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안다, 침묵 하나에-

                            주검 하나[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한백교회 전도사)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 「이사야」 53장 4~6절

 

1.

지난 16일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누구 하나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한 지인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두고 “숨 쉬는 것조차도 죄스러운 나날”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충격과 분노, 안타까움 등이 뒤섞인 비통한 정서 속에 지금 대한민국은 깊이 가라앉아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슬퍼하고 더 분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누군가를 위로하려 하거나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한 말이 섣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기독교는 이 현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제 안에 치밀어 오르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었습니다. 팽목항에서 바다를 향해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희 아이를 살려주세요”라며 간절하게 절하고 또 절하는 한 어머니를 TV 화면에서 보며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팠습니다. 대체 그 수많은 생명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어이없는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인가요? 아이의 어머니는 왜 있지도 않은 죄과를 자신이 뒤집어쓰겠다며 울부짖어야 했던 것일까요?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기독교는 이처럼 무고한 자들의 불의한 죽음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언론과 여론은 참사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추적하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로부터 시작해, 해경과 정부 관계자들, 선주 등이 표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때의 물음은 원인제공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며, 동시에 죄과를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인은 ‘전문 시위꾼이 유가족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그 정치인이 속한 정당의 한 최고위원은 한술 더 떠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파가 정부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책임자’의 자리에 이처럼 자신들의 분노와 증오의 대상을 단세포적으로 투영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분노에 찬 ‘책임자 찾기’가 끝나고 책임자에게 처벌이 내려진다고 해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죽음이 정당한 죽음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안전을 지킬 법적 의무가 ‘누구’에게 있었는가 묻는 편협한 책임담론은 그 질문이 첨예해질수록 이 사건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때의 책임이란 범법자를 색출하기 위한 돋보기이지 자신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런 책임담론을 넘어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를 ‘책임’에 대한 사유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2.

저는 항구에서 자신이 죄과를 뒤집어쓰겠다며 울부짖는 한 어머니를 보며 오늘의 성서본문이 떠올랐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프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라는데, 자식의 죽음 앞에서 그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는 4절은 “제가 잘못했어요”라는 어머니의 절규와 같은 감정적 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한 어머니는 아이가 담임선생님의 깜짝 생일파티를 끝내고 자랑하기 위해 전화한 것에 ‘자꾸 전화하지 말라’고 핀잔하고 짧게 통화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3절 본문은 그 어머니의 후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 있는 분들은 모두 이 사고에 매우 깊이 감정이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5절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인용한 본문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를 위해 무고한 당신이 벌을 받았구나’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보통 기독교의 ‘대속’ 또는 ‘속죄’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대속 교리의 핵심입니다(롬5:8, 고전15:3, 살전5:10).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대속과 관련한 놀라운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대속 교리와 관련해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알고 있는 이사야서 본문에서 대속에 대한 서술의 강조점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다른 데에 있습니다. 원래 오늘의 본문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야기 단락(52:13~53:12)의 일부분입니다. 아래의 표와 같이, 이 이야기 단락의 전반부(52:13~15)에는 당신의 종이 앞으로 이룰 성공에 대한 하느님의 연설이 배치돼 있고, 그 뒤로 후속부에는 "그"의 고난을 목도하며 하느님의 연설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서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표1> 고난받는 종의 노래(사52:12~53:12)의 화자-대상 구조

 

말하는 이

말해지는 이/대상 

 전반부(52:13~15)

하느님 

"그(주의 종)" 

 후속부(53:1~12)

 "우리"

 고난받는 종의 노래 전체

 이사야 예언자

 "그"에 대한 "우리"의 증언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이와 말해지는 대상의 관계를 보면, 전반부는 하느님이 말하는 이이고 하느님의 종인 "그"가 말해지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후속부에서는 주어가 "우리"로 바뀌면서 말하는 이는 "우리", 말해지는 이는 "그"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후속부의 본문은 하느님의 연설, 즉 하느님의 진리 선포가 아니라, 무고한 "그"가 고난을 받는 현장에 대한 "우리"의 증언이자 그가 우리 대신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대속의 강조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고난과 승리를 ‘예정’했다거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을 보며 고난을 피할 수 있었던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과 연민, 그리고 그것을 성찰하고 증언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때 대속은 내가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자 그리스도 ‘앞에’ 선 장소의 발견을 의미합니다.[각주:2]
세월호 참사에 대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진실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업과 짬짜미나 짜는 관료들,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안전 따위는 상관없다는 선박회사, 열악한 노동환경을 핑계로 승무원들이 내팽개쳐버린 책임의식 등 일반 승객은 알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죽음의 카르텔을 형성해 필연적인 참사를 예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우연히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죽음의 자리를 피할 수 있었을 뿐이며, 그들의 죽음이 언제든 나의 죽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5절) 그리고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움직이면 위험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거짓 명령에 학생들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7절)는 사실은 원칙을 따르는 사람을 배신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사야서의 "우리"와 같이 부조리한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의 자리가 됐을 수도 있는 고난의 자리에 무고한 그들이 있었고, 그들이 희생됐음을 깨닫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겹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나 대신 희생당한 사람이 바로 내 자녀라는 사실은 생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가 아닐지라도 그들을 보며 내 자녀가 언제 죽임의 체제에서 나 대신 희생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희생자의 부모와 같은 심리상태로 몰고 갑니다. 제가 이사야서에서 본 대속의 맥락은 이런 비참하고 잔인한 현실을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 앞에 있는 성서는 우리를 어떤 자리로 안내하고 있는 것일까요?

 

 3.

