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22]



조르지오 아감벤 IV-호모 사케르에 대한 본론(2)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감벤이 보기에 여기서 성스러운 것이 가지는 성격(호모 사케 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에게 바쳐질 수 없으면서, 동시에 죽여도 법에 의해 심판받지 않는다는 두 가지 특성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성스러운 삶(호모 사케르)가 나타난 것은 법과 주권이 생겨날때, 즉 정치와 종교가 함께 배재의 영역을 만들어 낼때 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말을 듣다보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성서에서 찾아낼 수 있다. 바로 바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 [새번역])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논쟁을 행하면서, 율법을 통해서 들어온 저주, 곧 사망의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명기 21-23절, 즉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다는 근거를 가지고(이는 바울의 해석학적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신명기의 콘텍스트는 예수의 십자가와 매우 다르다.) 예수가 바로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거룩함에 들 수 없는, 정결하지 않는 생명이란 말이 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바울에게 나타나는 율법폐기론적 관점은 역으로 구약의 신에게는 드려질 수 없는, 신에게 바쳐질 수 없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 [새번역])


    한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극명하게 대조하면서 세상의 통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다고 일갈한다.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가 그들이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세상의 통치자들이 불리우는 세력들 속에 로마 제국를 넣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바로 로마의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를 연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바쳐지지 못하는 생명이며 (율법 때문에), 세상의 법으로 죽임을 당하여도 그 책임이 발생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이다.

    아감벤은 2015년에 출판된 [Pilate and Jesus (빌라도와 예수)] (Adam Kostkotrans.,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을 읽으며 예수의 재판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보여준다. 아감벤은 요한복음은 절대로 크리시스 (심판하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베마(심판하는 왕좌)라는 단어가 나타난다.(2015, 13-14) 빌라도가 예수에게 왕이냐고 물어볼때, 예수는 자신의 나 라는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요한의 내러티브에서 군중들은 예수를 죽이기 원하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불경함과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이 재판이 로마의 합법적인 재판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자. 문제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죽음을 언도했는지, 유죄를 판결했는지가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요한복음 19-13)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분명, 자신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명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재판석에 앉았다. (아감벤은 이에 대한 해석으로 “예수를 데리고 나와 재판석에 예수를 앉혔다.”로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한다. [헬라어 번역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번역은 마태와 누가에서 예수를 왕처럼 옷 입히고 ‘유대인의 왕ʼ이라 칭하는 장면과 도 연결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 27-26절과 누가복음 23-25절과 같이 빌라도는 요한복음 19장 16절에서 예수를 심판하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를 “넘겨”(파레도켄)준다. 즉, 재판은 있었으나 심판은 없었다(2015, 51). 이러한 ‘미스테리ʼ한 예수의 재판의 귀결은 십자가이다.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가 로마의 법 안에서 이루어진 정당한 판결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바로 죽음에 넘겨진 것이다. 정당한 법적 판결이 아니라면 이를 정치적 또는 제사적 희생아라 볼 수도 없다. 즉, 예수야말로, 아감벤의 담론에서는, 호모 사케르, 죽일 수 있으나 신을 위해 희생되지도 못하고, 그를 죽인자가 벌을 받지 않는, 호모 사케르, 헐벗은 생명이다.


- 다음회에서는 이러한 성서적 읽기가 아감벤에게 어떤 결론을 주는지, 그리고 바울신학에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바울신학가이드21]



조르지오 아감벤 IV-호모 사케르에 대한 본론(1)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이번 웹진의 중요 텍스트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입니다. HS로 표기합니다.-


