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8]



조르지오 아감벤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1942년생, 이탈리아의 철학자, 그의 저서 [The State of Exception] (예외상태)와 [Homo Sacer] (호모 사케르)로 잘알려져있다. 삶정치(Biopolitics)의 개념을 중심으로 철학을 개진한다." 이 짧은 서론이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는 아감벤의 첫 소개이다. 위의 두 저서가 정치학, 사회학, 철학, 신학에 필수적으로 읽어야할 책으로 떠오르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과거에는 로마제국 현재에는 이탈리아의 신성으로 떠오른 학자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고자 한다. 필자는 신약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의 철학적 깊이를 쉽게 다룰수는 없지만 그의 바울에 관한 책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남겨진 시간: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바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논할 것이다. 물론 점차적으로 그의 철학적 프로젝의 중심을 논하기도 할 것이다. 

   바로 [남겨진 시간]을 펴보자. 본 서는 쉽게 말하면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개역개정)에 대한 길다면 긴 주석서이다. 원래 본문은 “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κλητὸς ἀπόστολος ἀφωρισμένος 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 사도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된” 정도가 되겠다. 먼저 아감벤식으로 용어를 정리하자. 그리스도란 메시아에서 온 말로써 기본적으로 ‘기름부은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처음 부분은 “바울, 메시아 예수의 종”이 된다. 아감벤은 본서 처음부터 기독교가 역사를 통해 이 메시아를 그리스도란 말과 분리해내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결국 로마서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소개이며 그러므로 ‘메시아적 텍스트’이다.[각주:1] 그리고 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메시아의 시간, “time of the now”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시간적 개념으로 소개하는 세번의 표현 [τοῦ νῦν καιροῦ (8:18), τῷ νῦν καιρῷ (3:26), τῷ νῦν καιρῷ (11:5)]에서 아감벤이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어느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같은 ‘지금 이순간’이다.[각주:2] 결국 아감벤이 바울을 통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아사상의 핵심은 바로 메시아의 시간,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시도가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데 바로 바울의 새관점주의 이후에 나타난 특정한 바울 해석에 대한 반론으로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본 웹진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소위 ‘바울의 새관점’을 설명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그 이유는 새관점주의가 나타나면서 과거의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의 ‘이신칭의,’ 즉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중심으로 한 바울신학이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율법을 벗어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바울 신학의 핵심, 즉 왜 바울이 그토록 열심히 에클레시아 (모임: 현재 ‘교회’로 번역되는)를 만들고 서신을 통해 신학적 진술을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하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여러 바울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자는 크게 바울신학의 ‘이신칭의’를 새롭게 해석한 제임스 던(James Dunn)이나 톰 라잇 (N. T. Wright)을 소개했고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종말론을 중심으로 놓은 알버트 슈바이쳐 (Albert Schweitzer)나 크리스쳔 베커(Christiaan Beker)를 소개하였다. 특히 던과 같은 학자는 바울의 주요 공격 대상은 유대교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교의 민족적 우월감이라고 생각했고, 바울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유대교의 아이텐티티 마커 (Identity Markers)라고 하였다. 즉 자신들의 다른 민족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특정한 전통이나 문화 (안식일, 음식법, 할례)가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지평과 동등될 수 없다고 바울이 목놓아 외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의 신학의 핵심은 어떤 민족성이나 문화등으로 인류를 갈라놓는 모든 형식에 반대하면서 평등하고 선입견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보편적 공동체의 정초를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은 보편적 구원의 지평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여러 인종적 갈등과 종교적 충돌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아감벤의 대답은 단순하다. 바울은 어떠한 새로운 보편적 인간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니즘, 즉 메시아적 시간론을 토대로 던의 방식이나 종말론적 방식으로 바울을 보지 않고 이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메시아론을 바울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바울에 대해 오로지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바울 이래로 아마도 딱 두명일텐데, 처음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이고 그 다음은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적 시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메시아적 시간, 남겨진 시간(The time that Remains)


    먼저 가장 쉽게 아감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예는 본서의 50–51페이지에 나오는 아펠레스와 포로토게네스의 일화이다. 둘다 헬라세계의 위대한 화가였는데, 프로토게네스가 아펠레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붓으로 더는 가늘게 그릴 수 없는 선을 그려놓았다. 프로토게네스가 떠난 이후 도착한 아펠레스는 이 선을 보고 자신의 붓을 들어 그 선의 중간을 가르는 더욱 가는 선을 그렸다. 즉, 더 가는 선을 그림으로써 이전의 선이 두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감벤은 ‘아펠레스의 절단’ (The cut of Apelles)라고 부른다.[각주:3] 이 소개된 예화로 설명하자면 프로토게네스가 먼저 그린 선은 유대교의 율법이나 로마의 법이 만들어내는 구분선을 뜻한다. 갈라디어서 3장 28절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그리스인들, 노예와 자유인들이 모두 구분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인을 분리하는 것이 바로 유대의 율법이고 노예와 자유인을 가르는 것이 로마의 법을 뜻한다.[각주:4] 즉, 당시 바울에게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법(Law)이였던 것이다. 바울의 서신에 반율법적인 시각이 있다면 바로 법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고 아감벤은 생각한다.[각주:5] (48) 결국 법은 나와 너를 나누고,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분리한다. 아감벤의 사상을 소개하는 다음편에서 법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펠레스의 절단’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법을 의미한다. 인간이 그릴수 있는 가장 가는 선의 구분 위에 그려 넣음으로 그 이전의 선이 가지는 의미를 무화시켜 버리는 선, 그것은 쉽게 말하면 바울이 스스로를 ‘메시아의 노예’라고 선언함으로 나타나는 효과와 같은 것인데, 아감벤은 바울에게 아펠레스의 선은 ‘육과 영’이라는 구분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다시 육체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유대인으로 나누어지고, 이방인 또한 육에 속한 이방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으로 나누어진다.[각주:6]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영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들을 합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자 함일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영에 속한 유대인은 율법아래 매여있고, 영에 속한 이방인들도 로마의 법 아래에 매여있다. 바울이 육/영이라는 아펠레스의 절단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9장 20–21절)  

    바울은 자신이 율법이 아니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자, 그리스도의 율법 위에,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유대인/헬라인이라는 구도는 사라진다. 즉, 율법아래에 그러나 율법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율법과 법이라는 프로토게네스의 선의 가운데 육/영이라는 선을 그음으로써 그 선안에 나타나는 새로운 존재들, 즉, 남겨진 존재들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의도라는 것이다. 바로 존재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닌 자들이 나타나는 시간이 바로 메시아의 시간이다. 다음 구절을 음미해보자.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7장 29절–31절)   


    전도서 3장은 “모든 일에 다 때가 있다”고 하면서 태어날 때와 죽을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분리된 시간을 하나로 합친다.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다. 바울은 “웃는 것처럼 울라”라고 하지 않는다.[각주:7]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라”라고 말한다. 바로 이 “as if not”이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에 일어나는 핵심적 사건이다. 바로 세상의 어떤 법도, 어떤 효과도 그 효력을 중지하는 시간(Inoperative time)이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하는 그 표현은 바로 노예와 자유인을 분리하는 로마의 법을 중지시키는 효과를 낳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유대의 율법의 효력을 소멸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메시아의 노예’라는 표현은 바로 메시아적 소명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효과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적 조건들이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을 표현한다.[각주:8] 그러므로 ‘부름받은’로 해석되는 클레토스 (κλητὸς)는 더 나아가 모든 소명받은 자들의 커뮤니티인 ekklesia (All Kleseis)로 명명되는 것이다.[각주:9] 바로 메시아적 시간에 메시아적 소명을 받은 새로운 공동체를 뜻한다고 아감벤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의 핵심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 즉 그리스도 공동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전의 모든 정체성이 그 효력을 잃어버리는 시간, 메시아적 시간에 나타나는 메시아적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메시아적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왜 아감벤에게 현시대에서 이 메시아적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그토록 큰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웹진 <제3시대>


  1. Giorgio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1. [본문으로]
  2. Ibid., 2. [본문으로]
  3. Ibid., 50. [본문으로]
  4. Ibid., 1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1. [본문으로]
  7. Ibid., 23. [본문으로]
  8. Ibid., 13. [본문으로]
  9. Ibid., 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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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7]



지젝과 바울(IV)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사랑이 뭐길래


    지젝을 다루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가 안고있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문제를 잘 꿰뚫어 본 종교인 유대교와 바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지젝이 말하는 그 문제를 해결할 묘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간단히 말한다면 그 묘수란 그야말로 닳고 닳은 단어인 ‘사랑’이다. 지젝이 바울의 입을 빌어서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뭐길래, 만병통치의 묘약이 되는 것일까?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등에서 자주 쓰이는 말인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지금 아주 통속적인 장면 하나를 그려보자. 한 부유하고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말을 타고 (또는 고급 차를 타고) 외딴 길을 지나가고 있다. 그때 한 젊은 처녀를 지나치게 된다. 그 순간 부자 청년을 둘러싼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그 청년의 눈길은 그 처녀에게 머무르게 된다. 그 순간에 관객은 또는 독자는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아! 청년이 사랑에 빠졌구나. 너무 로맨스 소설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것이 바로 지젝이 바울을 통해 말하는 묘약, 사랑에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먼저 청년이 사랑에 빠진 조건은 아마도 처녀의 아름다움이었겠지만 이 아름다움을 빼야만 더욱 사랑에 가깝다.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여타의 사회적 조건을 빼어버린 것. 그것이 사랑이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이란 아주 쉽게 표현하면 상징계를 뜻한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의 언어와 사회적 질서로 만들어 놓은 모든 상징의 세계를 꿰뚫고 전혀 다른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절대 위와 같은 감성적인 로맨스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위의 예는 그야말로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부자 청년의 계급과 젊은 처녀와의 관계에 우선된 가부장적, 여성차별적 구조가 선행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방인의 지혜, 그리고 기독교


   지젝이 말하는 이방인의 지혜(The very core of pagan Wisdom)[각주:1]는 플라톤이나 여타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통해 인간 사회를 만들었던 사상들이나 종교를 뜻하며, 멀게는 인도의 힌두이즘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한 우주론적 계급사회)나 가깝게는 그리이스 철학 (사회적 갈등들을 철학적 담론으로 순화시키는것)을 뜻할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가 이러한 계급의 질서를 혁파하고 각 개인들이 “보편성 (universality)에 직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소개하였다고 말한다.[각주:2] 여기서 보편성이란 성령 또는 오늘로 말하면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을 뜻하는데, 바로 이 성령의 보편성을 확증함으로써 기독교는 종래의 사회조직들이 기반하고 있던 상징적 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unplugging)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질서의 바깥에서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어떤 목사는 아마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 병든 자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이셨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부자와 건강한 자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회에 대한 전복적인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병든 것 때문에, 또는 버림받은 것 때문에 사랑받게 되는 것일까?

    지젝은 만약 사회적 타자라는 것이 사랑받는 조건이 되는 것을 지젝은 ‘휴머니즘’적 생각이라고 말한다.[각주:4] 아마도 누군가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아무 ‘조건’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젝에게 이러한 사랑은 현재의 사회구조를 개혁하는데 큰 의미는 없다. 결국 사회의 밑바닥을 위로 역전시키는 구조는 진정한 사회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버림받은 자들이 필요한, 또는 버림받은 자들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결과만을 낳기 때문이다.[각주:5] 만약에 버림받은 자들이 선택 받아 힘을 가진 자들이 되면 다음에는 이전의 힘을 잃어버렸던 자들을 사랑할 것인가? 지젝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unplugging’ (상징계로 부터 벗어남)을 ‘uncoupling’(상징계로 부터의 단절)이란 말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이 ‘언커플링’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이란 개념에서 명확해진다. 성령의 신자들은 율법에 대해여 죽고, 더이상 인간의 관점으로 서로를 보지 않는다.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써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현실 사회와 단절된다면 사회적 개혁할 수도 없고 또한 현대 정치에서 그러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지젝이 바울의 탁월성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7장 29-31절, 새번역)


    새로운 사회정치구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사회속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은 외형적 법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내장되어 있는 외설적 보안재 (obscene supplement), 즉 위반을 통해서 사회와 법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정지(suspend)시키는 것이다.[각주:6] 정리하면, 바울의 방식은 사회와의 단절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착적 가능성을 정지시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대할때 그의 사회적 지휘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의 모든 소유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 가족이나 친구등이 마치 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사회라는 상징계의 도착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발견한 대안이란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와 같은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대안의 부분에서 지젝은 마치 대충 유명하고 대충 진보적인 부흥사처럼 보인다. 또한 이러한 지젝의 생각을 설교중에 한다고 해도 보통의 청중들은 그리 어렵다거나 이상하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지젝을 마치고 지젝이 이해한 바울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젝의 아주 발칙한 일면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려면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더 물어야 한다. “정말 그런 완벽한 ‘아닌 척’하는 행동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젝에게 바울이 대안이 되려면 바울은 아주 완벽하게 신의 전능성을 부정하고 그의 죽음을 확신한 사람이어야 한다. 신의 죽음과 불능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지젝에게 바울이 말하는 언커플링은 불가능하다.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신의 불능성을 깨달은 것은 욥이었지만 그 비밀은 유대교 안에서 숨겨졌다. 이후에 그 비밀은 유대교가 ‘율법’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서 다른 정치나 사회구조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디아스포라’로써 또는 이방인으로써 다른 국가에 편입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지젝에게 화육 (신의 인간됨, incarnation)은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이 급진화된 형상이다.[각주:7] 보통의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humanity)과 신성(divinity)의 분리될 수 없는 융합이며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는 존재이지만, 지젝에게 그리스도의 인성은 바로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의 부산물 (fallout)이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의 불능이 죽음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이다.[각주:8] 신 (big Other)에게서 벗어난 인간이 되어야 비로소 상징계를 벗어나서 리얼(Real)에 기반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각주:9]  

    지젝에게 현대의 교회는 바울의 혁명성이 사라지고 다시금 ‘도착화’된 곳이다.[각주:10]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해결이자 자유를 의미했지만, 이제는 기독교는 정확하게 자신이 해체시키고자 한 이방인의 지혜, 도착적 상징계가 되어 죽었던 신과 그리스도를 살려내고 인간을 신과 그리스도에게 값을 수 없는 빚을 진 존재로 만들었다. 다시금 율법 (신에 대한 의무)과 향유를 기반으로 한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바로 ‘도착적 핵심’이 지배하는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젝에게 성령은 오로지 신의 죽음 이후에 탄생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기독교는 그가 분투했던 종교적 구조에 다시금 갇혀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오로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지젝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Slavoj Žižek, The Fragile Absolute, Or,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 (London; New York: Verso, 2000), 120.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Ibid., 121. [본문으로]
  4. Ibid., 126. [본문으로]
  5. Ibid., 125 [본문으로]
  6. Ibid., 130.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97.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Ibid., 98. [본문으로]
  10.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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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과 바울(I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도착에 빠진 세계와 기독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이는 되도록이면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더 느끼려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하였다.[각주:1] 여기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쾌락이란 보통의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쉽게 설명하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면 인간은 흥분상태가 된다. 이것이 고통의 상태, 또는 불쾌한 상태이다. 그런 증감된 흥분을 낮추어 주는 것이 바로 쾌락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풀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쾌락의 상태로 간다는 것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각주:2] 이렇게 보면 쾌락-불쾌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경제학적 관계에 있다. 불쾌함의 강도, 즉 흥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락의 폭도 증가한다. 즉, 불쾌함을 열심히 저축하면 더 많은 쾌락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어린이는 즉각적인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 어린이가 커서 현실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불쾌를 참아내면서 자신에게 허용된 쾌락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허용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법 (Moral Law)이다. 만약에 인간이 그 허용치를 넘어서까지 쾌락을 느끼려 한다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통하지 않게 되고 고통이 시작된다. 라깡은 그 이후 부터의 어떤 상태를 쾌락이란 말과 구분되기 위해 향유(Jouissance)라는 말로 표현된다.[각주:4] 이제 쾌락을 넘어선 향유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각주:5] 그래서 향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담게 되는데, 하나는 어떤 중요한 법에 대한 위반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고통과 죄책감을 뜻한다. 위반과 그 위반을 통한 고통에 따라오는 즐거움. 아마 이것이 향유에 대한 간단한 정의가 될 것이다. 바로 쾌락과 불쾌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 속에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불쾌를 넘어서는 고통인간은 바로 이런 향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했다.[각주:6] 아담 커스코는 다음의 예를 통해 지젝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향유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도덕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려는 한 구도자를 상상해 보자. 일체의 욕망과 욕구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타자에 대한 사랑과 희생만으로 그 삶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욕구와 성적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속이나 사막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육체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삶도 아니고 건강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향유의 행위가 필요하다. 즉, 어느 정도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지젝은 ‘inherent transgression’ (내장된 위반)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규정속도 시속 1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에서 5킬로 정도는 더 과속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듯이, 철저한 법에 대한 준수를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에는 이미 약간의 위반을 전제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바로 초자아적 목소리 (법을 지켜라!)에는 “향유를 즐겨라!”라는 목소리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 (Obscene superego supplement)라 하였다.[각주:7] 기억해 두자. 이러한 향유와 초자아, 달리 말하면 ‘big Other’ (대타자)의 관계가 더 과도해지는 것을 지젝은 ‘도착’ (Perversion)이라 부른다.  

   자, 이제 지젝과 기독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함에 있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Perversion (도착)이라는 개념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원래 프로이드는 이성애에서 정상적인 성행위를 벗어나는 것을 도착이라 불렀으나 라깡은 이후 프로이드가 내린 정의를 변형시켜 성적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임상적 구조로 정의하였고, 자연적인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각주:8] 이 단어가 지젝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향유(jouissance)와 대타자(the big other)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중 하나를 ‘도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가 있는데, Psychosis, perversion, and the two forms of neurosis: obession and hysteria가 그것이다.)[각주:9]


   이러한 향유의 차원은 상징계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상징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 (The big other)안에서 결여를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충동으로 인해 나타난다. 여기에서 도착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향유적 존재인 인간을 여전히 이데올로기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도착’이란 증세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아예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며 히스테리, hysteria에 대해서 지젝은 자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담 커스코는 도착이라는 개념에 지젝이 점점 집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유명한 말인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the perverse core or Christianity)으로부터 지젝과 기독교의 다리놓기를 시도한다고 말한다.[각주:10] 커스코는 여기서 지젝에게 도착이라는 것은 완전한 윤리적 실패 (the ultimate ethical failure)란 것을 강조한다.[각주:11] 지젝에 따르면 도착이란 스스로를 타자의(the Other’s) 향유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로 직접 동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경계들 사이를 읽고 도덕적 법이 실제적으로 위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도착은 바로 ‘내재된 위반’인 것이다.”[각주:12]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는 공식적 도덕법을 지탱하고 도착은 법을 강화하고 심지어 필요로 하며 도착적 쾌락은 바로 그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착은 전복이 될 수 없다.”[각주:13]

    지젝은 가장 도착적인 예로서 종교적 근본주의 (religious fundamentalism)를 든다. 도착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안내로써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한편으로는 수긍할만한 공개적인 얼굴 (예수는 사랑을 가르친 ‘좋은 사람’)을 놓고 그 밑에는 외설적인 향유 (바로 복수하는 하나님)를 놓아두는 것이다.[각주:14]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혐오하고 심판을 외치는 사랑 많은 목사님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 (증오와 사랑)은 드러난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데, 바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상식적인 도덕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다종교사회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타종교에 대해 비방과 증오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겉보기에도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타종교의 성지에서 땅밝기를 한다거나)에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상식이나 도덕에 비추어 보았을때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강력한 필요성 (하나님 나라를 위한)에 의해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확히 그 겉 사랑에 있지 않고 바로 이러한 도착적 구조에 있다고 지적한다.[각주:15] 결국 위반을 통한 고통을 포함한 쾌락 (향유)에 의해 기독교 근본주의는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서 앞장에서 논했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로서 기독교를 기억해보자. 신앙인이 교회에 들어가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면 그들은 하나님, 또는 교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보기에, 또는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길은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결국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비록 계속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것은 노이로제나 신경증 (neurosis)적 증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책임을 본인에게 지울수는 없기 때문이다.[각주:16] 그러나 도착적인 상황은 다르다. 바로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착적 상황이 편만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의 향유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라는 지젝의 말이 무서워지는 순간이다.[각주:17] 

    바로 이 지점이, 나의 판단에는, 지젝의 담론으로 윤리와 신학이 파고 들어오는 곳이다.


