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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기약할 수 없는 여행(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6. 2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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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할 수 없는 여행

박여라*

그렇게 코로나19와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니, 있다고는 하는데 있는 건가 싶었다. 그 다음에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하니 두렵기도 했다. 그러다 녀석이 하는 일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방어를 나름으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애써도 녀석들의 연결고리 끊는 일이 쉽지 않았고 결국 얘네들과 함께 봄을 보냈다. 청록이 무성한 여름이 됐다. 봄부터 내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걱정 없이 공기는 맑다.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저마다 다르리라. 나의 일상은 여행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남쪽에 매화가 폈다는 소식을 듣고 있기만 할 때부터 어렴풋이 이게 뭔가 했다. 일 년 내 길고 짧은 여행을 구상하고, 계획 중간중간에는 계획 없이 길을 떠나곤 했다. 멀거나 가깝거나 길 떠날 일이 없으니 할 일이 없다. 멋진 곳,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되어도 갈 수는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림에 떡이 이런 건가.

해외여행이 거의 없던 시절이 떠올랐다. 데자뷔다. 말이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이 물설고 낯선, 그런 설레고 신나는 여행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이 시절을 버텨내는 방법으로 나는 사진 앨범 속으로 들어간다. 다시는 가지 못하는 곳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그림에 떡을 파먹기 시작했다.

지난 12월 늦은 ‘여름 휴가' 가는 길, 터키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며 반나절 유람할 기회를 만들었다. 버스 타고 다리를 건너 비잔티움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이었던 구시가지로 들어가면서 보니, 그곳 지형이 수많은 왕래와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길목이었다. 

아야소피아(소피아 성당)는 역시 굉장했다. 한 켠은 공사 중이었지만, 6세기부터 교회, 그리스정교회, 가톨릭 성당, 모스크, 박물관에 이르는 세월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다. 술탄아흐멧(블루 모스크)은 내가 처음 들어가 본 모스크였고 거기서 꾸란(코란)을 한 권 얻어왔다.

다시 공항으로 돌아와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며 꾸란을 뒤적였다. 길이가 신약성서 ⅘ 정도라니 작은 책자로 만들 만하기도 했겠지만 고맙게도 맨 뒤에 색인이 있었다. 와인을 찾아보니 다섯 군데가 있다. 책마다 숫자를 새로 매기는 그리스도교 성서에 비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장과 절을 붙여놓으니 이 일자무식도 구절을 찾아보기가 쉬웠다. 

취하게 만드는 그것과 도박은 인류에게 혜택이 있다손 쳐도 해악이 더 큰 죄다, 사탄이 만들어낸 가증스러운 것이다, 이런 구절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의인에게 약속된 그곳에는 마시는 자에게 기쁨을 주는 와인이 강으로 흐른다는 묘사도 있다. 마호메트 당시까지도 이슬람교는 음주 절대 금지가 아니었다더니 과연. 

다음에는 환승지가 아니라 목적지로, 좀 여유있게 이스탄불에 다시 와야지 마음먹었더랬다. 와인 지역에도 가고 말이다. 터키에서 상업용으로 재배하는 와인 포도품종은 60여 종에 그치지만 터키 고유 재래품종 포도나무는 600~1,200여 종으로 확인된다. 와인으로 만드는 양은 아주 적지만 터키의 포도 생산량은 세계 4위다. 주로 식탁에 오르는 포도가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건포도를 만든다.

터키는 그루지야, 이란과 함께 와인 역사에서 처음 포도나무를 재배한 지역으로 꼽힌다. 고고학자들은 6천 년 전에도 이곳에서 와인을 생산했다는 흔적을 찾아냈다. 이 세 나라 접경 지역에 있는 아라라트 산은 홍수가 그친 뒤 노아의 방주가 닿은 곳이라는 그 장소 아닌가! (창세기 8장 4절) 방주에서 내린 노아는 인류 최초의 농부가 되어 포도나무를 심었고 인류 최초의 와인메이커가 됐다.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터키 와인 여행 얼마나 재미있을까. 기약은 할 수 없지만, 나중에 가게 된다면 말이다.

사진 설명: 마당에서 자라는 메를로 포도나무에 포도알이 제법 굵어졌다.

*필자소개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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