover.pdf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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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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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명삼
    2016.01.06 12: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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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퍼링크 연결해놓은게 다 깨져나와서 수정된 버전을 제 구글닥에 올려놓겠습니다. 자료의 출처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https://docs.google.com/document/d/1s8oA687UpVEarhHthhbtlfsMgQ-gLsCLO2JedYlSJjY/edit?usp=sharing
  2. 2016.01.06 13:3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필자께서 깨져 나왔다는 하이퍼링크 주소를 각주로 처리했습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집 : 김진호 vs 이재원, 바울을 둘러싼 썰전]




바울과 제국, 현대신학의 화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리고 이재원(미국 시카고 맥코믹 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 현, 한신대학교 초빙교수)



제 1주제_ 전사(前史)와 전향(轉向)


김진호_


    바울이 역사적으로 처음 포착된 시기는 서기 36년 직후로 보이고, 장소는 다마스쿠스다. 그 해는 예루살렘의 리버디논 회당(리베르티논 회당. 예루살렘에 거류하는 헬라계 이주자들의 회당)에서 스데반이 처형되는 등 일단의 헬라계 예수 추종자들이 심각한 탄압을 받고 흩어진 때다. 이들이 흩어져 이방지역에서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활동을 개시한 곳이 다마스쿠스와 안디옥인데, 나바태아국(Nabatea) 영토였던 다마스쿠스는 동방으로 향하는 선교의 거점이었다면, 로마의 영토였던 북시리아의 안디옥은 지중해로 이어지는 선교의 교두보였다. 

    바울은 그 무렵 다마스쿠스에서 반그리스도파 운동을 주도하다 그리스도파의 일원으로 전향하였다. 당시는 안티파스와 나바태아국의 아레타스 3세 간의 전쟁(34~36년)으로 나바태아국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이때 바울이 다마스쿠스 성을 몰래 빠져나온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후 바울은 아마도 나바태아국 여기저기서 그리스도 선교활동을 폈던 듯한데, “14년”(〈갈라디아서〉 2,1)이라고 말한 그의 동방 선교 활동은 실패했고, 그 역사적 흔적도 사라졌다. 

    여기서 논점은 ‘전향’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회심’과 ‘개종’인데, 회심은 개인의 내면적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바울의 인생행로의 극적인 전환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간과하게 하고, 그의 선교활동의 방점이 개인적 차원의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개종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새로운 종교를 창안했거나 이미 존재한 종교에 새로 가담한 것처럼 보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생애 내내 이스라엘 신앙 체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전향이라는 표현을 쓴다. ‘지향의 바뀜’이라는 의미와 사회적 운동의 뉘앙스를 갖는 이 표현은 바울이 가치관과 실천의 지향점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그는 그가 적대하던 그리스도파 운동가로 전향하여 활동한다.


이재원_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영향을 받아왔던 한국의 제도권 신학과 교회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사건 이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활동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 바울의 삶의 전환점을 ‘회심’이나 ‘개종’이라는 말로 지칭해왔다. 그리고 그 의미를 바울의 ‘내면성’ 또는 ‘내적 성찰’의 극적인 변화로 해석해왔고 동시에 바울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전환했다는 소위 ‘개종’의 의미로 해석해왔다. 따라서 ‘전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신학적 영향 속에서 지탱되어 왔던 ‘회심’이나 ‘개종’의 개념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역사적, 신학적 전제들에 내재한 문제점들이 비판적으로 지적되었다. 우선, 바울당시 유대교와 분리된 소위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전 종교에서 새로운 종교로 옮겨간다는 의미에서 바울의 개종을 말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전제이며 의미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사회적 공동체와 관련된) 바울의 삶과 실천의 지향점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이라는 의미에서 ‘전향’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하는 김진호 목사의 주장은 나와 같은 입장이다.  

    그러면 바울의 전향은 무엇을 뜻했는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관해 알려주는 대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파 집단에 대한 박해활동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바울의 박해활동은 1세기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던 (다마스쿠스를 포함하여) 유대인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삶의 현장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바울의 박해활동은 전통적 서구 해석이 주장한 것처럼 바울의 바리사이파적인 철저한 율법주의나 유대주의라는 단순한 관념적 도식에 입각해서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지배질서를 교란하고 위협하고 저항하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진압하고 차단하기 위해 정치반란범에게 가해진 십자가형에 처형된 식민지 유대 땅의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운동이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로마제국 도시 내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주변까지 전해졌고, 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 운동이 도시 내의 비유대인 (여성과 노예들을 포함한) 민중들의 가슴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로마제국이 제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안전과 존속을 보장받고 있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그러한 운동의 집단을 잠재적 혹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서 소수 종족적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과 불안한 정치적 위상이라는 상황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일종의 자기검열의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기검열의 행위는 반드시 항시적이거나 일관된 태도였다기보다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모국의 (로마제국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의 도시 내에서 그들의 특정 지역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바울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바리사이파적인 종교적 실천이 반로마제국적 그리스도 운동을 배격하려는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오히려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울타리 내에서 제국의 질서유지를 도와주는 실천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 실천의 전환, 곧 십자가에 처형당한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반로마제국적 실천의 지향점으로 삼게 된 것을 바울의 전향의 주된 의미라고 해석한다. 


제 2주제_ 전향 후 바울 활동의 사상적 매트릭스-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


김진호_


    다마스쿠스에서 시작된 초기 선교의 실패 이후 그가 다시 등장한 것은 안디옥이었고, 이후 그의 활동은 지중해 지역에서 전개된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활동 이력은 바로 이 시기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주로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지역의 대도시들에서 활동했고, 대개는 그 도시들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된 곳에서 활동했다. 당시 로마제국도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불렀고 오늘날의 거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유대주의와 사마리아주의가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배후가 되는 역사는 거의 1천년에 달한다. 그러므로 수백 년에 걸친 이주의 역사를 지닌 지중해지역으로의 팔레스티나계 이민자들을 유대인으로 소급해서 명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류다. 

    바울 당대에 이들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하나의 잘 조직된 교리적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들의 결속은 지중해 역사권의 형성 과정과 자치결사체로서의 콜레기아(collegia)의 형성 과정을 유념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간략히 말하면 기원전 4세기 이후 지중해가 하나의 역사권이 되면서 이 지역에는 광역 이주민들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주자들이 특히 많은 도시들에서 이해집단으로서의 종족적 콜레기아들이 속속 만들어졌고,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는 가장 대표적인 종족적 콜레기아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을 결속하게 하는 교리적 통일성은 아직 구축되지 않았고, 무수한 종파들이 공존하였으며 때로 치열하게 경합하였다. 바울이 전향하기 전의 자신을 규정했던 바리사이파와 전향 이후 새롭게 그를 규정하는 그리스도파는 바로 이런, 범이스라엘 종교권 내의 소종파 운동들이었다. 