너는 안다, 말 하나에-
주검 하나                       
(파울 첼란의 시 <밤으로 삐죽거리는> 중)

나치의 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두 줄로 서있습니다. 파울 첼란은 불길한 느낌에 슬쩍 줄을 바꿔섭니다. 그리고 인원을 체크하던 나치 장교는 첼란이 옮겨간 줄에서 한 사람을 지목하고 첼란이 서있던 줄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해서 파울 첼란은 노무자 대열에 포함돼 살아남았고, 첼란 대신 줄을 옮긴 남자는 가스실로 가야 했습니다. 첼란의 시는 줄을 옮기라는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을 주검으로 뒤바꾸는 잔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는 안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게 됩니다. 그는 자기대신 희생된 한 남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그 경험을 잊지 말라고 되뇌었고 그 기억을 나중에 시로 적었던 것일까요? 자신의 시를, 자신의 증언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잔인한 현실이 당신들의 생을 뒷받침하고 있는 토대라는 것을 경고하려 했던 것일까요? 어찌 됐든 그는 짧지만 심장을 찌르는 말을 통해 그가 목격하고 살아냈던 잔인한 과거를 현재화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의 말은 죽임의 체제에 대한 고발이면서 동시에 자기 대신에 희생된 이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검이 된 남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의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한 생명을 그렇게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죽임의 체제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첼란의 증언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절규는 세월호 안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목소리와 처참한 심정, 그리고 공포를 대언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절규는 비통함에 매몰돼 있고, 그래서 갈라지고 떨리는, 질서가 없는 (말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그 소리
들이 우리의 실존의 민낯을 보게 했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우울과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있습니다. 희생자들 앞에 선 우리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삶의 비참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안전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았고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생명을 빚졌습니다.[각주:3] 파울 첼란과 이사야서 속 "우리"의 증언은 이미 '과거'가 된 것을 현재화하는, 살아남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와 생명이 타인의 희생에 기대고 있다는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 역사의 고통스러운 선물이 아닐까요.

