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우리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세월호 얘기, 혹시 지겨우십니까? 지겹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도 ‘왜?’라는 질문은 넘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9월 24일)이 벌써 162일째인데도 말이지요. 지겨워도 직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세월호 사고 당일로 돌아가봅니다…” _손석희, JTBC 뉴스 2014년 9월 24일 오프닝 멘트 중


안티고네를 소환하며


    오늘은 위의 손석희 멘트가 있었던 날로부터도 2년 반 가까이 흐른 날이고, 이제 2주후면 우리는 세월호 3주기를 맞는다. 문득 지난 3년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믿기지 않았던 세월호 침몰과 더 믿기지 않았던 구조과정들, 구원파를 끌어들여 사건 초기에 문제의 핵심을 호도했던 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끓는 절규와 대통령의 눈물. 유민 아빠 김영호 씨의 목숨을 건 단식, 인상 깊었던 교황의 방한,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었다는 뉴스, 서울서 팽목항까지 세월호 인양을 위한 도보 행진,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유가족들의 삼보일배, 무의미했던 세월호 청문회, 대통령의 사라진 세월호 7시간, 대통령 탄핵 가결과 인용, 그리고 지난주에 있었던 세월호 인양 소식까지, 이상은 지난 3년간 세월호와 관련하여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굵직한 제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3년이 지나도록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조차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나지지 않았을 때 어느 문인(文人)은“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한 슬픔은 합당한 이유 없이 눈물을 그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각주:2]글을 쓰겠노라고 밝혔다. 그이의 다짐을 접하고 윤리학자로서 떠올랐던 단어가 진실과 애도다. 윤리는 진실의 윤리학이어야 하고, 윤리는 또한 애도의 윤리학이어야 맞다.

   졸고는 안티고네의 애도를 향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윤리에 대한 글이고, 그 윤리가 어떻게 현실의 불합리한 질서를 전복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상상이다. 안티고네의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애도는 진실을 향한 투쟁이었고, 그녀의 행보는 시스템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했던 전통적인 윤리학의 지형에 대혼란을 초래하였다. 나는 안티고네의 파국을 지향하는 윤리가 어쩌면 뒤틀리고 왜곡되고 변태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21세기 시민들이 지녀야할 윤리적 모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넘긴다.


애도의 원형


   맑스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는《소설의 이론》에서 고대 그리스를‘서사시 시대-비극의 시대-철학의 시대’로 구분하였다.‘서사시 시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대표적인 작품이고, ‘비극의 시대’ 하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루카치는 고대 그리스가 ‘서사시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섞여 있었던 시대였고, ‘비극의 시대’는 이성과 감성의 분화가 일어났던 시절, 그리고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감성과 욕망의 영역이 배제되면서 이성우월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밝힌다.

    애도에 대한 고전적인 판본은 고대 그리스 ‘서사시 시대’의 걸작 〈일리아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헥토르에 대한 애도의 장면과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이야기〉에 등장하는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이다. 〈일리아스〉는 기원전 12-13세기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브레드피트가 나왔던 영화 〈트로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일리아스〉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의 시신을 유린하는 장면이 나온다. 헥토르의 아버지가 밤에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내어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헥토르의 시신이 트로이로 옮겨져서 그동안 치르지 못했던 애도의 의식을 벌이는 것을 끝으로 〈일리아스〉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일리아스〉 속 헥토르에 대한 애도보다 더 복잡하고 진화된 애도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한다.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국가(테베市)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는 안티고네와 반역자(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응징의 차원에서 애도를 허락지 않는 테베왕 크레온 사이 갈등이 이 비극의 줄거리다.

    폴리네이케스는 테베國의 입장에서 볼 때 역적이다. 국가에 반기를 든 자들에 대한 역사의 형벌은 어느 민족이건 대체로 일치했다. 공동체 성원들 앞에서 공개적이고 잔인한 사형이 집행되고, 그 주검을 마을 어귀에 대롱대롱 매달아 공포의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거나, 혹은 그냥 시체를 들판에 내동댕이쳐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함으로써 반역자와 공동체 간의 거친 수직적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듯,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끼친 인물에 대한 응징과 처벌은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동체 성원들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당연한 처사다. 이 지점에서부터 안티고네의 문제의식은 시작된다.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사건은 안티고네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현실의 원칙,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현행법을 어기면서까지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되찾아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운영원리인 쾌락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현실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장례를 치르고, 고이 안장되어야 한다는 생명의 원칙, 진실의 원칙에 무게를 두었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내 기억에는 안티고네만큼 ‘쾌락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오현우다. 1970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외딴 마을에서 3개월 남짓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선다.


<오래된 정원> 중에서


    서울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비 내리는 시골길에서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왜 가니?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 왜 가는 거야? 그곳에 뭐가 있길래… 이 바보야!” 오현우는 한윤희의 이 질문에 아무런 말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안다. 그가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오현우는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까지 제공되는 쾌락의 공간과 시간을 거부하고, 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죽음을 향해 나가는 것일까? 왜, 안티고네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원칙에 머무르지 못하고 죽은 오빠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내야겠다고, 아직 나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며 절규하는 것일까?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내면 이렇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타자인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오현우 역시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현실 질서(법)의 위협과 협박과 조롱과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언어의 학습과 병행한다. 어린아이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이드(Id)가 지배하던 원초적 자아(상상계적 자아)에서‘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속으로 편입된다. 사회라는 상징계 안으로 진입한 아이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법과 질서와 전통 안에서 자라면서, 사회가 설정한 기표를 따라가는 것이 생의 목표이고 기쁨이 되는 인간으로 길들여지게 된다.‘쾌락의 원칙’이란, 사회적 기표를 하나씩 따면서 생기는 삶의 기쁨과 보람과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쾌락 원칙은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적 불안과 소외를 피하려는 속성이다. 그것은 법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는 쾌락을 추구하지만, 불쾌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금지된 대상을 피하려는 성질이다. 이런 까닭에 쾌락의 원칙은 사회적 금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보수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에게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측면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살고자하는 충동인 에로스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삶의 터전인 공동체의 원리를 거부하고, 자기를 끊어내는 죽음충동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재(the Real)란 무엇인가?


    안티고네와 오현우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욕동에 대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동을 ‘욕망desire’과 ‘주이상스jouissance’로 구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욕망이란,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이데올로기적 학습, 혹은 법률 안에서 형성되고 허용되는 욕망으로, 그것은 사회적 가치, 내지 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라는 상징계(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좀 더 많은 연봉을 추구하고, 육체마저 상품화하는 소비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좀 더 날씬하고 예쁜 외모를 욕망한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표(상징)를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연봉 1억, S라인의 몸매, 고급 외제차, 명품 가방 등이 대표적 기표라 할 수 있다. 그 기표들의 연쇄를 따라 우리는 상징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표들은 사회라는 대타자가 만들어놓은 기준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남들이 원하니까 내가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인정받으니까. 그러면 내가 편하고 즐거우니까. 그래서 계속 그 기표를 따려고 쫓아다닌다. 결국 상징계속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나 오현우는, 이런 식의 상징계 속 쾌락 원칙의 지배하에 있는 욕망과는 다른 욕망을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쥬이상스’다[각주:3]. 욕망이 상징계 속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쥬이상스는 상징계로 진입하기 이전 상상계 시절 작동하였던 욕망이다. 이것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떠돌다가, 현실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실재(the Real)’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실재’란 현실을 초월해 있는 존재, 혹은 운동의 원칙이었다. 플라톤의‘이데아’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라캉은 이런 전통적인 실재와는 다른 실재를 언급하는데, 이를‘Das Ding(=the Thing)’이라 불렀다. 지젝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the Real’이라 명하면서 ‘실재의 윤리’로 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잠시 여기서 실재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부연하면, 전기 라깡을 읽다보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가 뚜렷하게 경계 지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후기 라깡으로 갈수록 그들 사이 경계는 사라진다. 실재가 어느 특정한 공간과 층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실재계(界)라는 말은 적절치 못하다. 실재는 현실의 오작동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발생한 박근혜의 국정농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다원성이 강한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이 실재의 귀환을 설명하는 적절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시민혁명을 통해 높은 민주적 시민의식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 박근혜가 최순실 같은 작자에게 국정을 농단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다니!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의 천국 미국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적대의 메카니즘을 들고 등장한 쓰레기 같은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가 있나! 지젝이“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라고 말했는데, 너무나도 적절한 지적 아닌가 싶다. 박근혜라는 실재, 트럼프라는 실재는 대한민국이라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틈과 균열을 상징한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괴물의 숙주가 사람의 몸에서 기생하는 것처럼, 실재(the Real)는 세상의 틈과 균열로 존재하면서, 평온했던 상징계에 혼란과 불안을 선사한다.


안티고네와 실재의 윤리


    라캉은 실재를 겨냥하는 쥬이상스가 지닌 전복적인 힘에 주목했다. 쥬이상스는 상징적(세상적) 원칙과 질서로 제한하지 못하는 근원적 욕망이었다. 라깡은 안티고네 이야기를 그것의 적절한 예로 끌어들인다. 왕권을 놓고 숙부 크레온과 경쟁을 하던 폴리네이케스는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참혹하게 유린한 후 성 밖으로 내친다. 그것은 반역자를 향한 합법적인 법집행이었다. 아울러 백성들에게는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거두어 장례를 치를 경우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오빠의 장례를 치렀고, 그 이유로 지하동굴에 갇히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앞서 언급했듯이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였다. 쾌락의 원칙대로라면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는 실행되어서는 안되었다. 법을 어길 경우 짊어져야 할 형벌과 공포와 불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쾌락 너머의 원칙을 따라간다. 그것은 보편적인 하늘의 법도에 충실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례를 치를 권리가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인륜 말이다. 안티고네는 그냥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나, 윤리적 덕목에 입각해 행동했던 것이 아니다. 아주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인륜성에 기반한 행위였다. 이런 보편적 욕망에 충실했기에 안티고네는 체제가 만들어놓은 법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현실의 법과 대립각을 형성하는 것이었기에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안티고네는 찬란하고 슬픈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겨지게 된다.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그리스 비극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등극하게 된 연유다.

   하지만 안티고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티고네의 자살은 그녀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의 자살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디케의 죽음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크레온도 모든 것을 상실하는 파국을 맞게 된다. 안티고네의 법 밖의 것을 지향하는 윤리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법의 윤리를 무너뜨린 것이다.

    본래 윤리란 사회의 법규, 전통, 규범 같은 것들을 유지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마음의 자세, 그리고 그것을 위한 행위 일반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실재의 윤리는 사회, 혹은 국가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것, 규범적인 것을 뚫고 나간다. 국가가 제공하고 체제가 허락하는 규범을 따르면 편하고 안락한데, 이 쾌락원칙을 거부하면서 안티고네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는 것을 소망하며 나갔다. 그랬더니 옛 질서가 무너지는 결과가 발생했다.

    지젝과 더불어 슬로베니아학파의 얼굴로 떠오른 알렌카 주판치치는 기존 윤리와 다른 실재의 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실재와의 조우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된 물음-나는 나를 탈구된 상채로 던져놓은 그 무엇에 조응해서 행위할 것인가, 나는 이제까지 내 실존의 토대였던 것을 재정식화할 각오를 할 것인가?-속에서 윤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바디우는 이 물음-혹은 오히려, 이 태조-을 ‘사건에의 충실성’ 혹은 ‘진리(진실)의 윤리’라 부른다.[각주:4]


    실재의 윤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윤리가 대타자인 공동체가 정한 법규와 규범을 아무 생각없이 따르고 복종하는 도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의 조우를 통해 진실을 겨냥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스템의 이면을 들춰내면서, 대타자의 목소리를 의심하고 자신의 쥬이상스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분석석학의 윤리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윤리는 진실의 윤리다. 진리와 진실은 같지만 다르다. 뉘앙스 상으로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둘 다 어떤 사물과 사건에 깃든 함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같다. 드러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거나, 사람의 진심이거나, 사건의 진상이거나, 혹은 종교적 깨달음이이다. 문제는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의 차이인데, 진리는 우리가 그동안 볼 수 없었고 몰랐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고, 진실은 우리에게 익숙했고 늘 봐왔던 사물(건)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진실의 윤리는 실재가 귀환하는 사건이다. 실재는 예측가능한 상징계의 질서 어딘가에 균열이 생겨, 예상치 않게 그곳을 통해 무엇인가가 융기하는데, 그것이 현실의 모순을 들추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법의 모순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의 광기일 수도 있고, 맹목적인 도착된 믿음일 수도 있다. 실재의 귀환은 이런 상징계의 껍질을 깨면서,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억압하는 대타자의 목소리와 나의 진정한 욕망(쥬이상스) 사이의 괴리와 간극을 포기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다면 실재의 윤리를 세월호에 대한 애도의 문법으로 전환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애도를 묻다


    안티고네 이야기와 세월호 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권력은 그들이 보기에 애매하고 재수 없이 발생한 죽음을 둘러싼 진상규명과 애도 과정에 대해 난색을 표시하며, 빨리 그 애도의 기간이 흐지부지되기를 소망한다. 안티고네와 세월호 유가족들은 ‘당신들이 우리의 애도를 가로막는 처사는 옳지 않고, 너무 쪼잔한 것 아니냐?’며, 끝까지 체제가 강제하는 애도의 방식과 대결한(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애도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극명하게 다른 것일까?

   애도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그렇다면, ‘애도를 성공적으로 마쳤다’함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극복되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성공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애도가 되는 것 아닌가? 본래 애도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망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을 계속 지속시키는 행위여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도란 애도의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유지시키는 행위다. 그러므로 성공한 애도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인터뷰에서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이 슬픔이 완전히 극복되고 잊히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애도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

   안티고네의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는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현실세계의 법칙을 뚫고 나온 실재(the Real)의 귀환이었다. 이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배제되었던 ‘그것(das Ding, the Thing)’이 현실의 질서 밑에 숨어 있다가 융기한 사건이었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법집행에 차질을 초래한 사고였다. 세월호 사건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상징계를 뚫고 융기한 실재(the Real)라 할 수 있다.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가정의의 이름으로, 경제성장 혹은 경제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한국 사회의‘그것(das Ding, the Thing)’이 현실의 수면 밑에서 응축되어 있다가 터진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안티고네는 그 실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오빠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크레온이 장례를 막았던 이유는, 애도의식이 망자에 대한 기억을 공동체 내에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의 공유는 필연적으로 어느 임계점에 이르러서는 빅뱅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애도행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권력이 세월호에 대한 애도를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이유도 이와 같다. 세월호 참사는 무능하고 탐욕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실재가 드러난 사건이었고, 현 정부는 그 모든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진실을 향한 행위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일어날 사건의 파장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정부로서는 이 애도를 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애도가 구천을 떠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미완으로 남겨진 채 배회하는 세월호를 향한 우리의 애도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우리의 애도가 미완으로 남겨진 채 이어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들의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윤리적 답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리에서 망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는 행위를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고, 거기서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간의 대화와 관계 맺음이 계속 유지되도록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도래하는(to-come) 변혁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전망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세월호 애도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변혁을 향한 가능성의 지점이자 거점으로 우리 앞에서 살아 있게 된다.

   세월호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세월호 문제는 종결되었다!’고 선언하는 세상의 음성에 파열음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세월호 문제를 이대로 덥고 지나가려는 세력들에게는 부담과 불편으로 작동할 것이고, 그것은 세월호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그렇게 거짓된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진실을 감추는 자들을 향해서는 쫄지말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의 애도를 유포하다 보면, 우리 앞에 불가능했던 현실의 파국이 가능성의 형태로 우뚝 솟아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애도는 완성된다. 아니, 그때가 비로소 우리 애도의 출발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4. 10일 에큐메니안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65 [본문으로]
  2. 신형철 외, 『눈먼 자들의 국가』, (서울: 문학동네, 2014), 231 [본문으로]
  3. Jacques Lacan, “The Paradox of Jouissance” in Seminar VII,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trans. Dennis Porter(W.W. Norton & Company, Inc. 1992), pp.167-240. [본문으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실재의 윤리』, (서울: 도서출판 b, 2004), 3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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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욕망으로의 초대


   근대 주체철학의 신화가 완성되던 무렵 근대성 일반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 천재들이 19세기에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맑스(Karl Marx, 1818~1883)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그들은 각기 서양 주류철학이 걸어왔던 관념과 의식과 이성 중심주의에 맞서, 물질과 무의식과 반이성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욕망담론은 무의식과 반이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던 그때로부터 1세기가 흐른 현 21세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욕망에 대한 사유는 전통 사상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분야다. 그것은 프로이트와 라깡, 그리고 근래 지젝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 내지 윤리화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욕망인가. 이 대목에서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지금부터 논의하게 될 욕망담론은 자본의 무한질주에 따른 소비에 대한 욕구와 충동을 격려하고 뒷받침하는 이론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21세기 현실 속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정언명법은 자본이다. 거대하고 막강한 자본이 선사하는 강제로 인해 지구촌 인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지만, 지옥과도 같은 자본의 압제를 벗어날 전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시기에 욕망이론이 현실 저편을 지향하면서 현실을 넘어가는 에너르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혹시 자본의 막강한 벽에 균열을 가하거나, 그 벽을 타고 넘을 힘을 제공하지 않을까라는 기대에서 사람들은 욕망이론을 펼쳐든다. 그럼 지금부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탑승하기로 하겠다.


