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각주:1]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 이사야 1:15

 


이사야가 살던 시절


    이사야서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은 유다국의 개혁군주입니다. 그는 북왕국 멸망시기와 겹치는 남왕국의 왕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 앞에 있었던 왕이 아하스입니다. 여기서 잠시 기원전 7-8세기 남왕국을 다스렸던 왕들의 족보를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왕들 중 히스기야와 요시아왕이 평등주의 계열의 왕이었다면, 아하스와 므낫세는 발전주의를 주장했던 왕이었습니다.[각주:2] 특별히 제1이사야와 맞물리는 시대는 아하스 시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국은 아하스 왕 때 약소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당시 고대 근동은 앗시리아가 득세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제국의 반열에 오른 앗시리아에 맞서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동맹이 맺어졌고, 유다국에게도 동맹에 참여하라는 압박이 전해져 오지만, 아하스는 거부하고 친 앗시리아 정책을 폅니다. 야훼를 버리고 제국의 질서를 택한 것이죠. 이에 앙심을 품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국을 유린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급기야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국난 해소를 위한 번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기적처럼 아시리아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을 초토화 시키는 일이 발생했고, 그 결과 유다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후 유다국은 전례없는 발전을 하게 됩니다. 앗시리아 침공으로 인한 주변국 난민들이 유다국으로 유입되면서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가운데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제국의 논리에 의지해 성장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득세를 하였고, 그들은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농민들에 대한 착취를 두둔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양극화가 초래되더라도 일단 경제적 파이를 키우면 그것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낙수효과가 발생해 점차 양극화가 극복되리라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들의 논리는 닮아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소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대지주들이 제공하는 자본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회와 언론이 자본의 논리에 영향을 받는 오늘의 현실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이러한 시대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았던 교회에 대해, 그리고 그 곳에서 드려지던 예배를 향해 던지는 하나님의 추상과도 같은 비판의 메시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불의에 공조하던 교회에 대한 이사야의 저주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전 이해를 갖고 다시한번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이 구절은 비록 수천년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오늘의 교회를 향한 너무나도 정확하고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주간에 이사야가 다시 환생해서 한국교회를 본다면 한국교회를 향한 저주의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죄목은 여혐입니다.   


한국 교회, 여혐의 인큐베이터


    얼마 전 발생한 강남역 화장실 여성 피살사건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제가 윤리를 전공하고, 윤리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이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하거나, 윤리적 해법이 담긴 글을 쓰라고 합니다.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 학기 바쁘기도 하지만, 이 사건들을 분석을 하거나 비평을 하는 일보다 먼저 회개하고 애통하고 탄식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의 배후에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교회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국교회는 이 사건들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늘 하늘 뜻 나누기 제목을 ‘여혐,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라는 제목으로 뽑았는데 과연 한국 교회의 어디에 그런 면모가 있는 것일까요? 일단 표면적으로 한국교회는 ‘여성혐오’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만나왔던 교회 오빠들 어떤가요?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제한적이긴 하지만, 여성 억압과 차별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려 했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들 중에서 교회만큼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가 남성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교회와 여성혐오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강남역 살인남은 “여자가 무시해서” 범행 장소에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들어오는 첫 번째 여성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교회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살인남은 목회를 꿈꾸던 신학생이었고 자퇴 후에는 교회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주로 영향을 받은 곳은 교회였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누군가의 친절하고 다정한 교회 오빠였거나, 교회 누나가 보기에는 신뢰가고 듬직한 연하남 교회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유독 여성의 무시를 못 견뎌 여성을 살해하기로 작정했던 것일까요? 그에게서 여성 혐오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거치면서 형성되었을까요? 물론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교회에서 보고 자란 영향이 꽤 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드러내놓고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성 차별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구조화시켜왔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교리적 잣대로, 제도적으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도록 하였고, 교회 내에서 여성의 권위와 공헌은 헌신과 순종이라는 미담과 간증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거부하고 있고, 아직도 한국교회의 강단 위로는 여성이 오르지 못합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당회는 남자들 일색입니다. 여성의 비율이 교회에서 60% 이상을 상회할텐데, 최소한 50%는 안 될지언정 당회의 여성비율이 10%도 안 되는 기이한 인력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내에서 남성의 무시는 당연히 참아야 되는 성질이 되지만, 어떤 여성의 무시에는 분노해도 되는 것입니다. 어찌 목사 안수도 받을 수 없는 자들의 무시를, 어찌 장로도 될 수 자들의 무시를, 어찌 교회 강단에도 서지 못하는 자들의 무시를 견딜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어쩌면 평범한 한국 남자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인내심 테스트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인내심은 교회내에서는 작동을 하겠지만, 교회 밖을 벗어나면 무장해제 됩니다.  

    하지만,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무지하거나 무관심 합니다. 한국 교회의 간판 옆에는 여전히 전도폭발, 성령체험, 치유와 힐링 등의 문구가 난무합니다. 근래에는 사탄의 음모인 동성애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투사적인 열정과 교회와 사회를 붉게 물들이는 좌파용공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그들에게 장착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언명법들 앞에 늘 숭고하고 치열했던 한국교회였던지라 젠더에 대한 문제, 양성 평등, 페미니즘 따위의 문제들에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던 게지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여러 진보담론들을 살펴봐도 약자의 카테고리에서 여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민중신학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언급은 미비합니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민족통일이라는 큰 그림들을 그리시느라 이런 쪼잔한 양성평등 같은 미시적 문제들에는 미처 손길이 미치지 못했나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 자부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조차도 여성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은 높기만 합니다. 기장교단에 속한 목사후보생 신학생들은 각자가 속한 노회에서 참여하여 정기적으로 목회자 후보생 교육을 받고 면접을 치룹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여자신학생 상당수는 남성 목사님들 앞에서 질문을 받으면서 모욕감을 느꼈고, 심지어는 강간을 당하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증언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여자가 신학을 해서 뭐하려고?”, “한국은 아직까지 여성 목회가 힘들어”, “신학교에서 연애하면서 사모되면 되겠네” 등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적 질문들이 그 자리에서 오고 간다고 하네요.   

    이렇듯 한국 사회 전체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그곳이 세속적인 공간이든 성스러운 공간이든 상관없이 여성문제에 대해서든 공히 같은 마음 아닐까 합니다. 그것의 표현이 누구는 조금 세련된 것처럼 보이고, 그 문제에 대처하는 태도가 누구는 조금 진일보하고 누구는 여전히 티나게 후지지만, 그들의 무의식은 똑같습니다. 여성문제에 관해서는 관심도, 애정도 솔직히 없습니다. 애정과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문제의 심각성도 모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이러한 발아조건 속에서 서서히 싹 터오면서 진화해갔고, 드디어는 ‘강남 살인남’ 같은 증상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앞으로 닥쳐올 더 큰 유사사건들에 대한 징후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잡수십시오!” 이렇게 정부는 발표했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권력의 마음과 국가의 진실


    하지만, 경찰이 내린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은 저의 생각과는 많이 달라보입니다. 경찰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닌 단순 정신질환자의 “묻지 마!” 사건으로 결론지었습니다. 경찰은 김씨가 2003∼2007년 "누군가 나를 욕하는 것이 들린다"고 자주 호소하며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고, 이 증세는 2년 전부터 '여성들이 자신을 견제하고 괴롭힌다'는 피해망상으로 변화됐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서빙 일을 하던 식당에서 이달 5일 위생 상태가 불결하다는 지적을 받고 이틀 뒤 주방 보조로 옮겼는데, 이 일이 여성 음해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 범행을 촉발한 요인이 됐다고 경찰은 분석했습니다.  

    경찰은 범행 당시 김씨의 망상 증세가 심화한 상태였고 표면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범죄 촉발 요인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번 사건이 묻지마 범죄 중 정신질환 유형에 해당된다고 설명합니다. 또 김씨가 화장실에 들어온 여성을 보자마자 바로 공격한 점으로 미루어 범행 목적성에 비해 범행 계획이 체계적이지 않아 전형적인 정신질환 범죄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사회에 확인된 여성혐오 현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경찰의 발표는 과거의 자아 심리학에서 말하는 환자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 주체와 대타자(예: 사회, 국가, 교회 ...)가 있습니다. 주체는 분열된 주체입니다. 분열된 주체라 함은 대타자의 법과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섞이지 못하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정신질환자라 부릅니다. 반면, 대타자인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교회는 완벽한 시스템, 목소리, 그리고 법과 품격을 지닌 대상입니다.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는 분열된 주체를 완벽한 대타자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입니다. 대타자의 음성에 순응을 하고, 반응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그를 ‘정상인’이라 부릅니다.   

