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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마스크에 갇힌 뒤 남은 것들(김윤동)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2. 2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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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에 갇힌 뒤 남은 것들

김윤동
(본 연구소 기획실장)

유래없는 '가까움'이 우리의 일상을 뒤덮어 가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면, 하루나 이틀 안에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하루나 이틀이란 거리가 우리에게 익숙해질 때쯤 이것 또한 '멀다'고 느끼게 해줄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했다. 인터넷은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컴퓨터만 켜서 브라우저를 접속하면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때만 해도 우리는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움이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생각만 하면 닿을 수 있었다. 허나, 그 느낌도 오래가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브라우저를 켜는 일, 더 빠른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던 일이 아니라 아예 손바닥 안에서 즉각적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고, 접속과 동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순간에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 우리는 그 행복과 만족을 느낄 틈도 없이, 모든 것에 개입할 수 있는 마법의 모바일 시대를 맞이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까워졌다. 거리란 거리는, 시간이란 시간은 모두 단축되었다. 얼마 전 기술은 건널 수 없는 심연(深淵)이라 여겨졌던 죽음마저 통과해버렸다. 3년전 병으로 죽은 딸을 VR기술로 목소리와 모습을 재현해냈다.

멀고 오래 걸리는 것은 모두 제거되었다. 모든 것이 지척에 있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성이 구분되지 않고 서로 엉겨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동시대성', 즉 우리가 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도 이제는 뭔가 고루하게 느껴진다. '시대'가 아니라 한 '순간'에 있어야 동시적인 것이고, 아예 동시적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동시간성이 사라지는 시간을 우리는 산다.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러한 작금의 사태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은 먼 것의 완전한 철폐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먼 것의 철폐는 가까움을 만들어내기는커녕, 오히려 가까움의 철폐로 이어진다. 가까움 대신에 거리의 부재 상태가 형성되는 것이다. 가까움은 부정성이기에 속에 긴장을 품고 있다. 반면 거리의 부재는 긍정성이다. 부정적인 것은 그 대립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바로 여기에 부정성의 힘이 있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이처럼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한다는 명목 아래 오직 타자와의 거리를 철폐하려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현재 수행하고 있는 과업은 나 아닌  '그' 또는 '타자'에서 발화되어 하달되는 명령이면 안 됐다. 나의 외모, 행동, 성격, 운명 모두 '나'의 결단과 결정에 의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려 애썼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게 인지하기를 부추겼고 나의 나됨이 오직 나로 인해 벌어진 일로 기획해나갔다. 우리는 '해야 하는 것'을 없애고, '할 수 있음'의 주문을 스스로 걸었고,  거리가 있는 것들을 철폐시켜 모두 내 손이 닿는 곳에, 내 허리춤에, 내 숨결이 닿는 곳에 촘촘히 바짝 밀착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먼 것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려진 것이다. 먼 것 버리다 가까움마저 쓸려나갔고 남은 것은 '거리의 부재'뿐이라는 것이 한병철의 지적이다. 멂과 가까움이라는 이항(二項)은 서로 쌍을 이루어 대립하며 서로의 긴장을 유발하는 개념이지만, '거리의 부재'라는 긍정성의 괴물은 덩그러니 생동하는 힘 없이 멀뚱허니 서로에게 아무런 모멘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사태를 한병철은 마틴 부버의 개념을 들어 '근원거리가 소거되어버린 타자와 나'라고 표현하였다. 곧 이런 타자를 일컬어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 성애화된 타자"라 일갈하였다. 작금의 타자는 이격성(離隔性)을 상실하고 오로지 나에게 흥분만을 일으키는 대상, 다만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일종의 '바이브레이터(Vibrator)'와도 같은 것이라 보면 되겠다. 

참으로 곤란스럽게, 또는 묘하게 이런 상황 속에서 공교롭게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었다. 세계는 아주 중대한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지금은 바이러스를 해결할 백신이 개발될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중요한 시험문제도 있지만, 더 중요한 기로는 우리가 얼마나 다시 나와 타자 간에 문드러져버린 '근원-거리의 부재' 상태를 성찰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할 수 있음'의 세계에서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세계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감미로운 '흥분과 기분'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상처와 급습, 그리고 추락의 '사랑'으로 돌입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지를 받아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의반-타의반으로 마스크를 쓰게 되었다. 이왕 쓴 김에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강제적으로 흩어져버린 이 정황을 통해 성찰해보자. 정말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정말 가까운 것이었는지, 하늘과 땅이 멀고 동과 서가 먼 것을 우리는 너무나 무시하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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