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심범섭*



   지난 번 글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의 한 행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번 글에서는 이 행 앞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와 (해당 문장과 함께 시에서 화자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문장을 이야기하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두 구절에 대한 글을 두 번에 나누어 싣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해석 일부를 말씀드리고 싶다.

   먼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별”에 어떤 뜻을 부여할 수 있을까? 김응교는 그의 책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니라 하든 갈망이라 하든 조국이라 하든 그 어느 별이라도 삶의 근원일 겁니다.”[각주:1]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 . . 별이라는 소재는 . . . 순수한 이상에의 동경을 표현”[각주:2]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현대시인론>에서 박철석은 “서시”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작품에 보이는 ‘하늘’, ‘바람’, ‘별’은 윤동주 시를 대표하는 사적(私的) 상징으로서 죽음이 사랑으로 변용된 릴케적 원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람’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데아 세계라 할 수 있다.[각주:3]


   이 인용문의 둘째 문장은 좀 이해하기가 힘들다. 지상의 가변적인 존재이며 작품 안에서도 어떤 시련 같은 것으로 더 쉽게 이해되는 바람을 이데아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별’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박철석이 글을 쓰다가 실수로 ‘별’ 대신 ‘바람’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실수를 했던 아니든 나 자신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별”에 권영민의 말을 빌리면 “순수한 이상”, 박철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데아 세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는 김응교가 언급하는 “삶의 근원”이라는 의미와는 상통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각주:4]

   그렇다면 별로 표상되는 이상을 노래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러 가지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먼저 별과 노래 사이의 대조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한 가지 의미를 얻어보고 싶다. 밤하늘에 높이 멀리 떠 빛나는 별은 여러 특수한 장소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바라볼 수 있으므로 쉽게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노래는 특정한 문화에서 태어난 특정한 리듬과 가락, 그리고 특정한 언어가 어우러진 것이다. 1990년대 초 크게 인기를 누린 신승훈의 노래 “미소 속에 비친 그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별빛보다 환하진 않지만 그보다도 따사로와.” 내가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사람은 별에게는 없는 따듯함이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노래는 구체적이고 따듯한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드높고 영원한 보편적 이상을 내가 오늘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에 담아 따듯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윤동주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에는 “나는 별 하나에 /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의 앞과 뒤에서 시인은 별 하나하나에 “추억, 사랑, 동경, 어머니,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 강아지, 토끼, 노루,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을 연결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별을 노래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노래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주어진 시구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고자 한다.[각주:5] 노래의 특성으로서 부르고 듣는 사람의 생명력을 증진시키고, 영속 또는 영원을 암시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통합하고, 어떤 의미(“의미 있는 인생” 같은 말에서처럼 진지하고 좁게 정의되는 ‘의미’)를 담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특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이 가운데 통합과 의미 전달 기능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생명력을 증가시키고 영속을 암시하는 특성은 노래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리듬이 있는 것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의 리듬은 “음의 장단이나 강약 따위가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네이버 국어사전) 같은 말로 정의되는 리듬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되는 움직임” (같은 사전),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어떤 행동이나 상황이 정기적으로 반복되거나 교체됨을 동반하는 조화롭고 질서있는 움직임’[각주:6]처럼 더 포괄적인 정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포괄적인 정의는 우리가 일상에서 ‘리듬’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현상 일반을 아우른다.

   중요한 것은 이 포괄적인 정의가 말하는 리듬이 이 세계의 거의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한 본질적인 요소 또는 원리라는 사실이다. 자연의 영역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 밤낮의 교체 등에 어떤 리듬이 있다. 우리 몸을 보아도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 중 하나인 심장의 활동은 단순한 리듬으로 뛰는 것을 한 요소로 한다. ‘뇌파’의 존재는 우리의 인지 및 정서 경험의 한 측면이 리듬임을 알게 한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배가 고프고 잠이 오는 평범한 경험도 우리 몸이 어떤 리듬을 따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물리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지해 있는 사물도 깊이 들여다보면 아원자 입자(subatomic particles)들이 리듬있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 차원에서도 우리는 리듬에 따라 살아간다. 해마다 명절을 쇠고 기념일을 지키고 생일을 축하할 때 우리는 리듬 속에서 존재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리듬의 존재이다.

   노래는 리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리듬을 명확하게 느끼게 한다. 어떤 리듬은 너무 미세하여, 어떤 리듬은 너무 거대하여 제대로 감지할 수 없지만 노래가 구현하는 리듬은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 자체로서 정서적 영향력이 큰 소리라는 현상을 매개로 하므로 이 리듬은 더욱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 노래를 통해 이러한 리듬을 만나는 것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 우리가 더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물론 모든 노래가 한 사람에게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2017년 4월 20일(목) KBS에서 방영한 <문화의 향기>에서 예술감독 송승환은 그가 기획한 뮤지컬 <난타>의 호소력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심장의 박동으로 살기 때문에 리듬에 원초적인 감흥이 있습니다.” 이 말은 리듬의 존재인 사람이 음악의 리듬을 만났을 때 생명력이 더해짐을 느끼는 현상을 잘 요약해서 표현한다.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에 생명력을 북돋아 주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할 때 기억나는 영화 장면이 하나 있다. 2003년 미국 영화 <엘프 (Elf)>는 환상적이고 유머러스한 내용으로 크리스마스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산타의 썰매가 뉴욕 센트럴 파크에 추락하는데, 썰매가 다시 날아오르려면 크리스마스 정신이 더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조비(Jovie)가 사람들 앞에 나서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 신명을 퍼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듣도록 크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산타 클로스가 마을에 오네 (Santa Clause is Coming to Town)”을 부르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따라불러 썰매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크리스마스 정신이 사랑과 나눔과 감사의 정신이며 그러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할 때, 노래를 부름으로써 이 정신이 증가한다는 것은 노래 부르기가 우리의 행복을, 곧 우리의 생명력을 더 증가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 강영계는 그의 책 <죽음학 강의>에서 장례식의 의미를 논의하는 가운데 노래의 생명력이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예를 소개한다.


각종 음식과 장송곡은 일종의 상징이야. 죽음은 말 그대로 무이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가 완전히 무화되지 않고 아직 삶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거야. 또 죽은 자에게는 악마(마귀)가 들러붙기 쉽기 때문에 . . . 고인이 강한 생명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인을 해칠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산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거야.”[각주:7]


   생기를 더해주는 힘과 더불어 노래에 영속과 영원을 암시하는 특성이 있는 것은 노래의 리듬과 관련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노래의 리듬이 일깨우는 생명력 자체에 영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생명력은 생명의 지속을 뜻하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리듬은 어떤 요소가 반복되면서 나타난다는 사실도 영속과 관련이 있다. 어떤 것이 되풀이될 때 우리는 은연중에 이 반복이 계속되리라고 기대하는 듯 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관여하겠지만 반복은 그 자체로서 반복되는 것을 긍정하기도 한다는 사실도 무관하진 않으리라 본다. 리듬에 실린 우리의 의식에는 작지 않은 관성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조르바와 소설의 화자 ‘나’가 조르바의 산투리 연주에 맞춰 함께 노래부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때 경험하는 내적인 변화를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의 근심은 흩어졌고, 사소한 문제는 사라졌고, 영혼은 절정에 이르렀다. . . . 크고 작은 걱정들, 모든 것이 푸른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강철로 된 새, 노래하는 인간 영혼밖에 없었다.


   이 구절에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생명력이 넘쳐나는 경험과 영원을 감지하는 경험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이해한다. “노래하는 인간 영혼”을 “강철로 된 새”라고 비유할 때 “새”는 자유로움, 곧 비등하는 생명력을, “강철”은 영속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노래와 리듬과 반복과 영원을 서로 연결시켜 생각할 때 지나쳐버릴 수 없는 현상은 우리가 많은 경우 마음에 드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거나 듣는다는 사실이다. 우선 우리가 어떤 노래를 다시 경험하고 싶은 것은 이 경험에 (비록 늘 밝은 정서나 행복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은 가치는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영원한 가치를 되풀이해서 경험하고 싶어 우리는 그 통로가 되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거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각주:8] 이때 노래의 리듬, 곧 이미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어 노래가 되풀이될 때 반복의 반복 현상을 보이는 리듬도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를 경험하는데 기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구체적인 노래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노래의 리듬이 어떤 방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다시 경험하고 싶은 노래의 감흥에 기여한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럴 때 노래의 리듬은 영원이라는 개념과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노래에 별과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상황과 맥락을 반영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고, 이어서 노래 자체에 생명력 증진과 영속성 암시라는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생각을 모두 아울러서“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면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을 내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여 생명력을 증진하고 영속적인 의미를 창조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그 다음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도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보인다.

   다음 글에서는 “노래하는”에 담긴 통합 및 의미 전달의 함의와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또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문학동네, 2016년, p.347. [본문으로]
  2.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년. [본문으로]
  3. 민지사, 1998년, p.358. [본문으로]
  4. 마이클 퍼버(Michael Ferber)가 쓴 <문학상징사전 (A Dictionary of Literary symbol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에서는 별이 서양문학에서 상징했던 의미로서 ‘달, 해, 영광, 영웅, 황제, 명성, 구원, 천사, 방향, 운명, 기후, 점술,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사랑하는 사람, 셀 수 없이 많음, 1년 중 시점(절기, 계절), 인간 의지에 대한 영향력, 탄생과 죽음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등을 제시한다. 한국 시인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별”의 의미를 얻기 위해 서양 문학사에 등장하는 “별”의 의미를 참조하는 것은 쓸모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윤동주의 독서에 서양 문학 작품이 포함되었고 특히 그가 릿교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가 영문학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서양 문학사에 나오는 별의 뜻을 보면 대개 진중하거나 거창하거나 고상한 뜻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별의 연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식을 우리는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의 다음 구절에서 만난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본문으로]
  5. 물론 이 시에 나오는 “노래”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의 ‘노래’보다는 어떤 다른 활동이나 태도를 뜻하는 은유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듯 하다. 하지만 어떤 은유를 이해할 때 그 문자적 의미의 함의를 통해 의도하는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당연하고 적절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노래’의 문자적 의미에 연결된 의미들을 탐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문으로]
  6. 이 정의는 다음 두 사전에 나오는 ‘rhythm’이라는 표제어의 정의에 바탕하여 형성했다.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Unabridged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본문으로]
  7. 새문사, 2012년, p.153. [본문으로]
  8. 영원과 반복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생각을 배운 것은 마크(Marc)라는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 <못된가톨릭(BadCatholic)>에 올린 “의례, 영원의 증거(Ritual, Evidence of Eternity)”(2013년 4월 1일)라는 글에서이다. 이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영원은 반복을 요구한다 (Eternity demands repetition)”이다. http://www.patheos.com/blogs/badcatholic/2013/04/ritual-evidence-of-eternity.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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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



심범섭*



   스물 두 해 전 군대 시절 어느날 한 동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죽음을 탐구하는 철학자가 되겠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 무렵 자신에게 “검은 옷을 입은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젊고도 젊은 그 시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 결심을 금방 잊어먹고 오랫동안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이 나에게 사색과 배움의 가장 큰 주제가 되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가까운 분이 작고하신 일이지만 아마 그 동안 살아오면서 죽음을 더 많이 보고 들으면서, 또 내 몸의 노화를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관심이 점차 자라왔으리라고도 생각한다.

   몇 달 전 강릉시 포남동에 있는 대지서점에 갔을 때 사장님한테 죽음에 대한 책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장님은 그렇다고 하시면서 몇 년 전부터 죽음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말에 이어 “100세 시대니까!”라고 덧붙이셨다. 사장님의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의학발전으로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죽음의 경험을 이전과는 다르게 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새로운 관심으로, 더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장님이 말한 이유가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고령화 사회이므로’라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더 생각하게 된다면, 한 사회도 평균 연령이 높아질수록 죽음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오늘의 시대가 이전보다 감정과 종교 및 전인적이고 인문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죽음은 강렬한 슬픔과 두려움과 연관되고 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죽음은 오래 바라볼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생각을 시작하기에도 생각을 지속하기에도 쉬운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거의 언제나 제기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이다. 이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방법은 ‘죽는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라고, 조금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럴 때 잘 죽는 것은 당연히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 일상적인 용법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경우에 따라 며칠 또는 몇 달 또는 몇 년이 되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사는 것을 뜻한다. 이 기간을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만약 당신이 한달 후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러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나에게 잘 죽는 것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기간에만 아니라 언제라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또 늘 이렇게 산다면 죽음에 임박해 삶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가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이란 언제든지 우리에게 닥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다시금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잘 살면 잘 죽는 것이라는 견해는 설득력이 크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며, 수 많은 짧고 긴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만난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한 좋은 대답으로 내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 이 표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를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1. 사랑과 생명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그래도 사랑에 서로 다른 개체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있음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책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을 인간이 혼자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큰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도 “사랑은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이다”라고 말한다.

    두 학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랑과 생명을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실재하는 존재이고 사랑은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다.” 프롬은 사랑의 구성요소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달리 말해 사랑은 생명을 더 증진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며, 이는 사실 프롬이나 틸리히 같은 대학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직관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부재를 뜻하는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과 조화하기 위해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반응인 듯 하다.  

    윤동주 시인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할 때에도 사랑을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의 힘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는 사랑이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을 극복하거나 죽음과 조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힘이라는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이 싯구에 숨어 있는 최상급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랑


    앞에서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했는데, 윤동주 시에서 “죽어가는”의 의미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일까? 태어나는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것이 “서시”라는 시에 담긴 고양된 도덕적 정서 및 완벽주의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서 인지되는 완벽주의와 이상주의에 이런 넓은 의미가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살아가는 과정, 곧 죽어가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 과정에 고통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를 맞아야하므로 서글프지만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괴로움이 많아서 또 슬픈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신경쓰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필연보다는 당장 닥쳐온 구체적인 고민거리이다. 흔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구체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 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큰 비중을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울 때 우리의 생명은 위축되며, 그러므로 고통은 죽음에 더 다가선 상태이다. 우리는 생명을 더 많이 누리길 바라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럴 때 누군가 고통을 이해해 주면 우리는 하나되는 느낌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 달리 말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확장을 느끼는 것, 내 안에서 생명력이 더 증가하는 사건이다. 이렇게 생명력이 부족할 때 새로이 공급받는 것이 이미 생명력이 넉넉할 때 더 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경험인 듯 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이미 아쉬울 것 없는데 더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결여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답은 이것인 것 같다. 곧, 부족한 생명력을 더해주는 것은 그 대상이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생명을 아예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이 넉넉할 때 누가 나한테 밥 한 그릇을 주는 것보다 당장 굶어죽을 지경에 밥 한 그릇을 주는 것이 훨씬 더 고맙고 또 의미있을 것이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경계에 가까이 간 존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덜어주거나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영어 속담도 생겨난 것 같다. 히브리 성서 <시편> 1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개인과 공동체가 좋은 삶을 추구할 때, 결여와 고통이 없는 것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함을 암시한다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히브리 성서 <이사야>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50:4). 이 말을 하는 이사야도 위로하는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위로의 말을 어떻게 할 지를 하나님이 알려준다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축하의 말을 해야할 지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사실도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들도 있다. 말보다는 적절한 행동적 조처나 물질제공이 더 시급한 경우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 등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최선의 방안이 말이든 다른 것이든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사야의 말에 암시된, 말로 위로하기의 어려움은 사실 모든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얻었다고 하는데, 위로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동시에 “위로학”을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할지도 모른다.