욕망이 출몰하기까지


   정신분석학의 기본명제는‘모든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는 것이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욕망은 억압의 산물이고 귀환을 일으키는 매개라 할 수 있다. 욕망이 담론사에서 정식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이라는 걸출한 정신분석가로 부터가 아닐까 싶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일어났던 예수운동이 바울을 통해 세계화되면서 그리스도교로 발전했듯이, 이념으로서의 맑시즘을 실천철학화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견인했던 레닌처럼, 정신분석학의 발전과정에서 프로이트와 라깡의 관계도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라면, 라깡의 경우는‘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법과 제도와 규범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남근(pennies)은 라깡의 남근(phallus, 팔루스)과 다르다. 전자가 단순한 생물학적 성기라면, 후자는 상징계(the Symbol), 즉 사회적 인정과 권위를 나타내는 기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세공포(Castration complex)는 생물학적 성기에 대한 제거의 공포라기보다는, 자기의 사회적 자리와 지위가 인정되지 않고 박탈되는 것에 대한 공포이고, 이것이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남겨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이렇게 라깡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사회-문화적 해석의 틀로 확장시킬수 있었던 원인은 그의 언어관에 있었다.

    1953년 라깡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외치면서 본인 이론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라깡은 본인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언어의 개입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특별히 그는 유아가 말을 배우는 시기인 6개월에서 18개월 정도의 기간을 ‘거울단계(mirror stage)’라 불렀다.

    라깡이 ‘거울단계’를 끌고 오는 이유는 분명하다.‘상상계(the imaginary)’를 언급하기 위함이다.‘거울단계’의 아이는 남들이 보기에는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고, 정신적, 육체적 발달이 안 된 불안한 상태이지만,‘거울단계’아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낙관적이고 낙천적이다. 양육자(예: 엄마)와의 관계에서 100%의 쾌락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이는 자신과 양육자에 대한 구분이 없다. 이처럼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를 때리고도 자기가 맞은 것으로 오인하고,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울기까지 한다. 라깡은 이 시기를‘거울단계’라 부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유아들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거울과 나를 분리하기 시작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면서 세상의 질서로 편입하게 된다.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유아와 양육자사이 형성되었던 2항 관계는, 아버지의 개입으로 깨지고 만다. 아이는 엄마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은밀하고 내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거대한 타자의 등장으로 폭로되고 위축되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이때 아이는 자기의 성기가 색정의 원인이므로 아버지가 자신의 성기를 제거할 것이라는‘거세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아이는 체념 속에서 근친 상간적 욕구를 억누르고, 자신을 현실원리에 적용시키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의 질서에 복종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라 칭한다.

   그런데 이 시기가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시기와 겹친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면서 타자를 만나고, 내안으로 침입하는 타자의 개입을 참아내면서 아이는 자라난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자음과 모음을 배우고, 단어를 익히고,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시스템속으로, 즉 기호의 세계, 상징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언어의 습득은 아이로 하여금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이전단계(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100% 쾌락이 붕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이때‘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상징계를 지배하는 대타자이다. 이것은 사회를 작동케 하는 원칙들, 예를 들어, 도덕, 관습, 법, 관례, 예전, 이념 같은 것들이다.


욕망의 심층


    이제 본격적으로 욕망의 심층으로 내려가보자. 라깡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너는 교수다!’ ‘너는 의사다!’ ‘너는 박사다!’ 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교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 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계에 남겨진, 혹은 상징계로 진입할 때 제거당한 내 마음 속 잔여를 향한 욕망이다. 어쩌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간직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 중 일부가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편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시카고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한백교회 담임목사이고, 한신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상철이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말로 나를 다 표현할 수 있나? 뭔가 헛헛하고 아쉽고 섭섭하고 안타까운 무엇이 있다. 상징계속 이상철, 현실 속 이상철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상상계속 자아의 일부를 상징계로 진입하는 도중에 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말한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낯선 타자와 직면하는 고통을 견뎌야 아기가 살 듯, 상징계의 주체 역시 마찬가지다. 상상계라는 제2의 자궁을 뚫고 나와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람은 드디어 인간(人間)이 된다.


슬라모예 지젝 曰 : "하지만, 이건 아니올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인간의 욕망은, 상상계속 나의 욕망이 아니라, 상징계속 타자들의 욕망이다. 이를 좀 더 우리의 일상과 결부시키면 이렇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의 역사를 회고해보라. 얼마나 많은 민주투사와 열사가 등장하여 조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가.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국방을 위해, 수출강국을 위해,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 진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하면서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가. 진보진영에도 강력한 대타자의 목소리가 있었고, 보수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기표를 흠모하면서 행위했다. 대타자의 음성은, 그것이 보수의 목소리든 진보의 목소리든 간에, 현실의 우리를 지배하면서, 우리를 뒤에서 조정하던 실세였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를 현재화할 때 사용되는 해석의 준거였고, 우리의 미래까지를 담보한다고 여겨지는 묵시였다. 욕망이란 대타자의 목소리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동되는 주술이라 보면 맞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대타자가 지니고 있다는 권위와 숭고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롱한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 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 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재가 아니라 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타자가 실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를 몇 해 전 개봉했던 영화‘국제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국기 하강식을 하던 시절, 전 국민이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부동자세로 태극기를 바라보던 장면이 영화에서 연출되었다. 그 영화 개봉 이후 누군가에 의해 국기하강식 전통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후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다소 소란스러웠다.

    웬 국기하강식?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종북 좌파 빨갱이로 몰린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비록‘반공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비어있는 텅 빈 기표임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세계인 대한민국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형태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근본주의는, 대타자를 향한 확고한 집단적 도착적 믿음위에서 탄생하였고, 그 믿음을 먹으면서 성장하고 나서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대상을 향해서는 광기를 표출하는 삶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중간정리) 쉽게 이해하는 욕망論: “라면 먹고 갈래요?” 


    앞서 우리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을 뜻한다고 배웠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완벽했던 양자합의 관계가 깨어지는 상실과 아픔을 경험한다. 누가 그랬던가 아픔만큼 성숙해진다고.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성숙이란 요구와 욕구사이의 괴리로부터 발생하는 슬픔과 상실을 견디는 법이겠지만, 그 작업은 언제나 실패하여 욕망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욕망은 요구와 욕구사이의 함수관계에서 결정된다. 욕구는 보통 생리적 욕구다. 배고프면 먹고, 배설하고 싶으면 싸는 그런 욕구 말이다. 요구는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잔여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고시원에 혼자 사는 비정규직 열정 페이 청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배가 고파서 (텅 빈)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두 개 끓여 먹었다. 그런데 라면을 먹는데 갑자기 마음이 안 좋아진다. 엄마가 차려준 집 밥도 생각나고, 하루 종일 일하다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오는 자신의 처지도 처량하다. 라면을 두 개나 먹어 배가 불러 욕구가 해결되었는데 뭐가 문제지? 아마도 그(녀)가 원했던 것은 라면이나 밥이 아닐런지 모른다. 그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아닐까.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안에 담긴 사랑 이라든지,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먹던 저녁상가에서 벌어졌던 수다와 웃음이라든지...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요구의 영역이다.

    라면을 이용한 욕망계산법의 유명한 예화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 등장한다. 연상녀 이영애는 늦은 밤 문밖에 서있는 연하남 유지태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제안을 한다. 연하남 유지태는 정말 라면만 먹고 그 집에서 가만히 무사히(?) 있다 나온다. 정말 착한 교회오빠 스타일이다. 두 남녀가 이해한 "라면"은 서로 다른 의미였다. 연하남 유지태는 라면을 배가 고플 때 먹는 육체적 욕구의 대상으로 해석을 한 것이고, 연상녀 이영애에게 있어 라면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심리적 요구였다. 나의 허기진 마음을,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나의 이 쓸쓸함을 알아주고 만져주라는 싸인이 라면인데, 아직 세상을 몰랐던 유지태는 이영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나중에 둘은 헤어지고 마는데... 잘 헤어졌다! 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따져 묻지만, 순수가 얼마나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지, 사랑이 때로는 얼마나 저열하고 구질구질하고 남루한 현상인지를 어린 유지태는 몰랐다. 그런 유지태가 여인 이영애에게는 버거웠던 것이고. 그 영화를 보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영애의 선택이 현명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나도 속물이, 아니 성인(成人) 되어가나 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중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생리적으로는 배가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헛헛한 무엇이 항상 나의 무의식을 맴돈다. 그것은 욕구와 요구사이의 차이 혹은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상상계에서 누렸던 요구의 100% 충족이 상징계속 대타자의 개입으로 깨어짐을 전제한다. 바로 그 지점이 욕망이 출현하는 진앙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이해를 갖고 빨강구두를 둘러싼 욕망의 변증법으로 넘어가보자. 거기에는 또 다른 욕망의 세계가 펼쳐진다.


빨강구두와 죽음충동


   Google에서 ‘Red Shoe’를 쳤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고급에로영화의 대명사인격인 잘만 킹 감독의 시리즈 포스터들이다. 한국에서 방송되는 <사랑과 전쟁>의 미국판 19금 버전이랄까. <사랑과 전쟁>은 이혼직전 남녀가 변호사에게 찾아와 당신들의 입장을 하소연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는 한 남자의 우편함으로 배달된 여성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들이 겪었던‘사랑과 전쟁’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과 배신, 잘못된 만남, 어긋난 사랑, 뒤늦은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성적 환타지를 아주 농익은 영상으로 수놓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상징하는‘빨간 구두’란 그야말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것이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고 조절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미끄러져 가는 욕망의 기표다.

잘만 킹 감독의 <Red Shoe Diaries> 포스터


    안데르센 동화 <빨강구두>에 등장하는 소녀가 신은 구두가 그렇다. 마치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운동하는 근육인 불수의근(involuntary muscle)과 같다. 심장에 있는 근육, 소화기관이나 생식기관에 있는 근육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을 뛰게 하고 소화의 촉진을 도우며, 성기를 빳빳하게하는 자동인형 같은 근육이다. 동화에서 소녀는 춤을 추지만 사실은 그것은 그녀가 추는 춤이 아니다. 빨강구두가 추는 춤이다. 그녀의 춤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구두가 끼워져 있는 발을 잘라내는 것이다. 결국, 빨강구두는 나와는 상관없이 보이나 강력하게 나를 지배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고, 소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녀로 하여금 끝없이 춤을 추게 하여 발을 잘라내야 한다는 결정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죽음 충동’과 상관한다.

    ‘죽음 충동’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겠다. 삶에 대한 충동인‘에로스’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생명을 끊으려고 삶의 에네르기와 단절하려는‘죽음 충동’은 그 제목부터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심지어는 엽기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죽음충동에 대한 논의는 프로이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이트의 전기사상이「꿈의 해석」(1889)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그의 후기 사상은「쾌락의 원칙을 넘어서」(1920)와「자아와 이드」(1923)에서 언급하는 이드(Id)-에고(ego)-초자아(Superego) 사이의 역학관계에 관심한다. 특별히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욕망을 두 차원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에로스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와 반대적인 에네르기라 할 수 있는 죽음충동(타나토스)이다. 에로스가 삶에 대한 충동이라면, 죽음충동은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에 반하는 에네르기인 셈이다.

   ‘죽음 충동’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주체와 실재(the Real)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란 상징적인 세상 밖에 있는 초월적 실재(absolute being)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는 다르다. 내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는 그 무엇, 상징시스템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실재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을 전제하고 이미 상징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상징시스템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the Real)이다. 빨강구두가 그런 것 아닌가. 내안에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 나와 붙어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이고 그것이 빨강구두인 셈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근대적 이성을 바탕으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역사의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주체는 어쩌면 근대성이 부여한 환상일런지 모른다. 우리를 완성된 주체로 만드는 요인은 빨강구두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우리조차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영역 때문 아닐까. 그 이질적인 것들이 출몰할 때 주체는 비로소 온전한 주체의 모습을 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것 아닐는지.


파국의 욕망, 혹은 욕망의 파국


    앞서도 언급했듯이 상징계 속 주체는 결핍과 결여의 존재다. 상상계에서 누렸던 100% 쾌락을 거세당한 채 사회화과정을 밟으며 성장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은 드러나지 않지만, 인생의 고비고비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멀스멀 올라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욕망은 어쩌면 그 결여와 구멍을 메우기 위한 인간의 방어기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욕망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대타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욕망은 모른다. 돈을 많이 벌어도, 박사학위를 받아도 멋진 신랑 신부와 결혼을 해도, 성형수술을 해도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알고 싶어서‘케 보이(Che Vuoi)?’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답변은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죽음충동은 이 순간에 발동한다. 온갖 내공을 다 부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삶의 에네르기는 방향을 틀어 묻는다.‘죽어버릴까. 내가 죽어버리면 대타자는 만족하지 않을까. 죽으면 이 쓸쓸함과 공허와 이별하는 것 아닌가. 이제는 지친다. 죽자, 죽어버리자’어쩌면 우리의 근원적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의 진정한 의도는, 마치 수학(數學) 극한(Limit)에서 0을 향해 무한히 수렴(收斂)해 가는 것처럼, 죽음을 향해 수렴하는 무한질주 아닐까. 그렇다면 욕망과 존재의 근원인 제로(Zero), 무(無)로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구원으로 이르는 계단 아닐까. 그 비상구는 에로스로 차고 넘치는 욕망의 거리에 있지 않고, 타나토스가 똬리를 틀고 앉은 욕망의 이면 어느 텅 빈 구멍 속 아닐까.

   정신분석학에서는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다. 지젝은 라깡이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 프로이트의 해석을 근거로 성령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우리가 성령 안에 우리의 위치를 정하면 우리의 존재는 성스럽게 변하고 생물학적 삶 너머에 이는 또 다른 삶으로 진입한다.” 성령을 죽음충동과 연관시킨 대목은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성령임재 사건들이 갖는 특징을 언급하라면, 한마디로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상징계 속 기표와 욕망과 기억과 경력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기득권을 어찌 다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죽음충동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로 인해 역사의 물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무너질 것 같이 않았던 전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완고했던 시스템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성령을 체험했던 모세에 의해 파라오는 무너졌고, 성령을 체험한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면서 제국의 기독교화는 시작되었다. 성령을 체험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백인과 흑인간의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넘었고, 성령을 체험한 문익환 목사는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성령, 즉 죽음충동이 임하자 자아는 사라지고 텅 빈 충만이 자리했고, 그 힘으로 그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욕망의 전복성


   요약하면, 욕망은 삶에 대한 욕동인 ‘에로스’와 죽음을 향한 욕동인‘타나토스’로 구분될 수 있겠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빨강구두’는 삶에 대한 애착과 환희를 향한 욕망인‘에로스’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발을 잘라내어야만‘빨강구두’가 추는 춤이 중단되어 원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죽음 충동’을 닮았다.‘빨강 구두’로부터 시작된‘죽음 충동’은 현실 속 그 무엇도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의 욕망은 현실 저편의(혹은 아래의) 무엇을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상상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불신과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해왔던 완벽한 대타자와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보편성의 중핵이 텅 비어있다는 욕망이론의 발언은 통쾌하다. 현재 전 지구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완고한 신자유주의의 보편성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놓고 골몰하던 이들에게, 정신분석학의 제안은 현실의 원칙에 집착하는 욕망이 아닌, 상징계 너머에 존재하는, 아니 상징계의 텅 빈 중핵을 겨냥하는 욕망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이 21세기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에 균열을 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틈을 통해 진입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노래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이 제안하는 욕망은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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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7]



지젝과 바울(IV)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사랑이 뭐길래


    지젝을 다루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가 안고있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문제를 잘 꿰뚫어 본 종교인 유대교와 바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지젝이 말하는 그 문제를 해결할 묘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간단히 말한다면 그 묘수란 그야말로 닳고 닳은 단어인 ‘사랑’이다. 지젝이 바울의 입을 빌어서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뭐길래, 만병통치의 묘약이 되는 것일까?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등에서 자주 쓰이는 말인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지금 아주 통속적인 장면 하나를 그려보자. 한 부유하고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말을 타고 (또는 고급 차를 타고) 외딴 길을 지나가고 있다. 그때 한 젊은 처녀를 지나치게 된다. 그 순간 부자 청년을 둘러싼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그 청년의 눈길은 그 처녀에게 머무르게 된다. 그 순간에 관객은 또는 독자는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아! 청년이 사랑에 빠졌구나. 너무 로맨스 소설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것이 바로 지젝이 바울을 통해 말하는 묘약, 사랑에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먼저 청년이 사랑에 빠진 조건은 아마도 처녀의 아름다움이었겠지만 이 아름다움을 빼야만 더욱 사랑에 가깝다.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여타의 사회적 조건을 빼어버린 것. 그것이 사랑이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이란 아주 쉽게 표현하면 상징계를 뜻한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의 언어와 사회적 질서로 만들어 놓은 모든 상징의 세계를 꿰뚫고 전혀 다른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절대 위와 같은 감성적인 로맨스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위의 예는 그야말로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부자 청년의 계급과 젊은 처녀와의 관계에 우선된 가부장적, 여성차별적 구조가 선행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방인의 지혜, 그리고 기독교


   지젝이 말하는 이방인의 지혜(The very core of pagan Wisdom)[각주:1]는 플라톤이나 여타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통해 인간 사회를 만들었던 사상들이나 종교를 뜻하며, 멀게는 인도의 힌두이즘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한 우주론적 계급사회)나 가깝게는 그리이스 철학 (사회적 갈등들을 철학적 담론으로 순화시키는것)을 뜻할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가 이러한 계급의 질서를 혁파하고 각 개인들이 “보편성 (universality)에 직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소개하였다고 말한다.[각주:2] 여기서 보편성이란 성령 또는 오늘로 말하면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을 뜻하는데, 바로 이 성령의 보편성을 확증함으로써 기독교는 종래의 사회조직들이 기반하고 있던 상징적 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unplugging)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질서의 바깥에서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어떤 목사는 아마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 병든 자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이셨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부자와 건강한 자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회에 대한 전복적인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병든 것 때문에, 또는 버림받은 것 때문에 사랑받게 되는 것일까?

