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2



심범섭*



지지난 번, 곧 1월 초에 이 웹진에 실은 글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 세 가지(체험적, 상상적, 설명적 이해)를 이야기하면서 다음 글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일상적인 경우들을 몇 가지 이야기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글에서 미투 운동이라는 시의성 강한 주제를 다루느라 (비록 고통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처음의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이번 글에서는 이 계획을 실행하여, 우리 삶에서 흔히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을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가운데 세 가지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다.


1. 잘 난 사람을 잘 대하자


도올 김용옥이 <월간동아>에 연재했던 시평을 모아 1990년에 출간한 책 <도올세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이어령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김용옥은 이런 말을 듣는다. “조심해라. 우리 사회는 못난 놈은 밟아 죽이고, 잘난 놈은 띄워 죽인다.” 못난 놈을 밟아 죽인다는 것은 금방 이해가 되는데 잘난 놈을 띄워 죽인다는 것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말일까 이리저리 궁리를 해 보았다.

먼저 “띄운다”라는 말은 추켜세우는 것인데, 누구를 추켜세우면 그가 기분 좋아하겠지만 이것이 적절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그의 마음의 균형을 빼앗고 그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면 부적절한 띄우기가 불편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을 것이요, 교만한 사람이라면 더욱 교만해져 올바르게 처신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띄우기에는 추켜세우는 태도와 말과 행동에 더하여 흔히 어떤 무리한 요구가 동반하기 마련이고, 이것이 잘난 사람의 안녕을 침해하고 성장을 저해하게 된다. 띄우기가 단순한 경탄에서 비롯되어도 이러할 것인데, 여기에 띄우는 사람의 어떤 이기적인 동기나 열등의식 등이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고약해진다.

띄워서 죽인다는 것은 부적절히 추켜세워서 괴롭힌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 잘난 사람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와 무시가 포함되는 것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비범한 사람을 칭찬하고 칭송할 때 그를 초인이나 영웅 같은 특별한 인간의 범주에 집어넣고 그의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다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한 사람에 대한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와 태도는 반드시 내가 범접하기 어려운 비범한 사람에 대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유난히 똑똑한 젊은이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자기를 그리 주의 깊게 보살피지 않아서 불만이었다고 한다. 아이가 공부도 정말 잘 하고 영특하니까 부모는 ‘쟤는 뭐 자기 일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방임한 것이었다. 또 이 사람은 최근에 무슨 기술관련 수업을 수 개월 들으면서 강사가 자기한테 별로 관심을 안 보여서 고충이 있었다고도 했다. 강사 역시 그가 수강생 가운데에서 단연 뛰어났기 때문에 ‘저 학생은 뭐 혼자서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주지 않은 것이었다.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시장의 파리들에 대해서"라는 장이 있는데,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사람에게 범용한 인간들로부터 도망가라고 열변한다. 그는 용렬한 자들이 "그대의 주변에서 칭찬으로 웅웅거린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들이 "그대에게 신 또는 악마에게 하듯 아부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불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도 말한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복수로부터 도주하라!"

물론 니체가 말하는 상황은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경우보다 더 심원한 차원에 속하며 또 훨씬 더 드문 상황이지만, 잘난 사람을 띄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교훈이 있는 듯 하다. 특히 "보이지 않는 복수"라는 강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남을 띄우는 진정한 동기를 더 깊고 진지하게 성찰하게 한다. 우리의 동기가 진정 복수심(뒤틀린 열등의식의 반동)이든 순수한 경외심이든 띄우기는 띄워지는 사람의 고통에 우리를 둔감하게 한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를 먼저 한 연약한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내 경험을 쉽게 일반화하지 말자


많은 경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방해되는 것은 그의 어려움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속단인 것 같다. 이런 속단은 특히 타인이 겪은 것을 나도 이미 겪어보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가난과 싸우면서 별의별 일을 다 해 본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과 같은 일을 해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경험한 고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제대로 공감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각 사람의 고유함이 관여하게 된다. 비록 이름이 같은 고통이라도 각 사람에게는 그에게 고유한 고통이 있음과 나는 이것까지는 모름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병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생각해 보자.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떤 공통된 경험이 있으며 어떤 일반적 경향이 나타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의 구체적인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듣는 약이나 요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듣지 않는다. 병세가 안 좋아 금방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오히려 더 악화되지 않고 근근이 살아가는 반면 병세가 미미하여 큰 걱정 없던 사람이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오래 전에 이런 우스갯소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파리 때문에 성가심을 느끼고 있었다. 잡으려고 해도 안 잡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파리가 이 사람 앞에 앉게 되었다. 드디어 파리를 잡을 기회를 얻은 이 사람은 파리를 노려보면서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손을 다시 내렸다. 옆에 있던 동무가 물었다. “왜 파리를 안 잡아?”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까 그 파리가 아니야.” 이 농담은 직접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각 개인의 고유성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생각하도록 일깨워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각 개인의 고통의 독특함에 대해 더 민감하게 생각해야겠다는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나도 겪어봐서 잘 알지’같은 생각은, 납치한 사람의 다리를 침대에 맞춰 늘이거나 자른 프로크루스테스의 폭력과도 같을 수 있다.


3. 추상적인 이해의 부작용을 경계하자


때로 우리는 어떤 경험을 추상적인 원리로써 요약해석하여 그 안에 배어있는 고통을 못 보고 만다. 예를 들어 월남전에서 전사한 군인의 죽음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희생’ 같은 말로 정의한다면 이 병사가 한 인간으로서 관통해야 했던 크고 작은 고통은 모두 은폐되어 버린다.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를 만난다. 열 여덟 살 소녀 소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스스로 공창에 들어간다. 이러한 소냐의 결단과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소냐의 가족과 같은 건물에 세들어 사는 레베쟈트니코프라는 진보주의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내 생각에, 곧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그녀는 한 여자가 처할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 . . 사회의 현재 질서에서는 그녀의 상황은 온전히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에게 강요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미래 사회의 질서에서는 이 상황은 완전히 정상적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될 거니까요. . . . 소피아 세묘노브나의 개인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사회 질서에 대한 힘차고 진심어린 항의라고 봅니다. 그녀를 바라볼 때 나는 기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레베쟈트니코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온전히 실현되는 미래 사회를 강하게 희구한 나머지 소냐의 현재 상황이 이러한 이념을 실천하는 경우라고 주장하고 만다. 소냐의 현실을 온전히 자신의 사회사상에만 비추어 판단할 뿐 소냐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실 소냐의 실상은 자신의 처지를 매우 혐오한 나머지 (여러 번) 자살할까도 생각했지만 계모와 어린 동생들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소냐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베쟈트니코프는 어설픈 이념에 취해 소냐의 고통은 짐작조차도 못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기쁘기까지" 하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는 레베쟈트니코프를 저속하고 어리석고 단순한 사람으로 규정하는데, 소냐에 대한 그의 판단도 이러한 규정을 예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철학과 이념이 구체적인 개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에 이렇게 눈 멀어 있다면 비록 그것이 겉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표방하더라도 새로운 구속과 억압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죄와 벌>에는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에 대해 "그는 젊고 이론적이였으며 그 때문에 잔인했다"라고 평하는 대목도 있다. 소설의 화자가 이런 평가를 적용하는 맥락은 지금 내가 펼쳐놓은 맥락과는 다르지만 '이론적이므로 잔인하다'라는 기술은 추상적인 철학이 섬세한 공감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명료히 지적한다고 본다. 우리는 이론의 '맹'과 '치'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고통이 진정 공기처럼 편재해 있다. 우리는 이런 고통에 눈과 귀를 더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감과 이해의 노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취지로 쓴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언급하고 싶은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때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그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모순적 현실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고통은 비밀로 남아있는 것이 그 당사자의 존엄을 위해 더 나을 수 있다. 때로 침묵이 최고의 웅변이듯 때로 무관심이 고통에 대한 최고의 배려일 수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잘 이해하자는 선의가 또 하나의 경직된 이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고통을 이해하는 문제는 이 세상의 다른 많은 문제처럼 깊고 섬세한 지혜를 요구하며 많은 주저함이 불가피한 어려운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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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해선 안 되는 불편한 진실



심범섭*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이런 말을 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7장 6절). 개와 돼지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마음에 느끼는 심한 불편(당황)을 달리 해소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곧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거나 자신이 감당(소화)할 수 없는 것을 마주쳤을 때에 느끼는 불편을 성숙한 방식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 이를 폭력적으로 표현하고 마는 것이다.

영국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드(Frederick Forsyth)가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Opera)>에 바탕하여 쓴 일종의 속편 소설 <맨해튼의 유령 (The Phantom of Manhattan)>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에릭(Erik)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의 일부가 심히 일그러진 사람이라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젊은 시절 어느 날 밤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불량배 몇 명과 만나 시비에 휘말리는데, 어느 순간 그의 가면이 벗겨지고 불량배들은 그의 추한 얼굴을 보게 된다. 이때 이들은 반사적으로 에릭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들이 에릭을 얼굴을 보고 폭행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추한 것은 악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이 깡패들은 에릭의 비정상적인 얼굴이 주는 불편함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러한 불편함을 일으키는 대상은 악한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반사적으로 판단했고, 이 판단이 일으키는 거친 감정(아마 공포도 포함하는)을 해결할 방법으로 폭력행사 이외의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예수의 말에서 개와 돼지가 야만적인 불편반응을 보이는 대상과 포사이드의 소설에서 불량배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대상은 일반적인 인식에서 그 평가가 상반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진주는 좋아하고 심히 훼손된 얼굴은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이 일반적으로 좋거나 나쁘게 평가 받음을 떠나 무엇이든 그것을 마주친 사람에게 불편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러한 난폭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예수의 말에서 개와 돼지는 먼저 좋은 선물 자체를 "발로 밟"아 무시하고 그것으로는 분이 안 풀려 그 다음에는 이 선물을 준 사람을 난폭하게 공격하기까지 한다. 이 두 단계는 모든 미성숙한 불편 반응에 적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이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그냥 지나쳤고 그 다음에 레위인도 그를 보고 똑같이 행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0:30-31).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불편한 상황을 만나자 이 상황을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인데, 이는 성숙하지 못한 불편반응의 1단계를 예시한다고 할 수 있다.

못된 불편반응의 2단계까지 나아가는 예로서 이런 것은 어떠한가? 서울의 모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사람으로부터 수 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한 교수가 자기가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영어원서를 대학원생 몇 명과 함께 번역해 보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모임에서 교수가 어떤 대목을 번역하는데 이 학생이 보기에 잘못 옮기고 있어서 교수에게 이리이리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 교수는 화를 내면서 자기 의견이 맞다고 우겼다. (이 학생은 이 순간 다시는 교수의 오역을 바로 잡아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다른 학생도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오역이 지적 받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가 성숙한 사람이었다면 학생의 의견을 받아들였겠지만 그러지는 못 했는데, 그래도 불편반응의 1단계까지만 가서 그냥 학생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문제는 의견 일치가 안 되니 더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는 이 정도도 못 할 정도로 마음이 비좁은 위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 자신은 과연 이 두 단계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것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제대로 알려고 하기보다 단지 불편한 것이 싫어 그것을 은근슬쩍 무시하고 외면하는 일이 없는가? 더하여, 불편반응 2단계까지 나아가, 비록 예수가 말하는 개와 돼지처럼, 그리고 바로 앞에서 예로 든 신학교 교수처럼 난폭하게 반응하지는 않더라도, 불편하게 하는 대상 또는 제3자에게 경미하나마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는가? 인간은 사실 편안함에 깊이 중독된 존재라 이러한 철없는 반응에서 완전히 자유롭기가 어렵다.

그런데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 가운데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중요한 것일 때가 있으며, 이 불편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큰 어리석음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진실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권침해의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미투 (ME, TOO) 운동"이 전개되면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말하고 있고 이에 온 사회가 충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이 드러내는 진실이 초래하는 불편에 대해 이런저런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안희정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폭로 이후 "김지은과 함께 하는 사람들 성명서"를 발표한 사람들의 반응은 성숙한 반응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자신들이 과거에 성폭력을 묵과한 점을 반성하고, 김지은씨를 비롯해 모든 피해자와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이 문제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펜스 룰(Pence Rule)"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펜스 룰은 현 미국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2002년 미국 의회 전문지 <더 힐 (The Hill)>에 밝힌 것으로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고 아내가 옆에 없으면 술자리에도 가지 않겠다"는 규칙이다.[각주:1] 성적인 차원에서 오해를 받거나 유혹을 받을 상황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원칙인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회식이나 출장에서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식으로 번지고 있다"[각주:2]고 한다. 이런 반응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미성숙한 불편반응 2단계에서 1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반응, 곧 드러난 진실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반응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간 것으로 판단되는, 미련하고 난폭한 불편반응도 만나게 된다. 얼마 전 민주당 소속 부산시 시의원 출마자가 미투 운동에서 나온 성폭행 폭로에 대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SNS에서 저열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당에서도 제명 당했다.) 홍준표가 3월 7일 청와대 오찬 회동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에게 안희정 사건에 대해 "임종석이 기획했다는 얘기가 있던데"라고 말한 것, '세계여성의날'인 3월 8일 자유한국당 성폭력근절대책특위 위원장인 박순자가 "우리에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터치나 술자리 합석에서 있었던 일들이지, 성폭력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고 말한 것은 어떠한가? 이들의 말은 정치적인 계산이 포함되어 있어 민주당 시의원 출마자의 말보다 그 의미구조가 더 복잡하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분별력 없으며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다고 여겨진다.

