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황용연
(미국 GTU 박사과정)


 
요즘 필자의 살림 걱정 중에 하나는 한 달 전쯤 확 올라가 버린 달러 환율이 좀처럼 그 때 수준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 환전을 해야 하는데 계속 떨어지던 환율이 한 달 전쯤 확 올라가 버린 후 다시 떨어지긴 했어도 예전 수준으로까지는 돌아오지 않으니, 지금 환전하면 그 때 환전했던 금액보다 적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한 달 전 환율이 확 올라갔을 때 터졌던 사건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하신 독자분들도 있으실 테다. 그 때가 바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던 때였다.

연평도 포격 사건과 이후 최근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어찌 보면 오랜만에 북한을 남한 사회의 중심 논란거리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사건 이후부터 계속 이어진 군사훈련을 둘러싼 '본때를 보여 주어야 다시는 안 그런다' vs '안 그래도 긴장 분위기인데 계속 불 지르면 평화란 어디서 찾으란 말이냐'라는 논쟁부터, 이미 소위 햇별정책을 쓰던 정권이 물러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햇볕정책이 맞니 틀렸니라는 식으로 벌어진 논쟁까지.
각자 자기 입장은 뚜렷할 수 있어도, 아니 오히려 뚜렷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쉽게 승복할 수 없이 벌어졌던 논쟁들 속에서, 문득 제목의 질문을 한 번 던져 본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쉬웠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북한은 적이었다. 그것도 실제로 총을 맞대고 싸우기까지 했던, 그래서 현실적인 위협이었던 적 말이다. 그리고 그 적은 동시에 남한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거울 구실도 했다. '야만스러운 공산주의 독재사회'라는 북한의 이미지를 구축해 놓고, 남한은 이 이미지와는 반대이므로 살 만한 사회이다라고 말하기 위한 거울로서의 구실.
그런데 정작 그 거울을 많이 써 먹었던 남한의 정부도 '공산주의'는 아닐지 몰라도 '야만'과 '독재'이긴 마찬가지였음이 폭로되면서 북한에 대한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이런 견해들은 '동족'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사회주의의 이상적 측면에 관한 호감이 거기에 덧붙기도 했고, 또 다르게는 남한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었다는 '민족의 원형'이라는 이미지가 덧붙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견해들이 수다히 제기되었어도, 다른 한 편에서는 여전히 북한은 적이었다.

