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8]


지젝 (1) : 까다로운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주체의 문제


      탈근대 철학의 이론의 장에서 벌어진 논쟁의 화두는 ‘주체의 죽음’을 중심으로 벌어져 왔다. 인식론적 전환점을 찍은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와 헤겔을 넘어 후설의 현상학까지 경험의 주체를 실체론적인 형이상학에 의해 탈역사적으로 구성해온 부르주아 철학은 실존주의 철학(실존주의 역시 존재론적 시도의 한 형태이지만,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관념 체계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맑스주의, 구조주의에 이어 이마저도 한발 더 넘어서려는 탈구조주의에 의해 반박되어져 왔다. 이들 철학이론들의 지형은 엄연히 자기고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의미에서 지지되어온 ‘주체’의 존립근거를 부정하는 전복적인 태도에서 만큼은 일치된 입장에 있다. 이로써, ‘주체의 죽음’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용어처럼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이라는 탈근대를 향한 급진성이 유행처럼 지나간 이후에, 주체의 죽음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에 대한 물음은 모호한채 남겨졌다. 물론, 이성이 되었든 존재가 되었든 주체를 최종 판단의 결정권자로서의 권한을 부여한 결과, 그로 인해 구성된 세계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구조를 초래하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가 제거된 이후의 세계는 달라졌을까? 주체가 사라졌으니 마음 놓고 자유를 만끽하라고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면, 주체의 죽음을 확신케 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을 향유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바디우는 오늘날의 차이와 다양성의 문화가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강조한다. 즉 차이와 타자성이라는 말은 매혹적이지만 이들 용어들은 자본주의의 탐욕만을 충족시켜줄 뿐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바디우는 주체의 죽음이라는 급진적 현상이 다양성과 차이만을 강조한 채 사회적 갈등과 적대를 포스트모던의 풍토 안으로 일시에 흡수해 버리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와 차이의 존중이라는 그럴듯한 주장을 앞세워 헤게모니를 영속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지배전략이 주체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적으로 수용되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런 문제인식 위에서, 이 글은 먼저 지젝의 주체이론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칸트적 헤겔 또는 헤겔적 칸트의 이해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근대적 주체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지 않고 오히려 근대철학의 주체성 논의에서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두번째는, 데카르트부터 칸트, 헤겔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연결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라캉의 이론적인 토대로 기능하게 되는지를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이 라캉의 실재개념 안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현실 정치의 변혁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데카르트의 유령


    지젝의 철학적 사유는 주체의 죽음이 공언된 이 시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체를 부정함으로서 혁명의 가능성마저 제거해 버린 탈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뒤에는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묵인하고 존속시키는 탈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따라서, 지젝에게 철학적 문제는 근대적인 주체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혁명의 주체의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주체의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지젝이 선택한 길은 두가지 방향에서 파악될 수 있는데, 하나는 맑스-레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학이다. 맑스-레닌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은 생소하게 보일진 몰라도, 맑스주의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에 맑스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외부로부터 이론적 보완을 시도했던 경험은 역사적 선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맑스주의에 도입한 경우가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왜곡되어 국가사회주의라는 파시즘으로 흘러간 경위를 프로이드를 통해 밝혀내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맑스주의를 실존주의적으로 수용하면서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적으로 탈바꿈 할 때에, 알튀세르는 이러한 시도들을 수정주의로 파악하고 인식론적인 개입을 제거한 순수한 맑스주의 해석을 들고 나온 사례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젝의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철학의 결합은 형식의 측면에서는 전혀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 어렵다. 지젝의 프로젝트를 이전의 사례들과 구별짓는 데에는 형식적인 특별함이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에서 결여되었던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해 라캉의 정신분석철학의 관점에서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온다는 점에 있다. 이 글이 지젝에게 주목하는 점도 여기에 있다. 지젝의 철학은 주체 문제와 연관된 탈근대적인 해체주의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적 주체를 해방적인 역량으로 전유할 수 있는 이론적 시도를 과감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근대와 탈근대의 단절을 그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특색은,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1999)’의 서문에서 쉽게 발견된다. 지젝은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 해체주의자, 하이데거적 지지자, 생태론자, 비판적 맑스주의자와 여성주의자까지 이어져온 ‘데카르트적 주체라는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한 ‘학술권력’들의 동맹에서 찾는다. 지젝은 주체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데카르트의 주체가 여전히 유령처럼 출몰해 왔음에 주목하며, 주체의 유령에 대한 반 데카르트적 동맹이 지시하는 바는 역설적으로 데카르트적 주체성이 강력한 지적 전통으로 인정받아 왔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이처럼 지젝은 대세가 되어버린 주체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데카르트의 주체를 저마다 희생양으로 삼아 학술권력을 지배해왔던 진보적 담론들과 대결을 벌인다.


