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고찰 II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해 11월 원고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를 다시한번 고찰한다고 약속을 했다.
지난해 11월 원고를 쓸 땐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한국에선 박근혜 최순실 파일사건으로 매일 매일 한국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던 때였다.
지금 1월 이 글을 쓰는 이번주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주다.  특별히 선거기간동안 벌어진 성차별과 여성혐오의 문제에 저항하면서 취임식에 맞추어 1월 21일 여성들의 대대적 시위 (Women March)가 준비되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카나다에서도 여성 동시다발 연대시위가 계획 중이다. 지나 두 달간 한국은 6주에 걸친 엄청난 수백만명의 끈질긴 시위로 인해 12월 9일 국회는 박근혜의 대통령직을 탄핵하는 결의를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취임을 하지만, 트럼프가 제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해 낼지는 오리무중이다. 헌법재판소로 탄핵건이 넘어갔지만,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을지 역시 오리무중이다. 알 수 없는 이런 정치적 흐름은 비관적 또는 냉소적 판단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변수와 어려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해준다. 우린 이러한 위기에 대해 자각하는 차원에서, “깨어있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기면서, 11월 소개했던 제니퍼 웰쉬의 역사의 회귀로 돌아가보자.[각주:1]
웰쉬는 역사의 회귀라는 큰 테제를 야만주의; 대다수의 인구의 이주; 냉전체제 그리고 불평등의 회귀라는 소테제로 나누어 어떻게 부정적, 폭력적 역사가 회귀하고 있는지 통찰한다.
웰쉬는18세기 시작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정립된 서구자유민주주의는 3그룹의 차별을 기반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하면서, 서구 자유 민주주의가 지닌 본질적 한계를 날카롭게 집어낸다. 여기서 이 그룹은, 재산이 없는 자, 여성 그리고 유색인종이다. 즉, 서구 자유민주주의는 귀족, 백인, 그리고 남성을 보호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데 기초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영국의 경우 투표권은 오직 재산 (부동산)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졌다 (귀족계급). 1918년이 되어서야 서구 유럽사회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1965년이 되어서야 흑인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이런 차별정책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입각한 제국주의 세력 (나치, 일본군국주의)을 패배시킴으로써 본 힘을 갖기 시작했다. 1960년대 유럽식민주의하에 속했던 나라들이 독립을 성취하고 탈식민주의국가로 변화되면서 민주주의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보편화되어버린 민주주의지만, 완전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모습, 위기를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인 야만주의의 회귀의 예는ISIS의 등장이다. 민주주의에 도전을 주는  ISIS의 등장은 아이러니칼하게도2011년 아랍 스프링, 민주주의투쟁의 여파로 등장했다. 중동지역과 아프리카지역 이슬람 대중들은 전제독재주의를 반대하고 독재자 (예. 시리아 바샤 알아사드)들을 권력에서 끌어내는데 성공을 했지만, 그 성공의 여파는 길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 권력의 공백을 틈타ISIS가 권력을 잡았다. ISIS가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논리이다. 2001년 911 테러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쉬의 논리와 비슷하다. 테러를 대항한 전쟁 (War on Terror)를 선포하면서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전쟁은 정당화되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 전쟁 후유증은 계속되고 있다. 아니 ISIS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역사의 회귀와 재현을 논하면서 주목할 점이 있다. 이는 역사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점이다.  즉,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그 길로 돌아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현재의 욕구를 역사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 새마을 운동 및 경제개발을 그리워하는 이들에 의해 이명박이 경제 대통령이 둔갑을 하고 그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것이 그 한 예가 아닐까?
3장에서 웰쉬는 피난민의 문제는 전대미문의 대다수 이주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소위 “안보주의”라는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두려움, 기득권자들의 기득권상실에 대한 공격적 표현이 실체화되어 피난민에 대한 배타적인 반응이 더 큰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미국 트럼프의 선거 당선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바로 백인기득권자들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백인 정체성 상실에 대한 화풀이로 표현되었고(p. 154), 그렇게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장벽을 높이고 국수주의 안보를 강화하는 그 댓가 (cost)는 기본 인권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인종, 국적, 성, 계급을 넘어서서 누구나 누릴 권리), 자유 (자유롭게 움직이고 정착하고 살 권리)라는 기본 가치를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p. 158).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발원지에 속하는 유럽의 나라들도 제2 , 제 3의 트럼프를 정치지도자로 선출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국수주의와 인종/종족 말살주의 입장이 공공연하게 세계 곳곳에서 발현되고 있다.