지젝의 바울, 도착적 기독교의 해결책



    지젝과 신학의 관계가 밀접하다 못해 지젝이 신학을 이용하여 그의 철학의 탈출구를 찾으려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을 쓴 아담 커스코이다. 커스코는 지젝이 자신의 체계와 진리담론의 한 예로써 바울을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바디우는 다음편에서 논할 예정이다.) 지젝은 신학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각주:18] 지젝의 책, [The Puppet and The Dwarf] (한국어책 제목: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론은 그 유명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역사철학의 첫번째 테제로 시작한다.[각주:19]

    장기를 두는 인형이 있다. 그리고 이 인형은 절대 인간과의 장기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다. 알파고를 상상해도 된다. 그 테이블 안을 들여다 보면 한 난장이가 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 인형이 역사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이고 그 안의 난장이는 바로 신학 (theology)라고 말한다. 벤야민의 이 유비는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젝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상징계의 산물로써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이해해보았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역사 서술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승자의 기록’이다. 여기서 승자의 기록은, 바로 살아남은, 또는 상징계 안에 알맞게 포섭되어 기억된 자들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젝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상징계는 결핍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그 핵심은 텅비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적은 방식과는 반대의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잊혀진, 사라진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지젝이 보기에 아마도 현실의 상징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판타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말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라는 것이다.[각주:20] 앞으로 발터 벤야민은 조르지오 아감벤을 다룰때 더욱 심도 깊게 이야기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학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던 원시공산사회로 부터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져 결국에는 공산사회가 된다는 필연적인 역사유물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론을 지젝은 ‘억압된 것의 귀환’ (return of the repressed)을 응용하여 과거의 실패한 혁명적 시도들과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들의 귀환이 바로 실재적인 혁명의 상황의 가능성이고 바로 그러한 잊혀진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이 구원받는 것이 혁명의 상황이라 말하였다.[각주:21]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역사유물론이 퇴조되고 있는 현시대에서 벤야민의 난장이 유비를 거꾸로 볼 것을 주장한다. 곧 신학이 장기 인형이고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벤야민의 시대에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신학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잊혀진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신학으로 부터 역사적 유물론을 재발견하는 것이 혁명적 사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사고로 인해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게임에서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난장이를 붙잡음으로 혁명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젝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유물론자이고 어쩌고 저쩌고해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kernel) 이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제는 더 강력한 것이다. 바로 이 핵심은 오로지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유물론적 접근은 기독교적 핵심으로서만 접근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야만 한다!”[각주:22]


    다시 ‘도착’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지젝이 말하는 ‘도착’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첫번째는 왜 지금 기독교인가? 두번째는 왜 바울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지젝이 보기에 기독교는 매우 도착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이고 현대는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사회 전체에 편만한 상황이다. 즉,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착’인데 기독교에 이미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착’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존재이다. 두번째의 답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에 내재해 있는 ‘도착’에 대해 이미 알아차리고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고로 바울이 ‘도착’을 해결한 방법이 현재에도 가능하다면 바울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된다는 것이다. 차근 차근 따져보자. 

    커스코는 현대 사회에 대한 지젝의 진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사회는 곧 대타자 ‘Big Other’가 죽은 사회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라진 사회이다. 원래 대타자의 역할은 주체가 상징계에 잘 안착하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내려진 법 (신의 법)을 어기는 향유를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다.[각주:23]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교회에 두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교회를 통해 공급 받으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쾌락을 누리며 (예배를 빠진다거나, 이웃을 미워한다거나)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대타자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신의 법도 이를 어기며 얻는 쾌락도 존재하지 없다. 갑자기 자신이 믿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을 상상해 보자. 단순히 ‘신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와 부모의 지갑에서 몇만원을 훔치던 스릴과 회개의 기쁨이 없는 무료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현대의 인간은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어기는 방법으로 대타자의 죽음을 해결해 보려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지젝이 지적하는 ‘도착’적 행위이다.[각주:24]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보수적인 교회들에서 동성애를 비판할때 이를 수간(동물과의 성행위)으로 연결하여 폄하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매우 ‘도착’적인 행위로 보는데, 여러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에는 무감각하면서 동성애를 이러한 수간과 같은 매우 원초적인 금지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반응한다. 곧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법을 세워두고 그것을 완전히 위배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보면 그들이 대타자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대신에 스스로의 향유(쥬이상스)를 위해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독교 번영주의도 ‘도착’적 행위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쩌면 복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이라 여겨지는 것 자체가 ‘도착’적 사고가 편만한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도착’적 현상이야말로 기독교가 생존해온 방법이라고 밀어붙인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야말로 도착적이라고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기독교 신의 방법은 좋은 것을 위해서 언제나 악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구원이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유다에게 스승을 배신하는 길을 걷게하지 않았던가? [죽은 신의 위하여]의 부제가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인데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야말로 ‘뭔가 악한 일을 하고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것 이라고 말한다. [각주:25]그리고 지젝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바울이 찾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의 관점과 그 처방을 살펴보자.[각주:26]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의 특이성으로 주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아니라 욥이다. 모세나 다윗과는 달리 욥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나 다윗은 공동체와 국가를 신의 법과 법칙 위에 세운 인물들이지만 욥은 정면으로 신의 법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모든 종교나 국가는 어떠한 법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법은 언제나 신의 명령을 통한 금지를 바탕으로 세워지는데 그 저변에는 어떠한 폭력적 살해의 사건이 기반하고 있다고 하였다.[각주:27] 그렇다면 신의 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욥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시험하는 신의 존재는 프로이드의 초자아와 같은 외설적인 존재이다.[각주:28] 예를 들면, 욥기의 신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인간을 득의의 웃음으로 바라보는 신이다. 욥기의 마지막 40-42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겠지만 지젝이 말하는 욥기의 해석은 성서학에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욥이 신의 존재와 전능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신 스스로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욥 42:7,8)라는 말로 욥의 불평과 신에 대한 질문이 옳았음을 말했기 때문에, 지젝은 욥이야말로 신의 전능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고발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욥이 아니라 야웨였던 것이다.[각주:29]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에 두가지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법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생존을 추구하는 ‘도착’적 핵심(Perverse Core)과 그 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외설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신의 전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전복’적 핵심(Subversive kernel)이 그것이다. 지젝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욥이 고개를 숙이고 신의 법에 수긍하면서 유대교의 전복적 핵심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욥은 비밀을 알았지만 사회의 보전과 공동체의 생명이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황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알면서도 수긍해 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후에 용기있게 신의 죽음을 말한 자가 유대교에 나타났으니, 그는 예수와 그의 뒤를 이은 바울이었다.[각주:3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로 대표되는 로마서 7장은 보통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로마서 7장의 해석은 바울이 스스로의 유대인됨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본문을 율법폐기론적 (율법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입장) 구절이 아니라 율법의 선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율법의 장단점 정도로 해석한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이 정확하게 바울이 발견했고, 이미 욥이 발견한 율법과 야웨신에 존재하는 ‘도착’성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내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7장 18~23)


    욥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불능(Impotence)을 발견했던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어길수 밖에 없는 법칙이 그 속에 존재함을 발견했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비밀한 입장을 소개했던 것이다.[각주:31] 정리하면,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비밀은 바로 전복적 핵심 (kernel)이며 그것은 한마디로 ‘전능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 7장 25절)이라고 말할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통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 27장 46절) 신의 불능성이 드러났고 바야흐로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바야흐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을 발견함으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으로서만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바로 그 비전을 지젝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보는 듯하다. 이는 다음 웹진에서 논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Dylan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 edi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6), 150. [본문으로]
  2.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And Other Writings (PENGUIN CLASSICS, 2007), 66–67. [본문으로]
  3. 김상환, 라깡의 재탄생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102. [본문으로]
  4. 이현우는 그런의미에서 향유라는 번역보다 ‘향락’이라는 번역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하는데 원래 Jouissance라는 단어가 성적쾌락에 대한 의미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옳다고 본다. 그러나 향유라는 말이 많이 쓰이므로 여기서는 향유라고 쓰겠다. https://blog.aladin.co.kr/mramor/category/1216428?CommunityType=MyPaper&page=161&cnt=801 [본문으로]
  5.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93. [본문으로]
  6. Ibid., 102.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57–58. [본문으로]
  8.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41. [본문으로]
  9. Kotsko, Zizek and Theology, 61. [본문으로]
  10. Ibid., 6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63.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61. [본문으로]
  18. Ibid., 74. [본문으로]
  19.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ss.: MIT Press, 2003), 3. [본문으로]
  20.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151. [본문으로]
  21. Ibid., 158. [본문으로]
  22.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6. [본문으로]
  2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85. [본문으로]
  24.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53. [본문으로]
  25. Kotsko, Zizek and Theology, 88. [본문으로]
  26. 필자는 많은 부분 아담 코스트코의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의 3장 ‘The Christian experience’부분을 참고했다. 아담 코스트코는 이 장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이전의 지젝이 평가하는 유대교에 대해 서술한다. 원래 프로이드의 저서 [Moses and Monotheism]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평가하였으나, 그 이후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프로이드를 참고하면서 율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유대교의 특이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bid., 88–90. [본문으로]
  27.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93.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126–127. [본문으로]
  30. Kotsko, Zizek and Theology, 95. [본문으로]
  31. Ibid., 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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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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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ecceitas
    2016.06.10 11: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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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Adam Kotsko는 코스트코/카스코 중 하나로 택일하거나 아니면 코츠커 정도로 음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2. 한수현
    2016.06.12 11:3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네. 알겠습니다. 원고를 몇번에 나누어 쓰다보니 미쳐 고치지 못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울신학가이드15]



지젝과 바울(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번 지젝과 바울에서 주제는 지젝의 라깡 읽기였다. 라깡의 욕망의 도식을 바탕으로 판타지가 어떤 역할을 하며 주체는 어떻게 상징계(심볼릭 월드)에서 빗금쳐지는지, 케보이(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주체는 상징계 안에서 언제나 불안한 상태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라깡에 대한 이해가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지점은 라깡을 바탕으로 한 지젝의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맑스 (후기 맑스주의를 포함한) 읽기이다. 이번 장에서 주된 텍스트는 물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출발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지젝과 바울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처음 이 책이 나온 이후 지젝은 왕성한 필력으로 수십권의 책과 아티클들을 출판하였고, 그만큼 그의 사상과 현 시대에 대한 해법도 변화 발전되었다. 특히 지젝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 이후에 나타난 것이므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몇가지 지젝에 대해 나온 수많은 학자들의 저서들중에 도움을 받은 몇권과 지젝의 다른 저작들을 바탕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진행해보려한다. 지젝을 쉽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특히나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전문성이 부족한 필자에게는 지젝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이 쉬울 것이나, 필자의 경험으로 어려운 학자를 대할때는 먼저 최대한 쉽게 그의 사상을 오려내고 그 간단한 그림안에서 계속적으로 그 학자의 저서를 만나면서 자신의 생각을 변형시켜 가는 것이 코끼리 다리 더듬듯 방대한 저작 속에서 몇개의 편린을 붙잡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지젝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만이 아니라, 지젝의 처음 학문에 대한 계기는 그의 특이한 콘텍스트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단순한 질문, “왜 나름 성공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으로 살아가지 않는가?”이다.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왜 타락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공산주의적 혁명 정신으로 그 사회를 바꾸어 놓으려 하지 않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젝은 자신의 담론을 펼치면서 빈번히 정치적 사건과 예들을 비유로 사용한다. 그러한 예들을 바탕으로 글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필자 또한 여러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예를 잘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그 예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번 웹검색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조금 때로는 맞지 않은 예일수도 있고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 시킬수도 있지만 본 글에서는 ‘교회’를 예로 들어 지젝의 담론을 설명해 보겠다. 물론 지젝이 데드락 (교착상태)을 해석하기 위해, 희망적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기독교를 예로 들기도 하니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닐 것이다.


지젝으로 교회 보기


    처음 지젝의 질문을 교회를 바탕으로 바꾸어보자. ‘왜 사람들은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교회를 다닐까?’ 이것은 교회를 심각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읽는 성경의 나오는 신앙인의 삶이 자신이 사는 삶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봉 오천만원이 넘는 사례비에 고급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자녀들을 미국에서 유학시키는 대형 교회 담임목회자의 삶이 성서에 나오는 영적 리더들의 삶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좌우당간에 신앙생활을 해가며 큰 갈등없이 살아간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원래 맑스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거짓 믿음’ 즉 쉽게 말하면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가 행복해진다.’라는 거짓말로 시작하여 ‘목사는 거룩한 존재다.’라는 구라로 끝나는 기독교는 시민들이 현실의 부조리와 거짓을 보지 못하게 하여 사회 정의와 혁명을 방해하는 아편적 조직이라는 것이었다.[각주:1] 그렇다면 이 거짓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지젝은 파스칼을 인용하여 믿음은 앎(Knowledge)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습(Custom)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각주:2] 재미있게도 이런 가정이 가능한데, 백일기도의 효과를 믿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백일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아담 카스코(Adam Kotsko)는 지젝의 말을 응용하여 현대 미국 대형교회의 성공을 해석했는데, 윌로우 크릭 교회와 같이 열린 예배 형식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예배에 지루함을 느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예배 관습을 제공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믿음을 바꾸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팝음악과 강연형식의 순서를 교회적 예배라고 정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각주:3]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 그 유명한 ISP(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있음을 말했다. 이데올로기를 받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거짓-믿음이라는 비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를 이끌어가는 물질적 조직과 기구들이란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힘은 강제적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이고 ‘부드러운’것이다.[각주:4]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가 요즘과 같이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수많은 타락과 문제점들이 공유된 상태에서도 가능한지 물어봐야 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초대교회는 몰라도 현대의 교회는 ‘구원’이나 ‘복’으로 포장된 거짓으로 가득찬 집단으로 보인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목회자들의 불법과 타락이 사탄의 장난이라 믿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지젝의 설명은 이런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미 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각주:5] 아주 소수의 운빨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예로 든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준엄하며 냉정하다. 백일 기도를 한다고 자신의 자녀가 서울대를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심리가 존재할 뿐이다. 즉, 번영신학의 허울과 희생적 사랑이라는 선언 뒤에 숨겨진 교회의 이기심은 그 구성원들이 더 잘 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번영신학이 엉터리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번영신학은 무너지지 않는다. 차세대 영적 지도자로 각광받던 목사가 성추문에 휩싸여도 교회의 공금을 횡령해도 논문 표절이란 구설수에 올라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바로 이전 장에서 논했던 환상(Fantasy)가 등장하는 곳이 이 지점이다. 여기서 판타지의 역할과 현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좀 길긴 하지만 지젝의 말을 직접 옮겨보자. 다음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한부분을 필자가 번역 정리한 것이다.


    한 아버지가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의 곁을 오랜동안 지키다가 아들이 죽자 옆방으로 가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때 아들의 침대 옆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한 노인이 아이를 지키며 기도를 읖조리고 있다. 그 때 그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그의 아들이 그의 옆에 서서 그의 팔을 잡고 꾸짖듣이 말한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그가 일어나자 아들이 죽어 있는 방에서 불길을 발견한다. 노인은 잠에 들어 있었고 촛불이 그의 죽은 아들의 팔에 떨어져 불타고 있었다. 

    전통적인 꿈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꿈은 잠든 이의 잠을 연장 시키는 역할을 한다. 잠자던 아버지에게 현실로부터의 방해가 일어난다. (타는 냄새) 그러자 꿈이 발동하여 그의 잠을 연장시킨다. 짧고 작은 이야기는 외부의 요소를 담는다 (불, 아이- 그 편이 더 자는 자를 안심시킬수도 있다.) 그러다가 현실의 방해요소가 강해지면 잠자던 이는 깨어나게 된다. 

    라깡은 이런 전통적인 해석과는 반대의 해석을 개진한다. “주체는 외부의 방해가 너무 강해질때 자신을 깨우지 않는다.” 외부의 방해가 강하기 때문에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는 꿈을 만든다, 물론 자신의 잠을 연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로 깨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그가 그 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의 욕망의 실재다. (Lacanian Real) 이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꾸짖음이 바로 실재이다.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이것은 아버지의 근원적인 죄책감이며 이것이야말로 외부의 실재 그 자체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깨어나게 되는 이유이다. 그의 욕망의 실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꿈 안에서 그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그 실체로부터 소위 현실의 세계로 탈출한다. 계속 꿈을 꾸고, 그 자신을 속이고, 그의 욕망의 실체로 깨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결국 현실은 우리의 욕망의 실재를 가리우기 위한 하나의 판타지 만들기인 것이다.[각주:6] 

    쉽게 말하면 보통 우리는 꿈을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꿈을 벗어나서 현실의 세계로 온다고 생각하지만 지젝의 라깡은 이를 역전시킨다. 바로 보통 우리가 말하는 현실세계가 판타지이다. 역으로 꿈은 우리가 판타지인 현실세계를 넘어서 만나는 리얼의 세계이다. 이를 지젝은 라깡의 현실(Lacanian Real)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현실이 판타지라면 과연 무엇이 우리가 판타지를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바로 이 판타지가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각주:7]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진짜 힘은 교회의 타락을 숨기고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거짓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교회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우리가 교회의 타락과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타락과 문제점의 원인을 밝히고 고쳐 나가면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갱신과 개혁을 포기하고 ‘가나안’ 교인의 길을 걷는다.[각주:8] 둘 다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함정이 된다. 지젝에 따르면 이 둘의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진정한 교회의 핵(Kernel)을 만나지 않기 위해 환상적 현실을 제공하는 것이다.[각주:9] 왜냐하면 두가지 방법 모두 교회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바뀌지 않는가?


    약 40년전에 지나친 번영신학과 교회의 계급주의, 그리고 지나친 헌금강조등의 율법적 신앙을 바로잡고자 평신도 사역자를 강화하고 신유나 은사를 중심으로 한 예배를 금하고 세계선교의 희망을 불태운 교회가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구원파’교회이다. 현재의 교회가 거짓된 교리로 얼룩져 있다고 하여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로운 교회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내 그 곳은 이전보다 더욱 신비적이고 세속적인 집단으로 바뀌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이 이데올로기는 도대체 왜? 어떻게? 인간을 이리도 쉽게 조종할 수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강제로 어떤 것을 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러한 조종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하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한다.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할 수있다면 그러면서도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힘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교회를 크게 건축하기 위해 헌금을 모으고자한다. 이 목회자는 교회를 크게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크게 상관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성서의 뜻이나 신앙의 황금률이 아님을 알고있다. 그러나 교회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큰 사업을 편하게 하기 위해 건물을 늘리고 신자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는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여러 헌금을 많이 하여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건축헌금을 강조한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굳이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복을 받거나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다. 헌금을 많이 함으로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은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러한 신앙을 비판하는 목사들의 글이나 신학자들의 글도 넘쳐난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다음과 같다. ‘그것을 아는 것이 나뿐이라면? 오직 나만이 그것을 알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교인들은 목사의 말을 믿고 열심히 헌금을 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이 곧 신앙의 중심이 되는 사람에게 (또한 이것이 교회의 기본 신앙이기다하다) 이것은 대단한 위기이다. 자신은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신앙인이어야하고 그러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바로 헌금이 복과 직결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의 형태 이외에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할 길이 없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헌금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이다.[각주:10]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학벌위주의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지젝은 반유대주의를 가장 좋은 예로 드는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리 와닿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사회에서 대접받고 좋은 직장을 잡고 돈을 잘 벌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라는 것이 학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처음에 이것은 하나의 루머일 수 있다. 아마도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대접받기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다. 대학 간판이 좋지 않아도 자신의 노력과 특성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돈을 잘 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이것을 믿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려고 할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이것은 거짓말이며 현실은 실상 그렇지 않고 대학 간판없이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나 이 똑똑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만약에 바보처럼 순진하게 이것을 믿고 정말로 좋은 대학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사회 지도계층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나는 비록 이것이 거짓말이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겠다.” 결국 이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든 결과는 같다. 무슨 생각을 하든 좋은 대학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은 같은 것이다.