   태초에 인간이 있었고, 인간에게는 삶이 있다. 인간에게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동물의 삶과 같이 그저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일상의 단순한 생명현상으로의 삶과 특정한 사회나 개인으로서의 삶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아감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삶(생명)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두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HS, 33). 조에(zoe)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며 비오스(bios)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뜻한다. 이 두 단어를 이용해서 아감벤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를 새롭게 정의한다. 바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조에)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 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HS, 45). 바로 이것을 생각해낸 아감벤의 상상력이 그를 현대의 정치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부터 신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쉽게 말하면, 보통 정치를 당을 짓고 다른 당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치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어떤 일에 대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힘을 만들어 그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누르고 원하는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정치라고들 한다. 단순히 국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정치가 아니라 집안에서도 그것이 일어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을 얻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들이 정치적 행위이다. 이러한 정치의 의미 저변에는 개인이 각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식의 정치이해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인 인권과 투표권을 통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이런 식이면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보인다. 이러한 정치 이해에 일침을 놓은 사람이 바로 미셀 푸코이다. 아감벤도 말하듯이 푸코는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근대 국가는 ‘영토’중심의 국가, 즉 땅 따먹기 중심의 국가에서 ‘인구국가’ 즉 국민의 삶을 담당하는 국가로 바뀌었다(HS, 27). 그와 함께 국가는 자본주의의 끝없는 국가간의 경제적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위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내는 생명권력 중심의 국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HS, 27). 그러나 아감벤은 이러한 푸코의 생각은 정치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그 나름의 대안을 생산할 정도까지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감벤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올바르게 길러내는 전통적인 정치론과 국민을 세뇌하여 노예화 하는 푸코식의 주체화를 통합시켜 이해하는 현대의 정치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40), 이를 위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이해하게 된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성스러운 인간(sacred human being)이 바로 그러한 현대 정치를 이해하는 시작점이다. 이 호모 사케르는 위에 말한 조에(zoe), 그저 간신히 살아있기만 한 삶은 되지만 비오스(bios)인 정치적 존재는 되지못하는 인간이다. 여기에서 아감벤은 매우 도발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데, 이 조에인 인간이 정치적 인간으로 포섭 되어야만 주권자는 스스로의 주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즉, 시민이 존재해야만 현대 정치에 주권자는 (박근혜든 문재인이든 생각해보자) 자신의 주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주권자는 언제나 조에인 인간을 비오스의 인간으로 포섭할 때 항상 ‘포함인 배제’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HS, 43). 쉽게 말하면 포함하면서도 배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기는 하지만 언제나 내어쫓는 방법으로만 받아들인다. 무슨 뜻일까? 여기서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말이 나온다. 즉, 인간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지만 그 권리는 오로지 예외상태에서만 주어진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백명만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에 천명이 지원했다고 해보자. 이 천명에게 공정한 방법으로 경쟁해서 최상위 백명 만을 선발한다는 법이 있다고 하자. 이 법에 따라 백명의 학생을 선발할 것이다. 그런데 이 법에는 단서 조항이 있다. 단, 예외 상태인 경우, 또는 특별한 상황인 경우, 합격자는 총장이 임의로 선발한다고 적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번 학생을 선발할 때마다 예외 상태의 법률을 적용한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법을 전혀 어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법을 어길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저 생존할 뿐인 삶을 정치적 삶으로 받아들이되 언제나 예외적 상황만을 계속된다면 정치적 삶이 아니라 생존의 삶, 헐벗은 삶만이 계속될 뿐이다.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정치적 상황이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성소수자를 예로 들 수 있다. 인간이기에 법의 적용을 받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계속적인 차별을 받는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예외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들이 그를 예외의 상태로 볼 때, 그는 인간의 삶이 아닌 생존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 삶의 모든 장소가 예외가 규칙이 되어버리는 과정과 인간을 정치적 존재(비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완전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정치 자체가 예외 상태가 되어버리게 되고, 결국 인간은 “배제와 포함, 외부와 내부, 비오스와 조에, 법과 사실”이 구분 불가능한 영역으로 변해버린 상태가 바로 아감벤이 말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HS, 46).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란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바로 인류 사회가 법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계속 되었다고 말한다. 즉, 현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인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법전통에 필수 불가결하게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아감벤은 로마의 법에 대한 연구에서 “최초로 인간의 생명 자체와 결부되고 있는 형상에 대한 기억”을 찾는다.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인데, 희생제물로 바칠 수 없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 받지 않는다”(HS, 155). 이러한 종교적 전통과 법전통의 한 중간에 서있는 존재인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는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함께 포함하는 동종의 두 변이”이다. 즉, 보통 우리는 순결한 것과 더러운 것이 나누어져 순수한 것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지만, 성스럽다는 것은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함께 지칭하는 단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HS, 166). 로버트슨의 연구에서 착안하여 아감벤은 고대의 종교적 전통은 언제나 순결한 것과 불결한 것에 대한 규칙들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에서는 동일한 것들이며 (성스러운 것과 불결한 것의 공통점은 만들 수 없다는 것) 그것을 구분하는 명료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언제나 그 두개의 개념은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HS, 162-163). 여기에서 추방령이 의미하는 바가 재미있는데, “추방이란 신성에 대한 일종의 봉헌이며, 추방하다라는 동사는 흔히 바치다 또는 헌신하다라는 뜻으로 전이 된다”(163). 언뜻 보면 이러한 설명들은 매우 종교적인 분야로 보이지만 이런 종교학적 연구를 아감벤은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왜냐하면 아감벤이 보기에는 이러한 양가적 신성에 대한 이해는 종교와 법이 맞닿아있는 연구의 장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HS, 170). 여기에서 아감벤의 정치에 대한 이해는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종합되는 장으로 들어가는데, 이러한 아감벤의 관점은 그가 현대 정치와 인간 사회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말함에 있어서 고대의 텍스트와 성서를 읽어가는 정당성을 제공한다. 조금 더 나아가 아감벤이 어떻게 신성함이라는 종교적 코드를 법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지 살펴보자.