민주주의 또 다른 위기인 냉전체제의 회귀의 단적인 예는 푸틴이다.  2005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냉전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연방체제의 달콤한 과거는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영화로운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런 욕망을 웰쉬는 “근육강화” 정책으로 표현한다 (p. 193). 2011년부터 악화되고 있는 현 시리아 사태 역시 러시아의 근육강화정책의 일환이다. 러시아의 인권유린, 인권침해, 언론의 통제 등 내부 상황과 동시에 주변국가 사이버 공격을 통한 정보유출의 행태는 심각하다. 이런 행태는 주권민주주의 (Sovereign Democracy) 정책의 결과이다 (p. 234). 웰쉬는 이 주권민주주의는 철저하게 국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새로운 교리라고 설명한다. 이 주권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반자유주의다. 그런 점에서 레닌-스탈린 시대의 공산주의독재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지만 다르다. 국수주의 측면에서 반자유주의적이지만, 자유시장경제체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자유를 지향하고 동시에 지양하는 이런 모순의 기로를 걷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소련연방체제와 현 러시아 체제가 같지 않은 이유중 하나는 종교의 자유이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종교는 아편이고, 그러므로 제거될 존재이다. 그러나, 현 러시아 주권민주주의하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정된다. 푸틴 대통령 권위 다음으로 권위를 행사하며 다양한 특혜 (조세, 법) 받고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p. 237).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경제불평등의 회귀이다. 지난주 발표된 옥스팜 보고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62명의 재산을 합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 36억명이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합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편차는 매년 놀라운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각주:2] 이런 부의 편중은 1980년대 레이건 미정권과 대처 영국 수상의 시절에 등장했다.  11월 원고에서 인용했듯이, 1989년 후꾸야마학자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쳤다. 같은 책에서 미국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평등한지,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계급없는 사회를 주장했다 (p. 256). 그러나 소위 우리는 99%라는 “Occupy Movement”가 미국 전역을 휩쓸 때, 2008년 뉴욕증시가 추락했을 때, 계급이 없기는 커녕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간격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역사는 진보한다는 낭만적이고 안일한 선형적 역사관이 팽배할 1980년대, 신자유자본주의를 견제할 공산주의가 몰락한 그 1980년 후반기부터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사회는 경제적인 정체와 퇴보를 겪고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대부분 99% 수입은 상대적으로 줄고 있고 1%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1% 그룹은 직접적인 생산노동에 동원되지 않은 그룹을 지칭하며 그 그룹이  자본주의체제하에서 누리는 특혜를 웰쉬는 지적한다 (p. 265). 무슨 직업을 가졌고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부모밑에서 어떤 자산을 상속받고 현재 소유하고 있는지가 부의 증가에 영향을 미친다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한국의 속담은 거짓이다.
웰쉬는 경제불평등은 실제로 인권유린만큼이나 민주주의에 치명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자놀이로 1997년 한국경제를 흔들었고 지금도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IMF 국제금융기구조차도 경제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빈부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p. 269). 왜냐하면, 빈부격차에 기반한 불평등 경제는 경제활동기회라는 기본권을 박탈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된다는 뜻은 개인과 공동체의 존재적 위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단지 돈이 없다고 또는 일자리가 없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상실, 기본 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기에 그 불평등은 사회적 불안정으로 직결된다. 이 점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불평등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경제와 정치가 만날 수 밖에 없다. 공공성은 단지 부의 재분배만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책의 입안이요, 그 정책의 수행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수가 혜택을 볼 수 있는 공공성, 즉, 공적 관심과 공적 이익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도 민주주의 위기 극복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종교적 삶은 기본적으로 이기주의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서 살기보다 나누고 섬기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약자와 소수라는 이웃에 대한 관심, 타자에 대한 개방성, 즉 근본적으로 부정의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이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진보와 낙관을 보장하는 숭배의 대상도 완전한 제도도 아니다.  실제로 민주주의 선봉자 (나찌즘에 맞서) 윈스턴 처치힐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형태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외 정부형태는 더 최악이기에 이를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서구자유민주주의가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전제주의, 공산주의, 군사독재주의보다는 낫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헌신한 그 지도력을, 그 과거를 기억해야하며 이 민주주의가 정체하고 부패하지 않도록 현재 깨어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이렇게 부족하기에 강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즉,  우리 (공동체)의 바르고 꾸준한 노력으로 더 성숙하게 유지, 지속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미국의 최근 선거를 보면서 얼마나 무지가 폭력적인지 배웠다. 사실이 거짓으로 진리가 기만으로 둔갑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아니 안하는) 대중들의 무지, 비판적 의식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했다. 그래서 난, 인권유린, 경제불평등과 함께 민주주의를 부패시키는 독소는 바로 무지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해방신학에서 critical mass (비판적 대중), 민중신학에서 의식을 가진 주체로서의 민중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위기 극복은 공적 지식, 즉, 비판적 의식(critical consciousness), 상생의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실천이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최근 한국의 남녀노소가 다 참여한 대대적 시위를 보면서, 정치를 한다는 권력층이 대중들을 기만할 때, 대중들이 그걸 알았을 때, 그 무지에서 깨어나 뿜어내는 힘은 엄청나다는 것을 보았다. 이 힘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힘을 더 키울 때다.



