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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소리의 뼈, 무진기행, 텅 빈 무덤...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9. 9. 20. 21:52

본문

소리의 뼈, 무진기행, 텅 빈 무덤...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주간)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막 16:5-7)

 

Intro

소리의 뼈 (기형도)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 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오늘은 무척 저에게는 특별한 날입니다. 처음으로 ‘함께 읽는 글’을 선정해서 주보에 제가 고른 시가 올라간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백 이전과 이후의 저를 비교할 때 손꼽히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제가 시를 보고 읽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소설과 그 밖의 신학책, 철학책 읽는 것은 즐겨했지만, 제가 자발적으로 시집을 사서 시를 읽었던 적은 거의 없습니다. 저에게 시는 너무 어렵고, 모호하고, 답답한 장르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46살에 한백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를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에 50편씩 X 5(년)...적어도 250편이 넘는 시를 한백에 와서 접했고, 그 시간이 겹쳐지면서 조금씩 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한백에서 읽은 시 때문에 한 주간을 송두리째 그 시어에 취해 살았던 날도 몇 있습니다. 그것들이 쌓여 오늘 저로 하여금 시를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택한 첫 번째 시가 바로 기형도의 <소리의 뼈>입니다.

오늘 ‘하늘 뜻 나누기’ 제목이 “소리의 뼈, 무진기행, 텅 빈 무덤...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입니다. <소리의 뼈>는 우리가 함께 읽은 기형도의 시이고, <무진기행>은 김승옥의 소설입니다. 마지막으로 <텅 빈 무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 셋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를 억지로 추적하는 것이 오늘 ‘하늘 뜻 나누기’에서 제가 의도하는 것이고, 그 시도가 정말 억지인지, 아니면 어떤 개연성이 있는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해 주시리라 믿으며 오늘 ‘하늘 뜻 나누기’ 를 시작하겠습니다.

Episode 1. 소리의 뼈

‘소리의 뼈’가 무엇일까요? 오늘 함께 읽는 글에서 ‘소리의 뼈’가 궁금한 학생들이 김교수의 수업을 신청했는데, 한 학기 동안 김교수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저마다 ‘소리의 뼈’에 대한 해석을 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로 마무리 됩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노자의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구절이 생각났고, 제가 좋아하는 데리다의 해체와 차연, 지젝의 실재(the Real)도 당연히 생각났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지젝의 책 중에 <분명 여기에는 뼈 하나가 있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제목에 있는 ‘뼈’가 오늘 우리가 읽은 시 ‘소리의 뼈’와 어떤 상관이 있지 않을까, 한 주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글을 써볼 생각입니다.

한 주간 동안 ‘소리의 뼈’와 관련된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뼈’를 읽고 나서 가장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은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었습니다. 시에 나오는 침묵은 타종과 타종 사이, 그리고 ‘하늘 뜻 나누기’ 때 여러분들이 말을 건네고 받고 하는 사이의 간극일 것입니다. 그 침묵이 어색하고 두려워 누군가가 먼저 마이크를 잡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나서 또 침묵이 이어지고 다시 말이 이어지고. 그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의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입이 열리는 경험을 한백은 매주 합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는 오늘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우리들의 귀가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는 체험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소리의 뼈’는 무엇일까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현대철학이 갖는 전 시대와 다른 가장 독특한 점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조명입니다. 언어는 이전 철학전통에서 별로 중요한 대목이 아니었습니다. 대상(진리, 사물, 객관)을 어떻게 인식(주체, 주관)하느냐? 그것의 일치를 어떻게 보증하는가? 운동은 무엇이고, 바른 행위(윤리)는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 뭐 이런 것들이 전통철학의 주제였고, 언어는 단순히 그것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했죠. 그런데 20세기에 와서는 바로 언어가 그 판을 짜고 있고, 언어라는 망을 통과해야 진리가 비로소 구성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이 언어의 문제를 깊이 숙고한 사람이 비트겐슈타인(Witttenstein)이라는 철학자입니다. 초기작인 <논리철학논고>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기존의 서구형이상학이 구사했던 언어들(예: 운명, 절대, 자유, 존재...신 등)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리죠. 그는 언어란 지시적 기능(referential), 즉 대상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언어의 지시적 기능은 자연스럽게 통사론(syntax: 기호와 기호 사이 관계, 예를 들어 단어와 단어 사이 문법적 측면)과 의미론(semantics: 기호와 의미와 관계)의 발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후반부 저작인 <철학적 탐구> 가서 자신의 생각을 교정합니다. 언어는 지시적 기능으로만 국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의미가 그것의 사용(Use)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때부터 언어의 화용론(pragamtics)적 측면이 부각됩니다. 화용론은 언어와 사용자 또는 실제적 상황 사이 관계에 주목.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과 말의 주체가 누군지에 대해 따져 묻고, 각각의 상황에서 다른 형태로 발생하는 의미에 대해 고찰합니다. 화용론적 태도는 언어에 대한 것뿐 아니라, 사고방식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어. 겉으로 드러나 있는 뜻만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는 뜻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하는지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 있음을 추적합니다. (예: 욕쟁이 할머니 경우)