이런 두 방향의 견해는 여전히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유력한 견해로 자리잡고 있지만, 80년대 말 이후 남한과 북한의 행보가 상당히 엇갈리면서 새로운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주의 사회가 붕괴된 영향과 홍수/가뭄 등의 심각한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북한 사회가 식량 걱정까지 해야 되는 지경이 된 반면, 남한 사회는 올림픽과 월드컵 등을 개최하면서 그 동안 지속되어 온 경제성장이 마침내 국제적인 성공의 증표가 되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물론 중간에 IMF라는 좌절을 겪기는 했어도).
그리고 이 시기에 초등학생들이 "통일되면 거지떼가 몰려 올 까봐 싫어요!"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북한을 '적'으로 여기던 '동족'으로 여기던 간에, 양편 모두에게 북한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갖는 존재였다면, '거지떼' 운운하는 초등학생에게는 북한은 별 비중이 없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어쩌면 월드컵 때 시청광장에서 울려퍼졌던 "대~한민국"은 바로 그 무시의 완성형이었을지도. 이제 '남한'만으로도, 그 '남한'이 한반도 '남쪽'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국가가 되었다는 외침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한 무시는 사실 연평도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난다고 해야겠다. 연평도 사건을 일으킨 북한의 이미지는 무서운 적이라기보다는 '양아치'에 가깝다고 보이니까 말이다. 그런 양아치를 혼내 줄려면 얼마든지 혼내 줄 수 있었을 텐데(물론 미국이라는 '큰 형님' 허락이 필요할 수도 있긴 하지만) '안 혼내 주고' '퍼주기'만 했던 게 문제지, 혼내 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서 '못 혼내 준 건' 아니었다고들 하니 말이다. 물론 연평도 사건 직전에 있었던 '3대 세습' 등의 얼빠진 행위가 이런 '양아치' 이미지에 일조하기도 했을 것이고.
이런 '무시'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의 그 동안의 대북정책을 두고도 북한을 적대시했다기보다는 북한을 무시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게 된다. 협상이든 적대든 북한에 대해 어떤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기보다 북한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면 도와줄 것이라는 입장만 계속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평도 사건은 적어도 국가 운영의 차원에서는 이런 '무시'만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무시'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햇볕정책'은 과연 자유로울까.
물론 '햇볕정책'은 북한을 무시해서는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기본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보자는 정책이니 말이다. 어쩌면 본격적으로 그 일치의 지점을 찾기도 전에 일단 급한대로 '퍼주기'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 햇볕정책의 현실적 난관이기도 했을 것이고.
하지만 '햇볕'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결국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이야기 아니던가. 이 '햇볕정책'의 정식 명칭은 '대북포용정책'. 즉 남한이 북한을 포용한다는 이야기지 그 반대는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을 남북평화 쪽으로 어필하려 했던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에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남한도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트위터에서 이야기했단다. 그렇다면, 햇볕정책과 그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북한은 적어도 '동등한' 위상의 주체는 아니란 이야기이니, 이것 역시 '무시'의 흔적이지 않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연평도 사건은 이제 이런 '무시'만을 가지고는 더 이상 북한 관련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제 제목의 질문을 다시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북한이란 무엇인가"에 앞서서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북한을 무시할 수 있었는가"부터 먼저 물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북한을 새삼스럽게 '겁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북한을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 남한 사회의 자신감,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올림픽과 월드컵 등의 계기로 표출될 수 있었던 그 자신감, 도대체 이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 말이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묻게 된다면, 북한 말고도 다른 '무시'의 대상들이 그 물음의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아마 이 글의 제목도 바뀌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우리'라고 할 때는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냐, 그 자신감을 주도한 사람들 이야기냐 그 자신감 때문에 어쩌면 무시당했던 사람들 이야기냐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될 테니까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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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I :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따라서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 이제 타자(他者, the other)다!

 

타자에 대한 논의만큼 21세기에 유행처럼 번지는 담론이 있을까? 하지만, 타자에 대한 이론만큼 논란이 많은 경우도 드물어 타자에 대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에 대한 책을 접하는 독자들 모두 왕왕(아니, 대부분) 혼란에 빠지는 경우를 목격한다. 필자 역시 타자에 대한 윤리를 주제로 논문을 진행시키고 있는데, 타자에 대한 사상적, 신학적 의미를 논하기 이전에, ‘타자가 누구이고 무엇이냐?’는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말문이 막힌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봉착하는 이유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복잡하고 길었던 사상사의 전개과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주체에 대한 논의, 다시 말해 자기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기에 그렇다. 타자의 반대말이 자아, 주체 아닌가? 자기를 어떻게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타자에 대한 규정과 이해가 다르다. 저마다의 입장과 맥락에 따라 저마다의 주체가 성립하고 그에 대한 대립각으로 다종의 타자가 존재한다고 볼 때 타자에 대한 논의는 그야말로 타자적이다.

 

본격적으로 타자의 윤리를 논하기 이전에, 사상사에 등장했던, 촘촘한 의미의 두께를 지닌 타자에 대한 굵직했던 흐름을 살펴보는 시간을 차례로 갖는다. 우선, 이번 웹진에서는 근대 이전의 타자론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 특별히 몰락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쓰여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통해 중세인들이 지녔던 타자에 대한 배제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타자의 출현이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도래라는 역사적 전환기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의 타자론이고, 마지막은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이어지는 타자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논의는 거칠고 매끄럽지 못하다. 그것이 거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필자가 지닌 타자에 대한 이해가 아직 과문하기에 그렇다. 비록 지금은 이처럼 남루하지만, 언젠가 너덜너덜 이곳 저곳에 붙어있는 타자론을 유려한 칼솜씨로 깔끔하게 발라낼 그날을 꿈꾸며이제 타자에 대한 여행을 시작한다.   