(사실 이렇게 미성숙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애당초 인권침해의 고통에 대해 불편한 느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들에게 불편한 것은 인간의 억울한 고통이 아니라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초래되는 현실적인 제약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엄존하는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져서 인권침해라는 진실의 불편함에 더 현명하게 반응하고 더불어 인권침해를 더 예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다양한 주제로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다소 원론적으로 들릴 수 있는 두 가지 노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 가운데 한 가지는 3월 10일 경향신문에 실린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의 인터뷰에 나오는 말에서 예시된다. "실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미투 폭로 이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심각하다"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응답한다.


미투는 드라마 소재가 아니다. 개인끼리의 농담마저 막을 수는 없지만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남성들이 피해여성의 입장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내 딸이나 내 아내가 피해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라도 생각해봐야 한다. 미투는 남성·여성을 떠나 자신의 문제로 봐야 한다. 그러면 함부로 2차 피해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각주:3]


여기에서 이지문 본부장은 남성들에게 "내 딸이나 내 아내가 피해자"라고 가정하면 피해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내 식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의 구체성에 되도록 가까이 가려는 "상상적 이해"를 시도해 보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적 이해의 시도 및 훈련은 이미 일어난 고통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앞으로 같은 고통이 발생하는 것을 더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밤(Martha Nussbaum, 1947~ )은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Not for Profit: Why Democracy Needs the Humanities)"라는 강연에서 성숙한 민주시민을 기르기 위해 세 가지 차원, 곧 철학과 역사와 예술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상상하는 능력이 키워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각주:4] 우리 사회에서도 예술을 통한 상상 교육, 공감 훈련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침해의 고통에 더 지혜롭게 대처하고 더불어 이를 더 잘 예방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경주해야 할 또 다른 노력은 인권침해라는 폭력이 왜 나쁜 것인지를 깊게 고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철학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중세에 가톨릭 교회가 막강한 힘을 누렸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도 제시한다.


교회가 싸워야 했던 전통으로 로마와 게르만 전통이 있었다. 로마 전통은 이탈리아에서, 특히 법률가 사이에서 가장 강했고, 게르만 전통은 야만인들을 정복함으로써 태어난 봉건 귀족에게서 가장 강했다. 그러나 여러 세기 동안 이 두 전통 가운데 어느 것도 교회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 했다. 그 주된 이유는 이 전통들이 적절한 철학(adequate philosophy)으로 구현되지 못 했다는 사실에 있다.[각주:5]


러셀은 이런 견해를 밝힌 다음 왜 적절한 철학을 마련하는 것에 힘이 있는가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다른 화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러셀이 철학을 이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깊고 견실한 철학(사상, 이론)은 그 문제에 관련된 경험들을 언어로 명확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며, 인간이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데 필수적인 '이유'와 '명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사회의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통해 심오하고 견고한 철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과 예방하기 위한 교육에 모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각주:6]

불편한 진실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권침해의 고통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가 지금 이를 그냥 짓밟고 묻어버린다면 지금의 어린 세대가 나중에 우리에게 '당신들은 비겁한 어른들이었다!'고 욕할 것이다. 그리고 신과 역사가 우리를 이렇게 저주할 지도 모른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 .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5:26, 30).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http://tip.daum.net/question/102379210 [본문으로]
  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082056015&code=990100#csidx60c9a8d011fb757999cfe9a4577136d [본문으로]
  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101114001&code=940100#csidx234c576532f7409871bd72bb54df41e [본문으로]
  4. https://www.youtube.com/watch?v=mxgYsx1AJ68 [본문으로]
  5. 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Simon and Schuster, New York, 1945, p.302. [본문으로]
  6. 한 정치인은 올해 2월 23일 '스리체어스'라는 출판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성폭력 해결에 대해 다음과 같은 훌륭한 견해를 제시했다. 여성이 성희롱과 차별의 문화를 겪은 이유는 여성의 세력화된 정치적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여성을 건드려도)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빨리 뽀뽀하라는 얘기야'는 류의 왜곡된 성 인식이 생긴 것 . . . 현재의 성희롱과 성폭력의 문화에선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며 "일차적으로 여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거부권을 확실히 정치적으로 보장해줘야 한다. . . 섹슈얼리티(sexuality)라는 것에 대해 최근 몇 년 동안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 . 여성의 지위가 높아져야 직장 내 성희롱이든, 이런 문화들도 자연스럽게 견제된다. 여성 공무원들이 관리 및 간부직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서글픈 것은 이 정말 말이 되는 말씀을 한 사람이 안희정이라는 사실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101133011&code=940100#csidx361c784084f1251b84e4df286a8e4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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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1



심범섭*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한 나이 든 독신 여성이 있다. 쟝 발쟝이 운영하는 공장의 여성 작업장을 감독하는 이 여인에 대해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확고하고 공정하고 강직하며, 무엇을 주는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랑은 그만큼 지니지 못했다.” 위고는 주기, 이해, 용서를 사랑의 종류, 또는 사랑이 구현되는 방식으로 보았다. 그리고 위고의 이 말에는 이 사람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는 판단이 들어있다. 독자들도 이 사람을 답답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얼른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이 세 가지 덕목에 모두 부요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 남에게 무얼 잘 주는 덕목도 실천하기 어려우며, 남을 잘 이해하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덕목은 더더욱 구현하기 어렵다.  

   사실 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을 넘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시험이라고 아예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다.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면 그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가 더 쉬워지며, 만일 그와 인간관계가 있을 때 그 관계를 더 낫게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는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려 할 때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른다. 인간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익숙한 존재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해다”라는 어두운 선언이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밝은 선언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몇 해 전 티브이에서 어느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사람의 뇌에서 불안과 공포 등을 담당하는 부분이 더 안쪽에 있어 이런 부정적인 정서가 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일부러 ‘불안해야지’ 안 해도 불안이 저절로 찾아오지요”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또 몇 해 전 어떤 계기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목록을 한번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이 있다. 한 사이트에서 동양의 ‘희노애락애오욕’ 일곱 가지 범주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감정을 나열해 놓은 목록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전부 197가지 감정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긍정적인 것이 71 가지, 중립적인 것이 12 가지, 부정적인 것이 114 가지이다.[각주:1] 이런 분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분 좋을 때보다는 안 좋을 때가 더 많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히브리 성경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할 때 받게 될 복과 순종하지 않을 때 받게 될 저주가 열거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저주가 복보다 월등히 더 많다는 것이다. 1-14절에서 복을 이야기하고, 15-68절에서 저주를 이야기하는데, (비록 엄밀하게 그 가짓수를 세는 것은 힘들지만) 대략 따져보면 저주의 종류가 복의 종류보다 세 배 정도 많은 것 같다. 이 차이를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이 인생에서 마주치는 일 가운데 나쁜 일이 좋은 일보다 확실히 더 많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 삶에는 기쁘고 즐거운 경험보다 괴롭고 힘든 경험이 분명히 더 많지 않은가?

   이렇게 익숙한 고통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느낌과 생각이 많이 태어나는 연원이 아닌가? 또 우리의 가장 큰 비밀이 잉태되는 이면이 아닌가? 또 우리의 성장과 성숙에 절실하게 도움을 주지 않는가? 또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게 병들이지 않는가? 또 아름답고 유익한 창조의 결실을 가져오지 않는가? 그래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단언해도 억지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인문학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공부라면 ‘인문학은 고통학이어야 한다’고 말하고도 싶어진다.

   그렇다면 개인도 사회도 덜 고통을 겪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면, 그 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정말 많겠지만, 나는 이 글의 남은 부분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서투르게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번 글에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들을 몇 가지 체계없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통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이해’라는 말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는 “체험적 이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겪는 것과 같거나 비슷한 고통을 나 자신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해이다. 여기에는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이나 정서가 (많은 경우 강하게) 동반한다.[각주:2] 우리 속담에 “과부 설움은 과부가 안다”라는 것이 있다. 배우자를 잃고 혼자 사는 여성의 어려움을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잘 이해하는 경우를 말한다.

   고통에 대한 또 다른 이해는 “상상적 이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 어떤 것일까 상상할 때 얻게 되는 이해이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직접 경험 가운데 주어진 고통과 가장 비슷한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떤 구체적인 느낌이나 정서가 따라온다. 예를 들어, 나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알지 못 한다. 그래서 이런 슬픔을 감히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경험했던 슬픔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부모를 잃은 고통도 이러한데 자식을 잃은 고통은 얼마나 클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의 상상적 이해를 “고통 체험 번역”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번역은 대부분의 경우 어설픈 오역이지만 아예 번역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며 또 우리로 행동하게 하는 힘도 있다 할 수 있다.

   고통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은 “설명적 이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으로 고통의 성격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다. 달리 말해, 고통의 원인, 양상, 해결 방안, 예방법 등을 지식으로 머리로 아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많은 경우 구체적인 사례들을 관찰하고 분석한 것에 바탕하고, 따라서 일반론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에는 주어진 고통을 자신에게 이입할 때 따라오는 구체적인 느낌이나 정서가 없어도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생로병사> 같은 방송에서 중이염의 원인과 증상과 치료법 등에 대해 들으면서 이를 그냥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때 나는 중이염에 대해 설명적 이해를 얻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통을 나에게 이입해 어떤 느낌이나 정서를 체험한다면 이는 동시에 상상적 이해가 될 것이다.)[각주:3]

   이 세 가지 이해가 관련하는 방식과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가운데 중요한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이야기하기 위해 ‘예비 아빠를 위한 임신체험’이라는 예를 살펴보고자 한다. 용인시 처인구 보건소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글에서 한 문단을 옮겨 본다.


예비 아빠는 주말 동안 6가지의 생활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데요. 임신 7개월에 해당하는 7.5k의 임신 체험복을 입은 채 집 안을 청소하거나 계단을 오르는 등 임산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미션을 완료하고 미션 카드에 스티커를 붙여 표시합니다. 예비 아빠가 해야 하는 미션들은 사실 임산부가 매일매일 하는 일과들인데요. 임신 체험복을 입은 채로 미션을 수행하고 나면 아내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겠죠?[각주:4]


   우선 예비 아빠는 “임산부의 고충”을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고, 상상적으로 또는 설명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각주:5] 그의 임신체험은 임신부의 어려움을 무엇보다도 상상적으로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이 체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설명적 이해를 얻을 수도 있다.) 남성의 일상에서는 얻기 힘든, 임신부의 경험과 되도록 가깝게 설정된 직접 경험을 의도적으로 찾아나서는 것으로서, 되도록 체험적 이해에 가까운 상상적 이해를 얻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적극적인 고통 체험 번역을 위한 이러한 유사체험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참가하는 “24시간 기아체험”도 이런 예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사체험을 긍정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왕이면 체험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제는 사실 아주 상식적인 믿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믿음이다. 달리 말해,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하는 생각이 거의 모든 이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직접 경험이 없이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이해, 곧 설명적 이해는 공허한 것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경우가 많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속담, “귤이 어떤 맛이라고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한번 직접 먹어보는 것이 낫다” 같은 말이 이런 태도를 반영한다. 사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공감을 통해 위로하거나 치유하는 데에는 체험적 이해가 가장 중요한 듯 하다.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소중한 개념이 된다.