지젝의 주체론(칸트와 헤겔)

    필자는 가끔 평신도이지만 상당히 높은 신학적 지식과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성서를 공부하고 고민하며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주 듣는 질문은 이런것이었다. “전도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신앙인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고 수긍해줄 목회자이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라는 거대한 상징계 (Symbolic Order or The big Other)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을 위치시킬 수 없는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르면, 왜 대형교회가 수많은 문제들과 갈등에 시름하면서도 마치 그 교회에 맹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 처럼 보이는지 알 수 있다. 그들도 알고있다 우리처럼. 다만 알면서도 계속 하던대로 할 뿐이다. 바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방법이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안다는 것은 비판의식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만이 아니다. 나와 이글을 읽는 여러분도 모두 마찬가지로 살아간다. 이 부분에서 지젝은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후반부가 ‘주체’(Subject)에 할애되어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책의 초반부에 지젝은 알튀세르의 실패는 바로 어떻게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토대에 의해 ‘이름 불리워지는가?’ (Interpellation)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였는데,[각주:11] 이를 설명해내기 위해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전통에 위치시킨다. 바로 지젝이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을때 이는 결국 구조주의를 넘어서 독일의 관념론에 라깡을 안착시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각주:12]


가정된 주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어떤 것을 가정한다. 그 가정 뒤에는 또 다른 가정이있다. 이것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가정된 주체(subject)가 있다. 이 가정된 주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을 이전 웹진 글에서 우리는 판타지라고 불렀다. 바로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라깡이 연결되는 지점이 이곳이다. 우리는 언제나 상징계(심볼릭 월드)안에서 이미 가정된 존재이며 (빗금쳐진 $) 불안한 상징계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안정시켜줄 거대한 존재(신)를 찾아나서지만 결국 텅빈 대타자(교회-신이 있다고 하는 장소)를 만나 그 비어있는 곳을 판타지로 채운다. 그곳은 바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이며 바로 숭고한 대상 (무섭고도 장엄한 빈 물체)가 자리한 곳이다. 여기서 지젝이 숭고한 대상 (Sublime object)이라고 명명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바로 칸트가 말하는 thing in itself (물자체)를 지칭한다. 그 이유는 이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철학의 사유의 시작은 칸트이며 칸트의 사유를 극복한 지점이 바로 이 물자체에 대한 헤겔의 칸트비판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물자체와 인간의 사유사이를 건널수 없는 강으로 구분지었다. 이 부분은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와 좀 닮아있는데, 칸트는 인간이 물체를 인식하는 방법이 이미 선험적으로 (태어날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붕어빵의 틀이 언제나 그 형틀의 빵만을 만들듯 인간의 이미 구조화된 인식의 방법 (시각, 청각, 미각, 길이, 무게…)으로 물체를 인식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인식의 도구를 통해 이해된 방식으로만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물자체인 세계와 인간의 의식 속의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칸트는 머무르지 않고 그 사유화된 세계를 뛰어넘어 물자체의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숭고함(Sublime- 두렵고 떨리는 대상)을 만날때이다. 수백미터의 파도를 만났을때, 영혼마저 뒤흔들어 버리는 음악이나 그림을 만날을때, 인간은 자신의 사유의 깊이를 훌쩍 뛰어 넘어 사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엄함에 빠져들어간다. 바로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물자체가 인간의 영혼마저 흔드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헤겔은 이러한 칸트의 사유의 방식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물자체라는 외부적 요소를 이용하여 주체의 사유의 방식을 규정하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의 문제점은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방식이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해 버렸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지젝이 보는 헤겔의 주장이다.[각주:13] 위에서 사용한 교회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칸트식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보고 인간 나름으로 만든 기구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수도 바로 볼 수도 없으며 다만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나라에 준하는 교회는 하나님 자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득 문득 인간은 하나님의 장엄함을 그 숭고한 대상을 체험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헤겔의 불만은 이것을 거꾸로 이해하면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은 언제나 틀릴수 밖에 없다가 된다. 숭고함을 통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이 틀렸음을 칸트는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젝이 보는 헤겔의 정수(essense)는 칸트가 말한 묘사할 수 없는 물자체의 경험, 즉 숭고함 (Sublime)에 대하여 칸트는 옳았지만 칸트의 실수는 그 이면에 여전히 물자체가 있다라고 생각한 것에 있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칸트는 여전히 무엇인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각주:14] 그러나 헤겔에게 물자체 (Thing-in-itself)란 아무것도 없는것, 묘사할 수 없음 그 자체인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 (negation of negation)인데, 바로 현세계(정)에서 묘사가 불가능한 숭고한 무엇(Sublime object)로 부정(반)을 거쳤다면, 마지막 변증법의 단계인 합은 그 부정이야 말로 실재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다.[각주:15] 이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부정의 공간이 주체가 나타나는 곳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는 주체 자체를 상정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부정했던 그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각주:16] 독자들은 이전 장에서 빗금쳐진 주체에 대해 논했을때, 이미 주체는 빗금쳐져 있었다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 ‘이미’에 대한 설명이 여기에 있다. 지젝은 바로 절대 부정의 공간에서, 비어 있는 공간에서 주체는 나타났으며 주체의 자리와 생성은 정확하게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나타남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서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전기 지젝의 대안


    보통 지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젝이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두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초기의 지젝은 급진적 민주주의 (Radical Democracy)를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언급되어 있다. 후기의 지젝은 그의 기독교 읽기를 통해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데, 다음 웹진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설명과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설명에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기 지젝이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대안이 어떻게 대안이 될지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에 주체가 언제나 쥬이상스속에서 판타지에 묶여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주체가 생성되는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데올로기의 시작점을 살핀다. 바로 독일 관념론적 전통의 주체론에 이미 그 주체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헤겔에 와서 주체론은 완성되어 라깡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신(God)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유한성과 반대되는 무한성을 투영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하는 외부적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 주체의 개념의 부정성만으로 신에 대한 설명을 완성했다. 그래서 그는 무신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젝은 포이에르바하의 시도가 주체를 중심으로 외부적 세계 또는 신을 설명하려 했으나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포이에르바하의 설명은 왜 인간이 굳이 신(God)을 상상해야 하는 필요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각주:17] 칸트가 물자체 (Thing-in-itself)를 상정하고 숭고함이란 개념으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비어있는 리얼에 다가서기를 포기한 것과 비슷한 논리로 포이에르바하는 주체의 속성에 신을 위치시킴으로 비어있는 리얼을 인간의 속성에 소외된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채운다. 여기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약함의 부산물이라 선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신에 대한 지식이 믿음의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부분에 언급되었다.

    지젝은 헤겔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주체를 설명했다고 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또는 주체가 신의 이면에 자리한 진실이 아니라 주체는 주체이전에 신을 가정해야한다. 여기서 신을 실체(Substance)라 해도 좋다. 주체는 포이에르바하식으로 신을 자신의 주체 이후에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먼저 가정하고 그 신이 인간, 즉 주체가 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각주:18] 이것이 이른바 헤겔식의 그리스도의 화육 ‘incarnation’에 대한 이해이다. 바로 절대 정신인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이 주체가 나타나는 시작이 된다는 의미는 거꾸로 바로 그 신을 신의 자리에 세우는 것은 주체라는 말이 된다. 이를 라깡식으로 하면 바로 상징계 (the big Other)의 시작은 주체에 의해 전제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각주:19] 지젝은 이러한 헤겔 읽기를 판타지를 가로지르는 것(Traversing Its Fantasy)이라 생각한 듯하다. 바로 전기 지젝의 대안은 헤겔의 변증법으로 라깡의 상징계 안에 자리한 주체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상징계를 전제한 것이 바로 주체임을 인식하고 주체와 상징계를 묶는 이데올로기의 그 숭고한 대상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는 라클라우 (Ernst Laclau)에 착안한 것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목표하는 평등, 자유, 평화등의 급진화된 형태가 이른바 타인의 개성을 평준화하고 수량화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비어있는 가치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인권, 여성주의, 환경주의등의 가치들과 연대하면서 이른바 민주적 가치라는 평등 담론등을 통해 계속적인 투쟁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각주:20] 이를 교회적 상황에 비교한다면, 기독교의 신이라는 드러나 있는 기표와 가치들이 이데올로기임을 감안하고 그것이 비어있는 기표들의 상징계임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적 신앙을 포기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가치로 존재하는 사랑과 평화를 기반으로 좀 더 현실적인 층위에서 신앙의 방법들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후기 지젝은 스스로 의문을 표한다. 다음 웹진은 그 이유와 후기 지젝의 대안을 살펴볼 것이다.



<참고문헌> 

Kotsko, Adam.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Zizek, Slavoj.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First Edition edi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Books, 1993.

———.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 웹진 <제3시대>


  1. 이러한 맑스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읽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허상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 당시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정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2.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39. [본문으로]
  3.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24. [본문으로]
  4. Ibid., 25. [본문으로]
  5.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30. [본문으로]
  6. Ibid., 44–45. [본문으로]
  7. 지젝은 환상의 두가지 효과는 첫번째는 현실과 환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지 못하게하고 이 환상이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라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Ibid., 30. [본문으로]
  8. Ibid., 24. 지젝의 냉소주의 (Cynicism)을 가나안교인들의 생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냉소주의’를 비판하는데, 결국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밝히기 보다는 구조를 지속시키는데 공헌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근본주의 (fundamentalism)또한 냉소주의의 반대로서 같은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 [본문으로]
  9. Ibid., 45. [본문으로]
  10. 지젝은 이에 대한 몇가지 유명한 예들을 말했는데, 다음을 보라. Ibid., 210–211; ibid., 33. [본문으로]
  11.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42. [본문으로]
  12. Kotsko, Zizek and Theology, 44. [본문으로]
  1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232.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233. [본문으로]
  16. Kotsko, Zizek and Theology, 51; Slavoj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First Edition edi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Books, 1993), 12–15. [본문으로]
  17.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260. [본문으로]
  18. Ibid. [본문으로]
  19. Ibid., 262. [본문으로]
  20. Ibid., 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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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4]



지젝과 바울(I)


- 사람들, 지젝에게 갈 길을 묻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 웹진에서 무어를 통해 이야기했듯이 다시금 인문학에서 성서 읽기가 시작되고 있다. 성서가 이천년의 시간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보다 서구 기독교의 정치적 경제적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패도의 정치 폭력에 신음하던 자들의 텍스트 또한 성서였다. 미국 자동차 여행중에 머문 값싼 허름한 인터넷도 되지 않는 방에서 심심한 마음에 서랍장을 열었을때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 책이 성서이듯, 성서의 생명력만큼은 쉽게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생명력만으로 작금의 인문학의 성서읽기의 이유를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서 읽기를 독려하는 진보지식인들은 여전한 기독교의 힘 때문이라도 진보적 성서 해석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말도 옳은 말이지만 지금의 현상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왜 현대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이 성서와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지는 그들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방식에서 이해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웹진에서 지적했듯이 과연 그러한 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대답해 보아야 한다.  

   이번 웹진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흥미있는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중에 가장 대중에게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의 기인, 슬로야보르 지젝(Slavoj Žižek)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저서인 [죽은 신을 위하여] (Puppet and the Dwarf)에 대해서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 것이고 여기에서는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밝히지만 나는 철학을 전공한 학생도 아니고 지젝에 대해서는 과문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웹진의 내용이 지젝에 대한 처음과 끝이 아니다. 또한 여기에서 말해지는 라깡, 칸트, 헤겔, 알튀세르등의 인물들은 오직 지젝이 말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더욱이 그러한 지젝의 말을 필자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본 글은 지젝을 미국에서 스타로 발돋움하게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기본으로 다루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 다룰 지젝의 기독교 담론을 이해할 만한 수준까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지젝이 유명해진 대표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고집하는 학자가 아니라 이전의 대가들의(칸트, 맑스, 헤겔, 라깡) 충실하고도 삐딱한(?) 해설자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시대에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들을 현실의 담론 속에서 되살려서 다시금 재해석하고 그들의 논리를 이용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나 후기구조주의에 맞서는 기백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그럼 이러한 감탄사의 이유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론에서 밝히듯이,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둘째, 라깡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이해한다. 셋째, 앞의 두개의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립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본다. (Zizek 2009, xxx)


1.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후기구조주의의 특징을 간단하게 말하면, 리얼리티,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실재를 건져올리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여 닻을 내리면 그 닻은 실재의 대상과 닿는 순간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리 저리 잡히는 것은 계속되는 언어의 연쇄일뿐 실재는 그 안에 없다. 그러므로 진리란 없다. 모든 개념은 ‘차이와 반복’을 통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니 반복한다고 언제나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는다. 즉, 차이와 반복을 통해 계속 생성하는 운동을 지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로 규정된 세상이다. 구조주의가 실재하는 세계가 하나의 언어적 구조를 통하여 나타나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봄으로써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과 이별할 수 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비록 당신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과라는 언어로 규정된 먹어보면 어떤 감각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식상한 비판이지만 지젝의 후기 구조주의와 데리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지나치게 이론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것에 있다. 헤겔식으로 보면 후기구조주의의 코멘터리는 같은 이론적 토대에서 무한적인 반복의 해석을 제공할뿐,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지는 못한다. (ZizekSlavoj 2009, 174) 이에 대해 맑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 구조주의의 이러한 형식을 맑스주의적으로 풀어내어 후기-자본주의의 비평적 토대를 만들었는데,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한 해체주의적 독법자체가 후기-자본주의의 징후라고 비판한다. 지젝은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한다. 

    지젝은 이러한 후기구조주의의 이론을 ‘deadlock’(교착상태)라고 이름한다. (ZizekSlavoj 2009, 174) 지젝의 거의 대부분의 저작은 이 교착상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음 웹진에도 다루게 되겠지만 기독교에 대한 지적의 독법 또한 과연 기독교에 이 교착상태를 돌파할 어떤 것이 있느냐에 지젝은 관심한다.

     Real, 가질 수 없는 너.

    지젝이 리얼이라고 말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데리다는 메타랭귀지라고 부른다. 후기구조주의와 데리다는 이 메타랭귀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라깡 또한 이 리얼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노래의 가사 처럼 ‘못 가지는 너’ 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너’이다. 즉, 가질 수는 없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은 꼭 남기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결국 ‘가질 수 없는 너’를 포기하기 위해 메타랭귀지를 포기하고, 그 결과로 모든 언어를 메타랭귀지로 만들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물질 뒤에 존재한 신은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라고 말해버리면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이 신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범신론) 라깡은 이와 달리 ‘결핍’ 즉, 가질 수 없다라는 것을 그의 관점의 핵심으로 놓았다. (Zizek 2009, 176) 바로 내가 너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언어는 대상을 가리킨다. 소쉬르는 사인의 구조를 통하여 대상-언어의 관계에서 이른바 언어만 따로 떼어내어 사인(언어)=기표(signifier)+기의(signified)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즉, 언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것과 목소리와 같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사인이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고 근대 언어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만약에 여기서 사인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세계를 언어의 세계, 또는 상징의 세계라고 한다면 문제는 이 언어들과 실재들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 규정하고 대상과 언어의 관계를 해체시켰다. 지젝의 라깡은 이 언어의 세계, 상징의 세계에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잊는 거미줄과 같은 세계의 자리를 잡는 하나의 중요한 시그니파이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결핍이다. ‘가질 수 없는 너’의 결핍은 비록 가질 수는 없지만 ‘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굳게 서서 다른 거미줄들을 안정시킨다. 그것은 ‘결핍’이므로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Object a이다. 기의 (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이다. (Zizek 2009, 177)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와 같이 충만으로 가득차서 모든 세상의 운동의 원인이 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텅비어서 결핍된 아무런 의미가 그 안에 없는 어떤 기표이다. 이 기표가 표시하는 것은 실재 대상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결핍이다. 이 결핍이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없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없다’라는 것이 명확하게 존재하므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저 없다는 후기구조주의의 언술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 된다. (Zizek 2009, 180) 즉, 라깡을 오해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여기에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기억해 놓아야 하는데, 바로 Kernel이란 단어이다. 이 단어의 정의는 ‘핵심’을 뜻한다. 지젝은 핵심이란 표현을 쓸때, kernel과 core를 쓰는데 커널이란 표현은 바로 결핍된 상태 자체가 핵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Zizek 2009, 181) 이 표현은 다음에 기독교에 대해 ‘perverse core and subversive kernel’을 할때 다시 설명하겠다. 이 기의가 없는 기표인 ‘대상 A’(object a), ‘리얼’(실재), 또는 결핍된 기의(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와는 다른 ‘더 리얼’(the Real)이 있다.


     the Real, 바로 '너'


    바로 ‘너’이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리얼’이다. 원래 ‘더 리얼’은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상징계 (Symbolic order: 인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이해일 것이다.)로 가져오기 위해 상징화할때 그 충만함은 상징을 거치면서 결핍이 된다. ‘너를 가지기 위해 너라고 불러서 데리고 오는 순간 가질 수 없는 너가 된것이다.’ 이 결핍은 구멍으로 나타나있고 이 구멍을 중심으로 상징계는 구조화되어있다. (ZizekSlavoj 2009, 192) 여기서 잠깐, 지금까지의 내용이 정치사회적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보자. 

    혹자는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를 인류의 마지막 시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가 마지막 경제체제이고 자본에 여지없이 휘둘리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이상의 것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인 이유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본이 만들어낸 가난과 불법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며, 정치 참여를 통한 변화는 그전 하나의 미봉책으로 인류의 생존의 기간을 좀 더 연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현실 경제학과 정치학과 냉험한 현실주의만이 대안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종교는 그저 엄난한 삶속에서 잠깐의 안식을 제공하는 안식처로서 오직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반복할 것이다. 자, 이제 소위 빅브라더 (세상을 지배하는 인물)은 우리 앞에 앉아서 비릿한 웃음과 함께 선택을 강요한다. 인간의 삶은 구조속에서 극히 제한된 선택만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것이 되었다.
    윗 단락의 말들은 원래는 20세기가 저물기전에 이미 인문학에서 말하여지던 것들이다. 불과 몇십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표현을 달라졌지만 이와 비슷한 말들을 흔히 접한다. 흙수저, 금수저, 열정페이, 유리천장, 정치의 몰락, 전지구적 자본주의속에 한치앞도 볼 수 없는 경제의 흐름등. 20세기말에 철학적 담론들은 이러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은 구조속에 갇혀진 존재다. 솔직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그러했다. 근대이전에 인간은 계급이란 명확한 카테고리로 규정된 존재였다. 소작인 아버지밑에서 태어났다면 소작인일 뿐이다. 그 인생에 맞게 쓸데없는 생각없이 살아가면 된다. 근대가 되자 인간은 마치 자유와 인권을 얻은듯이 생각했다. 이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가 그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척한 것이고 실상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고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좋은 물건인양 보이게 했다. 산업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내적모순을 제 3세계로 이동시켰고 빈부의 격차는 국가와 국가간에 계층과 계층간에 만연한 현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물어야한다. 과연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가? 새로운 정치는 가능한가? 새로운 삶은 가능한가? 이 질문을 철학적으로 물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구조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지만 담론적으로도 그러하다. 인문학은 담론으로 말하는 것이니.
    ‘그렇다.’ 또는 ‘가능하다’라고 말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후기구조주의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이론에 맞서야한다. 바로 이것을 감행한 사람이 지젝인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실체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즉,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다. 오로지 너라고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어, 언어일 뿐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을 상징계(Symbolic order)라고 이름하자. 그것에 반대되는 것, 우리가 언어의 힘을 빌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의 세계는 상상계(imaginary order)라고 부르자. 원래 이러한 생각의 대표적 철학자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외우던 그 학자이다. 바꿔말하면 언어없는 생각은 맹목이고, 생각없는 언어는 공허하다..라고도 바꿀수 있다. 즉 칸트는 생각과 언어를 결합시킴으로써 기본적으로 사물 그 자체 thing in itself 를 우리의 앎의 차원에서 분리시켰다. 즉, 우리는 실재 세상과는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물의 세계를 그저 의미없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물의 세계는 단지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 현실이라고 바꾸어보면 그 현실은 노동자의 눈물이 서려있는 곳이며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삶의 가치들이 무가치해지는 상처입은 세계이다. 그렇다면 후기구조주의를 벗어나려는 지젝의 목적은 바로 어떻게 현실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 우리가 과연 현실을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자, 이제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불리우는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이 결핍이라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무엇을 생성해 내는가를 살펴보자.

