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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리뷰 (上)(조은채)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9. 6. 7.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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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리뷰 ()

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인사미술공간, 2019.4.19 – 5.18

조은채

권세정,  ≪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포스터
권세정, <½ 커뮤니티>, 카페트 타일, 50×50cm, 2019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이 모호하고 분절된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서 끝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이야기가 이야기가 되는 것은 끝이 알려졌을 때”이고 신데렐라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유리구두를 잃어버려야만 했다는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을 떠올리면서.[1]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에서 그 끝, 다시 말해 결론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전시의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권세정의 이번 개인전에는 ‘엄마(혹은 어머니, 여성)’, ‘피해자의 이미지’, ‘늙은 개, 밤세’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다. 하지만 인사미술공간의 지하와 1층 그리고 3층을 오가며, 그리고 회화와 영상, 조각과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이 전시에는 앞선 키워드로는 묶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사실 도통 그 뜻을 알 수 없는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이라는 제목만 보더라도 곧장 파편적이라는 형용사를 떠올리게 된다.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은 권세정의 첫 번째 개인전인 만큼 작가의 작업 경향을 전반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전시의 그 모든 요소를 몇 가지 단어로 묶기는 어렵다. 제목은 언뜻 전시의 시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시의 모든 요소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결론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전시의 끝이자 제목, 동시에 더 심즈(The Sims) 시리즈의 NPC 캐릭터이기도 한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즉 아그네스 크럼플보텀(Agnes Crumplebottom)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그네스 크럼플보텀 혹은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더 심즈 시리즈가 2000년에 처음 출시된 이후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 역시 거의 20년 동안 심즈 세계에 등장해 왔다. 아그네스는 회색 옷을 입은 노년 여성의 모습으로 항상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등장하는,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NPC(Non-Player Character)이다. 모든 NPC가 우편물을 배달하거나 도둑을 잡는 것처럼 성실하게 자신의 직업적 역할을 수행하는 심즈 속 세상에서 아그네스는 홀로 그의 강퍅한 성미를 뽐내는 것처럼 보인다. 아그네스에게 주어진 역할을 공공장소에서 애정표현을 하는 다른 캐릭터에게 달려가 가방으로 그들을 냅다 후려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아그네스의 이 역할 수행을 도중에 막거나 피할 수 없이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연애 행각에 대한 아그네스의 프로그래밍된 폭력을 과연 감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심즈 속 NPC 중 유일하게 먼저 다가와서 분노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을 자발적으로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그네스는 같은 게임 속의 세계에 갇혀 20년간이나 끝없이 떠도는 악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악령만큼 두렵고 섬뜩하다기보다는 플레이어의 영향력 밖에 존재하는 다소 불편한 존재에 가깝다.

왜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으로부터 시작해야 했을까? 권세정이 아그네스의 캐릭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사실 전시에는 캐릭터 자체보다는 아그네스의 성을 번역한 ‘부서지기 쉬운 바닥’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해 보인다.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이라는 캐릭터를 살펴보는 대신에 권세정이 말하는 부서지기 쉬운 바닥이 무엇인지 먼저 개념적으로 분석했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플레이어가 심즈 속 세계에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권세정이 작업 소재로서의 어머니, 밤세, 여성, 혹은 이미지 자체와 연관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언뜻 권세정은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을 통해 어머니 혹은 여성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강아지 밤세를 경유해서 노화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고, 피해자의 이미지가 어떻게 흥밋거리로 유통되고 있는지를 낱낱이 지적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시를 더 들여다볼수록 이 첫인상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심즈의 플레이어가 아그네스의 조건반사적인 폭력에 개입할 수 없이 그저 관찰했듯이 권세정 역시 어딘가 한 걸음 물러나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권세정은 밤세,어머니, 여성, 혹은 피해자의 이미지를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소재로 사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개입하고 가공하기보다는 수집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1] 존 버거가 마르틴 프랑크『하루 하루』에 부치는 팩시밀리 서문(1998)에서 인용. 존 버거, 김현우역, 『사진의 이해』, 서울: 열화당, 2015, p. 159.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영상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미술에 특히 관심이 있다.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를 드문드문 운영 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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