   하지만 설명적 이해에는 그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우선 임신체험 같은 적극적 고통 체험 번역에도 설명적 이해가 중요하게 관여한다. 왜냐하면 예비 아빠가 구체적으로 어떤 고충을 경험해야 하는가는, 많은 임신부의 경험에서 추출한 일반론적인 지식, 곧 설명적 이해에 바탕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실증에 바탕한 설명적 이해는 예비 아빠에게 임신부의 고통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 특히 고통을 예방, 경감, 제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아주 중요하며 이런 결과를 위해 복잡하고 정교한 지식이 필요한 경우, 사람들은 설명적 이해를 체험적 이해보다 더 신뢰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임신 여성들에게 건강한 임신 관리와 안전한 출산을 위해 ‘아이를 열 명을 낳아보았지만 의학교육은 받은 적이 없는 여인’과 ‘권위 있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 가운데 누구를 찾아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남자 의사를 선택하리라고 짐작한다. 때로 “백견이 불여일문이다”라는 말이 더 맞는 경우도 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목적을 향해 행동을 취할 때 이 세 가지 고통 이해는 각각 그 역할과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생각할 때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하는 요소로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맹자가 ‘측은지심’을 이야기하면서 드는 예가 한 예가 된다고 본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걸 볼 때 사람은 저절로 놀라움과 불쌍함을 느낀다고 맹자는 말한다. 이런 반사적인 반응 덕분에 우리는 이 아이를 구하려고 달려가게 되며, 따라서 이 측은지심은 고통이 더 적은 세상을 만드려는 노력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측은지심의 반응은 고통에 대한 한 이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답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이 즉각적이고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 설명적 이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나에게 같은 경험이 없어도 일어나는 반응이므로 체험적 이해와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측은지심은 내가 제시한 세 가지 이해 가운데 상상적 이해와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이 반응은 상상적 이해의 한 종류 또는 측면인가?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할 때 우리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이 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당할 고통에 대한 상상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때 내가 인식하는 아이의 고통은 ‘어떤 심한 고통의 존재 자체’이지 ‘그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상상적 이해를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을 내 나름대로 느끼는 (번역하는) 것으로 정의하므로, 나는 지금으로서는 측은지심이 고통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상정하고 싶다. 고통의 세 가지 이해와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고통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직관’으로 규정하고 싶다. (이를 혹시, 거창한 용어를 빌려와 “고통의 전이해”라고도 이름할 수 있지도 않을까?)

   이 글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서투르고 체계없는 생각을 나누어 보았다.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 어떤 근본적인 직관으로서 이 이해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 삶에서 흔히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를 살펴보면서 고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고방식과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출처: 주미의 미술치료 여행 http://ajmpt.blog.me/140208221758. [본문으로]
  2. 이 글에서 나는 ‘느낌’과 ‘정서’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느낌’은 “오싹한 느낌,” “어색한 느낌”처럼 우리가 보통 ‘감정’이라는 범주에 넣지 않는 내적 경험을 가리키고, ‘정서’는 “기쁨,” “우울함”처럼 어느 정도 폭(그것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가능하게 하는)과 시간적 지속이 있으며 우리가 보통 ‘감정’으로 간주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물론 이 세 가지 이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을 모두 포괄하지는 못 한다.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예로서 무속인이 이른 바 “신기”를 통해 이해하는 것, 보통 사람이라도 때로 꿈이나 텔레파시 등을 통해 이해를 얻는 경우 등이 떠오른다. 이런 비전형적인 이해는 아직 내가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못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 것으로 한다. [본문으로]
  4. 출처: http://sotongsamsung.com/1491. [본문으로]
  5. 인용문에 쓰인 “임산부”라는 표현은 임신한 여성과 산모를 포괄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임신 여성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임신부’라고 하므로 이 글에서는 임신 여성을 뜻할 때 ‘임신부’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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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2



심범섭*



들어가는 말


   지난 번 글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구절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이때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번 글에서 마저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노래”라는 표현에 담을 수 있는 의미 전달 및 통합의 뜻과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본문


   먼저 의미 전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의미’라는 말에는 적어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모든 단어에는 의미가 있다”라는 말에서처럼 그 내용이 무엇이든 어떤 ‘뜻’이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처럼 ‘가치’, ‘목적’과 상통하는 뜻이다. 노래에는 언어로 이루어진 노랫말이 있으므로 노래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전달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노래는 특정한 리듬과 가락이 현저하게 감지되는 음악적인 성격 때문에 노랫말의 의미를 더 효율적으로 더 호소력있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별을 노래하는”라는 표현에서 “별”이 숭고하고 보편적인 이상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별을 노래하는 노래는 당연히 중요하고 진지한 의미를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시에서 ‘노래’라는 말에 이렇게 무거운 의미가 담기는 예를 우리는 가끔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한용운 시인이 쓴“님의 침묵”의 마지막 행을 떠올려 보자.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여기에서 “사랑의 노래”는 님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진 절실한 경험에서 얻어진 어떤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이육사 시인의“광야”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의 4연은 다음과 같다.“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여기에서“노래”에 미래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소망에 해당하는 어떤 의미를 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거운 의미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명력을 증진시키면서 우리의 존재를 더 고결한 경지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이러한 자극을 주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참과 좋음과 아름다움, 곧 진선미가 그 답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민윤리 과목을 맡으셨던 조영수 선생님은 등단한 시인이셨는데 첫 시간에 자기 소개를 하시면서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시 한 편을 쓰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분에게는 시라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고 이해하게 된다. 참과 좋음과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속하는 구체적인 의미들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의 일부 또는 전체를 통일성 있게 규정할 수 있으며, 의미에 이끌림은 개인의 유한한 존재를 넘어서는 영속에 이끌림의 한 중요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의미에 헌신하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나보다 큰 것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욕망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의미의 특성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럿이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의미가 생물학적인 필요라는 생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 받는 이야기 가운데 일부를 언급하고 싶다.


시험하는 자가 …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3-4절)



   여기에서 예수가 떡과 대비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물학적 생존과 안락과 대비되는 고결한 ‘의미’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예수는 사람이 이런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보람 있게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의미를 떡, 곧 먹는 음식과 대비시킴으로써 의미라는 것도 먹는 것이라는 행위와 관련시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생각은 제일 먼저 같은 신약성경 안에 등장하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성찬의례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 ‘의미(意味)’에서 ‘미’가 ‘맛 미(味)’자라는 사실에도 주목하게 된다. ‘의미’라는 말을 만든 옛날 사람들이 왜 ‘味’ 자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도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먹는 것으로, 살기 위해서 먹어야만 하는 것으로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예수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 그리고 ‘의미(意味)’라는 말을 만들었던 옛 동양 사람들 모두 의미를 먹는 것으로 은유하여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이상 “의미(意味)는 의미(意米)다”라는 말장난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 네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랑클(Victor Frankl)은 자신의 극한적 경험에 바탕하여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할 때에만 충일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책에서, 프랑클은 인간이 의미를 찾을 때 기준으로 삼는 가치 체계의 근거가 생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인간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가치들을 위계화했는데, 이런 가치들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내재화되어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체가 되어) 어떤 상황을 평가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동원된다는 견해이다. 무엇이 의미 있다는 판단을 이루는 가치 판단의 기저에 진화 과정이 반영된 생물학적 요구가 있다면, 의미를 먹는 것으로 표상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바꾸어 말해, 인간이 의미를 찾는 것은 음식을 찾는 것처럼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의미를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밥처럼 일상적인 것으로서 날마다 신경 쓰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살펴볼 때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의미 있음이나 없음 자체를 마주치기보다는 의미 있거나 없는 구체적 대상을 마주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미 있다거나 없다는 판단은 의식의 표면에 잘 떠오르지 않고 과연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대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자체로는 의미 있다고 하기 어렵지만 우리에게 가치 있는 목표를 성취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이다. 특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거나 고통을 견딜 때 이런 의미가 부여된다. 예를 들어 위내시경 촬영은 고통스럽고 그 자체로서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건강 증진이라는 의미 있는 목표 때문에 이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견디어 낸다. 하지만 어떤 경험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좋은 자연 경관을 바라보는 것,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긍정적인 신비감이 있는 인물을 만나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 자체로서 반갑고 소중하다. 그 자체로서 내 안에 있는 생명력을 확장시키고 내 존재를 고양시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많은 경우 동일한 대상에 이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부여될 수 있다. 그 자체로서 소중한 일이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대상 가운데에는 이 두 가지 의미 범주 밖에 머무는 예, 곧 아예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내가 마주친 수 많은 낯선 사람들과 조금만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의미 없는 대상들을 의미 있는 대상, 특히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 종교의 한 중요한 목표 아닌가? 때로 지금까지 나에게 의미 없었던 사람이 문득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험, 더 정확히 말해, 아직 의미 없는 대상과 의미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의미 있지 않은 대상 가운데에서 (전부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많은 것이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대상이 되도록 인식을 바꾸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한 중요한 목표가 아닌가? 그리고 이런 목표에 담긴 의식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 의식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별을 노래”하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두서없이 생각을 늘어놓은 다음, 이제 노래가 지니는 통합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노래가 부르거나 듣는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데에는 적어도 리듬과 가락과 노랫말이 역할을 한다고 이해된다. 이 가운데 리듬 자체가 지닌 통일하고 통합하는 힘에 대해서 마이클 드레이크(Michael Drake)는 무속인(shaman)의 북 연주를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유려하게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의 심장 안에는 우리를 역동적이고 서로 이어진 우주 전체로 연결하는 완벽한 리듬이 조용히 박동한다. 북소리는 무속인과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존재, 하나의 심장박동으로 연합한다. 북소리는 자연의 모든 구별되고 불일치하는 면을 화해시킨다. 북소리는 개인과 행성의 울림을 촉진하며 조화와 균형을 회복시킨다.[각주:1]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런저런 리듬을 구현하면서 그 존재를 영위한다고 할 때, 그리고 생명 있는 존재에게는 자신을 싣는 리듬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 때, 노래의 리듬처럼 쉽게 인지되고 호소력 있는 리듬이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한 리듬을 따르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노랫말의 경우 여기에 담긴 언어적 내용이 통합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내용이 여러 사람에게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같은 감동을 줄 때 이는 가능한데, 특히 노랫말이 위에서 이야기한 ‘무거운 의미’를 전할 때, 이런 근본적인 의미에는 강한 보편성이 있으므로, 노래 부르거나 듣는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그만큼 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노래 가운데 “그대는 저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라는 곡이 있는데, 첫 부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저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가? 

분노한 사람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그것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의 음악. 

그대의 심장이 저 북소리에 맞추어 뛸 때에 

내일과 함께 곧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


   이 가사는 노래에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으며, 이 하나됨이 운동이 되어 크고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호소력 있게 예시한다.“분노한 사람들의 노래”라는 표현에는 노랫말의 내용에 대한 암시가 있다. 그리고 맥락상 이 내용은 사회정의실현이라는 무거운 의미를 담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의 심장이 저 북소리에 맞추어 뛸 때에”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같은 리듬 아래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노래의 통합하는 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어떤 때 어떤 곳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의 하나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은 이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의 내적 통합, 과거의 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통합, 미래의 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통합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과거 또는 미래 사람들과의 통합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역사 의식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통합을 노래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 앞에서도 언급한 이육사 시인의 작품 “광야”의 4, 5연이 떠오른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여기에서 시인은 현재에 뿌린 노래의 씨앗이 성장하여 미래에 우렁찬 노래가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것을 노래를 통한 현재와 미래의 통합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과 통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를 잘 공부하고 보편적 가치를 잘 탐구하면 훨씬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미래를 향해 자라나 나중에 오늘과 미래를 하나되게 할 노래의 씨앗을 구하는 것이 오늘을 책임 있게 사는 한 중요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로 시작되는 문장과 밀접하게 이어지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문장에서 화자는 그가 자신을 넘어선 존재(작품 안에서 이름을 찾자면 “하늘”이라고 할 수 있을)로부터 삶의 소명을 부여 받았으며 이 소명을 따르겠다는 뜻을 표현한다. 이 내용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하나는 이러한 소명의 길은 그 주체에게 근본적으로 홀로 가는 길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내가 갈 길이 무엇임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임을 정확히 알았을 때 사람에게는 좋은 의미의 고독감이 찾아오는 듯 하다. 20세기 인도의 신비주의자 성인인 푼자(Poonja)는 자신이 가는 길을 “너무도 좁아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없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정한 소명은 원시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두 번째로 “그리고 나한테…”라는 이 문장을 내 나름대로 앞 문장과 연관 지어보고 싶다. 이 문장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앞 문장과 표면적으로는 “그리고”라는 순접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두 문장의 내용이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두 문장이 모두 화자의 삶의 내용을 다루므로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순차적’ 해석은 적절하지 않고, 두 문장의 내용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두 가지 동시 상황 사이에 더 구체적인 의미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둘 사이에 둘째 문장이 첫째 문장을 수단으로써 수식하는 관계를 상정하고 싶다. 다시 말해,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감으로써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이해를 시도하고 싶다. 보편적인 사랑을 자신만의 고유한 소명의 길, 사실 철저히 혼자 가는 길을 가는 가운데 실천하고 싶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만의 독특한 사명이 있으며, 이 사명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것이라고 전제할 때 이런 해석은 자연스럽다. 보편적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하는 길은 각 사람이 고유한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그 이상을 추구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이런 해석은 시적 의미를 형성하는 차원에서도 보편성과 특수성이 만나 긴장을 이루게 하는 효과가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대목을 두고 앞뒤 없이 어설픈 생각을 늘어놓았다. 내가 한 이야기를 되돌아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생각의 틀은 역시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인 듯 하다. “별”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보편을 향하지만 “나한테 주어진 길”은 특수에 관련된다. “노래”라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나므로 특수한 것이지만 그 통합하는 기능으로써 보편으로 향한다. 보편과 특수의 상호보완과 대립의 역학은 한 사람의 삶과 사회 전체의 움직임을 생각할 때 반드시 탐구해야 할 주제가 아닐까 한다. 나도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었으면 좋겠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Michael Drake,The Shamanic Drum: A Guide to Sacred Drumming, Talking Drum Publications, 2010, p.1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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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심범섭*



   지난 번 글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의 한 행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번 글에서는 이 행 앞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와 (해당 문장과 함께 시에서 화자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문장을 이야기하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두 구절에 대한 글을 두 번에 나누어 싣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해석 일부를 말씀드리고 싶다.