초월론적 주체


    그러나 지젝이 부활시키고자 한 주체는 실체론적-존재론적인 데카르트식 주체 개념이 아니다. 지젝은 코기토를 시점으로 칸트로부터 인간의 이해에 적용되었던 초월적(선험적) 관념주의 철학에 의해 확인되는 것은, 사유하는 ‘나’는 인정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나’를 보증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즉, 칸트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 코기토를 자기 초월론적 철학의 출발점으로 수용하지만, 세계를 인식하는 투명한 자기확증적인 주체로서 인간을 규정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식되어진 현상과 객관적인 대상(물 자체 thing-in-itself)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사유와 존재, 지각과 대상, 표상과 실재는 일치하지 않으며 양극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여기서 자기 동일적인 주체성이 설 여지는 없다. 이성이 알 수 있는 지식의 범위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없는 것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영역이다. 칸트가 설정한 ‘물자체’는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영역, 초월적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비대상성에 속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현상이지 물자체가 아니다. 현상은 실재의 그림자이다. 실재로부터 유출되어 나오지만, 실재의 모사일 뿐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인식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두가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나는 한계로서 이성의 지위이다. 이성은 객관을 직시할 수 없다. 언어, 표상, 감각, 기호, 말 등은 실재 즉 객관적인 대상, 본질 그 자체를 지향할 뿐,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계는 현상과 본질의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 . 그러나 이성의 한계가 실재와의 완전한 단절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는 사고로서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의미를 요구하기 마련인데, 그 의미는반드시 초월적인 로고스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두번째로 지적되어야 할 점과 연관 되어 있다. 현상은 실재와 반성적(reflective)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성에 의해 파악된 세계는 실재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물자체는 지각에 의해 경험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부재하다고 할 수 없다. 실재가 없이는 상징계의 질서 또한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계로서의 이성은 이처럼 실재와 현상의 불일치 뿐 아니라, 실재의 존재를 확증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이처럼, 한계와 초월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칸트의 초월론에는 이성과 실재사이의 관계가 잠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실재의 영역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져 있지 않다는 특징 또한 포함하고 있다.


까다로운 주체


    칸트의 초월론적 방식은 인간의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를 상정해야만 성립할 수 있었다. 인식은 단지 감각을 통해 주어지는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객관와 주관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말한다. 주관은 객관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사실상 칸트의 핵심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잠정적으로 가정된 초월적 통각 영역 너머의 물자체를 진리로서 수용할 수 없었다. 헤겔이 보기에 철학이 객관적 진리를 알 수없고 한계안에서 제약된 상대적 현상만을 파악할 수있다는 것은 철학의 무능을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헤겔은 칸트의 초월철학에 손질을 가한다.


    헤겔은 칸트와 달리 이성을 객관적인 것으로 본다. 객관성을 갖는 칸트의 오성 또는 초월적 통각은 이미 헤겔에서 이성으로 동일시된다. 헤겔은 칸트가 분리한 오성과 이성을 다시 이성안으로 통합시킨다. 이렇게 통합된 이성은 객관을 타당하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실체론적으로 긍정하는 칸트와 달리 헤겔은 가정된 초월적 물자체를 부정한다. 칸트에게서 있을 것으로 가정된 물자체는 매우 약한 고리로 이성과 잠정적인 관계로 남아있었지만, 헤겔은 물자체를 가시적인 이성의 현실 영역으로 끌어온다. 현상은 객관에 대립하는 주관의 구성물이 아니라 바로 사물자체의 규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체로서 현상의 피안으로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현상계의 끝을 물자체라고 본 것이다. 물자체란 현상 세계의 너머에 있는 실체가 아닌, 현상계의 종착점이 바로 물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헤겔은 칸트가 끝까지 남겨 놓은 물자체마저도 주관의 영역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절대적 주체성을 복원한다. 이로써 현상과 실재 사이의 거리는 제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반대로 잠정적이었던 틈새는 보다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지젝에게 있어서 헤겔은 칸트철학의 극복자라기보다는 현상계와 물자체의 갈라진 틈새를 보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가시화시킨 장본인으로 이해되는 이유이다. 이점은 헤겔이 칸트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며 전통적인 이성과 그로 인한 결과인 형이상학을 복권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온 일반적인 헤겔에 대한 해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젝의 헤겔에 대한 독창적 해석법은 여기에 있다. 지젝은 ‘나눌수 없는 잔여(1996)’에서, 헤겔이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은 “주체는 알수 없다는 칸트의 생각을 사변적으로 역전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물자체로서 “주체의 ‘알 수 없음’은 주체가 비실정적 공백이라는 사실을 오성이 잘못 인지하는 방식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주체는 알 수 없는 텅빈 X라고 말하는 곳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인식론적 규정에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즉 주체는 순수 자기정립적인 ‘없음nothing’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통각의 너머에 물자체를 인정하는 칸트와 달리, 헤겔에게 주체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의 담지자이며, 지젝은 이러한 부정성의 담지자를 “까다로운 주체”라고 부른다. 부정성에는 주체뿐 아니라, 대타자로 기능해온 물자체역시 부정성의 대상이 된다. 언제나 감각 너머이 있을 것으로 가정되어 온 물자체는 ‘그곳’에 없다. 이로써 대타자도 역시 ‘그 곳’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헤겔이 물자체를 이성의 범주로 소환하였듯이, 지젝에게 대타자는 상징계 안으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지젝은 헤겔의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해석을 칸트주의와 연결시킨다. 칸트에게 확인되는 것은 초월적 통각에 의해 종합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 아니라, 이성과 물자체 사이가 서로 대립과 긴장 속에서 근본적인 상호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듯이, 헤겔의 변증법은 정과 반의 긍정적 종합으로서 합이 아니라, 부정의 근본화, 즉 부정을 더욱 철저히 부정하는 변증법이다. 변증법을 부정의 부정이라는 운동을 부정의 근본화시키는 것으로 읽어내고 그로부터 ‘비어 있는 텅 빈 무’로서의 주체를 발견하려고 하는지젝은 헤겔을 반칸트주의가 아닌, 반대로 급진적인 칸트주의자로 해석한다.  