    아감벤이 보기에 여기서 성스러운 것이 가지는 성격(호모 사케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에게 바쳐질 수 없으면서, 동시에 죽여도 법에 의해 심판 받지 않는다는 두가지 특성이 결합되어 있다. 즉, 인간의 법으로부터 예외인 동시에 신의 영역에서도 예외인 인간을 뜻한다(HS, 174). 바로 신의 영역에서도 설명되지 않고 인간의 법적 전통에서도 속하지 않는 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바로 이것이 아감벤이 묻고자 하는 질문인데, 그 질문의 답은 다음과 같다. 아감벤에 따르면 바로 주권(Sovereignty, 또는 통치권한)이 나타나는 영역에서 발견되는 인간이다(HS, 178). 여기서 아감벤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권은 바로 법적 예외 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쉽게 말하면 계엄령을 발발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러한 주권에 대한 이해는 칼 슈미트에 의해 개진되었는데, 칼 슈미트는 주권이 법에 의해 부여된 통치권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법을 정지시키는 계엄령의 권한까지 있기때문에 법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예를 들면, 광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을때, 당시 군부독재정권은 시민의 권한을 송두리채 부정하고 자의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주권이 국민에게 나오는데 어떻게 그 주권으로 국민을 살해할 수 있을까? 바로 계엄령을 발발시키는 주권이 그 법을 뛰어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바로 그것을 허락하는 법에 의해서 말이다(계엄령의 관한 법이 있기때문). 그러므로 주권은 법안에 있으면서도 법 밖에 존재하며, 그를 통해 예외상태를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 예외상태를 규칙으로 또는 일상화함으로 법자체를 정지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주권의 힘이다. 바로 이런 인간의 정치 자체가 생겨나는 영역, 즉 주권의 통치권한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모든 인간을 호모 사케르, 즉 성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이다. 즉, 생명을 성스러운 것이라 우리가 말할때, 보통 우리는 이 생명이 신에게 부여 받은 것이기에 절대적인 기본 인권을 가진 가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감벤이 보기에는 신의 영역에 버림받고 법의 영역에 보호받지도 못하는 죽음의 권력 아래에 놓인 헐벗은 삶(Bare life)를 말하는 것이라 주장한다(HS, 177). 그러므로 아감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보통의 정치학이 말하는 법과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신과 함께 살아가는 종교적 영역에도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영역이 동시에 포함되면서도 부정되는 이중의 배제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 다음 웹진에서 계속됩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바울신학가이드20]



