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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고도는 올 것이고, 우리는 갈 것이다(심정용)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5. 1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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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는 올 것이고, 우리는 갈 것이다

심정용*

“시간은 멈춰 버렸는걸요.”

교회에 등록하고 얼마 안 되어 연극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부활절 주간에 올릴 계획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를 읽었다. 학교 수업에서 접한 베케트는 늘 ‘부조리극’이라는 키워드와 엮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오직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시골길 가운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고도는 오지 않고, 그 사이에 포조와 럭키가 등장해 한 바탕 놀다가 떠나갈 뿐이다. 그래서 왠지 ‘고도’ 하면 선형적 플롯의 거부, 전통적 시간관념의 해체 같은 말이 더 익숙했고, 그런 전제를 통해 작품을 읽을 때면, 마치 그 특유의 불가해함과 이로 인한 지루함이 ‘고도’ 특유의 속성인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래서 딱히 재미를 느끼지 못해도 그 의의 때문에 꾸역꾸역 읽었다.

그러나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본 ‘고도’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연출 선생님은 ‘고도’를 학문적으로 먼저 접근하려는 시도에 반대하셨다. 내내 고도만을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그들을 거쳐 가는 포조와 럭키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견딘다. ‘고도’의 시간은 포조의 대사처럼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에 갇혀 있다. 인물들은 막연한 기다림과 절망을 반복하며, 세월이라는 바람을 맞는 북어처럼 매달려 있다. 아마도 50년이 넘게 이런 날들을 되풀이해왔을 인물들의 지리멸렬함은, 흐르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농담과 장난, 너스레와 토론을 쉼없이 만들고 소비한다. 흐르지만, 흐르지 않는, 시간. 그런 양가성만큼이나 작품은 언어적, 상황적으로 탁월한 유머와 동시에 흐르는 절망감으로 가득하다. 각 막의 말미에 등장하는 소년은 고도 씨가 내일은 꼭 온다는 말로써 또 한 차례의 희망과 절망을 암시한다. 하루는 그렇게 또 지나간다.

“안 되겠는데!”

‘고도’는 길고 인물은 적다. 그만큼 한 명이 맡은 대사량이 많다. 극과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리딩만도 여러 차례를 거쳐야 했지만, 일요일을 제외하면 다들 각자의 생활이 있었으므로 연습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몇 차례 역할이 바뀌고 배우가 바뀌었다. 그래도, 조금씩, 무언가가 쌓여 갔다. 의상이 갖추어지고, 조금씩 책을 내려놓고 대사를 말하기 시작했으며, 구체적인 블로킹을 익히고 연습했다. 연습은 평일 저녁에도 조금씩 추가되었고, 나아가 무대까지 갖춰지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몇 번을 미뤄지던 날짜가 확정되었다. 날짜가 새겨진 현수막까지 나와 버렸다. 이젠 도망 칠 수도 없이, 정말로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공연은 또 다시 기약없이 미뤄졌다. 잡힐 듯하던 감염은 몇몇 충격적인 계기를 거쳐 널리 퍼졌다. 곳곳에서 재택근무가 시행되는 가운데, 나는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도 거의 쓰지 않던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연습을 다녀야 했다. 현수막의 날짜는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로 수정되었다.

“벌써 시간이 흐르는 게 다르지 않느냔 말이다.”

연기된 연극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달라졌다. 유행 초기에만 해도 ‘올해 무효하고 내년부터 2020년 하자’는 말이 반쯤 농담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이제는‘코로나 원년’이라 불러도 될 만큼, 코로나 바이러스는 거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는 감염되었고, 그 가운데 누군가는 떠났다. 인간 사회 전체가 거리를 두고 위축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다소간 경계하며 피하는 비일상적 행동이 공식적인 일상 행동지침이 되었다. 

정말이지 세계가 안팎으로 바뀌고 있구나. 문득 강하게 떠오른 이 생각을 거슬러, 나는 내 생애주기와 맞물려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떠올렸다. IMF와 같은 경제 위기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같은 정치적 이슈까지. “아냐, 확실히 달라졌어.” 얼마간 절실한 믿음을 품은 블라디미르의 외침은, 확실히 반이라도 맞는 말이다. 포조의 연설처럼 “밤이 밀려와 우리에게 달려들”고 나면 어쨌거나 하루가 저문다. 시간의 흐름은 그 밀도에 상관없이 역사의 흐름을 끌어낸다. 하지만, 시간이나 역사와 관계없이 너무 짧은 순간들을 사는 우리는, 오로지 좁다란 지금에 갇힌 채 이 짓거리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그 불확실성이 무엇보다 우리를 절망스럽게 한다.

“미완성……”

그러니까, 어느 날 어느 순간을 지나면 분명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날이 아주 같은 ‘여느 날’일 수만은 없다. 그렇게 달라진 세계 속의 우리는 달라진 존재로서 생각하고 감각해야 한다. 분명 그래야만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시간은 더디거나 멈춰 있곤 한다. ‘고도’에는 이러한 시간의 상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어느 날엔가 포조는 시계를 잃어버린다. 또 어느 날엔가 눈이 멀어버린 포조는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에스트라공은 엊저녁과 같은 곳에 앉아 잠든다. 매여 있는 럭키, 모자를 살펴보는 블라디미르, 오지 않는 고도와 그 소식을 전하는 소년까지. 같지 않지만 비슷한 반복이 이어지는데, 두 막을 넘어 오랜 세월을 그랬다 생각하면 미치지 않기가 힘들 것이다.