    이때 바울이 말하는 바리사이운동은 강한 유대주의 성향의 종파였다. 공개적 공간구조를 띤 사마리아 성전이 야훼 앞에 모인 이들을 차별 없이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폐쇄적 구조를 지닌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가 시사하듯, 유대주의는 인종적, 성적 배타성을 함축하고 있다. 바리사이는 이러한 유대주의를 좀더 강도 높게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이재원_


   바울의 실천을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현장을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 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는 역사적으로 분리된, 혹은 신학적으로 대립된 소위 이방인 그리스도교인(Gentile Christians) 혹은 이방인 교회(Gentile Churches)로 간주했던 바울 해석의 지배적인 틀은 최근의 바울연구가들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운동에 가담하여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와 촌락에서 활동했던 바울의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현장은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들이었고, 여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비슷한 사회적, 정치적 처지에서 이들의 주변에서 살고 있었던 다른 종족 출신 이주민들 및 식민지하에서 자기정체성이 해체되었던 토착민중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전향 이후 십여 년 동안(〈갈라디아서〉에 언급된 14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 바울 자신은 직접 알려주고 있지 않지만) 제국의 여러 도시와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피지배계층 사람들의 고달픈 삶의 다양한 현실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을 것이다.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헬레니즘시대에는 특히 지중해 서쪽 지역에서는 주로 폴리튜마(politeuma)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고 다소 통합적인 자치체제를 갖추었는가 하면, 1세기 로마제국의 시대에는 주로 회당(synagogue)이라는 이름으로, 김진호 목사가 말하듯이 당시 로마사회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다양한 이해단체인 콜리기아(collegia) 등과 유사한 자치결사체(association)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었다. 회당 중심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로마의 도시들에서 통일된, 혹은 통합적인 체계방식을 갖추었다기보다는 특정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이들 공동체들은 한편으로는 팔레스티나의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통합적, 중심적 구조와는 지리적으로나 종교제의적으로 거리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로마제국의 여러 종교적 제의적 실천과의 긴장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 종교적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로마의 속국인 팔레스티나의 유대 지배층을 비롯한 여러 집단들이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공조, 타협, 저항 등의 상이한 입장을 취했듯이, 디아스포라 유대 사회에서도 그들의 지리적, 사회적 입지와 지역적인 문화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태도도 다양하게 표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지배와 관련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본다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멀리는 팔레스티나에서의 예수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가깝게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연대, 때로는 갈등과 긴장관계 속에서, 소아시아, 에게, 마케도니아 등 여러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사회의 구성요건의 충족(즉, 남자의 경우 할례행위) 없이 비유대인을 유대적 메시아 공동체 안에 받아들인 바울의 선교활동은 김진호 목사가 주장하는 유대주의의 배타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로마제국의 지구적 차원의 지배질서에 맞서는 예수운동의 지구적 공동체화(global localization)라고 나는 본다. 


제 3주제_ 전향 후 바울 활동의 사회적 매트릭스 - 로마제국


김진호_


    로마제국은 지중해 역사권을 제패한 처음이자 마지막 제국이다. 물론 이 방대한 제국은 유럽 내륙으로 팽창하였다는 점에서 지중해 역사로 한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유럽 내륙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특징을 규정짓는 데 덜 중요한 변수였다는 점에서, 지중해 제국이라고 가정해도 큰 무리가 없다. 

    나의 첫 번째 테제는 지중해 역사권의 모든 사회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여러 다른 주장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 테제는 이재원 교수와 논점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둘째 테제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사회들을 통치하였지만, ‘그 지배는 촘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통치가 관철되는 것은 주로 무력에 의한 것이었지, 이데올로기적 통합이나 사회적 통합은 거의 이야기할 수 없다는 얘기다. 가령, 수많은 그리스도계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황제숭배이데올로기는 결코 제국 전체를 통합하는 실효성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셋째 테제는 로마제국의 제1인자는 로마황제이지만, ‘지배체제로서의 로마제국은 탈중심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로마황제의 명령은 제국 구석구석에 효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물론 지방의 갈등이 중앙의 갈등으로 점철되거나 중앙의 법정으로 소환될 경우에는 황제의 결정이 중요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황제의 명령은 지방에까지 닿지 못했다. 가령 많은 비판적 그리스도교 연구자들이 바울의 반로마 활동을 반황제운동으로 초점을 맞추려는 것은 로마체제를 황제체제로 오인한 결과다. 

    이상의 세 테제들에 기초해서 나는 바울의 로마체제에 대한 태도를 재해석한다. 바울의 반로마활동은 반황제론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사실 대개 바울의 활동은 로마황제를 염두에 두고 수행되지 못했다. 그는 황제를 알지도 못했고 알 만한 위치의 사람도 아니었다. 또 그의 선교지의 대중에게 황제가 어떤 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황제에 대한 입장이 시사된 문서는 〈로마서〉인데, 이것은 로마시에서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의 갈등이 당시 황제인 네로의 정치와 뒤얽혀버린 상황에서 바울이 이 갈등에 끼어들려 한 문서이다. 


이재원_

    기원전 2세기부터 지중해 지역의 정치경제적 패권경쟁에서 서서히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던 로마는 마침내 기원전 63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게 되고, 뒤이은 악티움 내전(31 BCE)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명실공이 지중해 지역의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기나긴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군사적 무력으로 평정된 세상에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선포하며, 로마의 승리와 평화는 로마의 신들이 로마에게 부여한 은혜(Benefaction)이자 이러한 은혜는 동시에 정복당한 속국들을 위한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선전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전쟁과 군사력에 기반을 둔 로마의 제국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동반하여 제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고 강화시켰다. 제국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무리에게는 가차 없이 십자가형을 가했는가 하면, 그 질서에 타협하고 순종하는 대중에게는 평화와 안전(peace and security)이라는 기치 아래 때때로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라는 당근도 하사했다. 로마의 황제는 제국주의의 정점에서 위치하는 군사적 최고사령관이자 로마신들을 모시는 대제사장이고 로마의 정의와 법의 수호자이자 집행자이며, 최고의 가부장이자 로마제국의 최고의 후견인(patron)이고 두말할 여지없이 최고의 부자였다. 이는 단순히 로마황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속국의 지배권력과 도시의 귀족층 및 관리들로 이어지는 정치적, 경제적 후견인-수혜자(patron-client) 메커니즘의 연쇄망을 통해서 통합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러한 메커니즘은 하부구조인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로마의 황제는 죽어서 혹은 살아서도 신적인 존재, 구원자로, 신의 아들로 승격되었으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당시 통용되던 동전화폐(coins)나 도시의 광장에 세워진 황제의 상, 신전, 종교적 제의행위 등의 다양한 공적인 공간을 매개로 제국의 군중들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었고, 소위 황제제의(imperial cults)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고 동화하고자 하는 속국이나 도시의 엘리트층에 의해 행해진 자발적인 제국 친화적 제의행위였다. 

    최근의 이른바 제국비판적 바울연구에서 역설하듯이, 예수와 바울 당시의 로마제국에 관해 말할 때 나는 고전적인 로마역사가들이 로마의 황제 개개인의 치적에 관심했던 그런 의미에서 황제 중심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데올로기 요소를 총체적으로 관통하면서 극소수의 지배층과 대다수의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진 철저한 정치적 지배와 배제, 그리고 이들 사이에 존재한 엄청난 경제적 양극화를 지탱하고 정당화시키는 포괄적인 지배와 착취와 배제체제로서의 로마제국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적 상황은 예수운동과 바울운동의 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인 콘텍스트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김진호 목사가 말하는 ‘지배체제로서의 로마제국은 탈중심적 체제였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또한 바울의 메시지와 실천에서 반제국(주의)적 저항의 성격을 보는 입장은 김진호 목사가 우려하듯 바울의 활동과 공동체운동을 단순히 ‘반황제운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제 4주제_ 바울의 의인론. 그 사회정치적 함의


김진호_


     바울은 지중해의 몇몇 대도시들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에서 적대자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의인론을 제기했다. 곧 그의 의인론은 김창락의 가설처럼 논쟁의 이론적, 신학적 무기였다. 