    경찰의 인식은 이런 것입니다. 대타자 대한민국은 여성혐오 같은 것은 없는 완벽한 사회이고, 대타자 대한민국은 여성의 인권과 안전이 유지되는 정상적인 사회임을 먼저 전제합니다. 어쩌다 미친놈이 하나 등장해서 재수없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 너무 이 문제를 확대 해석하지 마십시오. 한 개인의 우발적 행동이었고, 더군다나 그는 미친 놈입니다. 그 미친 놈 하나만 제거하면 이 사회는 여전히 안전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대타자 대한민국은 안전한 공간입니까?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도 대타자 대한민국이 보인 반응은 같았습니다. 한 개인의 일탈적 사건으로 세월호 사건을 몰고 갔습니다. 세월호 발생 초기 모든 언론은 유병언을 쫓는데 혈안이 되었드랬습니다. 분열된 주체의 일탈적 행위로 인해 세월호가 발생했음을 드러내 보이는 액션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안전한데 사이비 광신도 집단으로 인해 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싹을 제거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세월호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밝혀진 진실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2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마무리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구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도....우리는 아직까지 확실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국정원이 개입했고, 여러 가지 부패의 커넥션이 이 사건 안에는 가득한 듯 한데 우리는 정확하게 그 진상에 대해 모릅니다.  

    결국, 세월호 사건이 처리되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국가란 없음!’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주체도 분열되어 있지만, 완벽한 대타자였던 국가 역시 분열되어 있음을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알아버렸습니다. 하지만, 대타자인 정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네들은 완벽하고, 문제가 없고, 순결한 존재이고, 너희들 분열된 주체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열된 주체를 좌파, 빨갱이, 동성애자,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지목하였고, 강남역 묻지마 사건을 거치면서 정신질환자가 그 목록에 추가될 것입니다. 이런 거대한 공조에 숭고한 대타자들은 함께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조중동, 그리고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거대한 공조의 파트너 들입니다.  


제발, 그 예배를 걷어치우라!


    여혐은 한국사회 층층히 쌓여있는 구조적 폐습 어느 한 구석에 완고하게 자리 잡은 집단무의식이 아닐까 합니다. 정신분석학의 기본이 무엇이었나요?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혐의 출몰은 그러한 점에서 위태롭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그 무의식이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렇듯 여혐은 나도 모르는 내안에 있는 어떤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강남역 사건과 같은 야만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야만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야만의 시스템 한 가운데 우리들의 교회가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 진실을 봐버린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알아차린 예언자 이사야는 그 사실에 견딜 수 없어서 “당장 너희들이 드리는 그 더러운 예배를 걷어치우라!”고 절규하는 것 아닐런지요. 이렇듯 이 천년도 훨씬 전에 울려퍼졌던 이사야의 외침이 돌고 돌아 21세기 한국땅에서 똑같은 울림으로 공명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우리는 지금 숨가쁘게 지나고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지난 2016년 5월 30일 주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김진호, 『산당들을 폐하라』(동연, 2016), 11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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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6]



지젝과 바울(I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도착에 빠진 세계와 기독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이는 되도록이면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더 느끼려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하였다.[각주:1] 여기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쾌락이란 보통의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쉽게 설명하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면 인간은 흥분상태가 된다. 이것이 고통의 상태, 또는 불쾌한 상태이다. 그런 증감된 흥분을 낮추어 주는 것이 바로 쾌락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풀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쾌락의 상태로 간다는 것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각주:2] 이렇게 보면 쾌락-불쾌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경제학적 관계에 있다. 불쾌함의 강도, 즉 흥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락의 폭도 증가한다. 즉, 불쾌함을 열심히 저축하면 더 많은 쾌락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어린이는 즉각적인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 어린이가 커서 현실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불쾌를 참아내면서 자신에게 허용된 쾌락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허용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법 (Moral Law)이다. 만약에 인간이 그 허용치를 넘어서까지 쾌락을 느끼려 한다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통하지 않게 되고 고통이 시작된다. 라깡은 그 이후 부터의 어떤 상태를 쾌락이란 말과 구분되기 위해 향유(Jouissance)라는 말로 표현된다.[각주:4] 이제 쾌락을 넘어선 향유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각주:5] 그래서 향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담게 되는데, 하나는 어떤 중요한 법에 대한 위반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고통과 죄책감을 뜻한다. 위반과 그 위반을 통한 고통에 따라오는 즐거움. 아마 이것이 향유에 대한 간단한 정의가 될 것이다. 바로 쾌락과 불쾌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 속에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불쾌를 넘어서는 고통인간은 바로 이런 향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했다.[각주:6] 아담 커스코는 다음의 예를 통해 지젝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향유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도덕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려는 한 구도자를 상상해 보자. 일체의 욕망과 욕구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타자에 대한 사랑과 희생만으로 그 삶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욕구와 성적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속이나 사막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육체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삶도 아니고 건강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향유의 행위가 필요하다. 즉, 어느 정도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지젝은 ‘inherent transgression’ (내장된 위반)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규정속도 시속 1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에서 5킬로 정도는 더 과속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듯이, 철저한 법에 대한 준수를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에는 이미 약간의 위반을 전제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바로 초자아적 목소리 (법을 지켜라!)에는 “향유를 즐겨라!”라는 목소리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 (Obscene superego supplement)라 하였다.[각주:7] 기억해 두자. 이러한 향유와 초자아, 달리 말하면 ‘big Other’ (대타자)의 관계가 더 과도해지는 것을 지젝은 ‘도착’ (Perversion)이라 부른다.  

   자, 이제 지젝과 기독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함에 있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Perversion (도착)이라는 개념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원래 프로이드는 이성애에서 정상적인 성행위를 벗어나는 것을 도착이라 불렀으나 라깡은 이후 프로이드가 내린 정의를 변형시켜 성적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임상적 구조로 정의하였고, 자연적인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각주:8] 이 단어가 지젝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향유(jouissance)와 대타자(the big other)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중 하나를 ‘도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가 있는데, Psychosis, perversion, and the two forms of neurosis: obession and hysteria가 그것이다.)[각주:9]


   이러한 향유의 차원은 상징계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상징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 (The big other)안에서 결여를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충동으로 인해 나타난다. 여기에서 도착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향유적 존재인 인간을 여전히 이데올로기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도착’이란 증세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아예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며 히스테리, hysteria에 대해서 지젝은 자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담 커스코는 도착이라는 개념에 지젝이 점점 집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유명한 말인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the perverse core or Christianity)으로부터 지젝과 기독교의 다리놓기를 시도한다고 말한다.[각주:10] 커스코는 여기서 지젝에게 도착이라는 것은 완전한 윤리적 실패 (the ultimate ethical failure)란 것을 강조한다.[각주:11] 지젝에 따르면 도착이란 스스로를 타자의(the Other’s) 향유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로 직접 동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경계들 사이를 읽고 도덕적 법이 실제적으로 위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도착은 바로 ‘내재된 위반’인 것이다.”[각주:12]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는 공식적 도덕법을 지탱하고 도착은 법을 강화하고 심지어 필요로 하며 도착적 쾌락은 바로 그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착은 전복이 될 수 없다.”[각주:13]

    지젝은 가장 도착적인 예로서 종교적 근본주의 (religious fundamentalism)를 든다. 도착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안내로써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한편으로는 수긍할만한 공개적인 얼굴 (예수는 사랑을 가르친 ‘좋은 사람’)을 놓고 그 밑에는 외설적인 향유 (바로 복수하는 하나님)를 놓아두는 것이다.[각주:14]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혐오하고 심판을 외치는 사랑 많은 목사님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 (증오와 사랑)은 드러난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데, 바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상식적인 도덕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다종교사회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타종교에 대해 비방과 증오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겉보기에도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타종교의 성지에서 땅밝기를 한다거나)에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상식이나 도덕에 비추어 보았을때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강력한 필요성 (하나님 나라를 위한)에 의해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확히 그 겉 사랑에 있지 않고 바로 이러한 도착적 구조에 있다고 지적한다.[각주:15] 결국 위반을 통한 고통을 포함한 쾌락 (향유)에 의해 기독교 근본주의는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서 앞장에서 논했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로서 기독교를 기억해보자. 신앙인이 교회에 들어가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면 그들은 하나님, 또는 교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보기에, 또는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길은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결국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비록 계속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것은 노이로제나 신경증 (neurosis)적 증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책임을 본인에게 지울수는 없기 때문이다.[각주:16] 그러나 도착적인 상황은 다르다. 바로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착적 상황이 편만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의 향유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라는 지젝의 말이 무서워지는 순간이다.[각주:17] 

    바로 이 지점이, 나의 판단에는, 지젝의 담론으로 윤리와 신학이 파고 들어오는 곳이다.