ⓒ 웹진 <제3시대>


  1. Jennifer Welsh, The Return of History: Conflict, Migration, and Geopolitic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oronto: Anansi Press, 2016). [본문으로]
  2. https://www.theguardian.com/business/2016/jan/18/richest-62-billionaires-wealthy-half-world-population-combine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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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배후세력’ 찾기에 담긴 약자혐오와 비민주성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여성과 종교]라는 과목을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해가 바뀌어도 계속 사용하는 몇 가지 수업 교재들이 있다. 서리니티 영 (Serinity Young)이 쓴 “티베트를 변화시키는 여성들, 여성들을 변화시키는 티베트” (“Women Changing Tibet, Tibet Changing Women”)라는 글과, “사티야: 적을 위한 기도” (Satya: A Prayer for the Enemy) 라는 짧은 다큐 영화이다.[각주:1]  이 글과 영화는 티베트 여성들, 특히 ‘아니’ (ani, ‘aunt’) 라고 불리면서 티베트 불교에서 정식으로 승려 안수를 받지 못하는 여성 승려들이 중국으로부터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벌이는 비폭력 저항에 관한 것이다. 불교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삶에서 행하는 여성 승려들은 자신들이 체포될 경우 중국 경찰의 지하 감옥에서 행해질 취조와 고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독립시위를 이끌어 간다. 그들이 불교의 가름침을 익히고 수행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토론할 주제들이 많은 글과 영화인데 그 중 한가지 주목할 내용은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이 시위 도중에 중국 경찰에 의해 체포가 되고 감옥으로 이송된 뒤에 왜 중국당국에 의해 지독한 고문을 받는가이다. 아무리 ‘평화’적인 시위라 해도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으니 당연히 고문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그들이 당하는 고문은 독립시위를 이끌었다는 ‘죄목’에 해당하는 형벌이 아니다. 여성 승려들은 고문 뒤에 재판에 넘겨지고 형이 결정되면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물론 수감 생활 중에도 여러가지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와 별도로 그들이 법정에서 형을 받기 전에 모진 고문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은 독립시위의 ‘배후세력’을 찾아 ‘진실’을 밝혀 내려는 중국 당국으로 부터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고문을 받을 때 그들이 항상 받는 질문은 ‘배후에 누가 있냐’는 것이다. 여성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하고 실행에 옮긴 평화적인 시위이지만 이를 받아 들이지 않은 채 어떤 ‘불순한 배후’가, 즉 ‘순수하지 않은 배후’가 있는지를 알아 내려고 중국 당국은 여성 승려들을 지속적으로 가혹하게 고문한다. 물론 대부분의 고문은 젠더화된 고문이다.


