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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다시, 석과불식(碩果不食)의 희망을 심는다.(양권석)

시평

by 제3시대 2019. 1. 1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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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석과불식(碩果不食)의 희망을 심는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흔들리는 희망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은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전망하는 사자성어를 뽑아서 발표한다. 지난 연말에는 ‘任重道遠’(임중도원)이라는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 실린 고사성어를 선택하였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수들이 2위나 3위로 뽑은 말도 비슷한 답답함, 불확실함, 불안감을 담고 있다. 2위는 密雲不雨’(밀운불우)라는 사자성어인데, 구름만 가득 끼여 있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도 인내를 강요하는 답답함이 있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가득하다. 3위는 ‘功在不舍’(공재불사)인데, 성공은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음에 있다는 뜻이다. 변화와 개혁을 향한 의지를 격려하는 듯도 하고, 밀어 붙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권력을 비꼬는 듯도 하다.


어쨌든 개혁과 변화를 향한 동력이 점점 약해지고, 기득권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촛불의 꿈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그 세 가지 사자성어 안에 함께 있다. 검찰개혁이나 사법개혁은 결국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고, 개혁의 동력은 확연히 약해지고 있으며, 머지않아 권력을 수성하기에 급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말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날로 더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파인텍 노동자들은 다시 높은 굴뚝 꼭대기로 오르고 있고, 구의역 김군의 죽음을 기억하며 촛불을 들었던 그 간절한 희망들을 조롱하듯, 다시 외주화된 죽음의 행렬이 태안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 정보기술(IT) 용역업체 청년 노동자, 그리고 며칠 전 화성에서 자동문 설치 작업을 하다 문에 끼여 목숨을 잃은 또 한 명의 20대 청년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무시해 왔고,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감내해 온, 방치하고 외주화해 온 위험은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전문의 임세원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무시하고 방치하고 외주화 해 온 위험이 불러온 또 다른 비극이다. 자살과 우울증이 만연한 현상을 경제발전을 위해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여기는 사회, 그래서 가능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자살과 우울의 위험과 고통을 숨겨 놓고 싶어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만들어낸 죽음이다.


모든 것을 경제적 상업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 환원시키는 사회, 그래서 집단 체면처럼 위험을 방치하고 외주화하고, 자살과 우울을 당연시 여기는 이 사회는, 이미 폭력적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 안에서 평화와 화해에 관한 논의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망상이 되거나 아니면, 상업적 손익 계산 속으로 수렴되고 만다. 이런 사회가 말하는 평화는 전쟁과 폭력에 대항하여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폭력과 정복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개혁, 변화, 그리고 평화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보다 분명하게 설명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해서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숙고하고 성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고 신영복 선생은 씨과실은 먹지 않고 땅에 심어 새 날을 기약한다는 의미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동서고금을 통틀어 자신이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씨과실을 내일을 향한 희망으로 심는 과정을 엽락(葉落), 체로(體露), 분본(糞本)이라 하였다. 엽락은 말 그대로 잎사귀를 떨어내는 일이다. 거품과 환상을 걷어 내라는 이야기다. 진실과 아픔을 외면하게 하고, 끊임없는 욕망과 집단체면에 우리를 묶어 놓은 그 환상과 거품을 걷어 내라는 이야기다. 체로는 삶의 뼈대를 발가벗겨 놓고 직시하라는 이야기다. 우리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시하라는 이야기다. 없어도 사는 거품과 치장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분본은 말 그대로 진짜 뿌리를 보존하여 그것을 덮어 보호하고 거름을 주라는 이야기다. 엽락, 체로, 분본은 지금의 상황에서 다시 희망을 붙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가 깊이 새겨 보아야 할 가르침이라고 여겨진다.


죽음의 질서 안에서 생명의 길을 선택했던 여인[각주:1]


엽낙하고 체로하고 분본하여 석과불식의 희망을 길러내야 하는 이 때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가 읽었던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를 다시 생각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지라르는 이 재판 이야기를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내기 위한 길을 찾는 목표와 맥락 안에서 읽는다.


이야기가 전제하고 있는 처음 상황은,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인이 서로 자신이 그 아이의 어미라고 말하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애초의 상황은 친모를 가려내는 상황이기 보다는, 서로 간의 소유권 주장이 대칭적 균형을 이루며 팽팽하게 주장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소유권 분쟁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 현명한 왕은, 소유권 분쟁의 해결 방식, 즉 분배정의의 방식을 적용하여, 아이를 죽여 둘로 갈라 나누어 가지라는 방책을 제시한다.


