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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비평] 데리다의 ‘선물 Gift’에 관한 여섯 시퀀스 I(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20. 5. 1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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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선물 Gift’에 관한 여섯 시퀀스 I *

이상철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00. 프롤로그 prolog

데리다 연구자들은 1990년대 이루어진 현실 사회주의 몰락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 데리다와 후기 데리다를 나눈다. 전기 데리다는 주로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에 주력하면서 그에 대한 전략으로 언어, 기호, 텍스트에 대한 천착을 특징으로 한다면, 후기 데리다는 정치, 윤리, 법, 신학, 정의론 등 정치철학과 신학적인 부분으로까지 자신의 관심사를 확대하여 해체론을 적용하기에 이른다. 

    지금부터 다루는 데리다의 ‘선물’은 후기 데리다의 사유를 특징짓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나는 데리다가 말하는 ‘선물’을 양파로 상정하고 하나씩 양파껍질을 벗겨나가는 심정으로 글을 전개할 것이다. 그 껍질의 종류는 다양한다. ‘차연’이나 ‘환대’ 같은 개념어 껍질도 있고, ‘파르마콘’과 ‘포틀래치’ 같은 서사성이 두드러진 껍질도 있다. 그렇게 하나씩 껍질을 지우다 보면 데리다 ‘선물’의 속살이 드러날까. 그것은 글의 말미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데리다 ‘선물’의 진면목인지는 아직까지는 판단이 안 선다. 

    본격적으로 ‘선물’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에 앞서 데리다의 ‘차연’에 대한 이해를 거치는 것은 당연하다. ‘차연’ 개념은 데리다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과 동시에 이후 전개되는 데리다의 사회철학으로 접근하는 데 있어 통과의례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01. 선물은 ... 차연différance으로 부터 

‘차연’으로 번역된 différance는 어원적으로는 differ(다르다) 와 defer(연기하다), 이 둘이 합쳐진 조합어이다. 북미 철학계에서 데리다를 전하고 있는 페넬로페 도이쳐(Penelope Deutscher)는 데리다의 차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차연은 현존(present)도 부재(absent)도 아니다. 그것은 현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일종의 부재이다. 그것은 동일성(identity)도 아니고 차이(difference)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일종의 미분화(differentiaition)이다. ” 

    differentiation는 수학용어로는 미분을 뜻하는 말이다. 미분이 무엇인가? 계속 잘게 쪼개는 것이다. 이렇듯 Differntiation은 사전적으로는 ‘미분화하기’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차이화하기’로 치환된다. 미분했다는 말은 쪼개어져서 이 전 형태와 다른 차이가 발생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볼 때, ‘차이화 하기’라는 말은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차이’와 ‘연기’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말이고,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틈과 여백이 계속 생겨난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해석에 대한 독점없이 해석의 준거점들이 계속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 글에서 ‘차연’은 틈과 여백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틈과 여백이란 의미가 재현할 수 없는 공간을 뜻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도는 끝내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도는 없다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는 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도 여전히 상존한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는 인간들이 지니는 자기동일성과 고도에 대한 환상과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서양철학은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역사가 아닐까. 오지 않는 고도를 맞이하려는 마음, 중심이 텅 비어있는 고도를 꽉 채우려는 마음, 멀리 있는 고도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마음이 바로 ‘자기동일성’이다. 서양의 정신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강박의 역사였고, 변증법이란 그 틈과 여백을 메우기 위해 고완된 정신의 방어기제인지도 모르겠다. 헤겔은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과정이다”라고 말했다지만, 데리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은 서구인들의 허풍이고 위선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차연’을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남성중심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교리중심주의로 상징되는 절대적 권위의 시스템속에서 차이를 계속 발생시키는 행위이고, 뿌리깊은 해석의 장벽에 틈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되고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자본이라는 초월적 보편성에 딴지를 걸고, 자본의 원칙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편리와 유행이라는 시대의 유혹에 요동치는 내 삶의 습관과 방식을 점검해보는 것, 그리고 나서 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유행과 욕망에 둔감해지는 방법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고민한 후에 실행해보면 어떨까. 

    결국, ‘차연’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거창한 것도 무시무시한 것도 아니다. 내가 내 삶속에서 차이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나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의심해보고 재해석 하면서 나만의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것이다. ‘차연’은 데리다의 후기 철학의 키워드인 환대(Hospitality)와 선물(Gift)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그는 환대와 선물이 자본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는 자들이 지녀야할 마음이고 행동임을 말하고 싶었는데, 그 논의의 시작점이 ‘차연’이었던 셈이다.    

