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그대를 찾아서 5(강윤아)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9. 12. 18. 20:04

본문

그대를 찾아서 5

강윤아(청소년극 연구자)

이 연재는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중고등부의 91년 예술제인 뮤지컬 “그대 버려졌나”의 참가자들을 만나서 인터뷰하는 프로젝트이다.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당시 공연 체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그것이 40대가 된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탐색하는 작업이다. [경동 예술제, “그대 버려졌나”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배경에 대해서는 본 연재의 초반에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 만난 O는 당시 중 1이었고 코러스의 일원이었으며 독창도 하였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학위를 마친 후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O는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 인터뷰는 10월 15일 오후 1시, 서울 시립 대학교 앞 카페 시사에서 진행하였다. 지면상 대화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아래 대화에서 Y는 나다. 

 

O: 제가 교회를 대학교 삼학년 때까지는 열심히 다녔지요. 이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지요. 신앙이라는 것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지니까.

Y: 왜 안 믿게 되었어?

O: 그냥 제가 믿지 않았다는 것을 어느 날 알게 된거지요. 내가 교회 가면서 행복감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신이 있어서 신앙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같이 있는 것에 대한 행복감… 인간의 행복감은 사회성도 포함이 되는 건데 그런 것을 충족을 시켜줬던 것 같아요. 친구들하고 관계도 좋지만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거기에 소속되었다는 안도감이 행복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더 만족감이 컸던 것이고…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의 행복에는 사회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좀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어요. 삼, 사학년 쯤 되면 스스로 찾아야 되잖아요. 삶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행복이란 뭐냐 찾아보게 되지요. 근데 행복이라는 것… 사회적인 성분이 있는거잖아요. 행복감이 어떤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면 내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소속감이나 어떤 관계 속에 있다는 안도감.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초월해 있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는 거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만큼 내가 느꼈던 행복감도 컸던 것이고. 그렇다면 그 존재는 다른 존재로도 대체 가능한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는 것이 신앙인이라면 저는 그게 대체가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신앙이 없는 사람이구나 깨달았지요. 신앙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 민폐다… 예술제라는 틀 안에서 존재감을 높임으로써 소속의 감정을 어떤 밀착감을 높이는 그런 효과를 발휘했던거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Y: 그러면 신앙과는 별개로 소속감에 대해서만 얘기를 계속 해보면... 그 소속감이 혹시 [당시에] 어렸기 때문에 어떤 특징이 있었을까요?

O: 청소년기 때가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거의 어른과 비슷하지요.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제약되어 있잖아요. 학교도 가야되고 시험도 봐야 되고

Y: 그렇지. 행위 주체성이 없지…

O: 제가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도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학교 기독교 써클 회장이었어요. 청소년기에 사회제도적으로 자신의 표현욕이나 자신의 성과나 작업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이런 것들이 공부 이외에는 상당히 막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속에서 행복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기독교 써클 하다보면 연합예배를 해요… 부흥 집회 비슷하게 진행이 돼요. 하도 교파가 많기 때문에 씽얼롱, 찬양 예배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깜짝 놀라는게 뭐냐 하면 진짜 감정이 폭발해요. 당시 날라리라고 부르던 염색도 하고 쿨한 척 하던 친구들이 눈물 콧물 다 쏟고 또 완전 모범생 친구들 교회는 다니니까 써클은 해야 되고 그런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도 똑같이 막 눈물 콧물 쏟아내는거에요. 서로 모르는 애들끼리 부둥켜 안고 막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어떤 예배라는 틀 안에 같이 모여서 무얼 한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감정의 해방감 같은게 있었던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사회적인 행복감을 느끼는 방식으로 많이 위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이제 저처럼 운이 좋아서 어머니가 경동교회를 다녔으면 교회에서 그런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저는 옛날의 경험을 그런 면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Y: 지금 성과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속감으로 무언가 만족감을 대체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하는데 혹시 두 가지가 다 필요한건 아닐까요?