이제 애도의 시간이 지나가면, 상대에게 의지해 자유를 얻고 있음을 보고 그것을 시인함으로써, 자신이 타인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부여받게 되는 증언의 책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생명을 빚진 자이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무고한 삶이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 앞에 서있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압니다, 증언해야 할 자의 침묵은 또 다른 죽음을 묵인하게 될 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증언의 책임을 말하기보다는 좀 더 슬퍼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4.4.27.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1587차 예배)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사야서의 '대속' 개념이 '고통받는 이와의 동행'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베른트 야노프스키 지음/김충호 옮김, 『대속』(한국신학연구소, 2005)에서 얻었음을 밝힌다. 대속의 개념사 연구와 충실한 구약성서 본문분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번역이 새로 되기만 한다면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새로운 번역이 나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본문으로]
  3. 물론 체제가 가하는 죽음의 위협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할돼 있지 않다. 때문에 이 글에서 말하는 공감과 증언의 영성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논란이 됐던 정몽준 의원 아들의 트위터 발언을 떠올려보라. 그는 세월호 참사와는 무척 거리가 먼 삶의 조건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이와 같은 이들은 이 글이 말하는 체제가 만드는 죽음의 공포를 공감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집단적 감성의 분할선을 추적해보면 우리 사회의 근본적 적대가 무엇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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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기념비를 세우라
: 차별금지법 논란에 즈음하여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우리말 성서에서 ‘회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콰할’(qahal)은 칠십인역성서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에클레시아’(ecclesia)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에클레시아’는 제2성서(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의 원어다.
한데 「출애굽기」 16,9의 용법에 따르면 ‘콰할’은 모세의 법 앞에 모인 백성을 뜻한다. 이 구절은 형식상 국가 이전 시기 광야의 유랑자들이 야훼가 내린 법을 통해 법공동체가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법공동체는 (떠돌이 사회의 상상이 아니라) 국가형성의 상상이다. 떠돌이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한 사회적 집단이 되었을 때, 이들을 묶어내는 양식이 곧 법의 반포인 것이다. 하여 법의 반포는 그 법이 포괄하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나눈다. 즉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과 관습과 역사를 가진 이들을 일괄하여 법의 일원으로, 곧 법의 ‘안’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하고, 나머지를 ‘밖’으로 배제하여 이방인이 되게 하는 이분화의 형식이 바로 국가에서 법의 효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적 집단이 법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비로소 국가다운 국가가 되었다는 시금석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공동체의 일원인가의 문제다. 즉 법은 누구를 ‘안’으로 포함하는가의 문제가 국가 형성의 핵심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다국의 멸망 이후, 그곳에서 일어난 재건공동체가 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누가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를 살피고자 한다. 여기서 유다 재건공동체는 과거 유다국이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 유배되어 끌려간 자들의 일부가 반세기 이후부터 돌아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귀환자들이 속속 돌아왔다. 바벨로니아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먼 곳에서 오려니 나이든 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혹여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난 이들도 험한 여정에서 쓰러졌다. 하여 기어이 고향 땅 유다로 무사히 돌아온 이들은 대개 청년들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지만 열정은 넘쳐나는 이들이다.
이들은 전에 왕족 혹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의 자손이었다. 해서 그들은 꿈꿨다. 그 땅에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주인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루아침이 유배민으로 전락하여 고생고생하며 살아가는 종의 신세가 아닌, 땅의 주인이 되는 삶, 인생역전의 꿈이다. 
한데 그들이 당도한 꿈의 땅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 채 버려진, 아무도 살지 않는 땅, 불에 탄 잿더미와 무너져버린 벽돌, 무수한 잡초만 가득한 ‘죽은 도시’였다. 그들을 환대해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고국 땅에서 주인이 될 줄 알았던 귀환자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폐허가 된 담벼락을 보수하고 잡초를 치워 가까스로 살 집을 마련했고, 겨우겨우 끼니를 잇는 절박한 생활고에 꿈이 자리잡을 곳은 없었다. 몇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귀향한 사람들, 새 나라에 대한 꿈에 한가득 부풀었던 그들은 번번이 절망하고 말았다.
그중 한 귀환집단이 있었다. 예수아 제사장과 즈루빠벨 총독이 이끄는 귀환자들이다. 이들의 지도자들이 황제가 준 기금을 가지고 와서 그 날이 곧 도래할 거라고 부추겼을 때, 그들과 앞서 귀환했던 이들, 그리고 그 지역의 일부 토착민들은 힘을 내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었다. 성전이 세워지면 야훼가 보살펴줄 것이라고, 하여 영광의 시간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전이 세워졌어도 야훼의 영광은 보이지 않았고, 비루한 현실은 여전했다. 게다가 때만 되면 몰려오는 약탈자들은 성전이 세워진 뒤 더 기승을 부렸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났다. 다시 큰 규모의 귀환자들이 돌아왔다. 지도자는 느헤미야 총독, 페르시아 황제의 관리였다는 자다. 그는 황제가 준 기금과 유배민 공동체에서 수거한 기금, 그리고 귀환민들로부터 징수한 기금을 모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가까스로 성벽이 세워지니 이제 더 이상 약탈자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성벽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곳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멀리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보내온 기부금과 기부물품이 쌓이기 시작했고, 성전 제사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제사장들의 권위는 다른 성소들의 권위를 압도하게 되었다.
식민지가 된 이후 유다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성읍이 되었던 미스바(예루살렘 북족의 13킬로의 성읍)도 예루살렘에 밀리게 되었고, 남쪽으로 30킬로 떨어진 성읍 벧수르도 예루살렘에 복속되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이제 영토다운 영토를 다스리는 총독이 되었다. 그 주(州)의 이름은 ‘예후드’였다.
예후드 주에서 느헤미야 총독은 강력한 분리주의 정책을 취했다. 식민지 이후 이 지역은 한동안 사마리아에 복속된 하위의 정치단위였었다. 또 사마리아 못지않은 강력한 정치세력이던 암몬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분리주의 정책을 통해 사마리아와 암몬으로부터 실제적으로 독립된 자치구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에스라 제사장이 황제의 재가를 받아 이곳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예후드 주의 백성을 결속시키는 법을 반포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법은 ‘성전에 계신 야훼께서 주신 율법’이라는 것이다. 이제 느헤미야의 분리주의는 하느님의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최초로 백성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전 제사도 비슷한 통합의 기능을 하지만, 그것은 제사 드리는 그 순간에야 효력을 미친다. 한데 예후다 영토가 넓어지자 모든 이가 제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된 데다, 제사는 연중 불과 몇 회만 시행될 뿐이다.
반면 율법은 성전까지 오지 않아도 백성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의식에 매어 있게 할 수 있다. 마을마다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하는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이 예배와 교육은 매 안식일마다 시행되었다. 법은 이렇게 제사보다도 예후다의 백성을 더 촘촘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안식일마다 마을에서 천명되는 율법에서 핵심은 ‘누가 예루살렘 성전공동체 예후다의 백성인가’라는 문제에 있다. 이때 에스라의 율법은 백성이 아닌 이를 규정함으로써 백성인 이들을 포용하는 형식을 지녔다.
누가 법의 백성이 아닌가 하면, 첫째로 이방인이 그렇다. 심지어는 이방인과 결혼하는 이도, 그이들의 자제들도 이방인이다. 강력한 배타주의다. 이방인과 결혼 중인 이들까지 강제로 이혼시키고 한 편을 국외로 추방하는 조치가 내려질 정도로 고강도의 폐쇄주의다.
둘째는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고자’는 배제의 대상이다. 왜 하필 ‘고자’라고 표현했을까? 추측컨대 ‘생산을 할 수 없는 성(性)’이라는 점이 고자 속에 담긴 핵심 논지였을 듯싶다. 왜냐면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가 혼혈의 위험으로부터 피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것이라면, 고자 배제의 원리는 깨끗한 피의 백성이 번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자 배제’ 원리 속에 함축된 것은 ‘생산하는 성’만이 진정한 ‘법의 내부’라는 주장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생산 없는 성’을 왜 하필 ‘고자’라고 했을까? 아마도 남성 중심사회에서 불임 여성을 거론하는 것보다는 불임의 남성을 얘기하기 위해, 불임 남성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자’가 배제의 대표집단으로 거명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느헤미야-에스라 식의 이러한 분리주의와 순혈주의는 유대주의적 성전공동체를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했고, 하나의 사회적, 종족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주체화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데 문제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 체제는 누군가를 강하게 차별하는 배제주의적 사회를 만들어냈다. 하여 이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이웃 족속과 결혼했던 이들을 강제로 갈라놓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제도화했다. 결국 소수자에 대한 배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그 사회는 성립했던 것이다.
이제 오늘 우리 시대 얘기를 해보자. 최근 다시 차별금지법안이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상정되었다. 북한 미사일 사태에 시민사회가 정신이 온통 쏠려 있는 중에 이 차별금지법 문제는 개신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있다. 기독교계 매체들 가운데 몇 개 빼고는 거의 전부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일방적 비난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해서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 표출된 여론은 반대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해묵은 물음이 제기된다. 왜 개신교계는 그토록 차별금지법 반대에 열을 올리는가? 말할 것도 없이 반대의 핵심은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 문제에 있다. 수많은 반대 주장에 들어 있는 공통된 불만은, 이 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죄라고 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니 이게 가당한가라는 주장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인 이들은 반성서적이고 반자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서적이라 함은 성서가 동성애자를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반자연적이라 함은 생식 없는 성은 부자연스런 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억지다. 성서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텍스트가 단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그 텍스트가 동성애와 무관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 또한 있으므로 그것으로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은 자명하자 않다. 설사 반대한다는 해석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서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니, 불과 몇 개 텍스트에 불과한 것을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가령 성서가 월경하는 여자를 불경하다고 하고, 그 기간에 그녀가 눕는 자리, 앉았던 자리에 닿는 것까지도 주변의 모든 사람을 부정타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교회도, 어느 목사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또 고기를 먹을 때 피까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반복하는 교회는 없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선 주일 점심 식사로 선지국이 나오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같은 몇 개 요소만은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성서 문구조차도 동성애 반대 논지가 불명확하니, 억지 부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반자연적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자연적이라는 것을 다수자의 선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단지 다수자에 속하는 이들이 낯설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종종 다수자의 폭력으로 드러나곤 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소수자든 다수자든 그 선택이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차별금지법은 인권법이다. 인권법은 소수자라 하여 차별받지 않는 권리에 관한 법이다. 소수자든 다수자든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한, 그 선택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한데 소수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낀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소수자들은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그런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바로 차별금지법인 것이다.
하여 차별금지법 같은 인권법은 다수의 동의를 요하기보다는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인권 개념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법제화되는 것이다. 즉 차별금지법은 그 사회가 국제적 인권의 관점에서 얼마나 성숙한 인격을 갖추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 논란은, 우리 사회가 누구를 법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격조 있는 사회가 될 것인가 아닌가의 기로에 선 논란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은 한국사회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국제적 인격을 결여한 사회가 되게 하려는 일에 앞장섰다.
다시 성서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사야서」 56,4~7는 느헤미야-에스라가 주장하는 법공동체의 폐쇄적 개념에 대항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