02. 선물은 ... 환대hospitality의 표시 

북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흘러온 난민과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프랑스에서 데리다는 타자에 대한 환대의 문제를 놓고 해체주의적 시선에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환대는 타자를 전제하면서 어떻게 타자를 대하고, 어떻게 타자를 향해 행위를 할 것인지를 둘러싼 데리다의 처방전이고, 선물(Gift)은 환대를 실제 삶의 정치에서 구현하는 실천강령이라 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타자란 우리의 유사성과 동질성을 깨뜨리는 존재이다. 신과 이웃은 서구역사에서 대표적인 타자의 목록이었다. 신은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초월한 넘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타자이고, 나보다 못하고 열등한 이웃은 우리 안으로 진입할 경우 우리의 동일성에 훼손을 가할 수 있으므로 타자로 분류하여 배제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신에 대한 경외가 어려운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려운가? 

    신에 대한 경외는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거리(distance)의 문제에서 나온다. 신과 인간의 거리는 극복할 수 없다. 그 거리가 인간에게 안도감을 준다. 신에 대한 경외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고,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그 거리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구호물자는 기꺼이 전할 수 있지만, 그 난민들을 국가로 들이고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살게 한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멀리 아프리카에 있으면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조할 수 있지만, 우리 안으로 그들이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환대의 대상이 아니라 적대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신을 향한 경외보다 내 안으로 들어온 타자에 대한 사랑이 힘든 이유다. 

     데리다는 신자유주의 도래 이후 자본을 따라 국경을 넘는 이웃, 난민, 노동자들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발생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 외국인 혐오증)에 맞서 무조건적인 환대를 이야기 한다. 환대는 근대성 일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대안적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이는 데리다가 ‘환대’와 대립적인 것으로 끌어온 ‘초대(invitation)’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분명해진다. 초대와 관용은 강자의 논리다. 권력을 지닌 자들의 양보와 자비와 은혜에 기대는 초대와 관용은 근대 부르지와의 시선에서 타자와 이방인과 소수자를 어떻게 대할지를 논한다. 초대와 관용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우위를 전제한다. 타자들의 입장과 처지는 절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봐주고 이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의 떨림, 얼굴의 변화, 몸의 움직임, 그리고 숨소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데리다는 이런 관용 대신 환대를 이야기 한 것이다. 관용이 주체중심적이라면, 환대는 타자중심적 개념이다. 관용의 주체는 근대성의 발전과정에서 다름을 수용하고 자기것으로 받아들이는 놀라운 종합의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관용의 주체는 자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혹은 않는) 타자에 대해서는 철저한 응징과 보복을 가했던 주체이기도 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비롯해서, 동성애 혐오증(Homophobia),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 이슬람에 대한 적대, 빨갱이에 대한 적대, 여성에 대한 혐오 등 무수한 적대와 혐오의 역사 현장에 그들은 존재했다. 데리다는 관용의 주체가 지니는 위험을 간파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환대를 이야기 한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무조건적인 환대’다.

    지금까지 나는 데리다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개념어인 ‘차연’에 대해 살폈고, 이어서 데리다의 실천철학이라 할 수 있는 환대에 대해 고찰하였다. 짧은 데리다 공부를 한 나로서는 ‘선물’에 접근하기에 앞서 ‘차연’과 ‘환대’를 거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데리다는 이런 추론의 고리를 거부하겠지만 말이다. 다음 장부터는 차연과 환대를 지나 좀 더 깊숙이 선물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그리스어인 파르마콘에 대한 사유,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포클래치에 관한 여러 의견을 지나면서 데리다의 선물에 대한 논의는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03. 선물은 ....... 파르마콘 pharmakon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선물을 주거나 혹은 받을 때 어떤 기대나 효과가 발생할지를 미리 예상하는 사람이 있는가? 데리다는 그것을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물’일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기대와 효용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고, 좀 과장하면 독약이다. 

    실제로 ‘선물Gift’은 독일어로 ‘독약’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성명사 die Gift는 선물이지만, 중성명사 das Gift는 독이다. 선물이 인간사이나 공동체에서 어떤 기대 효과를 일으켜 관계를 화석화 시키는 요소로 작동을 할 경우, 이때 선물(Gift)은 das Gift, 독약이 된다. 심지어 데리다에게 있어 가장 순수한 의미의 선물은 답례는 물론이거니와 “고맙습니다” 라는 정도의 반응조차도 허락지 않는다. 아울러 선물을 주는 사람이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하는 거야”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그 생각 자체가 일종의 보상이라 지적한다. 즉 선물은 선물을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에게 선물로 인식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물은 독약이 된다. 

