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6]


알튀세르와 이데올로기적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왜 알튀세르인가


      루이 알튀세르(1918-90)라는 이름이 맑스주의 논쟁의 한복판에서 한 때 큰 영향력을 끼쳤던 적이 있었다. 발리바르가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각주:1]에서 말한 것 처럼, 그는 맑스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테제를 프랑스철학사에 남긴 철학자이며, 맑스주의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에서 프랑스철학이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만든 공로자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에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혀진 듯 보이지만, 오늘에도 그의 철학적 유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맑스주의가 스탈린식 사회주의 실패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의 변화 안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방황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맑스주의를 관념론적으로 수용하려는 유혹으로부터 과감히 분리시키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은 학문적 완결성을 떠나 오늘날 맑스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모든 시도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굳이 열렬한 알튀세리앵이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에 맑스를 말하려면 알튀세르는 한번 쯤은 넘어야할 할 관문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관문을 통과시켜주는 열쇠와 같은 존재이다.

    이 글은 알튀세르가 이해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주체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의 전체 철학의 내용을 조망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구별시켜내기 위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으며, 이를 위해 정신분석학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알튀세르는 주체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지,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위한 철학’이라는 맑스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에 얼마만큼 충실하였는지를 평가해 보려고 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


    알튀세르의 철학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논의는 그의 두 권의 논문집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첫번째는 ‘맑스를 위하여Pour Marx (1965)’이고 두번째는 ‘자본론을 읽는다 Lire le Capital(1965)’이다. 이 두권의 논문집을 통해서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맑스주의 철학자로서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저술들은 무엇보다 책의 제목 자체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맑스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이유가있다. 제목 그대로, 그의 철학은 ‘맑스를 위한’ 동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맑스를 위한’ 그의 실천전략은 다시 ‘자본론을 읽자’는 제안으로 전개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가 겨냥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제일 먼저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들로부터 경계짓는 것이다. 스탈린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맑스주의에 대한 스탈린식의 교조적 적용에 대해 돌파구를 찾고 있던 때에, 맑스주의를 옹호하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손쉬운 반응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이었다.[각주:2] 이 휴머니즘적 해석은 맑스의 청년기 저작에 근거하는데, 특히 ‘경제철학수고(1844)’에서 재발견된 ‘소외’의 개념은 그간 무시되었거나 간과되었던 인간의 윤리적 심리적 차원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청년 맑스의 재발견은 그동안 스탈린의 교조주의를 통해서만 맑스주의의 저작을 해석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으로 경험되었다. 이 해방감은 다시 ‘자유주의’적이고 윤리적이며 휴머니즘적인 맑스주의를 진보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유, 소외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개념들로 맑스주의를 재해석하려는 흐름에 대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오염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대신에,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과학적 독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과학적 독해라는 것은, 맑스주의를 비판하거나 혹은 옹호하기 위해 맑스의 저작들을 이데올로기적 읽기방법으로 체계화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해석방식을 말한다. 말하자면, 맑스를 순수하게 읽어야 하지, 다른 의도를 숨겨둔채 읽지 말것을 주문하는 것이다.[각주:3] 알튀세르가 보기에,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은 청년 맑스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을 맑스 전체를 해석하는 틀로 오해한 나머지, 맑스 성숙기의 저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비판한다.[각주:4]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알튀세르가 내세운 ‘맑스를 위한’ 읽기 방법은 맑스주의 이론을 다른 이데올로기적 해석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이거나 휴머니스트적인 청년 맑스로 위장”[각주:5] 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해 반박하는 것을 과제로 보았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일차적으로 맑스 청년기 저술 안에 보여지는 휴머니즘적인 경향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를 위해서, 알튀세르는 이론적 형성의 특수한 차이를 드러내는 선별 지점을 지시하기위해 자끄 마르땡에게서 ‘문제틀’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과학적 학문의 토대에 대한 이론적 문제들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가스통 바슐라르로부터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먼저, ‘문제틀’이라는 것은, 개별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들을 주재하는 질문들의 체계”[각주:6]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과의 연관성/일관성을 벗어나서 답해지지 않고, 반드시 질문의 체계안에서 대답되어진다는 말이다. 모든 이론과 철학은 그 자체가 일관성 있는 연속적 개념들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문제와 답은 항상 서로 연관된 틀안에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우물가서 숭늉을 찾을 수 없는 것 처럼, 헤겔식의 관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맑스적인 유물론적 대답에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질문은 이미 대답이 발견될 범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틀’이라는 개념은 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의 차이를 분별해 줄 수 있는 방법이론으로 차용되었다. 이 개념을 통해 알튀세르는 청년맑스의 ‘경-철수고’는 포이에르바하의 문제틀이지 맑스적 문제틀이 될 수 없다고 분석하며,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를 분시시켜놓는다.

    ‘인식론적 단절’[각주:7]이라는 개념 역시 사적유물론의 주창자로서 성숙한 맑스를 이데올로기적 관념에서 발견되는 맑스를 분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말은 앞선 ‘문제틀’이라는말과 연관되어 있는데, 과학 이전의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에서 과학적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로의 급격한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 전환은 서로 유착관계에서 일어나는 순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환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서로 모순되고 단절되며 불연속적인 대립속에서 벌어지는 적대적인 전환을 말한다. 알튀세르는 청년 맑스와 성숙기의 맑스안에서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났다고 보는데, 그 기점은 ‘독일이데올로기’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독일이데올로기’[각주:8]에서 비로소 맑스가 목적론적 사고방식, 실증주의적 역사관, 휴머니즘적인 태도와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방식과 완전히 결별하고 그의 독창적인 ‘사적유물론’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으며, ‘자본론’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진보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았다.

    이제, ‘문제틀’과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들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다른 이데올로기적 체계(틀)과 분리시키고, 서구 부즈조아적인 휴머니즘으로부터 성숙한 맑스를 되돌려 놓기위한 알튀세르의 기획은 보다 구체적인 문제로 진입한다. 알튀세르는 이 목적을 보다 현실적으로 가시화시키기 위해 맑스의 초기 저작들 안에서 나타난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알튀세르의 대답은 이데올로기론에서 다뤄진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문제삼는 글은 그의 논문집 ‘레닌과 철학(1969)’에 실린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논문에서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는 이미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모순과 중층결정’이라는 글에서 먼저 다뤄진바 있다. ‘모순의 중층결정론’이 함의하는 바는, 다양하고 상이한 여러 층위들로 구성되는 사회와 역사는 경제라는 ‘기본모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로 구성되는 복합적 총체이고, 각 실천들은 제 각각 특수한 자질들을 갖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실천이 본질적 영역이 될 수 없고, 모순 또한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층위와 심급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구성체는 서로 보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며 모순은 원리에 있어서 중층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각주:9] 맑스주의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가 결정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수용되었다면, 알튀세르에게서, 상부와 하부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자리를 맞바꿈 하는 중층관계라는 변칙적인 관계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하부토대를 이루는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모순이 가지는 상부구조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구조를 비판하면서, 하부구조에 의해 파악될 수밖에 없는 상부구조라고 믿어왔던 요소들은 동시에 하부구조 안에서 ‘중층결정’[각주:10]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아 왔고 과학적 사고와 대립시켜왔던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속에서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는 실제적인 물리적 성질에 주목한다. 알튀세르는, 대체로 오류나 환상, 왜곡된 의식, 관념적인 현상이라는 받아들여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는 사실 개인들의 실제적 존재 조건들에 대한 그들의 ‘상상적인 관계’를 나타내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실제적 관계의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적 관계처럼 보여지는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론, 이론적 실천 그리고 이론적 형성(1966)’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인 실제에 관해서 ‘환영illusion’’을 구성함과 동시에, 역사적 실제를 ‘암시’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는 기독교에서 발견된다. 크리스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표상한다. 오늘 한국의 현실을 빗대자면, 열혈 친박-수구세력은 자신들을 국가와의 관계에서, 좌파를 청산하는 국가의 수호자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관계는 상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상상적인 관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허위나 왜곡이 아닌 실제로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물적존재’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에서 맴도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과 관계맺는 물리적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는 인간 욕망의 투영일 뿐이라면서 종교를 실체없는 허상으로 간주하였지만, 알튀세르식으로 보면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토대에 구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물적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적인 관계에서 개인이 부여받은 의식은 단순히 관계를 인지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이 관계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실천을 수반한다. 마치, 신의 자녀로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 자는 그에 걸맞는 종교의식, 종교적 규율과 의무를 하게 되는 것 처럼, 또는 친박-수구 단체 회원이 좌파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상상적인 관계속에 지나치게 몰입하였을 때에,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 집단행동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인간 개인들은 상상적인 관계와 실천의 상호작용 안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로 나타난다.


이데올로기의 호명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는 부르조아 국가에서 사회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국가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가 유지 재생산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두가지 수단이 동원된다고 본다. 하나는 정부, 행정, 군대, 경찰, 감옥과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 교육, 가족, 언론, 문화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전자가 폭력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고 강화하는 근본적 수단이며, 이데올로기 장치안에서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지배력을 장악당하는 주체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하는 관련성을 정리하자면, 개별자가 가지는 믿음, 신념의 존재는 관념에 머물지 않고 물화된 형태로 주어지는데, 왜냐면 개인의 주어진 관념은 물질적 실천들 속에 삽입되어 있는 물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물질적 실천은 물질적 의식에 지배되며, 그 물질적 의식은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 정의되고, 그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로부터 주체 관념은 파생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와 이데올로기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있다.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유사하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개별자들에 선행한다. 신념이 있기에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주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있음으로 해서 개별자들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결과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 개념이 ‘호명interpellate’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마지막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출/호명 한다’고 규정하는데, 이 말로서 알튀세르는 인간의 주체성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데올로기의 기본 기능은 개인들을 생산관계에 적합한 주체를 생산해 내는 것인데, 이는 호명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이봐 거기 당신’이라는 작은 말 하나만으로도 상상될 수 있는 매우 세밀한 상상적 관계의 조작을 통해 모든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거나 변형시키는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호명과 관련된 슬로보니아의 농담을 적절한 예로 든다. 극장에 늦게 들어온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연극을 방해한 죄책감에 싸여 있을 때에, 때 마침 배우가 내 뱉은 ‘누가 내 침묵을 방해하는가?’라는 대사를 부자 자신을 향한 말로 오인하였고, 결국 그는 극장 안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배우의 호명이 부자관객으로 하여금 큰 소리로 대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배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되는 사건은 이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호명은 상상적 관계를 불러일으키고 행동을 유발하는 데 이 모든 과정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오인’된 호출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튀세르에게서 ‘호명’이 이데올로기와 주체간의 관계에 대한 열쇠로 되는 이유는 개인을 주체로 되게하는 과정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환영/오인과 자기 암시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환영으로 존재하는 상상적 관계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호명한 것으로 오인했다면, 그것은 개별자를 주체로 불러내는 것이며, 복종의 강요와 억압이 아닌 순주히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과 행동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는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국가장치에 의해 호출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파악하는 알튀세르의 입장이 드러난다. ‘인간’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구성물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구성하기 때문에 주체는 이데올로기 없이 불가능하며, 이데올로기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없다고 본다. 사회적 재생산은 자신을 인식하는 자발적인 주체에 의해 수행되기보다 인간의 배후에 있는 장치구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선택한 목적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는 없으며, 모순의 중증결정 구조에서 경제적인 최종심급으로 규정되는 행위들과 효과만이 나타날 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서 어떤 본질적인 행위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해 자본론을 다시 읽기를 제안했던 의도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소외된 주체의 복권과정으로 읽어내는 주체 중심적인 독법을 신화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대신 ‘주체없는 과정’이라는 역사 개념을 등장시킨다. 역사는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 “역사속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은 그것이 절대자이든 인간이든 그 어떤 주체의 활동도 아니며, 역사의 기원은 언제나 이미 역사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따라서 역사에는 철학적 기원도 철학적 주체도 없다”[각주:11]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보는 알튀세르의 입장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신화일 뿐이다. 때문에 맑스주의는 인간의 주체로부터 출발할 수없다. 때문에, 계급투쟁도 역시 자유로운 인간주체들의 인식과 실천행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의 생산관계를 구성하는 관계들 차이들, 대립들로 이루어진 체계와 구조의 반영물일 뿐이다. 이렇게 알튀세르는 맑스에게서 인간의 제거하고 과학만을 남겨놓았다.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맑스의 관점에서 모든 계급적 모순과 대립, 그리고 계급투쟁은 경제적인 동기에서 발생하여 경제적인 목적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맑스주의 경제적 환원주의는 정치적 변혁과 계급투쟁의 개념들을 지극히 좁은 영역으로 제한하며 정치적 주체성이 발현되는 공간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고 만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당면한 한계에 스탈린적인 교조주의로 응답해온 맑스주의 진영에 대해 알튀세르는 새로운 맑스주의 독법을 제시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하는 것은, 모순은 경제적 토대에서 결정되기보다 상부구조의 존재와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계급적 모순은 경제라는 단선적인 층위로만 제기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국가장치들이라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계기를 통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맑스적인 계급투쟁의 협소한 개념은 알튀세르에 의해 넓은 외연으로 확장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계급적 모순의 문제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구조의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해석 또한 분리시켜내어, 맑스주의를 오늘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사고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으로 드러난 이데올로기의 실체와 그로 인해 구성되는 인간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을 넘어 회의감마저 들게 만든다. 인간은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라는 점은 인간의 주체에 덧붙여진 환상과 오인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은 모순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전망해 주기보다 인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승리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만든다. 마치 푸코가 지식과 담론이 구성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으나, ‘그러면 인간의 해방의 길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는 정작 궁색해지는 것처럼, 알튀세르 역시 이 점으로부터 인간주체에 대한 회의주의적 물음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또다시 문제로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조차도 인간주체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어하는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진정한 변혁은 현상을 현상대로 직시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러한 물음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알튀세르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던 중 아내를 살해한 비극적인 인생의 결말을 맞이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그가 평생을 붙들고 온 철학자로서의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삶을 정리하며 자신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 맑스와 프로이트를 결코 완독하지 못했고 따라서 둘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기꾼이라고 털어놓는다. 그가 맑스와 프로이트를 완독하지 못했다는 말이 그들의 책을 섭렵하지 못했다는 뜻은 물론 아닐 것이다. ‘맑스를 위하여, 맑스를 다시 읽기’를 ‘해석이 아닌 변혁을 위한’ 철학자로서의 절대 사명으로 여겼던 그에게도 ‘맑스적인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진 풀지 못한 숙제였다는 자기 고백이 아니었을까.