라캉과의 만남


    지젝의 해겔에 대한 독특한 독법은 헤겔의 철학을 타자를 주체로 환원시키고 차이를 동일성으로 통합시킨 형이상학적 철학의 토대로 이해해왔던 기존의 통념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시각에서 주체를 재구성할 여지를 남겨준다. 그러나 지젝이 다시 읽어낸 헤겔과 칸트만으로는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논하고, 현실정치 안에서 주체를 재구성의 대안으로 삼기에는 아직 이르다. 칸트와 헤겔의 해석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만나야 한다. 지젝은 칸트의 초월적 통각과 물자체의 개념을 라캉의 인식체계를 선취하는 모형으로 보았다. 라캉은 이를 상징계와 실재계로 구분하였다. 지젝이 데카르트로부터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을 읽어가는 관점은 이처럼 라캉의 개념과 맞물려 있는데, 이제 우리는 지젝이 해석한 칸트와 헤겔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되는지 볼 차례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지젝이 그의 주체 이론이 현실적으로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도 검토하기로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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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7]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후기구조주의와 해체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라는 믿음을 깨뜨리고, 인간의 주체성은 구조에 의해 구성된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파헤친 것은 구조주의의 성과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시작되는데, 그는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며, 기의란 기표의 차이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라 말한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언어가 실체와 조우할 수 없는 한계내에서 발생하는 언어들의 차이라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구조[각주:1]를 분석함으로서 실체를 로고스에서 발견해왔던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거부하는 대신, 언어의 차이와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명증한 사실로 여겨진 자아 혹은 의식을 실재의 출발로 보았던 자아중심주의에 균열을 가하였다.이같은 구조주의적 관심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사에서 실존주의가 봉착했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면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가? 후기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푸코, 라캉, 들뢰즈, 알튀세르, 데리다와 같은 이들은 구조주의의 업적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 구조주의가 간과하였던 문제를 니체, 프로이트, 맑스주의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에 기반하여 전개한다. 말하자면, 라캉은 프로이트를,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푸코와 들뢰즈는 니체에 대한 다시읽기를 주장하는데, 물론 이들의 시도 조차도 소쉬르의 언어학으로 시작된 구조주의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실체적 형이상학의 철학사를 뒤집기 위해 다른 경로를 채택했지만, 지향했던 지점은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표현대로 하자면, 기원과 중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중심이나 기원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당위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뮬라르크에 대한 위계질서와 그에 대한 차별과 억압도 일시에 무효화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한발 더나아가 구조주의의 노력으로 그나마 밝혀진 차이의 구조마저 의미관계의 본질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구조주의는 영화에서처럼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컴퓨터 가상 인식체계가 지배하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매트릭스라는 완벽한 통제시스템에 의해 컨트롤 당하고 있음을 구조주의는 드러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는 매트릭스의 실체를 밝혀낸 구조주의의 성과를 인정하지만, 매트릭스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로 한 발 더 나간다. 말하자면, 매트릭스 조차도 가상적인 조작물일 뿐이지, 인간은 매트릭스에 의해 구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매트릭스에 장악되지 않는 '네오(키아누 리브스)' 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시온이라는 구역이야말로 매트릭스의 구조가 지배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을 일정한 규칙성과 폐쇄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로 인정하는 순간, 철학은 형이상학적 로고스 중심의 철학사가 걸어온 길로 되돌아갈 위험에 빠질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따라서, 모든 중심과 기원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직시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네오와 같이 매트릭스의 감시를 빠져나오는 탈주하고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현상을 바로 인식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가 넘어서려 했던 지점이 여기에 있다. 푸코는 성(sexuality)이 구조적으로 억압되어 왔다는 가설을 깨고 성에 대한 지식과 담론은 오히려 확산되어왔음을, 들뢰즈는 영토화/코드화된 억압적 체계를 인정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영토를 가로지르는 노마딕한 탈주선을 제시하였고, 라캉은 구조화된 무의식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의 주제로 등장시켰지만 동시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한걸음 더 나아갔으며, 알튀세르는 자본의 착쥐구조를 넘어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라는 중층적 관계를 인식론적 틀로 제시하였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deconstruction)는 실체론적 철학에 저항하기 위한 구조주의의 기초위에 세워졌지만 구조주의적 인식체계 마저 넘어서려는 탈구조적인 사유행위를 함축해 놓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매트릭스라는 형이상학의 시스템을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완벽할 것 처럼 보이는 구조 안에서도 네오처럼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놈이 반드시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에 의해 매트릭스조차 마침내 부정되고 해체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치밀한 관계망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는 송곳 같은 현상이야말로 매트릭스로 구조화된 사회를 인식하는 본질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메타적 구조가 아니라, 구조를 전복시키는 미시적인 차이와 차이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던 태도에서 벗어나서, 안정과 질서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 일탈하는 작은 변화들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질적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를 묻는다. 이렇게 데리다에게서 후기구조주의는 전통적 사유방식을 해체(deconstruction)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체된 빈 공간 위에 아무것도 다시 구축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무엇을 해체하려고 했으며, 해체 뒤에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해체를 허무주의의 유포라고 비판하는 우려에 대한 반론은 무엇인가? 해체론 안에서 주체의 윤리적 실천의 계기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이글이 관심하는 주제인데, 그의 핵심적인 개념들 몇가지로 제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텍스트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 철학을 현존(presence)의 형이상학, 음성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로 파악하며, 이를 해체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전통적인 이성중심의 형이상학을 타겟으로 삼는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어떠한 기원이나 중심위에 세워진 사유체계도 아님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다. 형이상학의 근거지가 부정될 때에 순수성의 신화는 궤멸하게 되고, 비로소 본질과 현상, 선과 악,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음성과 문자 등과 같이 이항대립의 관계로 놓고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을 필연적인 결과로 정당화시켜왔던 근거들이 폭력적인 위계질서에 불가할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Of Grammatology)’에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주장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였던 니체와 존재의 복구를 통해 근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하이데거, 그리고 소쉬르의 반실체적인 구조주의적 언어학의 성과를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차이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관계에 선행하는 원초적인 기원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구조를 유한하고 폐쇄된 총체성으로 이해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소쉬르에게서 문자에 대한 음성의 우월적 지위는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데리다의 진단이다.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타난 음성우월주의는 소쉬르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문자는 언어를 표상하는 유일한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텍스트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시킴으로서 로고스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소쉬르적인 구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음성 대신 텍스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 항목들을 복권시키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것으로 로고스중심주의로 파생된 폭력적인 위계질서는 해체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데리다의 해체전략은 또다른 형태의 이항대립구조의 탄생에 의해 좌초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의도한 것은 매트릭스를 대체할 다른 구조물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총체적인 구조로 실체를 파악해야한다는 어떠한 형태의 시도도 출현하지 않을 만큼의 해체로 까지 밀고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단순히 형이상학의 근거를 전복시키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부수고 무너뜨리는 과격한 파괴운동(destruction)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어떠한 위계지배질서의 출현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에 대한 지향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차연(difference)’이라는 개념은 탈-구조화를 위한 그의 의도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차연


