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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환경 멜랑콜리아 (Environmental Melancholia)(양권석)

시평

by 제3시대 2018. 11. 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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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멜랑콜리아(Environmental Melancholia)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1. "지구온난화 1.5℃"의 경고

2018년 10월 1일부터 5일까지 인천에서 열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회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제48차 총회 보고서가 10월 8일에 "지구온난화 1.5℃"(GLOBAL WARMING OF 1.5 °C)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는 금세기 말까지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2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하면서, 1.5도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한 2015년 파리 기후협약의 합의에 따라,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2도가 아니라 1.5도로 묶기 위해 전면적이고 공격적인 정책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문서다.


보고서에 의하면 인류는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혁명 직전 보다 2도 이상 올라간 상태에서 살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단 150년 동안에 지구 평균 온도는 이미 1도가 올라 있다. 인류의 무절제한 삶은 수백만 년에 걸쳐서 일어날 지구의 기온 변화를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초래한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례 없는 기상 이변, 곧 지난 여름의 폭염, 집중 호우, 가뭄, 혹한, 폭설, 해수면 상승, 매우 높은 강도의 태풍이나 사이클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현재의 삶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보고서가 말하는 1.5도 상승은 물론이고, 2도 상승도 지키기 어렵다. 보고서에 의하면 1.5도는 우리가 기후 변화를 통제할 수 있는 한계범위를 말하는 임계점이요, 수억의 인구를 희생시킬 수 있는 환경 재앙이 시작되는 문턱이다. 그런데 그 문턱이 너무 가깝게 와 있다. 현재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2030년에서 2052년 사이에 그 임계점, 곧 1.5도 상승에 도달할 것이고, 재난은 이미 시작된다는 것이다. 2030년과 2052년 중간인 2040년 정도에 임계점이 온다고 보면 불과 22년 남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보고서는 지금 살아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이미 위기와 재난이 닥쳐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도 변치 않고 지금처럼 계속 살아서 2도 상승이 온다면, 그야말로 지구는 지옥 그 자체가 된다. 지구 평균기온이 2도 이상 상승하면 여름철 폭염으로 유럽에서만 수만명이 사망하고, 10억~20억명이 물부족에 시달리고, 세계 생물의 3분의 1이 멸종위기에 내 몰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재난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지역의 취약한 계층들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힐 것이기 때문에, 기후 문제는 곧 가난과 정의의 문제요 평등의 문제임을 역설하고 있다. 보고서는 1.5도 상승과 2도 상승의 경우를 비교하면서, 상승폭을 1.5도로 유지할 수 있으면, 21세기중반까지 1000만명을 수몰 위기로부터 보호할 수 있으며, 육지의 동식물이 서식지를 잃을 확률이 2배 줄어들고, 수억 명이 기후 관련 위험에 노출되고 빈곤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물부족으로 시달릴 인구도 최대 50% 이상 감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보고서를 위해 연구와 집필에 참여한 많은 학자들은 한 목소리로 1.5도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지금 즉시 전면적인 행동을 시작하도록 촉구한다. 그 첫번째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45% 줄여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야 제반 요소를 고려할 때 1.5도 상승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30년이면 불과 12년 후다. 10년 내에 인류 문명사에 있어 본적이 없는 혁명적 변화가 없다면, 지구 온도 상승을1.5도로 묶을 수 없다는 말이다. 너무나 가까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재앙은 이제 고개를 돌려도 귓전을 때릴 만큼 가까이 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변화와 결단을 위해서 망설일 시간 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엄청난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의외로 평온하고, 언론들 마저도 매우 차분한다. 이 나라의 언론들은 이 보고서가 말하는 엄중한 경고와 전면적인 변화를 위한 결단의 요청은 무시한 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는 구실로만 삼고 있다. 이번 달 “기독교 사상”의 권두언을 쓰면서 나는 이 보고서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글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맺는 말로서 "왜 우리는 모르는 척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기억해 보면, 이 정도의 경고를 지난 달에 비로소 들었던 것도 아니고, 그것도 한두 번 들었던 것도 아니다. 영화, 다큐멘터리, 그리고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쏟아져 나오던 재앙에 대한 경고를 충분히 들었다. 이처럼 경고는 충분히 가까이 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 사실은 기후 변화의 영향을 몸으로 겪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미세먼지로 가득한 나날을 견디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왜 임박한 엄청난 재난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무일 없을 것처럼 그저 일상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것일까? 왜 나는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은 기후와 환경 변화의 문제를 심각하게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라는 그 긴급한 요청은 왜 그렇게 어이없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닥쳐오는 위기를 몰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경고가 약한 때문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느끼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힘 때문인가?


2. 환경 멜랑콜리아 : 무엇이 공감을 가로막는가?


