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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정우와 김일두, 사랑과 종말에 걸쳐(심정용)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8. 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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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와 김일두, 사랑과 종말에 걸쳐

심정용*

좋아하는 가수가 다른 이의 노래를 커버해 부를 때 나는 두 곡을 좋아하게 된다. 원곡의 느낌과 커버의 느낌 모두를 놓지 못한 채 상황과 감정에 따라 찾아 듣는다. 그러다 보면 원곡을 부른 가수도 좋아하고 만다. 인디음악은 이렇게 알음알음 알아가는 매력이 있다. 이미 김목인에서 정우로, 정우에서 박소은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근 한 달 반째 정우가 부른 김일두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빠져 있다. 이 곡은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김일두의 2013년 앨범 [곱고 맑은 영혼]수록곡이다. 김일두의 음악과 목소리는 한대수에서 카쥬에 가까운 그 쨍한 소리를 덜어내고, 김민기에서 서정을 덜어내는 대신 처량하고 절절한 감성을 더한 어느 지점에 걸쳐 있다. 동시에 그의 음악은 흐린 날 부산 앞바다와 소주를 연상케 한다. 이런 분위기는 그의 온스테이지 라이브 영상은 물론이고, [제비다방 컴필레이션 2019/2020]의 수록곡 ‘복순씨’에 나오는 가사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에서도 두드러진다.

그 중에서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사로잡힌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슬프니까 조심하십쇼’ 라고 EBS <공감> 라이브에서 말한 것처럼, 이 곡은 가사와 분위기와 멜로디 모두가 온 힘을 다해 속을 깎는 슬픔에 기여한다. ‘숨 쉴 때마다 잃는 듯한 따뜻함이여/들리지도 않는 기적소리에 고개를 들지 말어라’로 시작하는 가사는 살아감보다는 죽어감을, 더불어 존재함보다는 소외를 읊조린다. ‘사람이 아닌 사랑이 필요할 뿐’이라는 바람은 어쩐지 머뭇거리는데, 그건 앞서 지나간 ‘시끄러운 빗소리, 크디큰 저 파도, 저주같은 이 삶’이 품은 무게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이 필요할 뿐이라는 미약한 바람을 중간 기점으로 하여 멈추었다 다시 몰아치는 반주 이후 이어지는 유일한 후렴구 가사는 청자를 다시금 슬픔으로 처박는다. ‘눈물과 눈물, 다시 눈물 뿐인 이곳에서/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미 그건 내 몫이 아니었어’ 김일두가 반쯤 내뱉듯 끝맺는 ‘이런 간헐적 광기에 난 미쳐간다’는 ‘삐조리 천재’인 그의 면모를 완성한다. 

한편, 정우의 커버는 한결 다른 슬픔을 전달한다. 투박하게 밀어내는 진성 대신 진성과 가성의 완급을 넣고, 음의 끝부분에는 미약한 듯하나 여운을 더하는 비브라토가 이어진다. 후렴 이전의 정지 상태에서 세던 ‘하나, 둘, 셋’과 간헐적 광기를 외치는 마지막의 내지름을 뺀 커버는 곡에서 처절함을 덜어내는 대신 곡을 전체적으로 조금 더 ‘노래’의 형태로 다듬는다. 결과적으로 김일두의 노래는 미칠 것 같은데 그게 왜인지 몰라 더욱 미칠 것 같은 감정을 안겨준다. 한편 정우의 커버는 턱, 하고 손에 닿게 막히는 어떤 한계나 절망을 마주하게 하고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슬픔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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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내가 싫어 견딜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건, ‘막힌 통로에 적당한 시간 차를 두고 뭔가를 털어 넣어야 하는 건 아주 오래된 저주다(<역류성 식도염>)’라던 허연의 구절 같았다. 또는 ‘내 발이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산책>)’던 네루다의 구절과도 같았다. 사람이 이 모양인데도 때에 따라 뭔가를 먹고 싶어하는 내가 싫었고, 그러다 보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또 뭔가를 괜히 찾아 먹고 마셨다. 그러고 나면 돈과 시간과 건강을 충실히 갉아먹은 스스로를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있었다.

비참한 현재, 도무지 자신 없는 과거, 과거에 내가 만나고 함께 한 사람들, 남아 있거나 떠난 사람들이 여전히 안에 남긴 멜랑콜리아의 흔적, 그것으로 인해 만들어진 내 모습들을 나는 도통 사랑할 수 없었다. 관계에 있어 하노라고 시도한 실험은 모두 실패해버린 것만 같았고, 삶에는 도통 재미를 찾을 수 없으며, 어떤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이제는 잠겨 들어가는 일만 남은 듯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좌우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데에도 실패했고, 좀 더 스스로를 사랑해보자는 공허한 다짐은 뒤틀린 합리화를 거쳐 다시 폭식과 폭음으로 이어졌다. 사정이 이런데 도대체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무기력에 허우적대면서, 조금 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자살을 꿈꾸지는 않았는데, 나를 두고 슬퍼할 주변이 생각나서였다. 실은 나를 둘러싼 타인들은 그렇게 직, 간접적으로 나를 살려 왔다. 내 징징거림과 호소를 그들은 기꺼이, 또 기어이 받아주고 돌보아 주었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어 타인에게 외주라도 맡긴 심정은 나를 미치게 하면서도 더 처박히지 않도록 간신히 붙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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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싫어하는 일이 나를 제일 절망케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나를 무기력하고 힘 빠지게 만든 건 저번 주부터 시작된, 아니 사실 유구하게 이어진 처참한 소식들이었다. 월요일, 법원에서는 (1살, 2살 등이 ‘장르’로 분류되는)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했고, 그는 고작 1년 6개월형을 마치고 풀려났다. 안희정은 모친상을 대대적인 이벤트로 열었고, 대통령을 비롯한 온갖 정치 인사들이 ‘공식적’인 직함으로 근조 화환을 보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 성 착취물 운영자의 사회적 생명도, 권력형 성범죄자의 정치적 생명도 거짓말처럼 건재했다.