     문제는 그 논쟁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해석하는 데 있다. 의인론이 지지하는 대상은 남자, ‘유대인’, 자유인에 대척점에 있는 존재인 여자, 이방인, 노예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1세기경 지중해권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는 무수한 타자들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유입은 크게 두 부류, 곧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테오세비우스)과 개종자로 나뉜다. 전자가 후원자이거나 후견인들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의 신앙에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후자는 대체로 이스라엘계 이민자 공동체의 도움을 바라고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후자들 가운데는 적지 않은 ‘방출노예’들이 포함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로마나’ 이후 정복전쟁이 사라지자 주요공급원이 사라진 노예의 가격 상승 현상이 급격하게 나타났고, 이에 노예노동에 기초했던 경제가 빠르게 붕괴하였다. 하여 노예노동에 기초했던 지주들이 노예를 방출하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방출노예들이 살 길을 찾아 대도시로 유입해들어 왔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존의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고자 애를 썼고, 유력한 자치결사체(콜레기아)인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에도 방출노예들의 유입이 적지 않았다. 

     대도시들에서는 방출노예들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하급노동시장이 교란된 데다, 불결하고 불경한 자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방출된 노예들에게는 더 불리한 생존여건이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계 공동체 내부인들은 저들 ‘더러운’ 개종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강성 순혈주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의 발언권이 빠르게 강화되었다. 

     한편 바울의 공동체 내에는 이들 방출노예들을 포함해서 하층민들과 여성들이 적지 않았고, 또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두드러졌다. 바울은 이런 ‘권리 없는 자들’이 차별당하지 않는 평등의 공동체를 주장했다. 한데 순혈주의적이고 노예에 대해 적대적이며 강성 마초주의적 성향을 지닌 바리사이 운동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바울은 바리사이파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바울이 발명한 신학적 담론이 의인론이었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샌더스가 이야기했던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적 기조를 바울이 자기 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무튼 바울은 의인론을 통해 유대인, 남성, 자유인 중심의 이스라엘 신앙에 대항하여 여성, 노예, 이방인에게도 차별이 없는 하느님의 공동체를 옹호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이러한 의인론은 그의 종말론적 비전과 결합되어 있다. 즉 그의 비전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의 평등주의를 주장한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평등사회를 향한 것이었다. 〈갈라디아서〉 4,21 이하의 종말론적 텍스트가 의인론에 관한 직전의 논지(바리사이파와의 논쟁에 한정된 논변)를 우주적 변혁의 사건으로 확장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안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그 담론의 장에 맞춘 언어로 의인론을 선택한 것처럼, 권리 없는 자들을 옹호하려는 그의 실천은 로마제국 내의 여러 담론의 장에 따른 언어를 발견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구체적 언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바울이 다른 언어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이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기억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아무튼 4,21 이하의 종말론적 언술은 그의 선교가 황제의 나라로서의 로마가 아닌, 차별과 배제의 체제를 총괄하는 포괄적인 중심인 로마체제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갈망하는 총괄적 언어다. 주지할 것은 이것은 로마체제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에게 전달하는 선전포고의 문구가 아니라, 바울의 대중인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권의 대중에게 제시한, 일종의 반제국적 선언문이라는 점이다. 1세기 중반 빌립보 시의 인구는 15,000~2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전투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전투의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자 못지않은 혹독함이 뒤따랐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 이 도시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절대1인이 되기 위한 정치적 격변이 세 번이나 벌어졌다. 그때마다 지배층의 급격한 변동이 있었고, 그들과 얽힌 서민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이재원_

    김진호의 의인론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 내 ‘유대주의적 배타주의적 성향’을 띤 집단에 의해 배제되고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의인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바울과 율법/유대교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수정한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서 보는 바울의 의인론 해석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른바 안디옥사건을 바울의 의인론이 전개된 일차적인 삶의 자리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 관점은 바울의 의인론을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차별 없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논쟁무기로 보면서도, 동시에 바울의 공동체들 내부의 유대인과 이방인 관계에서 유대적 배타주의를 여전히 일반화시키는 해석으로 치우치고 있다. 다른 한편, 김진호 목사는 소위 그가 말하는 ‘유대주의적 율법론 작동의 메커니즘’의 현장을 로마제국의 도시들에 흩어져 있는 유대/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의 상황과 관련시키면서, 의인론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바울의 비판의 중심에 ‘강성 순혈주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적인 배타적 유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다고 다소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나는 김진호 목사가 〈갈라디아서〉 3,28의 세 가지 사회적 관계유형과 연결시켜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라고 주장하는 데 물론 동의한다. 그럼에도 내가 비판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김진호 목사가 가정하는 ‘유대주의자’와 그 개념과 결부시키고 있는 배타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유대주의자’와 ‘배타주의’라는 개념들을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의 집단들에게 어떤 의미로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그 논거가 빈약하고 여전히 모호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의 바리사이파적 성향을 띤 유대주의자들이 디아스포라 회당내의 (‘더러운’) 개종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고 보는 추측은 보다 명확한 개념적, 사회사적 분석이 요구된다. 

    나는 바울의 의인론이 넓은 의미에서 〈갈라디아서〉 3,28의 세례공식문에 선포된 계급적, 여성해방적, 종교문화적 평등지향적 가치의 실천에 접목된다고 본다. 그럼에도 디아스포라 회당과 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메시아로 선포하고 따르는 집단 내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방인과의 종교적 사회정치적 평등한 관계문제가 바울 의인론의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로마에 의해 정복당해 그 지배 하에서 그들의 주권을 박탈당한 나라들, 유대인/이스라엘인들에서 시작하여 다른 종족적 민중들/이방인(nations)을 그리스도 공동체 안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바울의 메시지와 실천이 과연 유대주의적 배타주의(Jewish ethnocentrism), 달리 표현하면 유대교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겨냥한 것이냐, 아니면 일차적으로 로마제국주의의 당시 민중들을 향한 타자화를 겨냥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라고 본다. 


제 5주제_ 오늘 우리는 왜 바울을 이야기하는가


김진호_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금 바울을 주목한다. 오늘의 시대는 지구적 무기체계와 지구적 자본체계로 인해 무수한 난민과 유민들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세계의 고통의 질서를 재구축하고 있다. 이들 난민과 유민은 탈계급화된 존재들이고, 탈주체화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언어 붕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런 체제의 질서를 구축하는 제국은 국가 중심적 질서가 지배하던 근대국민국가 시대에 비해 현저히 탈중심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곧 여러 모로 지금의 시대는 바울의 시대와 닮았다. 