2.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


그래프 I

     그래프 I 에 대하여
    지젝은 여기에 의미의 소급성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대문자 S에서 S’로 가는 것은 시그나파이어의 운동이다. 즉, 기표가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다. 운동의 시작에 표시된 삼각형(∆)은 이른바 신화적 욕구, 즉 원인을 물을 필요없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묻지말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주체(Subject)가 상징계를 만나 (즉, 기표의 운동을 만나) 자신의 이름을 얻고 다시 귀환하느냐이다. 상징계를 세모로부터 출발해 다시 돌아오면서 주체는 빗금친 $가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 운동은 과거로의 소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지금 상징계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들어가더라도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과거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나오면서이다. 즉, 현재의 주체는 과거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된다. 어떤 의식의 운동을 따라 기표의 세계에 도착했을때 만나게 되는 기표(signifier)에 의해 주체는 호명되어진다. (ZizekSlavoj 2009, 112) 예를 들어,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교회에 들어선 순간 신앙인이라는 또는 기독교라는 거대한 기표에 의해 이름 불러워진다. 그 이후의 그가 만나는 여러 기표들, 믿음, 소망, 사랑, 삶의 의미, 인간의 자유등은 이미 모두 스스로 결정되어있다. 마치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그 의미들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의 운동과 같이 과거에 의미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프로이드의 케이스들에 비교할 수도 있다.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때 갑자기 겁이나고 답답해지는 것은 그 장소에서 어렸을때 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장소의 의미는 자신이 깨닫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과거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프 II(Zizek Slavoj 2009, 114)

    두번째 그래프는 좀 더 복잡한데, 지젝은 ‘소급의 효과’ (the effect of retrovers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먼저 빗금친 $가 원쪽으로 와서 운동을 시작한다. 첫번째 그래프에서 어떻게 주체가 되기위해 호명되고 상징계를 통과해 빗금친 $가 되는지를 말했지만, 사실 이미 주체는 빗금쳐저, 상징계에서 호명되어 있다. 일단 기표(Signifier)의 운동은 $를 두번 만나고 목소리 (Voice)가 된다. 여기서 목소리는 운동 이후에 남은 나머지를 뜻한다. 이 그래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타자 (O:the big Other)인데 처음에 예를 든 것이 기독교였으니 기독교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바로 상징의 코드(Symbolic code)를 대변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대타자, 기독교 사회에서는 기독교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모든 기표들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s(O)는 기표들이 대타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빗금친 $는 대타자를 뚫고 대타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 기표를 뚫고 다시 귀환한다. 여기서 귀환한 주체는 대타자에 의해 동일시된 I(O)[ego-ideal:상징적 동일시]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호명된 주체, 빗금쳐진 주체$는 대타자를 만나고 다시금 대타자에 의해 설정된 기표들을 만나 귀환하면서 대타자와 동일시(identify)된다. (Zizek 2009, 115) 즉, 대타자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데, 쉽게 설명하면 이제 주체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것이 되지 않고 대타자가 바라는 어떤 것이 되고자 한다. (원래 주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알 수도 없다. 주체 자체가 기표와 대타자의 만남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면서 나는 어떤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 이때 주체는 마치 자신이 원해서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대타자(O)에 눈에 비친 자신을 상상하면서 대타자의 눈에 좋은 신앙인을 훌륭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라깡의 말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들어맞으며, 이것이 바로 상징적 동일시(I-ideal)의 의미이다. (Zizek 2009, 117)

   중간 부분 왼쪽의 e란 상상적인 자아 ‘imaginary ego’이고 i(o)는 상상적 동일시를 뜻한다. (Zizek 2009, 119) 대타자를 통해 동일시[I(O)]하는 것과는 달리 상상적 동일시 (ideal-ego)는 타인의 무엇을 부러워 하여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빗금친 주체 $와 대타자(O)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상상적 동일시[i(o)], 또는 타인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아(e)를 형성할 수 있지만 주체는 끊임없이 대타자를 통해 상징계로 나아간다. 그것이 사회에서 ‘나’라는 주체로 살아갈 이름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프 III(Zizek Slavoj 2009, 124)
    ‘케보이’ (Che vuoi?)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그래프 III에 보이는데, 바로 “뭐라구요? 나에게 원하는것이 뭐라구요?”라고 해석할 수 있다. (Zizek 2009, 123) (이경재 2009) 그래프 II처럼 빗금쳐진 주체가 언제나 아무런 문제 없이 상징계에서 동일시되어, 즉 행복한 목사가 되어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언제나 상징계에서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어떤 잔여가 남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 잔여 없이 상징적 동일화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는 사회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그 때에 어떤 잔여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 남아있는 잔여가 주체에게 욕망(그래프에서 소문자 d)을 선사하고 주체는 대타자와의 만남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여기서 욕망(d)는 라깡에 따르면 욕구(need)와 요구(demand)와 구별된다. 욕구란 생물학적 필요를 뜻하는 것으로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욕구를 뜻한다. 요구란 그러한 욕구가 상징계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먹을 것 좀 주세요.”라는 것은 바로 ‘배가 고프다’는욕구가 타인에게 전해지기 위해 요구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는데, 스파게티와 피클이 나왔다고 생각해보자. 주체는 순간적으로 묻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원한 것일까?’ 또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 먹고싶어서 짜장면을 시키고 짜장면을 먹으려는 순간, 옆 테이블에 짬뽕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때, ‘짬뽕을 먹을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나의 욕구가 요구로 바뀌었을때 주체의 요구는 언제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내가 먹고 싶은 말로 다 할수 없는 그 무엇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최선을 다해 어떤 짬뽕이 먹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타인은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비록 말로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잔여가 생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시켜먹고도 채우지 못한 그 잔여물이 바로 욕망(desire)이다. (이경재 2009, 206) 그러므로 여기에서 욕망(d)라는 것은 주체가 대타자(the big Other)가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알 수 없어서 남겨지는 잔여, “나한테 정말로 바라는게 뭐예요?”의 ‘케보이’로 남는 것이 욕망이며, 그 욕망의 곡선은 결국 세번째 그래프의 끝에서 ($<>o)에 멈추게 된다. 바로 빗금쳐진 주체와 대타자사이의 끝없는 질문이 계속되는 곳이다. “나한테 무엇을….” 지젝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유대교는 이처럼 끊임없이 주체가 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불안의 종교’라고 말한다. (ZizekSlavoj 2009, 128)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때, 정말 바치라는 이야기인가? 왜 나를 택했나? 왜 이스라엘을 선택했나?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자가 되었나? 끊임없는 질문이 연속되는 상태라는 불안이 계속된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그 답은 찾아질 수 없다. 그 대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환상(fantasy)이며 ($<>o)는 라캉의 환상공식이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 마지막 완성된 욕망의 그래프이다.



    완성된 그래프(Zizek Slavoj 2009, 136)

    맨위 왼편의 S(O)에서 시작해보자. 처음에 리얼과 더 리얼에 대해 이야기한것을 상기하자. 더 리얼(the Real)은 절대 가질 수 없고 그것이 상징계로 들어오면 리얼(real)이 되는데 이 리얼은 충만함을 모두 잃어 버리고 결핍된 기표 (Signifier)로써 상징계를 지탱하는 누빔점(nodal point)가 된다고 하였다. 이 텅비어 있는 기표(Signifier)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남근이며 아버지의 법이다. 상징계를 지탱하고 있는 아버지의 법은 금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언제나 충만하지 못한 결핍의 상태이므로 그 금지를 어기려는 의도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라깡은 향유(Jouissance)라고 부른다. 애초에 충만했던 더 리얼(the Real)이 리얼(real)이 되면서 그 충만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향유(쥬이상스)는 그 충만성을 찾는 인간의 또 따른 욕망 운동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비어있는 대상 a(object a)를 찾아 계속운동하여 다시금 $<>D에 다다른다. 여기서 D는 상징적 요구(Symbolic demand)를 말한다. (ZizekSlavoj 2009, 138) 주체에게 요구된 상징적 요구를 뚫고 주체의 욕망의 그래프에 귀속되지 않은채 거세된 결과를 낳는 향유의 운동은 주체에게 더 리얼(the Real)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이고 상징계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주체에게 끊임없이 알려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판타지이다. 주체를 다시 불안하지만 텅비어있는 S(O)에 귀속시켜 주는 것이 바로 라깡의 판타지 공식인 $<>o이다. 바로 주체와 상상적 타자가 결합되는 곳이다. 바로 이 판타지가 대타자(O)의 결핍을 매워주고 리얼(real)의 결핍을 매워주고 향유에 의해 나타나는 충격을 감싸준다. 중요한 것은 이 판타지야 말로 이 그래프의 중심이며 불안한 주체를 안심시켜 다시금 상징계에 머물게하고 상징계의 기표 [s(O)] 에 안전하게 안착하게 한다. 바로 이 판타지적 효과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이론을 뽑아내는데 이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것이다. 판타지에 대하여 지젝은 ‘불안의 종교’인 유대교에 반해,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바로 이 환상 효과를 사용하여 주체의 불안을 없애고 안정화 시켰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아버지 신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주체의 불안을 사랑으로 채운다. 즉, 대타자가 자신을 내어줌으로 주체의 비어있는 불안과 욕망을 채워주는데 그 순간에 대타자의 빈 공간또한 이미 주체 안으로 들어왔기에 해결되는 것이다. (ZizekSlavoj 2009, 130) 이를 지젝은 정확하게 하나의 판타지라고 보았고 그 판타지가 작동함으로써 비어있는 대타자(O)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상 짧게 살펴본 지젝의 욕망의 도식을 필자는 ‘만능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지젝의 저서에서 애매한 부분을 만날때는 이 도식을 상기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도식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이해하고 어떻게 맑스와 헤겔을 통해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살펴보자.



<참고문헌>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9.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New York : Verso,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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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3]



성서학에서 철학으로


- 바울 이해를 위해 다리놓기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베커를 마지막으로 성서학에서 논하는 바울에 대한 논의를 일단 마감하려 한다. 필자가 소개한 학자들 이외에도 바울에 관해 논할 가치가 있는 학자들은 많다. 여기에서 마감하는 이유는 앞으로 논의할 바울연구에 대한 글들에 대한 충분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후로 논할 학자들은 성서학의 외부에서 바울에 대하여 논의하는 바디우, 지젝, 아감벤 등이 될 것이다. 보통의 성서학자들에게 이들의 바울읽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현상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전의 성서학의 결과물들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물들이 인기리에 읽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약에 필자가 “자 지젝의 바울 읽기는…” 이라고 글을 시작한다면 이는 성서학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절을 거부하고 필자는 이전까지의 웹진의 글들과 이후 철학적 바울읽기에 대한 다리를 놓는 작업을 이번 웹진에서 감행한다.  

   다리를 놓기 위해 필자가 데려올 학자는 스테판 무어 (Stephen Moore) 라는 학자이다. 미국 뉴저지의 드류(Drew)대학의 신약학자로서, 보통의 성서학자들과는 다르게 데리다, 포스트모던 철학, 탈식민주의등의 현대적 담론에 익숙하며 선구적으로 성서학과 비평이론들 사이에 간문학적 연구를 시도해온 학자이다. 그가 몇년전에 쓴 [The Invention of the Biblical Scholar] 라는 책은 부제인 ‘critical manifesto’(비판적 선언) 라는 말에도 볼 수 있듯이 작금의 성서학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성서학이나 성서학자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자 학자들인데, 그 목적은 성서에 대한 불경스런 질문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보통 보수적이라 불리는 성서학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학이라 불릴 수 있는 거의 모든 학문을 통틀어 지칭한다. 참으로 논쟁적이고 발칙한 생각을 던진 이유는 자신이 몸담고도 있는 성서학에 대한 자살적 충동때문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제는 “왜 성서학은 현대의 이론이나 철학적 담론과는 대화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고민하다가 생겨난 것이란다.

    한국의 주류 성서학은 아직도 전통적인 역사비평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역사비평학이란 근대부터 발달한 성서를 연구하는 방법론을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역사비평학은 성서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그 역사적 근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역사비평에는 크게 본문 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이 있는데, 텍스튜얼 비평은 텍스트의 원래 모습을 추적해 들어가는 비평을 말한다. 성서텍스트가 역사적 발전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면, 실지로 그러한데, 가장 초기의 판본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추적을 거듭한 결과 성서 텍스트는 여러 조각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예를 들면 복음서는 예수의 기적이야기,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와 기도문, 예수의 구전 비유, 초대 교회 예배문 등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 그 조각들이 하나의 양식으로 그 양식들은 각기 신앙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들의 전승과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양식비평이며, 편집비평은 양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편집의 결과로 나타난 복음서 등의 최종본의 편집의도를 살피는 것이 되겠다. 이러한 방법들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바로 성서 이면에 존재하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연구의 기본 목표로 삼는다. 무어는 이러한 성서학의 역사에 대한 관심 속에 사실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근대의 시대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발달로 학자들은 성서에 대해 여러 이성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데,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바로 성서의 권위에 관한 문제였다. 원래 성서의 권위는 성서를 토대로 하는 교황의 권위를 뜻하고 성서가 계시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했다. 즉, 하나님의 책이니 복종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근대의 시대에서 종교의 권위가 지배력을 상실하자 기독교는 문화를 통해서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문화적 주도권을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학이라는 학문을 필두로 기독교는 근대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으려 한 것이다. 무어의 성서학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무어가 진단하기에 근대의 초기에 성서가 당면한 최대의 위협은 성서의 비도덕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여기서 근대의 도덕성(Morality)란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보편의 단계까지 확장되는 보편적인 도덕성(윤리)를 뜻한다. 즉, 인간이 지구에서 살건 화성에서 살건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보편적 삶의 도덕을 뜻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성서의 여러 이야기들, 딸을 강간했다고 한 마을을 몰살시킨다거나 (야곱의 딸 디나, 창 24:1-41), 자신의 며느리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다거나 (유다와 다말, 창 38:1-30), 이방인 민족을 가축과 아이까지 모두 죽이라고 하나님이 명령한다거나 (사무엘상 15장), 또한 그 명령을 어겼다고 역정을 내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죄성이 최초의 나무열매 하나 먹은 것 부터라는 설명은 애매하기 그지 없다. 무어는 이러한 시대에 등장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오히려 기독교에게는 구원이었다고 말한다. 즉, 차라리 그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증명할 수 없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성서의 권위를 지키기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성서학과 그 방법론을 이야기할때, 영어로는 biblical studies, biblical scholarship, 그리고 biblic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무어는 ciriticism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무어가 보기에는 성서학은 역사비평에서 비평이란 의미의 수행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주류성서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에 비도덕성에 대한 질문과 비평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고 무어는 말한다.[각주:1] 

    신학교에서 처음 오경이 여러 문서들의 조합이라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어에 따르면 차라리 문서설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그 이야기들속에 나타난 성서의 비도덕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혜스러웠다는 말이다.[각주:2] 성서가 통일되고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고민하는 것보다 차라리 성서가 문학적으로 통일된 문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덜 고통스러웠다는 말이다.[각주:3] 옛날에는 은혜스럽던 기적 이야기들도 보편적 도덕과 종교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구는 살려주고 누구는 내버려두는 신의 모습은 애매모호한 도덕일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적이야기는 '역사적이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솔직한 비평이기 보다는 기적에 대한 보편적 도덕의 모순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각주:4] 차라리 “그런 일 따윈 없었어!”라고 하는 것이 성서는 '도덕적이지 않다'라고 하는 것보다 덜 아프기 때문이다.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성서의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기록들은 실제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이야기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시험에 들곤 한다.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진 이야기가 실제로는 갈대바다라는 비교적 건너기 쉬운 바다를 잘못 표현한 것이라든가,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은 그저 이야기로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충격을 받는다. 이것들은 이른바 성서학자들이 역사적 비평의 결과로 말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역사비평은 신실한 성도를 넘어뜨리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이라 욕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서의 허구성을 밝혀주는 용감무쌍한 학문다운 학문이라는 평을 들어오기도 했다. 무어에게는 이러한 구도를 다시 뒤집어 그 용감무쌍한 학문의 숨겨진 의도를 파헤친다. 곧, 이렇게 이야기하는 진짜 의도는 하나님이 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해주고 이집트인들은 죽였냐는 질문보다 대답하기 쉽기 때문라고 말한다. 오히려 성서의 역사성을 가지고 문제삼고 논하는 것이 성서가 가지는 비도덕성에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성서를 보호하기 쉽기 때문에 역사비평학적 연구가 근대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근대에 이르러 성서는 철학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보다는 회피하였는데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성서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비평에서 성서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진리에 대한 추구에서 생겨난 것이기 보다는 근대의 역사적 상황속에 생겨난 필연적인 선택이 된다. 성서의 여러 문제성 있는 텍스트들은 비판과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 연구의 무대에는 고대의 언어학, 철학, 고고학, 문헌학, 역사학, 문화학, 지리학등 수많은 전문분야들이 난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그 연구 결과들은 전문성 없이는 읽기 어려운 것들이 되고 자연스럽게 보통의 신앙인들의 영역에서 분리되게 된다. 성서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구약이냐 신약이냐, 복음서냐 바울 서신이냐, 역사 비평학의 어떤 분야냐, 교회론이냐 그리스도론이냐, 복음주의냐 진보주의냐 등등 수없이 쪼개어진 분과 학문과 연구 주제 사이에서 선택해야 학위라도 하나 받을 수 있다.[각주:5]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논의의 끝자락에서 예수의 이런 말은 이런 의미가 있다거나, 바울의 이런 말은 이런 이런 신학적 의미가 있다는 식의 연구논문을 내어놓게 된다. 비판이나 공격보다는 어떠한 가르침이나 신앙적 양상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끝마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성서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성서학은 사전에 차단하고 스스로의 생태계를 만들어 무슨 무슨 학회, 무슨 무슨 위원회등으로 그 생태계를 유지한다. 결국 이제는 아무도 성서학의 결과물들에는 큰 관심이 없다. 기독교 서점의 많은 부분들은 천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복음에 대한 쉬운 설명집이나 설교문 모음집으로 채워진다. 

    신약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매력적인 주제이자 일세를 풍미했던 예수연구에 대한 무어의 평가 또한 엄혹하기 그지 없지만 그의 책의 주제를 명확하게 해준다. 슈바이쪄가 이전까지의 예수연구를 단순히 근대 연구가들의 '자기 얼굴 그리기'라고 평가하고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하였을때 의도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결국 예수의 삶의 윤리적 가치를 무시한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슈바이쳐는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규정하고 그의 죽음을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역사를 수래바퀴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와 함께 예수의 가르침과 윤리를 종말론적 시대의 윤리라 평하였다. 즉, 예수가 말한 윤리와 도덕, 즉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으로 주고 헐벗은 자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윤리에 대해 엄숙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현대에는 맞지 않는 종말의 시대의 윤리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각주:6] 결국 슈바이쳐의 학문적 성과또한 근대 성서학의 숨겨진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였는가?”로, 또는 예수처럼 살기는 현재에는 불가능하지만… 이라는 말로 환원된다.

    결국 처음에 잘못 꿰어진 단추구멍처럼 성서를 과거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제한해버린 것이 오히려 성서의 가르침을 제한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무어의 진단일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무어는 정치적 비평, 문학비평, 구조주의 비평, 해체주의 비평, 3세계 비평 등을 아우르며 모두 역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났지만 성서학 안으로 들어오면서는 성서의 도덕성에 대한 질문들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채 성서안에서 과거의 문제들과 씨름하게 되었고, 결국 성서는 과거의 거룩한 책으로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를 든다면 문학에 대한 해석에서 독자들을 강조하는 혁명적인 경향은 성서학으로 들어와서는 ‘현재의 독자’보다는 ‘내재적 독자’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바뀐다. 아무리 현대적 방법론이 성서학으로 들어와도 결국은 과거의 사건의 재구성이라는 성서학의 기본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것은 성서를 현재적 사건으로 바꾸려는 충동을 무력화시킨다. 이 원인은, 다시 강조하자면, 성서에 대한 보편적 도덕성을 처음부터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성서를 과거의 기록이자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서학 안에 윤리학, 정치학, 더 나아가 신학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무어는 말한다.