ⓒ 웹진 <제3시대>

  1. 에티엔 발리바르, 루이알튀세르 1918~1990 (민맥신서, 1991), 33. [본문으로]
  2. 가장 잘 알려진 휴머니즘적 맑스 해석으로서, 가톨릭 철학자 Jean Yves Calves와 Pierre Bigo, 알튀세르의 옛스승인 Jean lacroix, 실존주의자 Jean Paul Sartre, 현상학자 maurice Merleau-Ponty와 같은 철학자들은 맑스의 철학이 본질상 인간 삶의 질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철학으로 포함시켰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유체계로 규정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런 종류의 휴머니즘은 도리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간교한 계략이며, 이는 맑스주의와 관련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루크 페레터,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앨피, 2006), 55. 참조. [본문으로]
  3.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다시 ‘자본론을 읽자’고 제안한다. 맑스를 그 어떤 이데올로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접어두고 순수의 자리에서 다시 맑스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불어판 서문에서 그의 학문적 지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반쯤은 방향 감각을 잃은 상태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했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과거로부터 오직 우리의 현재를 밝혀주고 우리의 미래를 비추어줄 그 무엇인가를 찾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글을 쓰고있다.” [본문으로]
  4.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우리는 맑스의 청년기 저작들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불꽃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불타는 정열을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흥에 겨워 맑스의 성숙기 저술들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맑스를 위하여, 24) 여기서 맑스의 청년기 저작은 ‘유대인의 문제’, ‘경제 철학 수고’, ‘신성가족’ 등을 말하며, 정확히는 ‘독일이데올로기(1845-46)’ 이전의 맑스철학과 저술들을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청년기와 성숙기의 분기점을 ‘독일이데올로기’로 구분한다. [본문으로]
  5. 맑스를 위하여, 서문 [본문으로]
  6. 맑스를 위하여, 67. [본문으로]
  7. 이 개념은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의 역사는 일련의 지속적 단절을 통해서 진보하는데, 이 단절을 통해 기존 과학은 폐기되고 새로운 이론 체계가 그것을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콩트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유사한듯 보이지만, 전혀 반대되는 개념이다. 콩트에게 역사는 진보의 과정으로서 연속성을 가지지만, 바슐라르에게는 역사는 불연속성이라는 단절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의 전환 Paradigm shift’과 같은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본문으로]
  8. ‘독일이데올로기(1845-46)’가 ‘인식론적 단절’의 전환점이 되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이데올로기’를 집필하는 당시까지만 해도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많은 집단과 경향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는 맑스주의의 당면 과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맑스주의를 자유주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와 쁘디 부르주아 사회주의와 대비시키는 것임을 함축한다. 한편으로, 과학적 공산주의만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현실적인 길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지는 영도이념으로 확신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문으로]
  9. 맑스를 위하여, 116. [본문으로]
  10. 알튀세르는 ‘중층결정 Surdetermination’이라는 용어를 다른 영역에서 빌어온 것이라고만 말하지만, 사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알튀세르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헤겔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담고있는데,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들과 절대지의 도래에서 경험되는 모순들은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본문으로]
  11.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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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4]


들뢰즈의 주체의 재구성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들뢰즈의 ‘다시쓰는 서양철학사’ 


      서구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뒤흔들기 위한 탈근대주의 철학자들의 프로젝트는 다양한 진영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때로는 푸코와 같이 지식과 담론의 계보학을 통해서, 때로는 무의식과 욕망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서구 존재론적 관념주의 철학에 대한 도전은 이어졌고, 그 결과 서구의 장구한 역사 안에서 존재론적인 형이상학을 떠받치던 개념의 파편들은 해체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해된 파편들의 흔적들을 바라보는 동안 얼마동안의 승리감에 도취될 여유는 주어졌지만, 이제는 잔해물 더미위에 올라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결국 남겨진 문제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의해 구조된 세계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 들뢰즈는 해체론에 의해 파괴된 전통적 개념들의 장치들을 재구성하기 위한 기획을 매우 종합적으로, 또한 정교하게 구현한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이 곧 탈형이상학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발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오히려 고전적 형이상학으로의 회귀와 재해석으로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전통의 그늘 아래에서 조명되지 못했던 비주류에 속하는 형이상학의 전통을 발굴해 내는 데로 시선을 돌린다. 말하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서 주목받지 못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를,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대신 둔스 스코투스를, 데카르트 대신 스피노자를, 칸트와 헤겔 대신 니체와 베르그송을, 무너진 형이상학적 토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축하기 위해, 시대의 전면에 재등장 시킨다. 이러한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을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초월적 경험론의 이름하에 그가 내세운 철학사의 재구성 전략은 매우 획기적이다. 그는 초월적 주체라는 형이상학적 건물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데에 힘을 소진하는 대신 초월적인 주체는 다름 아닌 경험이라는 내재성이었다고 선언한다. 물론, 지금까지 경험 역시 경험을 인식하게 하는 또 다른 주체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들뢰즈는 세계를 능동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같이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경험의 차이와 반복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경험을 관찰자나 주체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그 자체를 바로 초월적 원리로 간주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즉, 경험을 초월적 주체를 대신할 개념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초월적 경험론이 된다. 이렇게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기본 골격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존재론적 형이상학에서 배제된 전통들을 재구성하여. 니체로부터 시작되어 해체론에 이르기까지 탈/반플라톤적인 철학을 완성하고자 한 것이다.


차이와 반복

  

    그렇다면, 이 시리즈가 애초에 던졌던 물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들뢰즈에게서 탈플라톤적인 철학체계를 향한 전복적인 시도는 주체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었는가? 들뢰즈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시대 안에서 어떤 주체의 가능성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복잡한 그의 철학체계를 모조리 경유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기 보다는, 들뢰즈의 철학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인 ‘차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편이 수월하겠다.

    초월적 경험론으로 요약되는 들뢰즈의 사상의 전모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텍스트는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 1968)’이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들뢰즈가 겨냥하는 문제의식은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사유의 정점에 있는 ‘재현representation’의 개념이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차이와 반복이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통해, 재현의 방식으로 세계를 차등적으로 서열화시켜온 플라톤적 사유체계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구체화시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는 영원불변하고 자기 동일적인 최고의 존재이며 모든 것의 원형이 된다. 이데아는 존재하는 가시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준거점이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본으로서 이데아를 상정할 때에, 모든 자연과 사물을 이데아라는 원형의 모사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세계는 이데아의 재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재현된 세계는 또 다시 원형과의 유사성에 따라 고급과 저급으로 분류된다. 인간이 동물보다, 남자가 여자, 백인이 유색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식의 차별적인 가치평가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근거가 된 것이다. 결국 원본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의 해결은 따라서 간단하다. 원본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면, 애초부터 원본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면 재현으로 표상되는 세계의 질서도 동시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재현에 상응하는 대응개념으로서 ‘차이’를 제시한다. 차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세상은 원본에서 파생된 모사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곧 ‘차이’이다. 동일성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의 근거를 와해시키는 차이를 의미한다. 마치 실존철학에서 실존이 존재에 우선한다는 형식논리와 같다. 동일성이 차이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동일성에 우선하며 이것은 사실상 동일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차이’ 개념의 발견은 존재론적 철학의 사유구조를 역전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사물의 존재는 원본을 통해서만 확인되었지만, 차이로서 존재하는 사물은 그 사물자체 안에 있음의 잠재성이 내재하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 재현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내 사물은 ‘있다(현실)-없다(부정)’의 문제로 이분화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가 ‘드러났느냐(실재)-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냐(잠재)’의 문제로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차이로서 드러나는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의 힘을 생성하는 개체로 인정받는다. 시뮬라르크에 지나지 않은 사물의 세계는 이로서 차이가 생성하는 힘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차이의 생성원리를 무인도의 비유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무인도의 원인과 이유’에서 들뢰즈가 던지는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즉, “어떤 섬이 무인도가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그리고는 무인도에 우연히 표류하다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입도의 순간에 그 무인도가 유인도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비록 무인도에 최초로 사람이 발을 딛게 되었지만, 누구도 그 무인도를 유인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조차 무인도라는 관념 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인도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한 사람이 섬에 있다는 사실을 복수의 형태로 경험하는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섬은 여전히 무인도일 뿐이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사실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험되는 차이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타자와의 차이는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겨진 무인도라는 이름을 사실상 생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를 통한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한, 나는 지각의 주체 혹은 경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식의 초월적 주체는 자기의 스스로의 부정할 수 없는 인식의 주체를 발견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주장을 뒤집는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같은 마릴린 먼로이지만 다른 색상으로 채색되었다. 감상 포인트는 이 네 그림 중 어느 것이 진짜 먼로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것도 사실 먼로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네 초상은 먼로라는 인물의 원형이 빚어낸 시뮬라르크가 아니므로 부정되어야할 모조가 아니라, 시뮬라르크의 차이 그 자체가 먼로라는 캐릭터를 주조해 내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즉, 차이는 부정되어야하고 동일성으로 동화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차이와 차이의 반복은 그 자체가 존재를 생성하는 역능이며 힘의 의지로 인정된다.

    따라서, 생성하는 힘인 차이의 반복은 동일성의 조명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시뮬라르크의 재현과 전혀 다른 정치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플라톤 이래 동일성의 철학은 세계의 사물을 유사성으로 배열시켜 놓고 유사성들이 공통으로 지시하는 하나의 일의성만이 존재한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들뢰즈가 주목한 것은 영토 안에 배열된 사물들의 집합을 연결시켜 주는 코드화된 규칙성이다. 마치 푸코가 파놉티콘의 감옥이나 군대 학교 병원의 개별적 구조가 감시와 자기검열의 권력효과를 발생시키듯이 사물이 영토를 이룰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사물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힘이 발생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코드화라고 부르며, 보이지 않는 관계방식은 결국 억압의 구조를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관심하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영토성과 코드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느냐를 철학의 기본문제로 돌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때,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물의 차이에 대한 긍정이 존재의 초월성으로 인정된다면, 서구철학의 주류전통이 동일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구축해온 층화(stratification)된 세계의 경계는 무너지고 뒤섞이게 되고 만다. 그리고 층을 형성하여 일종의 아성과 같이 분리된 독자적 영토를 형성하는 것을 당위적으로 받아들여 온 세계관은 일시에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정된 배치에는 일정한 변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들뢰즈는 이것을 탈층화 또는 탈영토화라고 명명한다. 


들뢰즈의 주체는 어떻게 새로운가?


    재현을 부정하는 차이의 생성하는 힘에 근거한 들뢰즈의 사유는 동일성의 원리에서 발생하는 권력으로부터 탈주를 꾀하는 리좀(rhzome)적 주체, 혹은 노마딕(nomadic) 주체로 연결된다. 두 개념이 지시하는 바는 동일하다. 리좀은 뿌리는 땅에 있어야 하고 줄기는 뿌리로부터 땅위로 솟아 나와 있어야 한다는 식의 경직된 각 기관 사이의 획일적인 관계방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제약 없이 뒤섞이는 방식으로 사물 사이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재결합시키려는 사유방식이다. 리좀적 주체는 위계적인 지배와 피지배라는 현실의 영토화된 구조로부터 탈주하여 탈영토화하는 정치적 행동의 주체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파악하는 인간의 욕망이 플라톤과 그것과 대척점에 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인간의 욕망이란 이데아에 비추어 결핍된 것으로서 배제되어야할 부정적 대상이다. 헤겔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욕망은 자기의식의 절대정신이라는 목적을 위해 반드시 지양되어야하는 미성숙에 불과하다. 욕망은 결국 이성에 이해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서 다뤄져왔을 뿐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통제되어야 했던 욕망의 담론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시대 안에서 자본의 질서에 포획된 욕망을 욕망하게 하는 지배구조 아래에 놓이게 만들었다.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효과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종속된 것이다.   

    들뢰즈가 보는 욕망에 대한 플라톤에 대한 비판지점은 욕망은 플라톤식으로 결핍이 아니라 생산적인 욕망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욕망을 도리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보유한 원인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가라리와 함께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 들고나온 ‘생산하는 욕망’의 개념이다. 욕망은 영토화되고 코드화를 고착시키는 분절선들을 뚫고 나와 탈주하는 에너지의 원천이고 역량이다. 따라서 욕망은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직접적인 변혁의 분출시키는 모든 사회의 부분속에 편재되어 있는 힘이며 창조의 자유로운 힘으로 이해된다. 차이와 반복으로 귀결되는 리좀적 주체는 생산하는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들뢰즈는 사회 안에서 주체의 의미를 해명하는데 기여해 온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기능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다소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획기적인 대발견의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너무나 쉽사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고정된 관념 안에 가둬버렸다고 비판한다. 억압된 욕망으로부터 인간의 주체는 왜곡된 채 항상 다다를 수 없는 환상을 향해 길들여지는 존재로 묘사될 때 욕망하는 주체는 욕망을 통제하는 자본주의의 억압적 시스템을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라캉과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라캉에게서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이다. 주체는 결핍을 메우기 위한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 욕망과 주체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나눌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욕망하는 주체’가 아닌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욕망이란 사물들의 관계와 접속을 통한 생산적 활동안에서 이뤄지는 순수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공장의 기계가 어느 특정 부품이 상품을 찍어낼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계의 개별적 관계의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욕망의 주체’라는 이름은 특정 사물이나 개체에 특권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들뢰즈의 주체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성의 철학을 배제하고 현실세계를 동일자에 환원시켜 해석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거부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의 관계 안에 내재한 탈주본능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억압적 시스템은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들뢰즈의 ‘철학 다시쓰기’는 자본주의 시대 안에 어떠한 주체의 상을 남겨놓았을까? 그의 전략은 어떤 유의미한 돌파구를 열어주었는가? 이러한 물음으로 돌아갈 때,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영화 한편이 있는데, 다름 아닌 ‘아바타’이다. 부족한 지구자원을 채석하기 위해서 지구와 닮은 또 다른 행성 판도라를 식민지로 개척하려는 지구의 다국적 기업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족과의 싸움을 그리는 판타지 영화이다. 이미 유명한 영화이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을 듯 하다. 들뢰즈의 주체를 말하면서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이유은, 나비족이 지구의 다국적 기업의 총공세로 열세에 몰릴 때, 이 행성을 구원하는 주인공이 여타 영웅소재의 영화처럼 혜성처럼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다만, 아바타를 조종하는 제이크 설리는 나비족처럼 판도라 행성의 자연의 얽혀있는 그물망에 촉수를 통해 연결하여 교감을 이루는데 성공하고 그들과 일체가 되어 지구인의 폭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들뢰즈가 말하려는 리좀적이고 노마딕한 주체의 모습은 아마도 아바타가 행성의 모든 자연의 개체들과 촉수를 통해 교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단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자연의 모든 차이는 생성의 힘을 발휘된다. 마침내 자본주의의 욕망을 꺾어버리는 변혁의 주체는 어디에선가 메시아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존재의 힘을 믿고 획일화되기를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때로는 ‘동물이 되고’ 때로는 ‘식물이 되기’도 하는 자유롭고 탈주하는 변칙적 삶 안에서 해방은 도래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들뢰즈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가 재현으로 굳어져온 사물의 표상을 차이와 반복으로 대체하고, 개체 각각이 지닌 생성하는 힘에 주목하여 마침내 생산하는 욕망을 자본주의의 대항할 주체의 탈주본능으로 규명한 것은 대단한 그의 통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탈주가 항상 해방지향적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점을 들뢰즈도 간과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리좀적이고 노마딕한 주체의 유동성은 동시에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자유로운 탈영토화와 탈주는 광기의 위험과 죽음의 위험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탈주를 위한 재영토화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탈주선이라는 개념은 삶의 새로운 양식과 창조하는 전복적 흐름이다. 억압적 코드의 관성적인 운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클리나멘을 통한 새로운 창조라는 차원에서 탈주이며 탈영토화이다. 그러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탈주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혹여, 탈주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선험적 관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그의 ‘다시쓰는 철학사‘의 전략이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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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3]