조르지오 아감벤 III-호모 사케르에 대한 서론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이전 웹진까지 아감벤에 대해 논할 때 그의 저서 [남겨진 시간]을 중심으로 아감벤이 해석하는 바울의 종말론과 메시아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감벤의 철학중에 [남겨진 시간]은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또한 이 부분은 아감벤의 전체적인 사상의 그림 속에서 볼 때, 더욱 그 의미가 확실히 드러난다. 이번 웹진부터 2회에 걸쳐서 아감벤이 그리는 그림 중에 가장 핵심적인 줄기에 속하는 [호모 사케르](2008, 새물결)를 중심으로 아감벤의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을 살펴본다.


   보통 일반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정치를 논할 때, 근대의 민주정치는 길고 긴 인간 정치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신화의 시대에 묶여서 고대 국가의 왕이나 제국의 황제를 신의 대리자로 섬기던 정치 사회에서 중세의 봉건사회의 귀족 정치를 넘어 중앙집권적 왕권의 역사를 지나, 비로소 민주정치의 시대를 인간은 이루었다. 근대의 민주정치는 주권자(대통령이든 의회이든)가 가진 국가 운영하는 힘을 민주사회를 이루는 시민 모두에게서 찾는다. 소위 천부인권사상에 의지해서, 모든 시민은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함으로써 주권자는 잠시 동안 시민의 삶과 행복을 위해 국가를 통치한다. 이전의 고대사회나 중세 사회와 다른 점은 주권의 주인인 국민들의 인권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관은 근대 이래로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의심되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미셀 푸코를 들 수 있는데 그의 미시권력에 대한 이해 또한 이러한 민주정치제도의 환상을 비판하고 있다.

   민주정치제도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야기했지만 요즘에 와서 아감벤이 많은 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야곱 타우버스(Jacob Taubes)와 칼 슈미트(Karl Schmitt)간의 논쟁에서 나타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의 이해를 계승 발전시켜 현대를 진단하는 새로운 정치학의 관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Today everything is theology, except what the theologians declare to be such.”(Karl Schmitt) 

    -오로지 신학자들이 신학이라고 일컫는 것들을 제외하고 오늘날의 모든 것이 신학이다.[각주:1]