    그런 와중에 불현듯 새로운 사조가 일어났는데 인종, 젠더, 또는 계급이 인문학을 이끌던 시대에서 갑자기 종교로 담론의 관심이 변한 것과 발맞추어, 알랑 바디우, 아감벤, 지젝, 야콥 타우버스등이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무어는 이를 The Second Wave 라고 표현한다. 성서학을 깨우기 위한 첫번째 이론의 물결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지만 결국 페미니즘을 제외하고는 성서학 자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두번째 물결이 나타난 것이다. 이전에는 이론을 성서학이 받아들여 해석을 생산하였다면, 이 두번째 흐름의 특징은 해석까지도 성서학 외부에서 이루어졌다.
    이 두번째 흐름들은 성서학 밖에서 다시금 보편성과 역사의 개념을 중심으로 근대에서 생겨난 수많은 분열들, 개인과 공동체, 종교와 정치 사이의 장벽을 허문다. 그리고 역사적 비평이나 성서학의 연구물들과는 별개로 성서를 ‘철학적 또는 이론적’으로 접근하여 근대의 시대에 성서로 부터 퇴출되었던 유령들을 불러모아 성서와 다시 만나게 한다.[각주:7] 이러한 철학적 접근을 무어의 평가를 필자의 논리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에 근대의 시작에 생겨났던 보편적 도덕이라든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든가 이성과 감성의 분리등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고 성서를 좀 더 열린 자세로 읽었더라면 성서는 그저 신화를 담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을까? 오히려 지례 겁을 먹고 성서의 권위를 보호하기위해 감싸기만한 결과로 성서는 침묵하는 책이 되버린건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금 근대가 만들어낸 여러 장벽들을 벗어나 성서를 읽으려 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좋은 기회는 아닐까? 그들이 근대의 여러 장벽들을 비판하고 성서를 솔직하게 바라볼때 찾아낸 것들과 성서를 다시 읽으며 새롭게 열리는 종교적 담론에 귀기울여 보는 것이 우리 성서학자들을 다시 돌아보는데 필요하지 않을까?[각주:8] 이러한 권유로 무어는 결론을 맺는다. 그는 지젝이 옳다고도 바디우가 낫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왜 우리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담담하게 논할 뿐이다. 물론 지나칠 정도로 성서학을 몰아붙이기는 하지만.
    원래 무어의 이러한 논지는 하나의 질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왜 성서학은 인문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비평의 관점들과 철학적 담론에 무관심한가?” 라는 질문이다. 보통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의 힘에 굴복한 수많은 이론적 성과들,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 맑스주의등이 현시대에 이르러 이렇다할 대안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에 찾는다. 강력한 저항을 외쳤던 락과 힙합이 지금은 소수의 뮤지션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강력한 비평의 도구로 서구의 철학적 이데올로기를 혁파했던 해체주의가 데리다의 죽음 이후로 텍스트 읽기의 유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맑스가 말하던 새로운 사회가 오기는 커녕 급속한 환경파괴로 인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금, 문화 현상과 텍스트 비평를 통해 새로운 사회와 인간을 꿈꾸고자 했던 이론의 영향력은 그 힘을 잃은 것 같다. 그래서 쉽게 성서학은 이론의 종언과 함께 성서학의 부흥을 외치곤한다. “다시 성서로 교회로 돌아가자!”란다. 무어는 질문한다. “언제 제대로 이론을 수행한 적이라도 있었나?” 스스로 기독교 가치의 보호자를 자처한 성서학은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그러한 시선을 놓는 것 자체를 거부해왔다. 그런 성서학에게 이론을 통한 반성도, 대안이 없다는 반성을 위한 반성도 수행한 적이 없는 성서학의 모습이 지금의 성서학이라 말한다.
    긴 호흡으로 보면 어떤 역사이든 냉혹하다. 철학사의 수많은 천재들이 나타났고 세상을 종합화하는 멋진 담론들을 내어놓았지만 이내 역사의 장강속에 그 한계를 드러내며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이 있었기에 냉정한 반성역시 가능했고 새로운 담론의 생산이 가능했었다. 성서학은 과연 스스로를 냉혹하게 반성한 적이 있었던가? 그 반성이 성서학 내에서 가능하지 않다면 (필자의 입장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물론 아주 어려울 것이다.)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대화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필자가 공부한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바울수업을 Ted. Jennings교수에게 들었을때, 수업 첫 시간에 그가 강조하는 것이 있다. 너의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우연히 발견한 어떤 이의 편지를 무심코 넘기면서 읽은 것처럼 바울의 편지를 읽으라… 그말을 들으면서 떠올랐던 것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한 장면이었다. (스포가 될수 도 있으니 평이하게 설명하면) 감옥에 갖힌 여주인공은 생사가 불분명한 가운데 조그만 감옥의 벽돌 사이에서 누더기와 같은 어떤 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는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라고 시작하는 그 이전에 감옥에 갇혀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와 소망이 담긴 편지였다. 당신이 기독교가 무엇인지 예수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선교사나 목사들의 설명없이 “신의 뜻을 따라 예수 메시아의 사도로 부름받은 나 바울이…” 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읽는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바울의 말중에 당신은 무엇을 깨닫게 될까?

   다음 웹진부터 지젝을 필두로 이른바 기독교의 눈이 아닌 눈으로 바울을 읽은 사람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들의 글들이 바울신학에 대한 필자의 글의 마지막 부분이 될 것이나 그것이 이들의 글이 다른 성서학자들의 글들에 비해 더 우월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입장에서 더욱 면밀하게 검토되고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대신 안전벨트를 꽉 조이자. 생각보다 어지러운 여행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Stephen D Moore and Sherwood, Yvonne, The Invention of the Biblical Scholar: A Critical Manifesto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1), 47. [본문으로]
  2. Ibid., 52. [본문으로]
  3. Ibid. [본문으로]
  4. Ibid., 58–59. [본문으로]
  5. Ibid., 85. [본문으로]
  6. Ibid., 67. [본문으로]
  7. Ibid., 127. [본문으로]
  8. Ibid., 129–1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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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1]

 바울과 종말론

- 세월호, 바울, 그리고 에른스트 케제만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세월호 그리고 얼어버린 교회

    2014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어떤 형태의 고민이든 세월호에 대해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정신적 여파가 한국사회를 휘감아 돌아 마치 유령처럼 이곳 저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조금 늦은듯 하지만 세월호 사건에 대한 신학적 반성과 공부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세월호 사건은 한국교회와 신학에 대한 21세기 최고의 도전이다. 보수 일색인 한국교회와 신학에 대해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이 비극적인 사건은 외형만 비대하게 커진 한국교회의 복음과 신학의 빈곤을 비웃기라도 하듯 웅장하게 건축된 서초 사랑의 교회보다 더 거대한 모습으로 교회앞에 섰다. 물론 대부분의 교회나 신학은 가벼운 눈물과 인생에 대한 무상함으로 쉽게 이 사건을 덮으려 하겠지만 세월호앞에 신학마저 바로 서지 못한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곧 생명력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여러가지 질문을 던질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단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는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단순한 질문에 여러가지 복잡한 함의들이 숨어있겠지만 현대의 보수화된 대부분의 한국의 교회와 신학이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본다. 믿는자는 천국에 안믿는자는 지옥에 있다라고 안타깝게 이야기하고 싶을까? 정말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니 그렇게 말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한국기독교의 미래는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죽은자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살아야할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조금이라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것이라고, 죽은자들을 거름삼아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언뜻 보기에는 멋진 정치적 구호정도로 보이지만 ‘과거를 딛고 서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자’던 전두환 정권의 구호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과거를 규정하는 것은 현실이기에 과거를 현실화 하지 않는다면 그 과거는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순 무식하게 필자가 하나 꼬집고 싶은 것은 이른바 한국의 복음주의와 진보신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은자를 위한 신학’ 또는 ‘희생자를 위한 신학’이란거다. 그러기에 세월호앞에 진보신학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반복하거나,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오는 윤리적 자기 갱신을 다시 외치거나, 재발방지를 위해 현실정치의 복잡한 구도속으로 말려들어간다. 모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신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또한 신학이 자신의 특수성없이 다른 담론에 숟가락을 얹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주의신학은 자신이 복음이라 생각하는 구호를 다시금 무의미하게 외친다. ‘예수를 믿은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프로파간다를 외치면서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들이 수천년동안 팔아온 ‘죽음 이후의 보험상품’의 독보성을 목놓아 외친다. 그 댓가는 현실에 대한 부정과 현실속의 복이 모순적으로 짬뽕된 삶과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 예배행위와 헌금이다. 위에서 필자가 이야기한 것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위의 증상의 한 원인으로 ‘죽은자를 위한 신학’의 부재를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현대 한국 기독교과 신학이 얼어붙어 버리는 지점을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답이 있는가? 세월호의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미안하지만 필자는 그 해답을 쉽게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에른스트 케제만이라는 사람의 바울 이해를 살펴보며 그 답을 함께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독교의 신학은, 아니 바울신학은 죽은자를 또는 죽을자를 위한 신학이다. 그 신학을 잊어버렸을때의 결과가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과 일부 진보주의 신학이다.


    에른스트 케제만, 스승에게 반기를 들다.

    케제만을 말할때 꼭 앞에 붙는 수식이있다.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라는 것이다. 이른바 신약성서신학의 독보적인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불트만의 계보에서 태어난 학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스승에게 선을 그은 학자이며 곳곳에서 자신의 스승의 문제점을 따지고 든 학자이다. 뛰어난 신학자보다 더 귀한 것이 뛰어난 스승인데, 불트만은 그점에서 둘 다 이룬 사람이라 보인다. 그의 제자들은 그와는 전혀 다른 신학적 색깔을 드러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점이 더욱 불트만을 뛰어난 신학자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다시 케제만으로 돌아와서, 케제만이 살았던 시대에는 유독 위대한 신학자들이 마구 등장하던 시대였다. 불트만을 필두로 하여 칼 바르트, 폴 틸리히등 그야말로 신학도가 아닌 사람들도 필독서로 인정하던 책들을 썼던 학자들이며 신학이 인문학을 다시금 이끄는 것 처럼 보였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신학자들의 특징중의 하나는 바로 전쟁 이후세대, 또는 비극 이후 세대였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고 겪을 수 있는 가장 아픈 비극인 죽음의 시대, 제 3제국 나치의 시대, 아우슈비츠의 시대를 지나면서 그들은 이전까지의 신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왜 그 대답이 없었는지, 그 대답이 혹시 성서에는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케제만이 있다. 그에게 당시 교회가 잊어버린것은 종말론이며 그 이유는 바울에 대한 심각한 오해였다. 차근 차근 살펴보자. 필자가 신약성서신학을 배울때 나름 멋지게 생각했던 구절이 있다. 바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표현이었다. 불트만이 했다고 하는 이 표현은[각주:1] 결국 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나, 이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언뜻 이 표현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근대의 시대를 사는 불트만에게 성서는 신화적 세계의 산물이었다. 신화적 세계에서 말해지는 신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비신화화’되어야만 근대의 독자들에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불트만은 생각했다. 정작 신화나 고대의 이야기들의 핵심은 한 부족이나 집단, 또는 인간의 운명의 이야기라 해석된다. 곧 성서는 우주선이 날아 다니는 근대의 세계관에 맞게 인간에 대한 이야기, 즉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떻게 신앞에 설 수 있는가?'의 주제로 다시금 읽혀야 한다. 이런 불트만의 입장은 절대적 계시로서의 신이 깃든 문서라는 성서의 위상을 재정립하여 고등비평이 성서신학의 필수항목으로 등장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실존주의 철학이 신약성서신학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나 케제만에게 이런 불트만의 방식은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트만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인간’이란 개념이 다분히 근대적이란 것이 문제였다. 불트만이 말하는 ‘인간’이란 존재가 옳을 수도 있고 그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가 현실속의 인간을 올바르게 말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케제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과 불트만의 ‘인간’이해는 다르다는 것이다. 케제만은 불트만이 말하는 ‘인간’은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인 ‘개인’ (Individual)과 같은 개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개인’이란 변하지 않는 어떤 에센스를 가지고 있는 인간, 이른바 영혼이나 영(Spirit)을 가지고 있는 윤리적 결단을 할 수 있는, 세상과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다.[각주:2] 결국 불트만에게 전체 신약성서는 하나의 ‘윤리적 개인’을 찾기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각주:3] 하지만 영혼이나 영이 인간의 변치않는 본질이라면 진정한 인간은 ‘영’이나 ‘영혼’과 같은 존재가 된다. 결국 불트만은 바울을 당시 헬라의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윤리적 결단의 주체로서 인간을 발견한 사람 정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케제만이 말하는 바울에게 인간이란 바로 몸의 존재이다. 바울에게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의 동일성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연대하면서 그 차이를 견디어내는 (유대인, 헬라인, 노예, 자유인, 남성, 여성) 공동체적 존재이다. (P 3) 또한 세상과 몸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떤 결단이든 생각이든 세상과 분리되어 이루어 질 수 없는 존재이다.[각주:4] 갑과 을이 있다고 하자. 언뜻 생각하면 갑과 을은 하루 아침에 스스로의 결단으로 갑과 을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갑은 “그래 이제 갑질하지 말아야지 이런건 나쁜 일이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을은 “그래 이제 을이 되지 말자.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필자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또한 만약에 실천할 수 없어서 ‘그래 이런건 불가능한거야”라고 생각했다면 결국에는 윤리적 사고 자체도 사라진 것이 아닌가? 이렇듯 바울에게 인간은 그의 외부의 여러 조건과 관계에 뿌리박고 있는 존재이다.[각주:5] 또한 바울은 섣불리 인간이 윤리적 존재로 거듭날 거라고 추측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바울에게 하루 하루의 노력으로 자신의 영성을 길러서 좀 더 완전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그랬다면 바울은 로마서 7장에 그리도 길게 선을 행함에 부족한 자신을 질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을리 만무하다. 또한 그의 서신의 거의 절반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강조했을리도 없다. 바울에게 “현재의 구원은 오로지 개인이 가시적 공동체에 소속되어 구체적인 삶을 지킬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제자도가 구현되지 않게되면 교회는 종교적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로 변해 버리기 마련이다.”[각주:6] 바울에게 결단할 수 있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부르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개인이 있을 뿐이다.[각주:7]


    바울의 인간학 – 세계속의 인간

    이쯤되면 한가지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뭐야? 보통 교회가 말하는 것과 틀린게 없잖아? 인간은 죄인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것이고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자유주의신학은 틀렸다 이런소리 아냐?” 그러나 케제만이 말하는 바울의 인간은 이러한 구원관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구원관이 가지는 문제점은 여전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를 단순화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여전히 여기에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자리잡고 있다. 현실세계가 가지는 모순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실체없는 믿음, 즉 세계와 연결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는 구원보다는 영적인 차원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좁히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보면 불트만이 범했던 인간 개인 구원의 차원만을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인간은 세계속의 모순에 갖힌 존재이다. 스스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죄악으로 관영하여 인간을 죄악된 존재로 만들 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각주:8] 그러므로 바울이 풀고자 한 숙제는 죄인된 인간을 어떻게 의롭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죄악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였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세월호를 예로 들어보자. 세월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더 많은 짐을 실은 선박회사와 이를 눈감은 선장과 선원, 그리고 관계당국자들의 윤리적 문제만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또는 배와 승객들을 버리고 자기의 살길만을 찾은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이상하게도 승객이 아닌 선원들을 먼저 구조한 당시의 해경대원들이나 그 명령을 내린 사람들만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은 몇몇 사람이 올바른 윤리적 판단을 했다면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의 비극은 몇몇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특별하게 일어났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 2, 제 3의 세월호는 없을까? 지금도 그러한 문제를 안고 출항하고 있는 선박은 없을까? 어쩌면 세월호의 비극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설명되는 작금의 시대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사건은 아닌가? 능률과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는, 좀 더 나은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현대 교육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위험성도 상관않는, 인간의 존엄성이 이윤으로 치환되는 이 시대의 자화상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월호가 아닌가? 여기서 모순이라는 말을 ‘죄’라는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정확하게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죄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바로 세계가 죄의 악마적인 순환으로 이루진다는 것이 바울의 이해였기에 이 세계 속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해 보이기에, 세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정수를 깨닫지 못하고 여타의 다른 어떤 가치를 우상으로 삼았기에 벌어지는 비극의 현장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인식을 근대의 교회와 신학은 인식하지 못했을까? 필자의 표현으로 하면 ‘죽은 자를 위한 신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 존재의 현상으로 해석하고 그 죽음 뒤의 구원(천국가기)을 이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도구로 삼아버렸기에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이를 케제만의 표현으로 하면 좁디 좁은 개인적 인간이해를 통해 바울의 인간론, 교회론, 묵시론, 칭의론을 우르르 담아버린 결과이다. 케제만은 이를 반대로 뒤집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중에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묵시론, 즉 종말론을 필두로 바울의 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각주:9]


    케제만 종말론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놓다.