라캉 : 주체의 파괴자인가, 해방자인가?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라캉을 읽는 두가지 시각 


      프로이트를 통해 시작된 정신분석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 뿐더러, 여전히 누군가에는 생소할 수도 있는 분야이다. 그래도 프로이트만큼이나 라캉이라는 이름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큼 잘 알려진 대중적인 인물이다.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었고, 대중적인 연설가와도 거리가 먼 “고집스런”[각주:1] 정신분석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름이 유명세를 탄 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라캉이 20세기의 주목받는 사상가로 떠오르는 데에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서 급진적인 정치담론을 꾀하였던 조력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바디우나 지젝과 같은 학자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라캉이 말하는 ‘욕망하는 주체’를 반자본주의를 향한 이론적 무기로 활용하는데 앞장 서왔다. 그리고 최대한 라캉을 좌파스럽게 채색하는 작업이 완성에 다다를 즈음에 라캉은 체제 순응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저항의 주체를 키워내는 배후 정도로 대중들에게 각인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치료중심의 과학이라는 정신분석학의 통념을 깨고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들고 정신분석학계에 새 전환기를 연 혁신적 인물일진 몰라도, 반자본주의 기치를 들고 정치적인 진보성을 뒷받침하는 이론가로 우대되는 상황은 석연찮아 보인다. 여느 흔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력처럼, 68학생운동에 가담한 전력도 없고 마오주의에 한눈 판 적도 없는, 그저 개인적인 정신분석학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했던 그의 ‘비정치적인’ 행보안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담론을 뽑아낸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충분하다. 바디우나 지젝도 그러한 라캉의 비정치적 노선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놓으라는 맑스주의자들이 라캉으로부터 반자본주의적인 정치적 변혁을 꿈꾸며 그로부터 사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라캉의 주체이론은 그러한 정치변혁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안고 라캉의 주체이론에 접근할 때에, 우리가 참고할 텍스트는 매우 제한적이다. 주체는 기표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의식했던 탓일까, 그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그의 유명세를 고려한다면 그가 평생에 남기 책 ‘에크리(Ecrits)’[각주:2] 한권은 매우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책안에 그의 지적유산을 아낌없이 남겨주었고, 그의 사상적 구조를 거의 완결된 짜임새로 소개해 주고 있다. 목차를 언듯 보면 다양한 주제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목차 안에는 나름의 질서가 잡혀있는데, 그 목차들의 배열이 함의하는 바를 친절하게도 색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각주:3] 크게 분류해 본다면, ‘상징질서’, ‘에고와 주체’, ‘욕망의 해석’, ‘임상실험’, ‘인식론과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체를 이해하는 그의 이론전개방식에 따라 핵심개념들을 논증적인 순서대로 배열해 놓은 것이다. 에크리 안에서 소개되고 있는 주요 개념들은 이미 잘 알려진 것들이다. 가령, 주체의 삼단계 형성이론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와 욕망, 향락, 환상과 같은 주요 개념들은 라캉식의 주체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용어들이며, 다양한 활자경로를 통해서 보급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 라캉은 주체를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근대적인 주체의 해체를 위해 어떤 방법론을 구사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주체이론으로부터 어떠한 실천적인 담론이 도출될 수있는지를 평가해 보기로 한다.


데카르트의 <에고>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라캉이 정신분석학을 통해 세우고자 했던 주체이론의 핵심은 근대계몽주의에 기초한 절대주체 개념을 허물고 주체를 새롭게 규명하고자 한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 라캉은, 의심없이 수용되어왔던 절대 주체의 이면에 무의식이라는 공간이 있었음을 발견해낸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점을 근대 서양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의식 주체의 절대성의 위상을 흔드는 동력으로 사용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개인의 의식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자기동일성의 철학의 시대를 열었고, 사유의 주체(Cogito)가 절대 주체로서의 권위를 행사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결국 데카르트가 개인의 절대주체성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진리에 대한 판단을 보증함으로서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판단주체의 확실성을 판명하기 위해 요구되어진 조건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철학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의식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판단의 주체로 세우는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근거가 되었다.  

    라캉이 공략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유주체의 절대성에 근거하는 철학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데카르트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에고(Ego)’ 가 형성되는 과정을 ‘거울단계(Mirror Phase, 1936)’에서 설명한다. 거울단계란, 신체를 파편화된 상태로 인식하던 신생아가 거울에 투영된 자신을 경험함으로서 자신을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는 데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거울은 유아에게 형태를 부여하고, 발달을 인도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뤄진다. 유아가 자신을 최초로 통일된 형태로 경험하는 순간은 사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인식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인간의 주체가 형성되는 첫 시도는 허구와 소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셈이다. 거울의 투영을 통해 인식된 허구적인 자신의 정체를 라캉은 자아(Ego)라고 부르는데, 이는 진정한 주체로 발전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형태의 주체라고 볼 수 있다. 라캉은 거울단계를 통해서, 에고는 애초에 허구적인 이미지에 의해 잘못 인식된 자기동일화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오인,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하는 에고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서, 데카르트의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인식의 동일성으로서의 주체가 실제로는 취약한 근거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밝혀내려 한다. 자아에 대한 의식은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에 자신을 스스로 투영하고 동일시함으로서 구성된 거짓된 주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어왔던 인식의 주체와 판단의 주체 사이의 동일성이 라캉의 입장에서는 고작 유아적인 판단착오, 착시현상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없는 주체로서 에고를 발견하고 환희에 찼을지 모르지만, 라캉은 사실 그 에고란 걸음마도 떼지 못했으며 여전히 발달과정중에 있는 미성숙한 주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축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울단계는 허구적인 주체만을 생성하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주체의 원초적인 형태가 결정되는 단계이므로 거울단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시말해서, 거울단계를 거칠 때에만 사유의 주체와 사물은 어떠한 식으로든 관계 맺어질 수 있다. 비록 오인과 왜곡에 근거하지만, 현실세계를 인식하는 불가피한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라캉의 주체는 데카르트의 주체와는 정반대의 명제에 다다른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각주:4] 이로써 라캉은 거울단계 이론을 통해 데카르트적인 ‘에고’로서의 절대주체의 권위를 박탈시킨다. 그 대신 라캉은 자아의식이 내준 ‘생각하지 않는’ 공백의 정체는 프로이드적인 ‘무의식의 주체’였음을 보여주려한다.

    거울단계를 통해 라캉은 데카르트 철학 위에 세워진 절대주체의 개념을 비판함과 동시에, 두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타자)에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외부(타자)를 통해 투영(욕망)된 자신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실재와 다른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체의 원초적인 형성이 이러한 조건위에서 시작되었다면,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다음 단계에서도 결국 이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거울단계의 다음 단계로서 기표가 지배하는 상징계의 질서에 주체가 들어가면, 끊임없이 기표 위를 배회하는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 채 결핍의 형태로 무의식이라는 공간에서 남아 욕망하는 주체를 구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말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라캉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짚어 엎으려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고스란이 수용하고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으로 의심을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볼 때에, 라캉은 반 데카르트적이지 않고 오히려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더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생각하는 주체’가 진실이라는 확신에서 멈춰섰지만, 라캉은 그것이 정말로 의심없는 사실인지 프로이트를 무의식을 끌어와 한번 더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울단계이론은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는 진원지에 대한 라캉의 일차적인 반격의 장이 되었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에 대한 유용한 공격의 수단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주체 형성에 결정적인 무대가 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무의식의 본질을 적절히 파헤지지 못한 한계를 동시에 지적한다. 이에, 라캉은 기표가 사물들을 언어의 법칙에 종속시켜 기의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 추가하여,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는 무의식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질서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주체>에서 헤겔의 <욕망하는 주체>로


    라캉이 주체 개념의 정립을 통해 도달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지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전복이다. 이 전복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통하여 시도되었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그대로 차용하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하기를 선택한다. 라캉은 언어의 구조를 도입하여 주체가 어떻게 무의식이라는 공간안에서 언어, 즉 기표(significant) 에 의해 지배되는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이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의 재해석의 핵심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언표 안에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기표라는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는 순간 무의식은 자신의 결핍을 무수한 기표로 끊임없이 대체하는 순환구조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 함축돼 있는 것이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기표의 자리바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실재(Real)이지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주체는 실재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실재는 환상이라는 형태로만 주어질 뿐이다.  

    라캉이 주체를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주체에 머물지 않고, 욕망하는 주체로 보는 데에는 헤겔이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 이해하는 헤겔의 욕망론에서 발견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 이해하는데,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인정을 받아 자신을 확인하려는 욕망이며, 이는 모든 주체들의 욕망이므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이 논법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보여준 방식과 그대로 일치한다.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얻으려는 투쟁에서 승리자는 주인이되고 패배자는 종이 된다.투쟁의 결과에 따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갈려지지만, 자리가 결정된 이 후에 더 이상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타자로 인정되지 않기에 주인은 인정받을 수 있는 욕망을 노예로부터 얻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위치의 역전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인간은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게 됨으로 욕망하는 주체이기를 부정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헤겔의 욕망론이 ‘자기 동일성의 확보’라는 변증법의 최종 목적만을 제외한다면, 욕망의 주체로서 인간을 설명해 내는 적절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라캉의 근대적인 절대주체를 흔들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 드러난다. 헤겔은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인 긍정적인 ‘합(Synthesis)’을 자기 동일적인 주체성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 단계로 사용하지만, 역으로 라캉은 변증법적으로 놓인 타자 사이의 욕망 관계가 결국은 충족될 수 없는 부정적인 ‘합’으로 결론지어 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라캉은 헤겔 자신의 변증법을 오히려 인간의 절대주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용한 것이다. 헤겔의 자신의 칼로 헤겔 자신의 목을 겨누도록 만든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라캉은 데카르트의 절대주체 개념을 허물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판단 의식의 주체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끝까지 밀고나간 것을 그대로 자신의 거울단계이론에 적용하여 마침내 인식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절대주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데카르트의 주체를 공략하는 데에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도적이고 주도면밀한 전략적인 방법론의 선택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체의 포기인가, 해방인가?


    라캉은 거울단계(상상계)와 상징계를 통해 자아 의식의 절대주체의 탄생을 직접 주도하였고 이를 되돌릴 없게 못박아 두었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헤겔의 변증법을 그들의 무기로 하나씩 제압해 나가는 독창적인 싸움의 기술을 선보였다. 마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제갈량의 빈 배로 쏜 엄청난 수의 화살을 그대로 회수하여 이를 반격의 기회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면, 라캉은 근대적인 주체의 개념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오히려 데카르트와 헤겔을 경유하여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있다. 다시 말해, 라캉은 반 근대적인 급진적 해체주의라기 보다 근대를 적절히 후기근대의 발판으로 사용할 줄아는 안목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라캉은 근대적 주체로 구성된 세계관을 탈중심화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그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라캉이 주체를 기표의 결과물내지 대타자의 효과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극단적인 해체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편견중의 하나이다. 주체를 공중분해시키고 상징질서의 파생물로 전락시킨다면 주체를 역동적인 해방역량으로 수용될 수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차단되고 말것이다. 또한,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욕망하는 주체를 기정사실화 하게 될 때에는 국가나 지배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주체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회의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가 라캉을 비판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들뢰즈의 비판의 잣대로 보자면, 라캉은 인간의 저항적인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노예로 길들이는 반동분자에 다름없을 것이다.  

    라캉의 주체이론의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그를 섣불리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또한 욕망이 가지는 이중적인 성격때문이다. 라캉의 주체이론에서, 기표에 의해 연기되는 무의식이라는 구조에 갇혀있는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핵심으로 파악한다면 라캉은 반동이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달려듦으로서 상징화되는 주체에 대해 물러서지 않고 저항하는 인간을 라캉의 매력으로 볼 수있다면 라캉은 반대로 급진주의적인 혁명이론가로 재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라캉을 볼지는 결국 해석자에게 달려있는 문제이다.  



ⓒ 웹진 <제3시대>

  1. 라캉은 죽기전에, “고집스러웠던 저는 이제 갑니다”라는 유명한 말로 생애를 마친다. 68혁명의 고조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초연한 채 주체의 결핍을 응시하는 태도만이 변혁의 진정한 출발점임을 ‘고집스러운’ 태도로 일관해온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2. Jacques Lacan, E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tans. Bruce Fink (W.W. Norton: New York &London, 2006) 라캉의 저작에는 ‘에크리’ 이외에 ‘세미나(The Seminar)’ 시리즈도 있지만 녹취된 강의를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에크리’만큼의 정교함은 덜하다고 평가한다. [본문으로]
  3. J. Lacan, Ecrits, 851 특이한 점은 색인이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주제를 기준으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라캉이 에크리를 그의 사상을 한 장의 도면에 완전히 그려내려는 의도에서 공들여 집필구성되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본문으로]
  4. Ecrits, 430. 라캉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표현한다. “나는 나의 생각이라는 장난감( plaything, 데카르트의 ‘사유’를 격하시켜 표현: 필자 주)이 있는 곳에 없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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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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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2]

푸코는 주체를 부정하는가?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미셀 푸코가 1984년에 사망하기 직전 남긴 가장 마지막 글은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단편 에세이였다. 이 에세이는 같은 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UC 버클리에서 개최된 ‘근대와 계몽’이라는 세미나에 보내졌는데, 이 세미나에는 하버마스, 찰스 테일러, 리차디 로티, 허버트 드레이푸스 그리고 폴 라비노우와 같은 세계적 석학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미나는 푸코의 죽음으로 돌연 취소가 되었고 푸코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푸코의 이 마지막 에세이는 푸코가 계몽과 근대의 시대를 향해 남긴 일종의 유언장이 되고 말았다.[각주:1] 물론 이 에세이는 그가 죽음을 맞이한 병상에서 쓴 것이 아니라, 6년전에 발표한 강의의 글을 다시 구성한 것이기에 그의 최후의 유고작이라는 지나친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럼에도, 계몽에 대한 물음과 그의 답변은 푸코 자신의 철학의 근본적인 물음, 철학의 방법, 철학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저작임에는 틀림없다.  