    이 위로학은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마태복음 10:16)과 폭넓은 공부와 면밀한 분석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 위로학에서 놓칠 수 없는 진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경우 위로자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하듯 “인생의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엄연한 진실로부터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싯구에 그 영혼이 공명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위로학의 길을 가고 훌륭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3. 보편적 사랑


    이어서 주어진 구절에서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야 할 표현은 “모든”이 아닐까 한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한 비범한 의식, 일상적 의식에서 벗어난 확장되고 고양된 의식을 본다. 일상적 의식에서 사랑은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에 국한되기 쉽다. 마태복음 5:46-47에서 예수가 하는 말도 바로 이러한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가 강조하는 포괄적인 사랑을 결심하는 비범한 의식은 “서시”에서는 생명있는 존재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시인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간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또한 죽는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생명있는 존재는 ‘나를 비롯하여’ 모두 죽는다라는 필연을 직시하는 데에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있는 존재를 사랑해야겠다는 의지가 태어났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인식과 다짐에는 깊은 공감과 유대의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대의식을 힘있게 잘 표현한 문장으로서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존 돈(John Donne 1572 ~ 1631)이 쓴 구절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나 알아보려 절대로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 조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이러한 유대의식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정의에 온전히 맞아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이미 하나임을 상기할 때 우러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가 (앞에서 소개했듯이) 사랑을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으로 정의한 다음, 이 연합이 “본질적으로 함께 속하는 것[이] 분리”된 다음 “재연합(reunion)”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도움이 되는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이 통찰은 존 돈과 윤동주 두 시인이 말하는 넓은 사랑을 더 충실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넓은 사랑을 “모든”이라는 양적으로 포괄적인 표현과 어울리는 “보편적”이라는 또 다른 양적인 개념을 사용해 “보편적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양적인 표현은 이런 사랑의 요건이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질적인 특성을 간과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질적인 특성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동기에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진정한 보편적 사랑은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해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흠 없는 통로일까? 누구도 완벽한 통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완벽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하여,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걸어가듯 계속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보편적인 듯한 사랑의 동기에 이기적인 추구가 우려할 만큼 도사리고 있을 때 이런 사랑은 가짜 보편적 사랑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6:1-4에서 예수가 하는 말은 이런 가짜 사랑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한데 힘을 합쳐 이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능력과 자원은 심하게 제한되어 있어 아무리 그 의지의 지향에서 “모든” 생명있는 존재(또는 모든 사람)를 사랑하고자 하더라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한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보다가 이튿날 길을 떠나기 전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 . .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10:35)라고 말한다. 이때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함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자고 초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주막 주인에게 이 초대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왜냐하면 환자를 돌보는 비용이 두 데나리온 넘게 들어 자기 돈을 썼는데 사마리아인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는 안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때 많은 경우 현실적인 손해를 각오하거나 감수해야 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실천이 한계에 부딪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초대를 우리는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맺는 말


    영국이 낳은 천재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1872 ~ 1970)은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어느날 밤 내연녀와 함께 호텔방에 있는데 갑자기 바깥 세상이 지옥이 된 듯 했다. 당시는 2차대전 중이었는데 그날 밤 독일군이 런던을 공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 러셀은 겁에 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온전한 두려움은 사랑을 내쫓는다.” 이 말은 요한1서 4:18절에 나오는 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를 뒤집은 것이다. 비록 러셀이 이 말을 한 상황은 격조가 없지만 이 말 자체는 요한1서의 진술처럼 사랑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사랑과 두려움이 인간의 모든 동기의 두 가지 근원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사랑과 두려움이 양립할 수 없다는 요한1서와 러셀의 이해는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의미있는 통찰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의지는 두려움과 죽음의 어둠을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쫓아내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서시”는 조용한 독백처럼 씌여졌지만 이 시를 읽는 사람에게 이 빛을 확장하는 길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일깨울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함으로써 더 많은 사랑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죽음의 영역을 더 축소시키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죽는 길로서 잘 사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주어진 싯구를 다루는 방식에는 적어도 한 가지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문장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를 논의에서 제외함으로써 내 해석 방식에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느낌이 더해지게 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 번 글에서 이 수식어구, 그리고 (해당 문장과 함께 “서시”에서 시인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를 다루겠다고 계획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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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



심범섭*



   독서모임이라는 세계에 내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2013년 가을이다. 어썸피플(Awesome People)이라는 모임에서 주최하는 독서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작년부터는 다른 독서모임에도 나가보고 또 내가 직접 모임을 주최해보기도 하면서, 지난 3년 남짓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독서모임 경험을 쌓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수치는 손안에 없지만 젊은 직장인이 참여하는 독서모임이 지난 3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왜 젊은 사회인들이 독서모임에 더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해하면서, 또 독서모임의 좋은 영향력이 더 확대되기를 바라면서, 독서모임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독서모임이라는 활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보고 싶다. 이런 긍정적 인식은 독서모임이 어떤 구체적인 시기 또는 상황에서 얼마나 인기를 누리는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독서모임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이 활동을 바람직하고 격조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는 물론 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 의식에서 책의 권위 자체가 약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책의 권위란 무엇인가? 책의 권위에는 수준있는 정신활동의 권위와 글의 권위가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릇 ‘책’이라고 부르는 매체에는 어느 정도 격조있는 정보 또는 지식 또는 지혜가 담겨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번호부를 책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그 생김새는 책과 같지만 그 내용에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심화하는 요소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신문 읽기도 책 읽기와는 다른 활동으로 인식한다. 비록 신문에 실리는 어떤 글은 그 내용이 좋은 책의 내용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신문의 전형적인 기능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고 이런 목적으로 씌여지는 기사의 내용은 쉽게 ‘책’의 내용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책을 읽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라는 탄식이 일상에서 큰 저항없이 이해되고 수용된다. 사실 따져서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내용은 책으로 읽는 어떤 내용보다 확실히 더 수준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마트폰으로 유통되는 전형적인 정보가 책으로 전달되는 전형적인 정보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전제는 책이란 쉽게 쓸 수 없는 것,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과 이어져 있다. 책이란 어떤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이란 진지하고 고상한 것이며, 훈련이 있고 긴장된 노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의 권위에는 이러한 내용의 수준에 대한 판단에 더하여 글이라는 표현방식에 대한 긍정적 판단도 관여한다. 많은 경우 글을 쓰는 것은 말을 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어렵게 다가온다. 사실 우리는 말은 나도 모르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글은 자리에 앉아 의식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글이 말보다 더 지적 에너지를 더 많이 함축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글을 제대로 쓰려면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 논리적이고 정연해야 하고 더 집중해야 하고 생각이 더 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 글을 잘 쓰는 일은 어려운 일, 상당한 수련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지하고 고상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책의 권위가 뜻하는 바가 이러하므로 책은 공부, 배움, 교육, 지적 권위 등과 매우 밀접하게 엮이어 있다. 똑똑한 것, 많이 아는 것, 공부 잘 하는 것, 체계있는 것 등에 대한 존중과 인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문”의 숭상, 지성 및 지혜의 숭상과도 이어져 있다. 책에 실리는 내용은 보존하고 전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판단은 글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전파성과 영속성에 의해 더 강화되는 측면이 있는 듯 하다. 철학자 안병욱 선생의 다음과 같은 지극한 책 예찬도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근거하고 있다.


책은 인간의 창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영원의 도시 로마는 망했지만 로마의 책은 남아 있다. 신라는 무너졌지만 원효의 책은 살아있다. 그리스도를 처형한 권력자들은 죽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은 성서는 영원히 빛난다.[각주:1] 


    책의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본 다음 이제 모임이라는 것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떤 모임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쉽게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쉽게 나누도록 중매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삶에서 중요한 솔직하거나 진지한 대화는 매개자가 있어야만 순조롭게 생성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아가씨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 이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우매한 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누군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소개팅을 주선해 준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이성으로 대하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가족이나 친한 동무한테도 못하는 이야기를 생명부지의 정신과 의사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다. 이 의사의 자격을 공인하는 사회가 중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어떤 공통 관심사 아래 모임이 열리면 비록 그 모임에 온 사람이 단 두 사람이라도,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사적으로 만나서는 할 수 없는 솔직하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매개자가 이렇게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려면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중매자를 신뢰해야만 한다. 달리 말해 어떤 모임에 와서 모르는 사람하고도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 모임이라는 활동을 신뢰하는 것이다.  

    독서모임은 진지한 대화의 중매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모임이라는 활동 자체에 부여되는 신뢰가 있는데다가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솔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근본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한 동무하고도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하기는 늘 쉽지는 않다. 눈치를 봐야하고 분위기를 따져야 한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이 장벽을 넘기 위해 같이 술을 먹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 심각하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맨 정신’으로는 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맨 정신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독서모임은 제공해 준다. 그리고 책 안에는 여러가지 생각과 표현이 있기 때문에 심도있는 소통으로 가는 통로를 아주 다양하게 제공한다는 장점도 있다.

   ‘대화’는 말하기와 듣기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대화는 동시에 ‘대청’이다. 독서모임은 깊이 있는 대화대청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내 경험상 흥미로운 사실은 독서모임에 나온 사람들은 그 동기로서 듣고 싶은 바람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곧, 절대다수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배우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풀어서 말하면, 나는 아직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같은 책을 더 풍부하게 경험하고 나아가서 내 인식과 정서의 지평 자체를 넓히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독서모임에 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나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부터도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므로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것일 뿐,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듣고 싶은 욕구보다 더 강한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이런 욕구를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이 경청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독서모임에 온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철학자 이태수 교수는 대한민국의 대중인문학에 대해서 말하면서 고맙게도 언급해 준다.


    인문학은 스타 강사 강연에 수천명이 모이는 빅 이벤트에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인문학을 읽고 입을 열 수 있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한다. . . . 인문학도 유명 강사가 멋진 강연하고 박수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진정한 인문학이다. 유명 인사의 말만 듣고 감탄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스타 강사 없이도 내가 내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걸 지원해줘야 한다.[각주:2]


    이태수 교수가 부각시키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생산성(productivity)’ 개념을 통해 이해해보는 것도 의미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생산성이라는 개념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언급하는데, 그가 이 개념에 부여하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다음 구절에서 드러난다. 


    어떤 창조적인 작업에서도 창조하는 사람은 자기 밖의 세계를 대표하는 그의 재료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 . . 모든 종류의 창조적인 작업에서 작업자와 그의 대상은 하나가 되고, 사람은 창조의 과정에서 세계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그러나 이는 생산적인 작업, 곧 내가 내 작업을 계획하고, 생산하고, 그 결과를 보는 경우에 대해서만 유효하다.[각주:3]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 달리 말해 내 본질이 투여되는 일에서 나와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이런 일이 창조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프롬은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개념을 “내 얘기를” 하는 것에 적용한다면, 내 삶의 고유한 맥락에서 우러나온 이야기, 내 본질을 반영하는 이야기, 그래서 그 언어가 나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생산적인 일이요, 창조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듣는 이로부터 깊고 진실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반응이 말하는 이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생산적인 일, 창조에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이 동반하며, 이러한 내적 경험이 일하는 사람과 대상이 하나가 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창조와 그에 따르는 보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의 예가 구약성서 창세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창조설화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 . (1:1-31의 일부)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작업을 하는데 그의 창조물이 그가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애정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창조 대상에 대한 이러한 내적 반응이 진정한 창조의 한 조건이라고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생성 대상에 대한 기쁨과 사랑을 낳는 작업만이 창조라는 의미를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너 달 전 어썸피플 독서모임에서, 이 모임에 처음 온 서른 살 된 한 여자분이 모임이 끝난 다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다른 분들이 제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들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이 분이 느낀 기쁨과 만족이 “내 얘기를” 함이라는 생산적 활동의 보람이요, 따라서 이 분이 이 모임에서 한 일을 창조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믿는다.[각주:4]

    위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으로부터 창조자의 행복에 대한 해석을 끌어냈는데,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같은 표현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행복이라는 의미를 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긍정함을 뜻하며, 피조물이 보기 좋다고 한 것은 인간이 삶(생명)을 사랑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는 이 두 가지 의미가 어머니의 사랑의 특성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에도 적용한다. “약속의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젖은 사랑의 첫번째 측면, 돌봄과 긍정의 측면을 상징한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음의 행복을 상징한다.”[각주:5]