 

 

 

투박하게 읽어내는 근대이전의 타자론

 

서구 기독교 발전과정에서 여러 교리 논쟁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과 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해석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흔히 내재와 초월로 불리며 고대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에서부터 20세기 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신학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학 논객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져 왔다. 이처럼 신의 내재와 초월에 대한 해석은 당대 신학의 최대 이슈였으며 앞으로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 중세교회를 바라보는 이해의 창도 커다란 틀에서는 위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초월적 신에 대한 일방적 독주가 중세 1000년을 내내 지배했다는 말이 옳다. 이 시기에는 세상과 유리된 전적타자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만이 허락되었고, 체제(로마교황청)밖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에어리언으로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인들에게 타자란 두려움, 죄악, 악마, 공포, 마녀, 처단 등등의 말로 대치되면서 중세 특유의 타자포비아를 낳았다.   

 

타자에 대한 의식이 광기적으로 작동하고 합리적인 타자에 대한 접근이 지연되었던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 중세인들이 지녔던 세계관에 기인한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세계를 아름답고 친근하고 낙천적으로 이해한다. 세계관이 이처럼 따뜻했던 이유는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데, 하나가 공동체 자체의 안정성(폐쇄성)이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늙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의 모든 회로가 중세 전 까지는 모두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고 익숙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이렇듯 끈적하고 친밀한 횡적 공동체인 가정과 사회와 교회, 그리고 국가는 종적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 단일한 공동체성이 첫 번째 특징이라면, 하늘()과 관계맺는 무한에 대한 집단적 신뢰(믿음)가 중세 세계관의 두 번째 특징이었던 것이다. 근대 이전은 신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 즉 무한에 대한 믿음이 당대를 지배했던 사회이고, 무한한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인 계시(은혜)에 의해 인간은 신과 만났다. 이러한 매커니즘에 의해 중세의 (폐쇄적)공동체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교회가 위치하였다.

 

만일, 이런 안정된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타자)이 등장하면 무차별한 숙청이 자행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 좋은 예이고, 특별히 무한한 하나님의 자기현현 방식인 계시에 반하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감시와 통제와 제재를 받았다. 이를 통틀어 신비주의(mysticism)’라 부르고, 그것을 중세교회는 이단이라 정죄하였다. 근대이전 타자는 바로 이단자였던 셈이다. 전적 타자인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접속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 이상 피조물들의 타자로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인간 역시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두렵고 위험한 존재로 다가왔겠는가? 이처럼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가 사회전체를 지배했던 사회가 중세였고, 중세의 위기는 이 공식에 균열이 가해지면서 도래하기 시작하는데……

지금부터 다룰 <장미의 이름>은 중세교회가 지녔던 타자규정의 매커니즘을 파악하기에 유용한 자료이고, 중세가 지녔던 타자에 대한 증오의 두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해주는 흥미로운 해석이 될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따라서

 

쟝자크 아노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져 상영된 바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은 단순한 소설이기에 이전에, 중세 말 흔들리는 교회의 권위와 위기속에서 이를 수호하려는 수구 기독교 세력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14세기 중세교회가 상한가를 치고 십자군 원정의 실패 후 차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던 그 무렵, 한 수도원(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이에 윌리암 수사(영화에서는 숀 코너리가 배역을 맡음)가 사건의 해결을 위해 급파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범인은 수도원 도서관 사서로 40년 넘게 수도원을 장악했던 요르게 수도사였다. , 요르게는 사람들을 하나씩 죽였을까? 그리고 죽임을 당했던 인물들이 넘었던 금단의 벽은 무엇이었나? 이 질문은 소설의 주제이면서도 동시에 중세가 당면했던 교회의 위기와 세계관의 붕괴를 바라보는 중세 교권주의자들의 초조와 불안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장미의 이름’ 책표지