    지젝은 만약 사회적 타자라는 것이 사랑받는 조건이 되는 것을 지젝은 ‘휴머니즘’적 생각이라고 말한다.[각주:4] 아마도 누군가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아무 ‘조건’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젝에게 이러한 사랑은 현재의 사회구조를 개혁하는데 큰 의미는 없다. 결국 사회의 밑바닥을 위로 역전시키는 구조는 진정한 사회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버림받은 자들이 필요한, 또는 버림받은 자들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결과만을 낳기 때문이다.[각주:5] 만약에 버림받은 자들이 선택 받아 힘을 가진 자들이 되면 다음에는 이전의 힘을 잃어버렸던 자들을 사랑할 것인가? 지젝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unplugging’ (상징계로 부터 벗어남)을 ‘uncoupling’(상징계로 부터의 단절)이란 말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이 ‘언커플링’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이란 개념에서 명확해진다. 성령의 신자들은 율법에 대해여 죽고, 더이상 인간의 관점으로 서로를 보지 않는다.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써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현실 사회와 단절된다면 사회적 개혁할 수도 없고 또한 현대 정치에서 그러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지젝이 바울의 탁월성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7장 29-31절, 새번역)


    새로운 사회정치구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사회속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은 외형적 법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내장되어 있는 외설적 보안재 (obscene supplement), 즉 위반을 통해서 사회와 법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정지(suspend)시키는 것이다.[각주:6] 정리하면, 바울의 방식은 사회와의 단절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착적 가능성을 정지시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대할때 그의 사회적 지휘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의 모든 소유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 가족이나 친구등이 마치 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사회라는 상징계의 도착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발견한 대안이란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와 같은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대안의 부분에서 지젝은 마치 대충 유명하고 대충 진보적인 부흥사처럼 보인다. 또한 이러한 지젝의 생각을 설교중에 한다고 해도 보통의 청중들은 그리 어렵다거나 이상하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지젝을 마치고 지젝이 이해한 바울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젝의 아주 발칙한 일면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려면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더 물어야 한다. “정말 그런 완벽한 ‘아닌 척’하는 행동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젝에게 바울이 대안이 되려면 바울은 아주 완벽하게 신의 전능성을 부정하고 그의 죽음을 확신한 사람이어야 한다. 신의 죽음과 불능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지젝에게 바울이 말하는 언커플링은 불가능하다.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신의 불능성을 깨달은 것은 욥이었지만 그 비밀은 유대교 안에서 숨겨졌다. 이후에 그 비밀은 유대교가 ‘율법’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서 다른 정치나 사회구조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디아스포라’로써 또는 이방인으로써 다른 국가에 편입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지젝에게 화육 (신의 인간됨, incarnation)은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이 급진화된 형상이다.[각주:7] 보통의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humanity)과 신성(divinity)의 분리될 수 없는 융합이며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는 존재이지만, 지젝에게 그리스도의 인성은 바로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의 부산물 (fallout)이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의 불능이 죽음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이다.[각주:8] 신 (big Other)에게서 벗어난 인간이 되어야 비로소 상징계를 벗어나서 리얼(Real)에 기반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각주:9]  

    지젝에게 현대의 교회는 바울의 혁명성이 사라지고 다시금 ‘도착화’된 곳이다.[각주:10]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해결이자 자유를 의미했지만, 이제는 기독교는 정확하게 자신이 해체시키고자 한 이방인의 지혜, 도착적 상징계가 되어 죽었던 신과 그리스도를 살려내고 인간을 신과 그리스도에게 값을 수 없는 빚을 진 존재로 만들었다. 다시금 율법 (신에 대한 의무)과 향유를 기반으로 한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바로 ‘도착적 핵심’이 지배하는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젝에게 성령은 오로지 신의 죽음 이후에 탄생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기독교는 그가 분투했던 종교적 구조에 다시금 갇혀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오로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지젝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Slavoj Žižek, The Fragile Absolute, Or,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 (London; New York: Verso, 2000), 120.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Ibid., 121. [본문으로]
  4. Ibid., 126. [본문으로]
  5. Ibid., 125 [본문으로]
  6. Ibid., 130.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97.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Ibid., 98. [본문으로]
  10.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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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6]



지젝과 바울(I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도착에 빠진 세계와 기독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이는 되도록이면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더 느끼려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하였다.[각주:1] 여기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쾌락이란 보통의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쉽게 설명하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면 인간은 흥분상태가 된다. 이것이 고통의 상태, 또는 불쾌한 상태이다. 그런 증감된 흥분을 낮추어 주는 것이 바로 쾌락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풀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쾌락의 상태로 간다는 것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각주:2] 이렇게 보면 쾌락-불쾌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경제학적 관계에 있다. 불쾌함의 강도, 즉 흥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락의 폭도 증가한다. 즉, 불쾌함을 열심히 저축하면 더 많은 쾌락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어린이는 즉각적인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 어린이가 커서 현실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불쾌를 참아내면서 자신에게 허용된 쾌락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허용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법 (Moral Law)이다. 만약에 인간이 그 허용치를 넘어서까지 쾌락을 느끼려 한다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통하지 않게 되고 고통이 시작된다. 라깡은 그 이후 부터의 어떤 상태를 쾌락이란 말과 구분되기 위해 향유(Jouissance)라는 말로 표현된다.[각주:4] 이제 쾌락을 넘어선 향유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각주:5] 그래서 향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담게 되는데, 하나는 어떤 중요한 법에 대한 위반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고통과 죄책감을 뜻한다. 위반과 그 위반을 통한 고통에 따라오는 즐거움. 아마 이것이 향유에 대한 간단한 정의가 될 것이다. 바로 쾌락과 불쾌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 속에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불쾌를 넘어서는 고통인간은 바로 이런 향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했다.[각주:6] 아담 커스코는 다음의 예를 통해 지젝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향유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도덕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려는 한 구도자를 상상해 보자. 일체의 욕망과 욕구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타자에 대한 사랑과 희생만으로 그 삶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욕구와 성적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속이나 사막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육체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삶도 아니고 건강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향유의 행위가 필요하다. 즉, 어느 정도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지젝은 ‘inherent transgression’ (내장된 위반)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규정속도 시속 1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에서 5킬로 정도는 더 과속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듯이, 철저한 법에 대한 준수를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에는 이미 약간의 위반을 전제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바로 초자아적 목소리 (법을 지켜라!)에는 “향유를 즐겨라!”라는 목소리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 (Obscene superego supplement)라 하였다.[각주:7] 기억해 두자. 이러한 향유와 초자아, 달리 말하면 ‘big Other’ (대타자)의 관계가 더 과도해지는 것을 지젝은 ‘도착’ (Perversion)이라 부른다.  

   자, 이제 지젝과 기독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함에 있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Perversion (도착)이라는 개념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원래 프로이드는 이성애에서 정상적인 성행위를 벗어나는 것을 도착이라 불렀으나 라깡은 이후 프로이드가 내린 정의를 변형시켜 성적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임상적 구조로 정의하였고, 자연적인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각주:8] 이 단어가 지젝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향유(jouissance)와 대타자(the big other)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중 하나를 ‘도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가 있는데, Psychosis, perversion, and the two forms of neurosis: obession and hysteria가 그것이다.)[각주:9]


   이러한 향유의 차원은 상징계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상징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 (The big other)안에서 결여를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충동으로 인해 나타난다. 여기에서 도착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향유적 존재인 인간을 여전히 이데올로기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도착’이란 증세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아예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며 히스테리, hysteria에 대해서 지젝은 자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담 커스코는 도착이라는 개념에 지젝이 점점 집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유명한 말인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the perverse core or Christianity)으로부터 지젝과 기독교의 다리놓기를 시도한다고 말한다.[각주:10] 커스코는 여기서 지젝에게 도착이라는 것은 완전한 윤리적 실패 (the ultimate ethical failure)란 것을 강조한다.[각주:11] 지젝에 따르면 도착이란 스스로를 타자의(the Other’s) 향유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로 직접 동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경계들 사이를 읽고 도덕적 법이 실제적으로 위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도착은 바로 ‘내재된 위반’인 것이다.”[각주:12]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는 공식적 도덕법을 지탱하고 도착은 법을 강화하고 심지어 필요로 하며 도착적 쾌락은 바로 그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착은 전복이 될 수 없다.”[각주:13]

    지젝은 가장 도착적인 예로서 종교적 근본주의 (religious fundamentalism)를 든다. 도착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안내로써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한편으로는 수긍할만한 공개적인 얼굴 (예수는 사랑을 가르친 ‘좋은 사람’)을 놓고 그 밑에는 외설적인 향유 (바로 복수하는 하나님)를 놓아두는 것이다.[각주:14]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혐오하고 심판을 외치는 사랑 많은 목사님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 (증오와 사랑)은 드러난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데, 바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상식적인 도덕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다종교사회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타종교에 대해 비방과 증오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겉보기에도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타종교의 성지에서 땅밝기를 한다거나)에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상식이나 도덕에 비추어 보았을때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강력한 필요성 (하나님 나라를 위한)에 의해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확히 그 겉 사랑에 있지 않고 바로 이러한 도착적 구조에 있다고 지적한다.[각주:15] 결국 위반을 통한 고통을 포함한 쾌락 (향유)에 의해 기독교 근본주의는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서 앞장에서 논했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로서 기독교를 기억해보자. 신앙인이 교회에 들어가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면 그들은 하나님, 또는 교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보기에, 또는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길은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결국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비록 계속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것은 노이로제나 신경증 (neurosis)적 증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책임을 본인에게 지울수는 없기 때문이다.[각주:16] 그러나 도착적인 상황은 다르다. 바로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착적 상황이 편만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의 향유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라는 지젝의 말이 무서워지는 순간이다.[각주:17] 

    바로 이 지점이, 나의 판단에는, 지젝의 담론으로 윤리와 신학이 파고 들어오는 곳이다.


지젝의 바울, 도착적 기독교의 해결책



    지젝과 신학의 관계가 밀접하다 못해 지젝이 신학을 이용하여 그의 철학의 탈출구를 찾으려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을 쓴 아담 커스코이다. 커스코는 지젝이 자신의 체계와 진리담론의 한 예로써 바울을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바디우는 다음편에서 논할 예정이다.) 지젝은 신학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각주:18] 지젝의 책, [The Puppet and The Dwarf] (한국어책 제목: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론은 그 유명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역사철학의 첫번째 테제로 시작한다.[각주:19]

    장기를 두는 인형이 있다. 그리고 이 인형은 절대 인간과의 장기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다. 알파고를 상상해도 된다. 그 테이블 안을 들여다 보면 한 난장이가 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 인형이 역사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이고 그 안의 난장이는 바로 신학 (theology)라고 말한다. 벤야민의 이 유비는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젝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상징계의 산물로써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이해해보았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역사 서술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승자의 기록’이다. 여기서 승자의 기록은, 바로 살아남은, 또는 상징계 안에 알맞게 포섭되어 기억된 자들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젝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상징계는 결핍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그 핵심은 텅비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적은 방식과는 반대의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잊혀진, 사라진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지젝이 보기에 아마도 현실의 상징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판타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말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라는 것이다.[각주:20] 앞으로 발터 벤야민은 조르지오 아감벤을 다룰때 더욱 심도 깊게 이야기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학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던 원시공산사회로 부터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져 결국에는 공산사회가 된다는 필연적인 역사유물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론을 지젝은 ‘억압된 것의 귀환’ (return of the repressed)을 응용하여 과거의 실패한 혁명적 시도들과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들의 귀환이 바로 실재적인 혁명의 상황의 가능성이고 바로 그러한 잊혀진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이 구원받는 것이 혁명의 상황이라 말하였다.[각주:21]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역사유물론이 퇴조되고 있는 현시대에서 벤야민의 난장이 유비를 거꾸로 볼 것을 주장한다. 곧 신학이 장기 인형이고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벤야민의 시대에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신학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잊혀진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신학으로 부터 역사적 유물론을 재발견하는 것이 혁명적 사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사고로 인해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게임에서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난장이를 붙잡음으로 혁명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젝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유물론자이고 어쩌고 저쩌고해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kernel) 이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제는 더 강력한 것이다. 바로 이 핵심은 오로지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유물론적 접근은 기독교적 핵심으로서만 접근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야만 한다!”[각주:22]


    다시 ‘도착’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지젝이 말하는 ‘도착’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첫번째는 왜 지금 기독교인가? 두번째는 왜 바울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지젝이 보기에 기독교는 매우 도착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이고 현대는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사회 전체에 편만한 상황이다. 즉,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착’인데 기독교에 이미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착’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존재이다. 두번째의 답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에 내재해 있는 ‘도착’에 대해 이미 알아차리고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고로 바울이 ‘도착’을 해결한 방법이 현재에도 가능하다면 바울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된다는 것이다. 차근 차근 따져보자. 

