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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가리봉동의 시간과 당산동의 시간은 다르다(송기훈)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2. 8.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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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의 시간과 당산동의 시간은 다르다

송기훈*

이 이야기는 필자가 가리봉동 원룸(월세 20만원, 방 안에 기둥이 있음)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의 단상들을 담아 재구성 해봤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영등포산업선교회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가장 편한 방법은 5714번 버스를 타는 것이다. 5714번 버스는 광명시에서 구로를 지나 신도림, 영등포, 합정을 거쳐 서강대학교까지 서울 서부의 한 축을 이으며 달리고 보영운수 소속의 인기노선 중 하나이다.

 5714번 버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탑승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다보면 한 두 명쯤 익숙한 사람을 마주치곤 한다. 항상 같은 자리에 타고, 어제와 비슷한 피로도가 담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그렇겠지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잠이 살짝 들려 할 때 쯤이면 5714번 버스는 나를 내려준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오고가는 5714번 버스이지만, 그 버스 안에는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가 있다. 

 새벽 5-7시 사이에 원룸을 나와 가리봉시장을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가는길의 풍경은 그야말로 이국적이다. 새벽만 되면 찜기에 뽀얀 연기들이 가득 차오르고, 다소 생소한 음식들을 사고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상점의 간판엔 한문이 가득 써져있다. 

 연기가 걷힐 무렵 남자들은 가방 한 가득 공구를 넣고, 삶을 짊어지고 5714번 버스에 탑승한다. 여자들은 작은 가방을 짊어지고 5714번 버스에 오른다. 이들은 주로 신도림이나 영등포역 주변에서 내리는데, 남자들은 공사현장으로, 여자들은 식당이나 가게로 가는 것 같다. 여러분이 만약 새벽 시간에 합정방향 5714번 버스를 탄다면 자리에 결코 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영등포시장을 지날 때 쯤, 가득 차오른 짜증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새벽 안개가 조금 걷히면, 도시의 출근시간이 시작된다. 영등포시장을 기점으로 앞선 시간과는 다른 종류의 남자와 여자들이 탑승한다. 말투, 냄새, 목소리 크기, 속도, 몸짓이 모두 다르다. 이들은 필히 다른 종(種)의 생물들이 틀림없다. 종속과목강문계로 분류될 때도 다르게 분류될 것이다. 이들은 주로 학교라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과 신촌, 합정의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이종(異種)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각각의 사냥터에서 하루의 사냥을 마치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 시간대는 겹치지만 그들은 결코 섞이지 않는다. 땀냄새와 향수냄새는 5714번 버스 안에서 각각 다른 곳에서 피어난다. 한 쪽에서 오늘의 사냥감을 자랑하며 시끄러운 소리로 포효하면, 한 쪽에서는 하얀색 작은 귀마개를 낀 채 눈을 감는다. 한 종의 사람들은 먼 자리에 앉아서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만, 다른 종의 사람들은 혼자 앉아 자리를 지킨다. 

 신도림을 지나면 한 종의 사람들만 버스에 남는다. 신도림을 기점으로 두 종의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갈린다. 같은 버스 같은 시공간인데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과 빛깔이 신도림을 기점으로 정확하게 바뀐다. 놀라울 정도로 신기한 광경이 매일 아침, 저녁 펼쳐진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는 필히 이곳을 촬영해 주기를 바란다.   

 미래시대, 시간이 돈처럼 거래된다는 <인타임> 이라는 영화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가난한 동네에 살던 주인공이 부자 동네로 넘어가게 된다. 그 곳에 살고 있던 부자들은 주인공이 가난한 동네에서 왔음을 단번에 알아채는데, 그 정답은 ‘걸음속도’에 있었다. 

 1분 1초가 중요하고 다급한 가난한 동네 사람들은 걸음 속도가 빨랐지만, 부자 동네 사람들은 그럴 필요 없이 여유있게, 심지어 사색도 할 수 있을 만큼 걸음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5714번은 <인타임>이 매일같이 상영되는 오래된 영화관이다. 5714번 버스 안에서 가리봉동의 시간과 당산동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마치 한 상영관에서 다른 영화가 상영되듯, 그렇게 전혀 다른 두 인종의 시간이 겹치듯 따로 흘러간다. 걸음걸이, 말씨, 태도, 냄새가 다른 이종(異種)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간다.

*필자소개

현재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고 있으며, 예수의 십자가를 우연히 졌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자신도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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