우선, 사건의 시작이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벌어진 것이 흥미롭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데 생활의 특색이 켈틱(Celtic) 수도원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켈틱 수도원은 영국의 웨일즈와 아이랜드에서 발달한 수도원 유형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묘하게도 어거스틴과의 인간론 논쟁 이후 이단으로 몰린 펠라기우스가 숨어들어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각주:1]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원죄교리를 배격하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 은혜란 인간의 이성을 개발시켜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은혜는 인간성의 한 부분이지, 인간 본성에 예외적으로 부가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제국의 질서를 신의 질서로 등치시키기 위한 로마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에 반하는 발언이었고, 무엇보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제도기독교의 입장에서도 마땅히 제거해야 할 불온 사상이었다. 이렇듯 교회사의 전개과정에서 변방으로 내몰리고 이단으로 정죄당했던 펠라기우스가 자리잡았던 곳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의 전통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자연신학을 신봉하였고, 창조의 선함과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학문을 장려하였고, 창조의 선함을 믿기에 금욕생활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도 않았으며, 피조세계의 건강함을 근거로 노동의 신성함도 이끌어낸다.

 

사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대결은 그 전시대에 있었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 중세로 넘어가서는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으로 이어지며 등장했던 초월과 내재를 둘러싼 오래된 지적, 신학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그리고 양자간의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긴장과 갈등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에 와서 표면적으로 봉합되고 종합되었다. 스콜라철학은 그간 교회사 전통에서 배제되어왔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자연현상과 창조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아울러 세상속에 내재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접촉점으로 인간 이성을 내세웠다. 그 후 억제되어왔던 인간이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점차 (교황청입장에서 볼 때) 암세포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하면서 1000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중세교회는 서서히 몰락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각주:2]

 

소설 속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은 수도원내 도서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의 유일한 필사본을 둘러싼 비밀로부터 연유한다. <시학> 2권은 희극론, 즉 웃음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살해당한 사람들은 웃음은 예술이며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의 내용을 알고 이에 접근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요르게는 왜 그들을 죽이면서까지 <시학> 2권의 존재를 감추려 했을까? 이는 혹 중세 세계 전체를 감싸고 있었던 신과 인간사이의 불연속성, 즉 무한에 대한 믿음을 수호하기 위한 중세 교회의 최후 발악이 아니었을까? 요르게로 대표되는 중세교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있어 웃음이란 엄숙과 경건을 저해하는 요소이며, 교회에 대한 권위와 두려움마저 소멸케하는 위험인자이다. 그리하여 필경에는 신적 계시의 위엄과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기에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된다. 만약 이 사실이 만방에 알려졌을 경우 교회를 위협하는 많은 이단(타자)들이 창궐할 것이고 그 전에 미리 이것을 차단하여야 한다.[각주:3]

  

요르게 수사는 몰락하는 중세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투쟁를 벌이며 온몸을 바쳐 잠재적 이단의 등장을 막고자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요르게의 발악은 이미 시작된 근대를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그에 따른 타자의 등장은 <시학> 2권을 감추는 것만으로 멈춰서지 않는다.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이미 전방위적으로 중세의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타자의 출현을 의미하였다. 