          1784년에 칸트가 받았던 질문을 스스로 자신에게 다시 던져놓고, 계몽과 근대를 향해 푸코가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는, 근대를 낳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2세기가 지난 즈음, 또한 포스트모던 혹은 탈근대라는 용어가 이미 시대를 풍미하는 시점에서 굳이 지난 유행어를 꺼내 든 것일까? 다소 의아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자문자답 안에는 어떤 의도가 배어 있는 것일까? 그는 칸트가 말한 계몽, 즉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 그러나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사용이라는 한계에서만 가능해지는 계몽의 의미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성의 비판적인 사용이라는 점에서만큼은 푸코가 의미부여하려 했던 계몽의 해석을 위한 출발점으로는 충분한 것으로 보았다. 푸코에게, 계몽은 시간의 차이로 구분되는 고전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사이의 단순한 시차적 경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오늘의 역사안에 서있는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계몽이란 현재에 대한 비판적 태도 혹은 혹은 철학적 에토스(Philosophical ethos)’라는 것이다. 푸코는 이렇게 계몽이라는 개념을 역사적 시대의 특정한 구획점으로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구체적인 역사적 실재와 관계하는 역사 존재론적 그리고 역사 실천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탈근대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포스모더니즘은 계몽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계몽을 푸코식대로 시대의 변화 안에서 영속하는 에피스테메를 발견하는 비판적 태도라고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반계몽적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계몽의 시대의 또다른 패러다임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푸코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는 전통적 권위를 타파하고 이성의 주체를 세울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확신이 이성을 합리주의적 세계로 향하는 목적을 완성시키려는 전체주의적인 도구로 절대화시켜버린 오류로 좌절되었던 경험으로부터 경계를 긋고 이로부터 벗어나 또다른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멀다. 계몽의 시대 이후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 사고방식, 문화, 세계관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오늘의 실재의 체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또다시 등장하게 된다면 이것은 가장 위험한 전통의 회귀만을 낳았던 과거의 경험을 반복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푸코가 계몽주의에서 발견해 내려고 했던 것은, 전근대와 근대, 근대와 탈근대를 특정짓는 사실적인 기준 같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시도는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다. 다만,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 또는 우리가 역사적 실재와의 관계를 맺는 방식의 변화를 발견하고 이 변화안에 내재하는 철학적 에토스를 주체를 창조하는 원리로서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느냐가 철학이 관심가져야 할 물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몽에 대한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푸코는 결국 자신의 철학적 연구가 세가지 영역과 두개의 방법론을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려는 듯 하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푸코는 세가지 영역으로서, 지식, 권력, 그리고 윤리를 구분하는데, 지식은 사물에 대한 지배관계들을 파악하기 위한 영역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지식의 주체들로서 구성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한 범주이다. 권력은 우리가 어떻게 권력 관계들을 행사하고 또 그것에 복종하는 주체들로서 구성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서, 타인들에 대한 행위의 관계를 다루는 영역을 말한다. 끝으로 윤리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들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즉, 우리는 어떻게 우리 행위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답하기 위한 연구의 최종단계이다. 이들 세 영역의 철학적 연구의 범주들은 두가지의 방법론을 통해 검토된다. 하나는 고고학이며 다른 하나는 계보학이다. 모든 지식, 혹은 모든 가능한 도덕적 행동의 보편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사건들이 드러내는 담론의 사례를 다룬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이어야 하며, 현재의 우리의 존재형식이 과거로부터 변형되어온 것 처럼, 앞으로의 변화를 현재로부터 구분해 내어야 한다는 점에서 계보학적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들 세 영역과 두 방법이 서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푸코의 구분에 따라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지식의 고고학, 권력의 계보학,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세 가지의 영역으로 최종 구분된다.

         이와 같은 푸코의 철학적 물음과 방법, 구조에 관한 포괄적인 진술은 그의 철학적 단절점들에 대한 그의 해명임과 동시에, 그의 철학적 노정을 일관된 틀안에 재정렬하려는 포괄적인 의도라고 보여진다. 다시 말해, 계몽 혹은 근대성이 이성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켜온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주체성이 상실되어온 역사라는 그의 초기의 입장이 함축하는 인간의 자율성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어떤 희망의 여지를 남겨보려는 변화된 의도가 감지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사용’과 , 3권 ‘자기의 배려’가 그의 마지막 해인 1984년에 출간되었을 때에, 그는 1권 ‘지식의 의지’에서 보여준 주체에 대한 회의적 태도로부터 물러나, 윤리적 주체로서의 삶의 가능한 방식을 개진하였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성의 역사 1권에서 성을 억압해온 역사라고 믿어왔던 억압적 권력의 실체가 허구임을 보여주며, 성에 관한 지식과 담론의 확대가 효과적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권력의 방식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던 푸코에게서 인간의 주체적 삶의 방식에 회의적인 태도는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성의 역사 1권인 앎의 의지를 1976년에 출판한 후 8년 뒤 펴낸, 2, 3권 사이의 긴 공백은 푸코에게 전환의 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푸코는 1권이 주체를 담론이나 권력의 효과로 간주함으로서 주체를 객체화 했다면, 2, 3권은 개인이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한마디로 말해 1권과 2,3권 사이에는 푸코 철학 내부의 일대 단절이라 일컬어지는 사색의 전환 즉, ‘앎, 권력, 담론’의 주제로부터 ‘자기와 윤리’의 주제로의 급전환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제 1권 ‘앎의 의지’와 2권 ‘쾌락의 활용’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권에서 푸코는 성의 문제를 억압적인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억압가설’에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 우선, 푸코는 성의 역사를 억압 증대의 역사로 이해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가설에 정면 도전한다. 대신, 성에 대한 담론은 권력 자체가 행사되는 장에서 오히려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17세기 부르주아 사회는 성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고 검열, 통제하였던 시대였음은 분명하지만, 담론과 담론의 질서라는 차원에서는 성에 관한 담론, 형식과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특수한 담론들이 끊임없이 확산되었음을 밝혀낸다. 푸코는 이러한 성의 담론의 확산의 진원지를 기독교 정신 및 고백의 교리 안에서 찾으려 했다. 기독교의 고해성사는 육체적 성행위에 대해 절제된 언어로 숨김없이 말하도록 강제함으로서 성에 대한 담론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성의 담론이 중세에는 육신과 고해성사의 실천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단일한 담론의 형식을 띠었다면, 최근의 여러 세기 동안에는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인구통계학, 생물학, 의학, 심리학, 윤리학, 교육학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성에 관한 담론이 생산되고, 담론의 형태가 다양화되며, 담론 연결망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의 역사 1권은 성생활에 관해 말함으로써 유발된 권력효과는 무엇이고, 이러한 담론, 권력효과들에 의해 둘러싸인 쾌락 사이의 관계, 거기로부터 발생된 지식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연구는 성에 관한 전반적 담론현상과 담론화를 고찰하는 것, 담론을 따라 발생하는 권력이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의 다형적 기술, 그리고 담론의 생산에서 매체와 동시에 수단의 구실을 하는 지식의 의지를 도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금세기까지 서구인의 섹슈얼리티는 개인의 쾌락이나 자기 발견과는 무관한 권력기제로 작용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연구에서 푸코가 전제한 것은 주체가 자기에 관한 진실을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권력-지식의 치밀한 관계망을 통해 구축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근대의 주체는 개인의 신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치체제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관점은 인간의 주체는 지식과 담론, 권력에 의해 예속된 무기력한 존재라는 비관적인 결론으로 이끌고 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푸코의 이러한 관점은 2권으로 이어지는 그의 책에서 윤리적 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주체에 대한 회의로부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성의 역사 2권에서 푸코는 1권과는 다른 논조로 성에 관해 접근한다. 그는 2권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변화된 관점을 진술한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는 이러한 경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관점은 연구의 과제를 설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1권에서 권력-지식-쾌락체제의 작동과 존재이유를 결정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라면, 2권은 성과 관계된 지식의 형성, 그것의 실천을 규제하는 권력체계, 그리고 개인이 그 안에서 스스로를 이 성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해야만 하는 형태들 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 변화된 것이다. 처음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1권과 동일한 연장선에 있지만, ‘개인이 성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 방식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새롭게 추가된 것은 푸코의 변화된 관점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는 욕망과 욕망하는 주체에 관한 역사적, 비평적 작업을 통해 개인들이 욕망의 주체로 되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해왔는지를 분석하려 했고, 이 같은 실천을 통해 개인들은 자신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작동시킴으로써 그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을 해독하고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라 고백하게 되었음을 밝히려 했다. 즉, 개인은 자기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고 주체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같은 자기와의 관계가 어떤 형태와 양태들을 취하는지 탐구해야 했던 것이다.

         푸코는 이 같은 그의 문제설정이 우리 사회에서 분명 대단한 중요성을 지녔던 실천들의 총체, 존재의 기술이라 불릴 수 있을 그런 실천들의 총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 존재의 기술, 자아의 기법이 기독교의 사목적 권력행사에 통합되면서, 그리고 나중에는 교육적, 의학적, 혹은 심리학적 유형의 실천들에 통합되면서 그 중요성과 자율성을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의 사목권력을 성에대한 담론의 확산 주체로 보았던 1권과는 다른 입장이다. 1권의 입장에서 개인은 기독교, 정신분석학, 의학, 교육학 과 같은 많은 담론형성의 주체에 의해 예속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보았던 반면, 2권은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개인의 존재의 미학과 자아의 기법의 자율성과 중요성이 역사 속에서 어떤 변화를 거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둠으로써 개인이 ‘존재의 미학’의 기준을 작동시키면서, 자기의 실천을 통해 어떻게 주체화되어 왔는지에 역점을 두고 있다.이제 푸코에게 성은 담론. 권력의 통제를 받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개인이 쾌락을 도덕적으로 활용하는 매개체이자, 스스로의 도덕규범을 만들고 지키는 능동적 주체라고 그의 입장을 전환한다. 푸코에 따르면, 주체의 형성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푸코는 그것을 '자기의 테크놀로지' 혹은'자기의 배려'라고 부른다.

         이렇게 푸코가 제 1권과 제 2.3권 사이에 전개시킨 논리의 변화를 모순 혹은 단절로 보아야 할것인가? 푸코 그 자신이 자본주의적인 억압적 질서안에서 무저항적 태도를 부추기는 투항주의라는 비난을 의식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그 안에서 벌어진 틈새를 메워야 할 필요가 있었음은 추측 가능하다. 결국, 계몽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합리주의적 전통에 남아있거나, 계몽을 비판하고 합리성의 원리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양자택일적인 부정적 입장을 모두 배격하고 실천적인 비판으로 돌아서려는 긍정적인 이해를 통해 ‘자기의 배려’라는 인간의 자율적인 주체의 가능성으로 그의 결론은 다다르게 된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그를 향한 의심어린 시선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푸코의 윤리적 주체란 자기에로의 테크놀로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권력과 담론으로부터 서있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개인의 높은 수준의 능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언론과 정치적 눈속임에 쉽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다수에게 푸코의 주장은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자기의 배려,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주체의 가능성을 결국 개인의 내부적 문제로 축소환원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그가 받아야할 비판중 하나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비판은 전통적인 저항의 형태를 전제할 때만 타당하다. 푸코는 전통적인 주체로서의 고정적인 실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의 저항의 주체를 생산해야 할 시점이라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와 권력’에서 다음과 같은 푸코의 진술은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오늘날 아마도 주요한 목표는 우리들이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의 존재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개별화함과 동시에 전체화하는 근대적 권력구조의 이런 종류의 ‘이중적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들이 누구일 수 있을까를 상상하고 구축할 필요가 있다. 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과제는 국가나 제도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결부되어 있는 개별화 방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푸코에게, 저항의 대상은 억압적인 시스템을 콘트롤하는 외부적 실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저항의 대상은 부재하며, 설령 존재하는 저항의 대상이 제거되는 것으로 인간의 억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저항의 거점이다. 저항의 거점으로서 자아는 자신에게 관련된 권력관계를 능동적으로 맺어나가 는 주체의 존재 방식 혹은 자아의 형성기술을 통해 마침내 윤리적 주체로서 저항의 실천적 삶으로 진입하게 된다는 뜻이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지배 테크놀로지에서 자신이 자신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지배 테크놀로지로 우리의 시선이 옮겨질 때에,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목표에 다가설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주체에 대한 푸코의 진술이 여전히 자율적인 주체가 실재와 관계하는 방식의 변화를 선언적으로 요구하는데서 멈춰버린 듯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에세이는 197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한 강연회에서 있었던 푸코의 ‘비판이란 무엇인가? :비판과 계몽”이라는 강연에서 먼저 발표된 것이었고, 그 후 1983년에 ‘계몽에 관한 칸트의 에세이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칸트의 태도에 관한 비평’이라는프랑스 칼리지에서의 오프닝 강의로 다시 발표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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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들어가며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현상은 주체의 문제가 문학, 철학, 예술, 신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시 전 분야에 걸쳐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리라. 이런 현상은 계몽주의로부터 니체에 의해 기획된 신의 죽음이 몰고온 예고된 변화이기도 하지만 굳이 니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숨 막히는 질서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던 지성사의 필연적인 흐름 이었는지도 모른다.  

          계몽주의시대 이후 ‘신의 죽음’의 선언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근대적 주체의 죽음뿐 아니라, 주체를 둘러싼 욕망, 권력, 담론, 지식과 같은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라캉이 주체를 대타자라는 환상적인 실재를 욕망하는 존재로 파악한다든지, 푸코가 지식의 계보학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밝혀낸 것이라든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개념을 통해 서구역사가 억압해온 사유의 욕망으부터 자본주의의 문제를 파헤친다든지 하는 것들은 상이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게 되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주체에 대한 관심이 최종적으로 겨냥하는 지점은 억압적인 체제질서의 그 가려진 내막을 들춰냄으로서 인간을 억압한 그 모든 것들의 허구적인 실체로부터 인간의 주체적인 삶, 즉 주인된 삶을 회복시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주체에 대한 각각의 진술들을 통해 제시되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주체의 행동의 방식은 이론가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소 부정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이 감지된다. 다시 말해, 해체론이든, 포스트구조주의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명명하든 주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전통적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내지 해체이며, 이는 근대적이고 부즈조아적인 사회구조를 넘어서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혹은 해체가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역량마저 해체할 수 있다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마저 버리는 참사는 목욕시키는 엄마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주체가 중요한 문제인가


         데카르트의 근대 합리주의 이후 서양 근대 철학은 주관적인 관념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의 사유와 인식능력은 실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지배하였던 시대였고, 윤리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이성에 기반한 자율적인 개별자들 간의 합리적인 계약에 의거하여 정치적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낙관적이 기대가 팽배하였던 시대였다. 이것은 중세시대를 지배하였던 전근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신을 밀어내고 근대의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주체가 그 자리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절대 주체는 형이상학적인 신의 자리를 탈환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주체의 자리로부터 배제된 객체를 대립적으로 구분하여 객체에 대한 차별을 기정사실화하고 정당화하고 만다. 신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는 승리의 환호 뒤에는 자연이 인간의 정복의 대상물로 전락되고, 여성은 남성에 대한 복종의 대상이 되며, 유색인은 백인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비워주어야 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개별자 스스로에게 이데아나 신에게만 부여되었던 초월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존재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서 일어난 이러한 인식론적인 변화는 인간을 둘러싼 삶의 전반을 선과 악, 주인과 노예, 문명과 야만이라는 확연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로 구조화시켰다.