중국 정부는 어리게는 16살, 17살부터 20대, 30대인 여성 승려들이 스스로 그런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믿지도 못한다. 그런 ‘어린 여성’ 승려들의 ‘배후’에 ‘불순한’ 누군가가 있어서 그들을 조절하는 것이라 믿고, 어떤 ‘남자’ 승려들이나 혹은 더 큰 배후세력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갖가지 고문을 가한다. 이것은 고문에 담긴 여성혐오이다. ‘약한’ 여성은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오직 ‘강한’ 남성만이 배후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여성을 약한 존재,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 자발적으로 저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바로 여성을 고문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여성들은 ‘배후세력’이 누군인지를 말하지 않는다고 고문 받고, ‘배후세력’없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저항운동을 펼친 것으로 잠정적으로 결론 지어질 때는 감히 (남성)국가권력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는다.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고문과 형벌을 피해 갈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글의 저자인 서리니티 영은 중국정부의 ‘배후찾기’가 ‘성평등’을 외치는 중국 정책들의 ‘애매모호성’을 스스로 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라는 구호를 가지고 ‘성평등’을 외쳐온 중국이 실제로는 여성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은 정치적인 저항뿐 아니라 중국의 ‘애매모호한’ 성평등 정책을 폭로한 ‘죄’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들의 시위는 티베트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채 파괴한 “자비로운 지배자”로서의 중국에 대한 거부이며, 여성들, 특별히 소수민족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장려한다면서 동시에 그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정부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각주:2]


‘불순한 배후세력’. 우리도 많이 듣는 말이다. 대중시위나 저항이 있을 때마다 ‘배후’를 먼저 찾는다. 정부나 기업, 혹은 학교를 상대로 일어나는 ‘시위’가 있을 때 흔히 듣는 말이다. ‘온순한’ 주민들이, ‘나약한’ 청소년들이나 학생들이, ‘순응’하는 직원들이, ‘연약한’ 피해자들이 그렇게 시위를 주도하고 이끌리가 없다는 것이다.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누구인지 엄연히 아는 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배후세력’을 찾아 냄으로써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정부나 경찰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나 집회를 대하는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배후세력’을 알고자 하는, 아니 ‘만들어’ 내고자 하는 노력의 집요함이 보인다. 만약 저항이나 시위가 조금이라도 ‘과격’ 해질 경우에는 ‘불순한 배후세력’을 찾으려는 집착은 더 심해진다. 이렇듯 ‘배후세력’을 찾으려는 권력자들의 모습은 한국의 과거 군사독재정권이나 현정권에만 국한 된 것도 아니고, 권력을 쥔 자들이 통치수단의 하나로 사용해온 시대와 국경을 넘는 ‘작업’중의 하나이다. 이런 ‘배후세력’ 찾기와 만들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배후세력’ 찾기나 만들기는 ‘배후’에 대해서 보다는 사실 그 ‘배후’를 찾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배후’를 찾는 사람들은 시위의 참가자가 여성들이거나,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근거없는 확신을 ‘배후세력’을 찾는 행위를 통해서 여과없이 보여 준다. 뭔가 큰 일이 있으면 그 주체는 여성들이나 어린 사람들일 수 없고 반드시 뭔가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지닌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대부분 지도자급 ‘남성’이거나 ‘남성들로 이루어진 조직’이고, 때로는 ‘외부’ 세력이고, 그 배후세력만이 모든 사건의 전말, 또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실제하든 하지 않든 찾아지고 만들어진 ‘배후세력’이나 ‘진실’은 배후를 찾아내고 만들어 내야만 하는 권력자들의 약자혐오와 비민주적인 의식과 행동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고문과 진실 (Torture and Truth)]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페이지 두보이스 (Page duBois)는 사건의 ‘배후세력’과 ‘진실’을 캐내려고 노예들을 고문했던 고대 그리스의 잔인한 제도에 대해 논의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상한’ 자유인들과 달리 노예들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고문을 당할 때에만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다. ‘이성적’인 주인과 달리, 노예들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오직 고문을 받을 때만 ‘진실’을 얘기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들이 고문 받으면서 내놓은 얘기들만 ‘증거’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진실’은 항상 어딘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찾아 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각주:3]