    비록 창세기 이야기에 대해 프롬과 나는 접근 방향이 조금 다르고, 또 프롬은 “젖과 꿀”을 사랑에 적용하여 해석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의 틀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해, 창세기 이야기의 창조사건과 출애굽기의 ‘젖’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의 긍정을, 창조대상이 좋게 보임과 ‘꿀’은 이에 따르는 행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창조가 이루어지는 소통을 젖과 꿀이 흐르는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이태수 교수의 말에서 그는 유명 인사의 강연을 듣기만 하는 것과 독서모임에서 “내 얘기를” 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독서모임에서 말하기의 능동성과 참여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에서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지할 수도 있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어서 정말 좋았다고 말하는 서른 살 된 젊은 여성의 소감에서도 이 분 개인의 과거 소통 경험과 우리 (여성)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소통체험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에서는 2, 30대 젊은이들도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실 지난 3년 남짓 내가 참석한, 젊은 직장인이 주로 참여하는 수 많은 독서모임에서 받은 인상도 이와 일치한다. 달리 말해 대한민국은 소통의 젖과 꿀이 매우 부족한 사회이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쉽게 성사시키며, 너와 나가 함께 이루는 창조를 경험하게 하는, 그리고 이 밖에도 여러가지 장점을 지니는 훌륭한 독서모임이 더 많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창세기 첫머리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창조물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여섯 번은 (매번은 아니지만) 개별적인 창조 단계가 끝났을 때 나오고 마지막 표현은 창조세계 전체에 적용된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창조물에 대해 ‘좋다’라고 느꼈을 때 이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다음 단계 창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창조가 창조를 낳는, ‘창조의 창조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경험하는 소통의 창조에도 이런 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이 넘쳐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지고 더욱 흥성하기를 기원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미와 진실의 합창>, 삼육출판사, 1990, p. 59. [본문으로]
  2. 조선 비즈, 석학 인터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전병근 기자, 2014.10.25.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3. Harper & Row, New York, 1956, p.17. 번역과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4.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창조를 이야기할 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대화대청을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이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예로 든 여자분이 말하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행복은 듣는 사람의 경청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깊이 있는 말하기와 듣기는 개인적인 만남이나 책을 매개로 하지 않는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창조적인 대화와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역시 위에서 말한 책에 결부된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사회적인 권위가 있는 한 책을 매개로 말하는 사람은 이 권위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권위의 성격과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책의 권위와 더불어 갈 수도 있고 거슬러 갈 수도 있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책의 권위에 편승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비판할 때 이 비판이 설득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저자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람의 권위가 부여된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 책의 권위와 교섭하면서 얻는 권위가 그가 얻는 창조의 기쁨과 만족에 직접 관여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같은 책, p.49. 번역은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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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심범섭*



   몇 주 전 11월 5일 토요일 박근혜 퇴진을 위한 집회(“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하려고 광화문 광장에 갔다. 아직 오후 4시 전이라 광장에서는 이 집회에 앞서 백남기 선생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중고등학생 약500명이 독자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중고생혁명지도부’라는 조직이 주최한 집회로 보였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원래 행진을 허락받은 한계 지점에서 길을 막아 선 경찰 때문에 멈춰서야 했다. 한참을 대치하다가 결국 해산했고, 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이제 광장에서 진행되는 일반 집회에 참석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을 눈물이 솟기도 했다. 무엇이 이들의 맑은 한국어를 분노하게 했나 마음속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날 열린 큰 일반 집회에서는 청와대를 향한 행진이 없었다는 점이다. 곧, 이날 짧은 거리나마 청와대 쪽으로 행진한 단체는 이들 중고등학생들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현실적인 사정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가장 어린 참여자들이 가장 과격한 행진을 실행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격동하는 최순실 정국에서 중고등학생들은 자기들만의 집회를 열거나, 일반 집회에 참여하거나, 일반 집회에서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거나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학생 집회를 보고 감동을 받은 다음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한 신문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의사표현을 훼방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학교측에서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철거하거나, 대자보를 붙이는 것을 반대한 경우도 있었고, 공적인 장소에서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을 교칙상 징계하겠다고 언급한 경우도 있었고, 촛불집회 등에 참석한 학생들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자보 뜯고, 막고, 사찰까지 . . . 탄압 받는 중고생들 ‘시국선언’, 경향신문, 2016년 11월 9일.) 이 가운데 가장 내 시선을 끈 내용은 대구의 한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대구 달서구 와룡고등학교 학생회는 지난 8일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시국선언문 대자보를 게시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학교장에게 알렸지만 거부당했다. 학교 측은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같은 기사)  


    학교 측이 제시한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대구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표면적인 이유 뒤에 다른 이유가 숨어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맥락을 제쳐놓고 그저 이 이유의 표면적인 표현만을 읽는다해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왜 나는 동의할 수 없을까에 대한 생각은 우리 어른들이 다음 세대(아직 어른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소박한 답을 내놓고자 한다. 


1


    첫번째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강릉군 상산면 관음리에 사는 최영택의 집에는 출가했던 딸이 첫 아이를 해산하려 친정에 와 있었다. 딸은 아들을 낳았고 환갑이 지나 외할아버지가 된 최영택은 아기를 보러 들어갔다. 이때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곧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었고 갓난 아이에게는 큰절을 올렸다. 외손자에게 이런 예를 다한 것은 “새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때 외할아버지에게 큰절을 받은 아기가 우리 아버지이다. 곧 최영택이라는 특이한 인물은 우리 아버지의 외조부였다.) 최영택 어른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분에게는 갓태어난 아기의 새로움을 소중히 여기는 남다른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단지 외손자라는 아랫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태어남의 신비, 새로운 사람을 낳는 인간의 힘, 새로운 생명이 함축하는 가능성과 희망, 새 생명의 소중함과 기쁨 등을 구현하는 사건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창하게 말해서, 최영택 어른이 방금 태어난 외손자에게 큰절을 했을 때 그는 인류 역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에게 절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일화를 빌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어른들에게 새로운 생명, 어린 생명에 대한 경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아기든,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기본적으로 인간인 이상 우리 어른들과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평등주의적인 생각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새로움과 이에 동반하는 더 큰 가능성에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대한 경의는 창조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의는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한 필수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면 당연히 어린 사람의 새로움에 대해 경의를 품는다는 생각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그렇다면 어린 생명도 경외하라.’ 


2


    둘째, 우리 어른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내 아이를 키우지도 않고 일하면서 어린 학생들을 만날 기회도 없는 내가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2014년 봄이었다. 그때 나는 일산 동구 장항동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라페스타라는 상업 구역에서 중고등 학생을 많이 보게 되는 동네였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늘 서로에게 아무 상관없는 남이었다. 서로 말 한 마디 할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길거리에서 많이 마주치는 중고등 학생들이 이제 달리 보였다. ‘저런 애들이 죽은 거야! 저 생떼 같은 애들이 죽은 거야!’ 저런 애들이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어린 사람들을 위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에는 어떤 면에서 어른들이 우월하다는 전제가 들어있다. 어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직 어른 아닌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미숙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판단이 사회 전반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만18세가 되어야만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고, 2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극장에서 성인영화를 볼 수 있다. 또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고, 1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인터넷 성인영화를 볼 수 있고, 자기 명의로 재산 등록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혀 그들을 통제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아직 20년 가까이 살지 않은 사람들을 미숙하게 간주하는 것에는 경험적으로 자명한 이런저런 근거가 있다. 이 경험적 근거는 많은 경우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초월해 공통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더더욱 자연스럽게 ‘미성년자’라는 범주 설정을 수용하게 한다. 사실 많은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성장하는 방식이 이러한 공통점의 이유가 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사람 뇌의 전전두엽 피질은 여러가지 정보를 종합해 판단을 내리고 충동을 억제하고 계획을 세우는 기능, 즉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가장 크게 구별 짓는 기능을 담당하는데, 물리적 성숙이 완전히 이루어지는데 약 25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 부위가 사람의 몸에서 가장 늦게 성장이 완료된다고 하므로 사실 사람은 25세쯤 되어야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열 아홉살된 사람들이 스물 여섯 살 된 사람들보다 대체적으로 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생물학적 이유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어린 세대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도록 책임의식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나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한 대목을 나름대로 해석해 이 생각과 연결시키려 한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 가운데 첫째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27-28, 1:31-2:3) 


    이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엿새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마지막에 창조된 존재였고, 하나님은 그 다음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 이야기가 구축하는 세계의 논리를 따르자면 인간이 창조되어 처음 맞은 날은 안식일이었다. 곧, 비록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안식일에 쉬셨지만 인간은 일한 것도 없이 우선 안식일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은 먼저 쉰 다음에 일을 시작한 흥미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인간 존재의 이러한 전개 방식을 각 사람과 세대의 경험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해, 새로이 태어난 세대는 안식일을 먼저 경험해야 하며, 우리 어른들은 그들에게 이 안식일이 하나님이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날로써 체험되도록 힘써야 하지 않을까? 


3


    셋째,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에게 때로 어른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게 (어떤 때에는 사실 어른보다 월등하게) 현실을 인식하거나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위에서 두번째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전반적으로 어른보다 미숙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일반론일 뿐이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많은 지식과 정밀한 분석력이 필요한 상황일수록 더 많이 살고 공부한 어른의 판단이 더 믿을만 하겠지만 어떤 현상의 선악정사 여부를 파악하는 것 같이 근본적인 가치 판단을 제대로 내리기 위해선 반드시 어른이거나 경험이 많을 필요는 없다. 

    사람이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더 현명하지는 않다. 기독교 성서에는 나이가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는 견해가 실려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구절을 보라.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편 119: 98-100)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기 32: 6-9)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Scott Peck, 1936-2005)이 쓴 책 <잘 가지 않는 길을 더 따라가서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led)>에는 저자가 처음 기독교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말하는 내용이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백인으로 성장했지만 그는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교회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가보기로 한 교회는 우리 집에서 몇 블락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 교회 목사는 당대 가장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그의 일요일 설교는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로 방송이 되었다.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쉽게 그가 가짜임을 간파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서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처음 갔던 교회 목사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저명한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도 가보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 버트릭(George Butrrick)이었고,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그가 거룩한 사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간파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열 다섯 살 된 내 빈약한 머리는 이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 당시 가장 유명한 기독교 목사가 있었지만, 내가 열 다섯 살 때 판단하는 한, 영적인 성장 면에서 나는 이미 그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기독교 교회에 분명 나보다 여러 광년 앞선 또 다른 목사가 있었다.[각주:1] 


    이 글에서,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 밖에 안된 아이의 내적 능력은 적어도 두 차원에서 어른들과 대조되고 있다. 우선 표면적으로 이 아이와 당대 가장 유명한 목사의 영적 수준이 대비된다. 그리고 암시적으로 목사의 수준을 파악하는 능력 면에서 이 소년과 기독교인 어른들이 대비된다. (이 어른들이 소년 스캇만큼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가짜 목사가 최고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렇게 어른을 능가하는 소년의 영적 수준과 판단력은 그가 이전에 기독교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지만 열 다섯 살 난 스캇은 과연 열 다섯 살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착각하는 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어린 소년은 알고 보면 사춘기의 격랑을 거치면서 과대망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내용과 앞뒤 맥락을 살펴볼 때 지금 50대 후반에 이 글을 쓰는 스캇 펙은 40여 년 전 자신의 판단을 승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신뢰할만한 어른으로부터 어떤 면에서는 중학생이 많은 어른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내용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소년 스캇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명철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라는 대구 와룡고등학교 일부 어른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주장의 가치를 그것이 어른에게서 나왔는가 아닌가를 따져서 판단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예를 들어 문학이라는 영역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 현대시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승무”는 조지훈이 열 여덟 살 때 쓴 작품이다. 요즘 학제에 따라 말하자면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를 미성년자가 썼다고 해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발언도, 그리고 어떤 분야의 어떤 발언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면 받아들여야 한다. 초등학생의 표현이라도 말이 되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고등학생들도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른들에게 다음 성경 구절이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문제를 다루지만 한 사회에서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교육하는 차원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권면의 말씀에 담긴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어린 세대에게 어른의 언행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에 따른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견해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정의감, 선악판단 능력, 공정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말씀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언행에 노여워할 때 이에 귀 기울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나 파악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도 암시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노여워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와룡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노여움을 표현하는 아이들을 또 한번 노엽게 한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할 지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이 한 살 차이에도 의미를 두는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자격 없이도 발언권이 강해지고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의견이 존중 받지 못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특히 미성년자들의 생각과 느낌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원래부터 이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와룡고등학교에서도 일부 어른들이 그렇게 답답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어린 사람들)은 분명 미숙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미숙한 건 아직 새로워서이며, 이 새로움은 우리 안에서 잠든 생명력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면 영혼이 치유된다.” 

    그리고 신약성서 <골로새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3:21).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말씀과 비슷한데, 아이들을 노엽게 하면 “낙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낙심은 무거운 마음이요, 낙심한 마음은 안식하는 마음일 리가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노여움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분별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그들이 먼저 안식일을 누리도록 책임감 있게 노력해야 하겠다. 우리 아이들이 낙심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Touchstone, 1998, p.120. 위의 인용문은 1998년에 나온 책에서 옮긴 것이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3년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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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그러진 인문학



심범섭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대중 인문학 서적인 윤소정의 <인문학 습관>(다산호당, 2015)과 박웅현의 <다시, 책은 도끼다>(북하우스, 2016)를 읽게 되었다. 윤소정은 “나의 잠재력을 깨워 본인의 길을 만들어가는 교육”을 지향하는 교육기업 인큐의 대표이며, 박웅현은 광고인으로서 TBWA KOREA 크리에이티브의 대표이다. 윤소정은 책에서 고전을 읽는 인문학에서 벗어나 자신의 물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답하면서 성장하는 “실용 인문학”을 하라고 권유한다 (p.51). 이 책은 이런 목적을 위해 어떤 구체적인 습관을 어떻게 형성해야할 지를 이야기하는데, 앞 표지에 씌여 있는 “나만의 업을 만들어가는 인문학 트레이닝북”이라는 표현이 이런 성격을 간명하게 전달한다. 박웅현의 책은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에서 그가 책읽기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인데, 자신이 감명깊게 인문서적의 장점과 의미있게 다가왔던 이런저런 구절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는 책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읽는 것이고 “천천히” 읽어야한다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p.5).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젊은이에게 인문학 멘토로 인식되고 있는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답답함과 우려를 느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제시하는 인문학의 모습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대중 인문학 담론을 좀더 비판적으로 살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비록 이 글이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중 인문교양서가 보이는 전체적인 경향을 다루지는 못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인문학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를 환기하는 기능은 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는 ‘사람의 무늬를 배움’이요, 지식의 분야로는 ‘문학, 역사, 철학’ 세 분야라고도 하고, 여기에 ‘언어, 예술, 종교’를 덧붙여 여섯 분야라고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 근본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공부’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열 여덟 살 때 형 미하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썼다는 다음 구절을 우리는 인문학 선언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다.


인간은 불가사의이다. 만일 그대가 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일생을 다 보내버렸다고 해도 시간을 낭비했다고는 말하지 말라. 이제 나는 이 불가사의에 나를 바치겠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윤소정은 그의 책에서 인문학을 여러 번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정의하는데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는 표현이 그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 (p.29). 박웅현은 그의 책에서 인문학을 명시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지만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그가 생각하는 인문학이 위의 일반적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두 저자가 인문학을 정의하는 방식에 이미 어떤 파격적이거나 문제되는 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 공통된 문제점으로는 적어도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인문학의 목표와 이상을 온전히 논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이상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자아실현과 세계개선이라고 생각한다. 곧 내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이 세상을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계를 개선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우리 후손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을 뜻하고, 우리 시대에는 이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 자연환경과 인간 아닌 생명체에 대한 배려도 첨예하게 요구된다. 윤소정와 박웅현의 책은 세계개선의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인문학은 자아실현의 인문학에 머물고 만다.  