     바울은 그런 시대에 배제된 자들, 권리 없는 자들과 함께 하는 방식으로 하느님나라를 위해 일했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삶과 실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바울은 로마제국이 붕괴될 것 같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 세계를 넘어서고자 사력을 다하는 데 있어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같았다는 점이다. 메시아에 대한 그의 갈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시간을 예단할 수 없음에도 어느 순간 도래할 그 나라에 대한 갈망을 간직한 신앙양식이다. 하여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지배가 무제한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바울의 신앙을 되새기고 재점검하는 것은 오늘을 견뎌내는 신앙적 내공에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재원_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가능하게 하고, 예수에 대한 신앙을 태동시킨 그 처음에 일어났던 예수운동과 바울운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로마제국은 하나의 변수가 아니라 핵심적인 상황이었다. 이미 1970년대 말부터 남미해방신학과 한국민중신학에서 다루기 시작했던 ‘제국(주의)’이라는 주제가 21세기 초부터 북미 성서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신학영역의 지각변동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하고도 구체적인 세계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바울과 (로마)제국이라는 문제는 한국의 교회 상황에는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문제인식에 도대체 다가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바울이 저항했던 제국적 지배와 불의와 차별은 우리의 교회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통적으로 해석된 바울의 의인론에 근거하여 더더욱 배타적인 신앙론과 구원론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오늘날 초국적 지구적 자본주의는 바울 당시의 로마제국주의에 맞먹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며 이에 종속된 국민/국가와 개인들을 총체적인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시장의 논리 하에 무자비하게 예속시키고 있다. 이 논리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개인, 국민/국가, 민중, 사회체제는 짓밟고 정복하고 제거해야 하는 ‘타자’(Others)로 규정되고 고통의 현실 가운데로 처절하게 버려지고 있다. 

    오늘날 지구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총체적 구조적 실체로서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거대한 힘의 세력이다. 바로 이러한 지배와 권력과 폭력에 대한 저항하여 보편적인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실천은 국가내의 대안적 운동과 실천을 바탕으로 한 지구적(세계적) 연대를 절박하게 요청한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정의와 종말론적 저항의 희망에 근거한 바울(공동체들)의 신앙과 실천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위 글은 지난 해 11월. 30일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컨벤션홀에서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한신대 신학대학원 주최로 열린 좌담회의 자료집을 발췌한 것입니다. 아래 youtube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으로 좌담회 실황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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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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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수현
    2016.01.07 13: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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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좋은 계획이었고,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좀 질투도 납니다. 이정도의 깊이를 가진 학문적 결과물을 이토록 쉽게, 그리고 대조를 통해 명확하게 차이와 의미를 가르쳐 주는 토론은 제가 공부할 때도 만난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계획하신 분들과 참여하신 분들 그리고 올려주신 분 복 많이 받으십시오.


신학과 과학을 잇는 다리?



 

민기욱
(GTU 박사과정)


 


       성탄절을 몇 주 남겨둔 12월 초에 나는 박사논문 Proposal을 앞둔 마지막 단계인 종합고사 구술시험을 간신히 치러냈다. 엘리뇨 현상 때문에 올 겨울은 덥고 비도 많이 온다고 하던데 역시 하늘은 꾸물꾸물 대며 시험을 앞둔 준비가 덜 된 수험생의 심정을 잘 안다는 듯이 심란했다. 종합고사 위원회 4명의 교수 가운데 한 분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을 하루 전에 통고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그리 밝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그 분은 나와 공저로 책을 출판까지 했던 절친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인지라 나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망은커녕 내가 85세의 미안해하는 노신학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위로와 기도뿐이었다. 

       지도 교수인 Robert Russell과 Ted Peters 교수, 그리고 Skype를 통해 Outside Reader인 미국 중부에 위치한 Concordia College의 Ernest Simmons 교수는 법정의 피고마냥 나를 2시간가량 고기 굽는 집게처럼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종합고사를 위해 준비했던 130페이지 가량의 페이퍼들을 잘 발전시키면 훌륭한 박사논문이 될 거라 격려했다. “휴~”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네 인생에 더 이상 시험은 없을 거야.” 2시간 정도의 종합고사 구술시험 후 또 다시 1시간 정도 박사논문에 대한 조언을 들은 후 밖을 나서는데 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12월의 차가운 비였지만 눈송이처럼 달콤했다.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적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이 곳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at Berkeley, CA)에 온 지 이제 10년을 넘어섰다. 석사과정 후 박사과정 6년차의 한국유학생이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고민이 깊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시절 “이안 바버(Ian G. Barbour)에 의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를 목회학 석사 학위논문으로 쓰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유학의 길을 떠나 이곳 GTU에서 다시 석사 학위 논문으로 “God, Nature, and Quantum Theory”를 썼었다. 감사하게도 이 논문에 관심을 가졌던 Kenan Osborne 교수 (전 교황인 라칭거와 한스 큉의 제자다!)의 제안으로 2014년 1월 “Science and Religion: Fifty years after Vatican II” 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게 되어 “신학과 과학”이라는 학문에 첫걸음을 디디게 됐다.  

       그러나, 이 분야를 공부하며 큰 보람과 의미를 곱씹었던 순간은 학위 논문과 책 출판으로 인해 생겼던 저작권료가 아닌 지역 신문에 15차례에 걸쳐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으로 인한 반응을 목격하던 때였다. 각주 하나, 과학 공식 하나 없이 캘리포니아 지역에 사는 한인 이민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자로서 매주 아주 짧을 글을 쓰며 겪었던 고민과 반응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리에 생생하다. 한인 이민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1회성의 세미나에 나섰다가 멱살을 잡힐 뻔한 경험은 오히려 “그래 내가 잘 하고 있구나!” 하는 보람을 안겨주었다. 책에 파묻혀 있던 내게 “전투력”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 지면에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이 분야의 탁월한 학자도 아니고 글재주가 훌륭한 사람도 못된다. 그저 “서당개 3년”이라고나 할까! 몇 회에 걸쳐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니 큰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또한 이 지면이 학문의 진득한 향연을 펼치는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신문에 칼럼류를 쓸 만한 이 분야의 대가도 아니다. 다만 개인의 일기처럼 “과학과 신학”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가 공부하고 독서하고 토론하다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을 모아다가 조금 정리해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라 여겨주길 바란다. 당연히 학문적인 글을 위해 인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또 하나. 조금 더 깊고 넓게 공부하고 싶은 이들은 혹은 재미있는 꿍꿍이가 있는 이들은 연락을 주길 바란다. 내공은 깊지 않으나 놀기는 정말 좋아하니까. (이어지는 글은 예전에 한국일보에 내가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의 일부에서 왔다.)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 “기독교 신학과 과학기술”의 연구는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이안 바버(Ian G. Barbour)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학자들은 급변하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로 인해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자못 심각한 고민을 오늘까지 해 오고 있으며, 이러한 고민과 연구는 앞으로도 상당히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한신대학교 종교와 과학센터의 최근 출범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미래가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신학, 종교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개신교계는 이런 변화에 대해 무심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어쩔 수 없어 그냥 막연히 쳐다보거나, 또는 아예 반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예를 들면, 10여 년 전, 한국의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해 국가 이익의 측면에서 무한한 부가가치를 예상해 국가가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을 무렵, 그리고 그 연구의 지나친 과장, 확대로 인해 재판까지 갈 때까지 한국 기독교 교계는 각 교단의 헌장에 “줄기세포(stem cell) 연구”에 대한 변변한 문구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그 이후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막대한 연구비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그 저변에 있을 정치, 경제적 계산을 미루더라도 이미 미국 신학계의 경우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이미 상당 부분 확보했음을 볼 때 한없이 부러웠다.  

