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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절망을 희망하는.(김정원)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9. 1. 1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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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희망하는.





 김정원*


    “세상이 더 좋아질까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편안해질 수 있을까요?” 라고 한 청년이 물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고 나는 답했다. “글쎄요. 아마도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엄마는 계속 불행하지 않을까요?” 시답잖은 말이라도 던지며 좋은 날을 함께 희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희망을 논하는 것에 지친 나로서는 그 따위의 대답이 그날의 최선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졌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그 엄마의 남편은 룸펜이었다. 그 가운데 어렵고 아프게 자식들을 돌보았다는 그러그러한 herstory는 우리에겐 이미 빤한 것들이다. 우리네 할머니부터 어머니에게로 이어지는 이 케케묵은 herstories는 잊혀질 틈이 없이 접하게 된다. 생각해보면(더 생각할 것도 없겠지만) 가족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여성의 몫으로 할당되었다. 눈만 뜨면 술 퍼 마시고서 대낮부터 욕을 퍼부어대는 남편들 틈에서 참 잘도 버텨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꿈꾸는 희망은 아들의 성공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성공할 수 있을까? 저기 먼 세상에 있는 젊은이들 말고, ‘청년실업, 청년일자리, 청년세대, 청년주택, 청년수당’등에서 말해지고 있는 그 ‘청년’들은 그 어머니가 바라는 만큼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파랑새는 없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온정을 말할 텐가? 따뜻함, 사랑, 정, 배려 등등은 내 입으로도 들입다 해대는 것들이다.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쳤을 때, 그리고 남루한 나의 정신상태를 근거 삼을 때, 나는 늘 사랑에 실패했다. 재클린 살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는 사랑이라는 가장 사적인 경험도 사회의 요구에 따라 특정하게 조건지어진다고 말한다. 인정하듯, 사회에서는 사랑하기 좋은 대상을 돈이 많아야 한다고 조건지어 놓았다. 그러한 특정한 사회적 요구 너머의 사랑을 갈망하고 또는 그러한 사랑을 해보았다고 말한들, 그 역시 우리 사회가 이미 만들어 놓은 ‘낭만적 사랑’에 빠진 것이다.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화 해보겠다는 그 고결한 저항, 이미 예정된 만남이라는 그 확신,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정열, 사회적 틀을 벗어나도 무방하다는 그 의지…… 이토록 가슴 뛰는 일들이 관습과 사회가, 특히 이 자본주의 사회가 공고히 다져놓은 ‘낭만’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표현 방식 조차도, 즉 웃고 우는 행위들 마저 우리는 사회가 일러주는 것을 따르고 있다. 물론 이런 도전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볼품 없고, 덜 명예스럽고, 더 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일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을’이라고 명명해놓은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기적들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익을 중심으로 구조화된 이 그지발싸개 같은 사회에서는 결국 그 대상 자체,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한다기 보다는 이미 상품화된 그 낭만을 사랑하는 것에 그칠 심산이 크다는 것이 함정이다. 그렇기에 그 위대한(혹은 위대해 보이는) 사랑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가슴 뜀이 그치고 나면 낭만은 온데간데 없고, 볼품 없는 그 대상이 처량히 눈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파랑새는 진짜로 없다. 운명이라고 믿고 날뛰던 사랑마저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 구조 속에서, 희망을 말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러나 만약 희망을 욕망이라고 말한다면, 희망은 있다. 다시 말해, 만약 희망을 착각이나 이데올로기, 관습, 통념, 문화라고 말한다면 그때에는 비로소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절망적인가?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절망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에 절망적이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절망뿐이다. 우리는 다시 절망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또 herstories들을 듣게 될 것이고, 우리는 다시 또 사랑에 실패할 것이며, 우리는 또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놀아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절망의 순간들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을 몹시 희망적이게 알고 있다. 절망은 온다. 이미 왔고 여기 우리와 함께 있고 초를 다퉈 다시금 올 것이다. 절망을 희망해서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 이들도 있다. 사실 잘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이 남냐고 물어보는 것 역시도 너무 자본주의적이지 않나! 다만, 절망을 희망하고 있다 보면, 그러니까 절망할 수 밖에 없음을 망연스레 받아들이고 살게 된다면 조금 덜 아플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의 실패에, 나와 너의 구림에, 나와 너의 등신 같음에 너무 아파하지 않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어차피 또 절망할 것인데 온 몸으로 아플 필요는 없지 않나. 어차피 없는 희망, 어차피 있는 절망, 어차피 아플 마음.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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