    세계개선이라는 거시적이고 범인류적인 지향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하신 말씀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김용옥이 그의 책 <중용, 인간의 맛>에서 동양철학의 ‘우환’ 개념을 정의하는 대목이다. 대인이 우환하는 다섯 가지 중 마지막 두 가지가 세계개선에 관련된다고 본다.  


입에 풀칠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이쁜 새악씨 못 얻을까 걱정하고, 벼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가계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 . . 이런 걱정은 “우환”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소인의 근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환이란 무엇인가? 우환이란 반드시 대인의 우환이다! 대인의 우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배우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덕을 닦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천지가 바르게 자리잡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요, 만물이 잘 자라나지 못할 것을 우환하는 것이다. (p.124)  


    흥미로운 사실은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 이러한 인문학의 이상에 해당하는 내용이 한번씩,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교육과 관련하여 등장한다는 점이다. <인문학 습관>에서 윤소정은 자신이 운영하는 교육기업에서 일하는 교사들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큐는 ‘진짜 선생’이 되고 싶다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가고 있답니다. ‘교육만이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일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선생님들이시죠. (p.169)  


    박웅현도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하면서 본질적으로 같은 생각을 말한다.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고,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p.199). 이 두 인용문에 나타난 교육 철학에는세계개선이라는 인문학의 한 이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서 한 고립된 언술로만 존재하지 책 전체의 큰 의미축에 포섭되지 못한다.  

    이때 이런 이의 제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이상에 세계개선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이를 포함시키는 것은 당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닌가? 이 중요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인문학의 이상은 그 성격이 종교와 교육의 이상과 같다.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와 같고, 가르치고 배우는 ‘학’이라는 점에서 (역시 종교 그리고) 교육과 연결된다. 그리고 종교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류 사회에서 이미 상당히 객관적인 대답이 확보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철학자 안병욱 선생이 종교의 목표를 규정하면서 쓴 표현을 빌리면 “자아완성과 인류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영성계발만을 강조하거나 나 한 사람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일부 기독교의 흐름을 비판한다. 그리고 위에서 인큐 교사들과 박웅현의 교육철학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라기보다는 교육의 이상에 객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책이 공유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인문학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저자는 인문학을 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새로운 기쁨과 만족을 알게되는 것만 말하지 새로운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윤소정의 경우 새로운 습관을 통해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 고통은 내가 말하는 고통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두 책에서 인문학의 긍정적 효과는 일상, 곧 평범하고 익숙한 세계를 주체적으로 세밀하게 탐구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박웅현은 이런 과정에서 몰랐던 기쁨을 느끼리라고 말하고, 윤소정은 이런 실천이 새로운 평안과 활력을 가져오며 더불어 이 시대의 훌륭한 “인재”가 되는데 유효하다고 말한다 (p.10). 그러나 박웅현의 말대로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해보”면 “또 하나 삶의 즐거움”만이 얻어지는 것일까? (p.48)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을 잘 들여다볼 때 우리는 몰랐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몰랐던 추함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쁨뿐만 아니라 새로운 슬픔과 분노와 억울함과 역겨움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폭력과 모순과 마비가 편만하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늘상 쓰는 치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불편해지고 또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 않는가? 이보다 더 심각한 차원의 문제로서 미국의 윤리학자 제임스 레이철스(James Rachels)가 쓴 <도덕 철학의 요소(The Elements of Moral Philosophy)>(McGraw-Hill, 2003)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예로 들고자 한다. 지금 우리는 몇 백 년 전에 노예제도가 있었음에 대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놀라와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후 후손들은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그때에는 온 인류가 다 먹고 남을 만큼 식량이 있었는데 어떻게 다른 대륙에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하고 놀라와할 지도 모른다. 레이철스의 이런 지적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슬프게 한다. 우리 현재를 성찰할 때 이런 괴로움도 같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온전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박웅현의 책 제목에 나오는 ‘책은 도끼다’라는 표현은 카프카의 말 “책이라는 것은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에서 유래한다. 윤소정도 그의 책에서 이 말을 언급하며 “이 문장이 너무나 좋은 나머지 늘 영어 문장까지 달달 외우고 다닌”다고 말한다 (p.23).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 비유 자체의 논리 안에 ‘깨어지는 아픔’이 있음을 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독서 차원에서 이 깨어지는 아픔을 정확히 포착한 예를 우리는 이상민의 <나이 서른에 책 3,000권을 읽어봤더니>(대림북스, 2015)에서 만난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좋은 책은 큰 충격과 혼란을 준다. . . .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내가 모르고 있던,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이 바로 잡히기 때문에 당연히 명현 현상이 올 수 밖에 없다

. . . .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고 괴롭지 않다면 어쩌면 제대로 된 독서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은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라는 진실과 맞닥뜨려 보면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9-30) 


    우리가 인문학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책읽기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이상민이 말하는 명현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이 인문학의 위로와 기쁨만을 말하고 아픔과 고통에는 침묵한다는 비판에 대해 이러한 변론도 가능할 것 같다. ‘이 두 저자도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이 가능함을 알지만 고통이 결국에는 기쁨으로 귀결되거나 고통의 기저에 기쁨과 평안이 깔려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고통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누구든 기쁨과 고통 사이에 이렇게 어떤 연관을 설정하여 결국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고통 자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언급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고통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삶에서 실천하는 인문학의 고통이 특히 가치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세계개선의 노력을 낳을 때이다. 세상의 추하고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이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이를 없애려는 결심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런 실천은 많은 경우 고독하고 위험한 가시밭길이다. 이렇게 인문학 하는 사람은 때로 따돌림 당하고 때로 박해 받고 때로는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그랬고 마틴 루서 킹이 그랬다. 인문학을 제대로 하는 것은 때로 목숨을 거는 용기와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진실을 말한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34-39) 


    윤소정과 박웅현은 인문학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이러한 위험 또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저자들이 인문학의 고통과 위험을 외면하는 것은 그들이 애초부터 세계개선의 지향을 외면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서 이렇게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지만 동시에 두 책은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관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윤소정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주창하는 실용 인문학을 습득하면 세속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유비로써 말하자면 윤소정은 이른 바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을 설파하는 기독교 목사와도 같다. 그의 책에서 윤소정은 유용한 습관을 제시할 때 거의 언제나 이 습관을 실천한 사람이 성공한 사례를 언급한다. 이 예로 등장하는 사람은 소박하게는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 인정받는 청년이지만 많은 경우 한국적인 또는 세계적인 거물이다. 그리고 “배움의 주체가 비로소 내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이 시대가 원하는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다고 (p.249) 믿는 사람으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기도 한다. 


사실 잘된 사람들을 보면 출중한 능력이나 뛰어난 성적 때문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단련’되었기 때문에 성공을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p.241) 

저의 또 다른 선생님은 노력하면 바로 성과가 나온다는 말은 뻥이라고 말씀하시며 ‘끓는점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똑똑한 친구들이 성공을 못하는 이유, 바보 같은 친구들이 목표를 결국 이루는 이유 또한 이 원리 때문이랍니다. (p.332) 

앞서 말한 유석환 대표님은 어느 날 제 어깨를 두들기며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윤 대표, 힘들지? 그래도 그냥 무식하게 끝까지 해야 해. 끓는점에 도달할 때까지. 결국 성공은 똑똑한 놈들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처럼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p.333) 


    이런 예들과는 달리 겉으로 금방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윤소정의 성공주의 인문학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도 있다. 책의 3부 “인문학은 해석이다”의 7장 “나를 타인에게 각인시킨다”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미지로 계속 인식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달리 말해 그는 퍼스널 브랜딩이라고 하는 분야에서 쓰는, 개인 마케팅의 한 기법에 불과한 것을 인문학 습관으로 제시한다 (pp.220-32). 이 둘이 다름은 호박과 오이가 다름과 마찬가지인데 윤소정은 이 차이를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인문학 습관이란 사회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성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박웅현은 이러한 성공주의에서 자유롭다. 그가 독서로써 지향하는 “풍요로운 삶”은 삶과 인간과 세계를 더 이해하면서 더 위로와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는 삶이다. 아래 인용문이 그의 이러한 철학을 대변한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 . 가족이나 친구처럼 생각해보면 내 삶의 전부인 사람들, 아침밥, 새소리, 햇살, 늘 거기 있지만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즐거움의 대상이 되면 행복하겠구나. (49) 

별 볼 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힘. 그게 삶의 지혜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자 . . . (54) 

현재를 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고,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내려는 태도가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삶의 자세라는 말입니다. (88) 


    종교적 인물로 유비하자면 박웅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모든 순간의 충일함을 깨달으라고 권하는 뉴에이지 신비주의 구루 같다고 할까? 박웅현 인문학의 이런 특성을 인상적으로 알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수 년 전 박웅현이 어떤 라디오 방송에서 인문학의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청취자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한 사람이 좀 삐딱하게 이렇게 물었다.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옵니까?” 박웅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밥맛이 좋아집니다.” 인문학이 밥맛을 더 좋게 한다는 말을 그는 2011년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책은 도끼다>에서도 언급했고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도 다음과 같이 인유한다. 


오늘 소개해드린 두 권의 책 어떠셨는지요?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보시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선을 만나고, 지혜를 얻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면 다른 건 몰라도 밥이 정말 맛있어질 겁니다. (p.43) 


    우리가 이 밥 비유의 의미 구조 안에 들어가 말한다면 윤소정은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온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소정과 박웅현 두 사람을 놓고 비교하자면 박웅현 인문학이 한 차원 더 높다고 하겠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틀렸다. 인문학을 하면 때로는 밥맛이 좋아지지만 때로는 밥맛이 떨어지고 때로는 아예 밥숟갈을 놓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실 이 두 저자가 인문학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들의 책에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윤소정이 자기 책을 성공학 습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고 박웅현이 자기 책을 독서법 강독이라고 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따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책을 인문학 책으로 규정하므로 나는 인문학의 좋은 이름을 지키고 싶어 이렇게 수다스러워졌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책 <인문학 습관>과 <다시, 책은 도끼다>에는 삶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가르침이 많이 있다. 나 자신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새롭고 소중한 통찰을 많이 배웠다. 그러나 근본 인식의 틀을 볼 때 이 책들에는 인문학 하는 삶의 고통과 위험, 그리고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세계개선의 이상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도 왜 이 책들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서 그렇게 높은 인기를 누릴까?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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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생명의 말



심범섭



   올해 5월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받은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우리 일상에 만연한 폭력과 평범한 사람의 마음에 숨어있는 폭력성, 더불어 소통, 이해, 소외, 책임, 시간, 죽음 등 삶에서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다. 서로 연결된 이야기 세 편(“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상당히 복잡하고 매우 어렵다. 작가 한강도 상을 받은 다음 한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내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나눠갖는 마음으로 읽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재미있게, 또는 몰입해서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상징성와 암시성이 높은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을 자기 나름대로 유기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되풀이해서 읽는 것과 더불어 ‘한달만에 토익 점수를 200점 올리겠다!’라고 하는 학생 같은 열의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나 자신도 이렇게 성실한 자세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한 대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1. 불편하지만 낯설지 않은 진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영혜라는 젊은 여자로서 어느날 무서운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채식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 간 다음 급기야 나무가 되겠다며 음식 먹는 것 자체를 거부하면서 죽어가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폭력과 폭력 충동이 묘사 되는데, 그 가운데 폭력성이 가장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가장 복잡하면서도 또 충격적인 예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자살을 시도하는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인혜는 동생과는 달리 일상성의 경계 안에 머무르며 좀 지나칠 정도로 남을 배려하고 또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투철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면서 자기 삶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남편과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 그로부터 성관계를 강요당한다. 이런저런 계기로 그는 자신의 이런 소외를 깨닫게 되고 어느날 새벽 (사실 남편으로부터 또 한번 ‘배우자 강간’을 당한 다음) 급기야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 자살을 결심한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p.200)  


    인혜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뒷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기로 한다. 집을 나서기 전 그가 이를 위해 준비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마치 추운 듯 떨려오는 몸을 일으켜 그녀는 장난감을 놓아 두는 방의 문으로 다가갔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녁마다 지우와 함께 장식해 걸어놓은 모빌을 떼어낸 뒤 끈을 풀기 시작했다. 단단히 묶어두었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아팠지만, 참을성 있게 마지막 매듭을 풀어냈다. 장식했던 별 모양의 색종이와 셀로판지를 차곡차곡 모아 바구니에 정리한 뒤, 끈을 말아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p.201)  


    인혜는 목을 매는 도구로서 왜 굳이 아들 지우와 같이 만들었던 모빌 끈을 선택할까? “단단히 묶어두었기 때문에” 풀어 챙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에도 하필 이 끈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 뭔가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혜가 이 끈으로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광경을 상상하면 우리는 그의 숨은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끈은 원래 모빌을 달았던 끈이므로 이제 그의 시신이 모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빌이란 원래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사물이므로 인혜도 자기 시신으로 만든 모빌이 누군가에게 보이길 원한다. 그가 원하는 시선이 다름아닌 네 살 난 아들 지우의 시선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아들이 엄마와 함께 만들었던 모빌 대신 엄마의 죽은 몸이 모빌이 된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이 상상 속의 장면은 이때 인혜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섬뜩해진다. 이날 새벽 아직 자살을 생각하기 전에 인혜는 “이상한 흉통”, 곧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점점 자신의 몸을 죄어들어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p.200).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취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옷장문을 열었다. 아이가 젖먹이 때부터 좋아했던, 그래서 그녀가 집에서 자주 입었기 때문에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보라색 면티셔츠를 꺼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그녀는 그 옷을 입곤 했는데, 수없이 빨았는데도 젖내와 배냇내가 맡아지는 것 같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효력이 없었다. 흉통은 차츰 심해졌다. 숨이 가빠왔으므로 그녀는 계속 심호흡을 해야했다. (p. 200)  


    그러므로 인혜가 바라는 것은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엄마의 시체로 만들어진 모빌을 보는 것이다. (이 옷을 입을 당시에는 아직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살을 결심한 다음에도 이 옷을 계속 입고 있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무의식에서 이런 바람이 있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아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트라우마)를 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의도를 특별하고 기괴한 유형의 폭력 충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애초에 집밖에서 죽으려 했음을 고려할 때 인혜의 이러한 가학 의도는 의식적인 생각으로 형성되지 않고 무의식에만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그의 무의식은 “무의식이 하나의 충동, 모호한 충동의 자리가 아니라 꾀바른 전략적 자리”라는 통찰을 실감나게 하기도 한다.  