    커스코는 현대 사회에 대한 지젝의 진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사회는 곧 대타자 ‘Big Other’가 죽은 사회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라진 사회이다. 원래 대타자의 역할은 주체가 상징계에 잘 안착하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내려진 법 (신의 법)을 어기는 향유를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다.[각주:23]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교회에 두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교회를 통해 공급 받으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쾌락을 누리며 (예배를 빠진다거나, 이웃을 미워한다거나)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대타자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신의 법도 이를 어기며 얻는 쾌락도 존재하지 없다. 갑자기 자신이 믿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을 상상해 보자. 단순히 ‘신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와 부모의 지갑에서 몇만원을 훔치던 스릴과 회개의 기쁨이 없는 무료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현대의 인간은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어기는 방법으로 대타자의 죽음을 해결해 보려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지젝이 지적하는 ‘도착’적 행위이다.[각주:24]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보수적인 교회들에서 동성애를 비판할때 이를 수간(동물과의 성행위)으로 연결하여 폄하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매우 ‘도착’적인 행위로 보는데, 여러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에는 무감각하면서 동성애를 이러한 수간과 같은 매우 원초적인 금지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반응한다. 곧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법을 세워두고 그것을 완전히 위배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보면 그들이 대타자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대신에 스스로의 향유(쥬이상스)를 위해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독교 번영주의도 ‘도착’적 행위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쩌면 복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이라 여겨지는 것 자체가 ‘도착’적 사고가 편만한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도착’적 현상이야말로 기독교가 생존해온 방법이라고 밀어붙인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야말로 도착적이라고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기독교 신의 방법은 좋은 것을 위해서 언제나 악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구원이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유다에게 스승을 배신하는 길을 걷게하지 않았던가? [죽은 신의 위하여]의 부제가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인데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야말로 ‘뭔가 악한 일을 하고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것 이라고 말한다. [각주:25]그리고 지젝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바울이 찾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의 관점과 그 처방을 살펴보자.[각주:26]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의 특이성으로 주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아니라 욥이다. 모세나 다윗과는 달리 욥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나 다윗은 공동체와 국가를 신의 법과 법칙 위에 세운 인물들이지만 욥은 정면으로 신의 법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모든 종교나 국가는 어떠한 법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법은 언제나 신의 명령을 통한 금지를 바탕으로 세워지는데 그 저변에는 어떠한 폭력적 살해의 사건이 기반하고 있다고 하였다.[각주:27] 그렇다면 신의 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욥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시험하는 신의 존재는 프로이드의 초자아와 같은 외설적인 존재이다.[각주:28] 예를 들면, 욥기의 신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인간을 득의의 웃음으로 바라보는 신이다. 욥기의 마지막 40-42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겠지만 지젝이 말하는 욥기의 해석은 성서학에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욥이 신의 존재와 전능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신 스스로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욥 42:7,8)라는 말로 욥의 불평과 신에 대한 질문이 옳았음을 말했기 때문에, 지젝은 욥이야말로 신의 전능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고발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욥이 아니라 야웨였던 것이다.[각주:29]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에 두가지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법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생존을 추구하는 ‘도착’적 핵심(Perverse Core)과 그 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외설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신의 전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전복’적 핵심(Subversive kernel)이 그것이다. 지젝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욥이 고개를 숙이고 신의 법에 수긍하면서 유대교의 전복적 핵심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욥은 비밀을 알았지만 사회의 보전과 공동체의 생명이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황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알면서도 수긍해 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후에 용기있게 신의 죽음을 말한 자가 유대교에 나타났으니, 그는 예수와 그의 뒤를 이은 바울이었다.[각주:3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로 대표되는 로마서 7장은 보통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로마서 7장의 해석은 바울이 스스로의 유대인됨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본문을 율법폐기론적 (율법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입장) 구절이 아니라 율법의 선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율법의 장단점 정도로 해석한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이 정확하게 바울이 발견했고, 이미 욥이 발견한 율법과 야웨신에 존재하는 ‘도착’성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내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7장 18~23)


    욥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불능(Impotence)을 발견했던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어길수 밖에 없는 법칙이 그 속에 존재함을 발견했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비밀한 입장을 소개했던 것이다.[각주:31] 정리하면,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비밀은 바로 전복적 핵심 (kernel)이며 그것은 한마디로 ‘전능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 7장 25절)이라고 말할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통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 27장 46절) 신의 불능성이 드러났고 바야흐로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바야흐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을 발견함으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으로서만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바로 그 비전을 지젝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보는 듯하다. 이는 다음 웹진에서 논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Dylan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 edi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6), 150. [본문으로]
  2.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And Other Writings (PENGUIN CLASSICS, 2007), 66–67. [본문으로]
  3. 김상환, 라깡의 재탄생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102. [본문으로]
  4. 이현우는 그런의미에서 향유라는 번역보다 ‘향락’이라는 번역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하는데 원래 Jouissance라는 단어가 성적쾌락에 대한 의미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옳다고 본다. 그러나 향유라는 말이 많이 쓰이므로 여기서는 향유라고 쓰겠다. https://blog.aladin.co.kr/mramor/category/1216428?CommunityType=MyPaper&page=161&cnt=801 [본문으로]
  5.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93. [본문으로]
  6. Ibid., 102.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57–58. [본문으로]
  8.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41. [본문으로]
  9. Kotsko, Zizek and Theology, 61. [본문으로]
  10. Ibid., 6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63.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61. [본문으로]
  18. Ibid., 74. [본문으로]
  19.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ss.: MIT Press, 2003), 3. [본문으로]
  20.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151. [본문으로]
  21. Ibid., 158. [본문으로]
  22.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6. [본문으로]
  2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85. [본문으로]
  24.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53. [본문으로]
  25. Kotsko, Zizek and Theology, 88. [본문으로]
  26. 필자는 많은 부분 아담 코스트코의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의 3장 ‘The Christian experience’부분을 참고했다. 아담 코스트코는 이 장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이전의 지젝이 평가하는 유대교에 대해 서술한다. 원래 프로이드의 저서 [Moses and Monotheism]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평가하였으나, 그 이후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프로이드를 참고하면서 율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유대교의 특이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bid., 88–90. [본문으로]
  27.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93.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126–127. [본문으로]
  30. Kotsko, Zizek and Theology, 95. [본문으로]
  31. Ibid., 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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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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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ecceitas
    2016.06.10 11: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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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Adam Kotsko는 코스트코/카스코 중 하나로 택일하거나 아니면 코츠커 정도로 음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2. 한수현
    2016.06.12 11:3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네. 알겠습니다. 원고를 몇번에 나누어 쓰다보니 미쳐 고치지 못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울신학가이드15]



지젝과 바울(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번 지젝과 바울에서 주제는 지젝의 라깡 읽기였다. 라깡의 욕망의 도식을 바탕으로 판타지가 어떤 역할을 하며 주체는 어떻게 상징계(심볼릭 월드)에서 빗금쳐지는지, 케보이(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주체는 상징계 안에서 언제나 불안한 상태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라깡에 대한 이해가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지점은 라깡을 바탕으로 한 지젝의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맑스 (후기 맑스주의를 포함한) 읽기이다. 이번 장에서 주된 텍스트는 물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출발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지젝과 바울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처음 이 책이 나온 이후 지젝은 왕성한 필력으로 수십권의 책과 아티클들을 출판하였고, 그만큼 그의 사상과 현 시대에 대한 해법도 변화 발전되었다. 특히 지젝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 이후에 나타난 것이므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몇가지 지젝에 대해 나온 수많은 학자들의 저서들중에 도움을 받은 몇권과 지젝의 다른 저작들을 바탕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진행해보려한다. 지젝을 쉽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특히나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전문성이 부족한 필자에게는 지젝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이 쉬울 것이나, 필자의 경험으로 어려운 학자를 대할때는 먼저 최대한 쉽게 그의 사상을 오려내고 그 간단한 그림안에서 계속적으로 그 학자의 저서를 만나면서 자신의 생각을 변형시켜 가는 것이 코끼리 다리 더듬듯 방대한 저작 속에서 몇개의 편린을 붙잡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지젝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만이 아니라, 지젝의 처음 학문에 대한 계기는 그의 특이한 콘텍스트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단순한 질문, “왜 나름 성공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으로 살아가지 않는가?”이다.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왜 타락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공산주의적 혁명 정신으로 그 사회를 바꾸어 놓으려 하지 않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젝은 자신의 담론을 펼치면서 빈번히 정치적 사건과 예들을 비유로 사용한다. 그러한 예들을 바탕으로 글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필자 또한 여러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예를 잘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그 예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번 웹검색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조금 때로는 맞지 않은 예일수도 있고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 시킬수도 있지만 본 글에서는 ‘교회’를 예로 들어 지젝의 담론을 설명해 보겠다. 물론 지젝이 데드락 (교착상태)을 해석하기 위해, 희망적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기독교를 예로 들기도 하니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닐 것이다.


지젝으로 교회 보기


    처음 지젝의 질문을 교회를 바탕으로 바꾸어보자. ‘왜 사람들은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교회를 다닐까?’ 이것은 교회를 심각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읽는 성경의 나오는 신앙인의 삶이 자신이 사는 삶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봉 오천만원이 넘는 사례비에 고급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자녀들을 미국에서 유학시키는 대형 교회 담임목회자의 삶이 성서에 나오는 영적 리더들의 삶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좌우당간에 신앙생활을 해가며 큰 갈등없이 살아간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원래 맑스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거짓 믿음’ 즉 쉽게 말하면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가 행복해진다.’라는 거짓말로 시작하여 ‘목사는 거룩한 존재다.’라는 구라로 끝나는 기독교는 시민들이 현실의 부조리와 거짓을 보지 못하게 하여 사회 정의와 혁명을 방해하는 아편적 조직이라는 것이었다.[각주:1] 그렇다면 이 거짓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지젝은 파스칼을 인용하여 믿음은 앎(Knowledge)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습(Custom)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각주:2] 재미있게도 이런 가정이 가능한데, 백일기도의 효과를 믿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백일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아담 카스코(Adam Kotsko)는 지젝의 말을 응용하여 현대 미국 대형교회의 성공을 해석했는데, 윌로우 크릭 교회와 같이 열린 예배 형식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예배에 지루함을 느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예배 관습을 제공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믿음을 바꾸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팝음악과 강연형식의 순서를 교회적 예배라고 정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각주:3]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 그 유명한 ISP(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있음을 말했다. 이데올로기를 받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거짓-믿음이라는 비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를 이끌어가는 물질적 조직과 기구들이란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힘은 강제적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이고 ‘부드러운’것이다.[각주:4]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가 요즘과 같이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수많은 타락과 문제점들이 공유된 상태에서도 가능한지 물어봐야 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초대교회는 몰라도 현대의 교회는 ‘구원’이나 ‘복’으로 포장된 거짓으로 가득찬 집단으로 보인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목회자들의 불법과 타락이 사탄의 장난이라 믿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지젝의 설명은 이런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미 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각주:5] 아주 소수의 운빨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예로 든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준엄하며 냉정하다. 백일 기도를 한다고 자신의 자녀가 서울대를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심리가 존재할 뿐이다. 즉, 번영신학의 허울과 희생적 사랑이라는 선언 뒤에 숨겨진 교회의 이기심은 그 구성원들이 더 잘 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번영신학이 엉터리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번영신학은 무너지지 않는다. 차세대 영적 지도자로 각광받던 목사가 성추문에 휩싸여도 교회의 공금을 횡령해도 논문 표절이란 구설수에 올라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바로 이전 장에서 논했던 환상(Fantasy)가 등장하는 곳이 이 지점이다. 여기서 판타지의 역할과 현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좀 길긴 하지만 지젝의 말을 직접 옮겨보자. 다음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한부분을 필자가 번역 정리한 것이다.


    한 아버지가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의 곁을 오랜동안 지키다가 아들이 죽자 옆방으로 가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때 아들의 침대 옆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한 노인이 아이를 지키며 기도를 읖조리고 있다. 그 때 그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그의 아들이 그의 옆에 서서 그의 팔을 잡고 꾸짖듣이 말한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그가 일어나자 아들이 죽어 있는 방에서 불길을 발견한다. 노인은 잠에 들어 있었고 촛불이 그의 죽은 아들의 팔에 떨어져 불타고 있었다. 

    전통적인 꿈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꿈은 잠든 이의 잠을 연장 시키는 역할을 한다. 잠자던 아버지에게 현실로부터의 방해가 일어난다. (타는 냄새) 그러자 꿈이 발동하여 그의 잠을 연장시킨다. 짧고 작은 이야기는 외부의 요소를 담는다 (불, 아이- 그 편이 더 자는 자를 안심시킬수도 있다.) 그러다가 현실의 방해요소가 강해지면 잠자던 이는 깨어나게 된다. 

    라깡은 이런 전통적인 해석과는 반대의 해석을 개진한다. “주체는 외부의 방해가 너무 강해질때 자신을 깨우지 않는다.” 외부의 방해가 강하기 때문에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는 꿈을 만든다, 물론 자신의 잠을 연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로 깨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그가 그 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의 욕망의 실재다. (Lacanian Real) 이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꾸짖음이 바로 실재이다.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이것은 아버지의 근원적인 죄책감이며 이것이야말로 외부의 실재 그 자체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깨어나게 되는 이유이다. 그의 욕망의 실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꿈 안에서 그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그 실체로부터 소위 현실의 세계로 탈출한다. 계속 꿈을 꾸고, 그 자신을 속이고, 그의 욕망의 실체로 깨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결국 현실은 우리의 욕망의 실재를 가리우기 위한 하나의 판타지 만들기인 것이다.[각주:6] 

    쉽게 말하면 보통 우리는 꿈을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꿈을 벗어나서 현실의 세계로 온다고 생각하지만 지젝의 라깡은 이를 역전시킨다. 바로 보통 우리가 말하는 현실세계가 판타지이다. 역으로 꿈은 우리가 판타지인 현실세계를 넘어서 만나는 리얼의 세계이다. 이를 지젝은 라깡의 현실(Lacanian Real)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현실이 판타지라면 과연 무엇이 우리가 판타지를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바로 이 판타지가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각주:7]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진짜 힘은 교회의 타락을 숨기고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거짓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교회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우리가 교회의 타락과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타락과 문제점의 원인을 밝히고 고쳐 나가면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갱신과 개혁을 포기하고 ‘가나안’ 교인의 길을 걷는다.[각주:8] 둘 다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함정이 된다. 지젝에 따르면 이 둘의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진정한 교회의 핵(Kernel)을 만나지 않기 위해 환상적 현실을 제공하는 것이다.[각주:9] 왜냐하면 두가지 방법 모두 교회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바뀌지 않는가?


    약 40년전에 지나친 번영신학과 교회의 계급주의, 그리고 지나친 헌금강조등의 율법적 신앙을 바로잡고자 평신도 사역자를 강화하고 신유나 은사를 중심으로 한 예배를 금하고 세계선교의 희망을 불태운 교회가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구원파’교회이다. 현재의 교회가 거짓된 교리로 얼룩져 있다고 하여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로운 교회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내 그 곳은 이전보다 더욱 신비적이고 세속적인 집단으로 바뀌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이 이데올로기는 도대체 왜? 어떻게? 인간을 이리도 쉽게 조종할 수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강제로 어떤 것을 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러한 조종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하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한다.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할 수있다면 그러면서도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힘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교회를 크게 건축하기 위해 헌금을 모으고자한다. 이 목회자는 교회를 크게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크게 상관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성서의 뜻이나 신앙의 황금률이 아님을 알고있다. 그러나 교회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큰 사업을 편하게 하기 위해 건물을 늘리고 신자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는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여러 헌금을 많이 하여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건축헌금을 강조한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굳이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복을 받거나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다. 헌금을 많이 함으로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은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러한 신앙을 비판하는 목사들의 글이나 신학자들의 글도 넘쳐난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다음과 같다. ‘그것을 아는 것이 나뿐이라면? 오직 나만이 그것을 알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교인들은 목사의 말을 믿고 열심히 헌금을 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이 곧 신앙의 중심이 되는 사람에게 (또한 이것이 교회의 기본 신앙이기다하다) 이것은 대단한 위기이다. 자신은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신앙인이어야하고 그러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바로 헌금이 복과 직결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의 형태 이외에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할 길이 없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헌금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이다.[각주:10]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학벌위주의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지젝은 반유대주의를 가장 좋은 예로 드는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리 와닿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사회에서 대접받고 좋은 직장을 잡고 돈을 잘 벌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라는 것이 학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처음에 이것은 하나의 루머일 수 있다. 아마도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대접받기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다. 대학 간판이 좋지 않아도 자신의 노력과 특성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돈을 잘 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이것을 믿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려고 할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이것은 거짓말이며 현실은 실상 그렇지 않고 대학 간판없이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나 이 똑똑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만약에 바보처럼 순진하게 이것을 믿고 정말로 좋은 대학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사회 지도계층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나는 비록 이것이 거짓말이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겠다.” 결국 이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든 결과는 같다. 무슨 생각을 하든 좋은 대학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은 같은 것이다.