   데리다는 탈-구조화의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서, 소쉬르가 주장했던 ‘기표 사이의 차이에 의해 기의가 구성된다’는 주장을 기원의 개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순수한 기원에 대한 신화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나선다. 다시말해서, 기의는 기표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처럼, 기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표들의 차이가 반드시 기원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렇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 안에서 보면, 기원은 더 이상 실체적인 것,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데, 기원이라는 것 역시 기원에 선행하고 우선하는 다른 하위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보다 더 앞선 기원도 텍스트에 의해 차이화된 것에 불과하다. 데리다의 표현 그대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텍스트 중심주의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기표(문자)는 로고스철학에서 원본과는 무관한 열등한 것으로 배제되어 왔지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를 기원으로까지 확대적용시킬 때에 문자(기표)는 말(기의, 로고스)에 우선하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로써 기원의 기원으로서 적용된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는 기원이 가지는 말의 모순성을 폭로하며 마침내 기원의 기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시킨다.

    기표들의 차이를 기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데리다는 순수한 기원이란 말 자체가 가지는 모순을 드러냄과 동시에 음성중심의 기원의 신화를 해체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곧 말에 대한 텍스트의 우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탈-구조화(de-construction)는 재-구조화(re-construction)로 퇴색하고 말 것이다. 텍스트는 기원적이지만 결코 기원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텍스트는 대상을 지시하는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의 기능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문자는 그 자체로 대상을 의미하지 못하고 단지 대리적인 보충물로서 문자들간의 차이를 통해 대상의 존재를 흔적으로 남길 뿐이다. 그러므로 흔적은 이미 시간적으로 항상 뒤에서서 대상을 쫓아가는 지연된 관계에 놓여 있다. 흔적으로서 텍스트는 대상을 은유적으로 지시할 수는 있지만 대상과 동일성을 가질수는 없다. 대상은 텍스트에 의한 ‘차이’와 ‘지연’이라는 시공간적 방식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공간성의 차이와 함께, 시간성의 지연이라는 이중적인 운동을 통해서 기원은 파악될 수 없는 흔적으로만 남겨지게 된다. 이렇게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을 통칭하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데리다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게 만드는 의미의 효과가 사실은 무의미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차연’은 소쉬르의 기표가 드러내는 공간성의 차이만으로는 형이상학의 인식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주의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이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온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뒤섞어 버림으로서 끊임없이 기원을 재생산해 내려는 모든 철학적 시도를 봉쇄해 버리려는 해체와 탈-구조화의 이중적인 전략을 수행하는 데리다의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유령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철학하기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에 따른다면, 철학이 무언가에 대해 설명하고 논증하기 위해 텍스트를 동원할수록 지시하려는 대상은 자꾸만 멀어져 갈 뿐이기 때문이다. 흔적으로서 글쓰기가 증명하는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 뿐이다. 프랑스의 68혁명의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에게 보다 날카롭고 급진적인 정치철학의 태도가 요구되었던 것을 감안하자면, 데리다의 해체는 한가한 지식인의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투항주의적인 태도로 비춰진다. 데리다의 비판론자들이 그를 철학의 종말을 고하는 허무주의로, 심지어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동력마저 무력화시키는 위선자로 낙인하는 이유는 이점에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초기에 거침없이 써내려간 해체적 입장이 의미하는 정치 윤리적 실천의 면모는 그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전개된 유령론에서 드러난다.