민주주의의 (democracy) 개념적 토대가 형성된 고대 그리스사회에서 ‘일반 사람’ (demos), 또는 ‘시민’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자유인인 성인 남성들 뿐이었다. 여자들, 아이들, 노예들은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은 어떠한가? 민주사회 구성원들의 자기의사 결정권이나 행동권을 인정하지 않고 시위를 통해 드러내는 그들의 염원을 무시하는 권력기관이나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오직 힘있는 사람들만이 (물론 그 힘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생길 수 있겠다)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비민주적인 태도가 보인다. ‘일반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구성원인 시민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래서 ‘배후세력’을 밝혀내서 ‘진실’을 찾겠다는 권력기관이 사실은 가장 비민주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진실’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어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사회의 구성원 (demos)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염원을 시위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진실’인 것이다. 이런 진실을 무시하고 부인하려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세계 곳곳의 대로와 골목길에서 저항의 시위 행렬이 길어지는 또 한해가 될 것 같다.

 

 

ⓒ 웹진 <제3시대>



  1. Serinity Young, “Women Changing Tibet, Activism Changing Women,” in Women’s Buddhism and Buddhism’s Women: Tradition, Revision, Renewal. Ed. Ellison Banks Findly (Wisdom Publications, Boston, 2000). [본문으로]
  2. Ibid., 238-239. [본문으로]
  3. Page duBois, Torture and Truth (New York: Routledge, 19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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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과 해방: 팔레스타인의 눈으로 보는 출애굽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옥중에서 완성된 문익환 목사의 책 「히브리 민중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가르칠 때, 흔히 학생들이 들이대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애굽에서[각주:1] 종살이하다가 도망쳐 나온 히브리인들이 40년 후에는 오히려 침략군으로 전락 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해방군이 침략군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문 목사는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에서 침략군이 아니라 여전히 해방군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인이 가나안의 농민과 합세하여 가나안 봉주를 물리친 해방군으로서 출애굽의 진정한 정신은 애굽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의 해방전쟁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한다.[각주:2]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보면, 초기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경험한 히브리인과 가나안 민중이 연대하여 가나안 봉주에 항거한 민중 봉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을 가나안 민중과 연대한 해방군의 이미지보다는 가나안 침략군의 이미지를 서술하고 있다. 출애굽의 해방군이 가나안의 침략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넋두리를 쳐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이 아닐까?

 

이 글은 세 명의 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이- 탈식민주의 이론의 선봉자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 정치 사회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팔레스타인 성공회 신부 나임 아틱(Naim Ateek), 베들레헴 루터란 교회 목사 미트리 레헵(Mitri Raheb)- 말하는 출애굽의 의미를 되짚어 보면서 출애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난 80년대 중반 이스라엘 계 미국인 마이클 월츠와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드 사이의 출애굽 논쟁이 뜨거웠다. 이 논쟁의 시작은 정치 철학자이자 사회 비평가인 마이클 월츠가 「출애굽과 혁명」 (Exodus and Revolution)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 월츠는 출애굽을 모든 혁명의 패러다임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청교도나 미국의 식민지 개척자,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민족주의자, 미국 인종차별에 대항한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시민혁명은 출애굽의 혁명정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이들에게 출애굽은 ‘억압에서의 자유’를 상징한다. 따라서 왈츠는 혁명정신에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첫째, 애굽이라는 ‘억압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둘째, ‘더 나은 세상’인 약속의 땅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지해야 한다. 셋째, ‘약속의 땅’은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만 한다.[각주:3] 그러나 월츠가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억압의 세상’과 현대의 ‘억압의 세상’에 문제가 있다. 그는 애굽인들이 히브리인들을 박해한 것을 20세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비교하면서, 아랍국가와 근대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을 애굽인과 히브리인 사이의 갈등으로 동일시 한 것이다.