(☞ 재래시장에 가면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이 있죠. “야 이 멍청한 놈아 뭐하러 여기 왔어, 그것도 달린 입이라고 밥 먹으러 왔냐, 뭐 쳐먹을 거야?” 처음에는 황당하지만 그 할머니가 구사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언어의 지시적 기능으로만 바라보면 안 되죠. ‘멍청한 놈’은 정말 머리가 바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손녀손자같이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라는 뜻으로 손님들은 이해하였고, 그 할머니의 정을 느끼려고 그 식당으로 갑니다. 이것이 언어의 화용론적 측면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김교수가 말한 ‘소리의 뼈’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따르는 이토록 다양한 언어의 규칙들이 아닐까 합니다. 언어활동에 엄격한 규칙이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마치 공기처럼 말입니다. 공기의 소중함은 공기가 없는 곳에서 우리가 숨을 쉴 수 없을 때 느끼게 됩니다. 뼈는 우리의 몸을 지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 그 뼈의 소중함을 압니까. 우리에게 척추가 있다는 것을 아프지 않으면 우리는 잘 모릅니다.

김교수가 진행한 강의 속 침묵은 (소리의) 뼈를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수업시간에 교수가, 그리고 학생이 침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학교의 문법에서 벗어난 것이고, 그래서 불순하고 반동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불순하고 반동적 행위의 결과 ‘모든 소리들을 더 잘 듣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종교적으로 전환하면 그 순간 진리가 임했다는 것이고, 내가 그토록 꿈꾸던 성숙과 구원과, 해탈과, 열반을 경험했다는 것이겠죠. 침묵이 결국 진리를 out of joint (뼈 밖으로)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저는 김교수의 침묵이 종교적 언어로 환원하면 공허와 비어있음과 무와 무한과 내려놓음과 약함 등의 용어로 바꿔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Episode 2. 무진기행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1964년, 사상계 발표)은 안개의 고장 무진에서 벌어진 사흘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고향에 가서 세 사람을 만납니다. 중학교 선생으로 있는 후배 박(아직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문학도), 동창 조(고시에 합격해 세무서장으로 있는 탐욕적 인물), 그리고 서울 출신 중학교 음악선생 하인숙. 무진에 있는 유일한 이방인입니다. 나는 하인숙을 사랑하게 되었고 서울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다짐하죠. 하지만 전보 한 장을 받고 서둘러 무진을 떠나면서 나의 시도는 좌절됩니다. 하인숙에서 아내 영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요즘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을 너무나 대상화 시키고 신비화 한 고질적인 남성서사작품이라 비난을 받을 수 도 있겠지만, 발표 시기가 성인지 감수성 같은 개념이 없었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해서 봐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진에서 만난 세 사람(하인숙, 조, 박)은 타자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서로 다른 타자이죠. 이는 다분히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타자는 그 어디도 아닌 내 안에 있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것이고, 억압되어 있다가 귀환하는 그것입니다. 후배 박은 슈퍼 에고(Super Ego), 혹은 상상계 속의 나이고, 동창 조는 이드(Id), 혹은 사회라는 상징계의 원칙에 충실한 나입니다. 그렇다면 하인숙은 어떤 존재일까요? 그것이 나의 Ego(자아)입니다. 자아는 욕망(Id)과 도덕(Super Ego)사이에서 항상 방황하고 주저하고 좌절하는 ‘나’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안에서 내게 잡히지 않고 포획되지 않는 타자입니다.