   데리다에게 차연은 전통적 시공간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개념인데, 전통적인 입장에서 현존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단절되었으며 미래와는 연결되지 않은 ‘지금’이라는 정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안에서만 파악되는 것이지만, 차연의 운동은 현존의 대상을 끊임없이 과거로 밀어내고 다시 미래를 향해 달아나며 남기는 흔적을 추적해야 하는 통시적인 시간속에서 파악된다. 차연의 통시적 효과는 과거, 현재와 미래의 시간성들이 일직선상위에 차례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안에서 현존은 과거에 의해 부정되며, 미래에 의해서만 유추될 수 있는 불확실성으로 남는다. 따라서 현존하는 것은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존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모호한 것이다. 그는 이를 유령(specter)으로 표현한다. 유령은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기에, 존재의 부재와 더불어 부재의 존재를 지칭하기에 매우 적절한 은유로 채택된다. 유령과 결부된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의 현존을 일자의 동일성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한다. 유령은 그것과는 무관한 개방적이고 불투명한 절대적인 타자성이다. 데리다는, 철학이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자아와 현존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을 유령으로 존재하는 비현존의 존재론으로 뒤집어 놓는다. 인식의 근거는 자아의 의식, 혹은 기원이 아니라 유령과 같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흔적으로 등장하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 유령으로서 존재하는 타자는 자아의 이성과 판단에 의해 포섭되지 않으며 단지 무조건적으로 환대(hospitality)해야할 관계일 뿐이다.

    데리다에게서 해체의 정치적 급진성은 바로 이 유령의 존재에서 발견된다. 유령은 자아중심적인 시공간 구조에서 만들어지는 예측된 미래를 추구하는 일체의 목적론적 실천행위를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착취의 현실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 역시 공산주의의 필연성을 낙관하는 것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맑스의 공산주의라는 단선적이고 목적론적 구조위에서 공산주의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자본가를 위협하는 유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데리다는, 맑스를 넘어 계급, 국가, 제도의 경계를 허물고 도래하는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새로운 형태의 타자들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경계를 넘어선 개방적인 연대 안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오늘의 불의한 착취의 구조안에서 다시 소환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실체론적 존재론은 자본주의와의 공모관계안에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로 계층화하고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시켜 왔다면, 맑스의 공산주의는 같은 방식으로 가시적인 현존을 인간사회의 진보 가치로 삼아왔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 양쪽 모두가 믿어온 현존의 공간과 시간적인 경계를 넘어서 출몰하는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고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정치윤리를 제안한다.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구축해 놓은 확고부동한 존재를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유령으로 대체시켜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모호하다. 존재가 아닌 유령을 실재하는 것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데리다는 주체의 구성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데리다의 의도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정관념 하나를 지워버릴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은 주체를 부정하느냐 긍정하느냐는 식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추궁하는 것은 유령론이 지시하는 정치윤리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주체는 존재하는가, 부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익숙해 왔던 전통적인 접근법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해 고흐의 그림 “끈이 달린 낡은 구두”를 소재로 사용한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입장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상법을 재구성하는데, 샤피로는 구두 그림의 제작자인 화가가 누구인지를, 하이데거는 이 구두의 소유자에게 관심을 둔다고 본다. 두 사람의 감상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구두그림의 귀속관계가 그림을 그린 화가에 있든지, 아니면 실제 구두를 신었던 한 노동자로 보든지 간에 그들은 구두의 주체를 발견해 내려는 노력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만큼은 동일한 감상법을 취한다고 보았다. 반면, 이 그림을 보는 데리다는, 이 두 감상법이 모두 적절치 않다고 본다. 왜냐면, 이 구두의 그림은 신고 있는 상태가 아닐 뿐 아니라, 그림은 이미 화가의 화실에서 떠나 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두의 주인은 화가도, 실제 신었을 법한 누군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구두의 주인는 부재할 뿐이다. 그러나 구두의 주인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구두는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는 폐쇄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주체의 부재를 통해 주장하려는 바는 대상을 특정 주체에 귀속시키는 것으로는 사물의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유령과 같이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실재는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유령론을 통해서 말하려는 바는 자기 동일적인 주체를 해체하려는 것이며, 자기 동일성이 현존의 근거로 왜곡되어온 형이상학전통을 차이와 반복, 흔적으로 치환하려는 것에 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말해왔던 전통을 해체하고, 역으로 절대적인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윤리적 태도를 통해서만 존재에 대해 말하려는 철학의 시도는 가능해 진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환대의 윤리는 소수자, 약자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행동규범을 도덕적 감성에 기대어 호소하려는 것과 거리가 멀다. 유령론은 서양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해체작업이며 차이와 흔적을 통해서 출현하게 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경계없이 예측불가능하게 도래하게 되는 선물과 같은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며, 기존의 사고방식과 틀을 넘어서는 낯선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데리다는 묻는다. 유령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 유령을 축출할 것인가? 윤리적 주체로 설 것인지 말것인지는 그 물음에 달려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소쉬르는 언어가 ‘랑그’와 ‘빠롤’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설명한다. 랑그가 언어의 원리/체계라면 빠롤은 언어를 말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랑그는 빠롤을 통해 나타난다. 여기서, 그의 중요한 또다른 개념, 시니피앙(기표/기호)과 시니피에(기의/대상)가 있는데, 이 구분을 통해 소쉬르가 주장하려 한 것은,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의 차이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사물/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는 것. 소쉬르는 서구의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적 언어학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실체란 언어의 구조와 기표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구조적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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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6]