지젝의 주체론(칸트와 헤겔)

    필자는 가끔 평신도이지만 상당히 높은 신학적 지식과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성서를 공부하고 고민하며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주 듣는 질문은 이런것이었다. “전도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신앙인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고 수긍해줄 목회자이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라는 거대한 상징계 (Symbolic Order or The big Other)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을 위치시킬 수 없는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르면, 왜 대형교회가 수많은 문제들과 갈등에 시름하면서도 마치 그 교회에 맹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 처럼 보이는지 알 수 있다. 그들도 알고있다 우리처럼. 다만 알면서도 계속 하던대로 할 뿐이다. 바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방법이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안다는 것은 비판의식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만이 아니다. 나와 이글을 읽는 여러분도 모두 마찬가지로 살아간다. 이 부분에서 지젝은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후반부가 ‘주체’(Subject)에 할애되어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책의 초반부에 지젝은 알튀세르의 실패는 바로 어떻게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토대에 의해 ‘이름 불리워지는가?’ (Interpellation)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였는데,[각주:11] 이를 설명해내기 위해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전통에 위치시킨다. 바로 지젝이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을때 이는 결국 구조주의를 넘어서 독일의 관념론에 라깡을 안착시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각주:12]


가정된 주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어떤 것을 가정한다. 그 가정 뒤에는 또 다른 가정이있다. 이것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가정된 주체(subject)가 있다. 이 가정된 주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을 이전 웹진 글에서 우리는 판타지라고 불렀다. 바로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라깡이 연결되는 지점이 이곳이다. 우리는 언제나 상징계(심볼릭 월드)안에서 이미 가정된 존재이며 (빗금쳐진 $) 불안한 상징계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안정시켜줄 거대한 존재(신)를 찾아나서지만 결국 텅빈 대타자(교회-신이 있다고 하는 장소)를 만나 그 비어있는 곳을 판타지로 채운다. 그곳은 바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이며 바로 숭고한 대상 (무섭고도 장엄한 빈 물체)가 자리한 곳이다. 여기서 지젝이 숭고한 대상 (Sublime object)이라고 명명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바로 칸트가 말하는 thing in itself (물자체)를 지칭한다. 그 이유는 이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철학의 사유의 시작은 칸트이며 칸트의 사유를 극복한 지점이 바로 이 물자체에 대한 헤겔의 칸트비판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물자체와 인간의 사유사이를 건널수 없는 강으로 구분지었다. 이 부분은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와 좀 닮아있는데, 칸트는 인간이 물체를 인식하는 방법이 이미 선험적으로 (태어날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붕어빵의 틀이 언제나 그 형틀의 빵만을 만들듯 인간의 이미 구조화된 인식의 방법 (시각, 청각, 미각, 길이, 무게…)으로 물체를 인식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인식의 도구를 통해 이해된 방식으로만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물자체인 세계와 인간의 의식 속의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칸트는 머무르지 않고 그 사유화된 세계를 뛰어넘어 물자체의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숭고함(Sublime- 두렵고 떨리는 대상)을 만날때이다. 수백미터의 파도를 만났을때, 영혼마저 뒤흔들어 버리는 음악이나 그림을 만날을때, 인간은 자신의 사유의 깊이를 훌쩍 뛰어 넘어 사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엄함에 빠져들어간다. 바로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물자체가 인간의 영혼마저 흔드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헤겔은 이러한 칸트의 사유의 방식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물자체라는 외부적 요소를 이용하여 주체의 사유의 방식을 규정하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의 문제점은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방식이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해 버렸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지젝이 보는 헤겔의 주장이다.[각주:13] 위에서 사용한 교회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칸트식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보고 인간 나름으로 만든 기구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수도 바로 볼 수도 없으며 다만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나라에 준하는 교회는 하나님 자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득 문득 인간은 하나님의 장엄함을 그 숭고한 대상을 체험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헤겔의 불만은 이것을 거꾸로 이해하면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은 언제나 틀릴수 밖에 없다가 된다. 숭고함을 통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이 틀렸음을 칸트는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젝이 보는 헤겔의 정수(essense)는 칸트가 말한 묘사할 수 없는 물자체의 경험, 즉 숭고함 (Sublime)에 대하여 칸트는 옳았지만 칸트의 실수는 그 이면에 여전히 물자체가 있다라고 생각한 것에 있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칸트는 여전히 무엇인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각주:14] 그러나 헤겔에게 물자체 (Thing-in-itself)란 아무것도 없는것, 묘사할 수 없음 그 자체인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 (negation of negation)인데, 바로 현세계(정)에서 묘사가 불가능한 숭고한 무엇(Sublime object)로 부정(반)을 거쳤다면, 마지막 변증법의 단계인 합은 그 부정이야 말로 실재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다.[각주:15] 이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부정의 공간이 주체가 나타나는 곳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는 주체 자체를 상정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부정했던 그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각주:16] 독자들은 이전 장에서 빗금쳐진 주체에 대해 논했을때, 이미 주체는 빗금쳐져 있었다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 ‘이미’에 대한 설명이 여기에 있다. 지젝은 바로 절대 부정의 공간에서, 비어 있는 공간에서 주체는 나타났으며 주체의 자리와 생성은 정확하게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나타남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서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전기 지젝의 대안


    보통 지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젝이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두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초기의 지젝은 급진적 민주주의 (Radical Democracy)를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언급되어 있다. 후기의 지젝은 그의 기독교 읽기를 통해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데, 다음 웹진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설명과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설명에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기 지젝이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대안이 어떻게 대안이 될지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에 주체가 언제나 쥬이상스속에서 판타지에 묶여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주체가 생성되는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데올로기의 시작점을 살핀다. 바로 독일 관념론적 전통의 주체론에 이미 그 주체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헤겔에 와서 주체론은 완성되어 라깡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신(God)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유한성과 반대되는 무한성을 투영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하는 외부적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 주체의 개념의 부정성만으로 신에 대한 설명을 완성했다. 그래서 그는 무신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젝은 포이에르바하의 시도가 주체를 중심으로 외부적 세계 또는 신을 설명하려 했으나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포이에르바하의 설명은 왜 인간이 굳이 신(God)을 상상해야 하는 필요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각주:17] 칸트가 물자체 (Thing-in-itself)를 상정하고 숭고함이란 개념으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비어있는 리얼에 다가서기를 포기한 것과 비슷한 논리로 포이에르바하는 주체의 속성에 신을 위치시킴으로 비어있는 리얼을 인간의 속성에 소외된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채운다. 여기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약함의 부산물이라 선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신에 대한 지식이 믿음의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부분에 언급되었다.

    지젝은 헤겔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주체를 설명했다고 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또는 주체가 신의 이면에 자리한 진실이 아니라 주체는 주체이전에 신을 가정해야한다. 여기서 신을 실체(Substance)라 해도 좋다. 주체는 포이에르바하식으로 신을 자신의 주체 이후에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먼저 가정하고 그 신이 인간, 즉 주체가 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각주:18] 이것이 이른바 헤겔식의 그리스도의 화육 ‘incarnation’에 대한 이해이다. 바로 절대 정신인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이 주체가 나타나는 시작이 된다는 의미는 거꾸로 바로 그 신을 신의 자리에 세우는 것은 주체라는 말이 된다. 이를 라깡식으로 하면 바로 상징계 (the big Other)의 시작은 주체에 의해 전제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각주:19] 지젝은 이러한 헤겔 읽기를 판타지를 가로지르는 것(Traversing Its Fantasy)이라 생각한 듯하다. 바로 전기 지젝의 대안은 헤겔의 변증법으로 라깡의 상징계 안에 자리한 주체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상징계를 전제한 것이 바로 주체임을 인식하고 주체와 상징계를 묶는 이데올로기의 그 숭고한 대상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는 라클라우 (Ernst Laclau)에 착안한 것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목표하는 평등, 자유, 평화등의 급진화된 형태가 이른바 타인의 개성을 평준화하고 수량화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비어있는 가치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인권, 여성주의, 환경주의등의 가치들과 연대하면서 이른바 민주적 가치라는 평등 담론등을 통해 계속적인 투쟁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각주:20] 이를 교회적 상황에 비교한다면, 기독교의 신이라는 드러나 있는 기표와 가치들이 이데올로기임을 감안하고 그것이 비어있는 기표들의 상징계임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적 신앙을 포기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가치로 존재하는 사랑과 평화를 기반으로 좀 더 현실적인 층위에서 신앙의 방법들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후기 지젝은 스스로 의문을 표한다. 다음 웹진은 그 이유와 후기 지젝의 대안을 살펴볼 것이다.



<참고문헌> 

Kotsko, Adam.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Zizek, Slavoj.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First Edition edi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Books, 1993.

———.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 웹진 <제3시대>


  1. 이러한 맑스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읽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허상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 당시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정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2.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39. [본문으로]
  3.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24. [본문으로]
  4. Ibid., 25. [본문으로]
  5.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30. [본문으로]
  6. Ibid., 44–45. [본문으로]
  7. 지젝은 환상의 두가지 효과는 첫번째는 현실과 환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지 못하게하고 이 환상이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라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Ibid., 30. [본문으로]
  8. Ibid., 24. 지젝의 냉소주의 (Cynicism)을 가나안교인들의 생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냉소주의’를 비판하는데, 결국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밝히기 보다는 구조를 지속시키는데 공헌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근본주의 (fundamentalism)또한 냉소주의의 반대로서 같은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 [본문으로]
  9. Ibid., 45. [본문으로]
  10. 지젝은 이에 대한 몇가지 유명한 예들을 말했는데, 다음을 보라. Ibid., 210–211; ibid., 33. [본문으로]
  11.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42. [본문으로]
  12. Kotsko, Zizek and Theology, 44. [본문으로]
  1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232.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233. [본문으로]
  16. Kotsko, Zizek and Theology, 51; Slavoj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First Edition edi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Books, 1993), 12–15. [본문으로]
  17.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260. [본문으로]
  18. Ibid. [본문으로]
  19. Ibid., 262. [본문으로]
  20. Ibid., 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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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들어가며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현상은 주체의 문제가 문학, 철학, 예술, 신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시 전 분야에 걸쳐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리라. 이런 현상은 계몽주의로부터 니체에 의해 기획된 신의 죽음이 몰고온 예고된 변화이기도 하지만 굳이 니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숨 막히는 질서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던 지성사의 필연적인 흐름 이었는지도 모른다.  

          계몽주의시대 이후 ‘신의 죽음’의 선언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근대적 주체의 죽음뿐 아니라, 주체를 둘러싼 욕망, 권력, 담론, 지식과 같은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라캉이 주체를 대타자라는 환상적인 실재를 욕망하는 존재로 파악한다든지, 푸코가 지식의 계보학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밝혀낸 것이라든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개념을 통해 서구역사가 억압해온 사유의 욕망으부터 자본주의의 문제를 파헤친다든지 하는 것들은 상이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게 되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주체에 대한 관심이 최종적으로 겨냥하는 지점은 억압적인 체제질서의 그 가려진 내막을 들춰냄으로서 인간을 억압한 그 모든 것들의 허구적인 실체로부터 인간의 주체적인 삶, 즉 주인된 삶을 회복시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주체에 대한 각각의 진술들을 통해 제시되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주체의 행동의 방식은 이론가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소 부정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이 감지된다. 다시 말해, 해체론이든, 포스트구조주의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명명하든 주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전통적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내지 해체이며, 이는 근대적이고 부즈조아적인 사회구조를 넘어서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혹은 해체가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역량마저 해체할 수 있다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마저 버리는 참사는 목욕시키는 엄마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주체가 중요한 문제인가


         데카르트의 근대 합리주의 이후 서양 근대 철학은 주관적인 관념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의 사유와 인식능력은 실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지배하였던 시대였고, 윤리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이성에 기반한 자율적인 개별자들 간의 합리적인 계약에 의거하여 정치적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낙관적이 기대가 팽배하였던 시대였다. 이것은 중세시대를 지배하였던 전근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신을 밀어내고 근대의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주체가 그 자리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절대 주체는 형이상학적인 신의 자리를 탈환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주체의 자리로부터 배제된 객체를 대립적으로 구분하여 객체에 대한 차별을 기정사실화하고 정당화하고 만다. 신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는 승리의 환호 뒤에는 자연이 인간의 정복의 대상물로 전락되고, 여성은 남성에 대한 복종의 대상이 되며, 유색인은 백인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비워주어야 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개별자 스스로에게 이데아나 신에게만 부여되었던 초월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존재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서 일어난 이러한 인식론적인 변화는 인간을 둘러싼 삶의 전반을 선과 악, 주인과 노예, 문명과 야만이라는 확연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로 구조화시켰다.

         근대적인 주체의 발견이라는 인식론적 변화가 객체를 타자화 시키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통해 왕권신수설에 의거한 봉건적인 절대주의는 무너지게 되었으며, 시민이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근대적 주체의 등장이 무조건적인 비판의 문제로만 취급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전근대적인 절대주체가 봉건주의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뒤이어 등장한 근대적인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봉건주의를 몰아내고 부르주아 시민 사회를 지탱하는 새로운 사조로 전면화 되었다는 사실은,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타파하는 또 다른 새 정치사회는 탈근대적인 주체의 등장을 통해서 열려지게 되리라는 합법칙성을 말해준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을 한다는 것, 혹은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사회를 지향하는 지적 작업은, 결국 주체를 인식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고 이를 통해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안에서 논의되는 주체에 대한 이론들이 오늘의 자본주의 지배질서로부터 어떠한 변혁적인 의미를 함축하는지를 이 글은 묻고자 한다.


지젝이 말하는 주체


         이 글이 지젝을 특별히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한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지젝의 책은 읽는 속도보다 출판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유머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물량공세로 대중과의 접촉면을 다방면에서 확보해온 잘 알려진 맑스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유명세도 그렇지만, 그러나 이보다 지젝의 주체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인간의 변혁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론으로 가장 의미 있는 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는 나름의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지젝은 본 웹진에서 다뤄진 경험이 있고, 지금도 연재되는 관계로 지젝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지젝의 논의와 연류된 주변의 시선들을 참고하여 지젝의 주체이론이 가지는 차별성과 실천적 의미를 구분해 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이론가로서, 푸코, 들뢰즈, 라캉을 염두하고 있다.

          푸코의 경우, 그는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지식을 통해 담론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권력이라는 효과를 생성해내는데, 이 때 작동하는 권력은 주체에 의해 통제되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를 형성하고 주체의 자리를 결정짓는 권력임을 분석해 낸다. 정신병원, 감옥, 고아원, 학교와 같이 신체를 통해 가해지는 감시와 통제 시스템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은 곧 권력의 메커니즘이 폭력과 억압의 방식이 아닌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참여를 통해서 창출되고 과정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감시, 규율, 훈육의 통제사회에서 밀려나고 주변화된 타자들이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고고학적 계보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권력의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는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은 권력의 주체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사회의 통제시스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일 뿐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자기에의 배려’라는 모호한 답으로 얼버무린다. 푸코는 결국 인간의 개별적인 의식 안에서의 변화만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한 것일까? 푸코는 이후에 다뤄지는 주체의 철학이론에도 빠짐없이 거론되기에 짚고 넘어갈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라캉을 통해서 의도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법을 통해 정치적 주체성이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캉의 주체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고 만족될 수 없고 언제나 항상 결핍된 채로 기표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언제나 결핍된 존재로만 남아 있게 된다. 라캉에게 주체는 타자의 욕망이 거쳐나가는 장소이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체 이해만으로 정치적 주체성을 발견할 직접적인 단서를 찾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다. 물론 지젝이 읽어낸 라캉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들뢰즈가 기획한 주체는 라캉과 다른 것이다. 그가 서구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던 플라톤주의를 전복을 통해서 밝혀내려 했던 것은, 수직적이고 이분법적인 위계질서를 부여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개별자들에게는 동등한 지위에서의 수평적 차이와 그것의 반복만이 있을 뿐 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이데아를 제거한 칼로 다시 겨냥한 대상은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라캉과의 입장차이가 분명해 지는데, 욕망은 오이디푸스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욕망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의 본성에 숙명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욕망하는 주체는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를 위협하는 가능성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라캉과 들뢰즈의 욕망을 중심으로한 주체에 대한 이해는 차이로 끝날 것인가?

         마지막에 다뤄질 지젝의 주체는 욕망에 대한 해석이 푸코에 대한 비판과 라캉에 대한 변증법적인 해석을 통해 변혁적이고 실천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이론으로 어떻게 가공되어지는지를 보려고 한다.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지젝은 맑스가 설정해 놓은 계급적 혁명의 전선구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맑스가 보지 못한 혁명에서 인간의 주체의 문제를 다룸으로서 진보적인 해방역량을 담보하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이론가라는 호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비중 있게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다.

         쓰고보니 장황한 글이 될 것같다. 연재를 약속받아 놓은 것도 아니고 그저 공부하는셈 치고 글좀 써보라는 권유에 시작한 글이기에 혼자 장편 시리즈를 기획하는 것은 월권이다. 때문에, 지젝 이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매우 단촐한 소개와 더불어 실천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만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주체의 문제를 바라보는 상이한 접근방법들이 제공하는 각각의 이론들이 진보를 위한 정치변혁의 과정에서 ‘어떤 주체’가 요구되는지를 비판적인 입자에서 비교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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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4]



지젝과 바울(I)


- 사람들, 지젝에게 갈 길을 묻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 웹진에서 무어를 통해 이야기했듯이 다시금 인문학에서 성서 읽기가 시작되고 있다. 성서가 이천년의 시간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보다 서구 기독교의 정치적 경제적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패도의 정치 폭력에 신음하던 자들의 텍스트 또한 성서였다. 미국 자동차 여행중에 머문 값싼 허름한 인터넷도 되지 않는 방에서 심심한 마음에 서랍장을 열었을때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 책이 성서이듯, 성서의 생명력만큼은 쉽게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생명력만으로 작금의 인문학의 성서읽기의 이유를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서 읽기를 독려하는 진보지식인들은 여전한 기독교의 힘 때문이라도 진보적 성서 해석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말도 옳은 말이지만 지금의 현상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왜 현대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이 성서와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지는 그들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방식에서 이해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웹진에서 지적했듯이 과연 그러한 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대답해 보아야 한다.  