 

무너지는 중세, 도래하는 근대

 

중세의 붕괴와 근대의 도래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입각점이 있다. 문화사적으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부터 중세에 대한 균열과 근대를 여는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주장 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에 따른 봉건경제의 붕괴, 이에 따른 초기 자본주의의 등장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종교개혁의 후폭풍이라 할 수 있는, 수 백년간 진행된 각종 종교전쟁들로 인한 유럽대륙의 국민국가화와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로 야기된 고양된 시민의식을 들 수 있다. 이는 중세 교회와 봉건영주의 전횡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태동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 밖에도 각 분야별로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도래를 예감케하는 여러 전조들을 거론 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타자론의 관점에서 근대의 시작은 물리적으로는 지리상의 발견, 정신사적으로는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지적전통에 기반한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한 횡적 세계의 확대는 안정적이고 폐쇄적 공동체이었던 중세사회에 틈을 내면서 다름에 대한 공포, 충격, 그를 대하는 자세, 대책 등을 한꺼번에 모색하게 만들었다. 상상해보라!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배를 타고 온 노란머리 하얀피부 (검은 머리 검은피부 혹 노란피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면? 그 다름과 차이에 대한 해석, 타자를 하나로 엮어내는 방식, 타자에 대한 논의의 집대성, 내지 (당대 유럽식) 타자에 대한 해법의 완결판이 바로 헤겔철학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Philip Newell, A Celtic Spirituality, 정미현 역, 『겔트 영성 이야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중 1장 “창조의 선함에 귀기울이기: 펠라기우스”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소설 속 요르게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창세기는 우주의 창조에 대해 모자람 없이 설명하고 있는데도 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자연과학으로 우주를 음산하고 불결한 언어로 나타내고 있소”-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역 (열린책들, 1989), 533. [본문으로]
  3. 계속 요르게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소설 속 발언을 인용하면: “저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의 일자일언은 이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았오. 이 서책( 『시학』 2권)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이 그어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넘게 될 것이오.”-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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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여덟 번째

세미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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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개역개정판 열왕기상 19장 11-12절)

서방의 지중해와 동방의 아라비아를 잇는 중개무역로가 개통되었고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이 국제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북이스라엘은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된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는 아합왕이다. 북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독재에 맞서 생겨난 나라였기에 평등을 지향하는 민중전통이 살아있는 왕조였다. 그러나 야훼의 평등주의 전통에서 다소 자유로웠던 비 이스라엘계의 용병출신 오므리는 외세의 위협에 맞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부국강병의 길을 택하였고, 사마리아를 근거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페니키아의 성읍들과 상업동맹을 맺으며, 남유다를 예속화하는 등 평등보다는 발전에 주력하게 된다. 그의 아들인 아합은 페니키아 연합 왕국의 공주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아버지에 이어 보다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를 지향하였다.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는 사건(왕상 21장)은 모든 땅이 야훼의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뒤집는 것으로 아합의 권력 남용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왕상 17장)는 국가발전의 명목하에 벌어지는 처참하고 고달픈 민중의 삶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모든 정책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합은 야훼주의와 바알주의를 적당히 혼합하였고, 바알주의를 이용해 과도한 사유재산을 합법화하고, 사회불평등을 정당화하였다.

