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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방학계획표(김난영)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8. 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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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계획표

김난영(한백교회 교인)

이제 제법 글을 읽기 시작한 첫째가 방학을 앞두고 학교에서 계획표를 만들어왔다. 짧은 글이지만 해석이 쉽지 않기에 (율아, 너의 글을 해석하고 있자니 이번 방학은 한글 공부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참을 들여다 본 후 해독한 내용은 이렇다.

 친구와 캠핑 / 새벽에 일어나 엄마 몰래 만화보기 / 학교 지도 만들기

 계획의 스케일을 보니 일과표는 아닌듯하다. 선생님과 함께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개념을 배우고, 그 시간을 쪼개어 계획을 짜보는 활동이었겠지. 그러나 아이의 계획표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가 보이지 않는다. 평소의 자유분방한 행실로 볼 때, 수업시간에 선생님 이야기 안 듣고 딴 짓하다 급하게 옆 친구 계획표 보며 나름 구색을 맞춘 결과물로 보인다.

형이 하는 건 뭐든 해봐야하는 둘째가 계획표를 흘끗 넘겨보고는 연필을 들었다. 거침없이 그린 계획표에는 숫자도 보이고 알 수 있을 듯 없을 듯 아이만의 세계가 한가득 채워진다. 글이 편한 어른에게는 더욱 어려운 그림이라 둘째를 붙들고 설명을 부탁했다.

1. 아쿠아플라넷 가기 / 2. 별 보러 가기 / 3. 선풍기 들고 놀이터에서 놀기 / 4. 번개 치기(구경) / 5. ‘햇볕은 쨍쨍 대머리는 반짝’ 노래 부르면서 놀기 / 우박 맞기 / 드론 날리기

얼마 전 선물 받은 휴대용 선풍기를 놀이터에 나가 자랑하고 싶은 둘째의 계획은 노래 부르며 노는 일상적인 것부터 번개나 우박처럼 신만이 가능한 영역까지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반면, 아홉 살의 계획은 캠핑장, 만화, 학교 등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아빠와 함께 하기 위해 꼭 ‘토요일’에 가야하는 캠핑, 엄마의 눈을 피해 모두가 잠든 새벽을 공략한 만화보기, 학교 친구들과의 숨바꼭질에서 승률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지도 만들기 등 치밀함과 긴박감이 넘치는 계획들이다.

그 시절 나의 방학계획표는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놀고, 숙제/공부하는 학기 중과 다름없는 시간의 반복이었는데, 아이들의 참신한 계획표를 본 이제야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알겠다. 번개나 우박 등 아이들 뜻대로 되지 않는 계획도 있겠지만, 일단 벽에 붙여놓고 하나하나 실천해봐야겠다.

그나저나 잠귀 밝은 엄마 몰래 새벽에 만화보기라니, 아침잠 많은 첫째에게 가능할까? 진짜 새벽에 일어난다면 한 번 쯤은 눈감아줘야겠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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