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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종교의 자리(하희정)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9. 11. 2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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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리*

하희정**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와 거룩한 정신이 여러분이 숨 쉬는 모든 공간에 살아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함께 마음을 모아 만든 예문을 미리 받아보았습니다.  ‘민중 신학의 모태인 한신은 역시 다르구나, 아직 팔팔하게 살아있구나’ 안도했습니다. 그 외로운 길을 홀로라도 가겠다고 용기를 내신 선생님들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르는데, 소속이 어디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농부는 오늘 심은 씨앗에서 반드시 싹이 돋고 열매가 맺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삽니다. 농부의 믿음을 고스란히 지켜내고 계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합니다.

이야기 1

Sunday school 교사가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게 성경이야기를 들려주려 질문 하나를 던졌다.

선생님: 여러분,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영준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선생님: 여러분,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준이: 먼저 죄를 지어야 합니다.

 

이야기 2

어릴 때 친구 따라 처음 교회에 갔습니다. 처음 가본 예배당에서 제가 처음 배운 말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묻지도 않으시고 제 머리에 손을 얹더니, 너는 죄인이니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구원받는다고. 먼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던 제 친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라는 것을 했습니다. 저도 덩달아 울면서 회개라는 것을 했습니다.눈물이 나지 않아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를 시작으로 슬펐던 기억이란 기억은 다 끌어 모아서. 그렇게 저는 졸지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때 겨우 6학년이었습니다.동생하고 싸운 적은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죄인 소리를 들어야 할 만큼은 아니었습니다.친구에게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교회 오래 다니셨다는 집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기막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부모님의 죄가 유전으로 내려와 내가 직접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저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정직한 농부셨습니다. 많이 배우진 못하셨어도 잘못된 것은 어린 자식이어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대쪽 같으신 분.

"땀 흘린 만큼만 먹고 살아야 한다. 땀 흘린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고 죄다."제가 부모님께 배운 죄는 “땀 흘린 것 이상을 바라는 욕심” 그 한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처음 만든 사람 중 하와가 아담을 꼬드겨 죄를 지었고 이것이 유전으로 내려와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지은 것도 아니고, 내 부모님이 지은 것도 아닌,몇 천 년, 아니 몇 만 년 전에 살던 사람이 사과 하나 따먹은 것을 왜 내가, 내 부모님이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 사과를 본적도 없는데...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면, 사람을 처음 만드신 하나님이 아닐까? 작은 물건도 하자가 있으면 그걸 만든 회사가 AS해주지 않는가?어린 마음에 이해는커녕 억울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제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걸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그래야 천국 간다. 결국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그때부터 지금까지 질문 하나가 제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 설득하지 못하는 신학이 어찌 “만인을 위한 복음”이 될 수 있는가?

같은 시대 같은 세계를 살아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제 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죄로 가득 찬 "창살 없는 감옥"으로 바라봅니다.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선 하나님은 언제나 근엄한 심판자요, 인간은 누구나 그 앞에서 벌벌 떨며 구원을 구걸하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에게 심판자는 감히 바라볼 수도 없고, 감히 바라보아서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다채로운 향기를 가진 꽃과 나무로 가득한 신비의 정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꽃을 가꾸는 정원사요, 인간은 물기 머금은 한 송이 꽃이 됩니다. ‘혹여 어린 가지가 꺾이지는 않았을까’ 작은 바람소리에도 정원사 가슴은 덜컹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많이 달라집니다. 불행히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사람을,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잘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요,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지금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하루하루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이들을 좋아하셨습니다. 이들과 함께 둘러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을 가장 즐거워하셨습니다. 늘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에 음식이 넉넉할 리 없었지만 그곳이 어디든, 함께 나누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잔치자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바라만 봐도 배부른 자리...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자리를, 지켜야 될 것이 너무 많은 회당보다 더 즐겨 찾으셨습니다. 천국은 “무엇을 먹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달려 있음을 예수님은 늘상 가르치셨고 항상 실천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날도 세리와 죄인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진리에 목말라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식탁을 베풀어 환대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앉아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또 다른 부류가 있었습니다. 지체가 하늘만큼 높으신 분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환대의 식탁에 함께 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앞에 벌어진 장면을 보고 서로 수군댔습니다. 이들에겐 “금지된 식탁”이었던 탓입니다.

“격리시켜도 시원치 않을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 이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조상대대로 지켜온 유대인의 신성한 법을 이렇게 모욕하다니...제 정신인가.”

