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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포스트휴먼 시대, 교회와 신학은 안녕할까요?(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20. 2. 8.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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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 교회와 신학은 안녕할까요?*

이상철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00 프롤로그

1월 13일~17일 사이 일주일 동안 대전 목원대에서 “conflict, healing, transformation in the posthuman era” 라는 제목으로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목회학박사 과정 intensive course (집중과정)이 있었습니다. 저의 오래된 친구가 담당교수이자 그 과정의 코디네이터인 김남중 박사였고, posthuman 관련 주임교수가 서울대 이경민 선생(한백교회 교인)이었습니다. 두 분의 초대로 김진호 목사님과 제가 <포스트휴먼과 종교>를 주제로 15일(수요일) 하루 종일 오전과 오후 강의를 책임졌습니다. 

01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는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사안이고, 많은 이야기 거리와 생산물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포스트휴먼과 관련된 논의를 하나하나 다 따라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인류의 전(全) 세대가 어쩌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럼 이제 어떻게 앞으로 살아야 하나?”를 놓고 늘 고민했다는 점에서, 인류는 포스트 휴먼시대를 늘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불이 발견되고 난 이후의 인간은 불을 발견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포스트 휴먼이었고, 농업의 시작은 인간을 다시 농사짓기 이전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과정에서 만났던 야훼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포스트 휴먼이 되었죠. 예수를 만났던 제자들도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포스트 휴먼이었고,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인은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포스트휴먼이 되었습니다. 

    진화론과 뉴튼의 물리학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과학은 인간을 고.중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선사했다는 점에서 포스트 휴먼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와 칸트로 이어지면서 획득된 반성적 주체, 선험적 주체에 대한 통찰은 인간을 다시는 이전의 수동적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절단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포스트 휴먼 현상학 입니다.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탐욕과 욕망이 생의 에네르기라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도 절대 이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포스트 휴먼입니다. 그래서 지금 유행하는 포스트 휴먼 현상은 새로운 것 같지만 익숙한 새로움이고, 익숙하지만 또 여전히 새롭습니다. 

    제가 보기에 모든 포스트(post) 담론을 다룰 때 주의를 해야 할 것은 post에 대한 해석입니다. Post를 ex-(탈)로 해석? or after(이후, 연속)로 해석할 것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예로 들어볼까요. ‘After’는 ‘후에, 나중에, 후반’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구경기의 후반전을 생각해보십시오. 농구 후반전은 전반전의 점수 스코어와 선수들의 경고누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시작됩니다. 이런 식으로 'Post-'를 해석 할 경우 Postmodern은 근대의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근대의 후반전인 셈이죠. 이들은 근대성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은 근대적 이성의 반성과 각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근대적 이성은 미완의 이성이고, 계속되는 반성과 각성과 진화를 통해 이성은 자신은 저질렀던 문제들을 능히 처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버마스는 이를 두고 ‘근대는 미완의 기획’이라 설명한 바 있죠. 이 말에는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현실인식과 ‘근대적 이성은 계속 진화할 것’이라는 믿음과, 그리하여 마침내‘이성은 진리에 도달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깔려있다.      

    반면,‘Ex-', 즉 ‘탈(脫)’이라는 접두어에서는 ‘결렬, 단절’이 강조됩니다. 한마디로 근대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들은 근대적 이성, 주체, 대의, 진보 등등 수없이 우리를 현혹시켰던 거대담론에 대한 폐기를 과감히 선언합니다. 포스트모던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쓴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거대담론(Meta-narrative)의 붕괴와 작은이야기들의 발견”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죠. ‘작은 이야기들을 발굴한다’ 함은 타자를 자기 안으로 끌어와 자기 동일성을 확보해왔던 근대적 주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Post-’라는 접두어가 뜻하는 서로 다른 의미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얼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Post가 연속이든 단절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계승, 혹은 모더니즘과의 혁명적 결렬,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짝패인 셈이죠.   