어떤 이는 하인숙에서 아내 영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욕망에서 현실로, 환상에서 실존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본래의 실재에서 위장된 실존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본래 자아로 돌아가는 것이 좌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전자의 의견과 후자의 의견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또 다른 해석은 무엇일까요? (Pause)

사실 제가 <무진기행> 이야기를 하면서 ‘하늘 뜻 나누기’와 관련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소설 초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이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도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3초가 지나면 다음과 같이 최종결론을 내립니다.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없었다고 말입니다. ‘기행’이 붙어서 ‘무진’이 마치 실재하는 지명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소설을 읽어가면서 독자들은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실재 존재하는 장소가 아님을 눈치챕니다. 그렇게 결론지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무진’이 없다, 고도 100% 자신 있게 말을 못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이따 독서모임 하면서 이야기 나누어 주십시오. ‘무진’이 없다면 왜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무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Episode 3. 텅 빈 무덤

부활한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어있었다는 사실은 민중신학에서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예수의 부활이 꽉 차있는 충만하고 파워풀한 그 무엇이 아니라 ‘텅 빈 무덤’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기원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와 그 신자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서를 공부할 때 기준점이 되는 것은 마가복음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이 모든 복음서중 가장 먼저 쓰여졌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복음서들이 저마다가 처한 장의 논리 아래서 각각의 신앙공동체의 문제의식을 덧붙였다는 것이 복음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최초의 보고라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살펴볼까요. “그 여자들, 무덤, 흰 옷 입은 젊은 남자, 그는 여기 없다. 그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제자들은 거기서 그를 볼 것이다, 라고 전하시오. 여인들은 도망하여 덜덜 떨며 넋을 잃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 못하다.”

여인들이 부활한 예수를 못 봤다는 것, 젊은 남자를 통해 갈릴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전달받는 것, 그리고 여인들이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마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등장합니다. 왜 마가복음은 젊은 청년의 메시지만 전하고 그것이 실현되는 현장의 이야기는 없는가? 왜 부활한 예수가 현현하는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리인가? 왜 여인들은 청년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침묵하는가? 이는 마치 다른 복음서가 감당할 역할을 미리 남겨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마가복음과 다르게 마태복음(28:16-20)에 보면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가 이런 말을 하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는 예수 운동이 공교회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선교에 대한 교회의 자의식이 반영된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의 청년이 천사로 바뀌었고, 부활한 예수가 급기에 여인들에게 나타나 ‘평안하냐?’(28:9)고 말을 건네고, 여인들이 기뻐 뛰어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마가복음을 기본으로 하지만 마가복음의 비어있는 부분들을 많이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누가복음은 좀 더 많이 각색이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 익명의 두 제자에게 부활한 예수가 나오죠. 누가복음은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승천합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그러므로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입게 될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눅 24:27-49) 누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사도행전 1장(승천사건)과 2장(성령강림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초대교회의 조직화 제도화를 정당화하고 뒷받침하는 근거를 사용됩니다.

요한복음은 ‘텅 빈 무덤’의 목격자에 대한 기사가 좀 복잡하게 꼬여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1인이 먼저 가서 발견하고 마리아가 베드로에게 가서 말하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와서 ‘텅 빈 무덤’을 확인 한 후에, 제자들은 다시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20:10) 마리아가 다시 ‘텅 빈 무덤’에 들어가 흰 옷입은 두 천사를 만났고, 뒤를 돌아섰을 때 부활한 예수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곧이어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도마가 의심하는 대목도 이 기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낚시하고 생선도 먹고 빵도 함께 드십니다. 요한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처럼 공교회화, 즉 교회의 권위를 드러내는 구절을 없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요한공동체는 초대교회의 카톨릭시즘 과정에서 이탈한 집단들이 읽었던 성서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빈 무덤’을 교집합으로 하면서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은 서로 다른 다이나믹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목적으로 썼는지 디테일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공히 그들은 ‘빈 무덤’을 경유합니다. 만약에 그 무덤이 꽉 차 있었으면 어찌되었을까요.