주장인즉슨, 이방인이나 고자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은 안 된다는 얘기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 사회의 질서를 반하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과 성소수자는 그 사회로부터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구절은 당시 예후다 지역의 지배적 법률인 에스라의 법의 배제주의에 대항해서 제기된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인 셈이다.
이 성서 구절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성벽 안에서(곧 야훼의 법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는 표현이 주목된다. 누가 우리 사회, 우리의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에서 차별당하는 소수자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 야훼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활에 관해 상상해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부활은 몸이 난도질당한채 죽임당한 이들이 그 마지막 때에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어 일어서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몸의 부활 모티브는 그 살해당한 이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활은 몸의 복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하여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그들, 곧 소수자이기에 차별받았던 이들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차별당하고 죽임당한 소수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벌인다. 그것이 바울 사역의 핵심이기도 하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의 바울식 실천인 셈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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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31 22: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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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감합니다^^ 멋지십니다 ㅎㅎ
  2. 참된 목자를 찾으며
    2013.06.05 06: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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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 목사님 맞나요??
    성서적으로 동성애가 죄라고 딱 집어 얘기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법이란 불법한 자.. 죄인.. 을 위해 있다 하고 '아비를 치는 자.. 살인한 자..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라고 해서 동성애를 죄라 하고 있거든요.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가 동성애자를 죄인 취급하거나 혐오한다는 뜻이 아니라 글 쓰신 분이 성경을 들먹이시기에 나도 인용을 해본 것 뿐이구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로서 어려움을 겪다가 빠져나와 참된 행복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을 알기에 다른 동성애자분들도 이들과 같이 되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것도 행복의 기준에 대한 차별로 느껴진다면 죄송하구요.
    본론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전공도 정확히 모르는 분이 '법'에 대해서는 알고나 계실까 싶고 이렇게 분석과 해석력이 부족하신 분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제대로 이해는 하신 걸까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정죄하고 차별-배척하자는게 아니라 '동성애 합법'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문제점 그리고 '차별금지법'에 따른 역차별과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는 것.
    즉 '사람'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법'의 부실에 대한 반대인데, 마치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국제적 품격에 못 미치는 사람인 양 표현하신 것이 목사님으로서의 품격과 자질에 의심이 가네요..
  3. 위의 분
    2013.06.19 00: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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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같은 몇 개 요소만은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성서 문구조차도 동성애 반대 논지가 불명확하니, 억지 부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라고 본문이 말하는 게 뭔 말인지 모르시나 보군요.

    법의 부실을 논하기 전에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편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성찰의 능력부터 키워 보시길 권합니다.

독재의 내재화, 그 순박한 열정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40년쯤 전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으로 유다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각주:1]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중모반까지 일어났다.[각주:2] 영토는 예루살렘과 그 남쪽 일부만 남았고, 국론은 분열될 대로 분열된 상황이었다. 그때 아하스 왕은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결정을 내린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이다. 도성 남서쪽의 힌놈의 아들 골짜기 도벳의 성소에서 아들을 불태우는 제사를 지낸 것이다.