         근대적인 주체의 발견이라는 인식론적 변화가 객체를 타자화 시키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통해 왕권신수설에 의거한 봉건적인 절대주의는 무너지게 되었으며, 시민이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근대적 주체의 등장이 무조건적인 비판의 문제로만 취급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전근대적인 절대주체가 봉건주의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뒤이어 등장한 근대적인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봉건주의를 몰아내고 부르주아 시민 사회를 지탱하는 새로운 사조로 전면화 되었다는 사실은,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타파하는 또 다른 새 정치사회는 탈근대적인 주체의 등장을 통해서 열려지게 되리라는 합법칙성을 말해준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을 한다는 것, 혹은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사회를 지향하는 지적 작업은, 결국 주체를 인식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고 이를 통해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안에서 논의되는 주체에 대한 이론들이 오늘의 자본주의 지배질서로부터 어떠한 변혁적인 의미를 함축하는지를 이 글은 묻고자 한다.


지젝이 말하는 주체


         이 글이 지젝을 특별히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한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지젝의 책은 읽는 속도보다 출판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유머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물량공세로 대중과의 접촉면을 다방면에서 확보해온 잘 알려진 맑스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유명세도 그렇지만, 그러나 이보다 지젝의 주체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인간의 변혁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론으로 가장 의미 있는 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는 나름의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지젝은 본 웹진에서 다뤄진 경험이 있고, 지금도 연재되는 관계로 지젝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지젝의 논의와 연류된 주변의 시선들을 참고하여 지젝의 주체이론이 가지는 차별성과 실천적 의미를 구분해 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이론가로서, 푸코, 들뢰즈, 라캉을 염두하고 있다.

          푸코의 경우, 그는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지식을 통해 담론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권력이라는 효과를 생성해내는데, 이 때 작동하는 권력은 주체에 의해 통제되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를 형성하고 주체의 자리를 결정짓는 권력임을 분석해 낸다. 정신병원, 감옥, 고아원, 학교와 같이 신체를 통해 가해지는 감시와 통제 시스템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은 곧 권력의 메커니즘이 폭력과 억압의 방식이 아닌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참여를 통해서 창출되고 과정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감시, 규율, 훈육의 통제사회에서 밀려나고 주변화된 타자들이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고고학적 계보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권력의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는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은 권력의 주체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사회의 통제시스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일 뿐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자기에의 배려’라는 모호한 답으로 얼버무린다. 푸코는 결국 인간의 개별적인 의식 안에서의 변화만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한 것일까? 푸코는 이후에 다뤄지는 주체의 철학이론에도 빠짐없이 거론되기에 짚고 넘어갈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라캉을 통해서 의도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법을 통해 정치적 주체성이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캉의 주체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고 만족될 수 없고 언제나 항상 결핍된 채로 기표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언제나 결핍된 존재로만 남아 있게 된다. 라캉에게 주체는 타자의 욕망이 거쳐나가는 장소이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체 이해만으로 정치적 주체성을 발견할 직접적인 단서를 찾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다. 물론 지젝이 읽어낸 라캉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들뢰즈가 기획한 주체는 라캉과 다른 것이다. 그가 서구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던 플라톤주의를 전복을 통해서 밝혀내려 했던 것은, 수직적이고 이분법적인 위계질서를 부여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개별자들에게는 동등한 지위에서의 수평적 차이와 그것의 반복만이 있을 뿐 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이데아를 제거한 칼로 다시 겨냥한 대상은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라캉과의 입장차이가 분명해 지는데, 욕망은 오이디푸스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욕망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의 본성에 숙명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욕망하는 주체는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를 위협하는 가능성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라캉과 들뢰즈의 욕망을 중심으로한 주체에 대한 이해는 차이로 끝날 것인가?

         마지막에 다뤄질 지젝의 주체는 욕망에 대한 해석이 푸코에 대한 비판과 라캉에 대한 변증법적인 해석을 통해 변혁적이고 실천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이론으로 어떻게 가공되어지는지를 보려고 한다.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지젝은 맑스가 설정해 놓은 계급적 혁명의 전선구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맑스가 보지 못한 혁명에서 인간의 주체의 문제를 다룸으로서 진보적인 해방역량을 담보하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이론가라는 호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비중 있게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다.

         쓰고보니 장황한 글이 될 것같다. 연재를 약속받아 놓은 것도 아니고 그저 공부하는셈 치고 글좀 써보라는 권유에 시작한 글이기에 혼자 장편 시리즈를 기획하는 것은 월권이다. 때문에, 지젝 이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매우 단촐한 소개와 더불어 실천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만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주체의 문제를 바라보는 상이한 접근방법들이 제공하는 각각의 이론들이 진보를 위한 정치변혁의 과정에서 ‘어떤 주체’가 요구되는지를 비판적인 입자에서 비교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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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I)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 못지 않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이 물어왔던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주변을 떠도는 많은 명제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다’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 희망과 행위가 선택되고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동.서양 공히 신적인 ‘로고스’ 내지 하늘의 이치인 ‘道’에 의해 구성되어지고 운행되어지는 그 인간을 참 인간으로 오랫동안 간주해 왔었다. 사물의 형성과 운행의 법칙이 확고부동한 질서로 실재하고 있는 우주에서 인간은 그 법칙의 한 일원이었을 뿐이다. 어떤 비밀도, 어떠한 사연도 모두 속속들이 하늘의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야 했고, 인간의 내포와 인간의 외연은 그 빛 아래에서 수미일관하게 하나로 엮어졌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신적인 로고스(내지 天理) 아래 놓여있다는 점에서, 주체적 의지와 신념을 바탕으로 결단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인 기표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인간론이다. 구약성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얻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편)”라고 노래하면서, ‘인간이란 전적으로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포스트 맑시스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러한 인간이 살던 시대를 다음과 같은 낭만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루카치, <소설의 이론> 서문 中)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인간의 갈 바를 밝혀주던 그 빛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점점 광채를 상실하더니, 19세기에 이르러 어둠에 휩싸이고 만다. 빛이 사라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다 함은 그 빛 아래에서 살았던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찰스 다윈과 칼 맑스가 그 진앙의 진원였다고 후대 역사가들은 평한다. 맑스는 1845년에 발표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다”라고 말하였고, 같은 논문에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라 주장하면서,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신의 그늘에서 벗어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인간을 선언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오늘날의 인간이란 오랜 세월 시간을 버티면서 축적한 경험과 기억과 본능과 생존방식의 총체라는 것 이외에 인간에게 더 이상의 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본인이 창안한 ‘정신분석학’을 통해 인간이란 의식이라는 명료한 정신의 활동이 아닌, 알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불안한 실존임을 서늘하게 증명해 보였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세 사람었지만, 그들을 통해 신적인 원리에서 벗어난 인간, 오랫동안 익숙하고 낯익은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나는 인간, 그래서 이제는 고향집 아버지가 사라진,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modern 인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난 <웹진 49호>에 이은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두 번째 글의 제목을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로 정하였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내 깜냥에 그럴 능력도 없고…… 앞으로 연재를 계속하면서 기독교와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를 간헐적으로 끌어들이겠지만, 이번 <웹진 50호>의 주된 내용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발달(?)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웹진에 이어<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나오는 지젝의 라깡 해석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지젝 이론의 화두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개인이 사회적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던 라깡의 초기이론보다는, 라깡의 후기 이론, 즉 현실(the reality)은 그 자체로 완벽한 무엇이 아니라,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그 무엇인데, 그 구멍들이 환상에 의해 봉합되어 구성된 현실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현실보다는 현실을 지탱케하는 그 무엇, 곧 실재(the Real)에 대한 규명이 지젝을 이해하는 첫 단추이고, 그 단추를 풀어가면서 지젝 특유의 (실재의) 정치학, 윤리학, 신학, 문화비평이 전개된다. 졸고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라깡의 초기이론, 즉 주체구성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지젝식 해설이고, 실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자~~이제부터 가 볼까요? 아 유 뤠디?
     
징후(Symptom): 억압된 것의 귀환

지난 <49호 웹진>에서 ‘빗금 그어진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제 1원리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정의했었고, 그 억압이 숨겨져 있는 지점을 우리가 흔히 ‘무의식’이라 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무의식은 실증할 수 있는, 덩어리가 있고 물리적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징후(Symptom)’로서 나타난다.[각주:1] 이 징후에 대한 실례로 우리는 지난 웹진에서 어렸을때 성폭행을 당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어느 문방구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심장이 격하게 뛰는 예를 들면서 설명한바 있다.
다시 한번 징후에 대해 생각해보자. 징후란 무엇이고 언제 나타나는가? 징후는 뭔가 억압되었던 것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의 재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임시절 본인의 집무실에서 백안관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정사를 벌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클린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고,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론까지 조성되면서 미국 정계 전체가 큰 소용돌이로 휘말렸던 사건이었다. 그 무렵 ‘클린턴이 왜 그랬을까?’를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들이 나돌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클린턴의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클린턴의 생부는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그의 나이 4살 때 클린턴은 알코올중독자 로저 클린턴을 계부로 맞이하였다. 그는 자주 취해 폭력을 일삼는 자였고, 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면서 클린턴은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로저 클린턴 사망 후 클린턴의 생모는 세 명의 남자와 세 번 더 결혼하였다. 얼굴도 못 본 생부와 계부 4명, 총 다섯 명의 아버지가 클린턴에게 있었던 것이다. 성장기 내내 클린턴은 자기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불행한 일이 없는 것처럼 최면을 걸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어렸을 때부터 모순되는 것을 잘 조화시키고 상황에 따라 잘 적응하는 법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불굴의 의지, 승부욕,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강한 욕구 등이 이때 자리잡았고, 그것이 여성에게는 성적욕구로, 정치적으로는 승리에 대한 욕망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던 심리학자들의 인터뷰가 당시 난무했었다. 요약하면, 어린시절 억압되었던 그 무엇인가가 드디어 징후가 되어 귀환하여 대통령이 된 클린턴으로 하여금 르윈스키와 백악관 정사를 벌이게 했다는 결론인데…..
어렸을 때 아무런 억압 없이 성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클린턴과 같은 강렬한 징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하나씩 그런 징후들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라깡의 사유와 만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왜 생기는가?’라는 물음에 무의식은 어떤 억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즉 이런 억압이 눌려 저장되어 있는 장소가 무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라깡은 프로이트보다 한 발짝 더 나간다. 라깡은 개별적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겪게 되는 억압의 경험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이다.

라깡의 주체론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함은 아기가 제도와 문화와 사회속으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환산하면 옹알이를 시작한다는 생후 6개월에서부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18개월 사이다. 그 기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이전 엄마와 아기의 관계는 연속적이고 합체된 이자관계였다. 아기에게는 나는 나이고, 저것은 엄마라는 주객 이분이 없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18개월이 지나면서 엄마와 아기사이의 연속성은 서서히 깨어지고 불연속면이 펼쳐지는데, 그 파열을 제공하는 자가 바로 아빠다. 그곳은 엄마의 젖가슴이 곧 나였던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이 지배하는 차가운 상징계를 대변한다.
라깡은 이와 같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표현한다.[각주:2]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나는 가수다!’ ‘나는 의사다!’ ‘나는 박사다!’……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가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징계 진입할 때 제거당한(남겨진) 대상을 향한(대한) 욕망이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실재에 대한 부분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내가 보기에)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근원적으로 간직한, 자기소외와 분열과 억압을 동반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이 모두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시카고에 살고, 신학으로 박사공부하고 있고, 결혼했고, 목사인 이상철이다. 하지만, 그 이상철으로 완전히 온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과 비유할만 하다. 그 고통을 수반해야 아기는 더 이상 자궁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잠재적 주체가 아닌, 세상에서 카운트 되어 살아가는 주체로 설 수 있다. 

결국,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라깡의 답변은 근대철학이 제시하는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계몽이성에 의해 인도받은 근대적 주체는 이성의 빛으로 중세적 어두움을 정복하고 무지와 미지의 지점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세계를 통합하고 종합하면서 전체를 총체적으로 구성해나갈 줄 아는 그런 주체였다. 하지만, 라깡의 주체는 근대적 주체와는 반대로 uncanny하고 weird한 존재이다. 독일말로는 Ungeheuer! 카프카의 <변신>에 보면 한 친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엄청 큰 괴기스러운 벌레로 변신이 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카프가가 쓴 단어가 Ungeheuer이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무엇인가를 표시할 때 쓰는 단어다. 예전에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 감독 같은 대가들이 연출하고 시고니 위버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에어리언>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괴물들의 숙주가 인간의 몸에서 자라는 씬이 나오는데, <변신>에서와 마찬가지로 uncanny하고 Ungeheuer하다는 표현을 쓰기에 딱 걸맞는 장면이었다. 영화 <에어리언>의 그 장면은 라깡의 주체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파열과 분열과 섬뜩함의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것은 우리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가 징후가 되어 간간이 우리의 통제와 제약을 넘어 분출한다. 라깡은 징후가 되어 귀환하는, uncanny한 에어리언 같은 ‘내가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이룩한 주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이다. 너무 우울한가?      

<다음 웹진에 계속>

  1.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56. [본문으로]
  2. Ibid., 10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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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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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
: ‘빗금 그어진 주체($)’ 안에 숨겨진 함의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지젝 연재를 시작하며

소원을 말해봐 니 마음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 봐
니 머리에 있는 이상형을 그려봐 그리고 나를 봐.
난 너의 지니야 꿈이야 지니야~
<중략>
I'm Genie for you, boy!
I'm Genie for your wish!
I'm Genie for your dream!
I'm Genie for your world!