어디 그뿐인가. 화요일, 수요일에는 각각 다른 지역에서 남교사가 여자 화장실에 불법촬영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다음주 월요일에는 현직 해양경찰이 대학교 여자 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을 저질렀다.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어느 남성 작가는 알고 보니 아는 누나와의 카톡 대화 내용을 한치의 수정 없이 그대로 소설에 실었더랬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전 서울시장은 비서의 성추행 고발 직후에 자살했다. 도저히 나는, 제 정신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없어 하염없이 노래만 들었다.

최근 공연에서 정우는, 굳이 사랑 노래가 아니어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위로의 음악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그런 그의 신곡 중 하나인 ‘종말’은 그 깨달음이 진하게 담긴 노래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억울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세상의 종말이다. 한편, 죽고 싶어 하는 이는 차라리 그 세상의 종말을 바란다. 정우는 매번 ‘종말’을, 더 이상 추모할 일이 없었으면 바라는 마음에서 부르는 ‘추모하지 않기 위한 추모곡’이라고 소개한다.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12월 초순, 설리와 구하라를 떠나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후로도 ‘종말’은 정우의 공연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았다. 4월 16일에도, 미국에서 시위가 계속되던 6월의 어느 날 공연에서도. ‘종말’은 매번 늘 어디에나 있었다. ‘종말’은 ‘거울 속의 꽃/물에 비친 달’이 가지는 닿지 못할 반사의 이미지에서 ‘노래가 있고/글이 춤추는/이 멋들어진 말장난’이라는 다소 시니컬한 유희를 거쳐 후렴구로 나아간다. 종말, 삶과 죽음, 말의 상실, 불가능성을 담은 후렴구는 이렇다. ‘오늘이 마치 세상의 종말 같아/드리눕는 너와 곁에 앉은 내가/더 이상 쓸 말이 없을 것 같아/잡지 못할 당신만 헛돌아’

얼마나 많은 죽음이, 종말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차라리 죽음과 종말을 바라는 아픔은 또 얼마나 만연한지. 왜 이런 삶은, 세상은 그냥 끝나버리지 않고 이렇게 야속하게 이어져 버리는지. 추모하지 않기 위한 추모는 왜 그리도 요원해 보이는지. 나는 처음 들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도통 알 수 없다. 

그래서 ‘종말’을 듣고 또 들었다. 도무지 열심히 살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충분히 스스로를 싫어해서 바닥을 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 아래 더 지독한 지하세계가 있었다. 한편으로, 처참한 건 이 세상인데 왜 내가 이렇게까지 영향을 받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지 억울했다. 그런 억울함에 저번 주부터 계속, 말을 할 수 있고 그 말이 닿을 수 있는 온갖 곳에 무기력과 분노를 토로했다. 이제는 무슨 효과가 있는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청원이라도 빠짐없이 했다. 여건이 되지 않아 가지 못한 법원 시위현장에 가 있는 친구들을 응원하고 마음을 전했다. 가장 최근까지, 박원순을 지지했던 페미니스트 친구가 ‘모르겠다’만 읊조리며 우는 걸 오래도록 보았다.

과거로부터 관절 같은 변화의 기점을 끌어내어 사건의 흐름을 엮고 서사를 짜내는 일은 인간의 오랜 기억술이자 치유술이었다. 한편으로, 변하지 않을 듯하면서도 조금씩은 변해가는 흐름은 대기처럼 우리를 감싼다. 성범죄가 한낱 ‘파도 앞의 조개’였던 시기는 조금씩 멀어지며, 그렇지 않아 보일 때마다 누군가는 다시금 외치고 행동한다. 위치에 따라 그 정도가 야속하게 다른 무기력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뭐라도 하려는 그 ‘누군가’의 수는 점점 많아진다.

내가 지금의 나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 혹은 덜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과거보다 조금은 나아졌으리라는 서사에 속아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문학적, 심리적 상황 안에서 나의 위치성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이런 시기, 이런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찾아 시도하는 ‘행위자’가 되기로 했다. 나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종말의 무색함은 바라고 또 바란다. ‘종말’을 부르는 일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거의 어떤 불의를 꺼내드는, 한 조각 불가해한 기억 또는 기록 작업에 그쳐버리는 세계를 바란다. 그때까지는 조금씩 더 살아보려 한다.

 *필자소개 

비교문학은 대관절 뭘 공부하는 건가요? 늘 질문받지만 매번 잘 대답 못하고 나도 모르고 심지어 아무래도 계속 모를 것만 같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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