    자살하러 산을 오르기 전의 인혜의 행동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가 평소에 선량하고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폭력적 충동이 아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장면은 좋은 엄마에게도 자식에 대한 잔인한 가학 충동이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인혜의 의도가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아들 지우는 인혜의 절망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혜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자신과 그의 남편 때문이었고 더 깊이 따져본다면 친정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혜의 가학 의도는 가장 약하고 무고한 존재에게 향해 있다. 이때 인혜는 비겁한 사람이며, 자신의 죽음이 고통을 초래한 자에 대한 보복이 된다는 정의의 명분도 성립시키지 못한다. (사실 인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성관계를 강요하는 남편과 그와 성을 나눔으로써 존재하게 된 아들이 동일시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작품에서 그가 자살을 생각하기 전 “어둠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부자의 옆 얼굴이 가련하게 닮아 있는 것을 보았다”(p.199)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두 사람을 동일시한다는 근거가 될 만하다. 달리 말해 인혜는 남편에게 할 복수를 아들에게 대신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인혜의 자살 기도에는 아들에게 의도하는 정신적 폭력이라는 차원과 더불어 그가 아들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싶어한다는 차원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계획하는 자살에는 자신이 힘들게 살았음을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많은 경우 폭력에는 이해받고 수용받고 싶은 욕구가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다시금 인혜가 보이는 것을 전제하는 모빌이 되고 싶어했다는 점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사실 이 소설 전체에 걸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소통과 이해와 수용을 원하는 것은 중요한 한 주제로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주어진 대목에서 인혜의 왜곡된 가학 의도를 읽을 때 우리는 이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가족의 사랑 아래 감춰진 적의와 폭력, 그로 인한 고통과 인식 왜곡 등은 사실 특별하기보다는 흔한 경험이다. 한강의 소설은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불편하지만 낯익은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것 뿐이다. 


2. 새로운 "생명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인혜는 (다행히도) 그의 자기 파괴와 아들에 대한 가학의 의도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는 자살을 허락하는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의 경험은 이후의 회상에서 이렇게 이야기 된다.  


    그녀는 알 수 없다. . . . .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p.205-06)  


    인혜의 자살 기도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인 것 같다. 목매달을 나무를 찾는 사람에게 죽기를 단념하게 하는 “무자비”하고 “서늘한 생명의 말”이란 도대체 어떤 말 또는 기운인가? (햇빛을 받아 초록색 잎이 불꽃처럼 느껴지는 나무들은 이 소설에서 강한 식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된 심상이 되풀이해서 등장하며, 세번째 이야기의 제목 “나무 불꽃”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혜가 나무들에게서 들었던 말에 해당하는 말이 사람 사이에서도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말 또는 기운 또는 행동일까? 삶에 지쳐 죽고 싶은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어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목회자들은 이런 일을 더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가? 선지자 이사야도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50:4)라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에 대해서 우리는 들어본 바가 있었던가?  

    어쩌면 인혜가 새벽 햇빛 속에 선 나무들에게서 느낀 어떤 특별한 느낌을 인간 사이에서도 가능한 소통의 비유로서 이해하려는 이런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그 상응물을 찾아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절망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싶은 바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적어도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위로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전해지는 언어적 표현과 단지 자기 존재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행사하는 건강한 영향력의 구분이다. 이때 의도되지 않은 긍정적 영향력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게 하는 것은 위로하는 언어에도 곧잘 숨어있는 조종(통제)의 욕구 때문이다. “도움은 통제의 밝은 측면이다(Help is the sunny side of control).”이라는 말에는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부드러운 말에도 때로 딱딱한 억압(폭력)의 충동이 숨어 있다. 더하여 언어는 그 의도가 순수할 때에도 늘 부정확함과 오해의 부작용을 동반할 위험이 있다. 그저 자기에 충실한 사람의 영향력에는 이러한 그늘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인혜가 만났던 나무들은 단지 같이 있는 여러 나무가 아니라 서로 유대하고 연대하는 나무들이었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영혜가 어느날 언니에게 하는 말, “언니. . .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p.175)에서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해 나무들이 의도하지도 않으면서 발산하는 강한 생명력은 그들이 한 가족으로서 서로 손을 잡은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인간 세상에 적용한다면 서로 밀접하게 연대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셋째, <채식주의자>의 세계에서 나무들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생명체이다. 영혜가 나무가 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인혜가 마주친 나무들도 이런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폭력성이 폭력에 익숙한 사람에겐 사실 생경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나무들의 기운이 인혜에게 오히려 “무자비”하고 “서늘”하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폭력성의 부재가 우리가 사는 인간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노력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한 가르침이 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5:21-22) 


    우선 일상적인 무례함을 살인과 동일시하는 이런 관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더 상식적인 차원에서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불끈 화를 내거나 욕 한 마디 한 것이 때로 이런저런 불운한 인과의 연쇄로 살인과 같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화내고 욕하게 하는 마음이, 비록 그 표현에서는 살인보다 훨씬 사소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살인하는 마음과 같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해석에서는 욕하거나 화내는 행동은 작은 잘못으로 살인은 큰 잘못으로 구분하는 인식이 담겨 있는데, 이런 인식을 거부하는 제3의 해석도 가능하다. 곧 존재의 가장 심원한 차원에서는 처음부터 폭력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라는 해석이다. 바꾸어 말해 모든 폭력은 본질적으로 그 위상이 같으며, 작고 큰 폭력을 구별하는 것은 단지 지엽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말은 ‘이제 지엽에 속지 말고 본질을 파악하라’는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무들의 비폭력성을 가능한한 닮으려고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번째 해석이 일으키는 경각심이 아닐까?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도 나무를 비유로 하늘나라(이상적인 질서, 그러므로 당연히 폭력도 없는 질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복음 13:31-32) 어쩌면 폭력에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없다는 인식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한 겨자씨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한 선량한 엄마가 자살을 시도하다 포기하는 대목을 살펴보면서, 그의 절망에 내포된 듯한 미묘하고 잔인한 폭력성을 생각해 보고, 또 그가 자기 파괴라는 폭력을 저지르지 못하게 막은 나무들의 “서늘한 생명의 말”을 인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문학 작품을 독해하는 이 글은 매우 서툴고 주관적이다. 하지만 이런 글도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첨예한 담론으로 대두되는 오늘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폭력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더 철저히 생각하도록 추동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 본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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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복수



심범섭



   한국 사회에 고립화 경향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하며 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없다는 사람이 많고, 이런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고 하는데, 2014년 통계에서는 노인 100명 가운데 11명이 완전 고립 상태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경제불황으로 취업과 결혼 시기가 늦춰지고, 사별, 황혼 이혼, 기러기 가족 등의 이유가 더해져 현재 대한민국 4가구 중 1가구는 1인 가구라고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은 전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건강 상태가 더 안좋다고 한다.    

   고립화 경향을 보여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혼자 밥 먹는다’라는 뜻의 “혼밥”이다. 이 표현은 혼술 (혼자 술 마신다), 혼영 (혼자 영화 본다), 혼여 (혼자 여행간다) 등 혼자 활동함을 뜻하는 여러 표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혼밥 현상 자체는 단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을 시간적 또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 같은 부정적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는 여유를 즐기고 싶다 같은 이유로 자발적으로 혼밥을 선택한다. 하지만 원치 않는 고립이 혼밥 현상의 무시할 수 없는 한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혼밥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문재 시인은 “‘혼밥’과 시의 마음”이라는 글(2015년 12월 25일 경향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밥 먹듯이 해온 말이지만) 밥상이 둥근 이유는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먹기 위해서다. 평화에는 평상에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혼밥이 많은 사회는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사회다. 사회가 없는 사회, 가장 나쁜 사회다.  


    이문재 시인은 혼자 밥 먹는 것이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현상과 이어지는 이유를 진지하게 논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립과 사회의 평화를 관련짓는 이 구절은 나로 하여금 ‘왜 고립이 사회의 평화를 저해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소박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사람이 홀로 있다(고립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 생각해보니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듯 하다. 첫째, 물리적인 혼자됨, 곧 옆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경우이다. 비록 모르는 사람, 말 한 마디 안나누는 사람이라도 그가 가까이 있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가장 근본적인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에 반응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한 서양 학자가 고독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곤충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해당 곤충 두 마리를 같이 있게 했을 때 혼자 둔 개체보다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읽은 글을 지금 찾지 못해 학자 이름, 글 제목 등 세부사항을 언급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어울리면서 살면 더 오래 산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이때까지 이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인간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 덕분에 생물학적 수명도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학자는 자신의 곤충 실험 결과를 보면서, 의미에 대해 사유하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동물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며 인간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제기했다. 적적할 때 사람 많은 거리에 나가거나 찻집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 것을 보면 이 주장은 맞는 것 같다. “늙을 수록 북적북적한 데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지만,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람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정신과 신체 건강에 좋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단순히 다른 사람 없는 곳에서 홀로 지내는 것은 고립의 한 의미있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의미있는 인간 관계가 없다는 것이 홀로 있음의 한 가지 중요한 정의가 될 수 있다. 의미있는 인간 관계란 서로 관심을 기울이며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관계이다. 사람에 둘러싸여 살아도 이런 관계가 없으면 사람은 외로움을 느낀다. 이런 경우를 “홍수 때 오히려 먹을 물이 없다”, “군중 속의 고독” 같은 표현을 빌어 표현하기도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표현은 원래 데이빗 리즈만(David Riesman) 등이 1950년에 출간한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이라는 책에서 제시하는 개념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군중 속의 고독이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군중 속의 고독”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영문학사에서 이러한 관계적 고립을 가장 극명하게 형상화한 작품 가운데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단편 소설 “안타까운 경우 (A Painful Case)”라고 생각된다. 중년의 지성인 제임스 더피( James Duffy)는 어느 누구와도 친밀한 인간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몇 년 전 시니코(Sinico) 부인과 가까와진 적도 있었지만 부인이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절교하고 만다. 외로움에 괴로워하던 부인은 술에 의지해 버티다가 어느 날 드디어 자살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더피는 자신의 고립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향연으로부터 쫓겨난 (outcast from life’s feast)” 것으로 느낀다.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없이 사는 것은 “삶의 향연에서 쫓겨난” 채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셋째,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가치관,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바꾸어 말해 근본적인 인식에서 이해받지 못할 때 고독을 느낀다. 누군가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내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근본 인생철학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훌륭한 친구와 결별하기도 한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여양이라는 사람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알아준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철학을 이해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 어떤 기독교인들이 종교관이 다른 가족보다 종교관이 같은 남과 더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도 근본 세계관이 같은가가 유대감에 의미있게 영향을 미침을 드러내는 한 예라고 할 것이다.  

    넷째, 우리는 우리와 ‘처지’가 같은 사람이 없을 때, 곧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때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처지라는 것은 삶의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더 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더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라는 속담은 삶의 어떤 중요한 처지에 대한 이해를 이야기한다. 신경림 시인의 “겨울밤”이라는 시는 농촌 청년들의 고민과 좌절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슬픔을 아는 건 우리뿐”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농촌 청년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와 이 집단 밖에 있는 사람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동시에 전한다. 거의 20년 전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전화상담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선생님, 굶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상담가는 당황하면서 자신없게 이렇게 말했다. “밥인가요?” 그러자 전화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같이 굶어주는 사람이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크게 위로가 됨을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힘든 사람에게 그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고독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우리는 신 또는 참된 자아 또는 실재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근원적 대상과 합일되지 못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이를 종교적 차원에서 느끼는 고립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종교를 믿거나 영적 수행을 실천하는 것은 이 차원에서 고립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약성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의 명령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신과 소통하기를 그치지 말라는, 곧 종교적 차원에서 고립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차원에서 고립을 벗어나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 고립을 벗어나는 것과 갈등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책을 쓴 김정운은 “자기 성찰은 외로움에서 온다. 외로운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 주말에 반나절이라도 혼자 있어볼 필요가 있다. . . . 더 외로워야 덜 외롭다”라고 말한다. 물리적으로 혼자됨으로써 깊은 자아를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불교나 천주교 같은 종교에서는 제도적으로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종교적 차원의 고립을 극복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사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 다섯 가지 차원은 서로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꾸어 말해 이 가운데 사회적 통합과 평화를 더 직접적으로 저해하는 고립은 무엇일까? 나는 관계적인 고립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 철학적, 처지적, 종교적 차원의 고립은 관계적 고립보다 덜 일반적인 문제인 것 같다. 달리 말해, 대다수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 있지 못할 때 다른 측면에서 홀로 있을 때보다 더 불행하게 느끼는 듯 하다. 그리고 언론 보도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관계망”이 약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계적 고립과 사회의 평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먼저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이 누군가와 마음 편하게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게 규범 의식이나 윤리 의식이 퇴화하고 소통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은 사람은 선량한 의도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런 면에서라도 이문재 시인의 지적에 동의하게 된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은, 관계적으로 고립되는 주된 이유가 가난하거나 힘이 없어서일 때 가진 자 또는 힘 있는 자의 명시적, 암시적 멸시가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는 더욱 확연한 현상인데, 이와 관련하여 김우창 선생이 18년 전에 하신 말씀을 한번 들어보자.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값어치(남의 눈에나 자신의 눈에나), 사람의 값은 권력과 부와 지위에 의하여 정하여진다. 이것들은 우리 사회가 믿는 유일한 가치이다. (도덕적 자기 정당성의 느낌도 우리가 남달리 믿는 가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치의 추구는 사회 구조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 되기도 한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 체계에서 가해지는 수모를 피하며 자존심을 유지하려면 최소한도의 부와 권력과 지위를 확보하여야 하는 것이다.[각주:1]  


    거의 20년 전 글이지만 한국 사회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돌봄을 받고 싶어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를 생래적 권리(영어로 “birthright”로 표현하는)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대우를 충분히 받지 못할 때 사람은 분노하게 된다. 사실 제대로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모멸 받으면 분노하는 법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모멸 받기까지 한다면 그의 가슴에 간과할 수 없는 분노가 도사리고 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관심 받지 못함과 멸시 당함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부당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끼며, 어떻게 해서든 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약하기 때문에 짓밟히는 사람은 반드시 분노하고 반드시 “복수”를 생각한다.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복수심이 있는 사람은 심성이 거칠어져 그 말과 행동이 문득문득 차갑고 날이 서게 된다. 이런 면에서도 그의 현실은 평화를 이루는 좋은 조건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그가 보복 의식을 더 적극적으로 표출할 때 그 결과는 평화를 조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다. 그런데 복수는 많은 경우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게로 곧바로 향하지 못하고 자신보다도 더 약한 존재에게로 향함으로써 또 한번 부당한 상황을 낳고 만다. 여러 해 전 오키나와가 고향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안에서 주변인으로 차별받지만, 이들은 오키나와 남쪽에 있는 더 작은 섬들에 사는, 더 힘 없는 소수민족을 또 차별한다고 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폭행함으로써 울분을 해소하는 것도 왜곡된 복수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립과 복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나는 서정주의 어두운 시 “문둥이”에 한번 적용해 보고 싶다.  