    이전장에서 알베트 슈바이처가 종말론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놓았을때, 슈바이처에게 종말론적 언어는 예수의 원래의 메세지였으며 바울은 지연되어가는 예수의 재림속에서 신학을 넓혀가던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에게 being-in-Christ는 구원이 완성되는 재림 이전에 교회를 붙잡아주는 신학이었고 바울의 신학이 종말론을 통하여 신비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슈바이쳐는 생각했다. 그러나 케제만은 이와는 다르게 종말론은 원래 예수의 메세지가 아니라고 본다. 결국 종말론이 바울신학의 핵심이라 본 것은 동일하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두 학자는 다른 결론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슈바이처의 여러 업적중에 역사적 예수연구에 대해 남긴 것은 독보적이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이전까지의 예수의 연구가 예수의 모습보다는 연구자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을 더욱 반영한다고 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비판적 연구서를 썼다. 그를 통하여 복음서를 통해 통일성있는 예수에 대한 위인전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몇몇 조각들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조각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기다렸으며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곧 슈바이쳐에게 예수는 종말의 선포자이자 예언자였고 예수의 메세지의 핵심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였다. 그러나 그 후에 나타난 불트만이라는 거대한 학자에 의해 역사적 예수연구는 완전한 종언을 고하게 되는데[각주:10], 불트만은 ‘공관복음 전승사’라는 연구를 통하여 복음서의 기록중에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복음서의 기록은 오로지 초대 공동체를 통하여 ‘선포된 예수’만을 말하고 있고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록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받은 복음의 정수인 ‘케리그마’를 기록하기위해 당시에 떠돌던 여러 이야기들을 편집하여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서에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기록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고 여러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기까지 한 것이다. 케제만이 불트만의 제자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게다가 현대의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자 중의 한사람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를 유대사회의 한 혁명가로 그리고 있으며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세상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약학계에서 옛부터 지금까지 예수가 말한 두가지 종류의 종말론, 즉 내가 곧 올것이고 그 때 세상의 종말이 온다라는 말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하는 ‘이미’ 와 ‘아직’ (already or not yet),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과연 예수의 입에서 나왔느냐는 것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의심하고 있고, 그에 대한 논쟁또한 계속되고 있다. 만약에 이러한 종말에 대한 언사가 예수에게 나온것이 아니라면 이들은 부활절 이후의 초대교회의 메세지였다는 말이된다. 케제만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케제만은 “복음서의 역사는, 예언적 선포와 같이, 부활절 이후 시대에 나타난 묵시론의 열매이며, 이 거룩한 법의 선포는 부활 이후 공동체에서의 선포가 묵시적인 기반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나타낸다[각주:11]” 고 하였다. 여기서 묵시론적 열매는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 ‘ 모든 가치들의 전복’, ‘인자의 오심’과 같은 묵시론의 핵심들이 예수의 말씀속에서 새롭게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 복음서의 기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통하여 바로 예수가 종말론적 인자(사람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고 하나님과 예수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왕관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각주:12]이다. 여기서 혹자는 예수의 재림이나 종말에 대한 비전이 단지 부활절 이후에 일어난 초기 공동체의 생각일 뿐인가?라고 그렇다면 그저 그들의 상상일 뿐인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그 모든 신학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초대 공동체의 신학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이었으며, 이 묵시적 종말론은 두개의 큰 줄기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열광주의를 바탕으로 한 현재적 종말론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 유대 묵시문학을 바탕으로 한 미래적 종말론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적은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율법적 열심과 헬라적 공동체의 열광주의란 말과 같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통한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그의 선교사역을 통해 전하면서 이 두가지 종말론(또는 두 공동체의 신학들)이 가진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를 캐제만은 다름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에게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의의 선포’와 ‘의인됨’, 선물과 섬김, 자유와 복종, 성례와 윤리사이를 결합할 수 있었던 통일된 주제를 밝혀내는 것이다.[각주:13]”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하면 ‘의의 선포’, 선물, 자유, 성례가 강조되고 미래적 종말론을 강조하면 그 후자가 강조되게 된다. 이를 세월호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믿음으로 이미 우리가 의인이 되었고, 우리는 죄에서 자유하고, 예배를 통해 은혜를 입는다는 생각은 현재적 종말론에 해당한다. 물론 죽고난 이후의 천국은 덤이다. 이러한 ‘열광주의적’ 신앙형태가 현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에서 나타난 신학은 세월호에 비극에 대해 일단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들과는 일단 관계없는 ‘세상 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 속에 자신과 같은 신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제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열광주의적’인 실현된 종말론속에 사는 사람은 세계에 대해 단절될 수 밖에 없고 이는 무관심과 침묵으로 이어진다. 이와는 달리 미래적 종말론은 그 종말의 때가 미래에 있고 현재의 세계는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시대이므로 어떻게 신자로서의 삶을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신앙적 양태는 섬김, 복종, 윤리등을 강조하지만 점차로 세계에 대한 관심을 끊고 (세계는 불의하고 그것을 해결하러 예수님이 언젠가는 오실 것이기 때문에) 자기 공동체 안에서의 섬김, 복종, 윤리로 변질된다. 어떻게 구원의 상태를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므로 한편에서는 여러 법적 요소가 강조된다. 여기서 법이란 신앙생활의 형식을 규정하는 모든 것이다.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하며, 헌금은 어떻게, 목사가 되려면 어떻게, 교회는 어떻게등등 여러 형식과 규정이 강조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영적생활, 즉 어떻게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수 있는 자기 개발이 강조된다. 이러한 신앙과 신학은 세월호에 대해 윤리적 비판을 쏟아놓거나 세상의 죄와 불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은 선하며, 선택받았으며, 구별된 공동체라는 자부심이다. 법과 금욕을 통해 더 나은 영적 도덕성을 개발하지만 자신들 안에 들어선 교만과 위선은 보지못하고 철저한 선함만을 강조하는 율법적 몽학선생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바울의 종말론에서 본 구원과 부활

    슈바이처가 구원에 대한 두개의 기둥, 즉 믿음으로 얻는 의와 종말론적 참여(Being-in Christ)를 구분하여 다룬 것을 기억할 것이다. 둘을 분리한 가장 큰 이유는 둘의 관점, 율법주의를 넘어선 의와 윤리적 참여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며 슈바이처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바울을 종합하려 하였다. (슈바이처장 참고) 그러나 케제만은 바울 신학의 핵심을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돌파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케제만이 본 이 둘 사이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바울의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이것이 케제만의 바울연구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케제만의 말을 빌자면, 첫째로는 “바울의 신학을 ‘기독교 열광주의’와 ‘유대적 묵시주의’로 부터 구별하는 것은 불경건한 자(또는 불의한자)를 의롭게 하는 신학에 담긴 약속을 전례에 없이 과격하게 보편화한 것이다.[각주:14]” 이를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이신칭의’는 오로지 종말론적 관점에서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앞에서 그 어떤 기득권도 특정한 유산도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인 하나님의 의가 바로 믿지 않는 자, 또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또는 정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를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한 이유는 바로 종말론적 구원의 시작이 개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시작되었고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힘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이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바울은 부정하지 않는다.[각주:1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인 것은 명확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는 개인에게 따로 따로 개인의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편적으로 온 세계에 새로운 창조로 시작되었다고 바울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말이 왜 필요할까? 아니 그것은 바울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이 질문은 조금만 아껴두자 잠시후에 설명할 것이다. 바울은 어떻게 두개의 서로 다른 종말론을 그의 신학안에서 극복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란 무엇인가를 길게 논의하는 데, 바로 바울의 종말론이 종합되는 부분이다. 즉 부활이란 카드를 꺼냄으로써 현재적 종말론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현재적 종말론의 입장 또는 영열광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래의 부활은 중요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거부될 수 밖에 없다.[각주:16] 언뜻 보면 다른 것 같지만 현시대에서 영적 체험을 통해 한순간의 변화를 말한다거나 영적인 사람이 되었으므로 마치 죄악과는 단절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식의 생각이 현재적 종말론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현시대의 엄연히 존재하는 모순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일개 개인의 정신적 영역으로 한정하는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적 종말론이 강조되면 될수록,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피조물이 겪어야하는 세상의 모순과 죄에 대한 질문은 늘어만 갈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왜 세월호와 같은 비극이 이 시대, 또한 신자에게도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을 영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해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영혼은 중요하고 몸은 세계에 속하여 중요하지 않다는 헬레니즘적 사고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헬레니즘적, 또는 신플라톤주의에 교회가 젖어들어가게 되면, 실제로 현실이 그러한데, 예수의 재림이나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등은 그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구원받은 자와 멸망받을 자의 구분만이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바울은 부활의 그 어떤 현재적 의미도 부정한다.[각주:17] 필자는 이런 케제만의 논의에 동의하는데,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이 그러하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였으나 그 부활 사건은 현재의 신자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죄의 권력아래 있는 세계의 마지막 희망, 주님의 몸된 교회

    부활을 미래의 사건으로 미루어 놓은 바울은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새로운 복종’을 제시한다. 바울은 십자가에 참여함이 바로 부활에 참여함을 말하지만 부활은 미래의 사건으로 세계의 모든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옮겨갔을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고전 15:23-24) 이 새로운 관점이 바로 바울의 종말론을 그 이전의 묵시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들게 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제한되어 있다. 그 시작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완성은 오로지 이 세계의 죽음이 완전히 사라질때에, 죽음의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될 때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 죽음을 이기는 권세의 시작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세계가 아직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 현실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 케제만이 말하는 바울에 의하면, 바로 교회안에서, 죽음을 제외한 모든 세상의 권력은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안에서 그 힘을 잊어버리게 된다. 비록 여전히 그 권력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말이다.[각주:18] 그러므로 우리가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한 부분이면서도 유일하게 세계안의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나타내는 통로이자 표시가 된다. 바로 바울이 그토록 많은 서신의 지면을 통해 강조하였던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가장 중요한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몸(Body)라고 표현된 이유는 바로 이 몸을 통하여 세계와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9] 오로지 이 몸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obedience)을 통하여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를 현시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인간의 몸이 모여서 그들이 하나의 몸임을 고백하고 세상의 모든 권력과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에 뜻에 대한 복종을 통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여줄 수 있을때에, 그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볼 수 있을때에 부활의 소망이 여전히 의미있는 구원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 (헌신, 복종)으로 얻는 의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세월호,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불트만과는 달리 케제만에게 바울은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다. 근대적, 개인주의적 인간의 구원을 말한 불트만과는 달리 케제만은 바울에게 구원이란 개인의 영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때야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몸을 통하여 세상과 소통한다. 몸을 통해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랑을 한다. 또한 몸은 언제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타인에 의해 우리의 몸은 또한 몸으로 기능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세계속에 속한 우리의 몸은 또한 세계의 권력에 노출되어 끊임없이 유혹받으며 조종당한다. 바울은 개인의 몸은 너무나 연약하기에 언제나 공동체로서의 몸을 강조한다. (고전 12:14-26) 서로의 차이를 넘어 연대함으로 '한 몸'이 된 공동체는 세상의 불의와 대적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그러기에 바울의 구원은 매우 정치적이다. 우리의 공동체의 누군가가 슬픔에 빠져 있을때 그 공동체가 기뻐할 수 있을까? 한 몸의 아픔의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이의 아픔이 될때에야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설 수있을 것이다. 세월호의 비극이 자신의 비극이 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그저 슬퍼하며 위로하는 것으로 교회는 그 역할을 감당했다 할 수 없다. 몸은 세계의 한 부분이기에 그 비극이 일상이 되는 현장에서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는 세월호의 아이들이 부활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꽃과 같은 나이에 죽어간 그들이 아름다운 육신으로 다시 부활하여 그 몸을 가지고 기쁨과 행복을 다시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케제만의 바울에 의하면 그들의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정의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가는 교회에 오로지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일생을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데 바쳤다. 주님의 공동체가 그 빛을 잃는다면 그리스도의 소망도 빛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비추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부활을 소망을 안겨다 주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한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대의 교회에 준엄한 비판을 가하며 신자유주의로 물들어 새로운 희생자를 찾는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이 바로 그들의 부활을 이루어내는 일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며 종래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승리를 소망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원래 그 이전에 한스 콘첼만(Hans Conzelmann)이 한 말이다. [본문으로]
  2. Ernst Kasemann, Perspectives on Pau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1), 12–14. [본문으로]
  3. Ibid., 10. [본문으로]
  4. Ibid., 17. [본문으로]
  5. Ibid., 28.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Ibid., 31. [본문으로]
  8. Ernst Käsemann,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trans. W. J. Montague, New edition edition. (Philadelphia: Augsburg Fortress Publishing, 1979), 15. [본문으로]
  9. R. Barry Matlock, Unveiling the Apocalyptic Paul Pauls Int: Paul’s Interpreters and the Rhetoric of Criticism (Sheffield, England: Sheffield, 1996), 190. [본문으로]
  10. 물론 그 이후에 다시금 제2차, 제3차 역사적 예수연구가 미국학계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1. Käsemann,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98. [본문으로]
  12. Ibid., 105. [본문으로]
  13. Ibid., 171-172. [본문으로]
  14. Ibid., 178. [본문으로]
  15. Ibid., 181. [본문으로]
  16. Ibid., 126. [본문으로]
  17. Ibid., 207. [본문으로]
  18. Ibid., 134. [본문으로]
  19. Ibid., 1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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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0]

 바울과 종말론

바울과 신비주의 II (슈바이처의 바울신학)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나?

    지난 웹진에서 바울의 구원론(또는 칭의론)을 논함에 있어서 종말론적 긴장을 빼고서는 또는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신학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칭의론(Justification by Faith)과 바울의 율법론을 논할 것이다. 슈바이처는 종말론적 그리스도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현대 바울의 구원론을 수정하고 있다.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나타나있는 선택받은 자의 구할 것들이 있다. 일용할 양식(주의 만찬과 연관), 죄를 사함(세례, 구속), 유혹에서 벗어남(환난을 피함), 악에서 구원(종말론적 구원) 등이 그것이다. 여기 짧은 주기도문 안에 구원에 관한 4가지의 요소들이 함께 나옴을 볼 수 있다.[각주:1] 전통적인 묵시문학의 눈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려면 적어도 두 가지는 필수적인데, 하나는 예수가 선택 받은 자들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새로운 시대를 지배할 메시아여야 한다. 원래 묵시문학에는 속죄적 능력은 메시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보다는 선택 받은 자들의 믿음에 달려 있었다. 이는 제사전통과 예언전통 (특히 이사야서)의 대속적 제사장으로서의 모습에 메시아를 종합할 때 가능한 것이었고, 바울은 이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각주:2] 문제는 임박한 종말의 시대가 지연됨에 따라 원래는 “한 쌍이었던 속죄적 죽음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위한 죽음의 의미가 갈라지게 된 것이다.”(62) 

    그러므로 바울에게 속죄적 죽음에 대한 전승과 메시아니즘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속죄적 죽음은 이후 칭의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메시아니즘 또한 케노시스(자기비하: 자기를 비움)기독론 등으로 구체적인 윤리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각주:3] 하지만 속죄적 죽음의 기본적인 배경에는 종말사상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종말의 시대가 오면 하나님은 심부름꾼들에게 맡긴 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그 종말의 선언에는 유대의 율법 또한 포함되어 있다.(갈 4:1-11) 그러므로 율법에 복종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 된다는 뜻은 이미 끝나버린 세계의 군주에게 복종한다는 뜻이 된다. 즉,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바울이 율법을 반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슈바이처는 주장한다. 여기에서 슈바이처는 그 이후에 칭의론 논쟁을 낳았던 바울의 율법폐기론이나 새관점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간다. E.P. 샌더스, 제임스 던, 톰 라이트가 바울의 율법관이 율법적 공로주의가 아니라 계약적 율법주의라 보고 바울이 공격한 것이 유대 민족의 민족적 우월감이라거나, 선교적 전략이라거나, 전혀 다른 종교적 운동이라 함과는 달리 슈바이처는 바울신학의 종말론적 긴장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고 본다. 율법의 시대는 선택 받은 자들에게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 효과는 지속된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의 메시아 등극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울이 때로는 율법을 호되게 비판하고, 때로는 그 유용성을 인정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이유도 율법이 가지는 종말론적 긴장 때문인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는 율법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폐기론의 의미는 율법의 완전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보다 더 강한 자 곧 예수 앞에서 율법의 지배는 힘을 잃어 버림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율법아래 있는 인간이 있고, 그보다 더 강한 자의 권세아래 있는 자가 있다. (막 3:27) 하지만 이 종말론적 긴장을 엿가락처럼 늘여버리면 율법은 마치 좀비처럼 남아서 움직이는 죽은 자로써 남게 되고, 재림하지 않는 메시아의 자리를 하나님이 직접 채우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슈바이처는 이러한 바울의 율법관이 헬라의 이원론적 영지주의가 들어오게 되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말한다.[각주:4] 연약한 인간은 늘어진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달콤한 지혜의 열매를 먹고 육체가 없고 영만이 숨쉬는 삶을 살수 있다고 믿게 된다. 

    율법을 벗어버린 상태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더 강한 자 메시아에게 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메시아의 재림에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럼 그 빈 공간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어떻게 인간은 자신이 메시아 재림 시에 구원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율법없이, 유대교라는 테두리 없이. 슈바이처의 결론만 미리 말하자면 오직 하나다. Being-in-Christ. 이전 웹진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메시아 왕국으로 나아가는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세례로부터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 안에 (Being-in-Christ) 거하게 되는데 이는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문제는 바울이 이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 어떤 율법적인 언사도 쓸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율법은 필연적으로 행위(doing)에 그 초점을 맞추게 된다. 율법은 이러 저러 하게 하라는 법률을 통하여 공동체를 몸과 삶으로 느끼게 한다. 종말론적 공동체는 옛 시대 속에 불현듯 나타난 새로운 시대를 보는 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합일의 신비이다. 그래서 바울은 행함(Doing)의 반대말인 믿음(believ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각주:5] 가장 큰 이유는 히브리 성서(구약성서)에 이미 그 예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창 15, 하박국 2장 4절- 의인은 믿음으로 인해 살리라.) 문제는 여기서 믿음(faith)이 의(righteousness)를 얻는 길로써 오해되므로 구원이 마치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사건으로 오해될 때 일어난다. (219)

   어린 시절 주일학교로부터 우리는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라든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의를 얻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면 흔히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토록 혼동되는 ‘믿음’이라는 표현, 과연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공로주의인가? 아니면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순수한 의식적 상태일까? 슈바이처는 이를 단지 바울이 율법적 표현을 피하기 위해 쓴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각주:6] 종말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는 메시아로써 세상에 왔다.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불현듯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부활한다. 바울은 부활의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의미를 고찰한다. 바로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이므로 속죄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고 죽음과 부활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구원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부활이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근본적인 속죄와 칭의가 예수가 새로운 육체로 부활했음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육체는 죄와 사망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법의 영역에 속하여 있으므로 진정한 의로움과 구원의 가능성이 예수의 부활에 의하여 명확해졌다. 그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목표로 한 것이다.[각주:7] 슈바이처가 바울에게 예수의 죽음의 속죄적 효과를 믿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의 공동체가 예수가 걸었던 희생을 내면화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믿음이 행위로 구현되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라 슈바이처는 말한다.[각주:8] 그러나 이러한 칭의론은 바울의 신비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일 뿐 그 뿌리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바울에게 칭의론은 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의 지지 논리 (Support Statements)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각주:9] 필자는 이에 동의하는데,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 등도 바울의 칭의론이 바울의 서신에서 율법적 칭의를 반박하는 데에 사용될 뿐, 그의 신학의 중심이라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칭의에 대한 슈바이처의 결론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주의 전통에 따라 예수의 죽음이 대속의 효과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 육의 지배를 벗어나 영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아니라 Being-In-Christ가 바로 구원과 칭의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육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데에 있다. 거룩한 율법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동시에 유대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이미 율법이전에 존재하면서 율법 안에 숨겨져 있는 단어인 ‘믿음’이라는 표현을 이용하여 이른바 율법주의적 종교를 비판적으로 수용/극복했다는 것이다.[각주:10] 슈바이처는 바울이 논리적 구원론을 쓰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의 신학의 정수가 종말론과 신비주의인데 이를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에게 ‘믿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앙의 자세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각주:11] 비극은 바울의 믿음을 개인적이고도 독립적인 것으로 바꾸어 칭의론을 구성한 데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한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주고받는 거래처럼 그려진다.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순수한 영적 거래와 같은 논리가 오히려 공동체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바울의 신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슈바이처는 비판한다.[각주:12]

   

바울신학의 쟁점과 현대적 의미

  1) 성례전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전 장에서 개신교의 핵심으로 부상했던 칭의론이나 성령론 등이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다루어져야 함을 보았고 정작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어떻게 개인이 구원을 받느냐가 아니라 옛 것이 지나고 새것이 시작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였다. 그렇기에 슈바이처는 바울 신학의 핵심은 칭의론이 아니라 성례전과 윤리학이라고 말하는듯하다. 슈바이처는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를 설명하고, 칭의론이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에 지지담론임을 밝힌 다음, 그의 저서의 마지막 두 장을 할애하여 성례전과 윤리에 대하여 논한다. 이제는 신약신학의 주변담론이 되어버린 성례전과 윤리를 다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성례전이라 하면 카톨릭교회에서 활발히 연구되었던 주제였다. 개인의 결단과 신앙을 강조하는 개신교 전통 이전의 카톨릭 교회는 사제가 행하는 성례전 (세례식, 성찬식 등)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례는 더 이상 개인의 믿음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유아세례라는 방식까지 허용되게 되었다. (복잡한 이유로 현재의 개신교회도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슈바이처 당시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유대주의 전통에는 성례전이 없다는 것이었다.[각주:13] 그도 그럴 것이 성례전에는 신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유대주의에 카발라라는 독특한 신비주의 전통이 있지만 율법적 공통체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게 보통의 고등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과의 교통을 뜻하는 성례전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의 합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경이다. 결국 많은 학자들이 성례전적 전통은 헬라니즘에서 시작되어 기독교에 흡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이후로 신학적 담론이 헬라적 우주론으로 재편되면서 성례전은 신과 교통하는 신비주의적 심볼(Symbol)의 의미를 띄게 된다.(필자의 공부가 부족하여 슈바이처가 말하는 심볼리즘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폴 틸리히가 말한 심볼리즘의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기호, 언어, 모양, 형태도 심볼이 될 수 있는데, 심볼이 하는 일은 바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신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심볼에는 죽음 심볼과 살아있는 심볼들이 있는데 로마의 신전의 신들의 동상이 죽음 심볼에 해당할 것이다.) 

