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비평] 예수와 여인(김동용)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9. 11. 25. 19:49

본문

예수와 여인

김동용*

여는말 : Behind The Wall

가려진 벽 너머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온다. 소리를 지른 여성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 깊은 밤을 깨워버린 그 비명에 누구도 자기 일이라 생각지 않는다. ‘오늘도 잠 못 드는 밤이 되겠네’라고 내뱉는 이웃의 읊조림. 비명이 그치고 소동이 잠잠해질 때, 폭력을 뒤처리하는 청소부 역할을 자처하는 경찰. 폭력에 맞서 평화를 지켜야 할 경찰은 방관자에 불과하다.

세계 보건 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여성의 33%가 남편이나 남자친구 등 파트너로부터 신체적, 성적 폭력을 경험했음을 말한다. 이러한 폭력의 비율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25-30% 사이라고 한다. 물론, 보고되지 않은 모든 사건이 보고된다면 더 많은 수치로 변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이 고발한 현실이 대한민국이라고 다를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들은 일상의 위협에 불안해하고, 곳곳에서 이뤄지는 정서적 학대를 넘어 신체적 폭력, 성폭력으로 인해 지우지 못하는 상처들을 지닌 채 살아간다. 지금도 이 땅 곳곳에서 투쟁자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가려진 벽 뒤에서 눈물 흘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병무는 어떤 말을,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안병무가 바라본 예수의 여성상

유다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상

안병무는 성서 전체가 남녀를 차별하는 가부장 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런 가부장적 유대전통은 신약에까지 이어져 왔고, 예수 이후 바울에게까지 이어진다. 안병무는 이런 사실들은 성서의 배후에 자리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식했으며, 수많은 학자 역시 이런 배경을 계속 제시했다. 또 그는 레티 M. 러셀(Letty M. Russell)을 인용하며 창세기 1장 자료에는 하느님의 상대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을 뿐, 남자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만들어 냈다는 말이 전혀 없다는 점을 말한다. 또 남녀 차별적 전통이 자리한 유대 사회에서 가장과 맞먹는 역할을 해낸 여성상도 제시한다. 예언자 미리암을 위시한 드보라, 야엘, 아비멜렉을 죽인 무명의 여인, 에스더와 같이 민족을 구한 주체적 여성상에도 주목한다.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안병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예수의 시선에 여인들은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가부장 제도의 구조 속에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구원사역에 영향을 준 여인들이다.

우선 안병무는 복음서가 그 내용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여인과의 관계를 자주 보도하고 있는 것을 주목한다. 먼저 예수는 여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억울하게 재산을 수탈당한 힘없는 과부, 단지 두 랩돈 밖에 헌금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과부, 병든 딸을 구해달라고 간청하는 이방 여인이 그들이다. 힘없는 여인들이 권력자인 불의한 재판관이나 부자 그리고 예수까지 이기고, 더 나아가 재판관이 정의로운 재판을 수행하게 하고, 유대와 이방 사이에 막힌 담을 헐게 하는 힘 있는 자들로 나타난다는 점을 증언한다.

다음은 예수가 여인을 소재로 하는 경우 언제나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수가 유대의 종교적 모범자들과 대립하는 세리와 창기들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가고 있다(마 21:31)는 것과 관련하여 예수는 창기와 같은 여인들에게 오히려 참된 미래를 기대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예수가 하느님 나라 비유나 심판의 소식과 관련하여 여성의 언어나 여성과 관련된 언어를 많이 사용한다. 심판을 경고하면서 여인들의 운명을 심히 걱정했다는 점, 예수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모아 날개 아래 품듯이” 그 자녀를 품으려 했다는 말을 통해 예수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여성의 품’ 즉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창조적인 사랑의 전형적인 상정이라고 확언한다.

안병무는 예수가 생각한 새로운 공동체는 가부장적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가 그의 어머니와 형제와 누이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고 말했을 때,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는 것은 예수의 새로운 공동체에는 아버지가 전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는 요셉이 일찍 죽었을 거라는 추측을 통해 예수가 가부장 제도를 전제하지 않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이런 배경을 통해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남성 위주의 가족제도에 철퇴를 가한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안병무는 예수 주변의 여인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성서에 나오는 두 여인의 경우를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하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름 없는 여인’으로서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현장과 빈 무덤 전승에서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다.

예수에게 기름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네 복음서(막 14:3-9; 마 26:6-13; 눅 7:36-50; 요 12:1-8)에 전부 실려있다는 점을,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수난사의 서장을 장식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여인은 그림자처럼 나타나 행동하며 비판의 소리에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다. 안병무는 여인의 이런 행위가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인식했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한 것은 예수의 사랑으로 그의 눈이 뜨게 된 것으로 본다.