문둥이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시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은 인터넷의 한 블로그에서 빌려온 다음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위해 죄 없는 목숨을 희생시키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문둥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본능적 삶의 애착과 원죄 의식을 말하고 있다.”[각주:2] 그러나 동시에 이 글에 소외된 자의 왜곡된 복수라는 의미를 담아 읽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아기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에 따라 아기를 죽이는 것을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모멸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속설 자체가 이미 복수를 위한 이론일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달리 말해, 이 시에서 우리는 고립되고 멸시받는 사람이 극단적인 분노 때문에 사회윤리의 제약에서 벗어난 보복의 이론을 만들고 이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가책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라스콜니코프도 같은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매우 고립된 사람이었는데, 비범한 인간은 인류 전체의 진보를 위해 사회의 규범을 어겨도 된다는 철학으로 살인 강도를 감행한다. 고립되고 모멸받는 이가 보복의 이론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고립 현상과 그로 인한 갈등을 들여다 볼 때 ‘고립되고 억압받는 자의 복수’라는 개념이 가장 명심해야할 사항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고립화 경향을 막고, “오만과 모멸”의 문화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구체적이고 절차적인 답을 내놓을 능력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답을 내놓을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현실적, 실천적 차원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종교기관과 봉사기관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대책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지하고 작은 개인으로서 소박하게 몇 가지 생각하는 바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우리 사회에 다른 사람의 사람다운 삶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미 고통받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에는 그 고통의 구체적 경험을 (완전히는 불가능하더라도) 가능한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을 낳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런 책임감은 나와 남의 존재가 그 근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곧 남이 사실은 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둘째, 부정적인 고립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거나, 부와 권력과 지위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에 저항하는 “이야기(narratives)”를 찾고 창조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역사와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여러 서사 장르에서 유용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또 새로이 창작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인문 교육, 문화적 교양활동에 해당하는 일이다. 인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종교인들이 이런 노력에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고립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에 대해 조금 상술하자면, 이런 이야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고립을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원치않는 고립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또 하나는 누군가가 고립되어 있는 모습만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이 고립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나 같은 상황에 있다는 이야기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허구라 하더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  

    세째, 고립된 사람 또는 모멸받는 사람이 사회 및 공동체에 잘 융화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이 사람을 단지 도와야 할 약자로 인지해서는 안될 것이다. 빈곤한 사람만이 아는 부요가 있다. 거창하게 이름을 붙이자면 “결여의 역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립의 고통을 겪은 사람은 함께 있음과 공동체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모멸에 분노해 본 사람은 존중과 공정함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깊이 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이런 차원에서 결여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는 감각과 판단력과 언어가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만 있는 지혜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배우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이들의 자존감은 더 높아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삶의 상황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더 깊고 예민하게 인식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고립화 현상을 사회 평화와 관련하여 복수라는 개념을 통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우리 가까운 곳에 “해와 하늘빛이” 서러운 사람들,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김우창, “투명성: 경제 위기와 도덕”, <정치와 삶의 세계>, 삼인, 2000, p.31. 이 글은 원래 <신동아> 1998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이다. [본문으로]
  2. http://blog.naver.com/paulus1993/2206859935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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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진실



심범섭



    곧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그래서 지금은 정치적 수사가 요란한 때이다. 분별있는 사람으로서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종종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자신의 작은 장점을 과장하고, 단점은 축소하거나 감추며, 개인의 야심을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위장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말이 흥성한 이런 때에 말에 대한 믿음은 허약해진다. 그리고 이런 때에 어떤 말이 참된 말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를 떠나 진실한 말의 의미를 헤아려 보는 것도 마음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어떤 말이 참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똑똑하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길 가운데 하나는 분석철학에서 다루는 진실론(theory of truth)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으로 상응론, 정합론, 실용론이 있고, 이 외에도 다른 이론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학술적으로 접근할 능력은 나에게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그저 나 자신의 주관적이고 소박한 견해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어떤 말을 참이라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네 가지 특성을 생각해 보았다. (이 글에서 “말”은 ‘언어’를 뜻하며 따라서 말과 글을 모두 가리킨다.)  


1


    말은 그 내용이 현실과 상응할 때 참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2016년 4월 4일 사과차를 마셨다”라는 문장이 있을 때, 실제로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이 위의 날에 사과차를 마셨다면 이 문장은 참이다.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 상황일 때 우리는 약속, 예측, 예언, 다짐, 계획, 선언 같은 범주를 다루게 된다. 미래를 향해 던지는 말은 미래가 이와 맞아떨어져야만 참이 된다. 많은 경우 이런 참을 얻으려면 말한 사람의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말의 내용이 현실과 상응할 때 우리는 이 말이 ‘정확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정확한 말이 정직한 말의 전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정직한 말은 많은 경우 정확한 말에 공평무사한 판단이 더해진 것이다. 이런 사실에 담긴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면 때로 자기도 모르게 정직하지 못하게 말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정확이 인지적인 개념인데 비해 정직이라는 개념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이므로 내가 한 말이 부정확했다라기보다 부정직했다라고 인식되는 것은 나를 더 난처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거나, 이미 한 말에 현실을 일치시키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훗날에 대한 예측이 (말한 이가 가만히 있어도) 맞아떨어져 말이 참이 되는 경우와는 다르게 우리는 때로 말 자체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은 이런 인식을 드러낸다.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비롭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인과관계 논리로 설명할 수도 있다. 어떤 말이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미쳐 그 말의 내용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주면 아이가 성격과 인격이 건전하며 성취도가 높은 사람이 된다는 주장을 우리는 듣는다. 더불어 악담과 저주의 말이 한 사람을 절망으로,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말은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현실이 되지 않는다. “내 국민은행 통장에 오늘 10억원이 들어온다”고 내가10억번을 말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 말이 새로운 현실을 낳아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참이 되는 경우에 감탄하고 때로 그러지 못함에 실망하면서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정 말이 기적처럼 현실을 창조해내기를 소망하는 듯 하다. 동화에 가끔 나오는 ‘소원을 말해 봐’ 모티프는 이런 소망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소망이 가장 거창한 차원에서 표현된 것이 히브리 (구약) 성서 <창세기> 제일 처음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서 신이 말로써 천지를 창조하는 장면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2


    어떤 말의 표면적 의미가 현실과 상응하지는 않지만 삶이나 인간의 이치를 맞게 전할 때 우리는 이런 말에서도 참을 인지한다. 이런 인식이 널리 정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는 소설 같은 장르가 “개연성 있는 허구” 또는 “가공의 진실”이라는 주장을 우리가 얼른 받아들인다는 사실인 듯 하다. 전설, 신화, 우화 등도 사실이 아닌 언어로 진실을 전달하는 방식이며, 속담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나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처럼) 이러한 예가 많다. 이러한 언술을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숨은 원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해석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열려 있으며, 또한 누가 해석하는가가 한 해석이 사회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이 전하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권력과 권위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언술 자체에 크고 무거운 권위가 부여되어 있을 경우에는 이 언술을 표면적인 의미로,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사실성은 인정하지 않고 진실만을 찾아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대한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1483-1546)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를 이렇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 바보는 천문학이라는 과학 전체를 뒤집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령한 것이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각주:1] 루터처럼 해석한 힘있는 자들이 코페르니쿠스처럼 다른 견해를 주장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루터 자신은 지동설 주장자를 물리적으로 박해하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도 교회 당국에 의해 처형되지 않고 병으로 사망했다). 오늘날에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서에 대해 서로 차분하게 대화하기가 늘 쉽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실 경험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로 전하기는 매우 어렵다. 언어의 정확함이란 어디까지나 타협의 범주이다. 우리는 인식과 기억과 언어의 한계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옆집 사는 사람이 오늘 한 평범한 일도 아주 정확하게 말로 재현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허구를 통해서도 진실을 전하는 언어의 차원이 있음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자서전 대신 자전적 소설을 쓰겠다는 말을 할 때 나는 그가 (예술적 형상화에 대한 의욕이 있어서겠지만 동시에) 개인사를 정확하게 기억해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저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3


   어떤 말이 평소에는 보기 힘든 인간의 더 ‘정직한’ 모습을 보여줄 때 이런 말을 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감정이나 소망 등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말을 하기도 한다. 비록 말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절실한 심정이 인간 본성을 더 깊이 깨우쳐 준다. 이런 말은 김춘수 시인이 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의 깊이”에서 우러나온다고 할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고 통곡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예 가운데 하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애인에게 바치는 찬사일 것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같은 말에 들어있는 최상급 표현은 이 안에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에 따르는 비교가 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이면 안된다. 이런 최상급은 일상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가리키기 위해 극한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고백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는 말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오래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불가능이 없다고? 그러면 럭비 공으로 농구공처럼 드리블을 해보시지?”라는 유머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에 절실한 내적 경험이 담겨있다면 이 말은 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소설가 윌리엄 마치(William March 1893-1954)가 쓴 단편 “자그마한 아내 (The Little Wife)”에서 우리는 이러한 언어의 슬픈 예를 만난다.[각주:2] 회사 일로 출장 중이던 조 힝클리는 아내 베시가 출산 후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에서 그는 두번째 전보를 받는데 여기에는 아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있다. 조도 이를 짐작하고 차마 전보를 꺼내서 읽지 못하고 찢어서 내버리고 만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까운 곳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기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가 방금 첫 출산을 했는데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하다고 말하고 자기가 아내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연애했는지를, 지금까지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술에 취하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마약에 취한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이다. 그러나 조에게는 자신이 베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그녀가 안전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있다. 열차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조는 역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장모를 만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거짓말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더는 베시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서 그녀를 살아있게 할 수 없었다.”[각주:3]  

    조 힝클리는 아내가 아이를 낳고 아주 건강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은 현실과 상응하는가의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점에서 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아내의 죽음에 깊이 절망하는 마음, 아내의 죽음을 부인하고 싶은 간절한 심정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을 느낀다. 그가 미친 듯이 쏟아놓는 출혈같은 말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고 통곡”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참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논어> “태백편”에서 증자는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라고 말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모든 욕심에서 자유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착한 말도 진실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절명하기 전 외쳤다고 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마태복음 27:46)라는 말도 절망의 극한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참된 말이 아니겠는가.  


4


    어떤 말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비범하게 증진시킬 때, 곧 우리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할 때 이런 말을 참된 말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쓴 <향연>에서 알시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면서 그의 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하는 말은, 그냥 띄엄띄엄 들어도, 더구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데다가 그 사람이 그 말을 아무리 불완전하게 전할지라도, 그리고 듣는 이가 남자든 여자든 어린애든 간에 그 사람의 영혼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 영혼을 사로잡아 버립니다.[각주:4]  


    이 인용문에서 부각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은 듣는 사람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영혼에 충격을 준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분적으로, 그것도 또 부실하게 전해듣는다는 설정이 이런 뜻을 전한다. 같은 의미는 듣는 사람이 “어린애”라도 그 영향력에 차이가 없다는 말에서도 얻을 수 있다. 어린애는 아직 인지능력이 부족하여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어른보다도 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이해하지 못해도 영혼을 일깨우고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소크라테스의 말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특정한 정보, 말하는 이의 생각, 정서, 사회문화적 배경, 사람됨 등이 있다고 할 때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는 마력은 그의 사람됨, 곧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의 말에는 우리 영혼의 힘이 실리며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의 심오한 영혼에서 태어나 비범한 힘을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예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때로 우리가 누구의 말에 영향을 받는 이유는 그 말의 구체적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말이 일으키는 어떤 정신(영혼)의 울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말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정신의 힘을 싣고 어떤 “울림의 장(field of resonance)”을 형성하면서 듣는 사람에게 다가가는데, 그 말에 영향받는다는 것은 듣는 사람의 정신이 이 장에 포섭되어 같은 방식으로 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울림이 우리 영혼의 눈을 새로이 띄워 주어 더 고결한 경지에 이를 때 이 울림을 일으킨 말을 참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것이 있는데, 이 말이 가리킬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여기에서 논의하는, 말이 영혼을 고양시키는 경우는 아니라도 하더라도 이러한 경우를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곧 빚진 사람이 빚 받을 사람한테 한 어떤 말이 그의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강렬한 감동을 일으켜 경제적인 차원의 천냥 손해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말하는 사람의 사람됨과 상관없이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영혼이 고양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8세기 일본의 선승 반잔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가 이러한 경우의 한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반잔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러 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 시장을 걸어가는데 옆에 있는 푸줏간에서 주인과 손님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손님이 말했다. “고기 이 집에서 제일 좋은 걸로 주시오.” 그러자 주인이 맞받아쳤다. “우리 집에는 제일 좋은 고기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집 고기는 모두 다 제일 좋은 고기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반잔은 득도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가장 좋은 순간임을 깨달았다. 푸줏간 주인이 한 말은 장삿꾼의 닳아빠진, 사실성도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반잔에게는 존재의 본질을 짚어주는 지혜의 말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에게 깨달음을 간절히 원하는 수도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우리의 본질적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언어는 쉽게 마주치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이런 언어를 꾸준히 듣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언어를 듣기를 원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설교뿐만 아니라 종교생활 전반을 통해 이런 언어를 만나기를 원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8에서 예수는 “내가 . . . 참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하고, 같은 책 10:10에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언어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영혼을 더 풍성하게 하는 말, 그래서 참된 말을 나누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맺는 말