우리는 “세리와 죄인”을 마치 한 단어인 듯 붙여 쓰곤 하지만, 유대사회에서 세리와 죄인은 서로 상극인 사람들입니다. 세리는 말 그대로 Tax collector이고, 죄인은 세금을 못내 범법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마름과 가난한 소작인 관계 정도 될까요. 그런데 상극관계인 이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절박하여,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증오의 감정을 내려놓고 한 자리에 앉게 되었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수군거림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공통분모는 자기혐오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간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스스로 좋아서 선택한 삶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미줄에 걸린 작은 벌레처럼 평생 죄인의 굴레를 쓰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왔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숨 쉬는 것마저 죄스러워, 숨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누군가 쳐다보기만 해도 내 죄인가 싶어 자기도 모르게 숨어들고 자기검열을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억울한 소릴 해도 응당 내 잘못이려니 삼키며 살았을 것입니다.이들에게 예수님은 한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말씀해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4)

생명 하나의 가치는 그 어떤 숫자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특히 “홀로 된 1”의 가치는 “함께 있는 99”의 가치보다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합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효용가치에서도 현실감에서도 전혀 먹히지 않는 계산법입니다. 무리에서 벗어난 양 한 마리에 마음이 급해, 무리지어 있는 99마리를 아무런 안전대책도 없이 들판에 방치한 목자의 선택이 과연 상식적인가? 영어번역에 “open country"로 표현된 들판은 말 그대로 사방이 뚫린 공간입니다. 어디서 어떤 짐승이 나타나 이들을 해할지 모르는 공간입니다. 오늘 기준으로 보면, 99%를 방치한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고 “무책임한 선택”입니다.그러나 목자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이런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리에서 벗어나본 적 없는 99의 가치보다 무리를 떠나 있는 “너”라는 1의 가치가 훨씬 크다. 맹수는 혼자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아다니지만 양은 사람처럼 무리를 이루어 사는 동물입니다. 승냥이가 달라 들어도 공격할 무기를 갖지 못한 양들은 소속이 최고의 방어막입니다. 그래서 군집 동물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혼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리를 벗어나는 순간 모든 공격의 표적이 됨을 경험적으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죠. 반대로 무리 속에 있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안정감을 잃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소속이 주는 안정감입니다. 목자가 길이 잘든 99마리 양을 남겨두고 통제에서 벗어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무모함은 무리를 잃은 양의 두려움과 절박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분이 글에 이렇게 썼더라고요. 99마리 양들은 목자가 그들 곁을 떠난 후에도 결코 흩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잃어버린 동료를 허겁지겁 찾아나서는 목자를 보면서 오히려 안도했을 것이라고... 만약에 사라진 한 마리를 외면하고 자기들만 데리고 갔다면, 오히려 다 흩어졌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버려지겠구나. 내 친구처럼 그렇게 나를 버리고 가겠구나... 반대로 모두를 놓고라도 사라진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라면, 내가 끝까지 믿고 가도 되겠구나.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절대 나를 놓지 않겠구나.  내가 어느 순간 길을 잃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겠구나. 어떤 상황에 내몰려도 반드시 나를 찾으러 오겠구나. 결국 목자의 “위험한” 선택은 무리를 벗어난 한 마리 양에게도, 들판에 남겨진 양 무리에게도 최고의 선물이 된 셈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로 끝내는 것은 진짜 선물이 아니지요. 말은 행동으로 실천으로 보여줄 수 있을 때라야 그 힘을 얻습니다. 자기혐오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온 이에게,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내편 하나 없는 고독한 세상을 힘겹게 사는 이에게 가장 큰 선물은 그의 존재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 말해주고 그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모두가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히 여기고 함께 기뻐하는 것, 이것이 환대(hospitality)입니다.

“찾으면,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내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6)

소중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가장 극대화된 표현이 바로 공동체의 환대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증오와 적의(hostility)는 하나님의 언어가 결코 아닙니다. 참 정의는 증오와 적의와 혐오를 친구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세상을 무작정 미워하게 만드는 hostility가 아니라 세상을 끝까지 신뢰하게 만드는 hospitality입니다.