지젝의 바울, 도착적 기독교의 해결책



    지젝과 신학의 관계가 밀접하다 못해 지젝이 신학을 이용하여 그의 철학의 탈출구를 찾으려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을 쓴 아담 커스코이다. 커스코는 지젝이 자신의 체계와 진리담론의 한 예로써 바울을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바디우는 다음편에서 논할 예정이다.) 지젝은 신학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각주:18] 지젝의 책, [The Puppet and The Dwarf] (한국어책 제목: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론은 그 유명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역사철학의 첫번째 테제로 시작한다.[각주:19]

    장기를 두는 인형이 있다. 그리고 이 인형은 절대 인간과의 장기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다. 알파고를 상상해도 된다. 그 테이블 안을 들여다 보면 한 난장이가 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 인형이 역사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이고 그 안의 난장이는 바로 신학 (theology)라고 말한다. 벤야민의 이 유비는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젝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상징계의 산물로써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이해해보았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역사 서술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승자의 기록’이다. 여기서 승자의 기록은, 바로 살아남은, 또는 상징계 안에 알맞게 포섭되어 기억된 자들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젝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상징계는 결핍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그 핵심은 텅비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적은 방식과는 반대의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잊혀진, 사라진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지젝이 보기에 아마도 현실의 상징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판타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말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라는 것이다.[각주:20] 앞으로 발터 벤야민은 조르지오 아감벤을 다룰때 더욱 심도 깊게 이야기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학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던 원시공산사회로 부터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져 결국에는 공산사회가 된다는 필연적인 역사유물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론을 지젝은 ‘억압된 것의 귀환’ (return of the repressed)을 응용하여 과거의 실패한 혁명적 시도들과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들의 귀환이 바로 실재적인 혁명의 상황의 가능성이고 바로 그러한 잊혀진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이 구원받는 것이 혁명의 상황이라 말하였다.[각주:21]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역사유물론이 퇴조되고 있는 현시대에서 벤야민의 난장이 유비를 거꾸로 볼 것을 주장한다. 곧 신학이 장기 인형이고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벤야민의 시대에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신학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잊혀진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신학으로 부터 역사적 유물론을 재발견하는 것이 혁명적 사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사고로 인해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게임에서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난장이를 붙잡음으로 혁명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젝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유물론자이고 어쩌고 저쩌고해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kernel) 이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제는 더 강력한 것이다. 바로 이 핵심은 오로지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유물론적 접근은 기독교적 핵심으로서만 접근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야만 한다!”[각주:22]


    다시 ‘도착’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지젝이 말하는 ‘도착’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첫번째는 왜 지금 기독교인가? 두번째는 왜 바울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지젝이 보기에 기독교는 매우 도착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이고 현대는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사회 전체에 편만한 상황이다. 즉,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착’인데 기독교에 이미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착’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존재이다. 두번째의 답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에 내재해 있는 ‘도착’에 대해 이미 알아차리고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고로 바울이 ‘도착’을 해결한 방법이 현재에도 가능하다면 바울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된다는 것이다. 차근 차근 따져보자. 

    커스코는 현대 사회에 대한 지젝의 진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사회는 곧 대타자 ‘Big Other’가 죽은 사회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라진 사회이다. 원래 대타자의 역할은 주체가 상징계에 잘 안착하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내려진 법 (신의 법)을 어기는 향유를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다.[각주:23]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교회에 두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교회를 통해 공급 받으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쾌락을 누리며 (예배를 빠진다거나, 이웃을 미워한다거나)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대타자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신의 법도 이를 어기며 얻는 쾌락도 존재하지 없다. 갑자기 자신이 믿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을 상상해 보자. 단순히 ‘신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와 부모의 지갑에서 몇만원을 훔치던 스릴과 회개의 기쁨이 없는 무료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현대의 인간은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어기는 방법으로 대타자의 죽음을 해결해 보려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지젝이 지적하는 ‘도착’적 행위이다.[각주:24]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보수적인 교회들에서 동성애를 비판할때 이를 수간(동물과의 성행위)으로 연결하여 폄하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매우 ‘도착’적인 행위로 보는데, 여러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에는 무감각하면서 동성애를 이러한 수간과 같은 매우 원초적인 금지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반응한다. 곧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법을 세워두고 그것을 완전히 위배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보면 그들이 대타자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대신에 스스로의 향유(쥬이상스)를 위해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독교 번영주의도 ‘도착’적 행위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쩌면 복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이라 여겨지는 것 자체가 ‘도착’적 사고가 편만한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도착’적 현상이야말로 기독교가 생존해온 방법이라고 밀어붙인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야말로 도착적이라고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기독교 신의 방법은 좋은 것을 위해서 언제나 악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구원이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유다에게 스승을 배신하는 길을 걷게하지 않았던가? [죽은 신의 위하여]의 부제가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인데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야말로 ‘뭔가 악한 일을 하고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것 이라고 말한다. [각주:25]그리고 지젝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바울이 찾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의 관점과 그 처방을 살펴보자.[각주:26]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의 특이성으로 주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아니라 욥이다. 모세나 다윗과는 달리 욥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나 다윗은 공동체와 국가를 신의 법과 법칙 위에 세운 인물들이지만 욥은 정면으로 신의 법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모든 종교나 국가는 어떠한 법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법은 언제나 신의 명령을 통한 금지를 바탕으로 세워지는데 그 저변에는 어떠한 폭력적 살해의 사건이 기반하고 있다고 하였다.[각주:27] 그렇다면 신의 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욥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시험하는 신의 존재는 프로이드의 초자아와 같은 외설적인 존재이다.[각주:28] 예를 들면, 욥기의 신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인간을 득의의 웃음으로 바라보는 신이다. 욥기의 마지막 40-42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겠지만 지젝이 말하는 욥기의 해석은 성서학에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욥이 신의 존재와 전능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신 스스로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욥 42:7,8)라는 말로 욥의 불평과 신에 대한 질문이 옳았음을 말했기 때문에, 지젝은 욥이야말로 신의 전능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고발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욥이 아니라 야웨였던 것이다.[각주:29]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에 두가지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법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생존을 추구하는 ‘도착’적 핵심(Perverse Core)과 그 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외설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신의 전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전복’적 핵심(Subversive kernel)이 그것이다. 지젝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욥이 고개를 숙이고 신의 법에 수긍하면서 유대교의 전복적 핵심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욥은 비밀을 알았지만 사회의 보전과 공동체의 생명이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황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알면서도 수긍해 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후에 용기있게 신의 죽음을 말한 자가 유대교에 나타났으니, 그는 예수와 그의 뒤를 이은 바울이었다.[각주:3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로 대표되는 로마서 7장은 보통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로마서 7장의 해석은 바울이 스스로의 유대인됨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본문을 율법폐기론적 (율법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입장) 구절이 아니라 율법의 선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율법의 장단점 정도로 해석한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이 정확하게 바울이 발견했고, 이미 욥이 발견한 율법과 야웨신에 존재하는 ‘도착’성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내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7장 18~23)


