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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영원, 슬퍼하는 자만이 다다를 것이다(김윤동)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10. 2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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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슬퍼하는 자만이 다다를 것이다

김윤동
(본 연구소 기획실장)

비극의 탄생 : 비극이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비극은 늘 옆에 있었지만, 나는 늘 용케도 그 비극 옆을 잘 비켜가며 살아왔다. 비극은 말 그대로 슬픈 '극' 곧 허구적인 이야기일 뿐이기에, 각본과 배우들과 연출이 벌이는 그 마당에 나는 줄곧 없었고, 그 극의 관중일 뿐이었다. 

내 태생은 '어찌 보면' 아주 비극적이고 어머니조차 나를 비극의 당사자라고 볼 정도였지만, 나는 한번도 내가 비극의 당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이 자랐다. 오히려 나의 당사자성을 한사코 부인하며 살았더랬다.

비극적인 탄생을 100이라고 하고, 비극적이지 않은 탄생을 0이라고 했을 때, 나는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세상 모든 사람을 일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어디라고 딱 점지어 말할 순 없지만, 대략 추측하건대 중간 순위를 50이라 했을 때 100보다는 0에 가깝지 않을까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나도 인간이기에 가끔 아플 때가 있다. 많이 아플 때가 있다. 너무 아프다 보면 그 아픈 시간이 얼마가 되었는지, 그 정도가 얼마가 되는지 가늠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 그저 아픔은 어떤 임계점이 넘어가면 그저 ‘아픔’ 그 자체로서 남아 있지, 그 아픔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 고통의 의미란 사라지고 오히려 통각이 무화되기까지 하는 시간이 온다. 

그렇게 되면 그저 나는 사람일 뿐, 아픔이 어디까지 내 속에 얼마나 침투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이 느닷없이 찾아 들면 내가 아픈 사람인지, 사람이 원래 아픈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이미 허우적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 되면 손 쓰기를 포기하고 혼돈과 아픔과 슬픔 안에서 ‘나’이기를 포기한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뒤따르는 아픔을 위해 잘 지내던 아픔에 양해를 구하고 그 고통에 자리를 내어준다. 

내 고통이 우월해지기까지의 과정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다. 누구든 자기의 고통이 타인에게 전가되지 않기를바란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적어도 그것이 남들의 그것보다 우월하기를 바란다. 내가 넘기 어려운 고통을 넘어섰기에, 반복되는 것은 원치 않지만, 그것이 분명 어려웠다는 자부심이 포기되지 않는다. 

고로,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가짓수로 기억하기 시작한다. 그 때 겪었던 “고통 No. 1, 즉 고통 일련번호 1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바이다. 오히려 아픔의 당사자가 바라던 바와는 정반대의 일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처음에 사람들은 자기에게 닥친 아픔이라는 손님을 어르고 달래어 동무로 지내기를 기원한다. 낯설지만 말을 잘 걸지 못하는 긴장관계가 있다. 

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과도 같은 아픔을 맞이하는 사람은 이내 그 아픔과의 긴장을 포기한다, 한 번 두 번 아픔이 고통이 되면, 그러니까 딱지가 앉으면 고통을 잘 다루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자신을 그렇게 능력있는 사람이라 믿게 된다. 심지어 낯설기 짝이 없던 그 고통은 밀접해져서 그것마저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 마지 않게 된다. 포섭되고 삼켜지고 넘어선 고통이란, 그 얼마나 매력적인 이름이던가! 즉, 어느 순간부터는 대기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고통’들’을 처리해 내느라 바빠진다. 

결국 ‘나’는 그 고통들의 출석만 부르고 그것들이 가진 개별성을 가차 없이 가지치기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누구든 날카롭게 고통을 요리하여 멋지게 세상에 플레이팅하여 내놓는 능력을 가지고 싶지만, 끊임없는 노동, 그리고 일의 관성이란 호락호락하게 그에게 날카로운 칼날을 내어주지 않는다. 바쁜 일이 몰아치고, 흘러가는 시간의 관성이 이어지면 고통을 처리할 골든 타임을 놓치고 고통을 겪는 ‘그 사람’은 어느 순간 고통의 일련번호를 매기는 사람으로 전락해 있다.  

