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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비평] 데리다의 ‘선물 Gift’에 관한 여섯 시퀀스 II(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20. 6. 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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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선물 Gift’에 관한 여섯 시퀀스 II *

이상철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04. 선물과 포틀래치 potlatch 

그렇다면 선물이 독약(das Gift)이 아닌 선물(die Gift)로 쓰이는 경우는 언제일까? 이 문제에 대한 연구에 매달렸던 사람이 바로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이다. 그는 『증여론』(1925)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의 ‘포틀래치’를 분석하면서 인간은 선물을 주고 받으며 현실의 논리와 법칙을 벗어날 틈과 기회를 모색했다고 말한다. 

    상상해보라. 결혼식이나 장례식날, 혹은 칠순이나 팔순 잔치, 돌잔치날에 마을 사람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그날 모인 축의금, 혹은 조의금을 모두 불태운다면. 그것을 불쏘시개로 하여 자기 집 곳간에 비축된 쌀과 비단을 모두 꺼내 불태운다고 생각해보라.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된 시절을 보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 행위는 우습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하고 미친 짓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손님이 방문하거나 누가 찾아왔다는 이유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놓고 탕진하는 무모한 이벤트를 왜 감행하는 것일까? 자기의 부와 재산을 파괴하는 포틀래치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일까? 모든 것을 다 비워내는 것이 지도자의 도리이고, 능력이라 생각하는 집단의 무의식이 포틀래치에 투영된 것 아닐까. 선물, 즉 포틀래치를 베푸는 이는 그에 합당한 보답을 받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틀래치를 베풀고 그것만큼, 아니 그 이상 상대방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존경과 경의와 자기희생을 통한 도덕적 우위, 그리고 명예와 권위를 얻는다. 이렇듯 포틀래치는 힘과 권위가 무엇인가를 한껏 드러내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생기는 어떤 것임을 드러냈다. 

    포틀래치를 언급하면서 문득 예수가 생각났던 것은 신학하는 자로서는 당연했다. 예수는 포틀래치, 즉 본인이 인류의 선물이 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신적 위신을 가진 존재, 숭고한 대상이 되지 않았던가. 예수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불사르면서 우리에게 선물이 되었던 존재가 있었나. 복음서는 예수의 포틀래치에 대한 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교환의 법칙, 등가의 원칙으로 볼 때 예수의 포틀래치는 기이하고 엽기적이며 우스꽝스러운 행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의 현현을 체험했거나 숭고한 무언가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은 현실의 원칙에서 볼 때는 기괴하고 일반적이지 않고 코메디 같고 잔혹스럽게 보이는 존재들 아닌가.      

    결론적으로 포틀래치가 선사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예상치 않은 누군가가 베푼 선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지.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우리 삶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당장 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의 아무 조건없는 선물이 순간순간 발생하여 지금의 나를 이끌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나의 의지나 기획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형성되고 다가왔다. 그것은 공평하지도 않았고 인과론적이지도 않았으며 수미일관한 일관성을 유지하지도 않았다.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 교환의 법칙이 지배하지도 않았다. 교환의 법칙, 인과론적 결말, 수미일관한 변증법적 결과로만 따지면 나의 현재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허접했어야 맞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이러한 현실법칙의 외부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삶은 본래가 삐뚤삐뚤한 것이고 삐걱거리는 것이다. 그런 불균질하고 거친 삶의 단면을 매끄럽게 균질한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교환의 질서, 등가의 원칙이다. 포틀래치는 그 원리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가 우리 삶의 정언명법이 되어 버린 세상속에서, 포틀래치는 새로운 삶의 패턴을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05. 선물은 ... ‘불가능의 가능성 impossible possibility’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 텍스트, 차연, 용서, 환대, 정의, 그리고 선물은 서로 대체가능, 호환가능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건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환유적 말잇기 놀이처럼,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 텍스트, 차연, 용서, 환대, 정의, 선물’도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해체가 선물이 되고, 차연이 용서와 환대가 된다. 선물이 환대와 용서와 해체가 되는 것도 하나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대목에 데리다의 용어들을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데리다는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무조건적인 것’들에 관심하였다. 그는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애도, 무조건적인 선물 등을 말하는데, 사실 이러한 개념들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데리다는 선물을 언급할 때,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혹은 ‘마치 가능이라도 한 것처럼 as if it were possible’ 같은 표현을 많이 쓴다. 이런 불가능성들이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불가능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는 사도 바울이 지녔던 그것과 유사하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 우리들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바울은 ‘마치~ 아닌 것처럼(as if not)’ 사는 것이라 말한다. 현실 세계 속에서 살면서 ‘마치~아닌 것처럼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법을 무력화시키는 메시아적 현실의 시작이다. 비록 제국의 논리가 판치는 세계 속에 살지만 그것이 나랑은 상관없는 것처럼 사는 것. 자본이라는 물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것에 일방적으로 휩쓸려 가지만은 않겠다,는 각오로 사는 것. 체제와 권력이 온갖 권모술수와 모략으로 나를 감싸고 있지만 호락호락 순종하지 만은 않겠다,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것! 

    이 말은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의 여지를 제공한다. 자본을 향한 소소한 딴지들, 부정의 한 권력을 향한 불복종 운동들을 각자의 삶에서 상상하고 감행하라는 것이다. 데리다의 ‘선물’은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예이다. 선물은 세상은 자본에 미쳐 돌아가지만 나는 그것에 놀아나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지니는 삶의 자세이고 양태이다. 