    욥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불능(Impotence)을 발견했던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어길수 밖에 없는 법칙이 그 속에 존재함을 발견했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비밀한 입장을 소개했던 것이다.[각주:31] 정리하면,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비밀은 바로 전복적 핵심 (kernel)이며 그것은 한마디로 ‘전능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 7장 25절)이라고 말할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통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 27장 46절) 신의 불능성이 드러났고 바야흐로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바야흐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을 발견함으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으로서만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바로 그 비전을 지젝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보는 듯하다. 이는 다음 웹진에서 논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Dylan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 edi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6), 150. [본문으로]
  2.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And Other Writings (PENGUIN CLASSICS, 2007), 66–67. [본문으로]
  3. 김상환, 라깡의 재탄생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102. [본문으로]
  4. 이현우는 그런의미에서 향유라는 번역보다 ‘향락’이라는 번역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하는데 원래 Jouissance라는 단어가 성적쾌락에 대한 의미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옳다고 본다. 그러나 향유라는 말이 많이 쓰이므로 여기서는 향유라고 쓰겠다. https://blog.aladin.co.kr/mramor/category/1216428?CommunityType=MyPaper&page=161&cnt=801 [본문으로]
  5.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93. [본문으로]
  6. Ibid., 102.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57–58. [본문으로]
  8.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41. [본문으로]
  9. Kotsko, Zizek and Theology, 61. [본문으로]
  10. Ibid., 6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63.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61. [본문으로]
  18. Ibid., 74. [본문으로]
  19.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ss.: MIT Press, 2003), 3. [본문으로]
  20.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151. [본문으로]
  21. Ibid., 158. [본문으로]
  22.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6. [본문으로]
  2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85. [본문으로]
  24.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53. [본문으로]
  25. Kotsko, Zizek and Theology, 88. [본문으로]
  26. 필자는 많은 부분 아담 코스트코의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의 3장 ‘The Christian experience’부분을 참고했다. 아담 코스트코는 이 장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이전의 지젝이 평가하는 유대교에 대해 서술한다. 원래 프로이드의 저서 [Moses and Monotheism]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평가하였으나, 그 이후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프로이드를 참고하면서 율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유대교의 특이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bid., 88–90. [본문으로]
  27.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93.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126–127. [본문으로]
  30. Kotsko, Zizek and Theology, 95. [본문으로]
  31. Ibid., 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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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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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ecceitas
    2016.06.10 11: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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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Adam Kotsko는 코스트코/카스코 중 하나로 택일하거나 아니면 코츠커 정도로 음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2. 한수현
    2016.06.12 11: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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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알겠습니다. 원고를 몇번에 나누어 쓰다보니 미쳐 고치지 못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불어 존엄한 삶



신윤주



   창문을 열면 인왕산 자락이 빼꼼히 보이는 집에서 결혼하고 네 해를 살았다. 바다는커녕 개울가로도 둘리지 않은 한 동짜리 아파트였지만 건축할 당시의 유행을 따랐는지 유난히 벽이 희었고 한쪽에는 등대를 닮은 파이프가 기둥처럼 솟아 있었기에, 하늘이 파랗게 맑은 날이면 나는 사진으로만 봤던 산토리니의 풍경 속에 들어있기라도 하듯 황홀해했다. 그리고 언제나 계절은 안방과 거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널찍한 창 너머에서 바람과 풍경과 소리를 실어 날라주었다.    

   그 널찍한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건 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정오 무렵에 여자는 왕복 이차선 너비의 골목 쪽으로 난 창가에 서서 삼십분 이상 욕설을 퍼부어댔다. 쌍시옷이 잔뜩 들어간 말들로, 분노를 담아 힘껏, 세상을 향해 자신의 남편과 남편의 내연녀에 대한 험담을 쏟아냈다. 아랫집 여자였다. 적잖이 거슬리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경비 아저씨에게 내려갔다. 아랫집 여자 아무래도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상의를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히려 여자를 안타까워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는 바람에 저렇게 됐다나봐. 그냥 놔 둬.”   

    또 하루는 문 밖 복도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보다 위층에서부터 씩씩대고 중얼중얼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아랫집 여자의 소리였다. 옥상에는 왜 갔을까. 얼마 뒤에 보니 인터넷이 되지 않고 있었다. 전화 상담을 통해 할 수 있는 조치를 해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서비스 기사분을 불렀다. 그는 옥상 위에 전선이 다 끊어져 있다고,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전선에 일부러 가위질을 해놓는 것 같다고 했다.  

    여자의 맞은편 집에 사는 302호 부부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앞집에서 이상한 전파 소리가 들린다며 무작정 쳐들어가 소리를 추적하려 한 것이다. 우리 집에도 올라온 적이 있다. 아기 소리가 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 부부 사이에는 아기가 없다.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장롱에 아기를 숨겨 놓았을 거라며 집에 들어오려는 걸 겨우 문간에 세워두었다. 지나치게 확신에 찬 여자를 보며 확실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반응들은 어떤 소리 혹은 응시에 대한 반응 같았다. 그런 가설을 세운 뒤로는 여자와 여자의 딸이 외출하는 시간에 복도나 계단에서 마주치게 될 경우에 되도록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그러던 중에 여자가 어린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러 외출하는 시간과 내가 집에서 나서는 시간이 이틀 연속으로 비슷한 때가 있었다. 내려가던 계단에서 멈춰서는 것도 애매해서 최대한 둘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는 다시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여자는 딸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니 저 여자는 왜 자꾸 우리가 나가는 시간에 나와? 미쳤나봐. 확실히 미쳤어.” 

    그때는 정신병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증상들은 DSM의 진단 체계를 따라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분류되거나, 다른 분류법에 의거하여 편집증으로 진단되기도 하는 정신 질환에서 흔히 확인되는 양상이었다.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정신자동증mental automatism'에 걸린 사람은 늘 어떤 목소리가 자신에게 뭔가 말한다고 느낀다. 들리는 말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중얼대는 목소리가 있고 나중에는 그 목소리에 적대감이 서려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각주:1] 환청이나 환각과 더불어 망상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증상으로 꼽힌다. 환청이나 환각이 떨어져나가지 않은 충동의 대상인 목소리나 응시가 출현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증상이라면, 프로이트-라캉주의에서 망상은 이러한 현실적인 것the real과 대면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의미를 고정하는 자가 치료 기제로서 의미를 지닌다.[각주:2]  

    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프로이트의 분석 사례 중 편집증 환자 슈레버에 관한 것이 있다. 슈레버는 42세에 처음으로, 51세에 두 번째로 발병을 했다. 슈레버가 두 번째로 발병 했을 때 그는 항소심 법원의 재판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나중에 라캉은 슈레버가 재판장으로 호명된 사건을 두고 부성 은유 혹은 상징적 은유 기능의 잠재적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계기로 보았지만,) 당시 슈레버 자신은 과중한 업무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믿었다. 불면증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증세로 고통 받던 슈레버는 첫 번째 발병 시에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 재입원을 결정하고, 이후 증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프로이트는 슈레버가 입원했던 존넨슈타인 요양소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슈레버의 증상이 악화되는 과정을 전한다. 


    ‘즉 그는 뇌가 물러졌다거나 혹은 자기는 곧 죽을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환각을 근거로 한 피해망상이 이미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록 초기에는 가끔 나타나기만 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감각 과민증이 심하게 나타났다. 후에 시각적인 환각과 청각적인 환각이 점점 자주 일어났고 동시에 일반 감각도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환각이 그의 감정과 생각을 지배했다. ...... 그는 목욕탕에 빠져 죽으려고 몇 차례 시도했고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청산가리”를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망상은 점점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과 직접 대화한다고 하였고 혹은 자기는 악마의 놀이감이라고도 했고 ...... 나중에는 자기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또 자기를 괴롭히고 다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각주:3]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는 동안 슈레버는 고문에 가까운 목소리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결국 그 목소리의 메시지에 순종하듯 자신의 망상 체계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여자로 변하는 환각이 든다는 것이 괴롭기만 했지만 점차 이러한 생각과 화해해 가면서 자신의 몸으로 느낀 여성적 포지션의 흥분을 권리이자 의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새 인류를 낳는 소명을 맡은 여자가 되기로 한다. 슈레버에게 이 서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 혹은 현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현실 감각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서사는 정신병자의 망상 체계일 뿐이다. 어떤 정신병자의 망상 체계는 실제로 타자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기도 하기 때문에 망상을 환자 스스로의 회복을 꾀하는 일종의 서사 체계로서 이해한다고 해도 인식 기반의 차이 이상의 불안과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  

    보름쯤 전에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의 범인 역시 정신병을 앓는 주체였다. 경찰은 피해자의 상처 부위가 깊고 잔인했다는 점을 보아 이 사건은 면식범에 의해 저질러진 일일 것이라고 추측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둘은 원한 관계가 없었다. 원한 관계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관계도 맺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살해된 젊은 여성은 범인에게 어떤 잘못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그를 무시하고 공격했다는 여성 일반(에 관한 망상)에 대한 죗값을 치렀다. 그녀에게 ‘희생양’이라는 말 외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러나 여성에게 적절한 이름을 붙이는 일에 서투른 한국 사회의 몰지각한 호명 방식을 따라 그녀를 ‘화장실녀’라고 부르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부적절한 호명은 그녀에게 꽂힌 두 번째 비수였다. 아니,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무수히 반복된 공격의 연장이었을지 모른다.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현상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대하는 대중의 반응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확연히 얼굴을 드러냈다.  