   이번 웹진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흥미있는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중에 가장 대중에게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의 기인, 슬로야보르 지젝(Slavoj Žižek)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저서인 [죽은 신을 위하여] (Puppet and the Dwarf)에 대해서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 것이고 여기에서는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밝히지만 나는 철학을 전공한 학생도 아니고 지젝에 대해서는 과문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웹진의 내용이 지젝에 대한 처음과 끝이 아니다. 또한 여기에서 말해지는 라깡, 칸트, 헤겔, 알튀세르등의 인물들은 오직 지젝이 말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더욱이 그러한 지젝의 말을 필자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본 글은 지젝을 미국에서 스타로 발돋움하게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기본으로 다루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 다룰 지젝의 기독교 담론을 이해할 만한 수준까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지젝이 유명해진 대표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고집하는 학자가 아니라 이전의 대가들의(칸트, 맑스, 헤겔, 라깡) 충실하고도 삐딱한(?) 해설자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시대에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들을 현실의 담론 속에서 되살려서 다시금 재해석하고 그들의 논리를 이용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나 후기구조주의에 맞서는 기백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그럼 이러한 감탄사의 이유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론에서 밝히듯이,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둘째, 라깡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이해한다. 셋째, 앞의 두개의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립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본다. (Zizek 2009, xxx)


1.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후기구조주의의 특징을 간단하게 말하면, 리얼리티,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실재를 건져올리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여 닻을 내리면 그 닻은 실재의 대상과 닿는 순간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리 저리 잡히는 것은 계속되는 언어의 연쇄일뿐 실재는 그 안에 없다. 그러므로 진리란 없다. 모든 개념은 ‘차이와 반복’을 통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니 반복한다고 언제나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는다. 즉, 차이와 반복을 통해 계속 생성하는 운동을 지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로 규정된 세상이다. 구조주의가 실재하는 세계가 하나의 언어적 구조를 통하여 나타나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봄으로써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과 이별할 수 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비록 당신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과라는 언어로 규정된 먹어보면 어떤 감각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식상한 비판이지만 지젝의 후기 구조주의와 데리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지나치게 이론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것에 있다. 헤겔식으로 보면 후기구조주의의 코멘터리는 같은 이론적 토대에서 무한적인 반복의 해석을 제공할뿐,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지는 못한다. (ZizekSlavoj 2009, 174) 이에 대해 맑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 구조주의의 이러한 형식을 맑스주의적으로 풀어내어 후기-자본주의의 비평적 토대를 만들었는데,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한 해체주의적 독법자체가 후기-자본주의의 징후라고 비판한다. 지젝은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한다. 

    지젝은 이러한 후기구조주의의 이론을 ‘deadlock’(교착상태)라고 이름한다. (ZizekSlavoj 2009, 174) 지젝의 거의 대부분의 저작은 이 교착상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음 웹진에도 다루게 되겠지만 기독교에 대한 지적의 독법 또한 과연 기독교에 이 교착상태를 돌파할 어떤 것이 있느냐에 지젝은 관심한다.

     Real, 가질 수 없는 너.

    지젝이 리얼이라고 말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데리다는 메타랭귀지라고 부른다. 후기구조주의와 데리다는 이 메타랭귀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라깡 또한 이 리얼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노래의 가사 처럼 ‘못 가지는 너’ 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너’이다. 즉, 가질 수는 없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은 꼭 남기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결국 ‘가질 수 없는 너’를 포기하기 위해 메타랭귀지를 포기하고, 그 결과로 모든 언어를 메타랭귀지로 만들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물질 뒤에 존재한 신은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라고 말해버리면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이 신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범신론) 라깡은 이와 달리 ‘결핍’ 즉, 가질 수 없다라는 것을 그의 관점의 핵심으로 놓았다. (Zizek 2009, 176) 바로 내가 너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언어는 대상을 가리킨다. 소쉬르는 사인의 구조를 통하여 대상-언어의 관계에서 이른바 언어만 따로 떼어내어 사인(언어)=기표(signifier)+기의(signified)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즉, 언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것과 목소리와 같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사인이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고 근대 언어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만약에 여기서 사인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세계를 언어의 세계, 또는 상징의 세계라고 한다면 문제는 이 언어들과 실재들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 규정하고 대상과 언어의 관계를 해체시켰다. 지젝의 라깡은 이 언어의 세계, 상징의 세계에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잊는 거미줄과 같은 세계의 자리를 잡는 하나의 중요한 시그니파이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결핍이다. ‘가질 수 없는 너’의 결핍은 비록 가질 수는 없지만 ‘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굳게 서서 다른 거미줄들을 안정시킨다. 그것은 ‘결핍’이므로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Object a이다. 기의 (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이다. (Zizek 2009, 177)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와 같이 충만으로 가득차서 모든 세상의 운동의 원인이 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텅비어서 결핍된 아무런 의미가 그 안에 없는 어떤 기표이다. 이 기표가 표시하는 것은 실재 대상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결핍이다. 이 결핍이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없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없다’라는 것이 명확하게 존재하므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저 없다는 후기구조주의의 언술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 된다. (Zizek 2009, 180) 즉, 라깡을 오해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여기에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기억해 놓아야 하는데, 바로 Kernel이란 단어이다. 이 단어의 정의는 ‘핵심’을 뜻한다. 지젝은 핵심이란 표현을 쓸때, kernel과 core를 쓰는데 커널이란 표현은 바로 결핍된 상태 자체가 핵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Zizek 2009, 181) 이 표현은 다음에 기독교에 대해 ‘perverse core and subversive kernel’을 할때 다시 설명하겠다. 이 기의가 없는 기표인 ‘대상 A’(object a), ‘리얼’(실재), 또는 결핍된 기의(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와는 다른 ‘더 리얼’(the Real)이 있다.


     the Real, 바로 '너'


    바로 ‘너’이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리얼’이다. 원래 ‘더 리얼’은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상징계 (Symbolic order: 인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이해일 것이다.)로 가져오기 위해 상징화할때 그 충만함은 상징을 거치면서 결핍이 된다. ‘너를 가지기 위해 너라고 불러서 데리고 오는 순간 가질 수 없는 너가 된것이다.’ 이 결핍은 구멍으로 나타나있고 이 구멍을 중심으로 상징계는 구조화되어있다. (ZizekSlavoj 2009, 192) 여기서 잠깐, 지금까지의 내용이 정치사회적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보자. 

    혹자는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를 인류의 마지막 시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가 마지막 경제체제이고 자본에 여지없이 휘둘리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이상의 것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인 이유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본이 만들어낸 가난과 불법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며, 정치 참여를 통한 변화는 그전 하나의 미봉책으로 인류의 생존의 기간을 좀 더 연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현실 경제학과 정치학과 냉험한 현실주의만이 대안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종교는 그저 엄난한 삶속에서 잠깐의 안식을 제공하는 안식처로서 오직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반복할 것이다. 자, 이제 소위 빅브라더 (세상을 지배하는 인물)은 우리 앞에 앉아서 비릿한 웃음과 함께 선택을 강요한다. 인간의 삶은 구조속에서 극히 제한된 선택만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것이 되었다.
    윗 단락의 말들은 원래는 20세기가 저물기전에 이미 인문학에서 말하여지던 것들이다. 불과 몇십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표현을 달라졌지만 이와 비슷한 말들을 흔히 접한다. 흙수저, 금수저, 열정페이, 유리천장, 정치의 몰락, 전지구적 자본주의속에 한치앞도 볼 수 없는 경제의 흐름등. 20세기말에 철학적 담론들은 이러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은 구조속에 갇혀진 존재다. 솔직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그러했다. 근대이전에 인간은 계급이란 명확한 카테고리로 규정된 존재였다. 소작인 아버지밑에서 태어났다면 소작인일 뿐이다. 그 인생에 맞게 쓸데없는 생각없이 살아가면 된다. 근대가 되자 인간은 마치 자유와 인권을 얻은듯이 생각했다. 이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가 그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척한 것이고 실상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고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좋은 물건인양 보이게 했다. 산업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내적모순을 제 3세계로 이동시켰고 빈부의 격차는 국가와 국가간에 계층과 계층간에 만연한 현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물어야한다. 과연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가? 새로운 정치는 가능한가? 새로운 삶은 가능한가? 이 질문을 철학적으로 물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구조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지만 담론적으로도 그러하다. 인문학은 담론으로 말하는 것이니.
    ‘그렇다.’ 또는 ‘가능하다’라고 말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후기구조주의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이론에 맞서야한다. 바로 이것을 감행한 사람이 지젝인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실체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즉,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다. 오로지 너라고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어, 언어일 뿐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을 상징계(Symbolic order)라고 이름하자. 그것에 반대되는 것, 우리가 언어의 힘을 빌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의 세계는 상상계(imaginary order)라고 부르자. 원래 이러한 생각의 대표적 철학자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외우던 그 학자이다. 바꿔말하면 언어없는 생각은 맹목이고, 생각없는 언어는 공허하다..라고도 바꿀수 있다. 즉 칸트는 생각과 언어를 결합시킴으로써 기본적으로 사물 그 자체 thing in itself 를 우리의 앎의 차원에서 분리시켰다. 즉, 우리는 실재 세상과는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물의 세계를 그저 의미없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물의 세계는 단지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 현실이라고 바꾸어보면 그 현실은 노동자의 눈물이 서려있는 곳이며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삶의 가치들이 무가치해지는 상처입은 세계이다. 그렇다면 후기구조주의를 벗어나려는 지젝의 목적은 바로 어떻게 현실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 우리가 과연 현실을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자, 이제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불리우는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이 결핍이라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무엇을 생성해 내는가를 살펴보자.

2.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


그래프 I

     그래프 I 에 대하여
    지젝은 여기에 의미의 소급성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대문자 S에서 S’로 가는 것은 시그나파이어의 운동이다. 즉, 기표가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다. 운동의 시작에 표시된 삼각형(∆)은 이른바 신화적 욕구, 즉 원인을 물을 필요없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묻지말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주체(Subject)가 상징계를 만나 (즉, 기표의 운동을 만나) 자신의 이름을 얻고 다시 귀환하느냐이다. 상징계를 세모로부터 출발해 다시 돌아오면서 주체는 빗금친 $가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 운동은 과거로의 소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지금 상징계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들어가더라도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과거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나오면서이다. 즉, 현재의 주체는 과거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된다. 어떤 의식의 운동을 따라 기표의 세계에 도착했을때 만나게 되는 기표(signifier)에 의해 주체는 호명되어진다. (ZizekSlavoj 2009, 112) 예를 들어,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교회에 들어선 순간 신앙인이라는 또는 기독교라는 거대한 기표에 의해 이름 불러워진다. 그 이후의 그가 만나는 여러 기표들, 믿음, 소망, 사랑, 삶의 의미, 인간의 자유등은 이미 모두 스스로 결정되어있다. 마치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그 의미들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의 운동과 같이 과거에 의미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프로이드의 케이스들에 비교할 수도 있다.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때 갑자기 겁이나고 답답해지는 것은 그 장소에서 어렸을때 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장소의 의미는 자신이 깨닫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과거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프 II(Zizek Slavoj 2009, 114)

    두번째 그래프는 좀 더 복잡한데, 지젝은 ‘소급의 효과’ (the effect of retrovers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먼저 빗금친 $가 원쪽으로 와서 운동을 시작한다. 첫번째 그래프에서 어떻게 주체가 되기위해 호명되고 상징계를 통과해 빗금친 $가 되는지를 말했지만, 사실 이미 주체는 빗금쳐저, 상징계에서 호명되어 있다. 일단 기표(Signifier)의 운동은 $를 두번 만나고 목소리 (Voice)가 된다. 여기서 목소리는 운동 이후에 남은 나머지를 뜻한다. 이 그래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타자 (O:the big Other)인데 처음에 예를 든 것이 기독교였으니 기독교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바로 상징의 코드(Symbolic code)를 대변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대타자, 기독교 사회에서는 기독교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모든 기표들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s(O)는 기표들이 대타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빗금친 $는 대타자를 뚫고 대타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 기표를 뚫고 다시 귀환한다. 여기서 귀환한 주체는 대타자에 의해 동일시된 I(O)[ego-ideal:상징적 동일시]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호명된 주체, 빗금쳐진 주체$는 대타자를 만나고 다시금 대타자에 의해 설정된 기표들을 만나 귀환하면서 대타자와 동일시(identify)된다. (Zizek 2009, 115) 즉, 대타자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데, 쉽게 설명하면 이제 주체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것이 되지 않고 대타자가 바라는 어떤 것이 되고자 한다. (원래 주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알 수도 없다. 주체 자체가 기표와 대타자의 만남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면서 나는 어떤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 이때 주체는 마치 자신이 원해서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대타자(O)에 눈에 비친 자신을 상상하면서 대타자의 눈에 좋은 신앙인을 훌륭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라깡의 말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들어맞으며, 이것이 바로 상징적 동일시(I-ideal)의 의미이다. (Zizek 2009, 117)

   중간 부분 왼쪽의 e란 상상적인 자아 ‘imaginary ego’이고 i(o)는 상상적 동일시를 뜻한다. (Zizek 2009, 119) 대타자를 통해 동일시[I(O)]하는 것과는 달리 상상적 동일시 (ideal-ego)는 타인의 무엇을 부러워 하여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빗금친 주체 $와 대타자(O)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상상적 동일시[i(o)], 또는 타인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아(e)를 형성할 수 있지만 주체는 끊임없이 대타자를 통해 상징계로 나아간다. 그것이 사회에서 ‘나’라는 주체로 살아갈 이름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프 III(Zizek Slavoj 2009, 124)
    ‘케보이’ (Che vuoi?)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그래프 III에 보이는데, 바로 “뭐라구요? 나에게 원하는것이 뭐라구요?”라고 해석할 수 있다. (Zizek 2009, 123) (이경재 2009) 그래프 II처럼 빗금쳐진 주체가 언제나 아무런 문제 없이 상징계에서 동일시되어, 즉 행복한 목사가 되어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언제나 상징계에서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어떤 잔여가 남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 잔여 없이 상징적 동일화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는 사회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그 때에 어떤 잔여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 남아있는 잔여가 주체에게 욕망(그래프에서 소문자 d)을 선사하고 주체는 대타자와의 만남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여기서 욕망(d)는 라깡에 따르면 욕구(need)와 요구(demand)와 구별된다. 욕구란 생물학적 필요를 뜻하는 것으로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욕구를 뜻한다. 요구란 그러한 욕구가 상징계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먹을 것 좀 주세요.”라는 것은 바로 ‘배가 고프다’는욕구가 타인에게 전해지기 위해 요구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는데, 스파게티와 피클이 나왔다고 생각해보자. 주체는 순간적으로 묻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원한 것일까?’ 또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 먹고싶어서 짜장면을 시키고 짜장면을 먹으려는 순간, 옆 테이블에 짬뽕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때, ‘짬뽕을 먹을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나의 욕구가 요구로 바뀌었을때 주체의 요구는 언제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내가 먹고 싶은 말로 다 할수 없는 그 무엇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최선을 다해 어떤 짬뽕이 먹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타인은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비록 말로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잔여가 생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시켜먹고도 채우지 못한 그 잔여물이 바로 욕망(desire)이다. (이경재 2009, 206) 그러므로 여기에서 욕망(d)라는 것은 주체가 대타자(the big Other)가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알 수 없어서 남겨지는 잔여, “나한테 정말로 바라는게 뭐예요?”의 ‘케보이’로 남는 것이 욕망이며, 그 욕망의 곡선은 결국 세번째 그래프의 끝에서 ($<>o)에 멈추게 된다. 바로 빗금쳐진 주체와 대타자사이의 끝없는 질문이 계속되는 곳이다. “나한테 무엇을….” 지젝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유대교는 이처럼 끊임없이 주체가 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불안의 종교’라고 말한다. (ZizekSlavoj 2009, 128)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때, 정말 바치라는 이야기인가? 왜 나를 택했나? 왜 이스라엘을 선택했나?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자가 되었나? 끊임없는 질문이 연속되는 상태라는 불안이 계속된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그 답은 찾아질 수 없다. 그 대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환상(fantasy)이며 ($<>o)는 라캉의 환상공식이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 마지막 완성된 욕망의 그래프이다.