알튀세르와 이데올로기적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왜 알튀세르인가


      루이 알튀세르(1918-90)라는 이름이 맑스주의 논쟁의 한복판에서 한 때 큰 영향력을 끼쳤던 적이 있었다. 발리바르가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각주:1]에서 말한 것 처럼, 그는 맑스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테제를 프랑스철학사에 남긴 철학자이며, 맑스주의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에서 프랑스철학이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만든 공로자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에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혀진 듯 보이지만, 오늘에도 그의 철학적 유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맑스주의가 스탈린식 사회주의 실패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의 변화 안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방황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맑스주의를 관념론적으로 수용하려는 유혹으로부터 과감히 분리시키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은 학문적 완결성을 떠나 오늘날 맑스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모든 시도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굳이 열렬한 알튀세리앵이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에 맑스를 말하려면 알튀세르는 한번 쯤은 넘어야할 할 관문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관문을 통과시켜주는 열쇠와 같은 존재이다.

    이 글은 알튀세르가 이해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주체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의 전체 철학의 내용을 조망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구별시켜내기 위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으며, 이를 위해 정신분석학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알튀세르는 주체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지,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위한 철학’이라는 맑스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에 얼마만큼 충실하였는지를 평가해 보려고 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


    알튀세르의 철학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논의는 그의 두 권의 논문집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첫번째는 ‘맑스를 위하여Pour Marx (1965)’이고 두번째는 ‘자본론을 읽는다 Lire le Capital(1965)’이다. 이 두권의 논문집을 통해서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맑스주의 철학자로서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저술들은 무엇보다 책의 제목 자체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맑스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이유가있다. 제목 그대로, 그의 철학은 ‘맑스를 위한’ 동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맑스를 위한’ 그의 실천전략은 다시 ‘자본론을 읽자’는 제안으로 전개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가 겨냥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제일 먼저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들로부터 경계짓는 것이다. 스탈린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맑스주의에 대한 스탈린식의 교조적 적용에 대해 돌파구를 찾고 있던 때에, 맑스주의를 옹호하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손쉬운 반응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이었다.[각주:2] 이 휴머니즘적 해석은 맑스의 청년기 저작에 근거하는데, 특히 ‘경제철학수고(1844)’에서 재발견된 ‘소외’의 개념은 그간 무시되었거나 간과되었던 인간의 윤리적 심리적 차원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청년 맑스의 재발견은 그동안 스탈린의 교조주의를 통해서만 맑스주의의 저작을 해석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으로 경험되었다. 이 해방감은 다시 ‘자유주의’적이고 윤리적이며 휴머니즘적인 맑스주의를 진보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유, 소외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개념들로 맑스주의를 재해석하려는 흐름에 대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오염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대신에,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과학적 독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과학적 독해라는 것은, 맑스주의를 비판하거나 혹은 옹호하기 위해 맑스의 저작들을 이데올로기적 읽기방법으로 체계화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해석방식을 말한다. 말하자면, 맑스를 순수하게 읽어야 하지, 다른 의도를 숨겨둔채 읽지 말것을 주문하는 것이다.[각주:3] 알튀세르가 보기에,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은 청년 맑스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을 맑스 전체를 해석하는 틀로 오해한 나머지, 맑스 성숙기의 저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비판한다.[각주:4]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알튀세르가 내세운 ‘맑스를 위한’ 읽기 방법은 맑스주의 이론을 다른 이데올로기적 해석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이거나 휴머니스트적인 청년 맑스로 위장”[각주:5] 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해 반박하는 것을 과제로 보았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일차적으로 맑스 청년기 저술 안에 보여지는 휴머니즘적인 경향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를 위해서, 알튀세르는 이론적 형성의 특수한 차이를 드러내는 선별 지점을 지시하기위해 자끄 마르땡에게서 ‘문제틀’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과학적 학문의 토대에 대한 이론적 문제들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가스통 바슐라르로부터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먼저, ‘문제틀’이라는 것은, 개별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들을 주재하는 질문들의 체계”[각주:6]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과의 연관성/일관성을 벗어나서 답해지지 않고, 반드시 질문의 체계안에서 대답되어진다는 말이다. 모든 이론과 철학은 그 자체가 일관성 있는 연속적 개념들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문제와 답은 항상 서로 연관된 틀안에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우물가서 숭늉을 찾을 수 없는 것 처럼, 헤겔식의 관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맑스적인 유물론적 대답에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질문은 이미 대답이 발견될 범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틀’이라는 개념은 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의 차이를 분별해 줄 수 있는 방법이론으로 차용되었다. 이 개념을 통해 알튀세르는 청년맑스의 ‘경-철수고’는 포이에르바하의 문제틀이지 맑스적 문제틀이 될 수 없다고 분석하며,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를 분시시켜놓는다.