위에 인용한 성서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야는 바로 이러한 아합을 정면에서 공격한 하느님의 예언자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갈멜산의 대결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가져오는 절대권력과 야훼의 평등주의의 한판 투쟁이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 850대 1로 싸워 승리를 거둔 사건은 어떤 하느님이 참 하느님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인 동시에 절대권력을 향한 욕망을 부수고, 그에 물든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야훼 하느님 신앙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 오늘날 교회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네 평범한 심정에서는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을 박살내는 장면쯤에서 야훼 하느님이 등장하시면 그야말로 최고의 효과를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이 거대한 승리의 함성 속에 야훼는 현현하지 않는다. 대신 야훼 하느님은 승리의 싸움을 하고서도 다시 이세벨에게 쫓겨 차라리 죽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을 하는 엘리야를 채근하여 하느님의 산인 호렙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그 야훼는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로 등장한다. 이러한 은유, 상징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을 때 생기는 위험과 오해와 편견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엘리야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문자 그대로 읽을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갈멜산의 대결에서 엘리야가 백성들을 시켜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잡게 하고 그들을 기손 강가로 데려가 거기에서 모두 죽였다는 기사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어떤 이들일까? 물론 이들은 사회의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그래서 약자들의 피를 빨아 강자들의 배를 채우는 데 일조하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잡아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난 그러한 생각 속에 또 다른 폭력이 잉태하는 것을 본다. 변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너무 손쉽게 놓아 버리는 가벼움, 모든 성공에는 언제나 그 신화에 가려진 무수한 그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나 자신을,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여도 승리에 도취되는 순간 패배자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는 우리네들의 한계를 본다. 악을 박멸하는 것에 목소리를 높일 때 내 안에 깊이 내재한 폭력이라는 또 다른 악의 모습은 살피지 못하고, 그래서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불의에 저항하여 싸우는 용기도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상대편은 다 나쁘고 나는 무조건 옳다”는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도 경계해야만 한다. 어쩌면 바알의 예언자들은 더 잘 살고 싶고, 좀 더 편하고 싶고, 가끔은 내가 좋기 위해 남을 생각지 않는 평범한 우리와 같은 이들일 수도 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수많은 좋은 생각들이 서로 부딪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를 물리쳐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가자고 외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난을 받는다고 그들이 파렴치한 인간이거나 게으른 인간은 아니다. 신앙이 없다고 함부로 평가받을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목사가 빠지는 유혹도 전부 이런 것들과 관련되는 것 같다. 성공한 목회 어쩌구 저쩌구, 삐까뻔쩍한 그 무엇을 이루어야만 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흘러갈 때 혹시 우리는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영영 못 만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 가운데서 작은 성취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심지어 영광스런 자리(?)로 떠받들어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못생겨도, 나이가 어려도, 키가 작아도, 돈은 벌지 못해도, “목사님, 목사님” 하며 떠받드는 소리들만 귀에 쟁쟁할 때도 있다. 홀로 기도하면서, 그것도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오래도록 구상을 하고 발표한 목회계획이 “짜잔~” 멋지게 들어맞아 교인이라도 몇 십 명 늘면 갑자기 목이 굳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목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몇 몇의 반대의견은 들을 필요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다. 아흔아홉마리 양이 찬성하면 한 마리 어린양은 안중(眼中)에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이제 슬슬 “하느님의 종”에서 “하느님”이 되어가는 징조가 보이는 것이다. 

나에게는 7살(선규), 4살(동규) 먹은 두 아들이 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수 십 번 아이들과 협상을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윽박지르거나 내 맘대로 할 수는 없기에 아이들의 의견을 계속 묻는다. 아이들은 아직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판단을 못하고[각주:1]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 막무가내의 요청을 하거나 떼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다른 해결방식을 찾기 위해 엄청 머리를 쓴다. 잘 설명하기도 하고, 한가지로 쏠린 아이의 욕구와 생각을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안을 내놓기도 한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잘 해결되는 편이다. 

팽이를 놓고 두 아이가 싸운다. 팽이가 두 개나 있건만 둘째가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둘째를 혼낸다면 분명 울음소리는 더 키울 뿐이다. 잘못은 분명 둘째가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둘 사이에 협상할 거리를 찾는다. “선규야, 동규가 팽이를 무척 좋아하나 본데, 일단 두 개다 동규를 주고 선규는 이따가 동규 낮잠 자면 그 때 팽이 놀이를 하면 어떨까?” 실패다. 선규가 양보를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동규를 꼬신다. “동규야, 이 팽이는 형아 것이고 레이 유니콘 팽이가 네 것이니까 우리 하나씩 나누자.” 이것도 실패다. 동규가 두 개의 팽이를 두 손에 쥐고 놓지를 않는다. 다시 선규를 설득해 본다. “선규야, 아빠랑 숨박꼭질할까?” 이번에도 또 실패, 팽이에 필(feel)이 꽂힌 선규가 절대 포기할 기세가 아니다. 다시 동규를 꼬시기로 했다. “이게 뭐냐! 와~ 붕붕 자동차네, 삐뽀삐뽀 놀이 해볼까?” 아이들과 상관없이 내가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한쪽에서 새로운 놀이를 시작해 본다. 동규가 걸려 들었다. 금방 움켜잡았던 팽이를 놓아 버리고 자동차를 집으러 온다. 웬 걸! 이렇게 되자 큰 아이 선규도 이제 팽이에는 관심이 없다. 

