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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젊은이들이 함께 책을 읽는 다는 것은,(김정원)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9. 4. 4.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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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함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김정원*

봄이 채 오지 않은 날부터 우리는 모여 책을 읽었다. 모임은 한 청년의 제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청년이 물고 온 책은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이었다. 겁 없는 그의 제안 앞에서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웃으며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디우의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를 미리부터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철학함이란 자고로 골치가 아파야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모임은 ‘인문공화국’이라 이름 붙여졌고, 그 이름답게 공화적으로 돌아가며 발제가 진행됐다. 놀기도 바쁠 꽃다운 청춘들이 모여 바디우를 읽으며 자발적 사유투쟁을 하고 있는 이 진지충들을 보며 나는 퍽 흐뭇했다. 

예상했듯 바디우는 모두를 괴롭혔다. 철학적 사고가 낯선 이들은 보다 더 괴로워했고, 급기야 어느 날엔가는 무슨 이야기를 서로가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른 채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하는 나 역시도 ‘우리는 없고 책만 남는 것이 아닐까’하는 염려를 했었지만, 집단지성의 힘은 과연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바라봄에 있어 설화적 맥락과 신앙적 맥락을 구분해내기도 했고, 강함이 아닌 약함이 지배의 방식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디우로 인해 은혜를 받기도 했다. 책의 마지막 부분 즈음에서는 비로소 바디우의 핵심 개념인 ‘보편적 개별성’을 이해하였고, ‘진리 과정의 주체’로서 의연하게 살아 갈 것을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이러한 다짐이 우리에게 발생할지 상상하지 못했었다. 우리의 처음은 먹물들이나 입에 올리는 바디우를 그저 풍월이라도 읊으려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지적 허영을 채우고자 모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로의 빈곤한 독서 경험에 기대서는 도저히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은 난제들이 토론을 거치며 해결되고, 이것들이 내면화가 되는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어느새 새-존재로 살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눈동자를 바삐 굴리며 해제를 쏟아내던 나는, 잠깐, 가만히, 가만-히- 청년들의 얼굴을 쳐다본 적이 있었다. 갑자기 어떤 물음이 탁 하고 내 마음에, 그러니까 불현듯 이들의 진지함이 탁하고 내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대체 왜 이곳에 나와 ‘주체’나 ‘진리’와 같은 개념들을 되뇌며 바울처럼 살기를 다짐하고 있는가?’ ‘아니 왜 이들은 봄님이 오시는 이 때에 이 후진 건물에 모여 이토록 비순응적 사유를 하고 앉아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삶의 조건이 만드는 불확실성 앞에서도 희망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책 <유동하는 공포>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안전한 쉼터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 세계화는 제 몫을 해냈고, 이제 모든 사회는 물질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그리하여 박탈이나 태만으로 인한 피해는 일단 일어나기만 하면 완벽한 부정의를 성취하게 된다. … 그리고 밀란 쿤데라가 간결하게 요약한 것처럼, 세계화가 낳은 “인류의 단일화”란 근본적으로 “달아날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안전한 쉼터를 찾을 수 없다. 유동적 근대 세계에서는 위험과 공포조차 유동적이다. 아니면 유체라기 보다는 기체와 같을까? 위험도 공포도 흐르며, 스미며, 새며, 배어든다. 아직 그런 흐름을 막아낼 장벽은 발명되지 않았다.”  

그들을 쫓는 위험과 공포, 그들에게 스미며 배어드는 예측 불가능함. 이로 인해 불안했던 청년들은 “달아날 곳”을 찾았으리라. 그런 그들이 알바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도망쳐 온 곳이 바디우였다는 사실에, 그리고 안전한 쉼터로서 교회를 선택한 그들로 인해 나는 퍽 감상적이게 되었다. 

바디우는 심연으로 꺼져 들어가던 개념 ‘주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우리의 현실 속에 끄집어 내왔다. 불안한 그네들이 바디우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나 보다- ‘나는 주체로 살렵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용기를 지닌 존재를 말한다. 용기를 지닌 주체들은 불확실성의 위협과 자본의 물결에도 쉬 쓸려나가지 않는다. 아니다, 사실 가난한 우리는 이미 이 개 같은 자본주의에 쓸려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모여 저런 불온한 책을 읽는 이유는 죽을 때 죽더라도 쉽게 죽진 않겠다는 오기이며, 위협과 공포 앞에서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충실성(fidelity)과 끈기를 바탕으로 한 존버정신 되겠다.  

나는 지금 선우정아의 노래를 듣고 있다. 그녀는 지금 ‘현실은 동화를 질투해, 절대 우리를 가만 두지 않는다, 눈물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여기까지야’ 라고 노래한다. 맞다. 그녀 말처럼 현실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음은 물론, 땅을 치고 운다고 변할 현실이 아니다. 독서 모임 후의 그들은 그 지독한 현실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통일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는 최저임금을, 입대를 앞둔 알바생은 물류센터를, 대학생들은 미래를 전혀 보장해주지 않는 학교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구린 현실 앞에서도 후진건물에 기어들어와 혁명과 주체를 고민하는 그들 속에서 나는 결국 희망을 보게 된다. 식은 김밥을 씹으며 함께 그리는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웠다. 언제 올지 모를 그 나라 말고, 그네들의 얼굴 속에 들어찬 하나님나라 말이다. 올지도 말지도 모를 그 파란나라를 그리는 그네들의 믿음, 그 단순함. 그 단순함 속에서 견인되는 하나님나라. 각자가 무지렁이라고 고백하며 얻어지는 동질감과 공동체성….. 그렇다. 우리는 좀 많이 무식하고 용감하기에 ‘제국’에 맞서고자 하는 한 철학자의 책을 자본의 땅 명동에서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사랑하는 단순무식한 동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기를 다짐하는 청년들이여! 당분간 예수는 오지 않을 거예요. 하나님은 여느 때처럼 우리를 향한 구원을 망설이고 있을 거예요. 여러분이 암만 진리투쟁을 할지라도, 세상은 점점 더 드러워질 것이 자명하지요. 그렇지만, 주체로 살고자 다짐하는 서로의 못생긴 얼굴들을 기억해 주세요. 주근깨 가득한 얼굴, 홍조 가득한 얼굴, 피곤에 찌든 얼굴, 시커먼 얼굴, 공허한 얼굴이지만, 함께 읽고 토론하며 정의와 평화를 그리는 여러분들의 얼굴 속에 이미 하나님나라가 왕창 담겨 있네요. 비순응적 사유를 멈추지 마세요! 진정한 사건들은 비둘기의 발걸음처럼 다가오지요. 그래도 지치지 마세요. 계속 무식해주세요. 가장 커다란 정적의 순간에 불쑥 찾아온다고 하는 그 나라를 위해, 제발 그 무지렁이됨을 멈추지 말아주세요.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서로의 용기를 기억해주세요”  

우리 청년들을 닮은 봄 꽃들이 핀다, 내 가슴에.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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