    슈미트는 근대 정치를 진단하면서 근대의 정치학에서 현실 정치를 이해함에서 벗어나 신학적 방법론으로 정치를 이해해야한다고 말한다. 보통 우리는 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보통 ‘주권’이란 것은 신이 지배하던 시대가 종식되고 난 후에 인간 개개인의 권리에서 찾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주권은 이미 신적 권위에 의해 만들어진 법안에 장치되어 있었고 이제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으로서,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란 법질서 안에 속하면서도 그 법이 중지를 명령할 수 있음으로 법자체를 무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 법밖에 존재하는 자이다.[각주:2] 이러한 슈미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아감벤은 현대정치를 말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과 인간의 삶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그에 대한 주권자의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아감벤의 이해는 몇천년전의 고전을 읽는 것이 법과 인간 삶의 역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법이 우리의 삶에서 동떨어져서 법학이란 분과학문으로 바뀌거나 국회에서 법의 제정자와 주권자의 전유물이 되기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 법을 통해 현실 사회를 바꿔보려고 했던 시대나 법안에 신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었던 시대의 법과 기록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한 서구 정치의 원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아감벤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거기에 덩달아 성서라는 것이 가진 새로운 정치적 의미가 발견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감벤이 바라보는 현실의 삶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현실의 정치는 모든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만든다. 여기서 호모 사케르란 인간이란 호모(homo)와 성스러운(Sacred)의 라틴어 합성어로서 ‘성스러운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현실 정치의 주권자는 모든 인간을 호모 사케르로 만듦으로 자신의 주권을 확보하여 정치적 입지를 유지한다.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등장하는데, 아감벤은 이를 매우 절망적인 상황으로 본다. 단순하게 다시 말하면 아감벤은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나찌의 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고 여기고 이 수용소를 주권자들에 의해 호모 사케르가 된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여러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왜 ‘성스러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이리도 부정적인 것이고, 주권자는 도대체 어떻게 거대한 수용소를 건설하여 인류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간다는 것일까? 아감벤의 이러한 시대 개관은 매우 중요한데, 바로 어떻게 시대를 진단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해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웹진에서 이야기했던 [남겨진 시간]의 바울의 이야기는 아감벤이 바울을 통해 발견한 나름의 해법이다. 필자는 이천년전의 문서에서 아감벤이 발견한 하나의 특이한 생각의 방식을 바울을 통해 소개했고 이제 그 방식이 왜 현실 정치의 상황에 대한 해법이 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아감벤이 말하고 있는 ‘주권’의 개념, ‘호모 사케르’의 정체를 살펴보며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수용소로 한발자국 들어가보고자 한다. 다음 웹진에서는 본격적으로 호모 사케르의 역사를 살펴보자.


참고도서

Agamben, Giorgio.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 웹진 <제3시대>




  1. Carl Schmitt, letter to Armin Mohler, 14 August 1959, in Jacob Taubes, Ad Carl Schmitt: Gegenstrebige Fügung (Berlin: Merve, 1987), p. 37. [본문으로]
  2.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Vier Kar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1922](Berlin: Dunkcer & Humblot, 1996), 17.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바울신학가이드19]



조르지오 아감벤 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바울서신의 쟁점을 크게 두개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구원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종말에 관한 것이 된다. 즉, 구원론과 종말론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바울서신을 메시아니즘을 중심으로 읽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종말론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울 이전시대에 있었던 유대 종말론을 메시아니즘을 통해 바울이 어떻게 재해석하느냐가 그 방점이 된다. 유대의 종말론은 신의 심판과 다스림이 현재의 역사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은 이천년전이라면 모르겠으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않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 전통적인 바울의 종말론은 이 둘 사이에서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 대표적인 이해가 바로 ‘이미’와 ‘아직’이란 도식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히 ‘이미’ 시작되었고 그 완성은 ‘아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지만 죽어서 가는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몇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째로, 곧 온다던 예수는 틀린 건가? 둘째로, 예수가 곧 온다던 바울은 틀린건가? 세째로 그들이 틀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먼저 첫째와 둘째가 맞다고 한다면 일단 신학적 서술에서 종말론을 빼버려야한다. 바로 종말론이 없어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신학을 구성해야한다. 실제적으로 요즘의 신학은 구원론 중심의 신학이다. 특히나 바울의 신학이 ‘이신칭의’가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수 있다. 또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삶의 추구에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내세를 바라거나 메시아의 재림을 기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을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 최근의 성서신학은 몇가지 논쟁점을 남겨놓았다. 먼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종말론적 표현들이나 재림에 대한 표현들이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말인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이러한 심판과 재림의 메세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 생각한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신이 분부한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끈 혁명적 지도자로써 그려진다. 만약에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이라면 바울은 그러한 종말론을 구성한 일세대 신학자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만약에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위 종말론이라는 것, 즉 그리스도 공동체의 종말론의 1세대 정도되는 종말론 또한 ‘이미’와 ‘아직’이라는 도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감벤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바울의 메시아니즘의 정수는 메시아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가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보통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라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새롭고도 보편적인 인간을 상상한다. ‘새시대 새일꾼’이라는 표현이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등은 이전의 역사를 끝마치고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뭔가 새로운 인간을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또는 아감벤이 생각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시대를 어떻게 끝마칠 수 있느냐이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수 있겠는가? 또는 이전의 시대를 맺음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 그 자체일 수는 없을까? 이를 맑스식으로 말하면 맑스가 꿈꾼것은 ‘새로운 계급’의 시대가 아니라 계급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각주:1] 결국 핵심은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사건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 된다.[각주:2] 바로 메시아닉한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결국 주체가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주체가 그 현재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방법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 즉 “오로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구원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일이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고 바울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하나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각주:4] 이 세계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세계의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와 대치시키며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바울은 메시아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두개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하나가 법이고 두번째가 시간이다. 지난 웹진에서 필자가 아펠레스와 포로토제네스의 이야기를 다룰 때, 바울이 어떻게 법이 분리시킨 유대인과 비유대인,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분리를 어떻게 새로운 분리를 더함으로, 즉 육과 영으로 분리시켜 법자체를 정지시키는지를 논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바울의 논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전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것을 갈등의 극한으로 몰고감으로써 비판의 정점에서 반대로 완성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오랜 기간동안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율법관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가? 그런데 왜 완성시킨다고 말하는가?(롬 10:4) 아감벤에 따르면 오로지 율법을 그 극한의 갈등으로 스스로 몰아넣어서 마지막에 율법을 완전히 무장해재 시키는 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메시아닉한 관점에서는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각주:5]