    이렇듯 데리다는 선물에 대한 논의를 독약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끌고 온다. 그는 그리스어 ‘파르마콘 Pharmakon’이 지닌 중의성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가지고 왔다.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Phaidros)' 속 파르마키아(Pharmakeia, 제약술)의 이중성과 연관되는데 시작은 이렇다. 소크라테스가 더위를 피해 아테네 교외의 일리소스(Ilissos)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치유의 효능을 가진 샘을 뜻하는 요정을 '파르마키아'라 불렀다. 이 말에서 약과 독을 의미하는 '파르마콘(pharmakon)'과 지금 약국을 의미하는 'pharmacy'란 단어가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파르마콘을 거론했던 최초의 이유는 당시 유행하던 소피스트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소피스트를 파르마콘(독)으로 지목하였고, 파르마콘의 파생어 파르마키우스(pharmakeus, 주술사)라 비난했다. 이렇듯 <파이드로스>에서는 ‘파르마키아-파르마콘-파르마키우스’가 번갈아 쓰이면서 청각적 효과를 강화시키는데, 그 과정을 통해 데리다는 그것들과는 다른 맥락의 단어인 ‘파르마코스(pharmakos, 희생양)’를 떠올릴 수 있다고 말한다. 

    ‘파르마코스’에 대한 해석은 데리다의 텍스트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데리다는 반문한다. 문자가 기억의 한계를 보충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억을 위협하는 것 아닌가. 글이 불안한 기억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 아니라 기억의 능력을 가로막는 ‘독’이 아닌가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쓴 <파이드로스>의 대화편에서 진리란 영혼의 말(logos)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지, 결코 외적인 흔적을 빌려서 표시하는 문자(grammatology)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문자는 진리(로고스)에 대한 망각에 대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약(藥)’이고 ‘선(善)’이지만, 진리를 문자 안에 가두어 죽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독(毒)’이요 ‘악(惡)’이다. 이렇듯 데리다는 <파이드로스>를 통해 문자의 이중성과 파르마콘의 이중성을 비교하면서, 텍스트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폴리스는 본래 정결하고 완전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폴리스 안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누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구성원들은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했다. 경계를 더 삼엄하게 서면서 구멍과 틈을 메우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 왜일까? 문제의 원인이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 원인을 덮고 감추기 위한 희생양을 체제는 상정하기로 하는데 그것이 ‘파르마코스’다. 그 후 파르마코스는 폴리스 안으로 균과 독을 끌어 들인자로 간주된다. 마땅히 폴리스의 평안을 위해 파르마코스는 추방되어야 한다. 그 결과 파르마코스는 있지만 없는 자, 안에 있지만 밖에 있는 자, 혹은 안에도 밖에도 없는 자로 낙인찍힌 존재가 되었다.  

    파르마코스가 폴리스의 경계를 허물었던 것처럼, 데리다에게 있어 텍스트란 밖을 향해 열려있어야 하고, 해석이란 텍스트의 안과 밖을 허무는 행위다. 이런 해석의 갈등을 담고 있어야 텍스트는 텍스트로 완성된다. 서구인들이 믿었던 자기완결적이고 중심이 꽉 차있는 텍스트는 없다. ‘있음(Being)’은 ‘있음’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있음’이란 누군가의 ‘앎’에 담긴 ‘있음’이다. ‘있음’을 ‘텍스트’로 치환하면, 어떤 텍스트의 텍스트성은 텍스트 자체의 절대적 고유성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텍스트란 그 안에 파르마코스가 곳곳에 숨겨져 있어서 그것이 각기 다른 누군가의 앎과 삶의 현장과 만나 촉매가 되어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파르마콘’과 얽혀있는 ‘파르마키아’ ‘파르마키우스’ ‘파르마코스’에 대한 논의를 통해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텍스트의 해체에 대해 말하였다. 데리다의 ‘선물’을 논하면서 ‘파르마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분명한데, 선물이 신자유주의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를 해체할 기재로 작동할 수 도 있으리라 기대감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포틀래치에 대한 내용을 전개하면서 밝혀질 것이다.

(다음 호 2편에서 계속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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