베드로는 수제자였으면서도 스승이 갈 길을 몰랐는데, 어떻게 이 여인은 예수의 길을 그렇게 정확히 통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사랑이 그녀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었겠는가!(후론) 그러나 이 여인은 결코 그 사랑에 침몰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아픔을 넘어서는 강인함을 행동으로 시위하고 있다. 예수가 이 여인이 한 일이 아름답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내면성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즉 이 여인은 사람의 뜻과 하느님의 뜻 중, 사랑의 아픔을 견디면서 예수에게 ‘기름 부음’으로써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내몬 여인이라는 것이다. 안병무는 더 나아가 이 여인의 ‘기름 부은’ 행위는 그때까지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아직도 고뇌하고 있는 예수를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죽음의 길로 내몬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예수가 그 여인(들)에게 구원의 길에 대한 의식을 강화한 반면 그 여인은 바로 그런 입장에서 예수의 자기 인식과 결단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이 여인과 함께 다른 여인들도 예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고 보도되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명시된다. “마가복음 전승에서 이 여인은 맨 마지막 십자가 처형 현장과 빈 무덤 전승에서만 등장한다.”(막 15:40; 16:1) 이 여인은 갈릴리에 있을 때부터 예수를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막 15:40-41)으로 설명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도망해버렸는데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른 여인들과 예수의 운명을 지켜보고, 그의 시체를 둔 무덤까지 확인한다(막 15:47).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몇 여인들과 함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다(막 16:1-2). 이 여인의 행위에는 죽은 시체라도 섬기겠다는 애절함이 충분히 반영된다.

안병무는 여인들을 ‘민중 중의 민중’으로 바라봤으며, 예수의 수난과 구원 사건이 여인들을 만난 ‘사건’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간 예수의 결단은 영웅주의에서 말하는 홀로의 결단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민중들과 여인들의 염원, 그중에서도 어느 특수한 여인의 통찰에 의한 기대와 결단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한을 풀 수 있는 아무 수단도 없던 여인들은 무조건 그들 편에 서 주는 예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봤다. 그 새로운 세계는 직선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고난을 통해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민중운동에 앞장선 예수가 가야 할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을 가게 했다고 바라본다.

여성신학으로 바라보는 안병무

여성신학자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는 기독교 여성해방운동은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완벽한 시민권을 회복하고, 성서, 전통, 신학, 공동체 등에 대한 연구를 ‘여성해방적’ 용어로 개혁하여 이러한 일들을 이루는 것이다. 성서를 볼 때 가부장적 본문, 해석, 전승들을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새로이 들여다보고, 다시 해석해내는 것이 바로 ‘여성해방적 관점’에서 보는 성서이다.

이런 해석의 방법론을 지향하는 신학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있으며, 그 세력에 대한 항거를, 그리고 신학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이는 여성신학 뿐 아니라 모든 해방신학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안병무 또한 모든 억압 세력 가운데 성차별적 세력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안병무 조차 간과한 것은 성서 역시 권력의 산물이며 그 결과물을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안병무는 유대 사회를 둘러싼 가부장 제도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에 주목한다. 하지만 가부장 제도라는 울타리 속에서 예수와 관계를 형성한 여성들, 예수를 통해 일어나고 발생한 사건들‘만’ 여성 해방적 관점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신학의 눈으로 ‘기름 부은 여인’을 바라보면, 최초의 기록인 마가복음이 보도하는 여인은 '머리'에 기름을 붓고 예수로부터 칭송을 들으며 예수의 참 ‘제자직’을 수행한 여인이었으나(막 14:3-9), 누가복음에는 ‘발’에 기름을 부은 ‘죄 많은 여인’(눅 7:36-50)이 되어버렸음을 지적한다. 예수의 남자 제자들, 수제자 베드로도 인지하지 못한 예수의 길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우리에게 복음을 알려주는 ‘제자’이자 ‘계시자’로서 기름 부은 여성을 봐야 할 것이다. 각각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여인의 예수를 향한 사랑과 존경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시선으로 성서의 인물을 바라볼 때, 어떻게 탈바꿈되었는지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안병무가 바라보는 ‘여성 제자직’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열두제자 즉, 열두 명이라는 수는 예수가 죽고 난 이후, 교권화되어가는 초대교회에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로 대표되는 상징의 후대 산물이다. 그들이 예수의 제자로서 ‘대표’되고, 그중 핵심으로 등장하는 세 제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여성신학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처형을 지켜보던 세 여인(마 27:55-56; 막 15:40-41; 눅 23:49; 요 19:25-27) 등 오히려 예수의 제자직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제자의 대표로 인식한다. 즉 ‘예수가 여인들을 제자로 삼았느냐 하는 점’이라는 지적 자체가 여성으로서 예수의 제자직을 수행하던 이들을 협소한 시선으로 바라본 결과라 할 수 있다. 

앞선 장에서 안병무라는 렌즈를 통해 예수의 여성상을 조명해봤다. 당시 여성들은 ‘민중 중의 민중’이요, 가부장제도 아래 억압당하며 한이 서린 목소리로 울부짖는 것이 일상이던 민중이었다. 하지만 안병무 성서를 볼 떼 간과했던 지점들이 있었으며, 민중신학자 이전 남성이기에 갖는 한계에 머물러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오클로스’에 대한 인식, ‘사건’으로 대표되는 민중신학적 방법론은 오늘날 여성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여성들이 당하던 억압과 폭력은 과거보다 더 나아졌다. 동시에 더한 억압과 폭력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여성들도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은 이천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 땅의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해방의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을까? 그리고 이 질문에 민중신학은, 안병무는 자그마한 답이 될 수 있을까? 