이처럼 환경 훼손이나 재앙의 경고에 직면해서도 반응을 나타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방어적이거나 회피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문제와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환경 우울증" 혹은 "환경 멜랑콜리아"(environmental melancholia)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심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이 보여주는 환경 위기에 대한 방어적, 회피적, 공감부재의 현상은, 환경재앙에 대한 경고의 불충분함이나, 환경재앙에 대한 무지나 무감각 혹은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환경의 파괴나 훼손이 가져오는 상실감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실의 느낌과 정서를 충분히 표현해 낼 수 있는 언어나 담론과 같은 수단이 없거나, 아니면 그와 같은 상실의 충격을 표현하는 것을 가로 막는 심리적 문화적 억압기제가 있어서, 당사자가 상실을 충분히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그 상실의 충격을 애도로 풀어 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더 나아가 이렇게 충분히 의식하거나 애도하지 못한 상실의 충격이 우울증으로 자리잡고, 이것이 일종의 환경적 무의식 혹은 중후군이 되어서, 환경 훼손의 충격과 재앙의 경고에 대한 방어적, 회피적, 공감불능적 태도로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한다.


심리학적으로 멜랑콜리아란 상실의 충격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포박당해서 애도를 향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면서 동시에 아직은 애도로 조직되지 않은 미완의 복잡한 상태를 말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멜랑콜리아는 완전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상실이어서, 그 상실을 애도할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상태이며 우울증이다. 사람들은 환경적 상실을 느끼고 감각하면서도 그 상실의 충격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을 애도할 수도 없는 상황에 계속 직면함으로써, 우울증 상태를 심화시켜 가게 되고, 그것이 일종의 환경 무기력증, 환경 무감각적인 상태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환경 훼손이나 위기에 대해서 보다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대응할 수 있게 하려면, 정말 필요한 일은 경고의 강도를 더 높이거나, 더 무서운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더 깊은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억눌린 우울과 멜랑콜리라의 상태를 충분한 애도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실천으로 풀어내는 일이다.


여기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환경 훼손이나 상실의 충격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깊이 파악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처럼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그런 장애물을 훨씬 더 선명하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경험한 산업화로 일컬어지는 근대화 과정은 사실상 환경과의 분리와 환경 훼손을 합법화해 온 과정이었다. 산업화된 근대 자본주의 세계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자연환경이 나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부인해야 했고, 경제적 부강을 위해서 환경과 자연의 훼손을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찬양하기까지 했었다. 자연 환경이 사람들의 삶이나 정신이나 심리와 맺는 관련성을 말하는 것을 전 근대적 미신으로 치부했었다.


이런 세계 속에서, 환경적 훼손이나 상실의 충격을 충분히 의식하려는 노력 자체가 억압당하고 배제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실의 충격을 공적으로 다루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 허락된 언어와 담론의 교환 지평은 환경적 상실의 경험을 의식하고 표현해 내려는 시도 자체를 공적인 영역을 향한 사적인 것의 무례한 침범으로 간주했었다. 때문에 환경적 상실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담론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존재 기반을 뿌리 채 흔드는 것이었을 수 있는 상실의 경험을 표현하지 못한 채 누르고 감추어야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사람들은 이미 산업화된 근대세계의 삶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만큼, 충분한 상실의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충격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내거나, 충분히 의식해 내는 일은 허락되지 않은 무례요 불경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표현한다면 그것은 산업화된 근대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근대 사회는 환경 상실의 충격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담론을 제공하지 않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상실의 충격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나 반응을 억압하는 사회이며, 그래서 환경 우울증을 계속 심화하는 사회, 곧 환경의 재앙과 위기에 대한 무감각 무관심을 계속 강화하는 사회다. 그래서 환경적 상실의 충격은 의식할 수 있는 기회도 애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구체적인 표현 형식을 갖지 못하거나 아니면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고 만다.


3. 멜랑콜리아를 변화를 향한 힘으로 풀어내는 교회


그러면 이 환경 우울증 혹은 환경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일가? 진단의 역순이 곧 치유의 과정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환경적 훼손이나 상실의 충격을 충분히 의식해 내고, 또 표현해 낼 수 있는 길을 허락해야 하고, 상실의 충격과 쌓여온 우울과 멜랑콜리아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애도과정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상실의 과정을 사적인 경험의 과정으로 배제하고, 그 상실을 의식할 수 있는 언어와 담론의 가능성을 차단해 왔던 만큼, 그 의식의 과정을 복구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인 공간과 언어와 담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의식화의 과정을 사회적 실천으로 풀어내는 집단과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억눌린 우울감과 멜랑콜리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과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몸과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감각과 정서들을 자유롭게 표출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표현을 억제해 왔던 모든 방어기제들을 내려놓고, 자신들 안에 충분히 있는 창조적 회복적 능력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의 힘과 만나게 해야 한다.


아마도 이런 것이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의 경고가 보내는 교회와 신학을 향한 요청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환경 멜랑콜리아의 치유할 수 있는 공동체, 곧 상실의 충격을 의식하고 풀어 낼 수 있는 언어와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신속하고도 전면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보고서의 요청에 비하면, 너무나 더딘 과정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 온 삶을 바꾸어 내고 다시 세우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결국 우리 안에 숨겨진 변화를 향한 힘, 곧 오랫동안 억눌려 쌓인 환경적 우울 혹은 멜랑콜리아적 증후들을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과 동력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급해도 재앙에 대한 공포심보다는 환경과 인간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려는 근본적인 자비와 사랑과 공감의 힘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올바른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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