아픔이 고조되어 무화되는 시기가 온다고 상상했던가. 나에게 다가온 그 고통들은 ‘악’이 보낸 ‘사탄 no. 1, no. 2’ 일 뿐이다. 나는 그저 처리해야 할 ‘업무사탄 no. 1, no. 2’인 것이고… 나와 때론 긴밀하게, 때론 달래가며 맺어가는 ‘관계’로서의 아픔이 아니다. 

그럼 이제 나는 관대한 황제의 옷을 벗고, 야멸차게 고통을 채찍질하는 망나니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후 ‘나’의 고통은 없어지고 고통’들’이 죄수복을 입은 채 내 앞에서 도열하게 된다. 그저 고통들은 나라는 순전하고 정결한 존재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죄수’들일 뿐이며, 나는 그들을 심판하는 심판자로 서게 된다. 

마지막 단계는 이것이다. 결국 그 아픔들의 심판자로서의 ‘나’는 그것들을 소유한 ‘나’, 신화가 된 ‘나’로 탈바꿈한다. 그들을 다뤄 온 몸으로서의 ‘나’는 살아 있으며, 정복한 것들은 한낱 머리채만 들려진 채 나의 생존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어 있다. 

나의 고통은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아픔들을 넘어 서 있는 하나의 ‘있기’ 때문이다. 없음이 보낸 모진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는 바위처럼 내 몸이 흔적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이정재 분)이 하는 대사는 이 고통의 우월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주 적절한 예시가 되어 준다. 그는 왜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냐, 왜 배신하였느냐는 질문에 ‘그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말하면서 이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 몸에 일본놈들의 총알이 여섯개나 박혀 있습니다. 일천구백이십년 경성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때 총맞은 자리입니다. 구멍이 두개이지요. 여긴 이십이년 상해 황포탄에서 이십칠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삼십이년 이치구 폭파사건 때. 그리고 이 심장 옆은 삼십삼년에. 내가 동지 셋을 팔았다고 하셨는데! 그 친구들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그 젊은 청춘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거름이었습니다. 재판장님!”

 

동지를 셋 씩이나 팔아 넘겨 그들의 목숨을 내어준 이로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의로운 자기 몸을 증언해 주는 ‘자기 몸에 박힌 여섯개의 총알’이었다. 우월한 고통. 그것은 이와 같이 완성된다. 

 

내 고통의 고유함

우리는 요새 들어 ‘라떼’들이 얼마나 우리의 사유와 삶에 해악을 끼치는지에 대해 여기저기서 마찰음이 나고 있는 것을 듣는다. 아픔이 ‘라떼’라는 이름의 타인을 가해하고 학대하는 고통의 형태로 바뀐 걸 알아차렸다면, 그러니까 우리 몸에 피가 철철 흐를 때 알아차렸다면, 그것이 고체처럼 딱지로 변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렸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강제적으로 그 딱지는 뜯겨 나갔다. 

우리는 다시 비극을 마주한 지금, 아픔의 우월함을 따질 때가 아니다. 누가 더 고통스러운지, 겪었던 고통의 갯수가 몇 개인지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고통은 유일무이한 그런 우월한 것이 아니다, 고유하게 아프고, 고유하게 살아 있다. 

더 이상 아무런 아픔을 느낄 수 없는 지경이 오기 전에, 멸망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러니까 거꾸로 우리가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이 이르기 전에, 더욱 힘을 다해 아픔을 슬퍼하자. 그 슬픔만이 우리가 그렇게 염원하는 ‘영원’에 다다를 수 있게 한다고 윤동주가 이르지 않았던가. 

 

팔복

윤동주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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