소녀시대가 부른 ‘소원을 말해 봐’의 노래가사 중 일부다. 9명의 소녀시대 멤버들이 내게로 와 소원을 말해보라고 속삭인다. 실제로 그녀들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노래가사처럼 램프에 숨어있던 지니가 ‘뽕’하고 나타나 나의 모든 쾌(快)를 만족시켜 준다면? 아마도 미쳐 터져버리지 않을까?
실제로 그 소원을 끝까지 밀어부쳐 실행한 사람이 있었다. 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Sade)가 바로 그다. 사드는 칸트와 동시대 인물이다. 하나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타당한 입법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설파했던 엄숙한 성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우리의 쾌락의 도구로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우리 행동의 보편적인 준칙으로 삼자”[각주:1]고 주장했던 가학적 성 도착증환자 취급을 받는 자다. 라깡은 이 둘을 교차시키면서 정신분석학의 윤리를 정초하려 했고,[각주:2] 이는 현재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학파로 이어져 ‘실재의 윤리’로 각색된 채 인문학 전 분야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각주:3]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지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연재될 글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재의 윤리’[각주:4]가 무엇이고, 왜 그것이 이 시기에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지젝으로 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신학함과 어떻게 다른지? 에 대한 신학적 분석이다. 하지만,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라깡과 지젝을 지날 때 만나게 되는 몇 가지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각주:5] 특별히, 라깡과 지젝간의 이론적 접점이라 할 수 있는 실재(the Real)를 규명하는 일이 그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각주:6] 라깡-지젝에게 있어 실재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말하는 ‘the Real’이 사상사의 흐름속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실재, 즉 궁극적 진리, 만물의 원인, 혹은 모든 운동의 동인으로서의 그 ‘실재’와는 의미와 위치가 전혀 다른 새로운 실재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획득된 실재로부터 주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시작되고, 욕망에 대한 시각은 교정된다.
이 작업을 위해 나는 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지젝 사상의 밑그림이라 평가받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Y: Verso, 1989)中 Ch3 ‘Che Vuoi(케보이)?’에 나와있는 라깡의 악명높은 욕망그래프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먼저 살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성취된 지젝식 주체, 욕망, 실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필자는, 이 글이 진짜로 노리는 지젝식 실재의 윤리와 유물론적 신학이 지닌 함의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예상했겠지만) 앞으로 쓰게 될 원고들의 대부분은 지젝의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각주로 채워진다. ‘이론을 어떻게, 얼마만큼, 어느 정도의 깊이로 글에 투여해야 할런지?’ 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이론에 함몰되어서도 안되지만, 이론에 쫄아서도 안된다. 이론은 혈액세포로 따지면 체내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 제거를 담당하는 적혈구와도 같다. 산소를 원할히 공급하여 세포의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쓸데없는 분비물을 제거해 신체리듬을 원할히 유지하게 하는 적혈구처럼, 이론은 글의 과잉과 부하를 조절하고 글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한국처럼 이론의 유행이 급격하게 변하는 학문풍토 속에서 이러한 이론에 대한 천착은 근본주의 혹은 교조주의라는 불명예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론에 안착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지적일 수는 있어도, 이론을 넘어 횡단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단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지젝 전공자도 아니고, 지젝을 따로 시간을 내어 심도있게 공부한 연구자도 아니다. 단지, 지젝이라는 소문에 귀가 솔깃해 있는 정도의 수준이랄까. 그러기에 지젝을 읽어나가면서 많은 오독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끔한 질책을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바라기는 지젝에 대한 글을 앞으로 웹진을 통해 연재하면서 현재 지젝이라는 소문에만 의지하고 있는 내 지식의 얄팍함이 지젝을 직접보고 대화하는 경지로까지 고양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너무 큰 꿈을 꾸나? 어쨌든… Are you ready?  

케보이(Che Vuoi): “소원을 말해 봐!”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워밍업 차원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소녀시대의 ‘케보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 ‘케보이’는 주체의 대타자[각주:7]를 향한 질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소녀시대의 열혈팬클럽 회원이다. 소녀시대라는 확고한 대타자가 제공하는 질서속에서 쾌락을 누리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은밀하게 다가와 ‘소원을 말해 봐!’를 속삭이는 소녀시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후 묘한 충동과 고민에 빠진다. 나는 그 동안 대타자 소녀시대의 명령과 바램에 순종하고 부응해왔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뭐가 부족했었나? 내가 그녀들의 바램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녀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그럼,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욕망해야 되는 걸까?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주체는 상징계의 질서안으로 편입되던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무의식을 떠올리고, 억제되고 차압당했던 본능을 다시 되살린다. 사실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되기 위해 나는 팬클럽 규정을 잘 준수했어야 했다. 사진을 찍을 때 다정한 포즈를 취할 수는 있지만, 너무 몸을 밀착한다거나 과도한(섹슈얼한) 애정표현은 자제했어야 했다. 개인 홈페이지에 따뜻한 응원의 말은 올릴 수 있지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발언은 삼가한다. 그녀들의 숙소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릴 수는 있지만, 스토커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대타자 소녀시대는 바라만 봐도 좋은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그 법칙을 인정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될 수 있었다. 소녀시대를 브라운관에서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짜릿함과 뭔가 설명할 수 없었던 꿈틀거림을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대타자 소녀시대를 더 가까이서 합법적으로 품기 위해 나는 애초 그 욕동의 일정부분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소녀시대 팬클럽 회원이라는 상징계의 질서 안으로 편입하기 위해 거세당해야 했던 나의 본심들(?)이 ‘소원을 말해 봐’라고 속삭이는 그녀들의 음성을 들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What does this mean?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유명한 욕망이론이 펼쳐지는 진원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제, 악명 높은 라깡의 욕망그래프로 가야 할 시간이다.[각주:8]
진짜로, Are you ready?

빗금 그어진 주체($) 曰: “나는 지난 여름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

일단,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라깡의 주체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이성의 능력으로 모든 우주의 법칙을 관조하는 근대적 주체와는 달리 분열되어 있고 균열이 많은 주체이다. 특별히 라깡에게 있어 주체의 문제는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알파벳을 익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상징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제시하는 규범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고, 대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점 대타자의 욕망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주체는 상상계의 유아에서 상징계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태초의 본능과 욕구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의 질서가 부과하는, 즉 대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어떤 면에서는 훼손당한 존재다.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를 ‘빗금 그어진 주체($)’로 라깡은 표기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라깡의 욕망그래프는 이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주체가 사후적으로 탄생한다는 말이다.[각주:9] 이 부분에서 설명이 좀 필요한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속류 히치콕 영화 혹은 스릴러, 잔혹 복수극, 여성주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이 하나 있다. 극 중 어느 특정 장소에서 현재에서 과거로 오버랩 되는 경우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길을 가다 갑자기 무엇인가 필요해서, 혹은 갑자기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문방구(or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그 점방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찾으며 가게 안을 두리번 거리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가슴이 급하게 뛰기 시작한다. 순간 주인공은 정신을 잃고, 화면은 급하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20년 전 혹은 30년 전 그 문방구(가게)로 카메라는 시간이동을 한다. 주인공의 어렸을 때로 오버랩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5~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똑같이 그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씬이 나오고, 물론 그 여자아이는 주인공의 어렸을 때를 상징한다. 그 여자아이가 물건을 찾고 있는 사이 주인 아저씨가 가게 문을 닫고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주인 아저씨는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주면서 인형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인형을 공짜로 받은 여자아이는 기뻐서 아저씨와 함께 인형놀이를 신나게 하는데…아저씨가 인형 옷을 하나씩 벗기더니 자기 옷도 벗고 내 옷도 벗긴다. 아저씨는 인형을 만지고 나서 그 아이 몸도 만진다. 그때 아이는 ‘어, 뭔가 수상한데…이 아저씨가 왜 이러지?’라고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인형놀이를 하는 것이니까~’라는 방어기재를 작동하여 그 순간을 덮고 넘어간다. 문방구 사건 이후 20년, 30년이 흘러 성인이 된 주인공이 그 사건에 대한 혐의를 발견하면서 영화는 긴장과 반전을 거듭하며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너무나 우리들이 많이 봐 왔던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위의 기사는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을 잘 드러내고 있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라깡의 욕망 그래프 I: “주체는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Graph I>[각주:10]

위의 그래프는 라깡 Graph I이다. S에서 S’로 이어지는 벡터는 기표(ex. 말, 목소리)의 진행과정을, △ 에서 $로 이어지는 연쇄는 주체의 진행과정을 상징한다.  S-->S’벡터와 △--> $ 벡터
가 만나는 접점을 편의상 A, B라고 했을 때, S쪽과 가까운 접점을 B, S’쪽과 가까운 접점을 A라고 하자. 성인이 된 주인공이 문방구에 들어가 공포를 느끼는 지점은 B이고, 어린 주인공이 가게 아저씨와 인형놀이를 하면서 성추행을 당한 지점은 A이다. A(억압된 것, 어린 주인공이 당한 성추행 사건)가 원인이고 B(성인이 된 주인공이 뒤 늦게 어렸을 적 사건의 의미를 깨닫는 것)가 증상으로서 A의 효과라면, 아래 그래프 I은 원인(A)을 선행하는 효과(B)를 나타낸다.[각주:11] 즉 주체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A)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주체는(B) ‘빗금 그어진 주체($)’로 남겨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리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이미 완성된 채 계속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무엇인데, 여태까지 내게 알려지지 않았던(모르고 있었던) 그 진리가 어느 날 문득 내게 다가왔다”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진리란 원래 과거에 그 차제로서는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시간이 흘러 미래의 어느 시점인 현재에서 소급적으로 진리는 주체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고,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구성한 그 주체는 과거에 사건을 맞딱드렸던 애초의 주체와는 다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이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라깡의 Graph I은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은 주체란 언어적,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빗금 그어진 주체’($)로 등장한다는 말이고, 그 주체에서부터 모든 사건은 다시 출발되고 다시 해석된다. 이 말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라깡이 인용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발언: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각주:12]를 상기시킨다.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그 동안 배제되어 왔고, 잊혀져 왔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영화 속 장면처럼 한 여인이 어렸을 때 문방구 아저씨로부터 당했던 성추행일 수도 있고, 남자아이들의 경우 성장기에 학교(or 동네)형들에게 끌려가 금품을 갈취 당하고 집단구타 당한 후에,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삥 뜨기고 돌림빵 당한 후에, 무릅이 꿇려 복종을 강요당해야 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가 ‘모든 억압되었던 것들은 귀환한다’고 했다지? 억압되었던 것의 부활은 위의 예에서처럼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억압의 차원도 마찬가지다.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살육은 아무리 집권자들이 숨기고 감추려 했어도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를 쏟게 했다. 아니,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 정권들어 용산에서 혹은 쌍용차에서 불타 떨어진 사람들의 넋들은 다시 우리사회로 증환이 되고 예언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어쩌면 역사는 이 사실을 계속 증언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아픔뿐일지도…. 그것이 이 어두움을 건너 우리를 해방케 하리라’를 읊조렸던 어느 가수의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당했던 개인적, 집단적 억압이 끝까지 우리를 압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곳을 찍고 와야 한다. 그 자리로 돌아가 그것들과 대면한 후, ‘그때는 내가 어리고 약하고 무지하여 당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비웃어 주고 그곳을 유유히 빠져 나와야 한다. 물론, 그 주체는 애석하게도 에덴에서 지녔던 태초의 순수함와 충만함을 상실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들’에 의해 시간은 계속 이어지고 역사는 다시 쓰여진다. 이것이 바로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이유다. (계속)

P.S 다음 웹진에서는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라깡의 욕망그래프 II에 나와있는 상상적 동일시, 상징적 동일시에 대해 알아보고, 그래프 III에 나오는 ‘케보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Let us take as the universal maxim of our conduct the right to enjoy any other person whatsoever as the instrument of our pleasure.”-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9. [본문으로]
  2. 라깡 세미나 7권 &lt;Ethics of Psychoanlysis&gt;(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와 라깡 &lt;Ecrits&gt;trans. Bruce Fink (New York: W.W. Norton, 2006)중 ‘Kant avec Sade 사드와 함께 칸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3. 포스트모더니즘 윤리학의 세가지 경향 (자기의 윤리-타자의 윤리-실재의 윤리)에 대한 논의는 졸고 <탈경계의 신학>(동연, 2012)중 ‘포스트모던 윤리의 지형’(140-143쪽)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본격적으로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에 입각한 ‘실재의 윤리’를 선보인 책은 주판치치에 의해 2000년에 출판된 Ethics of the Real (NY: Verso, 2000)이다. 지젝은 이 책의 서문에 참여하였고, 본인의 독일어 저작인 Die politische Suspension des ethischen. (Suhrkamp. Frankfurt am Main, 2005)에서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5. 지젝을 구성하는 이론적 층위는 크게 세가지라 볼 수 있다. 맑스-레닌으로 이어지는 꼼뮨주의,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 전통, 그리고 라깡주의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라깡을 경유한 지젝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6. 흔히 라깡의 사상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젝은 라깡 후기 사상인 실재(계)와 욕망에 집중하고 있고. 하지만,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구분이 두부모 자르듯 선명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얽히고 중첩되고 겹쳐있다. 그러므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연속적인 한 스펙트럼 상에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난 웹진 33호(2011년 3월)에 실린 ‘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웹진 34호(2011년 4월) ‘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웹진 35호(2011년 5월)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기사가 라깡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7. 대타자(the big Other)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타자는 주관적 전제라는 위상속에서 비실체적, 혹은 문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며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슬라보예 지젝, &lt;How to Read 라깡&gt;, 박정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21쪽. 결국,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체가 아니라 가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타자가 실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식 대타자의 명령은 한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법칙이다. 마치 그것이 실제하는 것 처럼 우리는 행동한다. 그래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명박이 아무리 개판으로 나라를 망쳐놔도 나랏님이기에 감히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우리는 뷸효자, 배은망덕한 제자, 그리고 종북좌파 빨갱이가 되고 만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군사부일체’라는 텅 비어있지만, 상징적 세계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으로]
  8. &lt;에크리&gt; 마지막 부분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서 라깡은 4회에 걸쳐 그래프를 그려나가면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한다. Graph I 은 정신분석학에서 진실이 어떻게 소급적으로 구성되는지? 에 대한 기본문법을 언어학(ex. 기표와 기표의 관계)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Graph II 는 완성된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부분이고, graph III는 케보이, 즉 상징계 속에서 안주 못하는 주체와 그 과정에서 밝혀진 대타자의 비밀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라깡은 graph IV에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9. “The effect of meaning is always produced backwards, après coup.”-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101 [본문으로]
  10. Ibid.,101. [본문으로]
  11. Ibid.,56-57. [본문으로]
  12. “Wo es war, soll Ich warden (Where is was, I am to become)….That ‘I’ which is supposed to come to be where ‘it’ was, and which analysis has taught us to evaluate, is nothing more than that whose root we already found in the ‘I’ which asks itself what it wants.”-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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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간략한 윤리학史, 그리고 레비나스의 위치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살펴보기 이전에 서양윤리사상에서 발생했던 굵직한 윤리적 원칙인 목적론적 윤리, 의무론적 윤리, 그리고 책임윤리에 대한 이해를 먼저 살펴본다. 좋음과 기쁨,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윤리의 계보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에피쿠르스학파, 영국의 경험론, 공리주의로 이어지면서 행위의 결과에 주안점을 두는 윤리학설이다. 이런 까닭에 좋은 결과를 위한 개인의 혹은 공동체의 목적, 이상, 목표 등이 윤리적 이슈로 등장한다. 비록 중세 기독교 문명과 근대의 이성주의를 거치는 동안 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이는 니체 이후 다시 복권되어 푸코와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면서 억압되고 압제되었던 노예의 도덕이 아닌, 명랑하고 유쾌한 주인의 도덕을 꿈꾸며 21세기 사상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의무론적 윤리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동기에 무게를 둔다. 칸트가 대표적 인물이고, 목표와 이상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는 목적론적 윤리와는 달리 조건에 관계없이 내가 따라야 할 최고법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들에 의하면 선이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이란 바른 행위를 가능케하는 동력이다.