같은 공간에 머물렀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결정권을 독점하고 이를 독점적으로 실행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최고학문과 지식을 자랑했지만 예수의 말을 1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양은 오로지 희생양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멀쩡한 양을 데려다 조각조각 내서 성전에 제물로 바치거나 사람이 지은 죄를 덮어씌우고 사막 한가운데로 내몰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뿐. 율법의 세계에서 양은 그저 누군가의 죄를 뒤집어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양에게 흠이 있고 없음을 갈라내는 것뿐입니다. 양의 고통은 이들의 안중에도 상상력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잔인한 행위가 신을 기쁘시게 하는 정의라며 찬양해마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찌 무리에서 사라진 양 한 마리를 찾겠다고 가장 위험한 선택을 한 목자의 절박한 심정, 외로운 걸음, 그 무모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그들은 예수에 대한 설명조차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저 어린양을 보라”고 말해야 겨우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비유는 민중의 언어요 공감의 언어입니다. 제 아무리 어려운 법률적 개념도 난해한 철학도 삶의 자리를 공유할 수 있으면 비유를 통해 누구나 쉽게 풀어낼 수 있고 누구나 쉽게 핵심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또한 비유는 생활의 언어요 경험의 언어입니다. 아무리 쉽고 단순한 비유라도 경험이 통하지 않고 삶이 통하지 않으면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외계어가 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예수께서는 들판조차 허락되지 않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버전의 비유를 하나 더 말씀해주십니다.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8-9)

21세기도 울고 갈 성인지 감수성 아닌가요. 당시 은화인 드라크마는 화폐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 화폐가 데나리온으로 바뀌어, 드라크마는 품절화폐가 되었던 것입니다.한마디로 재생 불가, 대체 불가의 가치였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가치는 재생되거나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새 세상을 열어줄 대체불가 1%는 순도99%와도 맞바꿀 수 없는 미래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핵심 메시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신다는 이야기만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요? 이보다 더 큰 종교적 폭력은 없지 싶습니다. 그 누구도 “알량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워 타인에게 함부로 죄인이라 칭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왜곡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00%를 채우기 위한 1%의 희생은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순도 100%의 사회를 위해 1%의 침묵과 1%의 희생을 요구하는 시대와는 작별해야 합니다.오히려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1%를 따뜻한 시선으로 맞아주고 반겨주고, 99%가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가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 1%를 포기하지 않는 종교여야 할 것입니다.아니, 1%를 위한 99%의 환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종교라야 생명력 있다 할 것입니다. 새 길을 낼 때는 종교가 1%가 되어 길을 개척하고, 광장이 열렸을 때는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 없는지 사각지대의 마지막 1%까지 살펴야 합니다. 종교가 인간 안에 깊이 자리한 고통과 그 너머에 감추어진 새로운 희망을 함께 읽어내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그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 옛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선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조금만 달라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각각의 빛깔을 드러내는 모든 나무들을 다 품어,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자연을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미학입니다. 만약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빛깔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너무 지루해질 것입니다.

노아 방주사건을 기억하시지요? 40일간 비가 내리고 150일간 물이 땅을 가득 채운 동안 세상은 온통 회색빛뿐이었습니다. 그 끝을 무엇으로 끝내셨습니까? 각각의 고운 빛깔로 조화를 이뤄낸 무지개였습니다. 한 가지 색깔이 지배했던 세상을 마감하고 각각의 제 빛깔로 온 생명들이 빛나게 하신 것이 인류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미래 희망이고, 평화였습니다. 이는 종교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에 다가가야 하는지, 종교가 끝까지 지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 근본을 돌아보게 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선택된 사랑에 도취되어, 교회 밖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는 않는지...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함부로 "죄인"의 멍에를 씌우고 있지는 않는지...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사랑하지 못해, 다른 이들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먼저 정직하게 스스로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학여정이 근본을 회복하는 용기 있고 즐거운 발걸음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늘은 스스로를 의인이라 믿는 아흔아홉보다, 위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는 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사람됨의 가치를 놓는 순간 모든 혁명은 잔인한 폭력이 되고, 모든 종교는 집단파멸을 부르는 광기가 됨을 반드시 기억하게 하옵소서.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이와 함께 우는 이 되게 하소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과 경계의 담을 두지 않게 하시고, 서로의 재발견으로 함께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 이 글은 지난 2019. 10. 16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젠더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을 기억하는 예배"의 설교문입니다. 

**필자소개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교회사)이며 감리교 목사다. 기록에서 배제되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잃어버린 역사를 학문적 관심으로 삼고 있다.   

최근 저서로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 젠더로 읽는 기독교 2000년》(2019), 《그들은 휴머니스트였다: 조선의 역사가 된 이방인》(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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