       이런 거대 담론을 제쳐두고서라도 우리와 같은 소시민이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과학과 신앙”의 고민, 즉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많은 고민거리들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이에 나는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이자 도반으로서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을 준비하고자 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그 고민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혹은 그 고민과 갈등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의 것임을 깨달아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는 일에 내가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과학기술자로 한평생을 사셨던 내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다. 실험이 끝난 어느 오후 무렵, 40대 중 후반의 후배가 책상에 엎드려 그야말로 “엉엉” 울고 있더란다. 집안에 불상사가 생겼나 걱정돼서 물었더니, 과학자와 기독교 신앙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때문에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울고 있다고 말하더란다.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 아버지는 자못 심각하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이 갈등이 모든 신앙인들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내가 하는 공부가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GTU는 여러 개의 신학교가 유기적으로 연대하고 있는 연합신학대학원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침례교뿐만 아니라 몇 개의 가톨릭 신학교가 서로 긴밀하게 협업을 하는 유기적 공동체를 꿈꾼다. 덕분에 GTU에서 공부하는 신학도는 자연스레 여러 교단을 넘나드는 에큐메니칼 스승을 두게 된다. 내 경우 United Church of Christ 목사인 Robert Russell이 지도교수이고,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목사인 Ted Peters와 Franciscan 신부인 Kenan Osborne 이 스승이다. GTU 소속 Pacific School of Religion 캠퍼스의 마당에서 보면 멀리 금문교가 보인다. 내 지도교수인 Robert Russell이 설립하고 내년이면 35주년을 맞이하는 CTNS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의 로고 그림은 금문교다. 두 곳을 잇는 것이 다리인 것처럼 “신학”과 “과학” 혹은 “종교”와 “과학”을 잇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안 바버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량적 역할을 통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꾸 의문이 드는 건 왜일까?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잇고, 서로 오고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자, 그러면 “신학”은 이쪽에 “과학”은 저쪽에 있다 하자. 신학 하는 이들은 과학 혹은 기술 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때론 적극적으로 경고한다. 이에 과학 하는 이들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간섭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물론 내 스승인 Robert Russell 교수는 Creative Mutual Interaction 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신학”과 “과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주장한다. 그러나 내 인상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종사하는 이들의 바램일 뿐 “과학”은 그야말로 “무심”하다. 물론, “신학과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러 학자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유형을 묘사해 오고 있다. 나중에 이 유형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전히 뭔가 자꾸 만족스럽지 않은 게 남는 까닭은 뭘까?  

       한국에 계신 아버지의 소원을 기억한다. 그것은 전 세계에 있는 “다리” 사진을 찍는 거였다. 무슨 “대교” 이런 것도 있겠지만 크게 꾸미지 않은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찍고 싶은 거였다. 부전자전이랄까? 나는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놓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그저 유랑하면서 찍고 싶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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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 저자의 죽음과 텍스트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서구의 모든 신념과 믿음은 이 재현에 대한 자신감을 걸고 도박하였다. 

기호는 의미의 심층을 지시할 수 있고 기호와 의미는 서로 교환되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교환에 무엇인가가-물론 신이-보증을 서준다. 

그러나 만약에 신 자체가 시뮬라크로 되어질 수 있다면 

즉 신 자신이 보증을 서주는 기호들의 하나로 축소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장 보드리야르-  


     전통적으로 저자란 책의 의미를 보증해주는 자였다. 그렇기에 저자보다 저자를 더 잘 알기 위한 노력들이 뒤따랐는데, 책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즉 저자가 처한 환경과 맥락을 통해서도 그 의미를 결정하고자 했다. 서구의 낭만주의 해석학은 이러한 시도들의 한 예이며, 특히 사회학적 해석은 적극적으로 외부를 통해 규명하고자 했다. 저자의 의도는 이 해석들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쾨르는 하이데거 이후 비평이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작동될 순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스토리는 작가에 의해 창조된 장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길들여진 문학비평가는 흐릿한 지평 속으로 사라지는 스토리들 안에서 주체가 수동적으로 뒤얽힌 현상의 연장 선상에 놓이게 될 이야기된 스토리라는 이러한 개념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각주:1]고 지적한 바 있다. 한데, 저자와 관련한 문제가 이뿐이랴. 로만 잉가르덴과 볼프강 이저에 따르면 “글로 씌어진 작품은 독서를 위한 스케치이므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독자”[각주:2]임이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 저자에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에서 독자로 진행되어온 비평의 흐름은 어떤 한 책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해석의 문제를 주도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깨우쳐 주었다. 

     불행히도, 성서해석에서 이것은 우상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교회는 사도적 승계를 입증할 수 있는 제자의 계보에 복음서의 저자가 속해 있기에 복음서가 역사적으로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수와 그 목격자들』이라는 책을 쓴 보캄은 그 한 예다. 확실히 이것은 글을 쓰는 자 이외에는 어떠한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주장으로서, 다시 말해 글과 글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척도가 저자라고 판단함으로써 역사적 연속성과 글의 진실성을 동시에 보장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신이 하나의 기호로 축소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신이 전달한 내용을 보증하는 저자가 기호들 중 하나로 축소된다면, 이것은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기에 단일하고 확실한 소통을 가능케 해주었던 바벨탑을 무너뜨리는 일과 같을 것이다. 놀랍게도 바르트에게 이것은 전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텍스트의 즐거움이라고 불렀다. 사실, 바벨탑을 무너뜨린 이도 하느님이지 않던가. 아무튼, 그에게 저자란 신의 계시의 확실성을 담보하고자 애쓴 일종의 신학적 변증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작품은 더 이상 단 하나의 의미, 즉 모든 다양한 견해들을 수렴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한 단어들의 짜임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 작품 안에 다양한 글쓰기가 내재해 있어 서로 간에 충돌을 빚고 모순을 일으키는 다차원적인 투쟁의 공간이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기에 하나의 의미만을 고집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저자를 죽이고 텍스트를 돌출시킴으로써 텍스트에 다양한 저자/목소리가 내재해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그것도 단수가 아닌 복수의 저자를 말이다. "우리는 이제 텍스트가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저자-신의 메시지인)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다. ……텍스트에 저자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안전장치를 부과하고, 최종적인 기의를 제공하고, 글쓰기를 봉쇄하는 것이다.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그리고 이런 비평이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 텍스트에 하나의 <비밀>을,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른바 반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을, 진정으로 혁명적인 그런 활동을 분출시킨다. 왜냐하면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 결국 신과 그 삼위일체 위격인 이성·과학·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3] 

     그렇다면 복음서 역시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읽혀질 수 있을까?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교회의 전통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지 않았다. 유세비우스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특히, 마가복음과 관련한 그의 말을 말이다. 


