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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위태로움을 지향하며(김정원)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8. 5. 3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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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움을 지향하며





 김정원*

   


    세상이 페미니즘 이야기로 와글와글하다. 소위 ‘기센 언니’들만의 이야기였던 것이 양상이야 다르거니와 그 보편화됨에 있어서는 과연 놀랄만하다.


    ‘와글와글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첫 번째 뜻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로 그 뜻 ‘사람들이 모여 잇따라 떠들거나 움직이다’인데, 또 하나의 다른 뜻이 보다 흥미롭다. ‘쌓아 놓은 물건들이 잇따라 갑자기 무너지다’, 이는 ‘와글와글하다’의 다른 뜻으로서,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들을 잘 표현했다 볼 수 있다. 우리네의 언어에 그득한 ‘아버지의 법’, 그러니까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켜내던 ‘아버지의 이름’이 만들어낸 관습과 질서가 갑자기 잇따라 무너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명제를 알던 모르던 곳곳에서 차별에 대한 저항들이 일어나고 있다. 남성은 공공영역으로 여성은 사적 영역으로 경계 지워지던 것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눈 한 번 질끈 감고 넘어갔던 권력 관계 안에서의 성폭력을 향한 저항까지, 여성들의 저항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담론이 변한 것이다. 세상을 읽어 낼 때의 방법론이 변한 것이다. 그 변화 속에서 우리 여성목회자들의 삶 역시 진실로 변했을까? 세상이 다 변해도 교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이 있다. 안타깝게도 여성들은 여전히 안수를 놓고 사투를 벌여야 하고, 모성애와 친절함을 강요 받고 있으며, 감성과 공감의 영역에 갇혀 있어야 할 때가 많다. 즉, 보편적 인간은 사뭇 남성목사이며, 여성들은 행위 주체로서 특정 영역에서 줄곧 제한되고 있음을 말한다. 남성은 이성이고, 여성은 감성인가? 남성은 권위이고 여성은 헌신인가? 남성은 말하고 여성은 침묵하는가? ‘밖’에서는 이미 그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의 ‘안’은 그리 와글와글하지 못하다. 물론, 그 견고한 경계를 없애기 위한 여성 목회자들의 지난 50년간의 노고는 그야말로 은혜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배들은 얼마나 울었을까, 또 얼마나 아팠을까…… 다만 ‘밖’의 역동성을 감안할 때, 우리는 보다 저항의 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그 소리를 높인다는 것이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암만 페미니즘 노래를 부른다손 그것을 받아들일 때의 각자의 온도 차가 있기에, 그 다름 속에서 여성들 간의 연대를 이루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변화는 각성된 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위험을 감수하며 그 위험 너머의 새 장을 상상하며 나아가는 것은 우리네의 존재 투쟁이자 하나님나라 운동일 것이다.


    믿어보자, 존재에게 가장 위대한 풍요로움과 가장 큰 즐거움을 끌어내기 위한 비밀은 위험하게 살기다. 당신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 위에 건설하라! 당신의 배를 탐험되지 않은 바다로 출항시켜라! 당신의 닮은 꼴, 그리고 당신 자신과 투쟁하라.” – 니체, <즐거운 학문> 中


    그렇다면 우리가 목소리를 높일 때,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출현하고 유지되어온 종교가 과연 페미니스트 비판을 극복하고 종교적 전통과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마도 진보를 (사)칭하는 기장 역시 이 질문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기장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여성을 읽어내지 못했다. 예수는 역사 속에서 ‘떠돌이’로 ‘투쟁가’로 또는 ‘민중’으로 계속해서 ‘재맥락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그렇지 못했다. 숱한 신학적 실험들과 논쟁 속에서 탄생한 민중예수는 있어도, 억눌린 여성은 그 안에 없었다. 민중신학이 우리의 자존심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희생 당하는 여성, 차별 받는 여성의 이야기는 배제되었으며, 그 이야기가 우리의 정체성이 되지는 못했다. 실제로 ‘여성의 이야기’는 ‘민중 예수’보다 위험하다. 페미니즘은 ‘민중 예수’를 말하며 진보성을 획득한 남성이라 하여 봐주지 않는다. 노동해방과 통일을 외쳤던 이들이라고 한들 ‘억눌린 여성’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면, 페미니스트 비판은 그들을 그대로 겨냥한다. 진보고 아니고를 떠나 비대칭적인 권력구조와 굳건한 위계질서를 건드는 일이기에, 다시 말해 우리네의 탄탄한 ‘보편’을 비판함으로써 남성들의 기반 자체를 흔드는 일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위험하다. 이렇게 불평등함과 부정의함에 대해 와글와글하는 것은 우리의 ‘안’, ‘기장성’ 그 자체에 균열과 틈을 내는, 다시 말해 다된 기장성에 재 뿌리는 격이기에 페미니스트 비판은 공동체의 전통과 정체성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페미니즘은 실로 불온한 것이다.


    그 위태로움고 불온함을 향한 우리 운동의 내용이 ‘부권 질서’가 아니듯, 우리 운동의 종착점이 보편 남성 목사도 아니어야 한다. 이는 페미니즘의 한 갈래에서 논하고 있는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이성애적 가족구조만을 옹호하는 것으로서 여성만을 신비화한다. 이는 비대칭적인 기존의 담론을 유지하게 하며, 소수자들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동은 친여성적 슬로건을 넘어, 보편으로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 거부와 핵심이라 일컬어졌던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신화, 교리, 성서 등을 새로운 시대에 적합성을 갖도록 재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페미니즘적 렌즈를 이곳 저곳에 들이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혈루병 걸린 여성(막 5:25-34)의 이야기는 좋은 텍스트가 된다.   

 

    아래로 피가 멈추지 않는 그녀는 부정하다. 그녀를 만지는 이도 부정하고, 그녀가 앉은 자리에 다시 앉은 것 마저도 부정하다. 그녀는 정결법(레 15:25-26) ‘안’에서 꽁꽁 묶여 있으며, 그 ‘안’에서 버려져 있고, 그 ‘안’에서 가난하다. 그런 그녀가 예수를 둘러싼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포대기를 둘러 썼을지언정, 무리들 사이로 들어가 예수의 옷을 만진다. 위험하고도 불온한 그녀의 도발로 인해 그녀의 ‘안’은 전복된다. 그녀를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정결법 규정에 저항함으로써, 구원은 그녀의 것이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한 것이다. 구원과 해방의 이니셔티브(initiative)가 예수에 있지 않고, 위험하고도 불온한 그녀에게 있다. 법과 규범과 규율이 불온한 그녀로 인해 무너진다. 객관과 보편으로 스스로를 위장한 진리가 그녀의 구원받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균열과 틈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 여성의 용기가 공동체에 균열과 틈을 만들어 냈음을 볼 때 위태로움을 지향하는 우리의 운동과 닮아 있다. 그 길 위에서 구원받은 그녀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한 줌도 되지 않은 여성목회자들의 향후 50년의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앞서 밝혔듯, 변화는 각성된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보다 예민해져야 한다. 보다 도발적이어도 되겠다. 암탉이 울어 집안이 망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우리들의 지나온 50년과 앞으로의 50년 모두를 축하하며, 이 길 위에 끝내 서 있는 선배님들의 노정을 위로한다.


    - 이번 글은 한국 기독교장로회 여성목회자 50주년 총회를 맞이하여 발간되는 총회 문건에 실린 원고입니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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