개인의 작은 욕심들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악으로 증식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또 하나의 자만심, 욕망, 지배욕, 고집 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것을 성찰하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의견들을 놓고 싸움을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 사람의 열걸음이나, 다섯 사람의 두걸음이나, 열사람의 한걸음은 모두 같은 열걸음이지만 공동체를 생각해 본다면 모두가 손잡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흔아홉마리를 들이나 산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신 예수는 아마 길 잃은 양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침묵에 쌓여 있는 그 소리를 듣고 싶다. 어느 누구도 잘 돌아보지 않는 한 구석에서 조용히 그러나 부드럽게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그 소리를 듣고 싶다. 

갑자기 노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혹시 하느님의 세미한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입거나 욕을 먹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조심)하라. 큰 환란을 제 몸처럼 귀히 여겨라. 왜 ‘사랑을 입거나 욕을 먹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조심)하라’고 하는가? 사랑을 받으면 승진하고 욕을 먹으면 강등이 되는 법, 그러니 총애를 얻어도 놀란 듯이, 총애를 잃어도 놀란 듯이 하라. 그래서 사랑을 입거나 욕을 먹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조심)하라고 말한 것이다.”(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爲上, 辱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道德經』 13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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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론 성인이라고 상황판단을 다 잘하는 건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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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말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주일예배 후 교우들과 함께 자리한 식탁의 대화가 그날따라 유난히 불편했습니다. 큰 길 하나를 두고, 우리 교회는 ‘소망교회’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물론 골목 안쪽에 자리한지라,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이웃이며, 함께 지역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교회입니다. 매 주일 아침마다 성수대교 남단에서부터 도산공원 사거리까지 양 쪽 끝 차선에 주차된 고급승용차들과 외제차들을 봅니다. 건널목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성경책을 들고 소망교회로 향하는 것을 또한 봅니다.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 중 몇 명이라도 우리 교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교우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상상해본적도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 일도 있습니다. 주일아침,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들을 보는 일만큼 목사에게 좋은 광경이 또 있겠습니까. 이름이 다르고, 교파가 다를지라도,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라는 고백은 50명이 5백명, 5천명, 5만명이 부르는 찬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도 소망교회로 교적을 옮긴 교우들이 여럿 있는 터, 올 초 제직임명을 앞두고, 그분들의 이름을 교인명부에서 지웠습니다. 아팠습니다. 이런 제가, 그리고 교우들이 ‘소망교회가 아니라 실망교회’라는 세간의 비난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요. 저마다 일성을 토해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윤리의 마지노선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상식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어느 시사주간지가 뽑아놓은 기재의 제목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주먹이라’(시사in 174호)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썩고 또 썩고 또 썩어버린 겁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고, 작금의 교인들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이제 신물이 납니다. 교회가 피로감을 더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다가, 시장하시어 바라본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나무는 부패하고 타락한 유대교의 상징만은 아닐 것입니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그 나무를 보시고, 그분은 얼마나 분개하셨던지요. 이튿날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선생님 보세요.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 “하나님을 믿어라”(마가복음 11:20-21) 소망교회 사건을 두고, 저마다 하실 말씀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통탄의 소리, 자조의 소리, 분노의 소리, 빈정거림도 있을 것입니다. 제 글이 만약 여기까지 읽혀졌다면, 저도 여기에 한 소리 보태고자 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형제교회가 그 모양인데, 그 교회를 두고 기도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소망교회로 가겠다는 교우에게 왜 그 교회로 가려 하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크고, 사람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한 교회에서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그분에게 ‘그런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라고 말한 목사입니다. 소망교회뿐입니까. 최근 몇 개월 사이, 우리는 이른바 한국교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몇몇 교회의 이름이 신문지면과 인터넷상에서 몰매를 얻어맞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섣부른 영적 우월감이 빛은 타종교에 대한 무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들을 무심코 보아 넘기며, ‘나는 아닌데......’라고 혼잣말을 되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를 두고 한마디 하는 자리에 있을 때마다, ‘제2의 종교개혁’ 운운하며 예리한척(?) 정직한척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 ‘제2의 종교개혁’이 아니라 ‘제2의 계몽주의’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바벨탑처럼 쌓아놓은 교회의 권위, 성서와 하나님의 이름을 검과 방패삼아 구축해 놓은 요새가 완전히 포위당해 버린 것 같단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무너뜨린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 스스로 불신해버린 믿음의 자리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더 이상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온갖 허식과 탁상공론, 신학적 언어들의 유희가 퍽퍽한 목회현장을 더 힘겹고 씁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교회 담장안의 언어와 행위들로 축소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어느 교파 때문이라고, 어떤 신학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이에, ‘만민’이 우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사실이지 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읽고, 체계적으로 분석할 여유가 제게는 없습니다. 당장, ‘그 몇몇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가 아니냐’며, ‘기운 빠진다’고 한숨을 내쉬는 교우들을 마주해야 하는 저입니다. 우리입니다.