    2006년도에 신조어와 유행어 1위를 기록한 ‘된장녀’라는 단어의 등장을 기점으로 여성들은 ‘~녀’로 손쉽게 호명되기 시작했다. 희화화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범주화될 수 있는 여성들은 ‘된장녀’, ‘김치녀’, ‘건어물녀’ 등 주로 먹을거리와 연관된 이름들로 시작되어 ‘취집녀’, ‘무개념녀’, ‘오크녀’ 등으로 무수히 이어지고 그 외의 단발적 사건 속에서조차 언론의 주도로 가십성 ‘~녀’들이 생산되었다. 

    신조어는 기존의 어휘들로는 담아낼 수 없는 어떤 사물이나 개념을 가리키기 위해 새로 만들어내는 말이다. 일군의 ‘~녀’ 시리즈를 한 범주의 신조어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특히 최근 10~15년 사이에 기존의 이데올로기로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이 출현했다는 뜻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시리즈의 첫 주자인 ‘된장녀’에 관한 묘사를 표본적으로 살펴보면 몇 가지 키워드가 발견되는데, 명사(구)로는 ‘외국계 커피전문점’, ‘뉴요커’, ‘패밀리 레스토랑’, ‘남자 탤런트’, ‘남자 선배’, ‘비싼 밥’, ‘문자메시지’ 등이, 그리고 용언에 해당하는 구문으로는 ‘착각하다’, ‘수다를 떨다’, ‘빌붙다’, ‘얻어먹다’, ‘의미없는 ...... 작성하다’, ‘시간을 허비하다’ 등이 나타난다.[각주:4]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보았을 때 (반대 성의 연예인에 관해 평가하고 시시덕거리는 것은 남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여자가 남자 탤런트를 두고 평가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은 가당치 않으며,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외국계 커피전문점에 밥값에 준하는 돈을 지불하고 커피를 향유하는 것은 스스로 뉴요커라는 착각하며 사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소비 주체가 여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남자 선배에게 빌붙어 비싼 밥을 얻어먹으려고 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자’이고 ‘선배’이기 때문에 밥을 사줘야할 것 같은 압박감이 그들을 괴롭게 한다. 이것이 십여 년 전의 인식이다.  

    이 딸들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을 길러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했으나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가족 내 남성 형제들에 대하여 박탈당했던 권리를 딸에게는 회복시켜주고 싶지만 동시에 성 역할에 관한 한 아직 일정한 혼란을 겪는다. 이 아들들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어머니 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일정한 불만을 지니기 쉬우며 산업의 역군으로서의 자부심과 급변하는 산업 구조에서 파생되는 변화 속에 불안을 느낀다. 이들 부모 세대의 욕망 속에 전근대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될 수 없는 여성과 남성이 출현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경쟁했으며 사회에 진출했다. 이제 남성들은 공적인 장에서 양적으로 배가된 대상들과 경쟁해야 하고 사적인 장에서 이전보다 까다로운 타자들에게 구애해야 하게 되었다. 새로운 여성은 남성의 선택을 기다리는 대상에 머무는 대신 유혹하고 선택한다. “ ‘선배 졸려염 ㅠㅠ’ 같은 의미 없는 문자메시지를” 전송하고 난해한 해석의 문제를 야기하는 주체인 것이다. 만일 이러한 여성 주체를 ‘~녀’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을 통해 고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시대착오적 망상일지 모른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산업화 세대의 정상성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시대에 수정되지 않은 여성적 정상성을 요구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정조가 여성혐오다. 그러나 산업화 세대의 도덕규범은 이미 영토를 초월한 교류를 통해 세계적 보편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상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성 역할, 성적 취향, 성 정체성, 나아가 혼인, 출산, 성매매 포르노 등에 관한 도덕규범과 법규범이 제시하는 정상성은 한국 사회에는 더 이상 정상적인 여자, 정상적인 성, 정상적인 결혼,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정상성은 신화일 뿐이다. 정상성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겠지만 기준을 조정해나가는 일은 상대적으로 가능한 접근이다. 가령 범죄에 대한 규정과 접근을 달리함으로써 범죄율이 감소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고 사회 안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의 비율이 늘어나는 효과를 낸 네덜란드의 사례가 있다. 결과적으로 교도소 운영에 필요한 예산은 절감되었고 대신 범법자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은 늘어났다.[각주:5] 이 사례의 시사점은 한국 내 범법자를 처우하는 법제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다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에 있다. 지금껏 한국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방식이 격리하거나 못 본 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을 사회 안으로 끌어안고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약한 것은 근절해야 하는 질병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개인과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가해자는 3월 말 경에 가출을 하고 한동안 한 지하철역의 남자화장실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만일 그가 가출을 하지 않았거나, 가출을 했더라도 좀더 안정적인 사회적 보호 시설에서 머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까? 또한 애초에 그가 가출한 동기는 아버지가 그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각주:6] 만일 그의 아버지가 관리 불가한 자신의 아들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는 대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가족이 가정 안에서 모든 경제적, 정신적 비용을 부담하고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처했던 사연을 들었을 때 한때 아랫집에 살았던 여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삶의 조건이 무엇이었든 그녀는 상대적으로 존엄을 지키며 일상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정신분열증 연구자인 실바노 아리에티는 치료를 받지 않는 “평범한” 정신병자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모르며 미묘하고 절제된 광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백색 정신병,” “평범한 정신병”, “일상적 정신병”, “비밀스러운 정신병” 등으로 일컬어졌다. 대리언 리더는 이러한 정신병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며 우리는 미치지 않고도 미친 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리더는 우리가 정신병의 편재함을 알아야 하며, 정신병의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기가 촉발된 사람을 돕기 위해서다.[각주:7]  

    정부는 강남역 사건의 대책으로 공중 화장실을 개선하고, CCTV의 수를 늘리며, 조현병 환자들을 전수 조사하여 행정 입원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이것은 이 사회로부터 여성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말만큼이나 문제의 핵심과 무관한 듯이 보인다. 애초에 여성혐오는 여성을 계속해서 대상의 위치에 두고자 하는 욕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안전과 여성혐오의 연관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주체성과 욕망을 지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이데올로기적 거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바탕으로 이슈를 다뤄야 한다. 마찬가지로 조현병 환자들을 전수 조사하여 병원에 몰아넣는 것은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들은 불안해 보이는 방식으로 세계를 대하지만 여전히 존엄한 인간 주체이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이 영토에 머무는 인간 주체들의 존엄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남성은 여성을, 신경증자는 정신병자를, 이성애자들은 LGBT를, 국적을 소지한 자들은 외국인 체류자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동등한 욕망을 지닌 주체일 수 없는 것처럼 취급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젠 더불어 존엄하게 살 길을 모색하자. 언 발에 다시 오줌을 누기에 한국 사회는 너무 춥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대리언 리더, 『광기』, 배성민 옮김 (까치글방, 2012), 60-61쪽. [본문으로]
  2. 대리언 리더, 위의 책, 29, 96쪽.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전집 9권 『늑대 인간』, 김명희 옮김 (열린책들, 2003), 112-113쪽. [본문으로]
  4. 백승찬, “ ‘된장녀’가 어쨌다고...”, 「경향신문」 2006년 8월 6일. [본문으로]
  5. True Activist, “Netherlands Closing 19 Prisons Due to Lack of Criminals”, True Activist, April 12, 2004 <http://www.trueactivist.com/netherlands-closing-19-prisons-due-to-lack-of-criminals/> [본문으로]
  6. "검거된 미제사건-강남역 살인 사건의 전말", <그것이 알고 싶다>, SBS, 2016년 6월 4일 방송분. [본문으로]
  7. 대리언 리더, 『광기』, 2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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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복수



심범섭



   한국 사회에 고립화 경향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하며 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없다는 사람이 많고, 이런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고 하는데, 2014년 통계에서는 노인 100명 가운데 11명이 완전 고립 상태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경제불황으로 취업과 결혼 시기가 늦춰지고, 사별, 황혼 이혼, 기러기 가족 등의 이유가 더해져 현재 대한민국 4가구 중 1가구는 1인 가구라고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은 전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건강 상태가 더 안좋다고 한다.    