    비록 많은 경우 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항상 진실을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럴수록 진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가치있다고 할 것이다. 비단 지금이 선거철이어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른 바 ‘저신뢰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사기공화국이다”라는 심한 표현도 쓴다), 그래서 의심과 두려움이 많은 사회이기 때문에 참에 대해서 고찰해 보는 것이 더욱 의미있지 않나 생각한다. 진실에는 말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도 관련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진실된 말에 대해서 대강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듣는 말의 진실성을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 진실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성찰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언어가 범람한다면 그것은 말하는 이들의 천박함과 위선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이와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어서가 아닐까?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칼 세이건(Carl Sagan)의 Cosmos p.52에서 재인용(Ballantine Books, 1980). [본문으로]
  2. <20세기 영미 단편 소설 (The 20th Century English-American Short Stories)>, 양병택 편집, 서울: 신아사, 2013년, pp. 264-277. [본문으로]
  3. 같은 책, p.276. [본문으로]
  4. 작품 구절 번호 215c-d. 벤자민 조웟(Benjamin Jowett)의 영어 번역을 내가 우리말로 옮긴 것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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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의 시간



심범섭



    어느 고생물학 강연에서 강사가 화석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이 화석이 몇 년 된 건지 아시는 분 있나요?” 그러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100만 7년 되었습니다.” 강사는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7년 전에 그 화석이 100만년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이 사람은 고생물학의 시간 표현을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런 특이함 덕분에 이 이야기가 우스갯 소리가 된다. 고생물학보다는 덜하지만 인간 역사를 말할 때에도 많은 경우 시간의 양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역사가 5천년 되었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적어도 36년 전인데 그 후로 내 나이는 한 해 한 해 꼬박꼬박 많아져도 아직도 우리나라 역사는 5천년이라고 한다. 이광수의 <무정>이 출간된 것이 1917년인데 누가 “<무정>이 나온지 100년이 되어 . . .”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실은 99년인데 왜 1년을 더하느냐?’라고 따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몇 만 년 차이까지에도 관대하던 분들도 100미터 달리기 세계 기록인 9.58과 내 평생 최고 기록인 13.80 사이의 4초 남짓한 차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시간 감각 또는 시간 리듬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시간’이란 표현에는 여기 예를 든 것처럼 객관적으로 측정되는 시간이라는 일차적 의미도 있지만 ‘시간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 같은 의미도 있다. 우리 시대 큰 인문학자인 김우창 선생은 여러 해 전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가운데 “우리가 말하는 ‘시간 여행’은 사실은 역사 여행이지요. 시간 자체는 아무런 내용이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시간여행’ 같은 표현에서 ‘시간’은 ‘특정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등의 뜻을 지니는 대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 “한 아이가 태어나는 건 새로운 시간이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때에도 시간은 시간에 실려 펼쳐지는 이야기를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수치로 표현되는 양적 시간에 대해 여러 가지 감각과 틀이 존재하듯이 이야기를 뜻하는 질적 시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인식의 틀과 리듬이 존재한다. 정치가의 시간, 기업가의 시간, 학자의 시간, 농부의 시간은 각각 그 구성방식과 질감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시간에는 이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 또는 이를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부터 일관된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이 의미는 해당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거나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곤 한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시간의 문”에서도 “시간”은 삶의 이야기를 의미한다.[각주:1]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종열이라는 사진작가인데 그는 미래의 시간을 찍는 사람이다. 그가 미래를 찍는 방법은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해석을 보류하고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의 촬영 행위는 “해석이 행해지는 그 미래의 현실에 속하는 것”이 되는데, 그가 이렇게 현재를 “미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로부터 “압살을 모면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사람이 아닌 자연물의 사진을 찍으며, 길고 추상적인 자연의 시간 리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을 찾아 현재로부터 자기 실종을 꾀하지만 동시에 이 실종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유종열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기만 하고 미래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카메라의 숙명” 때문에 시간의 문을 찾지못하면서 고민하다가 자연의 시간보다 더 역동적인 사람의 시간을 찍는 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월남전 취재를 자원하여 비극과 참상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을 촬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카메라는 “대상의 시간을 정지시킬 뿐 . . . 그 시간의 벽을 뚫고 대상 안으로 들어가 함께 흐를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카메라가 인간의 치열한 현실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사진찍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데, 전장의 극단적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에게 촬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그는 전쟁 후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월남 난민을 촬영하기 위해 취재여행을 떠난다. 일본인을 선장으로 하는 화물선에 편승해 사진을 찍던 그는 어느날 실종되고 만다.    

    그로부터 5년 후 유종열의 아내에게 이 일본인 선장으로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의 필름과 그가 실종된 구체적인 사연이 담긴 편지가 찾아온다. 유종열은 처음에는망원 렌즈를 이용해 근처를 지나는 난민선을 촬영하기만 했으나 어느 날 카메라를 남겨두고 직접 한 난민선에 홀로 배를 타고 건너가기로 한다. 그가 바다안개 속에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선장이 겨우 사진으로 찍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된다. 유종열의 아내와 옛동료인 ‘나’는 그가 사라진 연유를 듣고 그가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서 그가 마침내 미래로 가는 문을 찾았고 대상과 함께 미래로 흘러갔으며 “그 자신이 미래의 모습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의 복잡한 의미망을 내가 제대로 파악했다는 자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가오는 의미를 오늘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우리’와 연관시켜보고자 한다. 유종열이라는 개인은 몇 단계에 걸쳐 성장하는데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깨어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이야기로 번역될 수 있는 부분은 그의 사진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미래로 가고 싶어하는 지점부터이다. 처음에 그는 현실의 무게에서 도피하고 싶었고 이 탈출구를 자연의 시간에서 구했지만, 어느덧 미래를 사람의 시간에서 구하게 되었고 특히 월남전 취재 이후에는 바로 지금 보이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박애적 의지를 지니게 된다. 미래의 시간은 그에게 “구원”의 시간이며, 따라서 대상과 함께 흘러가는 미래는 대상과 함께 구원받는 미래이다. 그리고 오늘 대한민국에서 소외받고 억압받는 이들과 우리가 함께 가고자 하는 미래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런 미래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기 실종이라는 단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유종렬에게 두려운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두려운 것이다. 이 자기 실종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유종렬은 카메라로 대상을 찍는 것마저 포기하는데, 이를 작품 안에서는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사진 찍기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상에게로 다가감으로써 난민들과 미래를 함께하는 유종열의 모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유종열이 몸으로 건너감을 우리 모두가 소외받는 이들의 삶의 물리적 현장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관찰과 논평의 대상으로 보기만 하는 이상, 곧 우리 마음에 구별의 벽이 서있는 이상 그들과 같은 시간을 흐를 수는 없다는 뜻으로 새기고 싶다. 우리는 자기 부인으로써 그들과 같은 차원에 서서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사실 유종렬이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을 찾았다는 사실을 그의 아내와 ‘나’는 그의 마지막 사진들만 보고서는 깨닫지 못한다. 일본인 선장이 보내준 편지를 읽고서야, 곧 유종렬의 마지막 행동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서야 그의 “성취”를 알게 된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생에서 어떤 의미있는 성취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되려면 반드시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의 소외받는 사람들과 시간(역사)을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이를 더 넓은 세상과 후세에 알리지 못한다면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생각은 소설 안에서 유종렬의 아내가 남편의 성공이 보편적 적용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만약 종열씨에게 그 미래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면, 아까 허선생님도 말씀을 하셨듯이, 그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은 다만 유종열씨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내야 할 만인 공유의 것이 되어야 하니까 . . . (182-83)

  

    실제로 작품에서는 유종열 개인이 도달한 미래의 시간에 다른 사람도 따라갈 수 있다라기보다는 그의 성공이 다른 사람도 각각 자기만의 미래의 시간을 찾아가는데 영감을 준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는 듯 하다. 분명한 것은 유종열이 이룬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이 그들도 미래로 가는 문을 찾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성취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해야 한다는 뜻을 취할 수 있다고 본다. 소설에서는 유종렬과 그의 마지막 행적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서로 다르고 유종열은 이 사실조차 모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반드시 이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서는 유종열과 일본인 선장이 하나가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청준이 소설에 담은 심원한 의미를 너무 쉽고 단순하게 번역하지 않았나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해석 부분의 첫문단에서 미래의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조금 더 상술하고자 한다. 곧,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미래가 구원의 시간이 될 것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텐데 그 중 하나를 다음 싯구를 통해 생각해보고 싶다.   


사랑이 낳아준

눈물 속에

하도 잘 익어서

별로 뜨는

나의 시간들[각주:2]

  

    여기에서 “시간들”은 어떤 특정한 시간대의 경험들로 이해되는데, “잘 익어서 별로 뜨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이미 발생한 경험들, 곧 과거의 “시간들”이라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의 과거 이야기는 사랑에서 솟은 눈물에 변용되었다. 이 변용 과정이 “잘 익”는 것이었음은 그 눈물이 매우 뜨거운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누군가가 시적 화자의 과거를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이 시간을 별로 탈바꿈시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별”은 초월적이고 영원한 원리 및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미래까지 포함하고 또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별이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대상이므로 이 원리는 보편적 적용력을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구체적 경험이 누군가의 깊은 사랑에 의해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지도적 원리를 낳게 된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 이런 원리를 구원의 원리라고도 이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 해석에서 “사랑”이라는 막연한 개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사랑에 ‘선하고 희생적인 의지’나 ‘대상과 하나되려는 뜻과 실천’ 같이 긍정적이나 여전히 막연한 의미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뜻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랑에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가 열 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한 말의 의미를 담고 싶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 가운데 순결이 조금 더 기독교의 본질에 어울리는 덕목인 듯한 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느낌이 아닐 것이다. 뱀 같은 지혜는 날카로운 판단력, 예민한 분별력, 깊은 사고력 등을 뜻하는 듯한데 이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기독교에서는 그리 강조하지 않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나운 악의 세력이 들끓는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확장하려 할 때 순결한 마음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힘든 것 같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순결이 지혜보다 얻기 쉬운 덕목인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다 성실한 노력과 고도의 훈련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이다. 제대로 사랑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주요 종교에서 사랑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사랑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에 참사랑이 워낙 드물기 때문이기도 해서인 듯 하다.  

    며칠 전 이화여대 후문 맞은 편에 있는 필름포럼이라는 극장에서 <나쁜 나라>라는 기록영화를 보았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유가족분들이 투쟁하신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김진열 감독님과 유가족분 가운데 영만 어머님(이분 본인의 이름도 들었지만 기억이 안남)과 함께 하는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다. 영화와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서 절실히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상식과 정의를 외면하는 권력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지혜도 있어야겠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이 나로 하여금 과거를 미래의 구원의 원리로 통합하는 사랑의 의미에 뱀같은 지혜도 포함시키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각주:3]  

    세월호 참사로 고통받는 분들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구원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비범한 지혜와 비범한 순결이 있어야겠다.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먼저 이들의 지나온 역정에 뜨거운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김우창 선생은 한국 소설의 시간을 논하는 한 글에서 성숙한 소설의 시간을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과 사물들 사이에서 자라나오는 사건 전개의 내적 원리”[각주:4]로, 그리고 더 간략하게 “내면적 유기적 시간”으로 이름한다.[각주:5] (이 개념이 비록 다른 영역에서 쓰인 것이지만 해석적 관점이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간과 같으므로 여기 빌려와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과 사물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자라나오는 사건 전개의 내적 원리”를 파악해야겠으며, 동시에 이 사건, 사람, 사물, 원리를 재창조해야겠다. (“재창조”라는 표현은 남의 경험을 멋대로 편집하자는 말로 들리는 위험도 있지만, 경험이 구원의 미래로 이어지는 최선의 해석의 틀을 찾자는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쁜 나라> 같은 영화를 만드는 일, 이런 영화를 보는 일, ‘416 가족협의회 기억저장소’에서 주관하는 “기억과 약속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양적 시간을 측정하는 준거로서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해와 달의 움직임, 추의 왕복, 심장 박동처럼 주기적인 운동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심장 박동은 개인적인 현상이며 심장이 정서의 근원지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질적 시간을 비유하는 개념으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한 사람의 독특한 시간 리듬이 있는 이야기를 그 사람의 심장의 이야기, 심장의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간에 동참하는 것을 그와 심장의 고동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는 권고는 곧 그들과 심장의 시간을 함께하라는 권고가 아니겠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억압받는 이들과 새로운 미래의 시간, “내면적 유기적 시간”, 심장의 시간을 창조하기 위해 자기 부인의 용기, 비범한 지혜와 비범한 순결, 정확하고 정직하게 기억하고 전달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소박하게 제안해보았다. 우리가 갈 길은 참으로 멀고 험한 듯 하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뿐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이청준, <1982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82, pp.134-206. 이 문단에서부터 여러 문단에 걸쳐 작품의 내용을 요약 또는 해석하면서 직접 인용이 많이 등장하는데 독자분들이 글을 원활하게 읽으시도록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는 않기로 했다. [본문으로]
  2. 이해인, “너에게 가겠다”, <작은 위로>, 열림원, 2008, p.30. [본문으로]
  3. 영만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특히 가슴 아픈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병무청에서 남학생 희생자 가운데 아직 사망신고가 안된 사람 중 일부를 대상으로 징집 신체검사 통지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 누구에 대해서도 신규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통보는 없었다는 사실도 언급하시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또 하나는 참사 이후 싸우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보상 문제에 대한 일부 국민들의 비뚤어진 시각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언급하신 한 예였다. 유족 가운데 어떤 분은 세탁기가 고장이 났지만 배보상과 관련하여 안좋은 반응을 일으킬까 두려워 몇 달 동안 손빨래를 하셨다고 한다. 첫번째 예는 국가의 잘못이지만 두번째 예는 보통 사람들의 문제이다. 영화 제목 “나쁜 나라”에서 “나쁜”이라는 수식어가 과연 권력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비록 영화 제작자의 의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에게도 적용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본문으로]
  4. “한국 소설의 시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솔, 1992, p.253. [본문으로]
  5. 같은 책, p.2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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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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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확실성



심범섭



    고등학교 때 배웠던 영어구문 가운데 ‘A no more B than C’라는 게 있었다. 