 

이에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이고 상황적인 갈등을 왜곡한 해석이라고 즉각 비판했다. 사이드의 논지는 분명하다. 월츠의 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관계를 왜곡하고 합리화한 책으로 [해방군 히브리인이 가나안 침략군으로 전락한 것처럼] 가나안 땅 정복의 단순한 역사적 반복이다’고 비판하였다.[각주:4] 월츠의 출애굽은 20세기에 세워진 국가인 이스라엘의 정책을 옹호하는 빈약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월츠는 아메리칸 대륙의 인디안을 학살하며 땅을 빼앗은 청교도의 이미지를 간과했고, 나치정권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일을 그대로 답습한 유대인 시오니즘을 간과한 것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즉, 월츠는 애굽의 압제에서 탈출한 해방군이 가나안의 땅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침략군으로 전락한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성공회 신부 나임 아틱(Naim Ateek)은 성서가 정치적으로 오용되고 남용된 점을 지적한다. 특히 근대 이스라엘의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성서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안타깝게도 히브리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고 해방시킨 하나님이 팔레스타인에게는 편파적이고 차별적인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장처럼 아틱 신부는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시오니즘의 시각에서 읽혀졌던 출애굽의 의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아틱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성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던진다:

 

과연 어떤 차원에서 구약성서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 해방 정신에 기초하여 구약성서를 해방의 근 거로 역설하지만, 오히려 성서는 팔레스타인을 노예로 전락시킨 문헌적/종교적 근거 제공하고 있다.[각주:5]


베들레헴 루터란 교회 목사인 미트리 레헵(Mitri Raheb)는 히틀러의 박해라는 ‘애굽’에서 출애굽 한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주한 이후 유럽에서 온 침략군으로 변했다고 한다. 레헵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출애굽을 강연할 때 주고받은 학생과의 대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목사님! 출애굽은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의 이야기인가요?”
“바로 우리 팔레스타인의 이야기입니다.”
 
1969년 이후 팔레스타인은 새로운 이스라엘 건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팔레스타인은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1980년 이후 팔레스타인은 높은 세금 폭탄을 맞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거나 학살당했다. 팔레스타인의 박해는 히브리인들이 바로의 압제 아래 박해 받았던 것과 상황이 다르다. 히브리인과는 달리 팔레스타인은 외부에서 유입된 ‘침략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 땅과 웨스트 뱅크)본토민이다. 출애굽의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해방을 의미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의 땅 안에서 해방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게 애굽은 지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각주:6]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의 협상도 거절한다. 따라서 레헵 목사는 하나님의 개입만이 진정한 출애굽을 가져 올 것이라고 믿는다. 레헵 목사는 열 가지 재앙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경제봉쇄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의 출애굽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경제 봉쇄없이 불가능하다고 레헵 목사는 주장한다.[각주:7]
 

세 명의 팔레스타인이-사이드, 아틱, 레헵- 말하는 출애굽은 자유나 해방이라는 단어로 결코 출애굽의 진정한 의미를 담을 수 없다. 출애굽은 억압과 노예에서의 자유를 넘어 끊임없는 해방을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05년 겨울, 베들레헴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소 근처의 벽에 그려진 그림.

이스라엘 사람들이 군인으로 묘사된 점이 특이하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애굽을 지칭하는 히브리어는 ‘미츠라임’으로서 이 히브리어를 가장 잘 번역한 단어가 ‘애굽’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집트와 고대의 이집트 사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애굽’이라는 지명을 의도적으로 사용함을 알린다. [본문으로]
  2.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38쪽. [본문으로]
  3. Michael Walzer, Exodus and Revolution (New York: Basic Books, 1985), p. 149. [본문으로]
  4. William D. Hart, Edward Said and the Religious Effects of Cultur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 1. [본문으로]
  5. Naim S. Ateek, "A Palestinian Perspective: The Bible and Liberation," in Biblical Studies Alternatively: An Introductory Reader. ed. Susanne Scholz (New Jersey: Upper Saddle River, 2003), p. 397. [본문으로]
  6. Mitri Raheb, I Am A Palestinian Christia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p. 89. [본문으로]
  7. Mitri Raheb, I Am A Palestinian Christian, p. 9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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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가 아니다" 당연한 '인간 존엄'을 되찾기 위한 그의 여정[각주:1]