   먼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별”에 어떤 뜻을 부여할 수 있을까? 김응교는 그의 책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니라 하든 갈망이라 하든 조국이라 하든 그 어느 별이라도 삶의 근원일 겁니다.”[각주:1]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 . . 별이라는 소재는 . . . 순수한 이상에의 동경을 표현”[각주:2]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현대시인론>에서 박철석은 “서시”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작품에 보이는 ‘하늘’, ‘바람’, ‘별’은 윤동주 시를 대표하는 사적(私的) 상징으로서 죽음이 사랑으로 변용된 릴케적 원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람’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데아 세계라 할 수 있다.[각주:3]


   이 인용문의 둘째 문장은 좀 이해하기가 힘들다. 지상의 가변적인 존재이며 작품 안에서도 어떤 시련 같은 것으로 더 쉽게 이해되는 바람을 이데아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별’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박철석이 글을 쓰다가 실수로 ‘별’ 대신 ‘바람’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실수를 했던 아니든 나 자신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별”에 권영민의 말을 빌리면 “순수한 이상”, 박철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데아 세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는 김응교가 언급하는 “삶의 근원”이라는 의미와는 상통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각주:4]

   그렇다면 별로 표상되는 이상을 노래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러 가지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먼저 별과 노래 사이의 대조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한 가지 의미를 얻어보고 싶다. 밤하늘에 높이 멀리 떠 빛나는 별은 여러 특수한 장소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바라볼 수 있으므로 쉽게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노래는 특정한 문화에서 태어난 특정한 리듬과 가락, 그리고 특정한 언어가 어우러진 것이다. 1990년대 초 크게 인기를 누린 신승훈의 노래 “미소 속에 비친 그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별빛보다 환하진 않지만 그보다도 따사로와.” 내가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사람은 별에게는 없는 따듯함이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노래는 구체적이고 따듯한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드높고 영원한 보편적 이상을 내가 오늘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에 담아 따듯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윤동주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에는 “나는 별 하나에 /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의 앞과 뒤에서 시인은 별 하나하나에 “추억, 사랑, 동경, 어머니,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 강아지, 토끼, 노루,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을 연결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별을 노래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노래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주어진 시구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고자 한다.[각주:5] 노래의 특성으로서 부르고 듣는 사람의 생명력을 증진시키고, 영속 또는 영원을 암시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통합하고, 어떤 의미(“의미 있는 인생” 같은 말에서처럼 진지하고 좁게 정의되는 ‘의미’)를 담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특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이 가운데 통합과 의미 전달 기능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생명력을 증가시키고 영속을 암시하는 특성은 노래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리듬이 있는 것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의 리듬은 “음의 장단이나 강약 따위가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네이버 국어사전) 같은 말로 정의되는 리듬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되는 움직임” (같은 사전),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어떤 행동이나 상황이 정기적으로 반복되거나 교체됨을 동반하는 조화롭고 질서있는 움직임’[각주:6]처럼 더 포괄적인 정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포괄적인 정의는 우리가 일상에서 ‘리듬’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현상 일반을 아우른다.

   중요한 것은 이 포괄적인 정의가 말하는 리듬이 이 세계의 거의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한 본질적인 요소 또는 원리라는 사실이다. 자연의 영역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 밤낮의 교체 등에 어떤 리듬이 있다. 우리 몸을 보아도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 중 하나인 심장의 활동은 단순한 리듬으로 뛰는 것을 한 요소로 한다. ‘뇌파’의 존재는 우리의 인지 및 정서 경험의 한 측면이 리듬임을 알게 한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배가 고프고 잠이 오는 평범한 경험도 우리 몸이 어떤 리듬을 따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물리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지해 있는 사물도 깊이 들여다보면 아원자 입자(subatomic particles)들이 리듬있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 차원에서도 우리는 리듬에 따라 살아간다. 해마다 명절을 쇠고 기념일을 지키고 생일을 축하할 때 우리는 리듬 속에서 존재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리듬의 존재이다.

   노래는 리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리듬을 명확하게 느끼게 한다. 어떤 리듬은 너무 미세하여, 어떤 리듬은 너무 거대하여 제대로 감지할 수 없지만 노래가 구현하는 리듬은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 자체로서 정서적 영향력이 큰 소리라는 현상을 매개로 하므로 이 리듬은 더욱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 노래를 통해 이러한 리듬을 만나는 것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 우리가 더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물론 모든 노래가 한 사람에게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2017년 4월 20일(목) KBS에서 방영한 <문화의 향기>에서 예술감독 송승환은 그가 기획한 뮤지컬 <난타>의 호소력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심장의 박동으로 살기 때문에 리듬에 원초적인 감흥이 있습니다.” 이 말은 리듬의 존재인 사람이 음악의 리듬을 만났을 때 생명력이 더해짐을 느끼는 현상을 잘 요약해서 표현한다.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에 생명력을 북돋아 주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할 때 기억나는 영화 장면이 하나 있다. 2003년 미국 영화 <엘프 (Elf)>는 환상적이고 유머러스한 내용으로 크리스마스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산타의 썰매가 뉴욕 센트럴 파크에 추락하는데, 썰매가 다시 날아오르려면 크리스마스 정신이 더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조비(Jovie)가 사람들 앞에 나서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 신명을 퍼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듣도록 크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산타 클로스가 마을에 오네 (Santa Clause is Coming to Town)”을 부르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따라불러 썰매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크리스마스 정신이 사랑과 나눔과 감사의 정신이며 그러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할 때, 노래를 부름으로써 이 정신이 증가한다는 것은 노래 부르기가 우리의 행복을, 곧 우리의 생명력을 더 증가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 강영계는 그의 책 <죽음학 강의>에서 장례식의 의미를 논의하는 가운데 노래의 생명력이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예를 소개한다.


각종 음식과 장송곡은 일종의 상징이야. 죽음은 말 그대로 무이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가 완전히 무화되지 않고 아직 삶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거야. 또 죽은 자에게는 악마(마귀)가 들러붙기 쉽기 때문에 . . . 고인이 강한 생명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인을 해칠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산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거야.”[각주:7]


   생기를 더해주는 힘과 더불어 노래에 영속과 영원을 암시하는 특성이 있는 것은 노래의 리듬과 관련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노래의 리듬이 일깨우는 생명력 자체에 영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생명력은 생명의 지속을 뜻하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리듬은 어떤 요소가 반복되면서 나타난다는 사실도 영속과 관련이 있다. 어떤 것이 되풀이될 때 우리는 은연중에 이 반복이 계속되리라고 기대하는 듯 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관여하겠지만 반복은 그 자체로서 반복되는 것을 긍정하기도 한다는 사실도 무관하진 않으리라 본다. 리듬에 실린 우리의 의식에는 작지 않은 관성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조르바와 소설의 화자 ‘나’가 조르바의 산투리 연주에 맞춰 함께 노래부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때 경험하는 내적인 변화를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의 근심은 흩어졌고, 사소한 문제는 사라졌고, 영혼은 절정에 이르렀다. . . . 크고 작은 걱정들, 모든 것이 푸른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강철로 된 새, 노래하는 인간 영혼밖에 없었다.


   이 구절에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생명력이 넘쳐나는 경험과 영원을 감지하는 경험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이해한다. “노래하는 인간 영혼”을 “강철로 된 새”라고 비유할 때 “새”는 자유로움, 곧 비등하는 생명력을, “강철”은 영속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노래와 리듬과 반복과 영원을 서로 연결시켜 생각할 때 지나쳐버릴 수 없는 현상은 우리가 많은 경우 마음에 드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거나 듣는다는 사실이다. 우선 우리가 어떤 노래를 다시 경험하고 싶은 것은 이 경험에 (비록 늘 밝은 정서나 행복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은 가치는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영원한 가치를 되풀이해서 경험하고 싶어 우리는 그 통로가 되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거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각주:8] 이때 노래의 리듬, 곧 이미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어 노래가 되풀이될 때 반복의 반복 현상을 보이는 리듬도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를 경험하는데 기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구체적인 노래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노래의 리듬이 어떤 방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다시 경험하고 싶은 노래의 감흥에 기여한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럴 때 노래의 리듬은 영원이라는 개념과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노래에 별과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상황과 맥락을 반영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고, 이어서 노래 자체에 생명력 증진과 영속성 암시라는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생각을 모두 아울러서“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면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을 내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여 생명력을 증진하고 영속적인 의미를 창조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그 다음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도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보인다.

   다음 글에서는 “노래하는”에 담긴 통합 및 의미 전달의 함의와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또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문학동네, 2016년, p.347. [본문으로]
  2.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년. [본문으로]
  3. 민지사, 1998년, p.358. [본문으로]
  4. 마이클 퍼버(Michael Ferber)가 쓴 <문학상징사전 (A Dictionary of Literary symbol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에서는 별이 서양문학에서 상징했던 의미로서 ‘달, 해, 영광, 영웅, 황제, 명성, 구원, 천사, 방향, 운명, 기후, 점술,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사랑하는 사람, 셀 수 없이 많음, 1년 중 시점(절기, 계절), 인간 의지에 대한 영향력, 탄생과 죽음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등을 제시한다. 한국 시인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별”의 의미를 얻기 위해 서양 문학사에 등장하는 “별”의 의미를 참조하는 것은 쓸모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윤동주의 독서에 서양 문학 작품이 포함되었고 특히 그가 릿교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가 영문학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서양 문학사에 나오는 별의 뜻을 보면 대개 진중하거나 거창하거나 고상한 뜻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별의 연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식을 우리는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의 다음 구절에서 만난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본문으로]
  5. 물론 이 시에 나오는 “노래”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의 ‘노래’보다는 어떤 다른 활동이나 태도를 뜻하는 은유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듯 하다. 하지만 어떤 은유를 이해할 때 그 문자적 의미의 함의를 통해 의도하는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당연하고 적절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노래’의 문자적 의미에 연결된 의미들을 탐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문으로]
  6. 이 정의는 다음 두 사전에 나오는 ‘rhythm’이라는 표제어의 정의에 바탕하여 형성했다.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Unabridged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본문으로]
  7. 새문사, 2012년, p.153. [본문으로]
  8. 영원과 반복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생각을 배운 것은 마크(Marc)라는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 <못된가톨릭(BadCatholic)>에 올린 “의례, 영원의 증거(Ritual, Evidence of Eternity)”(2013년 4월 1일)라는 글에서이다. 이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영원은 반복을 요구한다 (Eternity demands repetition)”이다. http://www.patheos.com/blogs/badcatholic/2013/04/ritual-evidence-of-eternity.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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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



심범섭*



   스물 두 해 전 군대 시절 어느날 한 동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죽음을 탐구하는 철학자가 되겠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 무렵 자신에게 “검은 옷을 입은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젊고도 젊은 그 시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 결심을 금방 잊어먹고 오랫동안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이 나에게 사색과 배움의 가장 큰 주제가 되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가까운 분이 작고하신 일이지만 아마 그 동안 살아오면서 죽음을 더 많이 보고 들으면서, 또 내 몸의 노화를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관심이 점차 자라왔으리라고도 생각한다.

   몇 달 전 강릉시 포남동에 있는 대지서점에 갔을 때 사장님한테 죽음에 대한 책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장님은 그렇다고 하시면서 몇 년 전부터 죽음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말에 이어 “100세 시대니까!”라고 덧붙이셨다. 사장님의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의학발전으로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죽음의 경험을 이전과는 다르게 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새로운 관심으로, 더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장님이 말한 이유가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고령화 사회이므로’라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더 생각하게 된다면, 한 사회도 평균 연령이 높아질수록 죽음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오늘의 시대가 이전보다 감정과 종교 및 전인적이고 인문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죽음은 강렬한 슬픔과 두려움과 연관되고 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죽음은 오래 바라볼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생각을 시작하기에도 생각을 지속하기에도 쉬운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거의 언제나 제기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이다. 이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방법은 ‘죽는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라고, 조금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럴 때 잘 죽는 것은 당연히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 일상적인 용법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경우에 따라 며칠 또는 몇 달 또는 몇 년이 되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사는 것을 뜻한다. 이 기간을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만약 당신이 한달 후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러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나에게 잘 죽는 것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기간에만 아니라 언제라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또 늘 이렇게 산다면 죽음에 임박해 삶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가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이란 언제든지 우리에게 닥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다시금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잘 살면 잘 죽는 것이라는 견해는 설득력이 크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며, 수 많은 짧고 긴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만난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한 좋은 대답으로 내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 이 표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를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1. 사랑과 생명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그래도 사랑에 서로 다른 개체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있음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책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을 인간이 혼자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큰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도 “사랑은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이다”라고 말한다.