    ‘인식론적 단절’[각주:7]이라는 개념 역시 사적유물론의 주창자로서 성숙한 맑스를 이데올로기적 관념에서 발견되는 맑스를 분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말은 앞선 ‘문제틀’이라는말과 연관되어 있는데, 과학 이전의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에서 과학적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로의 급격한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 전환은 서로 유착관계에서 일어나는 순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환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서로 모순되고 단절되며 불연속적인 대립속에서 벌어지는 적대적인 전환을 말한다. 알튀세르는 청년 맑스와 성숙기의 맑스안에서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났다고 보는데, 그 기점은 ‘독일이데올로기’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독일이데올로기’[각주:8]에서 비로소 맑스가 목적론적 사고방식, 실증주의적 역사관, 휴머니즘적인 태도와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방식과 완전히 결별하고 그의 독창적인 ‘사적유물론’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으며, ‘자본론’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진보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았다.

    이제, ‘문제틀’과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들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다른 이데올로기적 체계(틀)과 분리시키고, 서구 부즈조아적인 휴머니즘으로부터 성숙한 맑스를 되돌려 놓기위한 알튀세르의 기획은 보다 구체적인 문제로 진입한다. 알튀세르는 이 목적을 보다 현실적으로 가시화시키기 위해 맑스의 초기 저작들 안에서 나타난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알튀세르의 대답은 이데올로기론에서 다뤄진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문제삼는 글은 그의 논문집 ‘레닌과 철학(1969)’에 실린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논문에서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는 이미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모순과 중층결정’이라는 글에서 먼저 다뤄진바 있다. ‘모순의 중층결정론’이 함의하는 바는, 다양하고 상이한 여러 층위들로 구성되는 사회와 역사는 경제라는 ‘기본모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로 구성되는 복합적 총체이고, 각 실천들은 제 각각 특수한 자질들을 갖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실천이 본질적 영역이 될 수 없고, 모순 또한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층위와 심급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구성체는 서로 보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며 모순은 원리에 있어서 중층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각주:9] 맑스주의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가 결정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수용되었다면, 알튀세르에게서, 상부와 하부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자리를 맞바꿈 하는 중층관계라는 변칙적인 관계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하부토대를 이루는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모순이 가지는 상부구조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구조를 비판하면서, 하부구조에 의해 파악될 수밖에 없는 상부구조라고 믿어왔던 요소들은 동시에 하부구조 안에서 ‘중층결정’[각주:10]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아 왔고 과학적 사고와 대립시켜왔던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속에서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는 실제적인 물리적 성질에 주목한다. 알튀세르는, 대체로 오류나 환상, 왜곡된 의식, 관념적인 현상이라는 받아들여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는 사실 개인들의 실제적 존재 조건들에 대한 그들의 ‘상상적인 관계’를 나타내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실제적 관계의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적 관계처럼 보여지는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론, 이론적 실천 그리고 이론적 형성(1966)’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인 실제에 관해서 ‘환영illusion’’을 구성함과 동시에, 역사적 실제를 ‘암시’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는 기독교에서 발견된다. 크리스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표상한다. 오늘 한국의 현실을 빗대자면, 열혈 친박-수구세력은 자신들을 국가와의 관계에서, 좌파를 청산하는 국가의 수호자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관계는 상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상상적인 관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허위나 왜곡이 아닌 실제로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물적존재’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에서 맴도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과 관계맺는 물리적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는 인간 욕망의 투영일 뿐이라면서 종교를 실체없는 허상으로 간주하였지만, 알튀세르식으로 보면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토대에 구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물적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적인 관계에서 개인이 부여받은 의식은 단순히 관계를 인지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이 관계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실천을 수반한다. 마치, 신의 자녀로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 자는 그에 걸맞는 종교의식, 종교적 규율과 의무를 하게 되는 것 처럼, 또는 친박-수구 단체 회원이 좌파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상상적인 관계속에 지나치게 몰입하였을 때에,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 집단행동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인간 개인들은 상상적인 관계와 실천의 상호작용 안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로 나타난다.