"Ahaz the King of Judah" by Otto Elliger (18c 초) 아하스 왕은 재물로 불타고 있는 아들을 보며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시리아 제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쳐들어와 다마스커스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국도 재기불능의 상황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유다국 백성에게 아하스의 피눈물 흘리는 제사를 야훼께서 들어준 사건으로 기억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제 유다국은 전례 없는 초고속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아시리아의 침공을 당한 나라들로부터 대거 유민들이 남하한 결과, 산지인데다 척박하여 인구가 적었던 유다국 영토에 새로운 마을들이 속속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새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백 개의 주거지가 발굴되었고, 도성인 예루살렘의 크기도 15배 이상 늘어났으며, 도성의 인구도 그만큼 증가했다. 하여 이들이 바친 공납물로 왕실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고, 유다국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무력화된 블레셋 영토였던 서부 평야지대로 영토가 확장되어 식량생산이 비약적으로 불어났고, 소읍이던 라기스 성은 예루살렘에 필적하는 도시로 발돋음했다. 또 산악지대에서 생산된 올리브를 압착시켜 추출한 기름을 이집트와 아시리아로 수출하는 등 국제무역도 크게 증대하였다. 이제 유다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팔레스티나의 신흥 강대국 반열에 진입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아하스를 칭송했다. 아하스는 유다국의 진정한 군주로 떠받들어졌고, 아하스적 신앙은 많은 이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각주:3]
한데 아하스 시대의 국가의 번영은 동시에 사회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대규모 땅을 소유한 부자들이 등장했고, 땅을 상실한 몰락농민들 또한 속출했다. 조정에는 이들 부자들의 대표들이 관료로 들어와 대지주들의 농민들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를 두둔하는 정치를 폈고,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국가의 성공 정책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백성들은 아하스를 칭송했던 것이다. 대지주들 또한 왕을 열렬히 환호했다. 대도시의 시민들과 시골 농민 대다수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지역의 성소들이 대지주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성소들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대지주들이 낸 기부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들 지주들이 낸 제물 덕에 제사도 드릴 수 있었다. 지역의 성소들은 얼마나 화려하고 풍성한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느냐에 따라 위상이 결정되었고 인근의 작은 마을들의 성소를 복속시키는 유력 성소가 될 수 있었기에 대지주들의 기부능력에 점점 의존적이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성소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위계질서도 만들어졌다.
또한 성소에서 드린 풍성한 제물은 그 지역에 대한 신의 돌봄의 정도를 결정짓는다고 믿어졌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행운이 대지주들의 기부 덕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는 그런 식으로 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들과 사제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채 10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 유다사회는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고, 사회 전 영역에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대지주들로 구성된 기득권 집단의 보수주의적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강자 독식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것은 그 체제가 백성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히스기야 왕이 아하스를 승계했다. 그런데 새 왕은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으로까지 성장한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면서 왕실 중심적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것은 기득권세력과 연동하여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선왕의 정책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 개혁의 기반은 선왕이 구축한 풍요한 왕실재정이었다.[각주:4]
히스기야의 개혁은 농민들의 몰락을 막는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야 왕실을 좌지우지하는 대지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왕실의 개혁이 친 서민정책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을 백성은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중앙의 메시지가 백성에게 전달되는 주된 통로는 지역 성소들인데, 이곳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그것이 야훼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도했다.[각주:5]
하여 히스기야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백성을 왕실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암하아레츠’, 즉 민중적 농민정치세력이 개혁세력에 가담했다.[각주:6] 그리고 조정에도 귀족출신임에도 개혁을 지지하는 신주류 인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골의 대다수 농민들은 여전히 아하스와 그 시절 형성된 구 지배엘리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해서 왕실의 개혁은 지역 성소들을 철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이것이 히스기야-요시아 개혁이 지역 성소들을 철거하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던 주된 이유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29년간의 재위기간 중 후반기는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개혁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된 시기였다. 서부 평야지대는 인구가 70%나 줄었고 마을 수는 85%나 사라지고 말았다. 하여 왕실재정은 고갈됐고 그 와중에도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무려 55년간이나 재위에 있었던[각주:7] 왕 므낫세가 즉위한다. 그리고 이 왕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히스기야의 개혁 흔적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이때 므낫세의 정치는 아하스의 방식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대지주 중심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자식들은 땔감을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고, 어머니들은 ‘하늘 여신’에게 줄 빵을 만들려고 가루로 반죽을 하고 있다. 또 그들은 나의 노를 격동시키려고,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어 바친다. ―「이사야서」 7,18 (작은 따음표는 인용자가 붙인 것임)

이 구절은 므낫세 시대의 강도 높은 반개혁 현상에 관한 하나의 유의미한 특징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 평민 가족이 벌이는 가족 제사 장면이 스케치되어 있다. 본문에서 ‘하늘 여신’이란 아스다롯(Ashtaroth)을 말한다. 금성의 신으로 이 시기에 아세라(Asherah)를 대신해서 야훼 신의 부인으로 신앙되던 여신이다. 원래 이 여신은 아시리아의 폭풍우의 신 아닷(Adad)의 부인이다. 즉 아시리아가 지배하던 므낫세 치하의 유다국에서 아닷 신과 야훼가 동일시되면서 아스다롯 여신이 야훼 신의 부인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 아닷의 별칭이 멜렉이다. 이하스가 아들을 바친 바로 그 신의 이름말이다.[각주:8] 즉 아하스를 칭송한 백성의 신앙이 므낫세의 반개혁의 기틀이었다는 얘기다.

므낫세는 부왕 히스기야의 개혁 세력을 말살하고자 했다.