    두 학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랑과 생명을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실재하는 존재이고 사랑은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다.” 프롬은 사랑의 구성요소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달리 말해 사랑은 생명을 더 증진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며, 이는 사실 프롬이나 틸리히 같은 대학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직관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부재를 뜻하는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과 조화하기 위해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반응인 듯 하다.  

    윤동주 시인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할 때에도 사랑을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의 힘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는 사랑이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을 극복하거나 죽음과 조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힘이라는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이 싯구에 숨어 있는 최상급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랑


    앞에서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했는데, 윤동주 시에서 “죽어가는”의 의미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일까? 태어나는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것이 “서시”라는 시에 담긴 고양된 도덕적 정서 및 완벽주의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서 인지되는 완벽주의와 이상주의에 이런 넓은 의미가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살아가는 과정, 곧 죽어가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 과정에 고통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를 맞아야하므로 서글프지만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괴로움이 많아서 또 슬픈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신경쓰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필연보다는 당장 닥쳐온 구체적인 고민거리이다. 흔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구체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 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큰 비중을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울 때 우리의 생명은 위축되며, 그러므로 고통은 죽음에 더 다가선 상태이다. 우리는 생명을 더 많이 누리길 바라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럴 때 누군가 고통을 이해해 주면 우리는 하나되는 느낌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 달리 말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확장을 느끼는 것, 내 안에서 생명력이 더 증가하는 사건이다. 이렇게 생명력이 부족할 때 새로이 공급받는 것이 이미 생명력이 넉넉할 때 더 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경험인 듯 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이미 아쉬울 것 없는데 더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결여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답은 이것인 것 같다. 곧, 부족한 생명력을 더해주는 것은 그 대상이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생명을 아예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이 넉넉할 때 누가 나한테 밥 한 그릇을 주는 것보다 당장 굶어죽을 지경에 밥 한 그릇을 주는 것이 훨씬 더 고맙고 또 의미있을 것이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경계에 가까이 간 존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덜어주거나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영어 속담도 생겨난 것 같다. 히브리 성서 <시편> 1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개인과 공동체가 좋은 삶을 추구할 때, 결여와 고통이 없는 것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함을 암시한다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히브리 성서 <이사야>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50:4). 이 말을 하는 이사야도 위로하는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위로의 말을 어떻게 할 지를 하나님이 알려준다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축하의 말을 해야할 지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사실도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들도 있다. 말보다는 적절한 행동적 조처나 물질제공이 더 시급한 경우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 등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최선의 방안이 말이든 다른 것이든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사야의 말에 암시된, 말로 위로하기의 어려움은 사실 모든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얻었다고 하는데, 위로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동시에 “위로학”을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할지도 모른다.

    이 위로학은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마태복음 10:16)과 폭넓은 공부와 면밀한 분석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 위로학에서 놓칠 수 없는 진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경우 위로자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하듯 “인생의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엄연한 진실로부터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싯구에 그 영혼이 공명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위로학의 길을 가고 훌륭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3. 보편적 사랑


    이어서 주어진 구절에서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야 할 표현은 “모든”이 아닐까 한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한 비범한 의식, 일상적 의식에서 벗어난 확장되고 고양된 의식을 본다. 일상적 의식에서 사랑은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에 국한되기 쉽다. 마태복음 5:46-47에서 예수가 하는 말도 바로 이러한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가 강조하는 포괄적인 사랑을 결심하는 비범한 의식은 “서시”에서는 생명있는 존재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시인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간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또한 죽는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생명있는 존재는 ‘나를 비롯하여’ 모두 죽는다라는 필연을 직시하는 데에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있는 존재를 사랑해야겠다는 의지가 태어났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인식과 다짐에는 깊은 공감과 유대의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대의식을 힘있게 잘 표현한 문장으로서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존 돈(John Donne 1572 ~ 1631)이 쓴 구절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나 알아보려 절대로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 조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이러한 유대의식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정의에 온전히 맞아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이미 하나임을 상기할 때 우러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가 (앞에서 소개했듯이) 사랑을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으로 정의한 다음, 이 연합이 “본질적으로 함께 속하는 것[이] 분리”된 다음 “재연합(reunion)”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도움이 되는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이 통찰은 존 돈과 윤동주 두 시인이 말하는 넓은 사랑을 더 충실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넓은 사랑을 “모든”이라는 양적으로 포괄적인 표현과 어울리는 “보편적”이라는 또 다른 양적인 개념을 사용해 “보편적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양적인 표현은 이런 사랑의 요건이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질적인 특성을 간과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질적인 특성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동기에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진정한 보편적 사랑은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해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흠 없는 통로일까? 누구도 완벽한 통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완벽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하여,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걸어가듯 계속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보편적인 듯한 사랑의 동기에 이기적인 추구가 우려할 만큼 도사리고 있을 때 이런 사랑은 가짜 보편적 사랑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6:1-4에서 예수가 하는 말은 이런 가짜 사랑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한데 힘을 합쳐 이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능력과 자원은 심하게 제한되어 있어 아무리 그 의지의 지향에서 “모든” 생명있는 존재(또는 모든 사람)를 사랑하고자 하더라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한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보다가 이튿날 길을 떠나기 전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 . .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10:35)라고 말한다. 이때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함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자고 초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주막 주인에게 이 초대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왜냐하면 환자를 돌보는 비용이 두 데나리온 넘게 들어 자기 돈을 썼는데 사마리아인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는 안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때 많은 경우 현실적인 손해를 각오하거나 감수해야 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실천이 한계에 부딪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초대를 우리는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맺는 말


    영국이 낳은 천재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1872 ~ 1970)은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어느날 밤 내연녀와 함께 호텔방에 있는데 갑자기 바깥 세상이 지옥이 된 듯 했다. 당시는 2차대전 중이었는데 그날 밤 독일군이 런던을 공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 러셀은 겁에 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온전한 두려움은 사랑을 내쫓는다.” 이 말은 요한1서 4:18절에 나오는 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를 뒤집은 것이다. 비록 러셀이 이 말을 한 상황은 격조가 없지만 이 말 자체는 요한1서의 진술처럼 사랑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사랑과 두려움이 인간의 모든 동기의 두 가지 근원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사랑과 두려움이 양립할 수 없다는 요한1서와 러셀의 이해는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의미있는 통찰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의지는 두려움과 죽음의 어둠을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쫓아내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서시”는 조용한 독백처럼 씌여졌지만 이 시를 읽는 사람에게 이 빛을 확장하는 길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일깨울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함으로써 더 많은 사랑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죽음의 영역을 더 축소시키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죽는 길로서 잘 사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주어진 싯구를 다루는 방식에는 적어도 한 가지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문장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를 논의에서 제외함으로써 내 해석 방식에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느낌이 더해지게 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 번 글에서 이 수식어구, 그리고 (해당 문장과 함께 “서시”에서 시인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를 다루겠다고 계획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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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



심범섭*



   독서모임이라는 세계에 내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2013년 가을이다. 어썸피플(Awesome People)이라는 모임에서 주최하는 독서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작년부터는 다른 독서모임에도 나가보고 또 내가 직접 모임을 주최해보기도 하면서, 지난 3년 남짓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독서모임 경험을 쌓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수치는 손안에 없지만 젊은 직장인이 참여하는 독서모임이 지난 3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왜 젊은 사회인들이 독서모임에 더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해하면서, 또 독서모임의 좋은 영향력이 더 확대되기를 바라면서, 독서모임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독서모임이라는 활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보고 싶다. 이런 긍정적 인식은 독서모임이 어떤 구체적인 시기 또는 상황에서 얼마나 인기를 누리는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독서모임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이 활동을 바람직하고 격조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는 물론 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 의식에서 책의 권위 자체가 약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책의 권위란 무엇인가? 책의 권위에는 수준있는 정신활동의 권위와 글의 권위가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릇 ‘책’이라고 부르는 매체에는 어느 정도 격조있는 정보 또는 지식 또는 지혜가 담겨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번호부를 책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그 생김새는 책과 같지만 그 내용에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심화하는 요소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신문 읽기도 책 읽기와는 다른 활동으로 인식한다. 비록 신문에 실리는 어떤 글은 그 내용이 좋은 책의 내용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신문의 전형적인 기능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고 이런 목적으로 씌여지는 기사의 내용은 쉽게 ‘책’의 내용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책을 읽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라는 탄식이 일상에서 큰 저항없이 이해되고 수용된다. 사실 따져서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내용은 책으로 읽는 어떤 내용보다 확실히 더 수준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마트폰으로 유통되는 전형적인 정보가 책으로 전달되는 전형적인 정보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전제는 책이란 쉽게 쓸 수 없는 것,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과 이어져 있다. 책이란 어떤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이란 진지하고 고상한 것이며, 훈련이 있고 긴장된 노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의 권위에는 이러한 내용의 수준에 대한 판단에 더하여 글이라는 표현방식에 대한 긍정적 판단도 관여한다. 많은 경우 글을 쓰는 것은 말을 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어렵게 다가온다. 사실 우리는 말은 나도 모르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글은 자리에 앉아 의식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글이 말보다 더 지적 에너지를 더 많이 함축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글을 제대로 쓰려면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 논리적이고 정연해야 하고 더 집중해야 하고 생각이 더 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 글을 잘 쓰는 일은 어려운 일, 상당한 수련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지하고 고상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책의 권위가 뜻하는 바가 이러하므로 책은 공부, 배움, 교육, 지적 권위 등과 매우 밀접하게 엮이어 있다. 똑똑한 것, 많이 아는 것, 공부 잘 하는 것, 체계있는 것 등에 대한 존중과 인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문”의 숭상, 지성 및 지혜의 숭상과도 이어져 있다. 책에 실리는 내용은 보존하고 전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판단은 글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전파성과 영속성에 의해 더 강화되는 측면이 있는 듯 하다. 철학자 안병욱 선생의 다음과 같은 지극한 책 예찬도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근거하고 있다.


책은 인간의 창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영원의 도시 로마는 망했지만 로마의 책은 남아 있다. 신라는 무너졌지만 원효의 책은 살아있다. 그리스도를 처형한 권력자들은 죽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은 성서는 영원히 빛난다.[각주:1] 


    책의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본 다음 이제 모임이라는 것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떤 모임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쉽게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쉽게 나누도록 중매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삶에서 중요한 솔직하거나 진지한 대화는 매개자가 있어야만 순조롭게 생성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아가씨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 이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우매한 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누군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소개팅을 주선해 준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이성으로 대하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가족이나 친한 동무한테도 못하는 이야기를 생명부지의 정신과 의사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다. 이 의사의 자격을 공인하는 사회가 중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어떤 공통 관심사 아래 모임이 열리면 비록 그 모임에 온 사람이 단 두 사람이라도,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사적으로 만나서는 할 수 없는 솔직하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매개자가 이렇게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려면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중매자를 신뢰해야만 한다. 달리 말해 어떤 모임에 와서 모르는 사람하고도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 모임이라는 활동을 신뢰하는 것이다.  

    독서모임은 진지한 대화의 중매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모임이라는 활동 자체에 부여되는 신뢰가 있는데다가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솔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근본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한 동무하고도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하기는 늘 쉽지는 않다. 눈치를 봐야하고 분위기를 따져야 한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이 장벽을 넘기 위해 같이 술을 먹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 심각하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맨 정신’으로는 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맨 정신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독서모임은 제공해 준다. 그리고 책 안에는 여러가지 생각과 표현이 있기 때문에 심도있는 소통으로 가는 통로를 아주 다양하게 제공한다는 장점도 있다.

   ‘대화’는 말하기와 듣기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대화는 동시에 ‘대청’이다. 독서모임은 깊이 있는 대화대청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내 경험상 흥미로운 사실은 독서모임에 나온 사람들은 그 동기로서 듣고 싶은 바람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곧, 절대다수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배우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풀어서 말하면, 나는 아직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같은 책을 더 풍부하게 경험하고 나아가서 내 인식과 정서의 지평 자체를 넓히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독서모임에 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나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부터도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므로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것일 뿐,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듣고 싶은 욕구보다 더 강한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이런 욕구를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이 경청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독서모임에 온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철학자 이태수 교수는 대한민국의 대중인문학에 대해서 말하면서 고맙게도 언급해 준다.


    인문학은 스타 강사 강연에 수천명이 모이는 빅 이벤트에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인문학을 읽고 입을 열 수 있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한다. . . . 인문학도 유명 강사가 멋진 강연하고 박수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진정한 인문학이다. 유명 인사의 말만 듣고 감탄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스타 강사 없이도 내가 내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걸 지원해줘야 한다.[각주:2]


    이태수 교수가 부각시키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생산성(productivity)’ 개념을 통해 이해해보는 것도 의미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생산성이라는 개념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언급하는데, 그가 이 개념에 부여하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다음 구절에서 드러난다. 