지라르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상황이, 인간 사이의 모든 갈등의 본질적 모습이다.[각주:2] 서로가 같은 것을 욕망하면서 다투고 경쟁하고 갈등하는 상황이다. 아이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소유의 욕구를 채우려는 상황, 이것이 바로 모든 갈등과 폭력의 근본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 다시 말해 아이를 죽여, 몸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라는 왕의 해결책 앞에서, 두 여인은 서로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


먼저 아이를 죽여 둘로 갈라서 나누어 갖는데 동의한 여인을 생각해 보자.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지만, 어쩌면 지금도 그런 일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에서 그 여인은 아이를 깔고 자 죽인 어미다. 지금 분쟁의 대상이 된 그 아이에 대해서, 어떤 진정한 사랑이나 모정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 경쟁자인 상대방이 소유한 것을 자신도 소유하려는 욕망이 사로잡힌 여인이다. 그래서 아이의 생명까지도 소유를 위한 대상으로 객관화하여 보는데 익숙한 여인이다. 같은 것을 소유하려는 그 욕망은, 어차피 내 것이 안된다면, 내 것도 너의 것도 안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여인이다. 아이를 향한 애정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경쟁적 집착이 모든 판단을 가려 버린 삶이다. 경쟁하는 서로를 향해서 빈틈없이 사로 잡혀 있는 관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갈등의 악순환을 끊임없이 불러오는 삶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며, 끊임없이 누군가의 희생을 요청하고 강요하는 삶이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희생당한 자들의 아픔을 헤아리거나 공감할 능력을 잃어버린 삶이다. 그야말로 폭력적 희생의 메커니즘에 포로가 된 삶이다.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한 여인을 생각해 보자. 이 여인은 자신의 모성적 권리를 포기할 각오로 아이를 살려줄 것을 요청한다. 가짜 어미가 아이를 희생시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면, 다시 말해 누군가의 희생을 통한 정의를 요구했다면, 이 여인은 희생 제의적 방식을 거부하고 생명을 택한다. 누구가의 희생을 통해서 정의실현을 요구하는 세계,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스스로 거짓말을 한 죄인이 되는 위험, 스스로 그 세계의 질서를 위한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다.


소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아이의 생명을 언제든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세계 질서안에서, 어떻게 이 여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아이의 생명을 택할 수 있었을까? 생물학적 친모이니까 당연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도 없는 상투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여인이 사실은 가짜 어미였다고 상상해 볼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사실은 자신이 아이를 깔아 눌러 죽인 여인인데, 그래서 아이의 죽음을 본 여인으로서 더 이상 그러한 희생의 반복을 허락할 수 없어서, 아이의 생명을 살려 달라고 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제 몸으로 낳은 아이를 희생시키는 생물학적 부모들은 없는가?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정하게 그와 같은 비정한 부모가 이미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으로 인연이 없는 모든 부모는 다른 아이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가?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의 생명을 택한 삶의 결단은 생물학적 인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아이가 살고 죽는 문제는 생물학적 인연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린 생명의 미래를 결정하는 결정적 힘은, 아이를 죽여서 둘로 나누라고 하는 왕의 질서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은 바로 그 질서에 목을 메고 있는 우리의 삶이다.


르네 지라르는, 모성의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을 각오하면서, 아이의 생명을 택한 그 여인을 성서에 나타나는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형상 혹은 이미지(figura Christi)라고 말한다.[각주:3] 그녀가 친어머니로서 할 바를 다해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간의 경쟁적 집착에 사로 잡힌 질서, 끊임없는 폭력과 갈등의 악순환을 불러오는 질서를 거부했기 때문이요. 끊임없이 희생양을 요구하는 삶의 질서 한 가운데서, 그 희생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여인과 함께 생명을 삶을 향한 결단에 참여할 때, 우리가 바라는 변화와 개혁, 그리고 평화가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도, 역사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크게 충돌할 것이다. 더 이상 인간 이하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했던 민중의 생명의 외침을, 더 이상 폭력적 질서의 희생양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민중의 결단을 살려내고 이어가는 길은, 그 소유권 주장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각오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르네 지라르의 다음 책을 참고하면서 정리하였다. Rene Girard. Things Hidd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rans. Stephen Bann and Michael Mette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1978. 특히 141-181쪽을 중점적으로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Ibid., p. 238. [본문으로]
  3. Ibid., p.24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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