O: 두 가지가 다 필요한데 청소년기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입시 때문에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게 공식적으로 성적 밖에 없어요. 교회에서도 만약 예술제 같은걸 하면 참여해서 고무공에 색칠하는거라도 내가 예쁜 그림을 만드는거지요. 양자를 전부 다 제공해주는 종합적인 패키지로서… 그렇기 때문에 당시 경동교회 중고등부는 자신의 성적[하락]과 선생님의 빠따를 감수하면서까지 열심히 신우회 일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Y: 본인도 그런 편이었어요? 그 시절의 생활이나 정서를 회상하면… 어떤 느낌이었나요? 

O: 저는 본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 안정된 관계를 맺고 싶다... 이런거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도 다른데서 그런걸 찾기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교회에 관련된 것만 집에서 허락을 해주셨어요. 제도적으로 막힌거지요 사실. 다른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는 상태에서 소속감에서 오는 행복감을 줄 수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조직이 교회 밖에 없었던거지요. 그래서 사실은 경동교회의 그런 흐름이 있었던거는 상당히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없었으면 아마 어디 이상한데 빠져서 방황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Y: 그러니까 해소가 되었다는 얘기지? 그 때 필요로 했던 것이?

O: 예, 욕구가 충족이 되었다는 얘기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교회를 열심히 안 다녔겠지요.

Y: 그 당시에 기분은 어땠어요? "나 그 때 어땠어" 이 얘기를 좀 듣고 싶어요. 

O: 음… 사실은 공연을 한 날보다 전날이 더 좋았어요. 리허설 끝나고 무대 올라가기 직전. 

Y: 왜 좋았어, 리허설이?

O: 이제 내일이면 다 끝나는거지요. 뭔가.. 학교 가고 학원다니고 공부하고 이러는거 이외에 뭔가 일상적인… 재미있는 루틴. 시시껄렁한 얘기도 하고 애들끼리. 쓸데없는 소리도 막 해도 되고 그런 식의 루틴을 제공해주었던게 끝나는 것이고 하지만 내일 큰 무대가 남아있기 때문에 한 번은 더 만날 수 있다… 

Y: 어... 아쉬운데. 좋고.. 막 이런거였구나. 

O: 처음에는 아쉽지요. 왜 이게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지요. 생각을 해보니까... “아, 행복이라는 것은 찰나에 불과한 것이구나.” 사람들 각자의 또 할 일이 있고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야 되고 이런 필연성을 깨닫게 된 것 같아요. 

Y: 그럼 그 때 느낀 일상과의 차이가 컸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썼는데. 

O: 일상과의 간극은 크지 않아요. 아주 작은 차이에요. 애들끼리 모여서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된다는… 이건 상당히 작은거지요. 

Y: 그래도 아까 말한.. 어떤 신이라고 하는 든든한 빽이 있었기 때문에 릴렉스가 되는 면이 있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서로 오픈하거나 교감하거나 자기 것을 내놓는데 있어서 … 

O: 나와 신의 관계, 신앙이라고 하는 행위는 상당히 개인적인… 같은 신을 믿는 사람으로써 동료 의식을 느낄 수가 있지만 신하고의 관계가 우리 사이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Y: 관계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게 연극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면? 

O: 연극, 뮤지컬… 종합적인 매체를 통해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군이 당연히 있지요. 그래서 그런거 갖고 싸움도 많이 일어나고. 노래를 못한다던지 악기를 못 다룬다던지 이런 친구들 같은 경우는 상당히 좀 좌절감을 … 그것 때문에 교회에 못 나오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부담을 느껴서. 그런데 그것은 예술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특성이지요.

Y: 근데 너는 좋았잖아. 보니까 되게 신나게 춤추던데. 

O: 왜냐하면.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제가 춤을 잘 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잘 한다고 생각하는게 여기서 중요하게 다뤄지니까. 내가 할 수 있는데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거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건데 특정 매체를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그 매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배제된다는 뜻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거기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지만 좋은 경험을 못한 친구들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종교 단체에서 하는 여러 문화행사가 갖는 양가성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모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도 종교단체니까 신경을 써줘야되잖아요. 끼가 없는 사람들은 참여하기가 힘들지요. 워낙 잘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Y: 그런거 있지. 특히 기타 같은거 잘 치는 사람 되게 많았고... 

