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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 '위안부' 운동 관련 논란에 대한 단상(황용연)

시평

by 제3시대 2020. 6. 2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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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 '위안부' 운동 관련 논란에 대한 단상

황용연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1.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 독일편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어떤 독일의 젊은이가 나와서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나치의 범죄를 왜 자기가 책임져야 하냐 자기는 우연히 독일에 태어났을 뿐인데 이렇게 항변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이원복이 하는 대답은, 죄인의 아들(딸은 안 나온다)에게 죄가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죄인의 아들은 아버지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고, 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독일을 일본으로 바꾸어도 같은 장면이 가능하겠는데, 그렇다면 저런 항변이 들어올 때 적절한 대답은 무엇일까. 필자가 아는 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이런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사카이 나오키의 이야기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일본 제국이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일본국의 시민도 유죄이다라고 말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일본국, 즉 일본 제국의 후신인 국가의 시민은, 그래서 바로 그 국가의 주권자인 시민은, 일본 제국의 범죄로 인해 자신도 유죄이다라고 의심받을 가능성까지를 부인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제국의 범죄에 자신이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 범죄를 더욱 적극적으로 규탄하고 진상규명을 위해서 일해야 할 책임이 바로 일본국의 시민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이용수님의 기자회견 이후 한 달 이상, '위안부' 운동에 관한 논란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논란이 되었다. 그 와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 중 하나가 운동의 이상과 맞지 않는 당사자를 배격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워낙 증거가 뚜렷한 일들이기도 하고. 다만 여기서 이런 생각은 할 수 있겠다. 운동의 이상에 맞는 당사자가 있고 아닌 당사자가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당사자의 말을 듣는다/듣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보통 이럴 때 많이 나오는 언행은 당사자 중 한 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당사자에 대해서는 '배후'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번 논란 와중에 이용수님에 대해서 '배후'를 의심하는 언행이 많이 나온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테다. 반면 정대협/정의연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당사자들은 보상을 받고 끝내고 싶어하는데 운동단체들이 강하게 나와서 일이 안 풀린다는 식의 비판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이번 논란이 벌어지고 나서 보수정권의 고위 외교관도 이런 식의 비판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당사자와 배후를 구분짓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어떤 당사자든 간에, 혼자 모든 걸 다 깨닫거나 다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자신의 활동을 만들어 가는 법이라면, 누군가 당사자로 나설 때는 이미 그와 영향을 주고 받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일 터인데. 그렇다면 당사자와 배후를 구분짓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래서 부적절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면 이제 이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운동이 당사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데 이미 그 '당사자'의 입장도 언제나 복수로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 그러면 이 복수의 당사자의 입장을 놓고 다수결을 따지거나, 혹은 "우리도 있는데 너희가 왜 다라고 하니"를 주고받는 놀이를 할 게 아니라면, 한 입장에 터를 잡더라도 다른 입장과 어떻게 소통하면서 가능한 대로 여러 입장들의 공유점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문제가 될 터.

이번 논란에서 가끔씩 언급된 1990년대 중반의 아시아여성기금. 국가의 책임의 문제를 국민 모금 방식으로 우회하려 했던 그 기금을 두고 한국 '위안부' 운동과 필리핀 '위안부' 운동은 다른 방식을 취했다. 한국에서는 알려졌다시피 그 기금을 받지 말라고 했고, 받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반면 필리핀에서는 받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받은 사람들의 선택을 당사자들의 선택으로 인정하고 지지한다는 방식을 취했다. 아마도 필리핀의 예가, 앞 문단에서 이야기했던 '여러 입장들의 공유점'을 만들어가는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싶다.

3.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지금 '위안부' 운동을 두고서는 당사자/지원자라는 프레임이 아주 당연하게 운위가 되는데, 사실 사회운동에서 이런 프레임이 작동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당사자/지원자라는 프레임이 '위안부' 운동에서는 당연한 듯이 운위되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던 당사자들은 보상을 받고 끝내고 싶어하는데 운동단체가 강하게 나가서 문제다라는 논리를 어느 역사학자가 듣더니 그러면 정대협/정의연은 일종의 보험회사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마침 어느 시사평론가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저런 논리의 뒤에 깔려 있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마치 교통사고에서 그렇듯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하면 끝나는 문제라는 것인데,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는 국제사회가 이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 반성의 책임을 이끌어 내야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보험회사니 교통사고 합의니 하는 말이 나온다는 건 '위안부' 운동이 나와 관계 없는 남의 이야기로 비친다는 말일 테고, 그러나 당사자/지원자 혹은 당사자/운동단체라는 프레임이 작동하는 이상 저런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어렵다면, 사실은 당사자/지원자 프레임이 아주 당연하게 운위가 된다는 그 현상 자체가, '위안부' 운동이 남의 이야기로 비친다는 징후 아니겠느냐는.

남의 이야기이니 '보험회사'가 잘 처리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보험회사가 알고 봤더니 부정을 저질렀더라는 말이 들리면서 온갖 욕을 다 먹는 게 현재의 상황인 듯 하다. 운동이 국제적인 전시성폭력 고발 운동으로 확장되어 가고 '위안부'의 강제동원에 대한 좀 더 깊은 성찰적 담론이 나오고 있음에도, 운동의 대표적인 활동가가 여당의 위성정당에 동원되면서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방관할 지경이고 대중의 인식이 이미 학문적 담론의 주류가 된 취업사기 형태보다 여전히 '총칼 들고 강제로 끌어갔다'에 그치는 운동/담론과 대중의 괴리 현상도 '남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설명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현재까지의 '위안부' 운동을 마뜩찮아 하는 입장에서 등장하는 한일 외교관계의 뜨거운 감자 혹은 과도한 민족주의 등등의 프레임도 남의 이야기 현상이긴 마찬가지겠다.

4.

서두에서 사카이 나오키의 이야기를 빌려 일본 제국의 범죄에 대한 일본 시민의 책임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사실 사카이 나오키가 저런 입장을 제출할 수 있었던 실마리가 '위안부' 문제였다. 사실 일본 사회운동 내에는 '위안부' 문제를 통해서 자신들도 연루되어 있는 일본의 전후 체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진행한 성과들이 있다. 물론 그 성과들에 대해서 사회주의 망하고 말할 게 없던 일본 사회운동에 말할 거리를 주었다는 식으로 발언한 '한국인' 교수도 있지만 말이다.

일본이 이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위안부' 강제동원이 가능했던 식민지 체제의 중하단부를 지탱했던 권력이 새로운 시민권력으로 대체되지 못한 채 건설되었던 한국. 그 강제동원에 호응해 주었던 가부장제가 계속 지속되어 해방 후 돌아온 '위안부'들이 여전히 자기를 감추어야 했던 그 한국의 주권자인 시민은 주권자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나아가서, 현재 '위안부' 문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한일청구권협정. 그 협정을 통해 받은 돈이 중요한 씨앗 중 하나라는 오늘날의 경제발전의 성과를 누리고 있는 그 한국의 주권자인 시민은 주권자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총선은 한일전' 운운하는 민족주의가 더 이상 답이 아니라면, 그것은 '위안부' 문제를 '남의 이야기'로 만드는 프레임일 뿐이었다면, 시민권력과 가부장제, 그리고 그늘진 경제발전이라는 이슈들이 주권자로서의 시민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면, 이제야말로 이에 대한 시민적 성찰과 발언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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