    또한 선물은 계산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무엇이다. 그리하여 선물은 현재와의 단절을 뜻하는 의미가 되었다. 그 현재란 말할 것도 없이 전 지구적 자본의 세계화로 고삐가 풀린 이곳 지구다.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의 반대어로 협소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불가능은 우리가 희망은 할 수 있지만 전망은 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이 예측 너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불가능했던 것이 어떠한 계기와 기회에 시간이 쌓여서, 혹은 누군가의 호의와 사람들끼리의 연대로 가능성의 세계로 변했던 추억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우리에게 임했던 순간들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데리다의 ‘선물’안에 깃듯 ‘불가능의 가능성’은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 카이로스적인 도래와 파국을 기다리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몽상이나 낭만, 혹은 이상화가 아니다. 오히려 불가능성이 변혁의 가능성을 부단히 요청하고 노래하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동안 직선적으로 관행적으로 흘러오던 “시간을 탈구시켜(The time is out of joint)” 전혀 다른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본으로 재편되어 혁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꽉 짜여진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회의하게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있는 틈과 상처와 균열을 탐색하고 그 틈으로 내가 개입해 들어가다 보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데리다의 선물 안에 깃든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함의하는 바이고, 그렇다면 선물은 정치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기득권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불온한 선물이고 임박한 파국이다.     

06. 선물은 ... ‘법 밖의 정의 Outlaw Justice’ 

데리다의 선물에 관한 시퀀스를 차연, 환대, 파르마콘, 포틀래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 칭하고 설명하는 이 순간 유대 사회를 지배했던 ‘정결법’이니 ‘안식일법’ 같은 것을 어기면서까지 파국을 향해 달려갔던 예수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끝까지 주장하면서 살아간 인물이었다. 율법을 고수하면서 인민을 정죄하고 억압하는 무리들을 향해 예수는 그들이 정한 법을 어기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마15:3)”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법 밖의 정의를 선언한 것이다. ‘법 밖의 정의’는 선물의 행위론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나는 앞에서 ‘마치~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 데리다의 ‘선물’에 깃든 실천철학이고, 마치~아닌 것처럼 사는 사람들의 행위를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행동강령이라 말한바 있다. 이때의 행위는 Action이 아니고 Act이다. Action은 시스템과 제도 안에서의 행위다. 그 안의 질서를 존중하고 거기에서의 게임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의 행위다. 법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하고,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복지에 좀 더 신경을 쓰고, 공산주의 내에서 교조적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휴머니즘적인 공산주의가 나오고 하는 것들은 모두 변혁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체제 내에서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action이다.      

    그러나 act는 다르다. Act는 action과 다르게 경계를 넘어 파국을 향한다. 데리다에게 있어 선물은 말할 것도 없이 행위(act)다. 데리다의 선물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파괴하는 광기이고, 미친 에너지(앞의 책, 243)이다. 예수 당시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고 광기와 미친 에너지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 비유’는 타자를 향한 선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 한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사마리아인은 초죽음이 된 타자인 유대사람을 섬김을 받아 마땅한 이웃으로 대접한다. 타자의 신음에 무조건적인 선물로 응답하면서 그는 법 밖의 정의를 향한다. 

    예수의 윤리에서 나타난 ‘법 밖의 정의’ 는 내가 알 수 없는 존재, 내가 모르는 존재에 대한 응답(선물)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 메시지다. 최후의 심판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인자에게 무조건적인 선물을 한 사람인데, 나중에 밝혀진 것은 그 인자가 타자였다는 사실이다. 인자는 내가 알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신앙고백의 대상도 아니며, 숭배의 대상도 아니다. 인자는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선물의 대상이었다.

    예수의 무조건적인 선물은 유대율법에 대한 해체, 즉 ‘법 밖의 정의’를 향해 걸어갔던 행위(act) 아니었을까. 예수의 행위처럼 ‘법 밖의 정의’가 정확히 적용된 경우는 없다. 예수는 율법을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율법 안에 숨어있는 진정한 의미, 즉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인간 사회에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자는 율법 본연의 정신을 끝까지 밀어부친 인물이었다. 이렇듯 그에게 있어 선물은 상징적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의 질서와 상관없는 ‘법 밖의 정의’(Outlaw justice)를 겨냥한다. 

    ‘법 밖의 정의’에 대한 논의는 초대교회의 경우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로마인이나 유대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혁명적 선언을 하였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짧고 인상 깊은 말로 선물 안에 깃들어 있는 ‘법 밖의 정의’에 대한 서사를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5;17). 

    이 말은 복음이라는 기준선, 즉 바울의 그리스도 해석을 기준으로 세상이 재편되었다는 말이다. 로마가 그어놓은 절단선은 로마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그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일 수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국인과 난민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이러한 구분과 차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부질없는 선언일 뿐이다. 이제 새로운 분할선이 선포되었다. ‘로마의 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법으로, ‘자본의 법칙’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한 전환과 교체가 바로 데리다의 ‘선물’이 함의하는 바이다. 그 분할선을 중심으로, 그 선물로 인해 새로운 적대가 형성되었고, 그 선물로 인하여 세상의 가치는 역전된다. (끝)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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