 장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드로의 해설자였던 마가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많은 일들을 비록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그가 주목한 대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듣거나 혹은 주님을 따르던 제자는 아니었다. 후에 그가 베드로와 동행할 때 베드로는 그에게 주님의 교훈을 기록한 완성된 책을 남겨준 것이 아니라 일화 형식으로 주님의 교훈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이 전해들은 교훈들을 그대로 기록할 때에 실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자신이 들은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그대로 말하고자 하는 그 한 가지 일에 주의를 집중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해설자라고 말함으로써 마가복음서의 저자를 사도적 승계의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연중에 저자가 복음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중했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을 참작한다면, 역사 속에 계시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역사적 복원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설령 유세비우스가 이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하더라도,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진술은 마가복음서가 예수의 생애를 가장 잘 나타낸 복음서라는 홀츠만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결론에 철퇴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는 분명 순서대로 적은 것은 아니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적인 학자 레온 모리스의 말도 흥미롭다.[각주:4]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복음서의 끝 부분에 가서 그는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말한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마가복음서에서 예수에게 사용된 건 처음과 마지막이다. … 제자들은 마가복음서에서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도 재림의 때에 관하여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단 한 번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한 것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유대교의 자료는 그들이 메시야에 관해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마가복음서가 다층적임을 보여주는 단서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초기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예수에게 적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기에 마가복음서 저자는 최소한 자기 이전의 전통과 자신 간에 간격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고고학적 지층들을 보존하고자 애썼다는 점을 드러내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층들을 화석이나 지질학적 단층들처럼 이미 고정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곤란해진다. 던이 말한 바와 같이 전승들은 여전히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원시 교회들은 전혀 예수-전승을 처음부터 확고하게 존립해 있었던 바, 내용과 개요를 함유하고 있는 어떤 고정된 것, 하나의 전승체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전승들 자체는 이미 결정적인 형태로, 혹은 최종적으로 권위 있는 형태로 간주되지 않았는데 그 전승들의 권위라는 것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예언적 영에 의해 제기되는 적용과 해석에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각주:5] 

     그렇다면,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라는 바르트의 말이 복음서와 관련해서도 유효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자기 이전의 여러 문화에서 온 전승들을 짜 맞추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마가복음서라고 말이다. 공교롭게도 카독스는 이와 관련해 꽤 시사적인 논지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그는 마가복음서의 전승이 구전이 아닌 문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어떤 것이 더 원시적이고 그로 인해 권위를 갖는 것인지를 논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디벨리우스 역시 생생하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단화들이 반드시 원시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지 않던가. 그러나 좀 더 흥미로운 대목은 마가복음서에는 3개의 문헌적 층이 보이는데 이 층들은 각각 팔레스타인적, 디아스포라적, 이방인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층들이 편집을 거쳐 최종적으로 우리가 아는 마가복음서로 정착되었다고 말한다.[각주:6] 또한, 마가복음서가 호머의 서사시를 본뜨고 있다고 역설한 맥도날드의 논의도 눈여겨 볼만 하다.[각주:7] 그는 어리석은 제자들, 천둥의 아들, 배에서 잠자는 제자들, 급식기적, 변화산에서의 변모,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은 여인, 마지막 만찬 등 마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이 호머의 서사시와 매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개론적인 수준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일반적인 주장, 즉 마가복음서가 혼합된 청중을 가진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복음서라는 논의를 참작하면 그리 매력을 끄는 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개론수준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마가복음서가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 온 인용구들의 짜임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바르트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예증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연구는 꽤 흥미롭다. 

     한데 지금까지의 주장, 즉 마가복음서가 여러 층들을 지니고 있고 이 층들은 여러 문화의 온상에서 온 색채들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물음은 대번에 아주 유치하고 초보적인 것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마가복음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한 명의 저자에 의해 단번에 작성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벤들링은 마가복음서 내에서 최초의 이야기꾼의 이야기, 후대의 이야기꾼의 이야기, 그리고 최종 편집자를 구분해내고 있다.[각주:8] 얼핏 보면, 이것은 마가복음서의 이야기가 자료와 편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일반적인 주장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자료의 문제만을 말하고 있진 않다. 그러니까 자료의 문제를 넘어 한 이야기꾼에 의해 특정한 줄거리를 갖는 이야기가 마가복음서 내에 잠복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요한 마가 하나뿐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은 그에 따르면 순진한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저자의 문제는 아니지만 마가복음서가 두 단계에 걸쳐 작성되었다고 주장하는 크롬의 논의는 마가의 이야기가 단번에 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꽤 유용하다.[각주:9] 게다가 마가복음 16장 8절 이하가 원래의 것이 아니라 덧붙여진 것이라는 벨하우젠의 주장은 너무나 잘 알려진 바다. 하지만 이뿐일까. 얼만에 따르면 마가복음서 1:1의 하느님의 아들은 양자론적 이단들에 대항하기 위해 첨가된 것이다. 그는 여러 중요한 사본들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란 용어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각주:10] 그런데 잘 뜯어보면 이러한 논의들 역시 벤들링 못지않게 덧붙인 편집자도 한 명의 저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마가의 이야기가 16장 8절에서 끝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6장 8절로 끝난다면 우리는 여성들이 부활의 이야기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전해주지 않았다고 여길 것이다. 반면에 첨가된 9절과 10절은 최소한 여성들 중 하나인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마가복음서가 16장 8절로 끝난다면 예수를 처음부터 따랐던 유대인 여성들 역시 남성 제자들 못지않게 우둔한 인물로 간주되어야 하겠지만, 첨가된 9절과 10절을 고려하면 적어도 막달라 마리아만은 깨달은 인물로 변신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서 1장 1절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어구가 없다면, 마가복음서 전체는 예수의 신성과 관련해 일종의 양자론적 견해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어구를 첨가함으로써 양자론적 견해를 취하는 이단적 문헌이라는 혐의는 벗어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어구 하나를 첨가함으로써 이 후대의 편집자는 마가복음서 전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사실상의 저자가 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작가는 결코 근원적인 몸짓이 아닌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다. 그의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거나 대립하게 하여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는 바르트의 지적은 촌철살인적인 논평처럼 보인다. 

     이제 결론적인 물음을 하나 던져보도록 하자. 이처럼 저자들이 뒤섞여 있고 덧붙여졌다면, 어떻게 우리는 마가복음서를 일관된 흐름을 지닌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낼 수 있었을까를 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오독이었다고 판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독자에 의해, 즉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고자 욕망하는 신앙적/신학적 독자에 의해 마가복음서의 사상 내지는 신학이라는 틀이 건져졌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오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럼으로써 한 가지는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들뢰즈가 말한 바와 같이 고유명사의 퇴락이다. 저자라는 고유명사를 중심으로 사고해야만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가 얻어진다는 믿음. 신학에서 혹은 경전에서 최종적으로 신의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한 중요한 지표로 사용되는 저자에 관한 믿음. 이것은 붕괴되어야 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책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펼쳐 낸 들뢰즈의 지적처럼 말이다.[각주:11] 


     무한한 동일성 속에서 등장하는 이 모든 뒤바뀜들은 엘리스의 인칭적 동일성의 흔들림, 고유명사의 전락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고유명사의 전락은 앨리스의 모든 모험들을 관통해 반복되는 모험이다. 왜냐하면 고유명사 또는 단수명사는 한 지식의 항구성에 의해 그 동일성을 보장받으며 이 지식은 일정한 고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지와 휴지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들 속에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칭적 자아는 신과 세계 일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명사와 형용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정지와 휴지의 명사들이 순수 생성의 동사들에 연결되고 사건들의 언어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자아, 세계, 신 등의 모든 동일성은 상실된다. 