    이후에 논하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알랜 바디우와 상극을 이루는 아감벤의 바울 읽기이다. 아감벤은 명확하게 바디우를 비판하는데, 아감벤은 ‘하나의 보편적인 생각이 어떻게 완전한 타자들의 기초위에서 동일성과 평등성을 나타낼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각주:6] 바디우에게는 바울이 어떤 새로운 보편성을 더함으로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면 아감벤에게 바울은 ‘유대인’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로 묶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에 의해 생성된 아이덴티티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포착할 수 없음을 말한다. 결국 법자체를 inoperative(활동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아감벤은 새로운 주체가 아니라 법이 중지되어, 그 어떤 주체적 정의에도 포함되지 않는 ‘남은 자’(Remnant)들이 바울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 남은 자들은 “전체도 아니고 전체의 부분도 아니고, 부분이나 전체의 불가능성”을 나타낸다. 즉 모든 사람이나 민족들이 그 자신을 전체가 아니라 남은자로 놓는 것이다. [각주:7]예를 든다면 모든 사람들이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그 둘이 아닌 남은자가 될때 계급은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논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상상력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데리다의 논의를 바울로 이끌고 들어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바울읽기는 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도 나타나있다.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은 다음 웹진에서 논해보자.


참고도서

Agamben, Giorgio.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 웹진 <제3시대>



  1.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31. [본문으로]
  2. Ibid., 41. [본문으로]
  3. Ibid., 42. [본문으로]
  4. Ibid., 4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2. [본문으로]
  7. Ibid., 55.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바울신학가이드18]



조르지오 아감벤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1942년생, 이탈리아의 철학자, 그의 저서 [The State of Exception] (예외상태)와 [Homo Sacer] (호모 사케르)로 잘알려져있다. 삶정치(Biopolitics)의 개념을 중심으로 철학을 개진한다." 이 짧은 서론이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는 아감벤의 첫 소개이다. 위의 두 저서가 정치학, 사회학, 철학, 신학에 필수적으로 읽어야할 책으로 떠오르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과거에는 로마제국 현재에는 이탈리아의 신성으로 떠오른 학자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고자 한다. 필자는 신약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의 철학적 깊이를 쉽게 다룰수는 없지만 그의 바울에 관한 책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남겨진 시간: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바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논할 것이다. 물론 점차적으로 그의 철학적 프로젝의 중심을 논하기도 할 것이다. 