그 미칠 것 같은 감정이란, 시간이 흐르고 숱한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세상이 무심하도록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 두드러진다. 최근 나를 꾸준히 답답하게 만드는 일은 뿌리 깊은 성폭력 문제다. 얼마 전 친구의 일을 돕느라 언론에서 다루는 N번방 사건을 찾아보며 몇 가지를 깨달았다. 텔레그램 성착취는 훨씬 더 오래되었고, 이미 이를 다룬 기사는 작년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텔레그램은 각종 성범죄, 성폭력과 적극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버닝썬을 비롯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온갖 성범죄 사건도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온갖 SNS와 플랫폼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N번방 사건은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닥쳐온 재난이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는 길고 유구하다. 조주빈은 이미 N번방의 포맷을 따서 이후에 만든 ‘박사’방의 운영자였을 뿐이고, 그 전에는 손정우를 비롯한 몇몇 운영자가 관리하는 다크웹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소라넷이 있었고, 디지털 장의사와 결탁한 웹하드 카르텔이 있었으며, 토렌트와 같은 P2P 프로그램을 통해 여기저기에 조금씩 성범죄의 조각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 이전에는 불법 복제 비디오가 있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발달한 기술에 힘입어 평범한 여성이나 연예인을 합성하는 딥페이크 범죄가 가득하다.

이렇듯 만연한 성범죄 환경 아래, 정준영, 최종훈, 손정우, 조주빈, 강훈,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수(십)만의 가해자가 있다. 이들에게 내려진 판결은 대체로, 초범이어서, (가해자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납득하기 힘들지만) 증거가 불충분해서, 평소에는 착한 사람이라서, 반성의 기색이 보여서 같은 이유로 지나치게 너그러웠다. 그러는 동안 승리는 무사히 군대에 갔고, 김학의는 풀려났다. 손정우와 조두순은 올해 출소할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4년 전에는 강남역 사건이 있었다. 법과 문화의 시간은 가혹하게 느리다. 가해자의 미래까지 살뜰하게 챙겨준 덕분에 가해자가 흐르는 시간 속으로 거리낌없이 걸어 들어가는 동안, 피해자가 어디에서 어떤 시간을 살아가는지는 효과적으로 잊혀진다. 

하지만 말했듯 무언가가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다르지 않다. 기억은 그 다름을 구분하고, 다른 시간 속에서 스스로와 스스로를 둘러싼 세계를 길어 올린다. 이를테면 글을 쓰는 오늘로부터 6년 전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 그렇다.

그 날은 분주한 아침 시간이었다. 저게 무슨 일이야 하고 놀란 것도 잠시, 전원 구출되었다는 치명적인 오보는 이내 안심을 불러왔다. 이후 며칠간, 우리는 거대한 트라우마를 연일 생방송으로 접해야 했다. 거기에는 게으르고 무능한 정부, 자본과 결탁하여 한껏 느슨해진 안전 기준,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시스템, 공감하지 않는 폭력성이 깃들어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으라’며 ‘잊으라’고 강제하는 부조리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고도를 기다린다는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던 블라디미르의 말처럼, 과거를 기억하는 시선은 미래를 향한다. 제자리걸음중인 답답한 시간 속 처절한 방향성만이 변하지 않는 가운데, 얽매인 럭키의 단말마 같은 생각이 맴돈다. “미완성…...”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그러고 나서 다시 떠나는 거요.”

결국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소수의 관객만 초청하여 무사히 공연을 올렸다. 이로써 1년여를 느슨하지만 꾸준히 준비해 온 ‘고도’를 마쳤다. 정말이지, 연습이 아니라 관객, 배우와 더불어 호흡하던 기분은 잊을 수 없다. 연습하면서 내내, 공연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그때로선 도통 알 수 없었다. 단지 외우고 곱씹던 대사를 다시 외치고, 비슷하지만 다른 공기를 기억 속에 쌓아 나갈 뿐이었다. 실은 아직도 얼떨떨하고, ‘고도’ 이후를 살아간다는 감각은 애써 실감하려  해도 쉽지 않다. 뭔가가 확실히 달라졌고, 지나갔는데 말이다. 이렇듯 공들인 연극의 전후도 알 수 없는데, 만약 정말 고도가 오고 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눈길을 두어 ‘가자’를 거듭하면서도, 마냥 가버릴 수도 없이 기다리는 일 말고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극을 섣불리, 순환적 시간관이라느니 부조리극이라느니 하는 용어로 묶어둘 수는 없겠다. 존재에서 언어가 나오고, 언어가 다시 존재를 규정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결국 변하고 흐르는 시간과, 동시에 그렇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곤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리고, 그러다 날이 늦어 떠나려 하고, 그럼에도 걸음을 떼지 못한다. 만약 믿음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면, 이 텍스트 바깥 세계의 결말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고도가 올 것이고, 우리는 이 나무를 떠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견딘다. 잊지 않고, 명백한 다름과 그 다름 속 스스로를 감각하면서, “결국……그 자가 올 때까지.” 

 *필자소개 

비교문학은 대관절 뭘 공부하는 건가요? 늘 질문받지만 매번 잘 대답 못하고 나도 모르고 심지어 아무래도 계속 모를 것만 같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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