     그리고 이러한 반신학적 붕괴가 텍스트의 즐거움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서에서 텍스트의 즐거움은 어떻게 추구될 수 있을까? 이것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하지만 텍스트의 즐거움이 어떠한지를 에코의 말로 대신하면서 마칠까 한다.[각주:12]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들도 아래에서 에코가 전하는 즐거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물론, 마가의 말처럼 귀 있는 자는 이미 듣고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레나 코스추코비치는 '장미의 이름'을 번역하기 전에 이 작품에 관한 긴 글을 쓴 바 있다. 어떤 대목에서 그녀는 에밀 앙르와의 브라티슬라바의 장미를 언급하는데, 이 책에는 어떤 신비로운 원고의 추적과 도서관의 최후의 화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프라하인데 나의 소설의 첫머리에서도 프라하가 언급된다. 더구나 내 책에 등장하는 사서의 이름이 베렝가리오인데 그 책의 사서는 벵가르 마르라는 이름이다. 내가 경험적 저자의 자격으로 앙르와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고 그런 책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읽은 평론들 중에는 비평가들이 내가 잘 알고 있는 출처를 찾아낸 것도 있다. 비평가들이 스스로 찾아내도록 내가 교묘하게 감췄던 것을 그들이 교묘하게 찾아낸 것을 보고 나는 아주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출처를 전혀 알 수 없었던 글을 읽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출처를 밝히며 그런 책에서까지 내가 인용하고 있다고 지적했을 때 나는 매우 기뻤다. 또 어떤 해설자는 내가 작품을 쓸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에 읽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책들을 찾아내기도 했다(내 친구 조르지오 첼리는 옛날에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는 드미뜨리 메레쥐꼬프스키의 소설도 있었을 거라고 귀뜸해주었는데 나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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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1』, 김한식․ 이경래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9, p.167 [본문으로]
  2. 폴 리쾨르, 같은 책, p.170 [본문으로]
  3.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pp.32~34 [본문으로]
  4. 레온 모리스, 『신약신학』, 박용성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pp.165~167 [본문으로]
  5. 제임스 던,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김득중․ 이광훈 공역, 솔로몬, 1990, p.129 [본문으로]
  6. Cadoux Arthur Temple, The Sources of the Second Gospel,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본문으로]
  7. Macdonald Dennis R, The Homeric Epics and the Gospel of Mark, Yale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0. [본문으로]
  8. Wendling Emil, Die Entstehung des Marcus-Evangeliums, J.C.B Mohr: Tubingen, 1908, pp.214~237 [본문으로]
  9. Crum J. M. C, St Mark's Gospel: Two Stages of its Making, W. Heffer & Sons Limited: Cambridge, 1936 [본문으로]
  10. Ehrman, Bart.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93, pp.72~75 [본문으로]
  11.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pp.46~47 [본문으로]
  12. 움베르토 에코 외, 『해석이란 무엇인가』, 손유택 옮김, 열린책들, 1997, pp.99~1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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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포도주가 전해지다

 



박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요한복음 14장 6절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길’ ‘진리' ‘생명'은 대체 무엇인가. 어떤 대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번 글에서는 ‘길'에 대해 나누려고 한다.


    예수의 출생이나 행적을 담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공관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추상적이고 함축적이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말씀이 몸을 입었다는 말은, 몸을 가진 존재를 통해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표현이라면 비교해가며 앞뒤전후 상황을 살펴볼텐데 그렇지가 않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 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그러하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예수라니 무슨 길이고 어떤 길인가. 신약성서가 쓰인 그리스어로 트로포스(τρόπος)라는 단어인데, 우리말로 ‘길'을 뜻하기도 하고 ‘삶의 방식'을 뜻하기도 한다, 고 한다. 짧은 지식에 기대어 여기저기 찾아보니 트로포스는 길, 방식이란 뜻 말고도, 일시적 유행, 지나가는 바람, 변화를 뜻하기도 하고, 요령, 재주, 전환 등의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정적이며 가만히 있는, 그저 내 앞에 놓여있는, 나와 별 상관없는 그런 길이 아니라, 그리로 내가 나아갈, 나의 방향성과 움직임을 안고 있는 그런 동적인, 살아있는 길을 뜻하는 것 같다. (나는 언어학자도 성서학자도 아니므로 근거있는 이론은 결코 아니다.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아버지라 흔히 부르는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1713-1784) 신부는 1769년 샌디에고에 현재 미국 땅의 첫 미션을 세웠다. 그리고 10년 뒤인 1779년에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San Juan Capistrano) 미션에 심은 포도나무가 캘리포니아에 심긴 첫 와인 포도나무로 기록되어있다. 후니페로 세라는 북쪽으로 샌프란시스코까지 미션을 여덟 군데 더 세웠다. (작년 가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 중에 성인 추대한 그 후니페로 세라 맞다. 캘리포니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공이 클 뿐 아니라 미국에서 이루어진 첫 성인추대식이라 특히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에게는 의미가 큰 행사였지만, 스페인제국의 막강한 패권으로 선교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강제노동을 시킨 신부가 성인이 될 수 없다는 강한 반대를 만나 논란이 크게 일었다.) 


    18세기 이후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은 캘리포니아 미션에서 재배한 포도로 성례전에 사용하는 와인과 일반 식사 와인을 만들었다. 이 포도종은 곧 캘리포니아 전역에 퍼져 19세기 중반까지도 캘리포니아 와인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후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가져온 다양한 다른 포도종에 밀려 지금은 산타바바라 지역과 시에라네바다 산기슭 정도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미션에서 재배하는 포도라 하여 포도품종 이름이 ‘미션’이다. 2006년에 발표된 어떤 유전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페인 선교사들이 18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가져온 미션포도종의 원래 이름은 리스탄 프리에토(Listan Prieto)라 밝혀졌다. 리스탄은 스페인 헤레스(Jerez) 지역에서 만드는 셰리 와인의 주요재료인 팔로미노(Palomino) 포도종, 혹은 그와 매우 흡사한 종이다. 그러니까 미션포도종 리스탄 프리에토는 진한 색(prieto) 팔로미노라는 말이다. 


    리스탄 프리에토는 스페인 본토에서는 필록세라 (19세기말 유럽 포도밭을 초토화시킨 병충해) 때문에 거의 사라져버린 포도종이지만, 지리적으로 외딴 곳인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는 팔로미노 네그로 (Palomino Negro, 까만 팔로미노)로 불리는 같은, 혹은 매우 흡사한 포도종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카나리아 제도는 16세기에 신세계로 향하는 콘키스타도르, 선교사, 무역상 등이 주로 머물던 곳이며, 오늘날까지도 필록세라가 전해지지 않은 전세계 몇 되지 않는 지역이다. 


    유전자 연구는 이 포도종의 여정을 그려준다.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지역의 고유품종으로 알려진 리스탄 프리에토는 앞서 언급한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에 있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스페인 콘키스타도르의 움직임을 따라 칠레와 아르헨티나, 스페인 제국이 멕시코에 세운 수많은 가톨릭 미션, 현재 미국땅인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트로포스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러가지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스페인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고, 아르헨티나, 칠레에 뿌리를 내리고 멕시코 미션에도 뿌리를 내리고, 또 거기서 캘리포니아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여정이야말로 미션 포도종이 밟아온 길이다. 트로포스는 단순히 선으로 그리는 길 뿐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시간, 새로운 땅과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과 실패, 사람의 정성과 눈물, 땀과 숨, 기쁨과 감사,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는 나의, 우리들의 트로포스에는 무엇이 담겨있고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더해야 할까. 지금의 기준으로는 미션 포도종으로 만든 와인은 아주 보잘 것 없다. 풍미가 좋거나 인상깊지도 않다. 그러나 그 포도주가 길따라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 길을 새해 아침에 다시 생각해본다.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쓰고 있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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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내가 함께 걷는 '내일을 위한 시간, 투 데이즈 원 나잇'




이희승*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무심한 마음으로 보자면 다른 날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시계 태엽처럼 조용히 세상 첫 날부터 같은 궤도를 돌며 땅 위에 생명을 나눠 준 태양이지만 그래도 그 묵묵한 걸음에 새 날의 희망을 기대해보고 싶은 것은 저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청년 실업, 비정규직, 고용 불안, 그리고 정부가 앞장 선 노동 개혁 혹은 개악으로 소란스러웠던 20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벼랑 끝에 서서, 소리 낮춰 신음하고 있는 이웃들을 향해 새해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조심스럽게 느껴지네요.