    슈바이처는 전통적인 성례전 이해에 반기를 들고 유대주의적 배경에서 성례전을 이해하고자 한다. 비록 고고학적 연구의 한계가 있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나 쿰란 공동체의 공동체에 입회하기 위한 목욕의식 등은 종말론적 공동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성례전적 행위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슈바이처는 바울이 이러한 유대 전통의 몸 씻음과 주의만찬을 바울이 받아들여 그의 신비주의에 통합시켰다고 말한다.[각주:14]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만찬의 전통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중세에 와서 화체설이다. 아니다 여러 논쟁이 있었고, 보통 루터와 칼빈의 성만찬 이해 등이 성례전 연구에 중요한 분량을 차지 하지만, 슈바이처의 질문은 간단하다. 어떻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주의 만찬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그 당시에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에 대한 신비적 유비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대답은 간단하고도 단순하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공동체가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식탁 공동체를 발전시켰다면 그 이유는 메시아적 축제 (Messianic Feast)를 반복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를 기다리며 그의 부활을 축하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의 만찬이 다른 종교전통에서 옮겨운 것이 아니라 바로 유대의 종말론적 전통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각주:15] 그러므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참여하는 만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 속에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각주:16] 종말의 시대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방법,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이야기하는 세례와 주의만찬이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2) 윤리

    흔희들 윤리나 윤리학이라고 하면, 착하게 사는 또는 올바르게 사는 방법 정도로 생각하거나 정의가 무엇이고 선(The Good)이 무엇인지 묻는 학문으로 본다. 만약에 바울의 윤리를 바울이 생각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법이라고 한다면 슈바이처는 이것이야말로 바울 신학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보통의 칭의론이나 구원론에서 시작한다면 윤리학의 시작은 회개로 시작해서 회개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구원에 대한 개인의 확신과 변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연히 관심은 ‘회개’라는 특정한 변화에 쏠리게 된다. 그러나 칭의론의 생산자인 바울은 좀처럼 ‘회개’란 말을 쓰지 않는다. 공동체와 삶 자체에 관심을 가지면 삶 자체가 윤리를 포괄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비주의 (Being-in-Christ)에 비추어 보면 윤리란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함 자체이다. 바울의 윤리는 회개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자체가 아니었던가 (갈 5:22).[각주:17] 

    슈바이처는 바울이 관심 없었던 주제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바로 바울이 칭의론의 구원과 그의 윤리론을 연결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둘을 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 연결시켜 버리면 바울의 윤리론은 율법주의가 되어버린다. 바로 이러한 우를 범했던 것이 복음주의적 개신교회가 아닐까?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에서는 윤리가 바로 구원의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성도가 어찌 완전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의 윤리가 그의 구원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완전한 새시대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각주:18] 온전한 하나님의 시대가 시작되지 않았기에 바울은 그의 신학에서 세가지 요소를 앞에 둔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 사랑이 가장 최고의 덕목이 되고 그의 윤리의 핵심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과 소망은 온전함이 오면 사라질 것들이다.[각주:19] 오직 사랑만이, 아직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언젠가 마지막 나라에는 완전해 지는것,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 그 사랑은 이미 예수의 산상설교에 나타나 있는 것이며 그 완전한 형상은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만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쯤 되면 왜 저명한 신학자이자, 음악가이자, 의사인 슈바이처가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원한 것, 바울이 말한 사랑을 담고 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슈바이처는 바울의 가장 큰 업적은 윤리적 삶이야 말로 성령과 연합하는 삶임을 정의하고 사랑이야 말로 성령의 가장 높은 현전의 상태라고 본 것이다.[각주:20] 지금이야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윤리-성령-사랑을 연결시키는 것은 엄청난 신학적 상상력과 세계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랑이 최고라면 타종교나 철학에도 그러한 가르침이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슈바이처는 친절하게도 이에 직접 답한다. 바울의 윤리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그의 윤리가 종말론적 기대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사랑의 윤리가 필연적으로 메시아 그리스도의 삶과 영에 연합될 때 구체화 됨을 뜻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특이성(Singularity)을 불어넣음으로써 종말의 시대에 완전함으로 달려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영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런 바울의 사랑을 보편적 의미로 바꾸려 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적어도 바울신학에게는 그렇다. 또한 바울이 사랑이 의미하는 종말론적 긴장을 제거하고 구원의 특이성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실수이다.  다원화 시대의 종교다원주의적 담론이나 칭의론에 치우친 복음주의적 담론이 바울의 종말론을 잊어버리면 범하는 우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 신비주의의 헬레니즘화

    헬레니즘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와 신학에 여러 자취를 남겼고 이에 대해서는 끝없는 역사적 해석이 있을 것이다. 슈바이처에게는 아마 헬레니즘적 영향이 반갑지 않았을 것인데, 헬레니즘은 종말론적 긴장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기독교안으로 들어와서 바울의 종말론적 긴장과 신비주의를 헬레니즘적 이원론이나 영지주의적 구원론으로 덧칠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바울의 그리스도적 신비주의는 종말론적 메시아주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종말론적 긴장이 사라지면서 예수의 인격자체에 구원의 확실성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각주:21] 곧 새 시대와 완전한 사랑을 믿는 신앙이 예수라는 개인을 믿는 신앙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원래 예수의 중요성은 종말론적 신앙의 효용성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인데 말이다.[각주:22] 이미 헬레니즘의 유입을 슈바이처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의 개념을 포기한 헬라화된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의미하는 삶의 의미를 집어던지게 되었고, 이후 헬라화된 기독교가 윤리적 가치와 영적 의미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각주:23]


ⓒ 웹진 <제3시대>



  1. Albert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 60–61. [본문으로]
  2. Ibid., 63. [본문으로]
  3. Ibid., 64. [본문으로]
  4. Ibid., 73. [본문으로]
  5. Ibid., 207.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Ibid., 222. [본문으로]
  8. Ibid., 218. [본문으로]
  9. Ibid., 220–221. [본문으로]
  10. Ibid., 225. [본문으로]
  11. 여기에서 필자는 시카고신학교의 테오도르 제닝스 교수의 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피스티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믿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고 ‘loyalty’라고 번역한다. 또한 의를 ‘righteousness’가 아니라 ‘justice’라고 번역한다. [본문으로]
  12.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220. [본문으로]
  13. Ibid., 227.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248. [본문으로]
  16. Ibid., 271. [본문으로]
  17. Ibid., 294. [본문으로]
  18. Ibid., 301. [본문으로]
  19. Ibid., 306. [본문으로]
  20. Ibid., 309. [본문으로]
  21. Ibid., 335.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3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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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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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6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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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9]

 바울과 종말론

바울과 신비주의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보통 찬양집회나 기도회에서 흔히들 하는 기도를 들어보면 “주님 우리는 새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듣게 된다. 현실의 삶에서 여전히 세상의 원칙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기도는 마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자체가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이리도 더디게 변할까? 오히려 더 나빠지는것 처럼 보일까? 왜 우리는 의롭게 되지 못할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인침을 얻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왜 아무런 변화도 느낄수 없을까? 필자는 중학교 시절 여름 수련회를 다녀오면 마치 몇일의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것을 느끼면서 믿음을 통해 나의 존재안의 신비로운 변화에 대해 의심한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도사님마다 목사님마다 제각각이었다. 그 변화가 천천히 일어남으로 잘 모를수 있다는 말부터 그때 받은 성령이 제대로 된 성령이 아니었다는 말까지. 필자는 이 웹진에서 이 질문을 해결하려 하진 않는다. 다만 바울의 신학을 논하면서 바울이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를 생각해보자.

20세기에 위대한 위인으로 우뚝 솓아있는 의사이자, 음악가이자,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스스로를 바친 알버트 슈바이쩌는 이러한 신비적 신앙이 바울을 오해해서 생긴것이라 말한 학자이다. 그는 Being-in-Christ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적 신비주의가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그 핵심은 오로지 종말론에 대한 이해로부터 접근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바울신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곤 한다.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바울신학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집이 토대로 하고 있는 기초가 무엇인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그 기초에 대해 이야기 할때, 학자들이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라비닉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 사이에서 오랜동안 논쟁해 왔고, 각기 다른 구원론이나 기독론을 생산하였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라고도 했다. 또는 로마제국의 정치라고도 하였다. 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겠지만 필자가 지금부터 소개하려 하는 것은 바울신학의 확실한 기초, 또는 동인은 바로 종말론 (Eschatology)라는 시각이다.

종말론이라는 말을 들은 독자는 “뭐 종말론이 어쩼다고?”라고 하고 쉽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각 변화는 종래의 바울 신학의 근간을 흔들정도로 크다. 일단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에 큰 관심이 없다. “예수님이 곧 오십니다!”라고 종종 말하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 같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세대에 예수의 재림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만약에 정말로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면 일단 다음 세대에 대한 투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현실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세상을 떠들섞하게 하고 있는 말세론자들 이외에는 그러지 않는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점점 현실적 삶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어갔다. 그것을 타협이라할 수도 있고 변절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로 교회와 신약신학에서 현실적 종말론은 오랫동안 심각하게 다루어 지지 않았다. 칭의라든가 구원이라든가 교회라는 주제들은 쉬지 않고 줄기차게 다루어 지지만 종말론은 요한 계시록 연구 정도나 전도 부흥회의 하루 프로그램을 장식할 뿐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각주:1] 그러나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바로 내일 올지도 모를, 또는 자꾸만 연기되어가는 재림을 기다리는 긴장가운데서 하루 하루를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러한 생각이 그들의 삶과 신학에 끼친 영향을 우리가 간과할 수 있을까? 재림에 대한 믿음 하나은 때로는 교회의 교리를 송두리채 바뀌고, 온순한 사람들조차 생명을 아끼지 않는 순교자로 변모시키는데, 종말론에 대한 숙고 없이 우리가 신약성서를 또는 바울서신을 재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종말론에서 부터, 종말론에 의해, 종말론을 통해 바울 서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하나의 체계적인 해답을 거의 최초로 제시한 신약학자가 바로 알버트 슈바이쳐이다.

슈바이처를 신약학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신약신학도들에게 슈바이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지워질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위대한 통찰이었다. 당시의 예수를 인류 역사의 혁명가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연구해야할 인물로 보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서 예수를 종말의 시대의 예언자이며 메시아 왕국을 더 빨리 오게 하기 위해 자신을 역사의 수레바퀴에 던진 인물이었다고 슈바이처는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의 영향력은 그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묘사보다는 당시 자유주의적 예수연구에 대한 준엄한 일침에 이었는데, 그 이후로 예수를 일반적 위인으로 그리거나 위대한 사회주의자로 서술하는 경향에 마침표를 찍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그리는 이들은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나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그릴뿐이라는 위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그의 바울에 대한 연구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선교사역중에 안식년을 받아 독일로 돌아와 ‘바울과 신비주의’를 저술하였는데 보통은 바울을 종말론적 지평에서 서술한 첫번째 저작으로 소개될뿐이었다. 그의 ‘바울과 신비주의’라는 저작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연구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향이 있다. 첫째로 유대교적 종말론에 중점을 두는 그의 연구가 당시의 헬레니즘을 중심으로 바울을 연구하던 경향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개신교 바울신학이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연구에 매몰된 나머지 칭의론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보지 않는 슈바이쳐의 저작을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번 글에서는 슈바이쳐의 저작을 중심으로 종말론을 통해 바울의 저작을 새롭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슈바이처의 통찰이 상당히 설득력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 과 종말론(Eschatology)

보통 요한계시록 또는 요한묵시록으로 대표되는 세계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위주의 다큐멘타리들의 단골 소재이다. 사탄이나 세계종말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성서는 주요 자료로 쓰여지고 보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는 실제 종말의 시기에 대한 추측이 주요 논쟁의 쟁점이 되기도 한다. 슈바이쳐와 바울의 종말론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 간단히 성서학에서 말하여지는 종말론이나 묵시문학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자.

종말론(Eschatology)은 끝을 뜻하는 헬라어 에스카톤(Eschaton)과 지혜나 지식을 뜻하는 (logos)로 부터 나온  로지(logy)의 합성어로써 역사의 종말에 대하 논하는 학문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마치 크리스토로지(Christ+logy)가 ‘기독론’또는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하는 학문인 것과 같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당신의 역사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생각이 어떻든 어느정도 논리적으로 생각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종말론이된다. 이 ‘종말론’이라는 것이 성서와 연결되는 이유는 성서에서 인류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말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굳이 성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상당히 넓은 학문이다. 그 논의중에 성서와 연결시킬때 종말론과 성서간의 연결점이 생겨난다.

성서를 펴고 세계 종말에 대한 말들을 찾아보면 바로 눈의 띄는 것이 있는데, 그 구절들은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복음서들에 몇몇 구절들 바울서신들에서도 몇몇 구절들이 보인다.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고백과 기록이고 바울서신은 바울이 썼던 편지들이고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구절은 극히 일부이며 그 묘사도 단편적인 서술에 그치므로 복음서는 복음서로 부르고 바울서신은 그야말로 편지라고 부르지만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는 세계종말에 대한 나름 역사적이고 전체적인 서술이 보이는바, 이 둘을 묵시문학(Apocalyptics Literature)이라고 부르고 이를 하나의 문학적 장르로 구분한다. 시의 형식을 가진 글을 시라고 부르고, 소설의 형식을 가진 글을 우리가 소설로 부르듯이 인간의 글을 근대에 들어와서 여러 형식으로 분류하고 그 형식에 따라 이름짓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존 콜린스 (John J. Collins)로 대표되는 묵시문학 연구집단은 묵시문학이라는 하나의 형식적 장르를 만들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이라 불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당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적었던 사람이나 사람들은 세계종말에 대해 말하고 기록한 어떤 전통과 형식에 따라 둘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곧, 유대주의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안에 종말에 대해 서술하고 발전시켰던 전통(마치 예언 전통이나 지혜 전통과 같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문학 장르를 하나의 구성된 문학적 흐름으로 보는 사람들은 묵시문학을 읽는 형식화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치 우리가 시를 읽을때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확립하고 찾아보면 성서 이외에 외경과 위경에 묵시문학이라고 볼 수 있는 글들이 있는데 보통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1 (Ethiopic Apocalypse of) Enoch, 2 (Slavonic Apocalypse of) Enoch, Sibylline Oracles, 
Treatise of Shem, Apocryphon of Ezekiel, Apocalypse of Zephaniah, The Fourth Book of Ezra, Greek Apocalypse of Ezra, Vision of Ezra, Questions of Ezra, 
Revelation of Ezra, 
Apocalypse of Sedrach
, 2 (Syriac Apocalypse of) Baruch, 3 (Greek Apocalypse of) Baruch, Apocalypse of Abraham, Apocalypse of Adam, Apocalypse of Elijah, Apocalypse of Daniel.-[각주:2] 그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과 함께 앞에 언급된 글들을 모두 묶어서 묵시문학이라 한다. 묵시 또는 묵시록(apocalypse)으로 번역할 수 있는 Apocalypse는 성서학에서는 보통 묵시문학과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 그리고 묵시사상(Apocalypticism)은 세계 종말에 대한 관점으로 시작하는 세계관이나 생각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묵시문학의 근원이나 형식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묵시문학이 성서학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구약성서 또는 히브리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겪은 길고 긴 식민지 시대였다. 이전까지 유대국가들의 기둥역할을 하였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전통과 그 대척점의 예언전통, 그리고 왕정시대의 역사를 기록했던 신명기사가등의 역사서술 전통과 왕국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지혜전통의 시대가 국가의 몰락과 함께 끝이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혜전통의 민초들의 삶의 지혜로, 예언전통등과 함께 작게나마 명맥을 유지했다.) 끝나지 않는 식민시대와 오지 않는 다윗왕국의 부흥에 지쳐갈 무렵, 새로운 종교 전통이 유대사상안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심판과 함께 불현듯 세계밖에서 온다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묵시전통이라 불리게 된 유대정신사에 새로운 계기가 된 이것은 종말론이라 불리우는 역사의 끝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전가지의 유대 전통속에서 생산되어온 신학들은 이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되게 되었다. 중요한 몇가지만 살펴보자.

이전까지의 유대전통은 인간 사회와 현실적 상황에 대하여 민감했을뿐 아니라 정력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언전통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정의에 대해 준엄한 비판의 메세지를 생산하였다. 지혜전통은 나름대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법칙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이에 반해 묵시전통은 현실세계를 곧 하나님의 심판속에 사라질 곳으로 여긴다. 현실 정치와 그 위정자들은 심판의 대상이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대상인듯 보인다. 사회의 정의보다는 과연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적 묵시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다미선교회 사건을 생각해 보면 묵시전통이 가지는 부작용을 좀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묵시전통이야말로 기독교에 폭팔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위대한 종교적 운동이자 현대사회와 기독교에서 반드시 기억되고 새롭게 논해져야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와 묵시전통과 종말론을 통한 현대 기독교 갱신의 문제를 천천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지금은 알버트 슈바이처와 함께.


바울의 신비주의와 종말론

신비주의(Mysticism)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보통 ‘초월적 실재와 하나되는 즉각적인 체험’이라고 나와있다. (브리테니커 참조) 흔히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하면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삼층천의 체험등을 언급될뿐 신비주의는 바울에게는 조금은 생경한 주제이다. 슈바이쳐가 바울의 신비주의를 언급할때, 초월적 실재인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슈바이쳐는 명확한데, 그는 바울의 신비주의는 Being-In-Christ라고 말한다. 다른 표현으로 Christ-Mysticism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의 서신을 읽다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자들의 관계가 자주 앤(en-헬라어)/in(영어)의 표현으로 자주 등장한다. In Christ, 예수 안에서 라는 바울이 즐겨 표현하는 말은 구원에 대한 논증에서 부터 믿는자의 실제 생활에 대한 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보통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믿는자가 참여한다는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붙이는 경우가 많지만 슈바이쳐는 바울이 직접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안에 연합된다는 표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적 경험”을 느낀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기에 슈바이처가 보는 바울에게는 헬라적인 신비주의의 자리는 없다. 보통 헬레니즘에서 부활은 재생(rebirth)으로 해석된다. 헬라세계의 신화에서 부활은 흔히 죽고난 후에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보통 기독교에서 중생이라고 표현되며 요한복음의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속에 나타난 ‘불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한다. 비록 요한복음에서는 헬라적 표현으로 중생의 개념이 나오지만 슈바이쳐는 바울에게는 믿는자의 중생은 없다고 말한다.[각주:4] 적어도 바울에게는 성령을 받으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생거짓말이라는 말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선행을 위한 무능력을 토로하듯이 인간의 신성화(deification)는 바울에게는 낯선 개념이며,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세례의 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각주:5]

이러한 바울의 신비주의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슈바이쳐는 그의 신학 저서에서 예수와 바울을 헬라적 종교관과 세계관으로 해석하던 당시 독일 신약신학계를 통렬히 비판한다. 예수와 바울은 온전히 유대적 세계관에서, 특별히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보편적인 종교개념과 역사관으로 예수를 우주적 정의와 사랑을 외친 혁명가나 현자로 그리고 바울을 그런 예수의 가르침을 고등종교의 형태와 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으로 보던 당시의 연구가 가지는 한계가 슈바이쳐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보였다. 헬레니즘적 심볼리즘에 치우친 기독교 신비주의는 개신교에 두가지 성례전, 세례와 성만찬을 형식적 종교제의로 변모시켰다. 원래 바울에게는 이 두개의 성례전은 예수와 함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유일한 통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볼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성례전은 마술과도 같은 효과를 보장한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 죄의 사함을 얻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예수의 몸과 피와 연합한다. 이는 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에 참여함으로 인간은 신의 영역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신앙의 목적은 불멸의 삶이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불멸의 삶이 신앙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각주:6] 필연적으로 윤리적 관점은 뒷전이된다.