    어떤 창조적인 작업에서도 창조하는 사람은 자기 밖의 세계를 대표하는 그의 재료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 . . 모든 종류의 창조적인 작업에서 작업자와 그의 대상은 하나가 되고, 사람은 창조의 과정에서 세계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그러나 이는 생산적인 작업, 곧 내가 내 작업을 계획하고, 생산하고, 그 결과를 보는 경우에 대해서만 유효하다.[각주:3]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 달리 말해 내 본질이 투여되는 일에서 나와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이런 일이 창조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프롬은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개념을 “내 얘기를” 하는 것에 적용한다면, 내 삶의 고유한 맥락에서 우러나온 이야기, 내 본질을 반영하는 이야기, 그래서 그 언어가 나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생산적인 일이요, 창조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듣는 이로부터 깊고 진실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반응이 말하는 이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생산적인 일, 창조에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이 동반하며, 이러한 내적 경험이 일하는 사람과 대상이 하나가 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창조와 그에 따르는 보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의 예가 구약성서 창세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창조설화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 . (1:1-31의 일부)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작업을 하는데 그의 창조물이 그가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애정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창조 대상에 대한 이러한 내적 반응이 진정한 창조의 한 조건이라고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생성 대상에 대한 기쁨과 사랑을 낳는 작업만이 창조라는 의미를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너 달 전 어썸피플 독서모임에서, 이 모임에 처음 온 서른 살 된 한 여자분이 모임이 끝난 다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다른 분들이 제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들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이 분이 느낀 기쁨과 만족이 “내 얘기를” 함이라는 생산적 활동의 보람이요, 따라서 이 분이 이 모임에서 한 일을 창조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믿는다.[각주:4]

    위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으로부터 창조자의 행복에 대한 해석을 끌어냈는데,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같은 표현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행복이라는 의미를 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긍정함을 뜻하며, 피조물이 보기 좋다고 한 것은 인간이 삶(생명)을 사랑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는 이 두 가지 의미가 어머니의 사랑의 특성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에도 적용한다. “약속의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젖은 사랑의 첫번째 측면, 돌봄과 긍정의 측면을 상징한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음의 행복을 상징한다.”[각주:5]

    비록 창세기 이야기에 대해 프롬과 나는 접근 방향이 조금 다르고, 또 프롬은 “젖과 꿀”을 사랑에 적용하여 해석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의 틀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해, 창세기 이야기의 창조사건과 출애굽기의 ‘젖’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의 긍정을, 창조대상이 좋게 보임과 ‘꿀’은 이에 따르는 행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창조가 이루어지는 소통을 젖과 꿀이 흐르는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이태수 교수의 말에서 그는 유명 인사의 강연을 듣기만 하는 것과 독서모임에서 “내 얘기를” 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독서모임에서 말하기의 능동성과 참여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에서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지할 수도 있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어서 정말 좋았다고 말하는 서른 살 된 젊은 여성의 소감에서도 이 분 개인의 과거 소통 경험과 우리 (여성)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소통체험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에서는 2, 30대 젊은이들도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실 지난 3년 남짓 내가 참석한, 젊은 직장인이 주로 참여하는 수 많은 독서모임에서 받은 인상도 이와 일치한다. 달리 말해 대한민국은 소통의 젖과 꿀이 매우 부족한 사회이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쉽게 성사시키며, 너와 나가 함께 이루는 창조를 경험하게 하는, 그리고 이 밖에도 여러가지 장점을 지니는 훌륭한 독서모임이 더 많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창세기 첫머리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창조물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여섯 번은 (매번은 아니지만) 개별적인 창조 단계가 끝났을 때 나오고 마지막 표현은 창조세계 전체에 적용된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창조물에 대해 ‘좋다’라고 느꼈을 때 이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다음 단계 창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창조가 창조를 낳는, ‘창조의 창조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경험하는 소통의 창조에도 이런 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이 넘쳐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지고 더욱 흥성하기를 기원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미와 진실의 합창>, 삼육출판사, 1990, p. 59. [본문으로]
  2. 조선 비즈, 석학 인터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전병근 기자, 2014.10.25.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3. Harper & Row, New York, 1956, p.17. 번역과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4.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창조를 이야기할 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대화대청을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이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예로 든 여자분이 말하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행복은 듣는 사람의 경청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깊이 있는 말하기와 듣기는 개인적인 만남이나 책을 매개로 하지 않는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창조적인 대화와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역시 위에서 말한 책에 결부된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사회적인 권위가 있는 한 책을 매개로 말하는 사람은 이 권위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권위의 성격과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책의 권위와 더불어 갈 수도 있고 거슬러 갈 수도 있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책의 권위에 편승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비판할 때 이 비판이 설득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저자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람의 권위가 부여된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 책의 권위와 교섭하면서 얻는 권위가 그가 얻는 창조의 기쁨과 만족에 직접 관여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같은 책, p.49. 번역은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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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심범섭*



   몇 주 전 11월 5일 토요일 박근혜 퇴진을 위한 집회(“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하려고 광화문 광장에 갔다. 아직 오후 4시 전이라 광장에서는 이 집회에 앞서 백남기 선생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중고등학생 약500명이 독자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중고생혁명지도부’라는 조직이 주최한 집회로 보였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원래 행진을 허락받은 한계 지점에서 길을 막아 선 경찰 때문에 멈춰서야 했다. 한참을 대치하다가 결국 해산했고, 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이제 광장에서 진행되는 일반 집회에 참석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을 눈물이 솟기도 했다. 무엇이 이들의 맑은 한국어를 분노하게 했나 마음속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날 열린 큰 일반 집회에서는 청와대를 향한 행진이 없었다는 점이다. 곧, 이날 짧은 거리나마 청와대 쪽으로 행진한 단체는 이들 중고등학생들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현실적인 사정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가장 어린 참여자들이 가장 과격한 행진을 실행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격동하는 최순실 정국에서 중고등학생들은 자기들만의 집회를 열거나, 일반 집회에 참여하거나, 일반 집회에서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거나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학생 집회를 보고 감동을 받은 다음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한 신문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의사표현을 훼방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학교측에서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철거하거나, 대자보를 붙이는 것을 반대한 경우도 있었고, 공적인 장소에서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을 교칙상 징계하겠다고 언급한 경우도 있었고, 촛불집회 등에 참석한 학생들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자보 뜯고, 막고, 사찰까지 . . . 탄압 받는 중고생들 ‘시국선언’, 경향신문, 2016년 11월 9일.) 이 가운데 가장 내 시선을 끈 내용은 대구의 한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대구 달서구 와룡고등학교 학생회는 지난 8일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시국선언문 대자보를 게시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학교장에게 알렸지만 거부당했다. 학교 측은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같은 기사)  


    학교 측이 제시한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대구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표면적인 이유 뒤에 다른 이유가 숨어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맥락을 제쳐놓고 그저 이 이유의 표면적인 표현만을 읽는다해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왜 나는 동의할 수 없을까에 대한 생각은 우리 어른들이 다음 세대(아직 어른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소박한 답을 내놓고자 한다. 


1


    첫번째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강릉군 상산면 관음리에 사는 최영택의 집에는 출가했던 딸이 첫 아이를 해산하려 친정에 와 있었다. 딸은 아들을 낳았고 환갑이 지나 외할아버지가 된 최영택은 아기를 보러 들어갔다. 이때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곧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었고 갓난 아이에게는 큰절을 올렸다. 외손자에게 이런 예를 다한 것은 “새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때 외할아버지에게 큰절을 받은 아기가 우리 아버지이다. 곧 최영택이라는 특이한 인물은 우리 아버지의 외조부였다.) 최영택 어른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분에게는 갓태어난 아기의 새로움을 소중히 여기는 남다른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단지 외손자라는 아랫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태어남의 신비, 새로운 사람을 낳는 인간의 힘, 새로운 생명이 함축하는 가능성과 희망, 새 생명의 소중함과 기쁨 등을 구현하는 사건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창하게 말해서, 최영택 어른이 방금 태어난 외손자에게 큰절을 했을 때 그는 인류 역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에게 절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일화를 빌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어른들에게 새로운 생명, 어린 생명에 대한 경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아기든,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기본적으로 인간인 이상 우리 어른들과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평등주의적인 생각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새로움과 이에 동반하는 더 큰 가능성에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대한 경의는 창조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의는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한 필수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면 당연히 어린 사람의 새로움에 대해 경의를 품는다는 생각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그렇다면 어린 생명도 경외하라.’ 


2


    둘째, 우리 어른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내 아이를 키우지도 않고 일하면서 어린 학생들을 만날 기회도 없는 내가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2014년 봄이었다. 그때 나는 일산 동구 장항동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라페스타라는 상업 구역에서 중고등 학생을 많이 보게 되는 동네였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늘 서로에게 아무 상관없는 남이었다. 서로 말 한 마디 할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길거리에서 많이 마주치는 중고등 학생들이 이제 달리 보였다. ‘저런 애들이 죽은 거야! 저 생떼 같은 애들이 죽은 거야!’ 저런 애들이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어린 사람들을 위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에는 어떤 면에서 어른들이 우월하다는 전제가 들어있다. 어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직 어른 아닌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미숙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판단이 사회 전반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만18세가 되어야만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고, 2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극장에서 성인영화를 볼 수 있다. 또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고, 1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인터넷 성인영화를 볼 수 있고, 자기 명의로 재산 등록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혀 그들을 통제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아직 20년 가까이 살지 않은 사람들을 미숙하게 간주하는 것에는 경험적으로 자명한 이런저런 근거가 있다. 이 경험적 근거는 많은 경우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초월해 공통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더더욱 자연스럽게 ‘미성년자’라는 범주 설정을 수용하게 한다. 사실 많은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성장하는 방식이 이러한 공통점의 이유가 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사람 뇌의 전전두엽 피질은 여러가지 정보를 종합해 판단을 내리고 충동을 억제하고 계획을 세우는 기능, 즉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가장 크게 구별 짓는 기능을 담당하는데, 물리적 성숙이 완전히 이루어지는데 약 25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 부위가 사람의 몸에서 가장 늦게 성장이 완료된다고 하므로 사실 사람은 25세쯤 되어야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열 아홉살된 사람들이 스물 여섯 살 된 사람들보다 대체적으로 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생물학적 이유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어린 세대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도록 책임의식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나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한 대목을 나름대로 해석해 이 생각과 연결시키려 한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 가운데 첫째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27-28, 1:31-2:3) 


    이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엿새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마지막에 창조된 존재였고, 하나님은 그 다음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 이야기가 구축하는 세계의 논리를 따르자면 인간이 창조되어 처음 맞은 날은 안식일이었다. 곧, 비록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안식일에 쉬셨지만 인간은 일한 것도 없이 우선 안식일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은 먼저 쉰 다음에 일을 시작한 흥미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인간 존재의 이러한 전개 방식을 각 사람과 세대의 경험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해, 새로이 태어난 세대는 안식일을 먼저 경험해야 하며, 우리 어른들은 그들에게 이 안식일이 하나님이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날로써 체험되도록 힘써야 하지 않을까? 


3


    셋째,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에게 때로 어른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게 (어떤 때에는 사실 어른보다 월등하게) 현실을 인식하거나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위에서 두번째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전반적으로 어른보다 미숙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일반론일 뿐이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많은 지식과 정밀한 분석력이 필요한 상황일수록 더 많이 살고 공부한 어른의 판단이 더 믿을만 하겠지만 어떤 현상의 선악정사 여부를 파악하는 것 같이 근본적인 가치 판단을 제대로 내리기 위해선 반드시 어른이거나 경험이 많을 필요는 없다. 