묘하게도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독일의 저 유명한 <슈피겔>지(Der Spiegel)는 이번 대선을 “독재자의 딸이 인권운동가를 이기다”(Diktatoren-Tochter schlägt Menschenrechtler)라는 카피로 소개하였다. 이런 결과의 이면에는 지배연합을 지지한 무수한 대중이 있었다. 더구나 그 독재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서 압도적인 지지가 나왔다. 또한 지난 MB 정부를 거치면서 기득권세력에게 바닥까지 털려버린 서민층에게서도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렇다면 대중은 독재를 갈망하는 것일까? 확신컨대 그렇다고 대답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독재자의 딸도 독재자가 아닐지 모른다. 또한 나의 소견으로는 그녀가 독재자가 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사회적 여건으로는 독재정부가 등장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강력한 기득권 세력인 거대자본들조차 독재정부가 자신들의 이해에 유리하지 않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정치화된 강력한 군부세력도 없다.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메이저 보수언론들이나 법률권력, 그리고 보수지식인들도 통제받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면 <슈피겔>의 카피는 단지 과거사를 들먹이는 야유에 불과한 것일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독재정부는 불가능할지라도 이번 선거는 대중의 독재정치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을 가득 품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거 직후 도처에서 보복이 횡행한다. 한진중공업의 자살한 해고노동자도 그런 보복의 희생자였다. 또 다시 징계를 당한 복직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MBC 노조원들에 대한 무더기 징계도 그렇다. 무수한 영역에서 힘을 남용하는 법률적 혹은 탈법적 폭력들이 속출하고 있다. 일인치하의 독재자는 없지만 무수한 독재자들이 법률적 혹은 탈법적 힘을 남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문제로 보았던 민주주의적이고 인권적인 감수성이 퇴조된 현상이 시민사회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하스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반개혁적 폭력의 체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발전국가 한국을 이룩한 독재자에 대한 대중의 갈망도 민주화 이후 겨우겨우 세워가던 인권의 질서를 곳곳에서 산산이 부수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대중은 독재의 영성에 취해 버렸다. 독재자가 보여주었던 힘에 대한 그 순박한 열정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기원전 735~734년 경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은 다마스커스를 거점으로 하여 르신 대왕이 다스리던 아람국이었다. 르신(Rezin)은 이스라엘의 베가(Pekah) 왕과 더불어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을 막는 시리아-팔레스티나 군사동맹을 주도했다. 한데 이 동맹에 동참하지 않는 소국들 중 아하스(Ahaz) 치하의 유다국이 있었다. 이에 르신-베가 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유다국을 침공하였다. 이 연합군은 유다국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으나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철군하였다(기원전 734~732). 본문에서 “40년 전”이라는 표현의 시점은 히스기야 왕이 죽고 므낫세 왕이 반개혁 정책을 펴는 어느 시기를 가리킨다. 즉 이 시점은 반개혁의 시간을 상징한다. 그 시점에서 40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사야서」 7,6에 따르면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궁중모반 사건이 시사되고 있다. [본문으로]
  3. 히스기야-요시아 정부가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몰아치는 담론을 적극적으로 유포시킨 것은 아하스 왕의 지지세력을 견제하려는 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를 연상하고 있다. 아하스와 박정희, 이 두 인물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인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장본인이다. 동시에 이 둘은 그 성공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했던, 아니 적극적으로 그 희생을 활용했던 통치자였다. 그럼에도 백성/국민은 그이들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본문으로]
  4. 현대의 많은 국가들의 민주화를 연구한, 폴란드 출신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의 가설에 따르면, 사회의 경제적 성장은 그 사회를 민주화로 이행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다. 그 경우 전(前) 민주주의적 체제가 축적해 놓은 경제적 기반은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비용으로 활용된다. 한데 흥미롭게도 고대국가인 히스기야의 민중주의적 개혁도 아하스의 귀족주의적 국가가 이룩한 재원을 기반으로 해서 실행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마치 우리사회에서 주류 언론들이 복지가 국가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문으로]
  6. 고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사용된 ‘암하아레츠’에 대한 용례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농민 일반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농경사회가 지역의 대지주에게 예속되어 있으니 이들을 지방토호세력으로 해석했던 종례의 관점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열왕기」에 몇 차례 등장하는 이 용어는 위의 농민 일반을 지칭한다는 용례 해석과는 다르다. 이들은 유다국의 정변 상황에서 등장하며 특히 요시아 개혁의 중심세력의 하나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열왕기」의 암하아레츠는 정치화된 농민개혁세력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7. 유다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국, 그리고 오랜 식민지를 거친 뒤 수백 년 만에 건국한 하스모니아 왕국이나 헤롯 왕국에도 이렇게 긴 시간을 왕으로 재임한 이는 없었다. [본문으로]
  8. “그는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the Valley of Ben Hinnom)에 있는 도벳(Tophet)을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어떤 사람도 거기에서 자녀들을 몰렉에게 불태워 바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그는, 유다의 왕들이 주님의 성전 어귀, 곧 나단멜렉 내시의 집 옆에 있는, 태양신을 섬기려고 하여 만든 말의 동상을 헐어 버리고, 태양수레도 불태워 버렸다.”(「열왕기하」 23,10~11) 이 구절에서 요시아 왕은 아하스의 제사를 바벨로니아 지역에서 유래였고 암몬의 주신(主神)이기도 한 불의 신 ‘몰렉’ 제사로 해석하면서 우상숭배로 규정한다. 한데 그 다음 구절에서 이것을 ‘나단멜렉’(Nathan-melech)이라는 인물과 연계시키고 있다. ‘멜렉’은 「열왕기하」 17,31에 나오는, 불에 태운 인신재물을 받는 스발와임(Sepharvaim, 아시리아의 지명)의 신 아드람멜렉(Adram-melech)과 관련된 구절로 보인다. 즉 나단멜렉은 아시리아의 아드람멜렉 신과 관련이 있는 아시리아의 내시인 것이다. 여기서 아드람은 아닷 신(Adat)을 가리킨다. 즉 멜렉은 이 시기에 아닷을 가리키는 호칭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요시아 왕실은 이 구절을 통해 말렉을 몰렉(Molech)과 동일시하면서 말렉에 대한 모독을 꾀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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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2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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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굿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의인이 망해도 그것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도 그 뜻을 깨닫는 자가 없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 「이사야서」 57,1

 

제국의 경제가, 그 시스템이 온 이스라엘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황제가 재가한 국제적 거상(巨商)들이 이 지역에도 들어왔고, 대지주들은 그와 거래하기 위해 생산물의 가격 낮추기 경쟁에 매진했습니다. 일단 그와 거래관계가 트이게 되면 국제무역의 지역 독점권을 얻게 되었지요. 또한 세금대납업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그러다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지주들이 몰락하는 경우도 빈번했고, 무엇보다도 소농들의 몰락이 속출했습니다. 몰락한 소농들은 대지주의 소작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몰려들어 생존을 위해 뭐든 해야 하는 하급노동자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또 일부는, 그 땅에서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었기에, 막막한 심정으로 해외 이민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여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 것입니다.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에서 말입니다.

한편 이 시기, 국제경제의 활성화로 인한 다른 변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래장부, 거래계약서, 물품관리장부 등, 기록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상거래가 활발해지는 만큼 분쟁도 많아져 소송의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이것 역시 기록의 중요성을 강화시키는 이유가 되었지요. 이에 이집트산 파피루스가 대량 수입되어, 기록을 위한 비용은 크게 감소하게 됩니다. 또 당국은 세수(稅收)가 늘면서, 통치를 위한 기록의 필요도 높아졌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당국이 주도하는 종교의문서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이른바 ‘성서’ 문서들이 편찬되거나 저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작된 성서 문서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책들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오늘 읽은 성서본문이 포함된 한 문서입니다. 현대의 학자들이 ‘제3이사야서’라고 부르는 문서입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파트(56~66장)에 수록되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시기의 문서 작업이 전례 없이 활기를 띠게 되었지만, 그래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제3이사야서’라는 저자미상의 이 문서는 하층민의 관점을 담고 있는 책인데다, 그 기조 또한 민중적이기에 우리는 이 책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이 포함된 텍스트인 57장 1~13절은 당시의 민중 현실과 저항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합니다.