예를 들어, 현상금 1000만원이 붙은 국가보안법을 어긴 시국사범이 경찰에 쫓기다가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 누가 들어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이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목적론적 윤리에 따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행복의 기준이 문제가 될 것이다. 1000만원이 주는 물질적 기쁨이 신고를 하는 불쾌보다 큰 사람은 신고를 할 것이고 (양적공리주의), 물질적 기쁨보다 정신의 평온을 중시하는 사람(질적공리주의)은 그 도망자를 숨겨줄 확률이 높다. 의무론적 윤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칸트의 표현대로라면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하는 사람이므로 거짓말을 하지마라, 현실의 국가보안법이 보편입법이기에 신고하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맞는 행위이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이외에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책임윤리를 들 수 있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가 윤리적 판단기준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외삽적 논리싸움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에 대한 문제제기가 발생한다. 이는 윤리 본연의 쟁점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다시 숙고케한다. 책임윤리는 개별적 인간들이 자아내는 관계들에 주목하면서, 결국 윤리적 행위란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물음들과 아픔과 상처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입법이 과연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중시하는 책임윤리 안에서는 윤리적 주체와 윤리적 대상간의 관계가 주된 행위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위에서 살펴본 윤리방법론에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목적론과 의무론, 책임의 원칙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위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윤리적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So What?, 즉 ‘네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으로 우리를 내몬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굳이 이 세가지 범주에서 분류하자면 책임윤리라 부를 수 있겠지만,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라는 레비나스의 발언 속에는 이러한 기계적 분류보다는 더 복잡한 함의가 깔려있다.

레비나스의 사상속에는 서양철학에 대한 안티테제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칸트, 헤겔 또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에 공통으로 깔려있는 존재중심의 사고, 주체 중심의 자율성은 ‘나는 타자를 나의 동일성안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근대의 도그마를 전제한다. 그들에게 있어 타자는 또 하나의 자아이다. 남을 자아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기특한 것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고 배려하듯 타자를 그렇게 대한다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 사고와 교양으로 채색된 근대인들이 지니는 자기교만이다. 내가 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듯이 남에 대해서도 주체는 나를 알듯이 속속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의 도그마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야만의 근거가 되었다.[각주:1] 레비나스는 이를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서구의 도덕과 책임은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서구철학을 지배했던 유령, 즉 개인(타자)을 전체(동일성)로 환원시키려했던 돌림병 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힘의 철학’[각주:2], ‘전쟁의 존재론’[각주:3]이라 비난한다. 홀로코스트는 이런 서구형이상학의 실재가 돌출하여 인류전체를 베었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론을 펴는 첫 번째 단계에서 동일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타자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얼굴’은 동일성의 폭력에 반대하면서 윤리학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려는 레비나스에게 중요한 사유의 거점이 된다. 전통적으로 레비나스를 공부할 때 ‘타자의 얼굴’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면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 그리고 양자를 극복해나가는 레비나스 현상학의 독특함을 거론한 후 ‘타자의 얼굴’에 이르는 순서를 밟는다. 필자는 이런 도식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환대가 드러난 기사(예수의 비유에 나타난)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상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서고자 한다.

타자의 얼굴_ 예수의 비유를 중심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민중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그릇이 사용되어지는가에 따라 음식의 종류와 맛을 상상할 수 있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도 몇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전달되어져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맛과 향을 달리 느끼게한다. 예수가 민중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배달된다. 하나는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 즉 하나님 나라의 때(시간)와 관련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현실세계와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이다. 지금부터 언급하려고 하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비유는 대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를 언급하는 본문임과 동시에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받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준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에게는 더러운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사회는 사마리아산 포도주나 기름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라는 속설이 유대사회 전체에 퍼져있었다.[각주:4] 이렇듯, 유대인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율법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우리 인식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타자다. 그런데, 그토록 격멸했던 타자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나 초죽음이 된 유대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본문이 처음 읽혀지고 유포될 당시 유대인 독자들은 모두 의아했을 것이다. 유대사회의 지도층을 대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피해갔는데 왜 하필 사마리아인가? 이 비유 안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내가 알 수 없는 존재, 내가 모르는 존재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 타자란 나의 앎과 계산에 의해, 나의 율법과 관습에 의해 선택되고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내가 즉각적으로 응답을 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인자는 심판 날에 양을 자기 오른쪽에 염소를 자기 왼편에 세운다. 양과 염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이 심판을 지켜보는 청중이나 오른쪽에 있는 양, 왼쪽에 있는 염소 모두에게 인자의 판정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유는 그 판정기준 때문이었다. 김창락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놀라운 것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비신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거나 의식적으로 범죄를 하였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은 것이 아니라 이름없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았다는 것입니다.”[각주:5]

판정의 기준 못지않게 논란이 되는 대목은 인자의 자기인식이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 23:35-36). 김창락은 이 구절에 기대어 인자가 당대의 타자였음을 분명히 한다: “인자는 자신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완전히 동일시 하였다.”[각주:6] 인자가 타자라는 사실, 즉 내가 모르고 있었고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각주:7] 결국, 위의 예수의 비유를 통해 확인된, 인자가 나의 인식과 나의 결단과 신앙의 도그마 안으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통해 어느 순간 내게 확 다가와 응답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은[각주:8]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각주:9]은 한마디로 타자의 얼굴에 반응하는 것이다. 요즘 같이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 되고, 신체와 몸과 얼굴이 자본화 권력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시대착오적발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레비나스의 얼굴은 단순히 눈, 코, 입이 조합된 성형외과에서 개조의 대상이 되는 즉물적 개별적 얼굴이 아님은 당연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강조하는 점은 타자의 얼굴로부터 호명되어진 무엇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 ‘내가 여기 있나이다’[각주:10]라는 답변을 지닌 채 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이다(face to face).[각주:11]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윤리는 새롭게 태어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동일자에 대한 의심, 즉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자발성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이 일이 타자(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를 통해 일어난다. 타자의 현존으로 인해 나의 자발성에 문제제기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각주:12]

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주체, 즉 동일자의 자기의식 안에 갇혀있는 그 주체로는 우리가 타자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 이 말은 또한 주체이전에 타자가 먼저 상정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타자를 먼저 인식하고, 그런 타자의 얼굴에 반응(응답)하는 윤리적 주체로 자기를 정립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의 미래, 가능성이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론에 우선하는 윤리학,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다.

사실, 기존의 윤리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한다고 하지만 주체중심의 인식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타자에 대한 윤리는 실상은 나의 의지, 판단, 결정의 소산이고, 주체의 그것을 돋는 기저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작동한다고 푸코는 비판한 바 있다. 레비나스 역시 푸코가 같은 문제의식을 지녔으나 양자가 취했던 방법은 다르다. 푸코는 주체 대신 자기를 발견하면서 내면으로의 수렴을 강화한 반면, 레비나스는 주체를 향한 수렴대신 초월을 향한 발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가 지녔던 서구윤리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철학 깊숙히 문신처럼 베어있는 주체중심의 인식론 바깥에 새로이 윤리학을 위치시킬 수는 없을까?” 이러한 전환은 헤겔식의 근대적 주체, 그리고 그 주체가 지녔던 무한한 자유에 대한 반성이자 폐기선언이라 할 만하다.[각주:13] 인간은 근대가 이룩한 정신의 성취가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로부터 비로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는 존재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존재론 혹은 주체중심의 인식론에 선행하는 인간이라 표현하였고, 그 결과 윤리학은 레비나스에 와서 제일철학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87-88. [본문으로]
  2. Ibid., 44. [본문으로]
  3. Ibid., 22 [본문으로]
  4. 조태연 외.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84. [본문으로]
  5. 김창락.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천안:한국신학연구소,1997), 392.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Messianism is that apogee in Being-a reversal of being persevering in his being”-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60. [본문으로]
  8.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199-200. [본문으로]
  9. Levinas, Emmanuel. Levinas Reader. Edited by Sean Hand, (MA: Balckwell, 1989), 75-87. [본문으로]
  10.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136. [본문으로]
  11. Ibid., 99. [본문으로]
  12. “A calling into question of the same-which cannot occur within the egoist spontaneity of the same- is brought about by the other. We name this calling into question of my spontaneity by the presence of the Other ethics.”-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43. [본문으로]
  13. Ibid., 196-1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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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윤리(II) – “주체여, 다시 한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한국땅에서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울화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도덕과 윤리는 늘 재미가 없었다. 회상해보라, <바른생활 (초등학교) -도덕(중학교) -국민윤리(고등학교)>로 이름을 달리하여 불렸던 그 과목들이 얼마나 지루했었나를! 그것은 한국이라는 집단병영(?) 시스템 속에서 독재자들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새마을 운동(박정희)’정의사회 구현(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슬로건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왔다.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유신정권의 국면전환용 구호와 오랜 윤리적 주제였던 정의를 자신들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끌어들여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정언명령으로 각색한 제5공화국의 그것은 서구윤리 사상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전자는 에피쿠르스학파-영국의 경험론-공리주의로 계승되었고, 후자는 스토아학파-대륙의 합리론-칸트로 이어지면서 윤리적 논쟁을 벌여왔음을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 있었던 서구 윤리사상의 발전이라는 장에서 우리는 이미 배웠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전혀 섞일 수 없는 이 두 가지 윤리적 전략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음성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분단이다. 한국의 분단체제, 반공이데올로기는 수 천 년간 이어져왔던 서로 다른 윤리적 행위의 원칙을 간단히 하나로 화해시켰다. 그리하여 적어도 남한 땅에서 국민윤리란(북한도 마찬가지겠지만) 북과 맞서는 거대한 상징의 체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며 엄하게 타이르던 아버지의 권위,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는 금기의 영역으로 등극한다. 어쩌면 한국은 이러한 틀 속에서 집단과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의식의 세례가 거의 무방비적으로 이루어지는, 얼마 전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의 표현대로 야만의 사회이고, 반면 그 이데올로기가 지닌 음모가 놀라우리만큼 약발이 받지 않는 문명화된(?) 사회이기도 하다.

만일, 의식과 집단(체제), 의식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천착했던 푸코가 이렇듯 기이한 한국땅에서 활동했다면 뭐라 말했을까? 이제서야 겨우 본론으로 넘어간다.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드디어, 푸코와 만나다

 

푸코는 1984 5 25,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몇몇 뭉클한 장면이 있는데, 하나는 1995년 레비나스가 죽었을 때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영전에서 행한 아듀, 레비나스라는 추모사이다.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둘이었지만 점점 본인 사상의 후반으로 갈수록 레비나스에 다가갔던 데리다였기에 그의 슬픔은 더했다. 레비나스가 죽기 10년 전 푸코가 죽었고, 레비나스를 데리다가 추모하듯, 푸코에 대한 추모는 그의 절친했던 친구인 들뢰즈의 몫이었다. 들뢰즈는 별다른 말없이 푸코가 병상에서 최후로 완성한 성의 역사2권인 <쾌락의 활용>, 3 <자기배려>의 서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다.   

 

데카르트가 보편적이면서도 무역사적인 코기토적인 주체를 말하고, 칸트가 경험에 주어진 한계를 이성을 통해 묶음으로 선험적 주체의 탄생을 기획했다면, 푸코는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에서 이런 근대적 주체와는 구분된, 그 자신의 독특한 성과이자 사상사의 전개 과정에서 주체논의의 새로운 물꼬를 틀었다고 평가받는 자기 soi/self’ 개념을 기존의 주체 subject’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후 푸코의 자기개념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주체의 죽음이 운운되는 시대속에서 다시금 주체에 대한 새로운 생기를 부여하였다.[각주:1]

 

그래도, 주체는 계속된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 즉 인식주체의 인식대상을 향한 포섭과 간섭에 강한 능력과 권한이 부여되었던 그 시대! 인식주체가 기획한 구성아래 세계 축조의 가능성이 조심스레 예감되던 그 시절! 근대적 인간이란 루카치의 표현대로라면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소설속 주인공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무협지의 단골 내용으로 등장하는, 어렸을 때 원수로부터 부모를 여의고 하인 (어김없이 하인은 도망 중 장렬히 사망하고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에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약간 흘린다) 등에 업혀 산사로 피신한 주인공(인식주체)과 같다. 그는 산에서 우연히(아니, 필연적으로) 신의 음성을 지닌 스승을 만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경지에 이른 후 터미네이터가 되어 하산한다. 그 후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들(인식대상)을 찾아 하나씩 제거하는 내용이 무협지 후반에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삽입되어야 하는 것이 인정투쟁이다. 원수는 성장하여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주인공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어렸던 네가…! 그때 내가 너를 죽였어야 할 것을분하다!!”, 주인공은 이를 받아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가 아느냐? 내 칼을 받아라!” 노예의 복종(내지 패배)과 주인의 선포(내지 승리)가 만방에 알려지는 순간이다.   