   고립화 경향을 보여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혼자 밥 먹는다’라는 뜻의 “혼밥”이다. 이 표현은 혼술 (혼자 술 마신다), 혼영 (혼자 영화 본다), 혼여 (혼자 여행간다) 등 혼자 활동함을 뜻하는 여러 표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혼밥 현상 자체는 단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을 시간적 또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 같은 부정적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는 여유를 즐기고 싶다 같은 이유로 자발적으로 혼밥을 선택한다. 하지만 원치 않는 고립이 혼밥 현상의 무시할 수 없는 한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혼밥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문재 시인은 “‘혼밥’과 시의 마음”이라는 글(2015년 12월 25일 경향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밥 먹듯이 해온 말이지만) 밥상이 둥근 이유는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먹기 위해서다. 평화에는 평상에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혼밥이 많은 사회는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사회다. 사회가 없는 사회, 가장 나쁜 사회다.  


    이문재 시인은 혼자 밥 먹는 것이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현상과 이어지는 이유를 진지하게 논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립과 사회의 평화를 관련짓는 이 구절은 나로 하여금 ‘왜 고립이 사회의 평화를 저해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소박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사람이 홀로 있다(고립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 생각해보니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듯 하다. 첫째, 물리적인 혼자됨, 곧 옆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경우이다. 비록 모르는 사람, 말 한 마디 안나누는 사람이라도 그가 가까이 있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가장 근본적인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에 반응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한 서양 학자가 고독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곤충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해당 곤충 두 마리를 같이 있게 했을 때 혼자 둔 개체보다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읽은 글을 지금 찾지 못해 학자 이름, 글 제목 등 세부사항을 언급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어울리면서 살면 더 오래 산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이때까지 이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인간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 덕분에 생물학적 수명도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학자는 자신의 곤충 실험 결과를 보면서, 의미에 대해 사유하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동물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며 인간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제기했다. 적적할 때 사람 많은 거리에 나가거나 찻집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 것을 보면 이 주장은 맞는 것 같다. “늙을 수록 북적북적한 데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지만,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람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정신과 신체 건강에 좋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단순히 다른 사람 없는 곳에서 홀로 지내는 것은 고립의 한 의미있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의미있는 인간 관계가 없다는 것이 홀로 있음의 한 가지 중요한 정의가 될 수 있다. 의미있는 인간 관계란 서로 관심을 기울이며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관계이다. 사람에 둘러싸여 살아도 이런 관계가 없으면 사람은 외로움을 느낀다. 이런 경우를 “홍수 때 오히려 먹을 물이 없다”, “군중 속의 고독” 같은 표현을 빌어 표현하기도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표현은 원래 데이빗 리즈만(David Riesman) 등이 1950년에 출간한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이라는 책에서 제시하는 개념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군중 속의 고독이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군중 속의 고독”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영문학사에서 이러한 관계적 고립을 가장 극명하게 형상화한 작품 가운데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단편 소설 “안타까운 경우 (A Painful Case)”라고 생각된다. 중년의 지성인 제임스 더피( James Duffy)는 어느 누구와도 친밀한 인간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몇 년 전 시니코(Sinico) 부인과 가까와진 적도 있었지만 부인이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절교하고 만다. 외로움에 괴로워하던 부인은 술에 의지해 버티다가 어느 날 드디어 자살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더피는 자신의 고립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향연으로부터 쫓겨난 (outcast from life’s feast)” 것으로 느낀다.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없이 사는 것은 “삶의 향연에서 쫓겨난” 채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셋째,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가치관,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바꾸어 말해 근본적인 인식에서 이해받지 못할 때 고독을 느낀다. 누군가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내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근본 인생철학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훌륭한 친구와 결별하기도 한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여양이라는 사람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알아준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철학을 이해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 어떤 기독교인들이 종교관이 다른 가족보다 종교관이 같은 남과 더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도 근본 세계관이 같은가가 유대감에 의미있게 영향을 미침을 드러내는 한 예라고 할 것이다.  

    넷째, 우리는 우리와 ‘처지’가 같은 사람이 없을 때, 곧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때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처지라는 것은 삶의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더 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더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라는 속담은 삶의 어떤 중요한 처지에 대한 이해를 이야기한다. 신경림 시인의 “겨울밤”이라는 시는 농촌 청년들의 고민과 좌절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슬픔을 아는 건 우리뿐”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농촌 청년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와 이 집단 밖에 있는 사람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동시에 전한다. 거의 20년 전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전화상담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선생님, 굶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상담가는 당황하면서 자신없게 이렇게 말했다. “밥인가요?” 그러자 전화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같이 굶어주는 사람이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크게 위로가 됨을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힘든 사람에게 그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고독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우리는 신 또는 참된 자아 또는 실재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근원적 대상과 합일되지 못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이를 종교적 차원에서 느끼는 고립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종교를 믿거나 영적 수행을 실천하는 것은 이 차원에서 고립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약성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의 명령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신과 소통하기를 그치지 말라는, 곧 종교적 차원에서 고립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차원에서 고립을 벗어나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 고립을 벗어나는 것과 갈등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책을 쓴 김정운은 “자기 성찰은 외로움에서 온다. 외로운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 주말에 반나절이라도 혼자 있어볼 필요가 있다. . . . 더 외로워야 덜 외롭다”라고 말한다. 물리적으로 혼자됨으로써 깊은 자아를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불교나 천주교 같은 종교에서는 제도적으로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종교적 차원의 고립을 극복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사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 다섯 가지 차원은 서로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꾸어 말해 이 가운데 사회적 통합과 평화를 더 직접적으로 저해하는 고립은 무엇일까? 나는 관계적인 고립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 철학적, 처지적, 종교적 차원의 고립은 관계적 고립보다 덜 일반적인 문제인 것 같다. 달리 말해, 대다수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 있지 못할 때 다른 측면에서 홀로 있을 때보다 더 불행하게 느끼는 듯 하다. 그리고 언론 보도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관계망”이 약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계적 고립과 사회의 평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먼저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이 누군가와 마음 편하게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게 규범 의식이나 윤리 의식이 퇴화하고 소통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은 사람은 선량한 의도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런 면에서라도 이문재 시인의 지적에 동의하게 된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은, 관계적으로 고립되는 주된 이유가 가난하거나 힘이 없어서일 때 가진 자 또는 힘 있는 자의 명시적, 암시적 멸시가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는 더욱 확연한 현상인데, 이와 관련하여 김우창 선생이 18년 전에 하신 말씀을 한번 들어보자.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값어치(남의 눈에나 자신의 눈에나), 사람의 값은 권력과 부와 지위에 의하여 정하여진다. 이것들은 우리 사회가 믿는 유일한 가치이다. (도덕적 자기 정당성의 느낌도 우리가 남달리 믿는 가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치의 추구는 사회 구조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 되기도 한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 체계에서 가해지는 수모를 피하며 자존심을 유지하려면 최소한도의 부와 권력과 지위를 확보하여야 하는 것이다.[각주:1]  


    거의 20년 전 글이지만 한국 사회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돌봄을 받고 싶어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를 생래적 권리(영어로 “birthright”로 표현하는)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대우를 충분히 받지 못할 때 사람은 분노하게 된다. 사실 제대로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모멸 받으면 분노하는 법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모멸 받기까지 한다면 그의 가슴에 간과할 수 없는 분노가 도사리고 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관심 받지 못함과 멸시 당함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부당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끼며, 어떻게 해서든 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약하기 때문에 짓밟히는 사람은 반드시 분노하고 반드시 “복수”를 생각한다.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복수심이 있는 사람은 심성이 거칠어져 그 말과 행동이 문득문득 차갑고 날이 서게 된다. 이런 면에서도 그의 현실은 평화를 이루는 좋은 조건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그가 보복 의식을 더 적극적으로 표출할 때 그 결과는 평화를 조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다. 그런데 복수는 많은 경우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게로 곧바로 향하지 못하고 자신보다도 더 약한 존재에게로 향함으로써 또 한번 부당한 상황을 낳고 만다. 여러 해 전 오키나와가 고향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안에서 주변인으로 차별받지만, 이들은 오키나와 남쪽에 있는 더 작은 섬들에 사는, 더 힘 없는 소수민족을 또 차별한다고 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폭행함으로써 울분을 해소하는 것도 왜곡된 복수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립과 복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나는 서정주의 어두운 시 “문둥이”에 한번 적용해 보고 싶다.  