02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스트를 ‘탈 Ex’로 해석할 경우에는 나노기술,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인공지능 등 인간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기술의 도입에 관대합니다. 그리하여 종래 인간을 벗어나는 탈인간 현상에 대해서도 적극적입니다(이를 트랜스 휴먼니즘이라 부름). 포스트를 ‘후기after’로 번역할 경우, 포스트-휴머니즘은 (여기서 말하는 휴머니즘은 근대적 인간, 투명하고 계몽적이며 반성적 이성을 지닌 근대적 주체를 상정함) 근대적 인간성에 대한 성찰적 의미가 강합니다. 근대적 주체가 지녔던 야만과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휴머니즘을 다시 바라보자는 것이죠. 

    ‘포스트(after)-휴머니즘’은 기계와의 공진화를 기획하는 ‘트랜스 휴먼니즘’이 근대가 만들어 놓은 인간중심적, 유럽중심적, 백인중심적, 남성중심적, 이성애 중심적인 인간성에 바탕한 문명을 허물어 뜨리는데 일조하였고, 인간성 자체를 다시 숙고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인간성을 실재론적인 존재에서 관계론적인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 결과 이제부터는 어떻게 인간이 타자(그것은 단순히 인간뿐 아니라, 자연, 동물, 기계, 사물 등)와 관계를 맺을지가 인간성의 새로운 덕목으로 떠오릅니다.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모두 목사님들이었습니다. 목회학 박사 과정 학생들답게 그렇다면 목회적으로 ‘포스트 휴먼 상황 속에서 교회는 무엇이고, 예배는 무엇이고, 선교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So What?  학생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저는 우리 한백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들의 운영과 예배가 근대적 휴머니즘에 입각한 주체 중심적 시스템 아닌가. 그 주체란 말할 것도 없이 백인-남성-이성애자 중심의 권위와 위계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런 전통적 교회 운영과 시스템에 대한 반대로 탈권위, 탈제도, 탈성직을 모토로 운영되는 한백교회 시스템(예: 담임목사, 장로 임기제, 당회가 아닌 운영위, 교우협의회, 조 운영... 실체중심적인 목회가 아니라 관계중심적인 교회)과 한백예배를 소개했습니다 (예: 한백찬송가, 징3번, 함께 읽는 글, 삶의 고백, 설교 후 바로 이어지는 토론, 공동의 다짐, 하늘 뜻 나누기의 다변화..현장의 소리, 선교지 예배, 조 주관 예배, 반려견 예배 등). 강연 당일 저에게 한백교회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고, 마지막날 전체 토의에서도 학생들이 한백교회 예배에 대한 피드백이 많았다고 합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 새로운 교회를 상상하는 열망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03  

마지막으로 포스트휴먼시대의 종교, 교회는 무엇인가를 학생들과 토론 후 저는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신학의 사전적 의미가 신에 대한 담론이라고 하지만, 포스트휴먼시대 신학은 포스트 휴먼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고, 하고 있는 신학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삼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했던 어느 대신학자의 말이 떠오르네요. 포스트 휴먼시대의 신학과 교회는 무엇이고 어떻게 나가야 할까요? 저 역시 궁금하고 불안합니다. 개인적으로 포스트 휴먼 시대가 도래하여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고통의 현장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노력만이 아니라, 지금의 변화를 주도하는 뒤편에 혹 도사릴 수 있는 음모를 파헤치는 일,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이 확실하고 바른지를 의심하고 확인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변화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기획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따라가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를 어떻게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여전히 휴먼, 아니 휴먼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탄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대해서 우리는 살피고 교회는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포스트 휴먼이라는 소문과 소란에 휘둘려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고통의 현상을 간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교회와 신학은 포스트 휴먼 시대의 이면과 배후에서 그 현상의 잉여와 잔여, 그리고 부상자들과 함께 느리게 걷는 최후의 1인이어야 맞습니다, 포스트휴먼에 부적응하는 시대착오적인 공간과 언어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그 언어는 신학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눈물을 흘리는 최후의 휴먼이 사라지는 것이 포스트 휴먼의 완성이라면 그날은 교회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고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신학의 파산일이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 모두 우아하게 와인 한잔 하고 사라집시다. 진지하게 강의를 들어주시고 활발하게 토론에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안에서 뭔가 개운치 않았습니다. 제가 포스트휴먼 시대의 신학과 교회, 목회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었구나. 좀 더 진지하고 본격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고, 올해 하늘 뜻 나누기는 이런 고민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야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서울로 올라오는데 얼마전 있었던 이세돌이 은퇴대국 기사를 접했습니다. 

