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협주곡 <기억>(2015) - 멈춰짐의 공간, 나아감의 시간 III
이재구*
현대음악이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에 ‘불능’하여 애도함에 있어 적절한 매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불능’의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속히 ‘가능’의 길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가능의 길은 현대음악이 ‘소리’들의 해방공간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재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현대음악이 스스로를 소리들의 해방공간으로서 인식하는 일은 사실 괴롭고 씁쓸한 과정이다. 현대음악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은 바로 자기 자신이 단지 자기충족적인 존재일 뿐 자신의 외부 즉,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저 고립된 존재임이 밝혀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지만 만일 현대음악이 그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을 담담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넘길 수만 있다면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차갑고 무뚝뚝해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자신이 품고 있는 해방의 공간이 의의로 넓고 품이 넉넉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의 공간 안에 무수한 악음(樂音)들 뿐만이 아닌 모든 ‘무형’의 소리들 마저도 능히 담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지어 그곳에는 우리의 아프고 슬픈 ‘기억’의 소리들과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어쩌면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의 소리들까지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현대음악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도 ‘가능’한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땀흘려 힘써야 한다. 모든 불능의 길을 벗어나 가능한 길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그 길을 끝까지 밟아 나아가기를.
4월 16일 이후 두 달여의 기간 동안 학위작품과 관련된 작업은 중단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학위작품 안에 무엇을 담고 싶은 지는 점점 더 명확해져 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엄마아빠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안고 겸손히 엄마아빠들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나를 영혼의 골방에서 벗어나 현실을 마주하며 현실 속에서 살아가도록 독려했다.
나의 학위작품이 아이들을 하늘로 떠나 보낸 엄마아빠들에 대한 ‘위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항상 상기하며 작업에 임했다. 엄마아빠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이 나의 성긴 ‘위로’로 공허하게 치환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나의 음악이 ‘기억의 저장소’가 되었으면 하였다. 그것도 엄마아빠를 위한 기억의 저장소는 될 수 없었다. 엄마아빠들이 왜 기억의 저장소가 필요하겠나? 아픔으로 찟겨진 그들의 몸과 영혼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저장소일텐데. 나의 음악은 나를 위한 기억의 저장소일 뿐이었다. 나의 음악은 매정할 정도로 쉽게 잊고 무심해지는 나의 영혼이 또 다시 나약한 모습으로 발견될 때마다 항상 돌아가 깨우침을 얻어야 할, 나 자신을 위한 경책의 저장소일 뿐이었다.
나는 그 기억의 저장소를 기억의 내용에 따라 몇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이 기억의 내용이 피아노 협주곡 <기억>을 구성하는 형식이 되었다. 이 작품의 전체 형식은 크게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의 저장소에는 엄마아빠들이 현재 겪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담아내기 위한 방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품을 구성하는 여섯 섹션 중 섹션1, 섹션3, 섹션4, 섹션5의 총 네 섹션이 여기에 해당된다. 각 섹션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각주를 참고하라.) 하지만 그 곳에는 엄마아빠들의 아픔의 기억만을 담아둔 것은 아니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과거의 기억, 그리고 어쩌면 지금은 상상할 수 조차 없겠지만 ‘소망’이라는 미래의 기억도 꼭 함께 담아두고 싶었다. 1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억은 보통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행복감으로 해석될 수 있을 때 비로소 획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하지만 여러 미디어 매체를 통해 보고 들었던 엄마아빠들의 추억들은 하나같이 후회와 눈물로 얼룩진, 행복감과는 거리가 먼 추억들 뿐이었다. 엄마아빠들은 한결같이 아이들과 좀 더 자주, 좀 더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한스럽다고 말하며 흐느끼기만 했다. 가끔씩 엄마아빠들이 자신의 아이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꺼내는 순간조차도 온통 비애감으로 둘러싸인 추억의 파편들만 소환될 뿐이었다. 엄마아빠들이 겪고 있는 현재의 아픔과 슬픔을 경감시키는 일은 나의 음악을 통해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그 한스럽고 후회 가득한 기억들이 나의 음악 속에서 만큼은 가장 행복한 추억들로 환치되길 바랬다. (그 환치된 기억이 저장된 곳이 [음원의 3:52무렵부터 시작되는] 작품의 두 번째 섹션이다.) 그 동안 바삐 지내느라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늘 부족했던 엄마아빠들이 꼭 아이들과 이 소리의 놀이 공원에서 행복한 추억을 만들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기억의 방을 마련했다.
작품 내에서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소망’이라는 미래의 기억을 담을 방[음원의 19:52 부분에서 시작됨]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은 이미 천사의 날개를 달고 막 하늘로 떠오르려 하던 차였다. 고맙게도, 정말 고맙게도 아이들은 슬픔으로 엎드려 움크리고 있는 엄마아빠들을 하나둘씩 뒤에서 안아 일으켜 세워주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로 힘찬 날개짓을 하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직히 아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이들아, 정말 고맙다… 엄마아빠를 지켜줘서…’
아이들로 인해 실험이 ‘멈추어진’ 음악 공간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그 멈춰진 공간 속에서 나는 한없이 나약했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고요한 음성으로 알려 주었다.
멈춰짐, 그 멈춰짐의 공간이 곧 나아감의 시간이라고.
* 필자소개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작곡전공으로 Ph. D학위를 받고 현재 가천대, 국민대에서 작곡이론과 음악일반에 대해 강의 중.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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