굶주린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음식섭취를 거절하다가 아사해 버린 ‘시몬느 드 베이유’를 존경합니다. 그이처럼 순결하고 진실한 행동의 정점까진 못가더라도, 더 이상 한국교회를 저기에 두고, 나와 우리 교회를 여기에 둔 채 말하고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바로 나이고, 소망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일부교회가 한국 개신교회를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판단보다는, 나의 ‘믿음없음’과 ‘영적미성숙’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진보이고, 그들은 보수라 말하지 말고, 나는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들은 기도만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단정하지도 말고,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인정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호세아처럼 말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호세아는 개인의 삶으로 놓고 본다면, 참으로 괴로운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호세아가 살던 시절,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는 완전히 타락해 있었습니다. 모두 영적인 병자들이 되어 있었고,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 한마디면 족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알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을 바알처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라는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한다는 결의로 가득한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호세아에게 바알신전의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신전의 창녀는, 왕으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든 사람이 성적관계를 맺음으로써 바알이 주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바알신앙의 매개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세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아들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다’입니다. 둘째아들은 ‘로루하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아들의 이름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저주해야 하는 운명, 그 삶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괴로운 사람을 두고, 고멜이 도망쳐버립니다. 신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고멜은 신전이 아닌 어느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가까스로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구해 그 집 주인에게 지불한 뒤, 자신과 자식들을 버린 아내를 데리고 나옵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호세아가 보입니다. 조금 뒤쳐져 호세아의 뒷모습을 따라 걸어가는 고멜도 보입니다. 그때 호세아가 불쑥 고개를 돌려 말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마시오. 나도 당신에게 그리하리다”(호세아 3:3)
호세아가 무얼 했습니까? 고멜처럼 방탕했습니까?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도망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 호세아가 고멜에게 약속합니다. “나도 당신에게 그리하리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 뜻 안에서, 호세아는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고멜이 호세아에게 방탕한 여인이었다면, 호세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그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 같은 작은 교회 목사 하나가,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이 거대한 몸집의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냐? 돈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교회’라는 괴물과 ‘스스로 더 높아져버린 돈이라는 괴물’과 싸워야합니다. 그러하기엔, 저도 우리도 참 작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인 박노해가 전해준 ‘희망의 말’하나를 간직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이 말이 있다면
“나 하나 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 박노해, ‘꽃피는 말’

저부터 고치겠습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삶이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걸어가겠습니다.
‘그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아이의 교사로 확신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한 것과 같습니다(로마서 2: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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