    사람이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더 현명하지는 않다. 기독교 성서에는 나이가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는 견해가 실려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구절을 보라.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편 119: 98-100)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기 32: 6-9)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Scott Peck, 1936-2005)이 쓴 책 <잘 가지 않는 길을 더 따라가서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led)>에는 저자가 처음 기독교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말하는 내용이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백인으로 성장했지만 그는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교회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가보기로 한 교회는 우리 집에서 몇 블락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 교회 목사는 당대 가장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그의 일요일 설교는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로 방송이 되었다.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쉽게 그가 가짜임을 간파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서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처음 갔던 교회 목사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저명한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도 가보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 버트릭(George Butrrick)이었고,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그가 거룩한 사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간파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열 다섯 살 된 내 빈약한 머리는 이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 당시 가장 유명한 기독교 목사가 있었지만, 내가 열 다섯 살 때 판단하는 한, 영적인 성장 면에서 나는 이미 그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기독교 교회에 분명 나보다 여러 광년 앞선 또 다른 목사가 있었다.[각주:1] 


    이 글에서,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 밖에 안된 아이의 내적 능력은 적어도 두 차원에서 어른들과 대조되고 있다. 우선 표면적으로 이 아이와 당대 가장 유명한 목사의 영적 수준이 대비된다. 그리고 암시적으로 목사의 수준을 파악하는 능력 면에서 이 소년과 기독교인 어른들이 대비된다. (이 어른들이 소년 스캇만큼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가짜 목사가 최고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렇게 어른을 능가하는 소년의 영적 수준과 판단력은 그가 이전에 기독교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지만 열 다섯 살 난 스캇은 과연 열 다섯 살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착각하는 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어린 소년은 알고 보면 사춘기의 격랑을 거치면서 과대망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내용과 앞뒤 맥락을 살펴볼 때 지금 50대 후반에 이 글을 쓰는 스캇 펙은 40여 년 전 자신의 판단을 승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신뢰할만한 어른으로부터 어떤 면에서는 중학생이 많은 어른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내용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소년 스캇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명철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라는 대구 와룡고등학교 일부 어른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주장의 가치를 그것이 어른에게서 나왔는가 아닌가를 따져서 판단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예를 들어 문학이라는 영역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 현대시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승무”는 조지훈이 열 여덟 살 때 쓴 작품이다. 요즘 학제에 따라 말하자면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를 미성년자가 썼다고 해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발언도, 그리고 어떤 분야의 어떤 발언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면 받아들여야 한다. 초등학생의 표현이라도 말이 되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고등학생들도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른들에게 다음 성경 구절이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문제를 다루지만 한 사회에서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교육하는 차원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권면의 말씀에 담긴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어린 세대에게 어른의 언행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에 따른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견해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정의감, 선악판단 능력, 공정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말씀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언행에 노여워할 때 이에 귀 기울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나 파악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도 암시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노여워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와룡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노여움을 표현하는 아이들을 또 한번 노엽게 한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할 지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이 한 살 차이에도 의미를 두는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자격 없이도 발언권이 강해지고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의견이 존중 받지 못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특히 미성년자들의 생각과 느낌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원래부터 이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와룡고등학교에서도 일부 어른들이 그렇게 답답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어린 사람들)은 분명 미숙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미숙한 건 아직 새로워서이며, 이 새로움은 우리 안에서 잠든 생명력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면 영혼이 치유된다.” 

    그리고 신약성서 <골로새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3:21).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말씀과 비슷한데, 아이들을 노엽게 하면 “낙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낙심은 무거운 마음이요, 낙심한 마음은 안식하는 마음일 리가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노여움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분별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그들이 먼저 안식일을 누리도록 책임감 있게 노력해야 하겠다. 우리 아이들이 낙심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Touchstone, 1998, p.120. 위의 인용문은 1998년에 나온 책에서 옮긴 것이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3년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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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그러진 인문학



심범섭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대중 인문학 서적인 윤소정의 <인문학 습관>(다산호당, 2015)과 박웅현의 <다시, 책은 도끼다>(북하우스, 2016)를 읽게 되었다. 윤소정은 “나의 잠재력을 깨워 본인의 길을 만들어가는 교육”을 지향하는 교육기업 인큐의 대표이며, 박웅현은 광고인으로서 TBWA KOREA 크리에이티브의 대표이다. 윤소정은 책에서 고전을 읽는 인문학에서 벗어나 자신의 물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답하면서 성장하는 “실용 인문학”을 하라고 권유한다 (p.51). 이 책은 이런 목적을 위해 어떤 구체적인 습관을 어떻게 형성해야할 지를 이야기하는데, 앞 표지에 씌여 있는 “나만의 업을 만들어가는 인문학 트레이닝북”이라는 표현이 이런 성격을 간명하게 전달한다. 박웅현의 책은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에서 그가 책읽기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인데, 자신이 감명깊게 인문서적의 장점과 의미있게 다가왔던 이런저런 구절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는 책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읽는 것이고 “천천히” 읽어야한다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p.5).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젊은이에게 인문학 멘토로 인식되고 있는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답답함과 우려를 느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제시하는 인문학의 모습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대중 인문학 담론을 좀더 비판적으로 살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비록 이 글이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중 인문교양서가 보이는 전체적인 경향을 다루지는 못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인문학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를 환기하는 기능은 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는 ‘사람의 무늬를 배움’이요, 지식의 분야로는 ‘문학, 역사, 철학’ 세 분야라고도 하고, 여기에 ‘언어, 예술, 종교’를 덧붙여 여섯 분야라고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 근본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공부’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열 여덟 살 때 형 미하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썼다는 다음 구절을 우리는 인문학 선언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다.


인간은 불가사의이다. 만일 그대가 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일생을 다 보내버렸다고 해도 시간을 낭비했다고는 말하지 말라. 이제 나는 이 불가사의에 나를 바치겠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윤소정은 그의 책에서 인문학을 여러 번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정의하는데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는 표현이 그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 (p.29). 박웅현은 그의 책에서 인문학을 명시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지만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그가 생각하는 인문학이 위의 일반적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두 저자가 인문학을 정의하는 방식에 이미 어떤 파격적이거나 문제되는 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 공통된 문제점으로는 적어도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인문학의 목표와 이상을 온전히 논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이상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자아실현과 세계개선이라고 생각한다. 곧 내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이 세상을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계를 개선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우리 후손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을 뜻하고, 우리 시대에는 이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 자연환경과 인간 아닌 생명체에 대한 배려도 첨예하게 요구된다. 윤소정와 박웅현의 책은 세계개선의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인문학은 자아실현의 인문학에 머물고 만다.  

    세계개선이라는 거시적이고 범인류적인 지향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하신 말씀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김용옥이 그의 책 <중용, 인간의 맛>에서 동양철학의 ‘우환’ 개념을 정의하는 대목이다. 대인이 우환하는 다섯 가지 중 마지막 두 가지가 세계개선에 관련된다고 본다.  


입에 풀칠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이쁜 새악씨 못 얻을까 걱정하고, 벼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가계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 . . 이런 걱정은 “우환”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소인의 근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환이란 무엇인가? 우환이란 반드시 대인의 우환이다! 대인의 우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배우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덕을 닦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천지가 바르게 자리잡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요, 만물이 잘 자라나지 못할 것을 우환하는 것이다. (p.124)  


    흥미로운 사실은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 이러한 인문학의 이상에 해당하는 내용이 한번씩,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교육과 관련하여 등장한다는 점이다. <인문학 습관>에서 윤소정은 자신이 운영하는 교육기업에서 일하는 교사들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큐는 ‘진짜 선생’이 되고 싶다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가고 있답니다. ‘교육만이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일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선생님들이시죠. (p.169)  


    박웅현도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하면서 본질적으로 같은 생각을 말한다.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고,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p.199). 이 두 인용문에 나타난 교육 철학에는세계개선이라는 인문학의 한 이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서 한 고립된 언술로만 존재하지 책 전체의 큰 의미축에 포섭되지 못한다.  

    이때 이런 이의 제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이상에 세계개선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이를 포함시키는 것은 당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닌가? 이 중요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인문학의 이상은 그 성격이 종교와 교육의 이상과 같다.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와 같고, 가르치고 배우는 ‘학’이라는 점에서 (역시 종교 그리고) 교육과 연결된다. 그리고 종교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류 사회에서 이미 상당히 객관적인 대답이 확보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철학자 안병욱 선생이 종교의 목표를 규정하면서 쓴 표현을 빌리면 “자아완성과 인류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영성계발만을 강조하거나 나 한 사람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일부 기독교의 흐름을 비판한다. 그리고 위에서 인큐 교사들과 박웅현의 교육철학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라기보다는 교육의 이상에 객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책이 공유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인문학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저자는 인문학을 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새로운 기쁨과 만족을 알게되는 것만 말하지 새로운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윤소정의 경우 새로운 습관을 통해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 고통은 내가 말하는 고통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두 책에서 인문학의 긍정적 효과는 일상, 곧 평범하고 익숙한 세계를 주체적으로 세밀하게 탐구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박웅현은 이런 과정에서 몰랐던 기쁨을 느끼리라고 말하고, 윤소정은 이런 실천이 새로운 평안과 활력을 가져오며 더불어 이 시대의 훌륭한 “인재”가 되는데 유효하다고 말한다 (p.10). 그러나 박웅현의 말대로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해보”면 “또 하나 삶의 즐거움”만이 얻어지는 것일까? (p.48)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을 잘 들여다볼 때 우리는 몰랐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몰랐던 추함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쁨뿐만 아니라 새로운 슬픔과 분노와 억울함과 역겨움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폭력과 모순과 마비가 편만하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늘상 쓰는 치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불편해지고 또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 않는가? 이보다 더 심각한 차원의 문제로서 미국의 윤리학자 제임스 레이철스(James Rachels)가 쓴 <도덕 철학의 요소(The Elements of Moral Philosophy)>(McGraw-Hill, 2003)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예로 들고자 한다. 지금 우리는 몇 백 년 전에 노예제도가 있었음에 대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놀라와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후 후손들은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그때에는 온 인류가 다 먹고 남을 만큼 식량이 있었는데 어떻게 다른 대륙에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하고 놀라와할 지도 모른다. 레이철스의 이런 지적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슬프게 한다. 우리 현재를 성찰할 때 이런 괴로움도 같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온전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박웅현의 책 제목에 나오는 ‘책은 도끼다’라는 표현은 카프카의 말 “책이라는 것은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에서 유래한다. 윤소정도 그의 책에서 이 말을 언급하며 “이 문장이 너무나 좋은 나머지 늘 영어 문장까지 달달 외우고 다닌”다고 말한다 (p.23).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 비유 자체의 논리 안에 ‘깨어지는 아픔’이 있음을 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독서 차원에서 이 깨어지는 아픔을 정확히 포착한 예를 우리는 이상민의 <나이 서른에 책 3,000권을 읽어봤더니>(대림북스, 2015)에서 만난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좋은 책은 큰 충격과 혼란을 준다. . . .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내가 모르고 있던,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이 바로 잡히기 때문에 당연히 명현 현상이 올 수 밖에 없다

. . . .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고 괴롭지 않다면 어쩌면 제대로 된 독서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은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라는 진실과 맞닥뜨려 보면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9-30) 


    우리가 인문학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책읽기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이상민이 말하는 명현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이 인문학의 위로와 기쁨만을 말하고 아픔과 고통에는 침묵한다는 비판에 대해 이러한 변론도 가능할 것 같다. ‘이 두 저자도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이 가능함을 알지만 고통이 결국에는 기쁨으로 귀결되거나 고통의 기저에 기쁨과 평안이 깔려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고통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누구든 기쁨과 고통 사이에 이렇게 어떤 연관을 설정하여 결국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고통 자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언급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고통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삶에서 실천하는 인문학의 고통이 특히 가치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세계개선의 노력을 낳을 때이다. 세상의 추하고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이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이를 없애려는 결심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런 실천은 많은 경우 고독하고 위험한 가시밭길이다. 이렇게 인문학 하는 사람은 때로 따돌림 당하고 때로 박해 받고 때로는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그랬고 마틴 루서 킹이 그랬다. 인문학을 제대로 하는 것은 때로 목숨을 거는 용기와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진실을 말한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34-39) 


    윤소정과 박웅현은 인문학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이러한 위험 또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저자들이 인문학의 고통과 위험을 외면하는 것은 그들이 애초부터 세계개선의 지향을 외면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서 이렇게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지만 동시에 두 책은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관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윤소정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주창하는 실용 인문학을 습득하면 세속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유비로써 말하자면 윤소정은 이른 바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을 설파하는 기독교 목사와도 같다. 그의 책에서 윤소정은 유용한 습관을 제시할 때 거의 언제나 이 습관을 실천한 사람이 성공한 사례를 언급한다. 이 예로 등장하는 사람은 소박하게는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 인정받는 청년이지만 많은 경우 한국적인 또는 세계적인 거물이다. 그리고 “배움의 주체가 비로소 내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이 시대가 원하는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다고 (p.249) 믿는 사람으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기도 한다. 


사실 잘된 사람들을 보면 출중한 능력이나 뛰어난 성적 때문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단련’되었기 때문에 성공을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p.241) 

저의 또 다른 선생님은 노력하면 바로 성과가 나온다는 말은 뻥이라고 말씀하시며 ‘끓는점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똑똑한 친구들이 성공을 못하는 이유, 바보 같은 친구들이 목표를 결국 이루는 이유 또한 이 원리 때문이랍니다. (p.332) 

앞서 말한 유석환 대표님은 어느 날 제 어깨를 두들기며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윤 대표, 힘들지? 그래도 그냥 무식하게 끝까지 해야 해. 끓는점에 도달할 때까지. 결국 성공은 똑똑한 놈들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처럼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p.333) 


    이런 예들과는 달리 겉으로 금방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윤소정의 성공주의 인문학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도 있다. 책의 3부 “인문학은 해석이다”의 7장 “나를 타인에게 각인시킨다”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미지로 계속 인식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달리 말해 그는 퍼스널 브랜딩이라고 하는 분야에서 쓰는, 개인 마케팅의 한 기법에 불과한 것을 인문학 습관으로 제시한다 (pp.220-32). 이 둘이 다름은 호박과 오이가 다름과 마찬가지인데 윤소정은 이 차이를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인문학 습관이란 사회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성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박웅현은 이러한 성공주의에서 자유롭다. 그가 독서로써 지향하는 “풍요로운 삶”은 삶과 인간과 세계를 더 이해하면서 더 위로와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는 삶이다. 아래 인용문이 그의 이러한 철학을 대변한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 . 가족이나 친구처럼 생각해보면 내 삶의 전부인 사람들, 아침밥, 새소리, 햇살, 늘 거기 있지만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즐거움의 대상이 되면 행복하겠구나. (49) 

별 볼 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힘. 그게 삶의 지혜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자 . . . (54) 

현재를 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고,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내려는 태도가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삶의 자세라는 말입니다. (88) 


    종교적 인물로 유비하자면 박웅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모든 순간의 충일함을 깨달으라고 권하는 뉴에이지 신비주의 구루 같다고 할까? 박웅현 인문학의 이런 특성을 인상적으로 알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수 년 전 박웅현이 어떤 라디오 방송에서 인문학의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청취자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한 사람이 좀 삐딱하게 이렇게 물었다.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옵니까?” 박웅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밥맛이 좋아집니다.” 인문학이 밥맛을 더 좋게 한다는 말을 그는 2011년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책은 도끼다>에서도 언급했고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도 다음과 같이 인유한다. 