    완성된 그래프(Zizek Slavoj 2009, 136)

    맨위 왼편의 S(O)에서 시작해보자. 처음에 리얼과 더 리얼에 대해 이야기한것을 상기하자. 더 리얼(the Real)은 절대 가질 수 없고 그것이 상징계로 들어오면 리얼(real)이 되는데 이 리얼은 충만함을 모두 잃어 버리고 결핍된 기표 (Signifier)로써 상징계를 지탱하는 누빔점(nodal point)가 된다고 하였다. 이 텅비어 있는 기표(Signifier)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남근이며 아버지의 법이다. 상징계를 지탱하고 있는 아버지의 법은 금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언제나 충만하지 못한 결핍의 상태이므로 그 금지를 어기려는 의도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라깡은 향유(Jouissance)라고 부른다. 애초에 충만했던 더 리얼(the Real)이 리얼(real)이 되면서 그 충만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향유(쥬이상스)는 그 충만성을 찾는 인간의 또 따른 욕망 운동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비어있는 대상 a(object a)를 찾아 계속운동하여 다시금 $<>D에 다다른다. 여기서 D는 상징적 요구(Symbolic demand)를 말한다. (ZizekSlavoj 2009, 138) 주체에게 요구된 상징적 요구를 뚫고 주체의 욕망의 그래프에 귀속되지 않은채 거세된 결과를 낳는 향유의 운동은 주체에게 더 리얼(the Real)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이고 상징계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주체에게 끊임없이 알려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판타지이다. 주체를 다시 불안하지만 텅비어있는 S(O)에 귀속시켜 주는 것이 바로 라깡의 판타지 공식인 $<>o이다. 바로 주체와 상상적 타자가 결합되는 곳이다. 바로 이 판타지가 대타자(O)의 결핍을 매워주고 리얼(real)의 결핍을 매워주고 향유에 의해 나타나는 충격을 감싸준다. 중요한 것은 이 판타지야 말로 이 그래프의 중심이며 불안한 주체를 안심시켜 다시금 상징계에 머물게하고 상징계의 기표 [s(O)] 에 안전하게 안착하게 한다. 바로 이 판타지적 효과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이론을 뽑아내는데 이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것이다. 판타지에 대하여 지젝은 ‘불안의 종교’인 유대교에 반해,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바로 이 환상 효과를 사용하여 주체의 불안을 없애고 안정화 시켰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아버지 신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주체의 불안을 사랑으로 채운다. 즉, 대타자가 자신을 내어줌으로 주체의 비어있는 불안과 욕망을 채워주는데 그 순간에 대타자의 빈 공간또한 이미 주체 안으로 들어왔기에 해결되는 것이다. (ZizekSlavoj 2009, 130) 이를 지젝은 정확하게 하나의 판타지라고 보았고 그 판타지가 작동함으로써 비어있는 대타자(O)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상 짧게 살펴본 지젝의 욕망의 도식을 필자는 ‘만능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지젝의 저서에서 애매한 부분을 만날때는 이 도식을 상기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도식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이해하고 어떻게 맑스와 헤겔을 통해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살펴보자.



<참고문헌>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9.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New York : Verso, 2009.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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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국가인가?[각주:1]

: 세월호 침몰 사건을 바라보는 지젝의 시선과 산자의 독백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Intro

배가 가라앉았다. 3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를 내었고, 그 중의 대부분은 고등학교 2학년 눈이 부시게 푸르른 아이들이다. 2014년 고난주간 중간에 들려온 이 소식은, 그리고 현재 계속 진행 중인 그 사건은 우리를 모두 슬픔과 절망에 떨게 했고, 우리의 입에서 부활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구약성서 전도서 기자에 의하면 매사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그래 지금은 하염없이 울고 슬퍼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자다가 자다가 울화가 치밀어 잠에서 깨면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대체 이것이 국가인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저 바다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가 그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1
‘세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초월성을 이성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투사한 후에 얻어지는 확실성에 기인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지젝에게 있어 초월이란 저 멀리 있어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초월이 아니라, 초월성 자체가 이미 세계에 들어와 있어 세계에 틈을 내고, 그 틈으로 인해 혁명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세계 속에 개입하지 않는 초월성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성육신은 세계안으로 개입한 신의 초월성을 아주 잘 드러낸 사건이었고, 그 초월성은 2천년 동안 유전되면서 지속적으로 변혁을 위한 유령을 불러내는 주문과도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 초월의 가장 극점인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회상하는 2014년 고난주간에 그 초월을 비웃는 일이 발생해 버린 것이다. 

아! 이것이 정녕 초월의 방식인가!
아! 그래서 정녕 초월이란 “자기 속에서 자기를 능가하는 어떤 것!”이어야 했는가? 

사실 위의 문구는 정신분석학에서 많이 논의 되는 타자(the Other)에 대한 정의와도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 안에 있지만, 나를 능가하는 어떤 것,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것, 내 안에 있는 틈과 얼룩과 빈 공간…… ‘그 X로 인해 혹 그 곳이, 혹 그 날이 탈구되어(out of the joint) 불현듯 도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예감을 가지게 하는 그 무엇을 우리는 타자라 부른다.

지젝의 시선으로 이번 사건을 바라본다면, 2014년 고난주간에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이 비극은 숨어 있었던,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실재가, 그리고 그들의 타자가 커튼을 찢고 불쑥 융기한 사건이고, 이 비극은 우리에게 앞으로 많은 Sign을 허락하면서 유령을 불러내는 주술이 될 것이다.

2.
그런데, 문제는 그 타자가 지젝에게는 결핍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기존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결핍만을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적 치료란 대타자로 상징되는 세계와 사회는 완벽하다는 가정하에,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체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주체의 결핍이 주된 치료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 둘 다 이야기한다.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 그 양자의 결핍이 발생하는 복수적 결핍의 공간에 지젝은 개입하며 체제를 선동한다. 이것이 지젝의 특이한 점이다.

아래 예화는 지젝식 타자의 결핍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흥미로운 예화이다.
: 닭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믿는 환자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닭의 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치료를 받고 완치가 되어 그는 자신이 닭의 모이가 아니라, 인간임을 깨달았다. 완치가 되고 돌아가던 그 환자가 의사에게 돌아와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내가 이제 닭의 모이가 아니라 인간인 것은 알겠는데, 설마 닭도 그 사실을 알까요?” 

여기서 닭은 세계와 사회, 즉 타자를 상징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기존의 정신분석학적 치료란 정상적인 세계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에 대한 치료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그 타자 역시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대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일까? 실제로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 자살자가 많다는 것은 자살하는 사람 본인의 문제, 즉 주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살사회를 만들어 국민들을 자살로 내모는 대타자인 국가의 결핍이기도 하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결핍도 체험했지만, 그보다 더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국가로 상징되는 대타자의 결핍, 아니 붕괴이다. 주체만 정신 차렸다면, 주체가 정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보다, 믿었던(?) 대타자였던 국가가 텅 비어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잠 못 들게 한다. 완벽하게 미장센 되어있을 것 같았던 공간은 뻥 뚫려 있었고, 티끌 하나 없을 것 같았던 캔버스에는 곳곳에 얼룩이 묻어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못 했던 것은 아니나, 설마 이 정도까지 바닥을 칠 줄은 우리 중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결핍은 그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숙성시켜 왔던 것일까? 그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3.
전 시대를 ‘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하고, 현재를 ‘냉소의 시대’라고 할 때, 전자는 뭘 몰라서 생기는 문제이고, 후자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노동자, 농민은 한나라당을 찍는 것일까? 어떻게 자기 계급에 반하는 투표가 가능할까? 우리가 선거 때마다 수없이 물었던 질문들이다.

체제는 대중들이 원하는 환상을 너무나 잘 알고, 당대의 환상공식에 입각하여 새마을 운동으로, 뉴타운으로, 4대강으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그 환상들을 주입하는 데 성공해 왔다. 이렇듯, 이데올로기란 기본적으로 인민들에게 허위의식, 즉 환상을 주입하는 공식이다. 그것을 이데올로기적 조작이라고 불렀고, 80년대 운동의 1차 목적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주입하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저물고, 자본의 승리가 전 지구적으로 확인된 21세기를 우리는 냉소의 시대라 부른다. 냉소주의(Cynicism)의 기원은 그리스 견유학파의 대표격인 디오게네스로 올라가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수면으로 올라온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호와 운명을 같이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질적인 차이, 즉 사용가치를 화폐를 매개로 하는 교환가치로 바꿔버린 시스템이다. 환언하면, 전통, 개성, 성격, 역사, 명예 등등의 서사들을 비웃으며, “그런 것들 얼마면 돼?”라고 조롱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서사들은 몇 푼의 화폐로 교환되어 누군가에게 팔려가고,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통장에 돈이 입금되면 모든 것을 다 팔아 버릴 수 있는 cool한 인간이 되었다.

‘입금되면, 즉 환상이 주입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마치~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산타가 아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선물을 받기 위해 마치 진짜 산타가 있는 것을 믿는 것처럼 연기할 수 있어.” “나는 대한민국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 하지만 7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갖고 있는 성공한 대통령이기에, 마치 이 나라에 아무일 없는 것처럼 행동할 거야.” 나는 산타가 아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이고,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잘 아는 통치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대통령은 산타의 존재와 국가의 결핍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환상의 측면에서 발생한다는 말이다. 환상은 결국, 결핍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고, 환상은 결국, 얼룩을 감추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체제에 의해 수많은 환상들이 제공되면서 우리 안의 결핍을 메워왔다. 증상이란 그 결핍을 숨기는 과정에서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 생기는 얼룩과 같은 것이고…… 간헐적으로 그 증상들은 한국 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극적으로 출현하였다. 그것이 90년대 이전에는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문익환 등등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었고, 근래에는 용산에서, 밀양에서, 쌍용에서, 구럼비에서 그것들은 어김없이 제삿날 망자들의 혼령이 귀환하듯 그렇게 우리사회 구천을 떠돈다. 증상에 대해 정신분석학은 억압을 주장하지만 억압은 완벽히 억압되지 않는다. 지난 한국 현대사에서 억압되어 왔으나 완전히 억압되지 않았던 것들의 집단적 발호와 집단적 귀환이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이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4.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슬퍼해야 한다. 충분히 우리는 울어야 하고, 충분히 우리는 가슴을 치며 애통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조금 진정된 다음에, 눈이 부시게 푸르렀던 그 아이들을 다 보내고 난 다음에, 우리는 마음을 다 잡고 서서히 복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의 주요 골자는 Act이다. Act는 실재(the Real)을 드러내는 행위다. 억압당했던 실재를, 이데올로기가 선사하는 환상에 의해 메워졌던 결핍을 드러내는 행위가 Act이다.

지젝은 이 대목에서 Act와 Action을 구분한다. Action은 그때 그때 상황에 일시적 땜질을 하는 반응이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그 action을 취하는 것마저도 힘겹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촛불기도회 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몇몇 책임자 처벌하고, 일부 개각을 단행하고, 관련 법규 가다듬고, 유족들에 대한 보상 논의가 오고 갈 때쯤이면, 우리는 다시 일상에서 허덕이다 6월에 있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광장에 모여 목이 터져라 응원하면서 ‘오! 필승 코리아’를 한 목소리로 부르며 이 국가에 대한 감격을 다시 공유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오늘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젝의 현대 다문화주의 전략에 대한 지적이 나의 관심을 끈다. 세계화, 지구화, 탈영토화라는 모토아래에서 운영되는 21세기 자본의 운동은 차이의 정치학, 다문화주의에 대한 찬양과 옹호로 전환되어 전 지구를 하나로 엮어 버렸다. 이 말은 21세기 자본의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차이와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이는 특수한 것들이 보편화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감당한다.

예를 들어, 여기 homophobia(동성애혐오증)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우리 사회에서 지난 시절 불온하게 불리어 왔던 빨갱이, 전라도, 종교다원론자, 좌파 등등의 말이 지니는 기표들의 연쇄의 최종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사회의 결핍을 드러내는 위험요소들이다. 그런데 현대의 다문화주의는, 아니 자본의 위력과 아량은 이 모두를 다 포용한다. 그리하여 각자에게 우리 사회에서 기거할 자기만의 방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 방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동성애가 갖는, 빨갱이가 갖는, 좌파가 갖는 틈으로서의 잠재력은 사라진다. 그냥 단순한 This is one of them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의 타자는 타자성이 거세된 타자이고, 나와 일치하고 내가 공감하는 타자이다. 그리고 그 타자에 대한 환대와 수용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이러한 수평적 다양성은 라끌라우가 말하는 수직적 적대, 지젝식 틈새와 결핍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최후로 남겨진 수직적 적대라고 할 수 있는 절대 관용할 수 없는 타자는 역으로 공격해도 무방한, 이 사회에서 셈을 안 해도 되는 그런 존재로 정당화된다. 무슬림 세력이 대표적이고,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는 이들을 대표하는 표제어가 되었다.

에필로그

세월호 침몰사건은 대한민국의 수직적 적대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머지않아 사건이 진정되면서 수평적 다양성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물타기 전략이 흘러 넘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보편적 차원으로 고양되어야 할 Act를 가리우고 상황에 안주하는 Action 차원에서의 논의와 대책들이 요란하게 흘러 넘쳐 우리의 혼을 빼앗아 또 다시 이 논의에서 우리를 소외시킬 것이 뻔하다. 이제부터 두 눈을 부릅떠야 할 것이다.
Act는 사회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세월호 침몰은 대한민국 사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극명한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 긴장을 어떻게 유지하여야 하고, 어떻게 변혁을 위한 보편화의 가능성으로 이끌어 낼는지는 여기 이곳에 구차하게 살아 남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고, 어린 망자들을 향한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고 애도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한겨레 21, 제1008호 (2014. 4.28) 표지문구를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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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과 신학 (I)
: “신은 죽었다” Vs. “신은 무의식이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4시간 후에 당신이 죽는다면…

몇 해전 30대 이상 미국 남녀에게 ‘4시간 후에 당신이 죽는다면…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물었더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언뜻 생각하면 사랑하는 부모, 아내, 남편,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해, 정말 사랑해~ 너와 함께 한 이생에서의 삶은 다시 생각해도 최고였어!’라는 숭고하고 가슴 벅찬 말을 할 것 같은데, 성인 남자들의 답변은 남아있는 최후의 4시간 동안 ‘본인의 개인용 PC 하드 안에 저장된 포르노를 다 지우겠다!’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여자들은 화장대 서랍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자위기구들을 제일 먼저 처분하겠다는 답변이 많았다. 남녀 공히 높은 순위에 있었던 항목은 이메일에 남겨져 있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나눈 은밀한 대화, 혹은 사랑의 연서를 지우는 것이었다. 종합하면, 최후로 남겨진 이생에서의 4시간 동안 우리는 불륜의 흔적을 지우고, 내 욕정과 쾌락의 흔적을 찾아 말살한 후, ‘나는 비교적 정결하고 하자없는 사람이었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다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는 뜻인데... 
뭐 그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서구인들이라 ‘새삼 정결하고 정숙하게 보이려 애쓰지 않으리라!’예상했으나 (신앙 생활 열심이라는 한국 크리스챤들은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까지는 드러내지 말자!’라는 의식이 그들 뇌리에 여전히 잠재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나를 살짝 놀라게 했다. 이 글을 읽는 한국에 있는 독자들은 4시간 후에 당신이 죽는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신의 죽음

서구정신사에서 니체만큼 매혹적인 인물이 있었을까?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기관차처럼 종말을 향해 겁없이 달려가 막다른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바로 니체다. 이런 이유로 일찍이 푸코는 그 부서진 니체의 파편이 천 개쯤 될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니체는 그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서구 근대를 향한 본인 특유의 돌직구를 날리기 시작했고, 갈수록 구위가 날카로워지더니 급기야는 본인 사상의 후반기로 가서는 기독교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을 수없이 마구 퍼부었는데, 그것의 최종 판본이 “신은 죽었다”[각주:1]라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 신을 ‘우리가 죽였다(we have killed him)’라는 니체의 고해성사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겁없이 니체가 위와 같은 위험한 발언을 할 수 있었지?’ 물론, 이런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는데, 이는 서구 근대화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니체의 발언이 독하긴 했지만)

왕의 죽음

근대적 주체는 신을 죽이기 이전에 이미 왕의 목을 벤 전력이 있다. 프랑스 인민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이 그것이었다. 왕의 폭정에 맞서 파리의 시민들은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1789). 민중들의 행보에 불안을 느낀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인민들은 프랑스 인권탄압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구제도(앙시앵 레짐)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절정을 향해 치닫게 된다.
시위가 탄력을 받자 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인권 선언문에서 제시된 천부적인 인간의 자유와 평등, 국민 주권, 언론.출판의 자유 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민주적 시민사회 운영 원칙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혁명을 진압하려 하였다. 더욱이 루이 16세는 본인을 향한 국민적 저항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왕후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은밀하게 국외망명을 시도하려다 발각되고 만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나마 국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일부 세력들마저 완전히 등을 돌리면서 정국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데…
임기 2년의 국민의회가 끝나고, 제한선거와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근거하여 입법 의회가 소집되었고,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개발로 부를 축적한 상공업자 중심의 신흥 부르지와 계층과 봉건제의 폭정과 불합리에서 벗어나고픈 부농들이 결합한 지롱드 파가 대두하여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반역의 기운에 대한 수구세력의 대응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기존 구질서에 종속되었던 세력들과 주변국 군주들은 프랑스혁명이 본인들에게 미칠 파장에 대해 경계하였고, 혁명의 진전을 방해하려는 공작을 도모하였다. 정국 상황이 이렇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프랑스 인민들은 왕궁을 습격하여 왕권을 정지시키고 공민공회를 조직한 후에,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을 선포하였다.(제 1공화정, 1792). 그리고, 그 다음 해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1793, 1).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이다.[각주:2]

"느낌 아니까~"(개콘버전으로)

자고로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의 지위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왕권신수설’에 입각해 있었던 사회였던지라, ‘인민의 손으로 왕을 처단했다’ 함은 그 동안 우리사회를 지탱해주었던 왕의 법과 하늘의 도에 대한 폐기처분, 내지 사망선고와도 같은 사건이라 볼 수 있고, 이는 더 나아가 신의 죽음까지도 감히 도발케 하는 담력과 욕망을 근대인들에게 제공하는 빌미가 되었다. 실제로, 물리적 왕이 제거된 지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 니체는 ‘신은 죽었다’(1882)라고 선언하였다. (개콘버젼으로, ‘느낌 아니까~’)
이렇듯 그 동안 우리를 지켜주었던 신적인 원리와 선험적 중심의 균열을 지켜보며 19세기는 세기말적 불안과 공포속에서 사라져갔고, 그 균열과 텅빈 중심을 예감하며 20세기는 우울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라지는 중심은 비어있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다. ‘내용 없는 중심’이라는 근대성의 새로운 공리는 그 비어있는 중핵을 채우려는 분투들을 야기시켰는데, 지금 회상해보니 근대의 정신이란 당시 봇물 터지듯 분출되기 시작했던 탈중심화된 개별적 사상 혹은 그것들이 지닌 특수성을 아우를 수 있는 있는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 담론형성의 원칙 뭐 그런 것 아니었나 싶다.
에덴을 떠나간 하와와 아담 이후 후손들이 다시 무리를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탈향을 극복하면서 삶을 지속해갔던 것처럼, 바벨 이후의 자손들이 세상으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내동댕이쳐진 서늘한 그곳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진 천형이라 할 수 있는 방언을 세워나갔던 것처럼, 사라진 왕의 자리와 神의 이름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어야 했고, 이에 대한 답으로 근대는 최종적으로 ‘주체로의 전환 Turn to the Subject’이라 말을 고안해냈다.
막스 베버는 이를 ‘근대의 숙명’으로, 맑스주의는 이를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프랑크푸트트 학파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하버마스는 ‘대화적 합리성’으로 각각 달리 표현했지만, 이 독일의 사상가들의 뇌리에는 공히 그 텅 빈 중심을 향한 집착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점이 현대의 프랑스 사상가들과 대결하는 대목이기도 하고) ‘20세기는 이런 주체성의 한계가 어느 선까지 가능한지 실험되었던 장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지적일까?