문둥이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시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은 인터넷의 한 블로그에서 빌려온 다음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위해 죄 없는 목숨을 희생시키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문둥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본능적 삶의 애착과 원죄 의식을 말하고 있다.”[각주:2] 그러나 동시에 이 글에 소외된 자의 왜곡된 복수라는 의미를 담아 읽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아기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에 따라 아기를 죽이는 것을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모멸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속설 자체가 이미 복수를 위한 이론일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달리 말해, 이 시에서 우리는 고립되고 멸시받는 사람이 극단적인 분노 때문에 사회윤리의 제약에서 벗어난 보복의 이론을 만들고 이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가책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라스콜니코프도 같은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매우 고립된 사람이었는데, 비범한 인간은 인류 전체의 진보를 위해 사회의 규범을 어겨도 된다는 철학으로 살인 강도를 감행한다. 고립되고 모멸받는 이가 보복의 이론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고립 현상과 그로 인한 갈등을 들여다 볼 때 ‘고립되고 억압받는 자의 복수’라는 개념이 가장 명심해야할 사항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고립화 경향을 막고, “오만과 모멸”의 문화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구체적이고 절차적인 답을 내놓을 능력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답을 내놓을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현실적, 실천적 차원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종교기관과 봉사기관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대책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지하고 작은 개인으로서 소박하게 몇 가지 생각하는 바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우리 사회에 다른 사람의 사람다운 삶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미 고통받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에는 그 고통의 구체적 경험을 (완전히는 불가능하더라도) 가능한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을 낳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런 책임감은 나와 남의 존재가 그 근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곧 남이 사실은 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둘째, 부정적인 고립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거나, 부와 권력과 지위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에 저항하는 “이야기(narratives)”를 찾고 창조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역사와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여러 서사 장르에서 유용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또 새로이 창작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인문 교육, 문화적 교양활동에 해당하는 일이다. 인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종교인들이 이런 노력에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고립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에 대해 조금 상술하자면, 이런 이야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고립을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원치않는 고립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또 하나는 누군가가 고립되어 있는 모습만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이 고립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나 같은 상황에 있다는 이야기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허구라 하더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  

    세째, 고립된 사람 또는 모멸받는 사람이 사회 및 공동체에 잘 융화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이 사람을 단지 도와야 할 약자로 인지해서는 안될 것이다. 빈곤한 사람만이 아는 부요가 있다. 거창하게 이름을 붙이자면 “결여의 역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립의 고통을 겪은 사람은 함께 있음과 공동체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모멸에 분노해 본 사람은 존중과 공정함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깊이 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이런 차원에서 결여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는 감각과 판단력과 언어가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만 있는 지혜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배우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이들의 자존감은 더 높아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삶의 상황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더 깊고 예민하게 인식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고립화 현상을 사회 평화와 관련하여 복수라는 개념을 통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우리 가까운 곳에 “해와 하늘빛이” 서러운 사람들,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김우창, “투명성: 경제 위기와 도덕”, <정치와 삶의 세계>, 삼인, 2000, p.31. 이 글은 원래 <신동아> 1998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이다. [본문으로]
  2. http://blog.naver.com/paulus1993/2206859935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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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호프집에선 한 여자가 죽었다


-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거, <채식주의자> 읽어 봤냐?” “네, 당연히 읽어봤지요.” 아버지는 내 감상을 조곤조곤 물어보다가, 내가 나름 긍정적이었다고 하자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난 별로더라. 어떻게 그런 소설이 상을 탔는 지 모르겠다.”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왜 별로였냐고 묻는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감동이 없고, 인간적인 정도 없고.. 그런게 뭐 상을 탔나 싶다.” 


   노벨문학상에 버금간다는 ‘맨부커상’에 대해 접하곤, 아버지는 <노인과 바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단단한 근육 위로 바짝 선 핏줄 같은, 노장의 짙은 풍미가 지배하는 세상 말이다.  


   아버지는 어쩐지 추천해드린 <7년의 밤>도 퍽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저 스릴러 영화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신 선물을 고민하다가, 고민 끝에 시인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을 골라 들었다. <사슴>을 들고 계산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떤 고집 센 취향에 대한 상념에 빠져 들었다.


1.


    얼마 전 SNS에서 대학 시절 교수님의 포스팅을 접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아득하게 남았다. “실제로 중앙 문단의 한국문학사도 ‘순수/대중’으로 전개되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순수/대중’의 대립은 ‘순수’ 비평가의 틀이어다. 또 이 틀은 구별짓기에 기초하며 꽤 ‘혐오적’이다. 여성, 소수자, 노동자 및 대중에 대해.”[각주:1] 


   한강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분명 ‘순수 문학’에 속할테지만 이청준, 김훈,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명작 전집’을 읽어 온 아버지의 시각에서는 ‘장르 문학’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계기들이 일상의 시간을 파열내 버리고, 이윽고 소설의 세상은 현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작가의 의견이나 목적같은 건 강하게 휘몰아치기 보다는, 바스라지는 듯한 생의 감각과 섬세하게 엮인 감각의 틀 속에 사라질 듯 말 듯 고요히 잠자고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처럼 명실상부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노인과 바다>처럼 직접 대화를 건네지도 않는다. 보여주는 건 실타락처럼 풀어헤쳐지는 어떤 기묘한 감각과 감성들 뿐. 분명 그건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에 여성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 전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을 찾기는 극히 힘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엔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방인>, <데미안>, <1984>, <위대한 개츠비> 등이 있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전 명작 시리즈의 팔할 정도가 꽂혀 있었고, 아버지가 구매하지 않은 나머지 이할의 목록을 찾아보니 그나마 <인형의 집> 한 권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상황은 눈에 보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결코 순전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여태 접해 온 세계 명작, 그리고 고전 시리즈 가운데 여성의 세계는 거의 없었다. 여성 작가도, 여성성의 세계도, 그리고 여성이라는 질문 조차도.


2.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호프집의 공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시간이나 화장실을 서성였던 가해자는 이십대의 여자를 발견했고, 그녀는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에는 ‘나는 너다’ 혹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성혐오 범죄’라는 말이 끓어 올랐고, 너무나 쉽게 반대편의 전선이 생겨났다.


   이 전선에서 한 발짝 떨어진 일각에서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목소리를 두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 고 했다. 정신분석학과 수사학은 이 사건을 조현증 환자의 개별 문제로 보았고, 사회학과 여성학은 한 사람의 가해자보다 그를 둘러싼 이 사회 속의 여성 혐오 문화를 지적했다. 서로의 결에 따라 분석하고 도출해낸 결과였으나 합리와 객관은 전자가, 비약과 감성은 후자가 각각 차지했다. 남녀 뿐 아니라 학문 역시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학문과 전문가도 그랬는데 비전문가인, 순전히 ‘여성’일 뿐인 그녀들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성들의 공포 수위는 끔찍하게 치솟았는데,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되려 ‘남성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의 삼일장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한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는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다. 왜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꿈을 꿨어"라고 나직이 답한다. 그녀의 꿈은 붉은 피와 날것의 고깃덩어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고기를 끊고, 브래지어를 풀어버린다. 영혜의 남편은 ‘고기 냄새가 난다'며 섹스를 거부하는 영혜를 강제로 벗겨 삽입하고,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단지 그녀는 채식을 할 뿐이었다. 


   영혜를 둘러싼 남성성의 세계는 영혜를 혐오했다.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유두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그녀의 식성, 그리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그녀의 이야기까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을 틀어 막고, 멸시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던 것이다.


3.


   한강의 소설에 대해 ‘K문학의 쾌거'라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여성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같은 날 일어난 대조적인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한 여자의 성공은 사회가 너무나 손쉽게 취득해 가는 데에 반해, 다른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아니, 침묵을 넘어서 그 책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것을 ‘남성 혐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일부러 오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성혐오'라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멸시하고 혐오하고 조롱한다. 심지어는 성적인 표현을 끌고 들어와 모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언제나 ‘너무 과잉되었다.’라는 평가는 늘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그녀들의 몫이다. 채식을 고집했을 뿐인 영혜를 향해 모두가 힐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 모두가 실은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도 하고, 주말에는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군대도 다녀온데다가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게 ‘잠재적 가해자'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을 일이겠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은 오직 당신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고전 문학 시리즈에 여성의 작품이 없는 것, 역사 책에 여자란 선덕여왕과 유관순밖에 없는 것, 대기업 임원급에 여자는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사실들. 이 모든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던 영혜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안돼?” 그녀는 그녀의 몸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했고, 그에 대해 인정과 존중을 받기 원한 것 뿐이었다. 바라건대 영혜와 함께 질문해주시라. ‘그러면 안되는 걸까? 왜 안됐었을까’라고. 대답이 아닌, 질문조차도 우리에겐 희망이다.


