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목회마당]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김윤동)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9. 10. 11. 12:28

본문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김윤동
(본 연구소 기획실장)

요한복음 8장
12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3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됩니다." 하며 대들었다.
14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으니 내가 비록 나 자신을 증언한다 해도 내 증언은 참되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16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17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18 내가 바로 나 자신을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해 주신다."



간음중 잡혀온 여인

성서라는 책은 참으로 오묘한 책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석을 하고, 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이리저리 변형되어 온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 많은 해석과 의견이 분분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한 종교의 ‘유일한’ 경전으로서 그 오랜 시간을 걸쳐 인정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두고 하나님이 ‘불러줘서’ 지금의 글자가 되었다고 믿을 정도로 강력한 주술이 걸려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66권을 정경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너무나 완벽한 구성이고, 더 이상 일점일획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책이라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이 본문 앞에 나오는 이야기 덩어리가 7장 53절부터 8장 11절까지의 이야기인데요. 거기에는 특이하게도 괄호가 쳐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사본에는 없음’을 이야기하는 본문입니다. 교회와 그 권위들은 성경을 너무나 고결한 완결성을 갖고 있는 ‘숭배의 대상’으로 성경을 위치시켰지만, 오히려 성서 자신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스스로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괄호가 쳐진 본문이 무엇입니까? 너무나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큰 갈등의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간음하던 중에 잡혀온 여인입니다. 이전까지 자유와 용서, 그리고 끝없는 사랑을 줄곧 말해오던 예수 앞에 간음하던 중에 잡혀온 여인이 있습니다. 심지어 심증도 아니고 현장에서 잡혀온 사람입니다. 이런 현행범에 관해 법이 무엇이라 이야기합디까? 라고 하는 질문도 그들은 노리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는 여기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그 방법으로 사건을 무마합니다. 이 이야기의 해법은 무엇입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였지요. 이 말을 했더니 모두 뭔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그 돌을 내려두고 모두 자리를 떠났더라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예수는 당시 억압적인 율법에 의해 죄 있는 사람으로 판단 받았던 여인에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무죄’임을 선언하였고, 앞장 7장 24절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정하게 심판하여라!” 라고 말했던 것을 실제 행동으로 성취합니다. 

즉 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라는 본문은 예수는 보통의 인간이 판단을 내리는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가 내리는 심판, 곧 그를 보낸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통해 내리는 ‘심판’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고, 그동안의 관례나 습관, 법에 따라 내려지는 것이 아님을 선명하게 나타내주는 본문입니다. 

 

사람들의 어긋나버린 판단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8장, 즉 ‘판단’에 관한 명제들은 간음중에 잡혀온 여인 본문 뿐 아니라 앞의 7장과 연결됩니다.  7장은 예수가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던 갈릴리에서의 활동을 접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는 많은 기적들과 예측하지 못하는 놀라운 일들을 벌였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끌만한 일들을 빵빵 터뜨렸습니다. 권위 있는 자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가르침으로 굴복시키기도 하는 등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모아 나갔습니다. 그 모인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하자, 보잘것없이 아주 적은 식량을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는 소위 ‘오병이어’의 사건까지 일으켰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의 인기는 하늘까지 치솟았고, 그를 따랐던 제자들과 가족들은 초막절이 가까워오자 드디어 예수에게 권했습니다. “이참에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제대로 한번 사업을 벌여보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냥 너희끼리 올라가라. 나는 아직 때가 차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려보내시고 난 다음에, 아주 비밀리에 아무도 모르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10절)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회당에 나타나서 가르치시지요. 그러고 나서 엄청난 논쟁을 벌이시고, 결국에는 한번 당국에 의해 잡혀갈 뻔까지 합니다. 

이와 같은 전개는 갈릴리에서 벌어진 양상과 너무 다릅니다. 갈릴리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는 도착과 동시에 ‘싸움닭’이 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추종자들의 생각과 예수의 생각이 엄청난 간격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애초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인기를 모아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무슨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싸우러 온 것입니다. 

요새 참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신학자들이나 기독운동가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건데요. 예수가 그걸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운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어떠세요? 뭔가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목표가 설정되어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떤 세부 실천 계획들이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한 자원들이 있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중간중간 평가들이 있을 테고, 그것에 합당하게 다시 계획들이 수정되는 그런 과정들 말이죠. 그런데 예수는 그렇게 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선포했는데도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요? 그건 조금 이따 말씀드리도록 하고, 저는 다시 '판단'에 관한 본 이야기로 돌아와 말씀드립니다. 