‘품’의 신학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 여성들을 소외시키는 보편적 구조로서 성차별적 구조가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동시에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민중들 가운데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 때문에 오는 억압의 구조를 남성과 다르게 이중적으로 접하게 되어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제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시대와 지역, 계급과 인종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행해져 왔다. 그러나 여성이 겪는 폭력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된 것은, 서구에서도 불과 3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폭력은 너무나 오랫동안 거리낌없이 허용되어 왔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로서 자연스런 일상 문화의 일부가 되어 왔다.

정희진의 말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민중신학에서 보는 ‘사건’으로 접근하자면 그들에게 ‘일상은 늘 사건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일상의 폭력을 극복해내지 못한 채 여성들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도리어 극단적 여성주의로 치부해버리고, 그들이 지닌 극단성에만 주목해버리기 일쑤다. 정작 그들의 극단성으로 발생한 폭력 사건이 발생한 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안병무는 과연 어떤 말을 할까? 필자는 안병무의 여러 글과 논문들, 그리고 후학들의 논문들을 살피며 눈길을 끄는 글을 보게 되었다. 이 글에도 논쟁점은 분명 존재하지만, 여성을 향한 시선을 넘어 민중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바로 ‘품’이라는 단어다.

안병무는 오늘날 근대화의 과정에서 ‘품’이 사라졌음을 안타까워한다. 사라진 ‘품’, 즉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잠든 어린아이의 숨 쉼과 같은 느낌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문명의 몰락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한다. 이런 현실에서 그는 예수를 통해 ‘품’을 찾게 된다.

예수는 많은 민중에게 ‘품’이란 것을 잘 보여준 존재다. 갈릴리에서 민중이 만난 예수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을 품어주었던 존재였다. 도리어 민중들이 원하는 것에 그대로 끌려다니는 메시아였다. 그의 ‘품’을 통해 기존의 질서는 흔들리게 되었고, 민중들은 그를 메시아로, 권력자들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안병무에게 예수는 그저 고고한 메시아로 머물지 않는다. 지금 고난당하는 무리, 지금 배고프고, 지금 울고, 지금 목마르고, 지금 억눌린 자들에게 예수는 자신을 내던졌다. 그들이 있는 곳에 예수가 나서기도 했고, 예수가 있는 곳에 민중들이 나서기도 했다. 이런 상호동반자적인 관계를 통해 예수는 ‘더불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병무는 꿰뚫어 보았다. 관계를 통해 ‘우리’를 말하는 예수, 안아주고, 품어주는 예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품’은 자칫 여성 고유의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실제로 안병무가 ‘품’을 인식하는 것은 ‘모성애’를 기반으로 인식한다. 오늘날도 ‘모성애’는 본능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사회적, 문화적인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런 ‘모성애’를 바탕으로 ‘생명’을 품고 안아주는 ‘품’의 신학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갈등과 억압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필자는 ‘품’을 조금 더 확장할 것을 제안한다.

품이란 그러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품은 너와 나, 우리가 나 아닌 너 혹은 우리를 위해서 나의 어느 부분 또는 전체를 바친 것이 응결된 현실입니다. 받지 않으면 줄 수도 없고 주는 것이 없으면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는 정, 오는 정이라고 말을 합니다만 그것이 마주쳐 응결된 데가 바로 품입니다. 

 ‘품’이라는 것은 모성애로, 여성의 상징으로 치부하는 순간, 한계에 머물러 버리고 말 것이다. ‘품’을 조건과 환경에 가둬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있는 벽을 허물어 버리는 사랑의 구현으로 ‘품’을 인식해야한다. 그렇게 구현되는 ‘그리스도인의 품’은 ‘예수의 품’이며,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품’일 것이다. 타인을, 타자라는 ‘생명’을 품었을 때, 잉태하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다. 그러나 조건없는 ‘사랑’을 건네주고, 잉태할 때 찾아오는 해방의 기쁨과 눈물은 이 세상에 수많은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연민을 가지며, 타자를 품어주는 모습.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자세 아닌가? ‘품’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전달자요, ‘생명’의 잉태자가 되어야 한다. 

맺는말 : ‘품’을 지니고 ‘경계’속으로

다원화되고 파편화되어가는 21세기의 대한민국. 복합적으로 얽히고 설켜 있는 그물 속 같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경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경계에 서 있지 않은가? 보수적인 신학 배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진보적 신학을 마주하고, 남성이지만 여성주의에 귀 기울이며, 나와 다른 성(性)적 특성을 이해하려는 당신의 위치 역시 경계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경계에 세워진 벽 너머 사람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노동자의, 여성의, 성소수자의, 난민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경계에 위치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우리의 길잡이 예수는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가 했던 것처럼, 예수의 품을 가지고 들어가야 할 때다. 세상에서 천대받고 억압받는 민중 속으로

*필자소개

신학을 전공했고 현재 교회 전도사다. 어설프지만 끊임없이 단상을 남기고 감상을 나누며 스스로의 이상을 향해 한 걸음씩 옮기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