   꽃보다도 아름다울 나이, 그녀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 웹진 <제3시대>

  1. 천정환 교수 페이스북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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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음-마” 


     아이가 처음‘엄마’라고 불러주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짧은 단어에 ‘참 예쁘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미완의 발음이 주는 귀여움 때문은 아닐 겁니다. 말하는 아이의 눈과 얼굴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한 자 한 자 얼마나 정성을 들인 발음인지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정성스럽게 쌓아가는 말소리가 모여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요즘 ‘아이야말로 위대한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부가 저녁식사 정리에 정신이 없는 중에 아이가 말을 걸어옵니다. 

     “아빠, ○○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는 며칠 전 제 아이 율이를 심하게 밀친 아이지요) 

     “○○는 지난 번에 율이 때린 친구아니야?? 율이는 ○○가 좋아?” 

     “그럼, 우린 친구잖아!”   


     3월부터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 중이었던 6살 첫째가 기존 어린이집 친구들의 텃세 속에 어떻게든 함께 어울리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저희 부부에게 아이의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립니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아이의 강한 신뢰감, 이 보통명사에 담겨있는 묵직함이 아이의 적응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혼란스럽던 제 맘을 지그시 눌러 내리더군요. 친구 생각에 얼굴 가득 웃음을 짓는 아이의 한 마디 말이 흔들리는 부모의 맘을 다잡고 아이를 믿고 기다리게 해 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몇 안되는 단어로 어떤 유려한 산문보다 정직하게 세상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아이의 말을 ‘엉뚱함’이라고 웃고 지나치지만, 왠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도 곱씹게 되는 낯설고 거침없는 표현들은 우리에게 분명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제 아이는 물론 아이의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묻거나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미간에 힘을 주거나 눈을 굴리며 생각하고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해주는 모습 자체가 사랑스럽기도 하지요. 

     돈은 혼자 열심히 벌어오는데 쓰는 사람(바로 저지요)은 따로 있어 아들에게 공로를 치하 받지 못해 억울한 남편이 묻습니다. 


     "율아, 너 맨날 맛난거 먹는거랑 장난감 누가 사줘?" 

     "엄마가." 

     "엄마가 사주는 그 돈 어디서 난 줄 알아?” 

     "주.머.니."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아이의 예리한 통찰력이 웃을 일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소를 선물하기도 한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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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의 젊은이, 오해를 넘어서

밥상공동체를 만드는 작은 예수 운동의 부활

 


김혜령[각주:1]
(이화여대)


 

          「구별짓기」의 저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의하면, 인간사회의 위계적 계급질서는 단순히 자본의 소유여부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입는 옷에서부터 시작하여, 음악, 운동, 취미생활 등 비슷한 문화적 취향을 공유하며, 자기집단을 구별 짓는다. 이러한 취향의 차이야말로 인간사회의 복잡하고도 미시적인 사회적 계층들의 분화와 이들 간의 차별을 잘 설명해 내기에 부르디외는 이를 문화적 자본이라 부른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먹는 음식까지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음식을 볶을 때 버터를 사용하는지, 혹은 식용유나 마가린, 돼지기름을 대신 사용하는지, 곡물섭취는 빵을 주로 먹는지, 아니면 쌀과 파스타, 감자를 곁들이는지, 고기는 통조림이나 햄, 소시지와 같은 가공육을 주로 섭취하는지 아니면 고기를 직접 조리하여 먹는지, 고기 중에서도 소고기나 양고기, 말고기 혹은 생선과 같은 특정 고기를 주로 소비하는지, 조금 유치하리만큼 세세하게 조사가 펼쳐졌다. 어떠한 음식을 먹느냐가 한 사람의 계급과 신분, 직종 등을 구별하여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정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연구의 결과는 우리가 이미 상식적인 수준에서 공유하고 있는 경험이다. 점심시간, 누구와 무엇을 먹느냐가 이미 우리자신이 어떠한 사회적 존재인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신빙성 있는 자료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먹는 음식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사회의 구별짓기는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 캠퍼스 안에서도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혼밥(혼자 밥먹기)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90년대 중반, 나는 유치하게도 매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점심을 먹곤 했다. 학생식당이나 학교 앞 분식점 등을 우르르 몰려다니며 같은 밥을 먹었다. 물론 우리 중에도 잘사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음식이 아니라 옷에서나 구분이 될 뿐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먹는 것으로 차이를 느껴본 적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학교 안에 고급식당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또한 학생들 각자의 시간표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혼밥은 요즘 대학생들의 일상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이제 혼밥은 학생들 간의 전공의 구별짓기, 계층의 구별짓기 혹은 우정의 구별짓기 등의 원인이 되었고, 친구들이 무엇을 누구와 먹는지 관심을 갖는 것이 때때로 지나친 간섭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된 듯하다.  


          문제는 이러한 혼밥 현상 이면에서 경제적 문제로 식사를 해결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상황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의 대학교회에서는 장학금의 일환으로 10만원치의 식권을 매학기 100명의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이를 원하는 학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계층의 학생들이 많이 다닌다고 소문(?)나 있는 우리대학 안에도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데에 고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다양한 이유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혼밥 현상은 이들의 존재를 감추며, 이들의 어려움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  


         다행인 것은 이러한 학우들의 문제를 함께 짊어지고 싶다는 학생들이 대학사회에 곳곳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2년전부터 시작한 ‘십시일밥’이라는 대학생 비영리봉사단체다. ‘십시일밥’은 학생들 스스로가 학생식당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돈을 모아 필요한 학우들에게 학생식당쿠폰으로 되돌려 주는 학생나눔자치활동으로서 한양대에서 시작하여 현재 전국적으로 십 여개의 대학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우리학교에서도 어린 여학생들이 십시일밥 로고가 새겨진 베이지색 유니폼을 입고 점심시간마다 생활관 학생식당의 까페와 한식코너, 교직원 식당에서 일을 한다. 사실 모두 집에서는 설거지 한 번 제대로 안하고 자란 귀한 딸들이기에 아직은 서툴고 힘들어 한다. 그래도 이번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열 명이 넘는 학우들에게 ‘우리와 같은 밥을 먹자’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는 기대 속에 땀을 흘리고 있다. 물론 이들의 봉사가 한 끼의 식사를 걱정 하는 학우들의 모두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는 대단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교내의 다른 학생들과 교수님들, 가족들에게 화려한 대학 캠퍼스 안에도 여전히 따뜻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되고 있다. 또한 도움을 받게 될 학생들 역시 학점과 취업 경쟁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을 함께 걱정해주고 지지해 주는 따뜻한 친구들이 같은 캠퍼스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삶의 작은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자 박재순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친 예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가난으로 인해 이리저리 찢겨진 갈릴리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하나의 ‘밥상공동체’를 회복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가나안 혼인잔치의 포도주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최후의 만찬, 엠마오 도상에서의 식사 모두 이러한 나눔과 회복의 밥상공동체의 실행인 것이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일에서 인간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사랑을 가꾸어나간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십시일밥’이라는 대학생 나눔활동이 우리 대학사회의 가장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는 ‘성만찬’을 세속적으로 부활시킨 작은 예수운동이라고 라고 부르고 싶다.  



십시일밥 누리집 http://www.tenspoon.org/



          물론 개인의 봉사로 가려져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음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5년 전 프랑스 유학시절 대학생 학생식당의 식사 가격은 3유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 그 양과 질은 7유로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음식이었다. 나머지 차액이 어디서 왔을까. 한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들을 건강하게 길러내고자 하는 사회의 구조적 의지가 그 4유로의 차액을 채워 풍성하고 건강하며, 평등하고 행복한 밥상공동체의 잔치로 젊은이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 스스로가 연대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쪼개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또 그 사회 구조의 중요한 결정권을 만들어 내는 기성세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다. 부끄럽게도 젊은이들 스스로가 어렵게 열어 초대한 잔치에 밭 갈러 간다고, 장가가서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고 핑계대기에는 이제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 웹진 <제3시대>

  1.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박사(윤리)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서울 향연감리교회에서 점심봉사를 하며 가끔 설교를 맡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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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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