바울의 신학은 어떻게 불멸의 삶을 얻을 것이냐?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의 관심은 새롭게 변화되는 세계내에서 살아가는 믿는자의 운명이다.[각주:7] 세례는 이제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들어간다는 시작을 의미할뿐, 그것 자체가 가지는 마술적 효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들어간다는 세례식을 시작으로 믿는자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데, 바울은 서신을 통해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첫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세력의 시대가 끝이났다. 곧 종말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묵시문학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사탄의 세력인데 그들에게는 무저갱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이제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의 죽음은 그와 연합하여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주었다. 셋째, 이제 믿는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선택받은 자로써 마지막 메시아가 통치하는 제국의 수혜자가 된다.[각주:8] 이러한 변화 이후에 곧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되고 선택받은 자들은 메시아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울의 서신을 살펴보면 바울은 예수가 금방이라도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살전 1:10, 2:19, 3:13, 4:23) 비록 학자들이 후대의 바울서신에 지연된 종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고 하지만 바울이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재림을 의심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각주:9] 그러므로, 슈바이처는 바울이 말했던 여러 주제들은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종말의 시대, 곧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시대적 배경을 통하여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교리,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조차도 종말론적 지평에서 읽어야 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와 구원론

보통 “구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확신이나 하나님앞에서 부끄럽지만 의인으로 바로선 자기 확신정도의 대답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시한부종말론자들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물으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구원은 아마도 이 세계가 끝장이나고 맞이하는 영광의 시대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바울의 구원론이 현재에서 오해되는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슈바이처는 생각했다.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구원이란 메시아 왕국의 시작을 뜻한다. 이는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거래가 아니다.[각주:10]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는 죽음과 고통의 시대만이 아니라 앙겔로스(angel)의 시대이다. 여기서 앙겔로스는 흔히 영어로 angel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천사’로 다시금 이해되지만 원래 헬라어 ‘앙겔로스’의 의미는 메신저, 또는 심부름꾼을 뜻한다.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하나님의 심판이전의 시대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에녹서에 따르면 창세기 4장 전반에 나타난 천사들의 반란은 금세 진압되었지만 그들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악마 (Demon)들이 세상의 골칫덩이로 남게 되는데 그들의 왕인 사탄(Satan-디아볼로스)은 인간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자로써 하나님에게 심판날까지 세상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게 된다. 사탄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는 시기가 바로 메시아가 나타나는 시기이며 바로 구원의 시대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 가지는 첫번째 의미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로이 시작된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기록을 보면 메시아 왕국의 시작 이전에 환난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 환난의 시대에서 믿는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감내함으로 그들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데, 바로 그 믿는자가 받아야할 고난을 대표하여 죽은자가 바로 예수이다.[각주:11] 바울의 이러한 해석에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두개의 전승, 속죄적 죽음에 대한 제사전승(고전 15:2)과 메시아니즘(롬 1:4, 빌 2:8-11),을 종말론적 지평아래에서 종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즉, 곧 도래할 메시아 왕국을 위해 예수는 죽음으로 환난의 시대의 고난을 대신 지고 부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것이다. 결국, 바울에게 구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선택받은 자들이 하루 하루 이루어 가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의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울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보통 대충 넘어가는 바울의 윤리적 권고나 믿는자에 대한 충고들이 바울서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긴장을 바울을 신학에서 제거해 버릴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바로 믿음만을 부르짖는 신앙이고 윤리를 강조함을 율법적으로 비판하는 복음이다. 현대 기독교의 도덕적 타락을 근본적으로 논의 하려면 바울신학에서 종말론을 제하여 버린 신학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신칭의?는 율법페기론은? 루터가 말했듯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바울의 목소리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다음 원고에서 슈바이쳐가 종말론적 지평을 가지고 이제껏 개신교회들이 금과옥조로 섬겨왔던 구원론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로 하자.  

Charlesworth, James 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Apocalyptic Literature and Testaments. 1 edition. Garden City, N.Y: Doubleday & Company, 1983.

Schweitzer, Albert.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


ⓒ 웹진 <제3시대>



  1. 소위, ‘위기의 신학’으로 불리는 몰트만의 신학이나 불트만의 제자인 케제만등이 종말론적 신학과 신약신학을 말하였고, 두번의 세계대전이나 밀레니엄의 때에 종말론이 자주 언급되긴 하였지만 신약을 이루는 중요 주제로써 꾸준히 다루어지거나 조명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본문으로]
  2. Charleswort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4. [본문으로]
  3.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16. [본문으로]
  4. Ibid., 15. [본문으로]
  5. Ibid., 17. [본문으로]
  6. Ibid., 23.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Ibid., 25. [본문으로]
  9.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 로마서는 율법에 관한 논쟁이 주를 이루지만 여전히 종말론적 믿음이 보여진다. (갈라디아서 1:4, 4:10; 고린도전서 7:29;31, 10:11, 6:3, 3:13-15, 11:26, 26:22 고린도후서 1:14, 5:10, 11:2; 로마서 8:19;11;12, 16:20; 빌립보서 1:6, 1:10, 2:10, 3:20-22, 4:1-5) [본문으로]
  10.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54. [본문으로]
  11. Ibid.,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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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8]

바울신학과 탈식민주의III

- 탈식민주의, 바울, 그리고 여성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필자가 다니는 CTS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을 가르치는 수잔 띠쓸트웨잇 (Susan Thistlethwaite) 교수는 신학교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자중의 한명이다. UN이나 각종 세계 평화회의에 주요 패널로 참석하기도하고 정치권이나 각종 TV 토론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비친다. 교회의 각종 강연에서 진보적 신학의 필요성과 여성의 관점에서 교회의 복음등이 재해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녀가 이야기 해준 여러 재미있고도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본다. 어느날 교회에서 강연하던 중 어느 한 화난 여성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뜨쓸트웨잇 교수의 강의에 화가 났는디 일어나서 열심히 성서는 그런식으로 읽혀져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방식으로 그렇게 재단하면 안된다는 흔하다면 흔한 그러나 쉽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녀에게 답한 띠쓸트웨잇 교수의 말 “그래요? 그럼 제가 당신이 원하는 방식인 성경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거기 여성분! 입 다무시고 앉으세요!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입니다.” 좀 심하다 싶지만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성스럽게 생각하는 성서가 얼마나 여성차별적인 시각에서 쓰여졌는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오늘 탈식민주의와 바울이라는 주제를 마치면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여성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관계, 그리고 여성의 관점으로 본 성서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문제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할 것이다. 어렵지 않은 표현과 정보들로 되도록이면 독자들이 간단하게나마 탈식민주의와 여성신학이란 주제에 익숙해 지게 하기 위한 글이 될 것이니,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래에 소개하는 몇가지 텍스트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흔히들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남성들에게 권하는 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등이 있고, 유튜브에 찾다보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유머와 위트가 있는 동영상들도 있다. <화성에서…>라는 책을 전체 일독한 것은 아니지만 몇페이지를 넘기며 내가 생각한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어쩌면 당연한 듯 생각하는 지식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마치 푸코의 담론이론처럼, 그리고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연구에서 서구인들이 중동과 아시아에 대해 가진 생각들과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현대의 여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을 조사한다. 그 특징들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언뜻 합리적인 방법인것 같지만 여성을 어떻게 연구하고, 묘사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연구 자체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해보진 않았으나, 여성이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꽤나 근대적인 관심일 것이다. 물론 그 연구를 시작한 것은 남성일 것이다. 여기서 남성이란 생물학적 남자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생물한적 여자또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꽤나 남성적 가치나 판단등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마치 서구인들이 동양인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에서 열등한 존재로 치부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존재는 연구를 통해 여러가지 관점에서 열등한 존재로 보이게 된다. 여성의 감정적이고도 섬세한 성격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아주 제한적인 능력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여성은 감정적이고 섬세하다고 하였나? 오히려 여성은 그런 존재라는 사회적 통념을 충실하게 흡수하여 자라난 존재들이 여성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여성에 대해 이야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상황과 담론들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여성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 풍부한 자료들은 없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등의 저작을 보면 남성과 여성은 절대 두 극을 형성하는 대등한 존재들이거나 상하관계의 두 개채를 뜻하지는 않는다.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라는 눈에 보이는 차이는 존재하지만 고대 헬라 사회의 유일한 판단의 기준은 남성성(Masculinity)의 유무이다. 얼마나 마초적이냐를 기준으로 남성성의 상징인 영웅과 전사가 가장 상위이고 가장 남성성이 없는 여자가 최하위이다. 이는 만약에 여자라 할지라도 남성성을 많이 가졌다면 여성적 남자보다 상위에 설수 있음을 뜻한다. 즉 여성은 남성성의 부재를 뜻하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인식체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상황이다 보니 바울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라고 하거나 예수가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논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권주의신장이라는 말은 여성이라는 의미에 대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는 여성을 바라볼때 탈식민주의에서 말해왔던 ‘타자화’라든가 ‘재현’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탈식민주의의 쟁점들을 활용하여 여성을 라볼때 더욱 심도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Can the Subaltern Speak?

   스파박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짧은 논문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연구에 경종을 울린 기념비적 작품이다. 원래 서발턴 (Subaltern)은 그람시의 글에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the other(altern) 보다 더 아래 (sub)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인도에는 서발턴 스터디 그룹들이 있는데 그들은 영국 아래의 식민지 생활동안 계속된 저항운동에서 나타난 서구의 근대적 담론에 대항하는 고유의 대항담론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스파박이 던진 질문은 식민지시대하에서 그리고 탈식민지시대하에서 진정한 서발턴들은 바로 여성들이며 그들의 정치적 행동이나 목소리들은 언제나 오해되고 이용된다는 것 이었다. 어쩌면 서발턴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들리워지지 않는다. 한국의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짧다면 짧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은 국가의 독립이라는 대의 명분아래 그들의 삶을 희생했다. 광복 이후로 계속된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로 기록되어졌다.  유관순은 그런 예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태극기를 들고 일어선 젊은 여성이라는 아이콘은 민족애라는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장치이지만 거기에 내재한 여성성은 정치적 주체라기 보다는 민족적 감흥을 자극하기 위한 기폭제로만 사용되고 이내 사라진다. 노동운동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고 사라져간, 그리고 저항한 그들이 그려지는 것은 젊은 대학생의 혈기를 끌어올리거나 교과서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이 참으로 원하는 것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은 얼마나 관심이 있어왔을까?
   우리의 교회를 보자. 필자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무렵, 필자보다 똑똑하고 열심인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랬던 그들은 지금은 목사의 사모들로 조그만 교회의 목사들로 헌신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숨기고 교인들의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으로 목사를 돕는 도우미로 살아간다. 돈이 없다고 불평하면 믿음이 없는 사모가 되고 가정형편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할려고 치면 사모가 바깥으로 돈다는 불평의 목소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한 불평을 하는 사람들중의 많은 이들이 또한 같은 여성신도들이다. 수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며 자신의 시간을 들여 헌신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남성 목회자들의 그림자를 자처해야하는 지금의 상황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문제를 들여다보는 작은 단편일 뿐이다. 근대화의 발전과 민주정치의 발전의 그림자에서 언제나 어둠속에 있어야 하는 인간의 개체수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은 그러기에 진정한 서발턴 들이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서발턴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여성들 중에서도 상위 3% 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유색인종들에 비해 언제나 상위를 차지한 백인 여성들도 있으며, 선진국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차별과 많은 기회를 확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탈식민주의는 여성의 문제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의 복잡한 고리들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러한 생각의 방식이 성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바울서신, 그 복잡한 여성과의 관계

   이제 신약성서로, 또한 바울서신으로 들어가보자. 먼저 바울 서신에서 여성에 대한 논쟁은 여성학적 성서해석이 시작된 이후로 계속 되었는데,  바울은 과연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또는 바울은 여성 차별주의자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혹자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출산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성의 지위를 국한 시키는 것을 가르쳐 바울은 여성차별론자임을 강조하고, 또 다른편에서는 본문은 후대의 첨가를 가능성이 많고 바울이 서신에 여성 지도자들을 로마서와 빌립보서에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진보한 사상을 가진 남녀차별철패론자로 본다. 시대가 더함에 따라 논쟁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왔다가도 변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연구들을 계속 읽다보면 바울에 대해 궁금한 것이라기 보다는 연구자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연구를 거듭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슈바이쩌가 그의 유명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굴해내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하고 난후, 그려낸 예수는 바로 연구자 자신의 얼굴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에 반해 탈식민주의 성서읽기는 해석의 스포트라이트를 바울에 맞추기를 거부한다. 성서의 시대의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성서라는 텍스트는 여성들을 바라보기 위한 통로의 구실을 한다. 당시의 여성들의 모습이 문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않고 여러 복잡다단한 거미줄과 같은 그물망으로 가려져 있기에 하나, 하나 그 그물망을 그러내어 그 안에서 여성을 재발견해내야 한다. 아마도 그러한 복잡다단한 연구를 하는 이유는 당시의 여성의 모습속에 드러난 기독교 신앙과 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러한 연구가 기독교 신학에 기여할 수 있는지 짧게 나마 논해보자.
   성서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문자화되어 기록된 것이라는 표현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축자영감을 따른다면 글자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서 자체가 직접계시라는 말이 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경험을 통해 여러 형태의 문명적 결과물과 조화되어, 언어를 통해 기록된 것이 성서라고 생각한다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그 안의 인간의 경험물들을 이해해 가느냐가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기록은 그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 언어속에 들어있는 바울의 고뇌와 체험을 이해할 때만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려 몸무림친 바울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1세기의 신앙인들의 기록이 신약성서에 담겨있고, 가장 예수와 지근 거리에 있었던 그들의 삶을 이해할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다시금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자, 이제 당시의 여성들에게 눈을 돌려보자.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했던, 그저 한 집안이나 개인의 사유재산 정도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바로 여성들이었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사회의 불의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구원은 어떤 의미였을까? 구약의 히브리 백성의 신앙의 시작이 노예생활로 부터의 탈출이었다면, 신약의 여성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어떤 의미였을까? 그 해답의 단초는 오로지 성서라는 텍스트 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약성서의 기록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루어졌고, 성서의 기록자들 또한 그러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깝게나마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여성학적 성서해석은 탈식민주의안에서 영근 이론들을 바탕으로 성서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여성들

   이 장에서는 간략하게나마 여성주의적 성서해석으로부터 탈식민주의 여성주의적 성서해석까지를 대표적인 몇몇의 학자들을 통해 소개 한다.

   엘리자벳 S. 피오렌자 (Elizabeth S. Fiorenza)는 불모의 성서신학계에서 여성주의적 해석의 씨를 뿌리고 거두기까지 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녀의 대표작 ‘In Memory of Her’는 마가복음 14장 9절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각주:1]는 말씀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놓는다. 예수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은 이름없는 여인의 행적이 왜 이후의 복음사역에서는 사라져 버렸을까? 피오렌자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가부장제화(Patriarchalization)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본다.[각주:2] 바로 예수의 시대에 복음의 중심이 되었던 여성들의 신앙들이 그 이후에 서서히 사라져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오렌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전통적인 양식비평의 방법으로 후기의 전승을 담고 있는 다른 복음서들의 같은 이야기들을 마가복음과 비교하여 어떻게 이 이름없는 여인의 이야기가 퇴색되고 사라져가는지 보여준다. 바로 전통적인 성서비평을 방법을 통하여 어떻게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피오렌자가 주장하는 바는 성서에 남아있는 비가부장적 전승의 흔적들을 통하여 초기기독교 공동체가 남녀평등의 공동체를 꿈꾸었음을, 적어도 남성과 여성 지도자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공동체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피오렌자는 성서를 통한 여성해방은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초기 모습을 발굴하고 어떻게 그 공동체가 남성과 제국중심의 종교로 변화되어 갔는지 밝힘으로 가능한 것이라 믿었다.[각주:3]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최초의 여성학적 성서해석을 시도한 무사 두베 (Musa S. Dube)는 피오렌자의 업적은 인정하면서도 그녀의 방법론의 문제점이 결국 성과 제국주의 담론이 얽혀있음을 보지 못하는 실패를 낳아 결국 여성을 얽매고 있는 복잡다단한 제국의 논리를 밝혀내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두베는 먼저 피오렌자의 방법론이 전통적인 편집비평과 양식비평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 텍스트 밖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고 있었던 제국과 식민담론을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각주:4] 여성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오히려 더 큰 콘텍스트에 대한 시각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두베의 이러한 비판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피오렌자의 방법론이 초기 기독교를 이상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식민지시대의 저항공동체였던 기독교 공동체가 남녀의 평등을 실현한 이상적 공동체로 읽히워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두베는 아울러 종래의 예수 대 제국의 담론을 비판한다. 예수 공동체와 제국을 대립관계로 놓고 예수의 복음에서 정치적 저항의 메세지를 찾아내는 연구는 저항의 한 축을 담당했던 여성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성서 해석을 명확한 두축의 갈등 (지배자와 피지배자)으로 봄으로 여성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현대 정치를 비판하는 윤리적인 해석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바로 남성과 곁에 있는 여성의 문제들, 가정폭력, 이혼, 낙태, 임금 불평등, 인신매매, 성매매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하등의 비판적 능력을 상실한 비윤리적 해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베는 성서의 진정한 해방적 관점은 이 두가지를 아우르는 해석이어야 하며 성서에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제와 제국의 논리를 벗기고 성서를 탈식민화 (Decolonization)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바로 성서의  중심에 내재하는 제국주의적 복음화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에야 비로소 성서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과 우주적 하나님의 지혜 (Universal Sophia of God)를 말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읽히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5]
   피오렌자가 치나치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방식으로, 두베가 끝없이 성서의 제국담론을 벗기는 방법으로 여성과 식민해방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면, 다비나 C. 로페즈 (Davina C. Lopez)는 그녀의 저서, The Apostle to the Conquered (정복당한 자들의 사도)에서 바울을 다시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여성에 대한 담론을 개진한다. 로페즈는 바울의 역사적 상황이 식민담론, 제국주의, 인종, 여성, 이원론등의 복잡다단한 거미줄 망으로 얽혀있었지만 그 중 가장 전면에 선명하게 대두되었던 이미지는 바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당시의 로마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로마의 신전에 조각들중 클라우디어스 황제의 브리타니아(현재의 영국) 정복을 기록한 조각에서 로마의 황제는 남성으로 피정복민인 브라타니아는 여성으로 조각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반나의 여성으로 조각된 브리타니아는 그녀의 머리채를 로마의 남성전사에게 잡히워 진채 몸부림 치고 있다. 이에 로페즈는 여성이 피식민인과 피지배자로 형상화됨을 통해, 남성인 로마의 사유재산이 되고 그의 보호를 받아야 됨을 너무나 간단하게 이데올로기화 됨을 지적하였다. 결국 여성은 제국의 담론이 피지배자들에게 형상화 시켰던 이미지이고 이러한 이미지는 피지배자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적 이미지를 투사함으로 타민족에게 우월감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는 유대민족에게도 존재했다. 이전의 웹진에서도 논했듯이 유대민족이 제국을 통해 내면화시켰던 제국의 이미지는 다웟왕국의 제건이나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하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끊임없이 복음안에서 제국주의적 복음주의로 나타난다.
   로페즈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바울의 회심사건을 남성적인 제국적, 유대적 이데올로기에서 예수의 부활을 토대로한 여성적, 이방인들을 (모든 다른 민족들) 위한 복음의 사도로의 전환으로 해석한다. 여타의 제국주의를 콘텍스트로한 성서신학 담론들이 로마제국이나 유대민족주의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에는 주목하였으나 정작 이방인 (Gentiles, pagans)의 정치, 사회적 콘텍스트를 읽어내지 못해온 것을 비판하면서, 로페즈는 할례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나 바울 자신을 ‘어머니’ (갈 4:19)로 묘사하는 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바울의 복음은 남성적 제국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여성으로 묘사된 피식민인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박해자에서 박해받는자로의 역전은 종교적 영역을 벗어나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읽히워 질 수 있으며 여성학적 입장이 바울을 다시 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비록 로페즈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상황을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지나치게 환원시킨감이 있지만, 바울의 회심사건을 새롭게 해석하여 피지배자을 위한 복음에 재해석은 바울을 정치적인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에서 함께 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짧게나마 세번으로 나누어 탈식민주의와 바울의 관계에 대하여 약술해 보았다. 탈식민주의와 바울은 아직도 새롭게 조명되는 분야이므로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학문의 장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개역개정 막 14:9 [본문으로]
  2. Fiorenza, In Memory of Her, 35. [본문으로]
  3. Ibid. [본문으로]
  4. Dube Shomanah, Postcolonial 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Bible, 39. [본문으로]
  5. Ibid., 4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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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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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0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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