 

위의 무협지 플롯은 근대적 인식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이다.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잠식해가는 과정이 진보이고 획득이며 발전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하에서 객체는 무릎꿇어 인식주체를 향해 패배와 복종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객체는 자연일 수 있고, 식민지 국가일 수 있으며, 당시에는 세상속에 섞여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으나 지금은 사라진 정신병자, 부랑아, 동성애자, 히피들그 밖에 인식주체와는 다른 무리들, 즉 타자라 할 수 있다. 근대는 체제에 의해 타자를 향한 인정투쟁의 거대한 망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다. 그 망을 통과한 자만이 체제안으로 편입되고 망에 걸린 무리들은 버려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푸코의 근대비판은 시작되는데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등으로 대표되는 푸코 초기 계보학적 연구들이 역사적으로 힘과 지식의 역학속에 구성된 주체의 허위를 폭로했던 작업이라면, 성의 역사로 대변되는 푸코의 후기 작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허물이 벗겨져 탈영토화된 주체를 어떤식으로 재영토화 시키는가의 문제, 즉 자기가 자기를 형성하는 방식에 관한 몰두로 그 관심이 바뀌었다. 이를 윤리적 화두로 전환하면, 근대 주체 철학 위에 서있었던 도덕이 보편에 개별을 맞추는 입법의 차원이었고, 그러한 도식속에서 윤리란 그 명법을 내 것으로 끌어당겨서 (자발적, 의식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보편을 향해 투항하게 만드는 그런 주체를 위한 윤리였다. 반면, 푸코의 후기사상에 나타나는 윤리적 판단의 근거는 보편보다는 개별에 포커스가 있다는 점에서, 칸트류의 의무론적 윤리나 니체가 비판했던 노예의 도덕과는 사고의 지점도 다르고 전개양상도 판이하다.

 

푸코는 근대 프로젝트 안에 펴져있던 총체적 난맥의 첫 단추를 주체규명에서부터 찾았고, 이런 이유에서 주체대신 자기를 제안한다. ‘자기라는 말은 기존의 철학에서 말해왔던 주체개념과는 다른, 자기의 욕망(혹은 본색)이 더 충실히 반영된, 즉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기름이 빠진 주체라 할 수 있다.[각주:2] 비록 근대적 주체는 사망했지만, ‘자기라는 이름이 부여된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 셈이다. 이는 데카르트이래 등장한 근대적 주체가 절대적 주체로 등극한 이래 한차례도 흔들리지 않았던 서구 주체중심의 철학에 대한 의식적이고도 악의(?)적인 반동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고대 그리스로!

 

서구 현대 사상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찾아 많은 경우 고대 그리스를 향해 회귀한다는 점이다. 마치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를 외치는 듯 말이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그랬다. 서구 형이상학에 대해 평하면서 존재망각의 역사였다고 비판하던 하이데거가 내세운 전략이 바로 고대 그리스로의 귀환이었다. 이는 근원적 존재체험과 기원에 대한에 여전한 미련과 애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 안에 깃들어있는 사상적 혹은 미적 보수성을 엿볼 수 있다.[각주:3]

 

푸코 역시 자기의식의 단초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어온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에 대한 문제제기 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고대그리스의 존재체험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던 하이데거와는 달리,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를 오히려 고대그리스의 존재 체험에 기대어 전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양자는 확연히 구분된다.[각주:4]

 

고대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선함이란 착함보다는 좋음이었다. 즉 내게 쾌를 선사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내게 불쾌를 선사하는 것은 악한것이다. 물론 그것은 감각적인 쾌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정신적인 영역까지를 포함한 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 했을 때 이는 전적으로 좋음을 의식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푸코가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적인 좋음을 다시 현대의 윤리적 테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어떤 보편과 규범에 의해 개인이 함몰되지 않고, 자기가 자발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의 추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에게 있어 윤리란 미학적 성격을 띤다.[각주:5] 전통적 의미에서 미적 판단력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받아 예술작품 안에 스며있는 이데아의 순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방(복사)의 정도가 정교할수록 진품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현대 미학에서는 미적 주체와 미적 대상간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미에 대한 의식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데아가 지닌 아우라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감동, 새로운 가치 창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푸코는 이러한 현대 미학의 패러다임을 그의 윤리학으로 초대한다.

 

에필로그: 결국, 자기의 윤리란?

 

윤리학은 자고로 본질주의와 토대주의에 입각해 이데아를 상정한 후 윤리적으로 그 본질에 따라 사는 삶을 안내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윤리학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생성으로 보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시간의 경과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동일성안으로 들어온 창조와 변화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성과 창조의 과정속에서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의 도덕을 어느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의 윤리를 보편성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설득과 대화와 연대의 과정 모두가 윤리학의 범주가 된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윤리학이 등장한 셈이고, 이에 대한 발전과 도전과 응전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자기에 대한 실천에 있어 그 실천의 주된 목표는 자기와의 관계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로의) 전환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이동을 뜻한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4-65. [본문으로]
  2. “자기체험은 단순히 통제된 힘이나 언제나 반항할 준비가 된 힘에 대한 지배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기쁨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자신의 현 모습에 만족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6. [본문으로]
  3. 하이데거가 걸어갔던 그리스전통에로의 복귀에 대한 부분은 2009년 9월 25일 웹진에 게재되었던 졸고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3)”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19)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성의 역사』 2권과 3권은 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도덕을 다루면서 윤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시도하는데, 특별히 자기이해와 고대 그리스와의 연관에 주목하려면 아래 부분에 주목하기를: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57이하. [본문으로]
  5. “왜 우리의 삶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 사물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의 삶은 왜 그렇지 못하는가?” - Michel. Foucault, ‘On the Genealogy of Ethics: An Overview of Work in Progress’ in 『The Foucault Reader』, Edited by Paul Rabinow. (New York: Pantheon Books, 1984), 35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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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윤리(I) – “주체여, 안녕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포스트모던 윤리의 지형

포스트모던 윤리학의 계보를 투박하게 분석하면, 니체로부터 기원하여 푸코, 들뢰즈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와 (후기)데리다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요근래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실재(the Real)의 윤리를 들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맑스와 라깡의 세례를 받은 이 그룹에 속한 학자들에는 21세기 최대의 스타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지젝과 칸트에 대한 라깡적 독해를 시도한 <실재의 윤리>의 저자 주판치치가 있다. 요약하면, 포스트모던 윤리는 크게 세가지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니체로부터 시작되는 자기의 윤리, 레비나스와 데리다로 대변되는 타자의 윤리, 그리고 슬로베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실재의 윤리가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논의의 집중을 위해 전자의 두 경우에 포커스를 맞추어 내용을 전개할 것이고, 새롭게 등장하는 실재의 윤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과제로 넘긴다.

우선 두 그룹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서구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자행되었던 개별자를 향한 동일자의 무차별한 폭력에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많은 경우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성급하게 포스트구조주의[각주:1] 계열의 학자로 묶여서 알려지게 된다. 물론 해체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초기 데리다를 포스트구조주의 계열로 분류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적어도 90년대 이후 자신의 해체주의적 이론을 윤리적 테마로 이행하던 시기의 데리다는 오히려 레비나스를 닮았다. 레비나스는 애초부터 니체-푸코라인과는 다른 출발점이었다. 후설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계보를 따라 레비나스의 사유는 시작되었고, 특별히 유대교 신비주의의 영향이 그의 문장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려왔던 양 진영은 서구 형이상학이 지니는 전체성의 폭력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전략적인 면에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은 자기의 해석학으로 치달았고, 레비나스와 (후기)데리다는 타자의 발견에서 그 해결점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 니체에 기대다!

영어원서를 읽다보면 Subject 라는 단어를 만날 때 만큼 모호하고 이중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도 드물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체, 실체, 자아, 주제라는 뜻 이외에, ‘신민(臣民), 신하, (집합적)국민이라는 뜻도 Subject 안에 들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니, 급기야는 형용사로 쓰일 때는 복종하는, 지배를 받는, 당하기 쉬운,…에 빠지기 쉬운으로 해석을 해야한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주체, 강철과도 같은 불패의 정신을 지녔던 그 주체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전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주체의 숨은 뜻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이렇듯 가려져 있었던 주체를 수면위로 강하게 끌어올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니체였다. 기본적으로 니체에게 있어 세상이란 더 이상 나를 어떤 합리적 구조에 가두는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디오니소스적인 축제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은 나의 욕망이 끊임없이 활기치는 놀이터 같은 곳이 된다. 우리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듯이,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밝힌 주인의 도덕이란 이러한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삶을 긍정하고, 그런 삶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생성시키는 윤리이다. 이는 근대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투명하고 통합된 주체의 도덕도 아니고, 엄숙하고 너무나도 체제 순응적인 노예의 도덕일수도 없다. 어떤 에네르기에 의해 분열되고 그래서 앞날이 불투명하고 혼돈에 쌓인 그런 주체를 위한 도덕인것이다.[각주:2]

이렇듯 니체의 사상 안에 함의된,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길들여진 주체에 대한 거부는 집단에 대한 딴지와 개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모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니체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밝힌 것처럼 거대담론의 붕괴와 작은 이야기들의 발견으로 전승된다.[각주:3]  진정 우리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거대담론이니 공동체니 역사의 발전이니 하는 선언적인 구호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작은 이야기들, 예를 들어 개인은 누구인가? 집단과 이념의 그늘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 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이다.[각주:4] 이 질문은 완강했던 근대적 주체의 붕괴를 예고하는 서술임과 동시에 새롭게 번역되는 주체에 대한 기대와 전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Episode: 내가 주체로 서기까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적하고 있는 주체란 어떤 집단에 몸담고 난 이후에 만들어진  주체이고, 어느 특정 이념에 노출된 이후 형성된 그 주체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남자로서의 주체성을 담보하려면 군대에 갔다와야 한다. 병역미필자는 해외에 나갈 때도 제한이 있고, 이력서를 쓸라치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항상 꿀린다. 사람들은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그럼 군대 가기 전 사람과 군대갔다 와서 된 그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고백하자면 내 경우는 군대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체득해야 할 온갖 나쁜 것은 다 배웠다. 굴욕에 복종하는 법, 짜웅(아첨)하는 법, 여자를 오로지 즉물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법, 가라(허위)로 보고하는 법, 인간을 격멸하는 것까지그런데 세상은 그런 군대를 나온 남자를 사람됐다고 사회적으로 인정한다.

공적차원에서 내 주체되기의 완성이 군대를 통과한 이후의 일이라면, 그것의 시작은 그 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지금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거의 다 외우고 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도덕 시험이 그것을 외워서 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민교육헌장은 그 이후로 내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이어 통째로 암기하고 있는 세 번째 주문이 되었다. 당시 중간고사 시험을 보면서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문장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를 쓰고 난 후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 자신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있다는 것, 내가 민족의 역사를 창조할 일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고 그런 조국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원통하고 분하다. 그 어린아이를 그렇게 기만하다니! 어떻게 나라 전체가 이런 사기극에 집단적으로 공모할 수 있는가?

주체의 죽음! 주체여 안녕 !!

군대를 갔다오지 않아도 사람이 될 수 있고, 구태여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아도 삶은 넉넉히 지속된다. 누군가가 창조하려했던 새 역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했는지 우리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않은가! 병역을 필해야만 비로소 한국땅에서 남자 노릇 할 수 있는 그 주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되새기며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그 주체! 어쩌면 주체란 이런 필터링을 거친 후에 걸러진 찌꺼기가 아닐까? 그 필터는 군대일수도 있고, 국민교육헌장일수도 있으며, 그 밖의 여러가지 이름과 가능성으로 현존하며 그 다음을 대기하고 있다. 현대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주체의 죽음이란 바로 그렇게 필터링된 주체에 대한 사망선고인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논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경계를 나누고 그것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필자가 보기에는 소모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주창자라 평가받는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라깡, 푸코 등의 학자들 스스로가 구조주의의 틀 안에 묶이는 것을 거부했고, 그 거부의 몸짓들을 투박하게 포스트구조주의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변별점을 분석하는 작업보다는 오히려 구조주의/탈구조주의 논쟁이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유익한 논의가 되리라 본다. 서구 근대 형이상학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생각하는 나) 중심의 철학은 시대를 달리하며 현상학과 해석학, 실존주의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포물선을 그리게한 동력이었다. 물론 이것은 대상이 주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전 시대의 형이상학과는 차이가 있지만,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포섭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한 동일자의 폭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는 이에 맞서 인간의 인식과정이 결코 투명한 의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인간의 의식으로는 파악이 안되는 구조(언어, 문화, 역사, 무의식 등) 안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본다. 인간이 선천적 종합판단과 의지적 결단에 의해 행위하는것 같지만, 기실 그것은 어떤 짜여진 판에 의해 의도되어진 예상 가능한 함수라는 것이다. 이는 코기토적 주체에 대한 정면도전이라 할 만하다. 구조주의 처음 시작은 소쉬르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등 과학적 분석방법에서 출발을 했지만, 이는 점차 영역을 확대하여 서구사상 전반에 대한 비판(반이성주의, 반인간중심주의, 반민족중심주의, 반서구중심주의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일련의 과정을 포스트구조주의라 부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는 이론, 이념, 주의등이 지닌 보편화의 가능성과 영토화의 음모를 의심하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구조주의, 더 나가서 근대성이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면서 공들인 체제 어딘가에 틈이 생겨 물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는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 지금 실재라고 일컫는 것의 보이지 않는 어느 구석에 틈이 생기고 그 틈새로 무언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진짜 실재라고 말이다. 라깡은 이를 ‘증상’이라 말하고,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해체불가능자’이다. 지젝은 아예 대놓고 이를 ‘실재’라 부른다. 물론 구석에 난 틈과 그 틈을 통해 스며나오는 불순물은 이론의 체계 내에서는 비합리적, 비이론적, 비학문적 요소이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오히려 이 부분을 통해 이론의 체계가 성립된 흔적을 역으로 추적하면서 이론에 주름을 내어 결론적으로는 이론의 표면적을 넗히는 역할을 한다. 기존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무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의 허위를 인정하지만 안고 나가는 애정이 포스트구조주의에 스며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근대라고 일컬어지는 전 지역에서 파생된 문제에 대한 변론이자 땜질이며, 그러기에 그들에게 있어 사유는 단절과 봉합이 아닌 개방과 재서술의 형태로 미끄러져간다. [본문으로]
  2. 니체식 (흔들리는 혹은 욕동하는) 주체를 잘 드러내는 문장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다: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가 나의 모든 의지를 다해 의지해야만 하는 곳에, 내가 사랑하고 또 소멸하기를 원하는 곳에, 하나의 상이 단지 상으로만 남아 있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 - Friedrich. Nietzsche.「Thus Spoke Zarathustra」in the Portable Nietzsche, Edited by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8), 235. [본문으로]
  3. J.F.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trans. Geoffrey Bennington and Brian Massumi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60. [본문으로]
  4.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그것이다. 작은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자기의 의지와 욕망에 대한 한없는 관용이 냉전 종식 이후 몰아 닥친 신자유주의 시스템과 교묘한 결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이야기들의 발굴을 통한 자기의 확장이 거대담론을 다시 복원하고 거시세계의 건강성을 담보할 수 있으리라는 그들의 낙관적 견해는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인지? 이같은 지적은 90년대 초.,중반 사상계를 달구었던 중요했던 이슈 중 하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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