04

작년 12월 18일~21일 국내 AI 한돌과 이세돌 사이 은퇴 대국이 있었는데 이세돌이 1승 2패로 패배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세돌은 2016년에 알파고와 대결 한 전력이 있죠. 1국에서는 이세돌이 2점을 깐 상태에서 덤 7집 반을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1국에서는 이세돌이 불계승했습니다. 여기서 2점을 깔었다는 것이 포인트인데, 이것을 접바둑이라고 하네요. 두 사람의 바둑 실력이 벌어질 때 약한 쪽에서 미리 몇 점을 깔고 시작하는 것이죠. 그 방식 자체가 이미 인공지능의 우위를 전제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국에서 이세돌이 이긴 까닭에 2국에서는 이세돌과 한돌이 호선(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교대로 잡아가며 두는 바둑)으로 대결했는데 이세돌이 불계패. 3국에서는 1국처럼 이세돌이 2점 깔고 덤 7집 반을 주는 방식으로 시작했는데 180수 만에 이세돌이 불계패를 하여, 최종 1승2패로 이세돌이 은퇴대국에서 패했습니다. 

    이세돌의 마지막 대국소식과 관련된 링크가 있었는데, 작년 11월 27일에 경향신문에서 인퇴 선언 후 첫 언론 인터뷰한 기사가 있어 출력해 읽었습니다. 이세돌은 “딸과 아내 앞에서 알파고에게 패배한 것이 마음이 아팠고, 그것이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은퇴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12월 은퇴대국을 설명하면서, “그냥 맞두면 질것이 뻔하고, 넉 점 까지는 아니지만 두 점 접바둑이라면 버틸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인간과 AI 간 대국에 대해 전망하면서 “AI가 한없이 인간을 추월할 수는 없다고 본다. 프로기사들도 AI를 공부하면서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집중력이나 체력 등을 감안할 때 사람이 AI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어내려 가면서 맞대결을 하면 질 것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극으로 모는 이세돌의 모습이 좀 짠하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종교성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향해 나가는 구도자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인공지능이 지배하는(하게 될) 세상 속에서, 인간에게는 존엄성 같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끝까지 사수하려는 발버둥 같은 것이 느껴져 좀 뭉클했습니다.   

05

제가 이세돌에 대한 기사를 좀 더 일찍 접했더라면 클레어몬트 목회학 박사과정 강의가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저는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세돌의 기사를 접하면서 인간과 AI의 결정적 차이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성찰의 유무, 그 강도의 강약 차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AI의 지능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고, 근래는 인간의 감성과 창의력도 금방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한계를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용인할 수 있을까요. 성찰은 반성입니다. 영어로는 둘 다 reflection.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 빛을 반사하는 것, 지난 시간, 사건, 역사를 되돌리는 것,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게 하는 것, 현상학적으로는 에포케(판단중지)를 선언하고 멈춰서서 지금까지의 과정을 복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찰과 반성 안에 깃듯 철학적 함의라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에 과연 성찰의 기능이, 반성이 기능이 어떻게 작동이 되고 어떻게 대체가 될까요. 자연스럽게 이 질문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 없는(혹은 변형된 성찰의 시대에서) 인간은 무엇이고,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될까, 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기자가 인터뷰에서 이세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AI의 한계에 대한 질문과 연관이 되는데, 2016년 이세돌이 알파고와 대결했을 때 기억을 소환하며, “이 국수가 공식대국에서 AI한테 1승을 거둔 유일한 기사로 남을 텐데,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화제를 모은 백 78수는 어떤 수인가” 이세돌이 다음과 같이 답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꼽수다. 원래는 안되는 수다. 하지만 꼼수에 대한 학습이 덜 된 알파고에 버그가 생겨 행운의 1승을 거둘 수 있었다. AI의 버그는 언제나 일어난다. 요즘 중국의 AI ‘절예’가 진 바둑을 봐도 버그로 의심되는 착점들이 더러 있다.” 이세돌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인공지능에게는 버그를 제외한 한계란 없다. 인공지능은 버그를 제거하고 줄이기 위해 프로그램을 수정하며 진화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인공지능이 지닌 실패율 Zero, 성공률 100%를 향해가는 욕망의 법칙, 결코 하강이나 후진을 허락하지 않는 변증법 논리가 작동하는 그 지점에서 버그가 발생한다면, 바로 그 지점이 신학의 자리이지 않을까. 그 자리에서 한계에 대한 인정과 운명에 대한 성찰을 논의할 수 있다면 여전히 신학은, 그리고 교회는 그것의 유의미함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봅니다.  