 

권오윤[각주:2]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영국 하층 노동 계급에 속한 주인공의 삶을 다룹니다. 주인공의 애정 생활이나, 가족 혹은 유사 가족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국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 중에서도 불합리한 영국 복지 제도에 대한 비판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구직 활동을 해야 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노동 복지의 현실은 <외모와 미소>(Looks and Smiles)(1981) 같은 초기작뿐 아니라, 90년대의 <레이닝 스톤>(1993), <내 이름은 조>(1998) 등의 영화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 바 있습니다. 또한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1994) 같은 영화에서는, 지키기 힘든 조건들을 내세우는 관료적인 사회 복지 제도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싱글맘을 보호하고 돌보기는 커녕, 점점 사회 바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통찰을 보여 주기도 했지요.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그런 계열입니다. 40여년간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 온 60대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심장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는 법적으로 보장된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담당 직원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지급을 거부당합니다. 항소를 준비하면서 실업 급여라도 받기 위해 애를 쓰지만, 절차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관료적인 영국 복지 제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간 고용 센터에서는, 불과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고용 센터 상담을 거부당한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도우러 나섰다가 쫓겨나기까지 하지요. 영화는 이 때부터 다니엘과 케이티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갑니다.

 

켄 로치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층 계급의 리얼리티에 맞게 인간적인 단점도 많이 지니고 있고, 결국 큰 사고를 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반적인 중산층의 도덕 기준으로 볼 때 많이 부족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들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기 위한 설정이지요. 각기 아버지가 다른 4명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또 다시 쉽게 사랑에 빠지곤 하는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의 싱글맘 매기, 마약 거래로 모은 돈으로 어머니와 살 멋진 집을 구입할 꿈을 꾸는 꾸는 <스위트 식스틴>(2002)의 리암, 친구들과 함께 값비싼 싱글 몰트 위스키를 훔칠 생각을 하는 <엔젤스 셰어>(2012)의 비행 청소년 로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잘’ 해 보려고 합니다. 규정과 절차에 질린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것을 존중하는 가운데,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안간힘을 쓴 대가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멸감뿐입니다. 다니엘은 고용 센터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하나 둘씩 어렵게 맞춰 나가지만, 그럴 수록 시스템은 그에게 더 완전한 복종을 원합니다. 그는 아내의 추억이 깃든 집안의 가구를 몽땅 팔아치우지 않고서는 연명할 수 없는 처지에까지 몰립니다.

 

 

아무 기술도 없고 배움도 부족한 싱글맘 케이티는 더 기가 막힌 일들을 당합니다. 그녀는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아이들이 우선이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마트에서 먹거리와 아이들 물건은 사면서도 개인 위생용품인 생리대와 데오드란트, 면도기 등을 살 돈이 없어 훔치다 창피를 당하기도 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푸드 뱅크에서 장을 보다가 배고픔을 못 이기고 그 자리에서 통조림을 따서 입에 마구 욱여 넣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 참혹한 빈곤의 굴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정직하고 성실한 노력만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손에 쥐어야만 탈출이 가능합니다. 다니엘의 운명과 케이티의 삶이 달라지는 분기점이 케이티가 성매매에 나서기 시작하면서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설정입니다. 자본의 논리와 그것에 기초한 사회 체제는 돈이 없다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걸 서슴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 나온 영국 복지 제도의 뻣뻣하고 관료적인 모습은 영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정 기준을 갖춘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는 보편 복지가 아닌,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선별 복지 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일입니다. 대상자가 얼마나 지원을 필요로 하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원 대상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한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주업무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나라의 초중고 무상급식 논쟁부터 시작하여, 양육 수당의 차별적 적용, 기초생활수급자 선정 기준 문제, 기초노령연금 차등 지급 등과 관련한 논란들 역시 재정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선별 복지 개념을 추구하면서 벌어진 것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의 복지 제도는 국민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지,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시혜 행위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자선과 기부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받는 사람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드러내게 만듦으로써 더 큰 모멸감을 줄 뿐입니다. 먹고 살려면 자존감이라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푸드 뱅크의 자상한 사람들, 위생용품을 훔친 사실을 눈 감아 주는 점장, 성매매를 알선해 주는 포주 등은 케이티에게 모두 같은 요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니엘 역시 질병 수당이나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절차와 규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노예처럼 행동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영화 말미에 다니엘이 겪는 불행은 부당한 처사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고, 당당한 인간으로 버텨낸 끝에 받게 된 징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 힘 있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다니엘 블레이크의 꿋꿋함과 주저하지 않는 연대 의식에 감명 받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의 안타까운 실패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와 사회 제도를 만드는 일에 소중한 씨앗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2월 18일자 기사 <"우리는 개가 아니다" 당연한 '인간 존엄'을 되찾기 위한 그의 여정>(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71106)으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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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말의 지혜