   바로 [남겨진 시간]을 펴보자. 본 서는 쉽게 말하면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개역개정)에 대한 길다면 긴 주석서이다. 원래 본문은 “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κλητὸς ἀπόστολος ἀφωρισμένος 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 사도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된” 정도가 되겠다. 먼저 아감벤식으로 용어를 정리하자. 그리스도란 메시아에서 온 말로써 기본적으로 ‘기름부은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처음 부분은 “바울, 메시아 예수의 종”이 된다. 아감벤은 본서 처음부터 기독교가 역사를 통해 이 메시아를 그리스도란 말과 분리해내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결국 로마서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소개이며 그러므로 ‘메시아적 텍스트’이다.[각주:1] 그리고 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메시아의 시간, “time of the now”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시간적 개념으로 소개하는 세번의 표현 [τοῦ νῦν καιροῦ (8:18), τῷ νῦν καιρῷ (3:26), τῷ νῦν καιρῷ (11:5)]에서 아감벤이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어느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같은 ‘지금 이순간’이다.[각주:2] 결국 아감벤이 바울을 통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아사상의 핵심은 바로 메시아의 시간,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시도가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데 바로 바울의 새관점주의 이후에 나타난 특정한 바울 해석에 대한 반론으로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본 웹진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소위 ‘바울의 새관점’을 설명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그 이유는 새관점주의가 나타나면서 과거의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의 ‘이신칭의,’ 즉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중심으로 한 바울신학이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율법을 벗어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바울 신학의 핵심, 즉 왜 바울이 그토록 열심히 에클레시아 (모임: 현재 ‘교회’로 번역되는)를 만들고 서신을 통해 신학적 진술을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하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여러 바울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자는 크게 바울신학의 ‘이신칭의’를 새롭게 해석한 제임스 던(James Dunn)이나 톰 라잇 (N. T. Wright)을 소개했고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종말론을 중심으로 놓은 알버트 슈바이쳐 (Albert Schweitzer)나 크리스쳔 베커(Christiaan Beker)를 소개하였다. 특히 던과 같은 학자는 바울의 주요 공격 대상은 유대교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교의 민족적 우월감이라고 생각했고, 바울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유대교의 아이텐티티 마커 (Identity Markers)라고 하였다. 즉 자신들의 다른 민족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특정한 전통이나 문화 (안식일, 음식법, 할례)가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지평과 동등될 수 없다고 바울이 목놓아 외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의 신학의 핵심은 어떤 민족성이나 문화등으로 인류를 갈라놓는 모든 형식에 반대하면서 평등하고 선입견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보편적 공동체의 정초를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은 보편적 구원의 지평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여러 인종적 갈등과 종교적 충돌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아감벤의 대답은 단순하다. 바울은 어떠한 새로운 보편적 인간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니즘, 즉 메시아적 시간론을 토대로 던의 방식이나 종말론적 방식으로 바울을 보지 않고 이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메시아론을 바울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바울에 대해 오로지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바울 이래로 아마도 딱 두명일텐데, 처음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이고 그 다음은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적 시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메시아적 시간, 남겨진 시간(The time that Remains)