06

한계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끝(end)과 관련된 것이라면, 끝과 작패인 ‘처음’에 대한 이야기 역시 종교에서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오늘 택한 창세기가 시작하는 성경구절은 바로 그 처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창세기를 분류할 때 1장부터 11장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기까지를 원역사라고, 하고 12장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4대에 걸친 가문의 이야기죠. 창세기의 끝은 요셉이 죽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율법서(토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한권의 책으로 편집된 것은 바벨론 포로기(BC5)라 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로 돌아와 에스라-느헤미야 시절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고 에스라가 율법책을(느헤미야 8장)을 읽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9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장은 그 율법책(토라)의 제일 처음부분입니다. 토라 전체의 서문이죠. 어떤 책이든 그 책의 서문을 쓰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래서 제일 어렵다고 하죠. 왜냐하면 독자들에게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 원고를 다 쓰고 난 다음의 헛헛함과 아쉬움과 희열 등 복잡한 감정이 막 밀려오기 때문이죠. 토라를 최종적으로 편집한 사람의 마음도 그러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분명 어떻게 서문을 쓸지를 놓고 며칠 몇날을, 아니 수년, 수십년 동안 정신적으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토라는 바벨론 포로기 기간에 한권의 책으로 모아졌을 것이라고(편집) 추측합니다. 바벨론 포로기가 어떤 상황입니까, 나라는 망하고 우리는 지금 포로로 끌려와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런 절대 고독과 고통의 상황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모으고 붙이고 순서를 맞추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나간 시간을 회고하면서 반성하고 기도하면서 토라를 한 권으로 엮기 시작하였고, 마지막으로 책 전체의 서문을 어렵게 심사숙고하면서 써 내려 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그리고 제일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 신은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빛을 만들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여기까지가 오늘 ‘하늘 뜻 읽기’에서 우리가 함께 본 내용입니다. 

07

여러분들은 오늘 성경본문 중에서 어느 구절, 단어에 가장 눈이 가시나요.(Pause) 저는 ‘하루가 지났다’ 에 시선이 고정되었습니다. 천재 시인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처음(시제1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한 아이가 달려간다 두 아이도 달려간다 세 아이도 달려간다. 네 아이도 달려간다....” 이렇게 열셋 아이가 달려간 후, “한 아이가 무섭다고그리오, 두아이도무섭다고그리오, 세아이도무섭다고그리오. 네아이도무섭다고그리오... 열 셋아이가 무섭다고그리오” 마지막은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로 끝이 납니다. 

    처음 이시를 만났던 기억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마도 학창시절이었을텐데, 저는 이상의 오감도를 접한 이후로 한백에 오기전까지, 정확히 말하면 한백의 ‘함께 읽는 글’에서 시를 매주 정기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시라는 장르에 대해 절패감, 거리감, 저항감이 있었습니다. 오감도라는 시를 만나 좌절했던 기억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라는 성경구절을 생각하는데 오감도의 처음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시인 이상은 오감도에서 ‘처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달려가는 열 셋의 아이 중 첫 아이가, 무섭다고 우는 열 셋의 아이 중 첫 아이. 아니 그 한 명 한명 각자가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 아닐까. 시인 이상은 진리가 무엇이고, 본질이 무엇이고 하는 그런 물음보다는, 모든 세상사에는 게임의 법칙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첫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던 이유는 그곳이 타락해서가 아닙니다. 그곳에 나쁜 놈들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의인 열사람이 없어서 망했다고 성서는 적고 있습니다. 이상의 시 오감도를 빌어 말하면, (불의에 저항하면서) 달려가는 첫(한) 아이가 없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대의 슬픔과 억울함과 아픔에 치를 떨며 두려워하고 몸부림치며 울고 있는 첫(한)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망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이상이 창세기 1장을 읽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했습니다. 하루가 지났다(5)...이튿날이 지났다(8)... 사흗날이 지났다(13)...나흗날이 지났다(19)...닷새날이 지났다(23)...엿샛날이 지났다(31) 그렇게 창세기 1장이 끝납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가...지났다, 라는 창세기 1장의 전개 방식을 보면서 힌트를 얻어 한 아이가, 두 아이가, 세 아이가, 네 아이가...열 셋아이가 달려갔다, 울었다를 반복시키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이죠.    