조윤선의 구속에 관하여


 

  요즘 국민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는 뉴스프로다. 무소불위였던 권력이 몰락해가면서 연일 다양한 뉴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선정성이나 빠른 전개, 카타르시스는 웬만한 드라마 이상이다. 다만 뉴스를 볼수록 국민들이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진다는 점에서 비극에 가깝다.
  오늘도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과 문체부 장관이 구속됐다. 특검 한 달 만에 벌써 10번째 구속이다. 두 사람 죄의 경중은 언론을 통해서 차고 넘치게 드러났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그동안 해왔던 거짓말, 특히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진 조윤선의 호소력(?) 있는 거짓말은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의원님, 천번 만번을 여쭤보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결단코 사실이 아닙니다.”
  조윤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요약하자면, 85년 서울 대학에 들어가서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인 시대에서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책만 보다가 고시에 합격하고, 정치판에서 불러주니까 국회의원, 장관, 청와대 비서관, 문체부 장관까지 시키는 대로 하다가 나중에는 범죄까지 시키는 대로 저지르고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 이다. 객관적인 평가는 아니지만 중론으로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짧게 말해, 공부 잘하고 성실하지만 자기비판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부 잘하고 성실하지만 자기비판이 없는 공직자에 대한 우려는 이회창 전 대선 후보를 목격했을 때 가장 강렬했다. 이회창 역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으로 판사와 고위 공직을 거치면서 나름 원칙적인 처신으로 대쪽 이미지를 쌓아왔지만 서민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한 귀족처럼 보였다. “요즘 고려대 나와도 기자하는가?”라는 발언이 상징적으로 유명하다. 다행히 이회창은 낙선하여 정치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김기춘 조윤선을 보면, 제 2, 제 3의 이회창들이 아직도 대한민국 공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아래 작품은 당시 이회창 대선후보처럼 자기 세계에 갇혀있는 성실한 엘리트들의 자기비판을 희망하는 마음에서 제작한 작품이다.-<늙은 말의 지혜>(2007)- 책상은 엘리트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 지식에만 천착하는 성실하고 무비판적인 엘리트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라고 본다. 그래서 백그라이트로 책상을 봉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백그라이트는 청계천 공방에서 노동자들이 사용하고 남은 부산물 중의 하나이다. 때로는 책에서 얻은 고급 지식이 현장에서 체험한 하찮은 지식만 못할 때가 있다. 따라서 엘리트, 특히 공직자는 자신의 지식을 관습적으로 쫒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타인의 지혜를 빌어 수시로 자기를 반성해야 한다.

 

 

백정기_늙은 말의 지혜_백크라이트, 책상, 의자_90*60*144cm, 2007

 

 

2007년 청계천 공방 풍경

 

 


 


백정기 作 (미디어작가)


- 작가소개

홍대 회화과를 중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을 졸업했다. 2008년 개인전 를 시작으로 5회의 개인전을 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2년 홍은예술창작센터, 2013년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레지던시 활동을 한바 있다. 음악적 청각화를 주제로 “Walking alone on a clear night: Musical sonification based on cityscape”외 1편을 등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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