  2014년에 개봉한 <내일을 위한 시간 (원제: Deux jours, une nuit)> 을 만든 벨기에 출신의 형제 감독인 장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역시 이와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유주의의 횡포로 강팍해져 가는 유럽 노동 현실의 맨얼굴을 다룬 이 영화는 마치 온갖 맛집의 향연같은 헐리우드 대작들과 볼거리가 화려한 국내 흥행작들 사이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담백한 동치미 같다고 하겠습니다. 젊은 시절, 영화라는 매체에 입문하면서부터 직접 카메라를 둘러 매고 줄곧 공장지대, 파업현장 등을 돌며 다큐멘타리를 찍었던 다르덴 형제의 저력과 노장으로써의 성숙함이 어우러져 가식없이 깊은 맛을 내는 명작이라고 꼽고 싶네요. 주연을 맡은 마리옹 코티야르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영화 상영 시간인 95분 내내 목이 타들어 가는 여름 햇볕 아래 마른 먼지가 흩날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동안,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를 뿐입니다.  


  주인공인 산드라는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합니다. 공장 노동자였던 그녀는 심한 우울증으로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얼마간의 휴식 후에 복직을 준비하던 산드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산드라가 없는 동안 그녀의 일을 나누어 맡았던 동료 열 여섯명에게 회사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했던 것이지요. 각자에게 매월 천 유로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산드라가 공장에서 해고 당하는 것에 찬성하도록 말입니다. 겨우 우울증의 그늘에서 벗어난 산드라는 이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순순히 일자리를 포기할 만큼 여유로운 입장이 아니지요. 주말이 가기 전에 열 여섯명의 동료들을 찾아 다니며,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위해 재투표해 줄 것을 부탁하기로 결심합니다. 동료들의 넉넉치 않은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산드라는 자신이 얼마나 무리한 부탁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천 유로라는 큰 돈을 포기해달라고 종용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산드라의 목소리는 미안함과 수치심으로 매순간 가늘게 떨리고, 한없이 작아진 존재감 앞에 산드라는 삶을 포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산드라가 생의 가장 초라한 순간을 견디는 동안, 냉정하리 만큼 담담한 이 영화는 산드라와 독대하며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야 하는 동료들을 악인으로 만들거나, 보너스를 포기하고라도 산드라의 손을 들어 주는 동료들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에 주저합니다. 그저 조용히 산드라의 곁을 지키는 다르덴 형제의 시선은 양편의 노동자들이, 아픈 동료의 등에 칼을 꽂게 만든 회사의 소위 ‘효율적인’ 경영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서서히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고단한 일박 이일간의 수고는 해피엔딩을 맞지 못하지만, 산드라를 포함한 열 일곱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미끼로 자신들을 모래알처럼 흩어 놓은 회사의 방침에 대한 분노를 함께 공유하는 신선한 연대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르덴 형제는 죽은 듯 보이지만 단단히 버티고 선 늙은 나무의 밑둥같은 결말을 선사합니다. 모래 먼지가 흩날리는 공장지대의 신작로에 선 해고 노동자 산드라는 더이상 해고의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작은 절망에도 쉬이 눈물을 떨구던 산드라가 이제 홀로 서서 망망한 허공을 응시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내일은 온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해 내는 이 영화의 결론에, 그 무뚝뚝하고 뭉툭한 감동에 필자는 주착없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대학에서 비정규직 지식노동자 (시간 강사)로 근무하고 있는 필자의 기약없는 오늘과 희망없는 내일이, 쫓겨난 일터에서 남은 짐을 챙겨 나와 목적지 없이 황망히 길 위로 내몰린 산드라의 월요일 아침과 오버랩된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고집스럽게 리얼리즘에 사명을 건 듯한 이 영화는 도무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환상 위에 진한 화장을 덧입힌 듯한 가식적인 승리감에 충만한 해피엔딩을 거부하고, 비관적인 오늘을 꿋꿋이 함께 버티는 이웃들이 꿈꾸는 좀 덜 비관적인 ‘내일’을 위한 시간을 관객들의 가슴에 남겨 놓고 끝을 맺으려는 듯 합니다. 


  사실,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재편된 자본주의 구조의 척박한 가장자리를 차지하게 된 노동자들의 현실을 직시하는 영화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20세기가 만들어낸 꿈의 공장이라는 영화 산업의 붐을 가져 온 니켈오디언 (5센트 극장)의 주요 관객이 바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 든 노동자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미국이 대공황의 철퇴에 휘청거리던 1930년대 초, 무성영화의 거장 찰리 채플린이 그린 이 시대 노동자의 자화상 <모던 타임즈>는 초기 영화 산업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내재적인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근원적으로 품고 있는, 현실과 환상의 괴리라는 이 아이러니한 현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꿈’ 혹은 ‘환상’의 본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현재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욕망의 원리와 더불어,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욕망의 근본적인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이 모순을 이용해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현대의 산업이 바로 영화 산업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스크린이 제공하는 이 가상의 공간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요? 이 물음에 얼른 대답할 수 없다고 해도,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꿈의 공간이라고 불리는 스크린을 통해, 땀내가 후끈나는 어수선한 잠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다니던 일터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전화 한 통을 받는 공장 노동자 산드라의 단춧구멍만큼 작은 (그래도 그 집 사는데 빌린 대출을 갚으려면 한 삼십년은 더 걸릴 것 같은) 이층집 풍경을 들여다 보고 싶지는 않다는데 동의하실 것 같네요. 왜냐하면 이 후줄근한 산드라의 공간, 즉 다음 장면을 안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 손바닥 보듯 뻔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산드라의 삶은 바로 우리가 살아 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관객으로 하여금 희망 혹은 꿈이라는 이름으로 더 나은 내일을 무턱대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예술가로써 과연 윤리적인 선택인가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고자 하는 다르덴 형제는 우리 이웃 산드라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통해, 새해 첫날 누구나 맘 속에 그려 보는 화사한 희망의 채도를 두어 단계쯤 낮춰야 비로소 볼 수 있는 현실을, 우리가 발딛은 초라한 세상을, 부조리와 결핍으로 고통받는 우리의 삶을, 영화라는 꿈의 공간에 오롯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 불편하게 펼쳐지는 상처투성이의 자화상을 바라봄으로써, 이웃의 비루한 일상과 고민 그리고 갈등을 겹겹이 공유한 끝에야 얻어지는, 산드라와 그녀의 동료들이 어느 주말 오후에 느닷없이 경험한 그 단단한 연대를 욕망하게 합니다. 환상 혹은 신기루가 아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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