O: 막 부러워보이고.

Y: 그 동안의 삶을 쭉 돌아볼 때 만약에 그 사건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나의 상태...  달라졌을까? 혹은 청소년기의 나를 돌아보았을 때 경동교회 활동이나 예술제로 인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O: 만약에 없었다면 저는 성향에 맞춰서 다른 소속할 데를 찾았겠지요. 성공을 했으면 지금과 비슷한 생활을 했을 것 같고. 성공하지 못했으면… 사실 그런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안들림] 성인이 된 이후에 무의식적인 심리 상태에 큰 영향을 끼쳐요. 히스테리 분석하다보면 꼭 나오는게 어린 시절의 억압된 욕망에 대한게 꼭 나오잖아요 그런 것 처럼. 

Y: 거기서 소속감이 제일 중요하다는거지?

O: 욕망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인거지요. 사랑은 관계에서 오는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소속감이지요. 소속감이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성인이 되면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모르지만. 어떤 일을 추진하거나 할 때 사람이 조금 더 자신감이 있어진다던지 내가 무슨 실패를 했을 때 그것을 너무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탐색해본다던지 이런 식의 어떤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준다던지 하는 것 같아요. 

Y: 그럼 너도 그래? 그걸 했기 때문에?

O: 내가 어떤 집단에 소속된 것 뿐만이 아니고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기 여하에 따라서. 내가 그런걸 해봤다하는 경험이 이제 이역만리 타국에서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청소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거지요.

Y: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뭐 이런...

O: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거를 의식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하다보면 뭐 되겠지.” 이렇게 당연한 생각도 사실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못하면 막 좌절하고 나는 안되는 인간[이다] 이런 식으로… 그게 어떤 무의식적인 사랑을 받은 경험의 차이, 어린 시절의 경험의 차이가 이제 그런거를 만들어주다는거. 나는 중요한 사람이고 사랑받아본 경험이 있고 이런 경험이. 그 사람의 자존감을 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Y: 그게 본인한테 해당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거지

O: 예예. 저한테도 해당이 된다고 생각을 하지요. 학교에 있었던 동아리나 교회에 있었던 교회 친구들이나. 그런데서 내가 하기 여하에 따라서 사랑도 받을 수 있고… 기본적으로는 어떤 집단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현재 사회인으로서 생활하는 데 상당히 긍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나

[…] 

아도르노의 Erziehung zur Mündigkeit [Mündigkeit 에 이르는 교육] 라는 글을 한 번 읽어보세요. 근대 교육의 목적은 한 인간을 Mündigkeit를 가진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인데, 이 개념은 Unabhängigkeit [독립성]와 Selbständigkeit [독자성]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목적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달성될 수 없습니다. 개인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착취를 하거나 착취를 당해야 하지요. 저는 이러한 모순적 상황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겪었던 상황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예술이 주는 찰나의 기쁨과 희망과 행복감이라는거. 현실의 모순이 잠시나마 거기서 화해했던 순간이지 않았나…

Y: 나도 그거야. 그렇게 뭔가 오롯이 내가 나에게 집중하고 있고 이로써 현실과 당당하게 관계 맺고 있다고 느꼈던 그 감각… 

O: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그런거를 경험했다는 거 자체는 인생에서 큰 플러스 알파가 되는거같애요. 

Y: 그런거 같아. 

O: 솔직히 제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안해본 일이 없는데 경찰서에서도 일하고.. 그걸 하면서도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이 현실의 모순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갑자기 모든게 충만하게 보여지는 그런 순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는 그런 순간을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을 해요 저는. 한 번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순간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서 계속 나갈 수 밖에 없는거지요. 

Y: 맞아. 

O: 저는 그 길을 이제 공부에서 찾은거지요. 공부하다보니까 그런 비슷한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맑스주의를 제가 하게 된 것도 모순을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방법으로 제거하기 위한 방편 중의 하나잖아요. 현실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데. 

(끝)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