마가복음이 주목하는 다른 한 가지는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여인들에게 “그분은 갈릴리로 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저는 ‘빈 무덤’과 ‘갈릴리’가 수사학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환유적 연결장치가 아닐까 합니다. 비유법에서 직유법이 있고 환유법이 있잖아요. ☞ 직유법(예: 내 마음은 호수다) / 환유법(예: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하느님 나라가 무엇이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규정하고 제도화하고 교리화하려는 것이 은유법이라면, ‘빈 무덤’과 ‘갈릴리’로 이어지면서 예수의 부활에 담긴 함의를 길게 늘이는 수사학은 다분히 환유적입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처럼, 하느님 나라는 ‘빈 무덤’, ‘빈 무덤’은 ‘갈릴리’.... 갈릴리? 라고 물으면서 사람들이 생각을 했겠죠. 어떤 사람은 자유를, 희망을, 아픔을, 정의를, 환대를, 평등을, 용서를, 사랑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계속 회상하면서 환유적 연결고리를 이어가다 보니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그들은 믿지 않았을까. 저는 민중신학이 이러한 신학적 상상력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러한 상상은 당연히 동심원적 위계질서에 길들여진 제국의 논리와 폭력의 문화와 대결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빈 무덤’과 ‘갈릴리’ 서사는 위험한 사건의 문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필로그: 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지금까지 저는 ‘소리의 뼈’, ‘무진기행’, ‘텅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소리의 뼈’의 ‘침묵’, ‘무진 기행’의 ‘무진’, 마가복음의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셈입니다. 침묵, 무진, 빈 무덤 사이의 어떤 비슷한 함의가 있을 것 같았는데 결론을 지으려고 하니 매끄럽게 정리를 못하겠네요. 침묵은 ‘소리의 뼈’에 대해 물음을 던졌고, ‘무진 기행’에서 무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죠, 아니 존재했나요.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은 부활신앙을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혼란과 미궁으로 빠뜨립니다.

이런 난관에 봉착해있는 저에게 화엄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인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무진기행>에도 이런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무진과 무진의 사람들(하인숙, 조, 박)에 대해 말하면서,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 오는 개구리 울음 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질을 한꺼번에 맞비빌 때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 울음 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인다라는 천신들의 왕이고 그가 사는 궁전위에 끝없이 펼쳐진 그물이 있다고 합니다. 그물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지점에 구슬이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물을 들었다 놓으면 구슬들이 딸랑거리며 서로를 비추며 소리를 냅니다. 인다라의 그물에 대한 이야기는 화엄불교의 대표적 테제입니다. “개별자는 전체이고, 전체는 곧 개별자이다 一卽多 多卽一.”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라 전개되는 투쟁과 정복과 복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화엄의 세계는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조화와 울림을 강조하죠.

저는 <소리의 뼈>에 등장하는 ‘침묵’, <무진기행>의 ‘무진’, 부활사건에 나오는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느끼는 우리들의 각자 다른 생각과 고민들이, 인다라의 그물에 달린 구슬과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혹은 <무진기행>에 나오는 개구리 울음소리, 조개껍질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리의 뼈>에서 ‘침묵’이 의미 하는 것, <무진기행>의 ‘무진’은 존재했나, 왜 무덤은 비어있어야 했나,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그물에 달린 구슬이 되어 각기 다른 소리를 내면서 다른 구슬에서 들려오는 나와 다른 소리를 듣습니다. 어떤 진리가 인다라의 그물을 지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있게 말은 못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진기행에 나오는 대사처럼 “나는 그 개구리 울음 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성서를 읽는 마음, 성서의 진리가 우리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8월 11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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