지젝이 던지는 화두

지젝은 20세기 내내 실험되었던 사회주의 몰락 이후, 근대성 전체를 관통하는 주체성이라는 코드의 상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허무를 지적하면서,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시 살아 남아야 하는지? 어떻게 다시 사회를 조직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한 법과 정치의 형태는 무엇인지? 냉소가 판치는 이 시대에서 새로운 윤리적 전략은 무엇이고, 신의 무능과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이 시대에서 우리는 신학에 어떤 말을 다시 건넬 수 있을지?’에 대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진다.
니체 이후 현대인들은, 아니 엄격히 말하면 갈릴레오가 법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던 그 무렵부터, 칸트가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던 빛의 단절을 선언하며, 인간 경험 너머를 알 수 없는 영역, 즉 물자체로 선포하던 그 무렵부터, 신은 사실상 죽었던 것은 아닐까? 이미 그때부터 대타자의 붕괴는 감지되었고, 빈틈이 없었던 城의 어느 구석에서부터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간극은 매울 수 없는 현실의 질서가 되어버렸고...
그래 맞다. 돌이켜보면, 이미 신은 오래 전부터 쭉 그렇게 죽어있었다. 신의 죽음’을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우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마치 똥 싸놓고 뭉개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태연히 현실의 놀이에 몰두한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지젝의 신 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젝과 신학>을 시작하며

하지만, 대타자의 균열을 충분히 분명히 감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일말의 불안이 우리에게는 있다: “신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우리는 신의 부재를 알고, ‘그 신이 과연 본인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알랑가몰라~’ 하면서 신을 조롱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일말의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 불안이 숙주처럼 잠재해 있다. 그렇게 그 불안은 숨어있다가 ‘4시간 후 지구가 멸망한다면?’이라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포르노 파일을 지우고, 자위도구를 없애고, 애인과의 불륜의 흔적을 제거하는 무의식적 행위를 하게끔 하는 동인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지젝은 라깡의 말은 빌어와 “신은 무의식이다”[각주:3]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해설에서부터 다음 원고는 시작될 것이다)

이번 웹진부터 <지젝과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한다. 흔히 지젝의 신학을 유물론적 신학, 유물론과 신학의 조화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렇듯 조야한 나의 지젝 이해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젝과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려는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씁쓸한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이제는 신학에 대해, 한국교회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이 서글픈 현실 속에서, 전통적인 신 담론에 입각했던 교회의 타락을 ‘대타자의 붕괴’, 혹은 ‘실재의 균열’로 이해하고, 그 균열과 붕괴, 그 연약함과 불완전한 지점에서부터 다시 신을 바라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젝을 통해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구원의 패러다임을 다시 꿈꿀 수 있다면………정말 좋겠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God is dead. God remains dead. And we have killed him. How shall we, the murderers of all murderers, comfort ourselves?”- Nietzsche, Friedrich., “The Gay Science 125” in The Portable Nietzsche, Edited by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8), 95. [본문으로]
  2.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제1공화국 이후 등장했던 나폴레옹 시대가 몰락한 후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은 빈 회의(1814-15)를 개최하여 정통주의와 복고주의 원칙하에 유럽의 질서를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회귀시키려 하였다. 그 일환으로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여 다시 ‘앙시앵 레짐’으로 복귀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에 프랑스 시민들이 다시 봉기하여 민주주의를 사수하면서 제2공화정 수립을 향해 다시 피 눈물나는 혁명을 감행하는데… 그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바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이다. [본문으로]
  3. Lacan, Jacques.,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ed. Jacques-Alain Miller, tr.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78), 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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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I)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2)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이어도 사나~~

우리집은 내가 열 살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도에서 서울 한복판 종로3가로 이사 왔다. (그 문화적 충격이란… 그에 대한 사연은 다음 기회에 또 나누기로 하고) 당시 제주에는 19세기에 출생한 팔십이 넘은 나의 증조 할머니가 생존해 계셨다.  줄곧 제주에서 사셨고, 제주에서 한일합방과 일제시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박정희까지 모두 감내했던 분이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4.3까지…

할머니는 해녀였다. 지금은 제주해녀가 많이 줄었다지만, 할머니가 젊었을 때 만 해도 그냥 일상적으로 동네 아낙들이 바다로 들어가 물질(제주 해녀들이 바다로 들어가 전복, 해삼, 낙지 같은 것을 포획하는 활동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을 하였다고 한다. 해녀가 무슨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말이다. 옛날 지리시간에 배워서 알겠지만 제주도는 섬 전체가 화산섬 현무암 지대로 물이 흘러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해안가에서 쏟아 오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민가들이 해안가를 따라 분포하였다. 그냥 마을 길 따라 걷다보면 바다가 나온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당시 제주 바다는 제주 인민들에게 중요한 삶의 자원이었고, 그 몫은 당연히 생활력 강한 여인들의 차지였다. 나의 증조할머니도 젊었을 때는 빈번히 물질에 참여하셨다고 당시를 회고하셨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랑 같이 있다 보면 당시 물질할 때 불렀다는 노동요들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듣는 알 수 없는 곡조에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를 읊조리던 할머니에게 “그게 무슨 노래야?” 라고 버릇없이 묻던 증손자를 할머니는 마냥 귀엽다 쓰다듬으며, 그냥 옛날에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불렀던 노래라고만 답하셨다.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바로 ‘이어도 사나’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는 전설 속 섬 파랑도(‘이어도’의 정확한 명칭)를 찾기 위해 벌이는 수색전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군함정까지 동원된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이어도는 모습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고, 수색종결을 선언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색작업 취재차 승선했던 제주출신 천남석 기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천남석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육지에서의 시간보다 바다위에서 생활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아버지는 이어도를 찾아 떠나야겠다며 수평선을 넘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어도를 목놓아 노래하다 밭이랑 사이에서 죽는다.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 이청준, ‘이어도’ 中

‘이어도’는 제주 뱃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피안의 섬이다.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어도’로 갔다고 믿었다. 나의 증조할머니가 불렀던 구전가요 ‘이이도 사나’는 이어도 관련 가락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이어도 가니?’ ‘이어도에 사느냐?’라는 뜻이 가사에 내포되어 있다. 천남석은 섬사람들의 이 지긋지긋한 이어도를 향한 집단무의식, 당신의 아비와 어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어도’로 인한 정신의 가위눌림, 그리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어도에 대한 부질없는 환상에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이어도 탐사작전에 비장한 마음으로 승선하였던 것이다.
 
전설 속 섬이었던 이어도의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제주 남쪽 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된 이후이다. 영국해군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마침내 1910년 수심 5m 아래 암초를 측량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이어도’는 국제적으로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 불린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1984년 제주대 탐사팀이 마라도 서남쪽 149Km 떨어진 곳에서 정상부가 해수면 5m 아래에 있는 4개의 봉우리로 구성된 거대한 수중암초를 확인하였다.

수심 5m아래 거대한 지대가 있다 함은 조금 높은 파도가 일면 그 형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소설속 천남석의 아버지가 “파도로 정신을 잃어 의식이 혼미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이어도를 보고 살아 돌아왔다고…그 이어도를 다시 찾으러 가야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탐사결과를 놓고 볼 때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어도는 존재하는가?

 

<검은 집>에 들어가기까지

지젝은 본인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의 예제풀이 성격의 책인 <Looking Awa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1991)를 <The Sublime Object…>가 세상에 나온 2년 뒤에 출판하였다. <Looking Away…>를 연습용이라고 한 이유는 대중문화, 소설, 오페라, 히치콕 등을 끌고 들어와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서 언급한 이론적 내용들을 보다 알기 쉽게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지젝은 이 책에서 미국 작가 하이스미스의 단편소설 <검은 집>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실재에 대하여,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텅 빈 실재를 메우는 환상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그의 앞으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옛날 필자가 어렸을 때 검정 뿔테 안경쓰고 영화 해설을 하던 정영일이라는 영화평론가가 있었다. 그 분은 지금처럼 인터넷도 발달되지 않았고 씨네 21도 없었던 그 시절에 TV ‘주말의 명화’ 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아저씨였는데, 소년 상철이 보기에 정말 멋지고 근사하고 똑똑했었다. 그 아저씨 영화해설에 빠져 영화를 보겠다고 기다리다(보통 밤 10시 10분에 주말의 명화는 시작됨)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잠들었던 기억이 얼마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남배우 알랭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분명히 본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위선, 탐욕… 뭐 그런 것들을 다룬 영화였던 것 같은데, 보고 나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영화였다.

영화 <태앙은 가득히>의 원작 소설작가가 바로 <검은 집>을 쓴 하이스미스이다. 지젝의 <Looking Away…>에서 언급한 소설 <검은 집>을 필자는 3년 전 한국 방문 했을 때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오래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이 오버랩 되었다. 왜지?

 

언덕 위 그 집에는 마돈나가 있다/없다

<검은 집>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원작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자 나름대로각색을 했는데 양해 바랍니다)
무대는 미국 시골 어느 선술집, 날이 저물면 마을에 사는 남자인간들이 하나 둘 그곳으로 모여 들어 언덕 위 ‘검은 집’에서 있었던 자신들의 추억을 안주 삼아 시간가는 줄 몰라 한다. 응삼이는 검은 집에 홀로 사는 마돈나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함께 한 후, 테라스에 포개어 앉아 함께 바라보았던 저녁노을을 이야기하고, 갑돌이는 마돈나와 함께 새벽 산책을 나갔는데 갑자가 비가 쏟아져 몸을 급하게 숨긴 처마밑에서 우발적으로 감행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회상하고, 술에 취한 병태는 동공이 풀린 채 마돈나와 나누었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맞닥뜨리는 탁 트인 서재 건너편 첫 번째 방 하얀 커튼이 드리우져 있었던 침실에서의 정사를 고해성사 하듯 읊조린다. 

그때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마을로 새로 이사온 한 젊은 엔지니어가 “내가 그 집에 가서 마돈나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여러분, 그 집과 마돈나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함께 갈 사람 없습니까?” 그 젊은 엔지니어의 제안에 아무도 마을의 남자들은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 청년 혼자 언덕 위 검은 집으로 올라가는데…
여기까지의 플롯은 카프카의 <성城>을 연상시킨다. 마을 사람의 경외의 대상인 성을 측량하러 온 젊은 측량 기사 K, 그러나, 소설 ‘성’에 등장하는 K는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반면, 하이스미스는 젊은 엔지니어를 언덕 위 검은 집으로 과감히 올려보낸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예상했겠지만, 측량기사, 엔지니어는 근대성, 과학, 합리성, 이성…뭐 그런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겠고, ‘성’과 ‘검은 집’은 신화, 전설, 전통, 무의식…뭐 그런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물론, 지젝은 이런 얕은 수에 관심하지 않는다. 좀 더 소설을 따라가보자.

언덕 위 검은 집에 도달한 젊은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응삼이가 마돈나와 함께 저녁노을을 보았다던 테라스는 축대가 무너져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갑돌이가 새벽산책길 마돈나와의 경이적인 첫 키스의 사연이 묻어있던 처마 밑은 누군가가 쳐놓은 녹슨 철조망 때문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2층 탁 트인 서재를 지나면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병태와 마돈나의 하룻밤이 새겨져 있다던 그 방엔 천장에는 거미줄이 난무했고, 창문은 깨어져 있었으며 하얀 커튼은 갈기갈기 찢겨져 깨진 창문 틈 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언덕 위 검은 집은 폐가였던 것이다. 그럼 마돈나는 어디에?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마돈나의 자취는 그 집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집을 나오려는 찰나에 1층 화장실 깨진 거울 틈새에 꽂혀 있는 사진 하나가 그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빛 바랜 흑백사진이었고, 사진 밑에 적혀있는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사진 속 주인공은 백발마녀 같은 허리가 약간 꾸부정한 노파였고, 그의 왼손에 보드카 병이 쥐여져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Lovely Madonna! 라는 문구가 사진 밑을 장식하고 있었다. 설마 이 노파가 마돈나?  청년은 그 사진을 들고 마을로 내려갔고, 술 집에 모여있는 그 남자인간들에게 언덕 위 폐가를 돌아본 소감을 전달한 후에, 사진을 식탁 위로 던지며 “이 노파가 당신들이 말하는 마돈나인가?”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순간, 떠들썩했던 그 술집엔 찬물을 끼어 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년은 짦은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며 피를 흘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청년 뒤로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응삼이가 서 있었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오늘은 살인죄로 징역을 살던 응삼이가 석방되는 날이다. 병태, 갑돌이를 비롯한 동네 몇몇 남자인간들이 감옥 앞에서 두부를 들고 응삼이를 반갑게 맞이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새롭게 장소를 옮겨 단장한 Bar에서 축하주를 마시면서 그 동안 못다한 밀린 이야기를 하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응삼이가 갑자기 불쑥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난 그럴 수 밖에 없었어…어떻게 그 놈이 그것을 건드릴 수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구!” 응삼이의 최후 변론을 듣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의를 하면서, “그럴 수 밖에 없었지.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어. 응삼이 네가 안 그랬어도 우리 중 누군가 아마 그렇게 했을거야. 암 그렇고 말구. 그걸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잔에 술을 채우고 브라보를 외쳤다.[각주:1]

 

에필로그: 남겨진 질문들

앞서 살펴보았던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에게 있어 ‘이어도’는 어떤 의미였을까? <검은 집>에 등장하는 응삼이에 있어 검은 집과 마돈나는 무엇인가?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 그리고, 지젝은 무엇을 이들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가? 다음 웹진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검은 집]에 대한 에필로그: 10년 넘게 페미니스트 아내와 사는 까닭에 나는 [검은 집]을 읽으며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했다. 이 작품이 남자인간들의 관음증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에 기반하지 않나?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소설에서 ‘검은 집’을 향해 환상을 투사하는 존재는 오로지 남자인간들뿐이고, 여자는 남자 인간이 꿈꾸는 환상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에어리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환상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미묘하고 설명하기 힘든 차이가 존재하며,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남자들의 환상공식이 응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다. 우리 남자들에게 있어 환상이란 잉여쾌락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마을 사내들에게 검은 집과 마돈나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현실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흘러 넘치는 공간이고, 그 잉여의 꿈과 욕망을 투사하고 실현시켜주는 일종의 스크린이다. 영화관이 밝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영화의 해상도가 낮아져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이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아 신경질이 난다. 그래서 영화관 안은 어두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상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서는 말이다.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이렇듯 음습한 남자들의 환상 메커니즘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인간의 환상작동방식은? 남자인간들과 다르지 않을까? 그럼, 책 제목은 [하얀 집]이 되어야 하나? (이 우매한 남자인간의 질문에 대한 여성 필자의 현명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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