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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이유 있는 편식(김난영)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10. 1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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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편식

김난영(한백교회 교인)

채식에 가까운 시절이 있었다. 가끔 먹을 수 있는 치킨과 돈가스를 제외하면 육고기를 먹지 않았다.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도 모양새도 불편했고 입에 대기는 더욱 싫었다. 동생은 물처럼 마시던 흰 우유도 맛이 없었다. 밥상에 함께 앉는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 고기를 마다하는 나를 신기해했고, 엄마는 우유조차 안 먹는 내가 또래보다 덜 클까 걱정했다.

“너는 고기 안 먹어? 왜?”

집 밖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답을 준비해야 했다. 일로 만나는 사람과 밥을 먹을 때면 더욱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 나를 무던하지 않은 특이한 사람, ‘편식’하는 사람으로 볼까 불편했다. 스무 해 가까이 그런 고민을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다행히 해가 지날수록 나와 비슷한 식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난 비건이야.”

비건, 채식주의자. 오랜 시간 밥상머리에서 주절주절 늘어놓았던 내 편향된 식성에 대한 설명을 말끔히 정리해주는 한 단어, 참 매력적이다. 물론 “동물로 만든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운동”◈으로서 ‘채식주의’와 비교한다면, 나는 그저 ‘채식’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 역시 특정 음식을 먹는데 ‘불편함’을 느껴서 채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우유급식을 시작했다. 2교시 쉬는 시간에 모든 아이들이 흰 우유를 마셔야 했다. 안 먹고 도망가면 선생님한테 혼나고, 놀기도 바쁜 쉬는 시간에 털어 넣듯 마셔야 하는 게 꼭 약 먹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우유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 더욱이 우유가 소의 젖이란 걸 알게 되면서 우유에 대한 반감은 더해졌고, ‘도대체 소는 매일 전국의 아이들이 마시는 이 어마어마한 양의 젖을 무슨 수로 만들어내나?’하는 의심도 들었다.

전 세계 곡식의 40퍼센트 이상이 사람이 아닌, 사람이 먹을 소와 돼지에게 가고 있다고 한다. (세계빈곤퇴치의 날까지 만들고, 24시간 기아체험을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육식을 위해 배고픔에 허덕이는 이웃을 외면하고 있다.) 식탁 위에 고기반찬 하나 더 올리겠다고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 밀림을 밀어내 축사와 사료공급을 위한 경작지로 개간하고 있다. 허파가 기능을 상실하면 우리의 몸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효율을 극대화한 공장식 축산업에서 동물의 삶은 어떤가. 한 발짝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더러운 축사에서 도축되는 날까지 살아남기 위해 항생제로 연명한다. 상품으로 말끔히 진열된 고기의 도축과정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식탁 위에 오르는 동물의 일생은 삶이 아니라 생산 과정일 뿐이다.

우리의 몸은 각 기관이 연결되어 있다. 팔과 다리가 떨어져 지낼 수 없으며,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일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만큼만 취해야하는 생태계의 균형이 인간의 과한 육식으로 파괴된다. 숨 쉬는 땅이 줄어들고, 축사에서는 어마어마한 분뇨와 폐수가 발생하며, 모든 교통수단의 배출량보다 더 많은 탄소배출로 온난화에 기여한다. 건강을 위한다는 이유로 평생을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잔인하게 죽어간 동물을 섭취한 인간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병과 신종 성인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달고 산다. 육식으로 인해 함께 살아가는 동물과의 연결이, 발 딛고 살아가는 땅과의 연결에 큰 균열이 생겼다. 더 늦기 전에 결심할 때이다.

채식주의자인 남편친구와 함께 해녀체험을 갔다. 물질에 영 소질 없어 보이는 남편은 겨우 한 마리 소라를 채취했으나, 친구는 대여섯 마리나 들어올렸다. 집으로 돌아와 삶아 낸 소라를 도마에 올리고 먹을 부분을 골라내는 중이었다.

“이건 해산물이야. 너무 몸이 마르고 있으니, 이 정도는 먹어도 돼.”

“아니야. 마른 게 아니라 가벼워지는 거야.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먹어.”

“고기는 이해를 하겠어. 근데 해산물은 왜 안 먹는 거야?”

“소라는 구워질 때 고통스럽지 않을까? 나는 고통을 주는 게 불편해.”

인간이 미물이라 취급하는 해산물의 고통을 헤아리는 그의 모습에서, 채식은 육식으로 황폐화되어 가는 환경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엄성 회복을 위한 실천임이 분명해졌다.

이제 나의 편식에 대해 더 분명한 이유를 댈 수 있을 것 같다.

“난 비건이야. 내 몸에, 내가 사는 이 땅에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 거지.”

ⓒ 웹진 <제3시대>

김한민, 아무튼, 비건, 위고, 2018.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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