    아니 역으로 창세기를 편집한 사람들이 이상의 오감도를 먼저 보고 창세기를 쓰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도 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와서 창세기 서문을 어캐 쓸지 참조하려고 미래의 문학작품들을 조사하다 우연히 이상의 오감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오감도에 나타난 한 아이의 중요성, 처음의 중요성을 토라의 서문에서 밝히자, 고 결론을 내리고, 오감도를 카피하여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가 지났다라고 틀을 짜놓고, 사이사이 창조서사를 집어넣은 것이죠. 

    창세기의 편집자들은, 모든 것이 망해 무너져 내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나라를 잃고 수천마일 떨어진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처음에 대한 기억의 소환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의 서문은 시원에 대한 문학적 상상이어야 했습니다. 마치 연어가 자기가 태어났던 곳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의도와 과정을 거치면서 창세기 1장이 쓰여졌다고 저는 앞으로 우기기로 했습니다.  

08

이제 음력으로도 2020년이 되었네요. 어제 설날 멀리 고향 다녀온 분들도 계시고, 지금 현재 고향에 계신 분도 있습니다. 가족들이 설날이나 추석에 주기적으로 모여 얼굴을 보고 지지고 볶고 하는 세레모니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연중행사는 아닙니다. 아마도 인종과 종교와 시대를 초월해 인간은 주기적으로 친족들이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 기원, 처음을 확인해왔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에 모여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죠. 어릴 적 이야기, 옛날이야기...그 레퍼토리는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외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무슨 회의를 하다가,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분이 아마도 우리세대가 지나면 명절 때 가족들이 모이는 퍼포먼스가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Pause) 이런 이야기는 명절때마다 우리들의 어머니 세대, 할머니 세대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었다고 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제사를 모실 때가 되면, 우리 아래세대가 어른이 되면...다 없어질거야, 라는 예상은 예전에도 계속 있었더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금까지 수백, 수천년 동안 이어지는 것을 보면 단숨에 사라지지는 않지 않을까, 라는 조심스런 의견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물론 핵가족화, 1인가구가 들어나면서 감소하겠지만, 사라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포스트휴먼시대의 과제일지도 모르죠. 

    오늘 하늘 뜻 나누기 제목이 ‘포스트휴먼 시대, 교회와 신학은 사라질까요?’입니다. 저는 포스트휴먼시대가 되면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문제, 인간의 한계와 운명에 대한 문제, 인간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서 conflict(갈등)을 일으킬 것이고, 그 갈등으로 인한 상처와 충격을 healing(치유)해야 하는 과제가 등장할 것이며, 그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transformation(변형)이 일어날 것이라 봅니다. 교회는 그 갈등과 치유과 변화를 수용하고 감당하고 담아내는 어쩌면 유일한 공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보면 교회가 가장 먼저 사라질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09 에필로그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한백교회를 생각합니다. 이상의 오감도에 나오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 나가는 한 아이가 바로 한백이기를, 현실의 소돔과 고모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인 열사람이 있었더라면 소돔과 고모라는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백이 의인 열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이 땅이 망할 수 없게 만드는 부적과도 같은 이름이 되기를 새해 아침에 기원합니다. 또한 이런 기도도 합니다. 나중에 우리 모두가 살아 남아 지난 날을 회고 하면서, 그날 우리가 한 말과 행동으로부터 한백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을 맞이하였는데, 그날이 우리의 1일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께서 그 모든 시간과 과정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셨다, 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쁘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모두 Happy New Year!

(*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2020년 1월 26일 예배 원고를 수정 보완하였음을 알립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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