    먼저 가장 쉽게 아감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예는 본서의 50–51페이지에 나오는 아펠레스와 포로토게네스의 일화이다. 둘다 헬라세계의 위대한 화가였는데, 프로토게네스가 아펠레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붓으로 더는 가늘게 그릴 수 없는 선을 그려놓았다. 프로토게네스가 떠난 이후 도착한 아펠레스는 이 선을 보고 자신의 붓을 들어 그 선의 중간을 가르는 더욱 가는 선을 그렸다. 즉, 더 가는 선을 그림으로써 이전의 선이 두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감벤은 ‘아펠레스의 절단’ (The cut of Apelles)라고 부른다.[각주:3] 이 소개된 예화로 설명하자면 프로토게네스가 먼저 그린 선은 유대교의 율법이나 로마의 법이 만들어내는 구분선을 뜻한다. 갈라디어서 3장 28절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그리스인들, 노예와 자유인들이 모두 구분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인을 분리하는 것이 바로 유대의 율법이고 노예와 자유인을 가르는 것이 로마의 법을 뜻한다.[각주:4] 즉, 당시 바울에게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법(Law)이였던 것이다. 바울의 서신에 반율법적인 시각이 있다면 바로 법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고 아감벤은 생각한다.[각주:5] (48) 결국 법은 나와 너를 나누고,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분리한다. 아감벤의 사상을 소개하는 다음편에서 법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펠레스의 절단’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법을 의미한다. 인간이 그릴수 있는 가장 가는 선의 구분 위에 그려 넣음으로 그 이전의 선이 가지는 의미를 무화시켜 버리는 선, 그것은 쉽게 말하면 바울이 스스로를 ‘메시아의 노예’라고 선언함으로 나타나는 효과와 같은 것인데, 아감벤은 바울에게 아펠레스의 선은 ‘육과 영’이라는 구분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다시 육체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유대인으로 나누어지고, 이방인 또한 육에 속한 이방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으로 나누어진다.[각주:6]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영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들을 합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자 함일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영에 속한 유대인은 율법아래 매여있고, 영에 속한 이방인들도 로마의 법 아래에 매여있다. 바울이 육/영이라는 아펠레스의 절단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9장 20–21절)  

    바울은 자신이 율법이 아니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자, 그리스도의 율법 위에,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유대인/헬라인이라는 구도는 사라진다. 즉, 율법아래에 그러나 율법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율법과 법이라는 프로토게네스의 선의 가운데 육/영이라는 선을 그음으로써 그 선안에 나타나는 새로운 존재들, 즉, 남겨진 존재들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의도라는 것이다. 바로 존재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닌 자들이 나타나는 시간이 바로 메시아의 시간이다. 다음 구절을 음미해보자.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7장 29절–31절)   


    전도서 3장은 “모든 일에 다 때가 있다”고 하면서 태어날 때와 죽을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분리된 시간을 하나로 합친다.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다. 바울은 “웃는 것처럼 울라”라고 하지 않는다.[각주:7]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라”라고 말한다. 바로 이 “as if not”이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에 일어나는 핵심적 사건이다. 바로 세상의 어떤 법도, 어떤 효과도 그 효력을 중지하는 시간(Inoperative time)이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하는 그 표현은 바로 노예와 자유인을 분리하는 로마의 법을 중지시키는 효과를 낳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유대의 율법의 효력을 소멸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메시아의 노예’라는 표현은 바로 메시아적 소명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효과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적 조건들이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을 표현한다.[각주:8] 그러므로 ‘부름받은’로 해석되는 클레토스 (κλητὸς)는 더 나아가 모든 소명받은 자들의 커뮤니티인 ekklesia (All Kleseis)로 명명되는 것이다.[각주:9] 바로 메시아적 시간에 메시아적 소명을 받은 새로운 공동체를 뜻한다고 아감벤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의 핵심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 즉 그리스도 공동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전의 모든 정체성이 그 효력을 잃어버리는 시간, 메시아적 시간에 나타나는 메시아적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메시아적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왜 아감벤에게 현시대에서 이 메시아적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그토록 큰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웹진 <제3시대>


  1. Giorgio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1. [본문으로]
  2. Ibid., 2. [본문으로]
  3. Ibid., 50. [본문으로]
  4. Ibid., 1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1. [본문으로]
  7. Ibid., 23. [본문으로]
  8. Ibid., 13. [본문으로]
  9. Ibid., 22.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1)
특집 (8)
시평 (94)
목회 마당 (60)
신학 정보 (136)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72)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5)
소식 (153)
영화 읽기 (32)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53,571
Today : 12 Yesterday : 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