A whale is no more a fish than a horse is.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처럼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로 해석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구문을 처음 배울 때 이 문장이 왜 주어진 방식으로 해석되는지 이해는 못했다. 그리고 내가 읽은 책에도 설명이 나와있지 않았고 학교 선생님도 그 원리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 가서 어느 날 문득 이 구문의 의미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위 예문을 직역하면 ‘고래는 말만큼만 물고기이다’가 된다. 그런데 ‘말만큼 물고기이다’라는 표현은 사람 사는 세상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물고기가 아니다’를 뜻한다. 그래서 ‘고래도 전혀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A no more B than C’라는 구문에서 ‘than’ 다음에는 누가 봐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 전혀 논의의 여지가 없는 현상(‘말은 물고기가 아니다’)을 거꾸로 말하는 진술이 나오고, ‘than’ 앞에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대한 명쾌한 주장이 나온다. 예를 들어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고래가 물고기처럼 생겼기 때문에 자명한 사실이 못되기도 한다. 위의 예문을 말하는 사람은 고래에 대한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혼동스럽거나 오해받는 고래의 정체를 더 이상 혼동스럽지 않은 것으로 확립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래 공식은 이미 확실한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에 기대어 아직은 불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명제가 확실한 것으로, 보편적 상식으로 수용되게 하려는 용도로 쓰인다. 달리 말해 이 구문은 사회의 ‘상식(자명한 것)의 권위’에 의존하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문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는 언어자원의 하나로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앎을 필요로 하고 또 이를 근거로 삼아 확실한 앎을 점점 더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고래공식에서 다루어지는 확실성은 어떤 명제가 현실을 정확하게 지시함으로써 얻어지는 확실성이다. 이러한 확실성은 현재의 현상뿐만 아니라 과거의 현상 (“우리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고 확신한다”같은 표현에서처럼)과 미래의 현상(“분명히 ‘인류는 화성에서 살게 될 것이다’”같은 표현에서처럼)에도 적용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문제시하는 확실성에는 이러한 명제의 정확성 이외에도 적어도 두 가지가 더 있는 듯 하다. 하나는 정도를 말할 수 있는 경험에서 그 정도가 높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감격,” “확실한 군정 종식” 같은 표현에서처럼) 얻어지는 확실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떤 존재가 시간이 경과해도 변하지 않을 때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같은 표현에서처럼) 얻어지는 확실성이다. 물론 정확성, 정도, 변화 여부라는 이 세 가지 범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범주를 다른 범주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 때도 많다.    

    현재의 좋은 확실함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의 관점에서 유겐 드러베어만(Eugen Drewermann)이란 독일 학자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를 해석한다. 드러베어만은 최초의 인류가 신의 명령에 거역한 이유로 흔히 거론되는 이유, 곧 탐욕, 정욕, 교만, 불복종이 일관성 있는 논의를 낳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가 그들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실존적 공포라고 가정한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는 그들 자신이 그들 존재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주가 언제든지 자신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들이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드러베어만은 창세기의 실낙원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으며, 인간이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적용하는 것이다.[각주:1] 하지만 이 해석에서도 역시 인간은 영원히 얻을 수 없는 확실성을 욕망하면서 확실함의 영역을 더 늘이려고 애쓰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 해석이 설득력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 삶에서 확실성이 중요하고 보편적인 문제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드러베어만의 창세기 이야기 해석은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간의 피조물성과 연관시키므로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상대적으로 더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상정하고 이를 안정적 토대로 삼아 삶을 영위한다. ‘말은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인식(사실, 현상)도 이런 의미에서 확실한 것의 한 예이다.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더 인간다운 삶을 설계하고 이를 하나하나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의미의 확실성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확실성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불안하게 되고 때로 절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확실해야만 하는 여러 근본적인 요소들이 불확실한 형편이다. 국가는 재난에서 국민을 지켜주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중산층이 무너져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졌고, 내집 마련은 비현실적인 목표가 되었으며,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도 허약해졌다. 경쟁은 극심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와 패자가 부활할 수 있는 제도도 없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고 각자도생, 각개전투만이 살 길이며, 이 나라를 아예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취업의 문턱이 너무 높고 일자리를 구해도 고용이 불안하고 터무니없이 착취당하는 경우가 많다.  

   2015년 10월 19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내놓은 ‘2015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에는 대한민국의 이러한 실정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지를 묻는 ‘사회 관계 지원’ 항목에서 OECD 34개국 가운데 최하위를 차지했다. 주관적 건강 만족도에서도 꼴찌였으며, 밤에 혼자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끼는 정도에서는 28위였다.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도 하루 48분으로 최하위였으며 (OECD 평균은 151분), 이 중 아빠가 같이 놀아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하루 3분, 돌봐주는 시간도 하루 3분에 지나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의 OECD 평균은 47분). 그리고 개인이 평가한 삶의 만족도에서는 OECD 34개 회원국과 러시아, 브라질을 포함한 36개국 가운데 29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불안하고 불만스럽고 더하여 분노하게 하는 각박한 대한민국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이다 (2011년 기준 인구 10만 명 당 33.3명, OECD 평균 12.4명; 2013년 기준 28.5명).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주간은 “우리는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라는11월 24일자 칼럼에서 “지난해 미국인 총기사망자는 1만2563명, 한국인 자살자는 1만3836명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총이 없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다.”라고 개탄하기도 한다.    

    최근 등장한 수저론을 빌려 말하면 금수저나 은수저가 아니라 동수저나 흙수저나 똥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에게 대한민국은 전망이 없는 곳이다. 얼마 전부터 절망적인 대한민국을 “헬조선”, “망한민국”, “지옥불반도”로 일컫는 표현도 들린다. 대한민국은 지옥인가? 지옥은 나쁨이 극한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다. 위에서 말한 확실함의 특성을 적용하자면 나쁨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높다는 확실성과 이런 나쁨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확실성이 구현되는 공간이다. 우리 사회에서 좋은 확실성과 안정성이 무너지면서 그에 상응하여 나쁜 확실성이 증가했고, 이런 부정적 확실성이 극점에 이르렀다는 인식이 “헬”과 “지옥”이라는 표현으로 전달된다.  

    몇 년 전 2-30대 젊은이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부르는 “3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곧 내집 마련과 인간관계도 포기한5포 세대가 되었고, 이제는 꿈과 희망마저도 포기한 7포 세대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마지막 항목으로 등장한 ‘희망’은 일곱 가지 포기 대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희망은 인간 정신의 근원적인 성향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했다는 것은 결혼이나 출산 같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삶과 생명에 대한 긍정 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지옥에 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특성인 듯 하다.  

    실제로 우리는 몇몇 문호의 작품에서 지옥이 그러한 곳이라는 말을 듣는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대표작 <신곡>의 “지옥”편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들어오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3장 9행)라고 씌여있다고 말한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턴은 대표작 <실낙원>에서 방금 지옥에 떨어진 사탄의 눈에 비친 그곳을 이렇게 묘사한다.    


즉시 그는 본다, 천사의 눈이 닿는 한의 

그 황량하고 거친, 처참한 광경을. 

주위 사방에는 무서운 암굴, 그것은 마치 

불길 이는 화덕, 그러나 이 화염에는 

빛이 없고, 오히려 보이는 어둠에 

드러나 보이는 것은 다만 비참한 광경뿐. 

슬픔의 지역, 우수의 그림자, 평화와 

안식은 없고, 사람이면 모두가 갖는 

희망마저 없고, 다만 끝없는 가책이 

휘몰아치고, 꺼지지 않고 불타는 

유황에 붙은 불의 홍수가 소멸하지 않는다. (제1편 59-69행)[각주:2]  


    “사람이면 모두가 갖는 희망”이라는 표현은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른다 (Hope springs eternal in the human breast)”라는 영어 속담을 상기시킨다. 희망이 사람에게 본능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에게는 살고자 하는 욕구처럼 뿌리 깊게 희망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밀턴의 지옥은 이러한 희망도 소멸된 곳이다. 이 사실은 지옥의 어둠이 지니는 성격과 상응하는 면이 있다. 밀턴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은 빛을 발하지 않고, 이곳에는 “오히려 보이는 어둠(rather darkness visible)”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어둠은 원래 빛이 없는 상태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실체가 없는데, “보이는 어둠”은 스스로 실체가 있는 어둠, 물체로서 존재하는 어둠으로 이해된다. 빛의 부재로서 존재하는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곧바로 사라지지만 실체로서 존재하는 어둠은 빛을 아예 가로막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어둠”은 궁극적인 어둠, 극한의 어둠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둠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옥의 어둠은 이곳에는 인간에게 본능과도 같은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물리적 차원에서 상징하는 듯 하다.[각주:3]  

    지옥은 과연 절망의 어둠만이 지배하는 곳인가? 단테와 밀턴은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우리에게 조금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 그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에서 위고는 당대 최하층민의 은어(argot)에 대해 길게 논하는 대목에서 프랑스 대혁명 전의 파리 샤틀레(Châtelet) 지하감옥을 언급한다. 이곳은 툴롱(Toulon)의 갤리선(노예나 범죄자가 노를 저었던 전투 선박)으로 가는 죄수들이 보통 한두 달, 때로는 6개월 정도 수용되었던 곳이다. 세느 강보다 2.5미터 정도 더 낮은 곳에 위치했던 이 감옥에는 창문이나 환풍시설도 없었고, 바닥은 25센티미터 정도 두께로 진흙이 덮여있었다. 어둠 속에서 죄수들은 목에 감은 쇠사슬이 짧아 누울 수도 없었고, 잠이 들어도 계속 깨어나야 했다. 무릎까지 진흙에 빠져있었고, 다리에는 자신의 배설물이 뭉개져 있었고, 진흙 위에 던져진 빵은 다리로 끌어와야 했다. 당연히 이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윽고 위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 지옥같은 무덤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무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그들은 죽었다—그리고 지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희망이 없는 곳에 여전히 노래는 있다. 몰타 근해에서 갤리선이 접근할 때 노 젓는 소리보다 먼저 들리는 것은 노래 부르는 소리였다. 샤틀레 지하감옥에서 살아남았던 밀렵꾼 쉬르방상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계속 살게한 건 그 운문(rhymes 노랫말)이었다.” [각주:4]  


    이 인용문에 보이는 “희망이 없는 곳에”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는 위고 또한 지옥을 희망이 불가능한 곳으로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지하감옥과 갤리선이라는 지옥에 떨어진 인간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위고는 이렇게 답한다. “어떠한 고통을 가해도 인간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는 사랑을 파괴할 순 없다.”[각주:5] 위고는 사랑을 희망과는 다른 것으로 상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랫말에서 살 힘을 얻었던 쉬르방상의 예는 이 지옥의 노래가 그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위고가 사랑이라고 규정하는 힘이 본질적으로 희망과 같은 것, 또는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성향 또는 욕망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한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른다”라는 속담도 이렇게 결론내리는데 도움을 준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위고의 지옥에서 분명히 희망은 가능하다고 이해한다.  

    헬조선은 단테와 밀턴의 희망이 불가능한 지옥인가, 위고의 희망이 가능한 지옥인가? 순진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절망과 좌절의 어둠이 짙은 이 대한민국이 그래도 위고의 지옥에 가깝다고 믿는다. 어떤 이에게는 궁색한 근거로 들릴 수 있겠으나 단테와 밀턴이 그리는 지옥은 결국 상상의 산물이고 위고가 이야기하는 지옥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나는 희망의 확실성을 믿고자 한다. 상상의 지옥에서 희망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물론 위고의 지옥에서 죄수들이 불렀던 노래가 처음부터 희망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위고도 샤틀레 감옥의 노래 대부분은 슬픈 노래였다고 말한다.[각주:6] 그러나 절망을 토로하는 노래라도 이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는 행위 자체가 절망의 무게를 덜어주었고 새로운 희망을 일깨우기도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헬조선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제안이 나와있다. 어떤 이는 지속적인 연대와 작은 변화라도 촉발하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어떤 이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여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제일 과제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정부와 국회에게 가장 큰 책임과 역할이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진정한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사회전체의 구조를 바꾸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저 개인적으로나마 획일적 기준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자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헬조선이란 표현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해서 나온 것인데 개발도상국에 가서 한 달만 지내보면 자긍심이 생길 것이라는 괴상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이나 방안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 대신 희망의 확실성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인간은 절망하면서도 또 다시 희망한다는 이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실에 대해 사색하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사색에서도 우리의 노래가 태어나고, 그리고 우리가 “서로 함께” 노래한다면, 지금 우리를 덮은 어둠이 설사 실체로서 존재하여 빛을 가로막는 어둠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 이를 분쇄할 수 있지 않을까?  

    위고의 말처럼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서 불멸하는 것이라면 희망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사랑과 희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이상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고가 이상의 빛이 잠시 가리워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말하는 문장이 내가 읽은 영역본에서 마침 고래 공식으로 씌여있어 이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The ideal is . . . no more in danger than a star in the jaws of the clouds. 

(이상은 . . . 구름의 주둥이 안에 든 별처럼 위태롭지 않다.) [각주:7]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드러베어만의 이 견해는 다음 저서에 나타난다. Strukturen des Boesen: Sonderausgabe. Die jahwistische Urgeschichte in exegetischer/psychoanalytischer/phhilosophischer Sicht (3 vols.; Paderborn: Schoeningh, 1985-86). 나는 이 저서를 읽은 것이 아니라 드러베어만의 해석을 소개하는 내용을 다음 글에서 읽었다. “The Lamb of God and the Forgiveness of Sin(s) in the Fourth Gospel”, Sandra M. Schneiders,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73, 2011, p.6. [본문으로]
  2. 이 인용문은 이창배 교수의 번역문(<실낙원 (Paradise Lost)>, 범우사, 1996, p.16)을 내가 원문을 이해한 것에 따라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3. 이창배 교수는 “darkness visible”을 “간신히 보일 정도의 짙은 어둠”으로 옮겼다. 나는 “visible”의 대상을 어둠으로 보는데 반해 이창배 교수는 어둠 속에 있는 대상(사물과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이창배 교수의 번역은 내 해석보다 덜 문학적이지만 대신 이 어둠 속에서도 사물과 사람이 보인다는 내용과 상식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어둠”이라는 내 해석은 새로운 성격의 어둠을 소개하고 희망의 부재라는 인간 내면 상태와 상응하는 문학적 효과를 거두지만 이런 극단적인 어둠 속에서도 사물과 사람이 보인다는 모순을 내포한다. [본문으로]
  4. 이 인용문은 펭귄 출판사에서 나온 영역본(<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 노먼 데니 (Norman Denny) 번역, 펭귄 (Penguin), 2013, p.1224)에서 해당 구절을 내가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5. 같은 책, p.1225. [본문으로]
  6. 같은 책, p.1224. [본문으로]
  7. 같은 책, p.13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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