오늘 소개해드린 두 권의 책 어떠셨는지요?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보시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선을 만나고, 지혜를 얻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면 다른 건 몰라도 밥이 정말 맛있어질 겁니다. (p.43) 


    우리가 이 밥 비유의 의미 구조 안에 들어가 말한다면 윤소정은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온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소정과 박웅현 두 사람을 놓고 비교하자면 박웅현 인문학이 한 차원 더 높다고 하겠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틀렸다. 인문학을 하면 때로는 밥맛이 좋아지지만 때로는 밥맛이 떨어지고 때로는 아예 밥숟갈을 놓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실 이 두 저자가 인문학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들의 책에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윤소정이 자기 책을 성공학 습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고 박웅현이 자기 책을 독서법 강독이라고 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따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책을 인문학 책으로 규정하므로 나는 인문학의 좋은 이름을 지키고 싶어 이렇게 수다스러워졌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책 <인문학 습관>과 <다시, 책은 도끼다>에는 삶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가르침이 많이 있다. 나 자신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새롭고 소중한 통찰을 많이 배웠다. 그러나 근본 인식의 틀을 볼 때 이 책들에는 인문학 하는 삶의 고통과 위험, 그리고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세계개선의 이상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도 왜 이 책들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서 그렇게 높은 인기를 누릴까?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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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생명의 말



심범섭



   올해 5월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받은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우리 일상에 만연한 폭력과 평범한 사람의 마음에 숨어있는 폭력성, 더불어 소통, 이해, 소외, 책임, 시간, 죽음 등 삶에서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다. 서로 연결된 이야기 세 편(“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상당히 복잡하고 매우 어렵다. 작가 한강도 상을 받은 다음 한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내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나눠갖는 마음으로 읽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재미있게, 또는 몰입해서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상징성와 암시성이 높은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을 자기 나름대로 유기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되풀이해서 읽는 것과 더불어 ‘한달만에 토익 점수를 200점 올리겠다!’라고 하는 학생 같은 열의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나 자신도 이렇게 성실한 자세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한 대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1. 불편하지만 낯설지 않은 진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영혜라는 젊은 여자로서 어느날 무서운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채식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 간 다음 급기야 나무가 되겠다며 음식 먹는 것 자체를 거부하면서 죽어가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폭력과 폭력 충동이 묘사 되는데, 그 가운데 폭력성이 가장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가장 복잡하면서도 또 충격적인 예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자살을 시도하는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인혜는 동생과는 달리 일상성의 경계 안에 머무르며 좀 지나칠 정도로 남을 배려하고 또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투철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면서 자기 삶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남편과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 그로부터 성관계를 강요당한다. 이런저런 계기로 그는 자신의 이런 소외를 깨닫게 되고 어느날 새벽 (사실 남편으로부터 또 한번 ‘배우자 강간’을 당한 다음) 급기야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 자살을 결심한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p.200)  


    인혜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뒷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기로 한다. 집을 나서기 전 그가 이를 위해 준비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마치 추운 듯 떨려오는 몸을 일으켜 그녀는 장난감을 놓아 두는 방의 문으로 다가갔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녁마다 지우와 함께 장식해 걸어놓은 모빌을 떼어낸 뒤 끈을 풀기 시작했다. 단단히 묶어두었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아팠지만, 참을성 있게 마지막 매듭을 풀어냈다. 장식했던 별 모양의 색종이와 셀로판지를 차곡차곡 모아 바구니에 정리한 뒤, 끈을 말아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p.201)  


    인혜는 목을 매는 도구로서 왜 굳이 아들 지우와 같이 만들었던 모빌 끈을 선택할까? “단단히 묶어두었기 때문에” 풀어 챙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에도 하필 이 끈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 뭔가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혜가 이 끈으로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광경을 상상하면 우리는 그의 숨은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끈은 원래 모빌을 달았던 끈이므로 이제 그의 시신이 모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빌이란 원래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사물이므로 인혜도 자기 시신으로 만든 모빌이 누군가에게 보이길 원한다. 그가 원하는 시선이 다름아닌 네 살 난 아들 지우의 시선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아들이 엄마와 함께 만들었던 모빌 대신 엄마의 죽은 몸이 모빌이 된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이 상상 속의 장면은 이때 인혜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섬뜩해진다. 이날 새벽 아직 자살을 생각하기 전에 인혜는 “이상한 흉통”, 곧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점점 자신의 몸을 죄어들어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p.200).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취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옷장문을 열었다. 아이가 젖먹이 때부터 좋아했던, 그래서 그녀가 집에서 자주 입었기 때문에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보라색 면티셔츠를 꺼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그녀는 그 옷을 입곤 했는데, 수없이 빨았는데도 젖내와 배냇내가 맡아지는 것 같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효력이 없었다. 흉통은 차츰 심해졌다. 숨이 가빠왔으므로 그녀는 계속 심호흡을 해야했다. (p. 200)  


    그러므로 인혜가 바라는 것은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엄마의 시체로 만들어진 모빌을 보는 것이다. (이 옷을 입을 당시에는 아직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살을 결심한 다음에도 이 옷을 계속 입고 있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무의식에서 이런 바람이 있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아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트라우마)를 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의도를 특별하고 기괴한 유형의 폭력 충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애초에 집밖에서 죽으려 했음을 고려할 때 인혜의 이러한 가학 의도는 의식적인 생각으로 형성되지 않고 무의식에만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그의 무의식은 “무의식이 하나의 충동, 모호한 충동의 자리가 아니라 꾀바른 전략적 자리”라는 통찰을 실감나게 하기도 한다.  

    자살하러 산을 오르기 전의 인혜의 행동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가 평소에 선량하고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폭력적 충동이 아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장면은 좋은 엄마에게도 자식에 대한 잔인한 가학 충동이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인혜의 의도가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아들 지우는 인혜의 절망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혜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자신과 그의 남편 때문이었고 더 깊이 따져본다면 친정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혜의 가학 의도는 가장 약하고 무고한 존재에게 향해 있다. 이때 인혜는 비겁한 사람이며, 자신의 죽음이 고통을 초래한 자에 대한 보복이 된다는 정의의 명분도 성립시키지 못한다. (사실 인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성관계를 강요하는 남편과 그와 성을 나눔으로써 존재하게 된 아들이 동일시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작품에서 그가 자살을 생각하기 전 “어둠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부자의 옆 얼굴이 가련하게 닮아 있는 것을 보았다”(p.199)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두 사람을 동일시한다는 근거가 될 만하다. 달리 말해 인혜는 남편에게 할 복수를 아들에게 대신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인혜의 자살 기도에는 아들에게 의도하는 정신적 폭력이라는 차원과 더불어 그가 아들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싶어한다는 차원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계획하는 자살에는 자신이 힘들게 살았음을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많은 경우 폭력에는 이해받고 수용받고 싶은 욕구가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다시금 인혜가 보이는 것을 전제하는 모빌이 되고 싶어했다는 점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사실 이 소설 전체에 걸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소통과 이해와 수용을 원하는 것은 중요한 한 주제로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주어진 대목에서 인혜의 왜곡된 가학 의도를 읽을 때 우리는 이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가족의 사랑 아래 감춰진 적의와 폭력, 그로 인한 고통과 인식 왜곡 등은 사실 특별하기보다는 흔한 경험이다. 한강의 소설은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불편하지만 낯익은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것 뿐이다. 


2. 새로운 "생명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인혜는 (다행히도) 그의 자기 파괴와 아들에 대한 가학의 의도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는 자살을 허락하는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의 경험은 이후의 회상에서 이렇게 이야기 된다.  


    그녀는 알 수 없다. . . . .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p.205-06)  


    인혜의 자살 기도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인 것 같다. 목매달을 나무를 찾는 사람에게 죽기를 단념하게 하는 “무자비”하고 “서늘한 생명의 말”이란 도대체 어떤 말 또는 기운인가? (햇빛을 받아 초록색 잎이 불꽃처럼 느껴지는 나무들은 이 소설에서 강한 식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된 심상이 되풀이해서 등장하며, 세번째 이야기의 제목 “나무 불꽃”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혜가 나무들에게서 들었던 말에 해당하는 말이 사람 사이에서도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말 또는 기운 또는 행동일까? 삶에 지쳐 죽고 싶은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어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목회자들은 이런 일을 더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가? 선지자 이사야도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50:4)라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에 대해서 우리는 들어본 바가 있었던가?  

    어쩌면 인혜가 새벽 햇빛 속에 선 나무들에게서 느낀 어떤 특별한 느낌을 인간 사이에서도 가능한 소통의 비유로서 이해하려는 이런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그 상응물을 찾아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절망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싶은 바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적어도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위로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전해지는 언어적 표현과 단지 자기 존재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행사하는 건강한 영향력의 구분이다. 이때 의도되지 않은 긍정적 영향력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게 하는 것은 위로하는 언어에도 곧잘 숨어있는 조종(통제)의 욕구 때문이다. “도움은 통제의 밝은 측면이다(Help is the sunny side of control).”이라는 말에는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부드러운 말에도 때로 딱딱한 억압(폭력)의 충동이 숨어 있다. 더하여 언어는 그 의도가 순수할 때에도 늘 부정확함과 오해의 부작용을 동반할 위험이 있다. 그저 자기에 충실한 사람의 영향력에는 이러한 그늘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인혜가 만났던 나무들은 단지 같이 있는 여러 나무가 아니라 서로 유대하고 연대하는 나무들이었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영혜가 어느날 언니에게 하는 말, “언니. . .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p.175)에서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해 나무들이 의도하지도 않으면서 발산하는 강한 생명력은 그들이 한 가족으로서 서로 손을 잡은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인간 세상에 적용한다면 서로 밀접하게 연대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셋째, <채식주의자>의 세계에서 나무들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생명체이다. 영혜가 나무가 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인혜가 마주친 나무들도 이런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폭력성이 폭력에 익숙한 사람에겐 사실 생경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나무들의 기운이 인혜에게 오히려 “무자비”하고 “서늘”하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폭력성의 부재가 우리가 사는 인간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노력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한 가르침이 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5:21-22) 


    우선 일상적인 무례함을 살인과 동일시하는 이런 관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더 상식적인 차원에서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불끈 화를 내거나 욕 한 마디 한 것이 때로 이런저런 불운한 인과의 연쇄로 살인과 같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화내고 욕하게 하는 마음이, 비록 그 표현에서는 살인보다 훨씬 사소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살인하는 마음과 같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해석에서는 욕하거나 화내는 행동은 작은 잘못으로 살인은 큰 잘못으로 구분하는 인식이 담겨 있는데, 이런 인식을 거부하는 제3의 해석도 가능하다. 곧 존재의 가장 심원한 차원에서는 처음부터 폭력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라는 해석이다. 바꾸어 말해 모든 폭력은 본질적으로 그 위상이 같으며, 작고 큰 폭력을 구별하는 것은 단지 지엽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말은 ‘이제 지엽에 속지 말고 본질을 파악하라’는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무들의 비폭력성을 가능한한 닮으려고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번째 해석이 일으키는 경각심이 아닐까?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도 나무를 비유로 하늘나라(이상적인 질서, 그러므로 당연히 폭력도 없는 질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복음 13:31-32) 어쩌면 폭력에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없다는 인식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한 겨자씨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한 선량한 엄마가 자살을 시도하다 포기하는 대목을 살펴보면서, 그의 절망에 내포된 듯한 미묘하고 잔인한 폭력성을 생각해 보고, 또 그가 자기 파괴라는 폭력을 저지르지 못하게 막은 나무들의 “서늘한 생명의 말”을 인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문학 작품을 독해하는 이 글은 매우 서툴고 주관적이다. 하지만 이런 글도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첨예한 담론으로 대두되는 오늘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폭력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더 철저히 생각하도록 추동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 본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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