‘의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데 그 죽음을 사람들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1절). 도대체 ‘의인들’이란 누구일까요? 또 왜 그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그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5~9절에서 우리는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람을 피우는 자이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자입니다. 여기서 바람을 피우는 것은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인신제사를 말합니다. 원래 아하스 왕이 시리아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침공하여 국가가 존폐 위기에 놓였을 때, 자기 아들을 야훼께 바치는 제사를 말하는데(「열왕기하」 16,3. 기원전 734~732년), 한 세기 쯤 후인 요시아 왕이 개혁 드라이브를 본격화하던 때(기원전 622년경)에 이 인신제사는 요단강 건너 지역 암몬족의 신인 몰렉에 대한 제사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하스로 표상되는 불의한 통치자가 바로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자로 지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데 기원전 3세기, 제3이사야서의 시기에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 시절 이스라엘 사회를 다스리던 유력한 가문이 있었는데 토비야 집안입니다. 한데 이 사람은 암몬족 토호였고, 제국 왕제로부터 이 지역의 총독으로 위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필경 토비야 집안이 죽음의 방관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죽어가는 의인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9~12절에서 우리는 바로 그 정보를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의 방조자들은 “섬길 신들을 찾아 먼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9절)고 합니다. 아하스 왕은 르신-베가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멀리 아시리아 황제에게 원병을 요청했었지요. 한데 이 애기를 전하고 있는 제3이사야서의 시대에 아시리아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시기에 아시리아 황제에 대응하는 이는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황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 오는 아시라아 황제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오스 황제의 대리인, 곧 황제가 재가한 거상의 거대한 행렬과 비견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거상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 대지주들의 후견인, 곧 그들의 구원자입니다. 한데 바로 이런 네트워크가 대변하는 제국의 경제 시스템은 소농의 몰락을 초래했고, 소작농의 심화된 혹독한 노동 현상을 야기했습니다. 요컨대 제국의 거상이 대변하는 질서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에게는 구원을 의미했지만, 민중에게는 고통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1절의 본문을 주목해 봅시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민중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들이 죽는 것은 도리어 재앙 피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요컨대 이 텍스트에는 제국의 경제 질서가 민중의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예언자의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한데 그 제국적 체제를 불러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토비아 가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입니다. 그들이 제국의 경제 질서를 불러들임으로써 자기들의 권력과 돈을 쌓아가고 있을 때 민중은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만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선 정국이 이제 막바지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맘 땐 네거티브 전략이 불꽃을 일으킵니다. 그러는 중에 박근혜 씨가 연루된 스캔들이 여러 개 폭로되었는데, ‘억대 굿판’ 스캔들도 그 하나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1월 14일, 사단법인 박정희 생가보존회가 구미의 박정희 생가에서 탄신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행사에는 경북도지사, 구미시장, 지역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들 주요 인사들이 한마디씩 소원과 축하의 발언을 했습니다. 굿판이니 그 말들 속에 박정희 신격화 발언이 포함되었음은 충분히 예측할 만 합니다. 또 대선이 임박했으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하는 말이 들어있으리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요. 물론 모두 의전용 발언입니다.

한데 굿을 했다느니 신격화 발언이 있었다느니 하는 건, 근본주의 성향의 유통성 없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민감한 사안일 것입니다. 해서 새누리당은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최초 유포자를 고발하고, 네거티브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때 박근혜의 표정이 얼마나 살기등등한지 그이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지요.

이 스캔들을 둘러싼 공방이야 두 정당과 열혈 지지자들이 할 일일 테고, 나는 이에 대해 좀 다른 점에서 유감을 표하고자 합니다. 나의 관심은 이 굿에 참여한 대중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년 박정희를 기리면서 제단 앞에 세워진 사진을 향해 절을 하고 소원을 빕니다. 그들은 필경 세상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면서 얼굴에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상받을 만한 역량이 그들에겐 없습니다. 해서 종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당, 사찰 등에서도 그들의 상처는 좀처럼 보듬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종교들이 지배층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들은 굿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상처는 상하로 권력이 나뉜 사회의 아랫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일반적인 상처이겠지요. 특히 한국 근대의 폭력성이 주된 원인이 된 상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혹독한 현실이 가장 깊은 상처의 흔적을 새겨놓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굿판을 찾아왔습니다. 한데 그 굿에서 신격화된 이의 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국제조약인 한․미 FTA를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굿은 자신들에게는 구원을 선사하는 굿일 테지만, 민중에게는 죽음의 굿, 그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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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이후 선교는 가능한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가련하고 빈궁한 사람들이 물을 찾지 못하여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탈 때에, 나 주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 「이사야서」 41장 17절


지난 3월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 사고로 1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20년 동안 방사능오염으로 사망한 20만 명의 다섯 배나 되는 수치입니다. 그 방사능 유출의 양은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방사능보다 무려 168배나 되는 양이라고 합니다. 체르노빌 사고의 13배나 된다고 합니다. 

이 무시무시한 재앙은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시사하는 하나의 전조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전쟁이나 테러 같은 재앙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파괴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사고’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피해는 대규모 전쟁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욱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여 2011년 3월 11일 이후 후쿠시마는 ‘문명발전의 의도하지 않은 파괴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후쿠시마 이후’는 인류의 발전지상주의적 문명에 대한 성찰의 절대적 요청에 직면한 시간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후쿠시마 이후’에 대하여 더 이야기할 게 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반핵 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지금은 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날 때까지 원전의 치명적인 위험에 대하여 거의 알지도, 문제로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사고가 나고서야 히로세 다카시가 말한 것과 같은 정보가 비공개되고 있다는 걸 문제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보의 독점이 시민사회가 위험을 감지할 기회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원전은 하나의 신화처럼 일본 시민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관리국가이고, 따라서 원전은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에너지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원전으로 말미암아 일본 같은 초일류국가의 발전은 담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모한 확신은 정부와 기술엘리트에 의해 독점된 정보로 말미암아 시민사회가 원전의 위기에 대해 무지함으로써 지탱된 것이었음이 사고 이후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여 시민사회는 국가와 기술엘리트가 충동질하는 발전지상주의 체제에 자신의 욕망을 함께 실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회의 종말이 ‘후쿠시마 이후’가 시사하는 성찰의 내용인 것입니다.