첫째, 예수는 추종자들의 그 허튼 ‘계획’과 동떨어져있는 사람이었고, 둘째,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는 목표와 계획이 애초에 없었으며, 셋째, 그는 자신을 호시탐탐 체포하고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어째저째하여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추종자들은 올라와서 예수를옹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겠지만, 무작정 올라온 예수는 거침없이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쳐 버렸습니다. 가르침을 했지만, 갈릴리에서처럼 사람들의 지지와 환호를 받은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체 어디서 저런 학식을 배웠는지 궁금해 했고(7:15) 어떤 이들에게는 더 큰 반발을 사고 말았습니다.(7:32) 또 이전부터 그의 소문을 들었던 사람에게는 커다란 의혹을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오면 맞아들이려고 했던 잠재적 추종자들은 ‘그가 과연 그리스도가 맞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되어버렸습니다. (7:41)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 또 새로이 추종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7:31) 무리 가운데에는 큰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7:43)

예수의 흐트러뜨림이 성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예루살렘 사회에 큰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믿던 사람들에게는 의혹을, 의혹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그리고 분노가 있던 사람들에게는 더 큰 분개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혼란을 주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동요하고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법과 규율, 질서를 책임지던 바리사이들이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이 화를 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12절에서 자기 자신을 빛이라고 설명한 것, 그러니까 자신을 메시아라고 증언한 것이지만, 정확히는 당시의 법과 질서를 뒤흔들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참되지 못하다.”라고 말이죠. 예수가 당시 사회의 규율과 법에 의해 ‘악한 사람’이었던 게 아닙니다. 그가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화가 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물었습니다. 너는 대체 너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고 말이죠. “너는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너의 말을 옳다고 말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대답합니다.(14절) 

저는 이 대답이 아까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곧 태초로부터 정해진 탄생, 생애,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남이라는 거대한 계획과 서사를 미리 알고 있었던 ‘신적인’ 예수, 이 세계의 통치자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오해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이미 처음부터 자신이 벌일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목적과 계획대로 움직이는 로봇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소름돋는 계획이 어디 있습니까? 기존의 기독교 교리와 문법대로 아들을 죽여서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저는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공동체가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이 과연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공동체는 회당으로부터도 쫓겨나고, 점점 제도화되어가는 그리스도 공동체로부터도 배척당한 바닥까지 박탈당한 민중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을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요한공동체를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의 공동체였다고 주장합니다. 3장 8절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증언,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데,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여인의 설화에서는 대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니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그 곳이 바로 진정한 예배처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정말로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와는 정말 다른 결을 가진 복음서이지요. 

결국 요한공동체의 비젼은 예수의 자유로움, 즉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고, 아마르티아 센의 말처럼 충분한 ‘역량’을 가진 자유인으로서 어떤 타인이나 사회가 미리 상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과의 대면에서도 기죽지 않고, 굴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자기를 결정할 수 있는 예수의 그 '자유'를 상정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나는 내가 증언한다.  

그런 말의 뜻이어야 이어지는 이후의 15절 이하와 맥락이 같아집니다. 즉, 예수는 그 당시의 ‘판단’들과는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기준을 가지고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 급급하지만, 예수는 결코 아무도,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포착해봅시다. 15절의 앞부분과 대비가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너희들은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나는 하나님 또는 아버지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렇지만, 예수는 자신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말합니다. 즉, 대비는 <너희는 판단하지만,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가 맞습니다. 제가 만약 요한복음에 생략된 예수의 말을 요즘의 언어로 재구성한다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너희들은 끊임없이 메시아가 누구인지 그걸 판단하느라 정신이 없다. 메시아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 기준에 따라 오디션을 보느라 정작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다. 그 옛날 예언 그 문자에 갇혀서 갈릴리에서는 그리스도가 날 수가 없다느니, 그런 기준들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판단한다. 하지만, 과연 메시아가 그런 것일까? 시작과 끝을 알면 전체 속에 나를 발견한다. 불완전한 지식, 불완전한 앎이라면 끊임없이 상대적인 위치를 가늠하느라 세월을 헛되이 보내겠지만,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지를 아는 삶이라면 내 위치를 굳게 포지셔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판단’이 아니라 유연하게 '대응'을 할 수 있다.

기준을 내세우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사람, 어떠한 사회적 가면을 쓰지 않고도 손을 덥석 잡을 것 같은 사람. 그게 바로 오늘 예수 자신이 말한 예수입니다. 예수는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체인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안에서 판단하면 그것은 판단이면서 동시에 아닙니다. 그는 온 세상과 역사를 심판하는 절대적 판단자, 그리스도이시지만, 먼지보다 작고 작은 미물의 사소하고 억울한 상황에 흔들리고 반응하는 자유이시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쓴 잔'이 닥친 결단의 상황에서도 그 잔을 마실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정해진 '그리스도'라면 끝까지 살아남아서 약속을 성취해야 하지만, 상황에 대응하고 대면하는 자유로운 한 인간이라면, 죽음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물결에도 아파하고 떨고 스러져가는 억압의 세상과 사람들의 상황에 반응하고, 자유롭게 결단하는 그 역사속 주체가 되었을 때, 그는 십자가라는 어려운 '판단' 앞에서 자유롭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18절에 나온 것처럼 전체이신 아버지를 믿고 그렇게 살아왔던 삶, 현재의 남루한 내 손과 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궤적들만이 오직 자기의 증거가 됩니다. 

* 이 글은 지난 9. 22에 함께.걷는.교회에서 나눈 설교문입니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