한데 한국사회 또한 이점에서 일본사회와 쌍생아적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국의 전두환 정부는 미국과 신규원전 건설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계약은 그 해에 있었던 전 세계의 유일한 원전 수주계약이었습니다. 또 올해 3월 후쿠시마 사건이 발발할 즈음, 대통령 이명박은 아랍에미레이트와 맺은 원전 수출 기공식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원전은 발전을 상징했고, 실제로 한국사회가 이룩한 성공은 원전이 제공한 전기 능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원전 의존적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시민들도 일본의 시민만큼이나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원전에 관한 정보는 국가와 기술엘리트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회는 공히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입니다. 국가의 복지 시스템보다는 국가적 발전주의가 시민이 상상하는 유토피아의 밑그림을 이루는 사회인 것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지구를 휩쓸었던 1990년대에 이르면 세계의 거의 모든 사회가 이러한 발전지상주의의 제도화를 추구하지만, 특히 일본과 한국은 신자유주의 이전부터도 그런 지향성의 사회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발전 지상주의는 국가와 기술엘리트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화되었습니다. 기술엘리트는 이른바 과학적 맹신주의를 퍼뜨리는 주역이었고, 국가는 이러한 기술엘리트의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안전의 신화를 성공주의와 결합시켜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하여 시민은 발전주의를 뒷받침하는 기술문명의 요소들을 경유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키워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의 신화가 후쿠시마로 인해 여지없이 붕괴된 것입니다. 

한데 저는 ‘후쿠시마 이후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특히 한국사회에 관하여 제기한 논점입니다. 왜냐면 알다시피 발전 지상주의에 있어 한국사회와 교회는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한국사회의 고도성장과 교회의 고도성장은 시기와 양상을 같이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의 성장지체와 교회의 선교 위기도 서로 겹쳐 있습니다. 요컨대 발전지상주의의 제도화에 있어 한국사회와 교회는 서로 엮여 있습니다. 이것은 발전지상주의를 극복하려는 모든 개혁적 시도에 발목잡고 있는 주된 사회적 세력의 하나가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확실히 우리사회에서 교회는 성공에 미친 사회를 추동하는 역사적 세력임에 분명합니다.

최근 정부와 서울시가 ‘부채 의존형 사회’의 위기에 빠져버린 것도 발전지상주의 정책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정부와 서울시의 발전지상주의 정책은 과도한 토건주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부동산 거품으로 만들어진 발전/성공의 신화를 공모하는 사회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체제가 위기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 나락으로 먼저 떨어진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고, 점차로 전 국민이 함께 내던져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제를 충동질했던 이들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떨어지겠지요.

아무튼 이러한 토건주의적 발전지상주의에 교회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는 뻥튀기된 욕망을 교회건축을 통해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그런데 과도한 교회건축은 전 교인을 이 과도한 교회건축에 총동원해야만 가능한 사업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신앙은 끊임없이 발전지상주의를 정당화하면서 제도화됩니다. 즉 한국교회의 신앙체계는 발전지상주의를 체현한 신자들을 양산합니다. 즉, 발전지상주의에 익숙한 신자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발전지상주의에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시민-성도, 발전지상주의를 욕망함으로써 신앙과 세속의 성공을 함께 누리는 자들을 양산하는 장치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여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가장 발전지상주의에 열렬한 광신자들의 온상입니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찾아오고, 또 교인이 되는 과정은 그런 이들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교회담론 속의 권력의 구조도 한몫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담론에서 하느님과 성도는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성도를 구원하고 축복하는 신은 성도에게 그러한 구원의 말을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중계자들을 통해 합니다. 그것은 그 중계자들이 신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것은 국가와 기술엘리트가 정보를 독점하고, 이러한 정보 망각상태에서 이뤄지는 시민의 거품 욕망의 체계가 한국과 전 세계의 발전지상주의의 담론 구조인 것과 유사한 형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지상주의는 엄청난 재앙을 낳았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계기적 사건이었습니다. 하여 우리 시대에 시민의 성찰은 ‘후쿠시마 이후’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성찰을 가로막는 주요 장소인 것입니다. 하여 교회는 오늘날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인습, 낡은 욕구의 체계가 잔존하는 장소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교회는 선교 대신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성장지상주의의 키워드가 들어 있는 모든 제도적 장치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체하며 후쿠시마 이후를 성찰한 새로운 모색들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첫걸음은 성장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작은 교회’의 추구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사회 속의 작고 빈궁한 자의 축복을 위한 신앙과 교회의 모색에 있다고 봅니다. 후쿠시마 이후의 선교가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텍스트는 그러한 신앙의 한 전거입니다. 발전지상주의를 추구했던 다윗왕조의 신학은 국가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다윗왕조만이 신의 축복을 백성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국가신학이 낳은 재앙입니다. 한데 식민지 시대 유배지에서 과거 다윗왕조의 신학을 위해 성전에서 일했던 일단의 사제와 하급성직자들이 새로운 개혁의 구호를 외칩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 텍스트에 담겨 있습니다. 신은 다윗계 왕의 기도에 응답하는 이가 아니라, 가련하고 빈궁한 이들의 신음 소리에 응답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의 시대에 개혁은 바로 이와 같이 국가의 성공을 추구하는 신학이 아니라 작은 자들의 고통에서 시작하는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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