이데올로기의 호명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는 부르조아 국가에서 사회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국가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가 유지 재생산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두가지 수단이 동원된다고 본다. 하나는 정부, 행정, 군대, 경찰, 감옥과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 교육, 가족, 언론, 문화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전자가 폭력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고 강화하는 근본적 수단이며, 이데올로기 장치안에서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지배력을 장악당하는 주체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하는 관련성을 정리하자면, 개별자가 가지는 믿음, 신념의 존재는 관념에 머물지 않고 물화된 형태로 주어지는데, 왜냐면 개인의 주어진 관념은 물질적 실천들 속에 삽입되어 있는 물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물질적 실천은 물질적 의식에 지배되며, 그 물질적 의식은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 정의되고, 그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로부터 주체 관념은 파생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와 이데올로기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있다.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유사하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개별자들에 선행한다. 신념이 있기에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주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있음으로 해서 개별자들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결과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 개념이 ‘호명interpellate’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마지막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출/호명 한다’고 규정하는데, 이 말로서 알튀세르는 인간의 주체성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데올로기의 기본 기능은 개인들을 생산관계에 적합한 주체를 생산해 내는 것인데, 이는 호명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이봐 거기 당신’이라는 작은 말 하나만으로도 상상될 수 있는 매우 세밀한 상상적 관계의 조작을 통해 모든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거나 변형시키는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호명과 관련된 슬로보니아의 농담을 적절한 예로 든다. 극장에 늦게 들어온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연극을 방해한 죄책감에 싸여 있을 때에, 때 마침 배우가 내 뱉은 ‘누가 내 침묵을 방해하는가?’라는 대사를 부자 자신을 향한 말로 오인하였고, 결국 그는 극장 안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배우의 호명이 부자관객으로 하여금 큰 소리로 대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배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되는 사건은 이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호명은 상상적 관계를 불러일으키고 행동을 유발하는 데 이 모든 과정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오인’된 호출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튀세르에게서 ‘호명’이 이데올로기와 주체간의 관계에 대한 열쇠로 되는 이유는 개인을 주체로 되게하는 과정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환영/오인과 자기 암시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환영으로 존재하는 상상적 관계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호명한 것으로 오인했다면, 그것은 개별자를 주체로 불러내는 것이며, 복종의 강요와 억압이 아닌 순주히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과 행동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는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국가장치에 의해 호출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파악하는 알튀세르의 입장이 드러난다. ‘인간’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구성물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구성하기 때문에 주체는 이데올로기 없이 불가능하며, 이데올로기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없다고 본다. 사회적 재생산은 자신을 인식하는 자발적인 주체에 의해 수행되기보다 인간의 배후에 있는 장치구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선택한 목적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는 없으며, 모순의 중증결정 구조에서 경제적인 최종심급으로 규정되는 행위들과 효과만이 나타날 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서 어떤 본질적인 행위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해 자본론을 다시 읽기를 제안했던 의도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소외된 주체의 복권과정으로 읽어내는 주체 중심적인 독법을 신화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대신 ‘주체없는 과정’이라는 역사 개념을 등장시킨다. 역사는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 “역사속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은 그것이 절대자이든 인간이든 그 어떤 주체의 활동도 아니며, 역사의 기원은 언제나 이미 역사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따라서 역사에는 철학적 기원도 철학적 주체도 없다”[각주:11]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보는 알튀세르의 입장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신화일 뿐이다. 때문에 맑스주의는 인간의 주체로부터 출발할 수없다. 때문에, 계급투쟁도 역시 자유로운 인간주체들의 인식과 실천행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의 생산관계를 구성하는 관계들 차이들, 대립들로 이루어진 체계와 구조의 반영물일 뿐이다. 이렇게 알튀세르는 맑스에게서 인간의 제거하고 과학만을 남겨놓았다.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맑스의 관점에서 모든 계급적 모순과 대립, 그리고 계급투쟁은 경제적인 동기에서 발생하여 경제적인 목적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맑스주의 경제적 환원주의는 정치적 변혁과 계급투쟁의 개념들을 지극히 좁은 영역으로 제한하며 정치적 주체성이 발현되는 공간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고 만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당면한 한계에 스탈린적인 교조주의로 응답해온 맑스주의 진영에 대해 알튀세르는 새로운 맑스주의 독법을 제시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하는 것은, 모순은 경제적 토대에서 결정되기보다 상부구조의 존재와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계급적 모순은 경제라는 단선적인 층위로만 제기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국가장치들이라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계기를 통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맑스적인 계급투쟁의 협소한 개념은 알튀세르에 의해 넓은 외연으로 확장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계급적 모순의 문제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구조의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해석 또한 분리시켜내어, 맑스주의를 오늘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사고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으로 드러난 이데올로기의 실체와 그로 인해 구성되는 인간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을 넘어 회의감마저 들게 만든다. 인간은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라는 점은 인간의 주체에 덧붙여진 환상과 오인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은 모순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전망해 주기보다 인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승리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만든다. 마치 푸코가 지식과 담론이 구성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으나, ‘그러면 인간의 해방의 길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는 정작 궁색해지는 것처럼, 알튀세르 역시 이 점으로부터 인간주체에 대한 회의주의적 물음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또다시 문제로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조차도 인간주체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어하는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진정한 변혁은 현상을 현상대로 직시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러한 물음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알튀세르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던 중 아내를 살해한 비극적인 인생의 결말을 맞이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그가 평생을 붙들고 온 철학자로서의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삶을 정리하며 자신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 맑스와 프로이트를 결코 완독하지 못했고 따라서 둘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기꾼이라고 털어놓는다. 그가 맑스와 프로이트를 완독하지 못했다는 말이 그들의 책을 섭렵하지 못했다는 뜻은 물론 아닐 것이다. ‘맑스를 위하여, 맑스를 다시 읽기’를 ‘해석이 아닌 변혁을 위한’ 철학자로서의 절대 사명으로 여겼던 그에게도 ‘맑스적인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진 풀지 못한 숙제였다는 자기 고백이 아니었을까.



ⓒ 웹진 <제3시대>

  1. 에티엔 발리바르, 루이알튀세르 1918~1990 (민맥신서, 1991), 33. [본문으로]
  2. 가장 잘 알려진 휴머니즘적 맑스 해석으로서, 가톨릭 철학자 Jean Yves Calves와 Pierre Bigo, 알튀세르의 옛스승인 Jean lacroix, 실존주의자 Jean Paul Sartre, 현상학자 maurice Merleau-Ponty와 같은 철학자들은 맑스의 철학이 본질상 인간 삶의 질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철학으로 포함시켰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유체계로 규정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런 종류의 휴머니즘은 도리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간교한 계략이며, 이는 맑스주의와 관련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루크 페레터,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앨피, 2006), 55. 참조. [본문으로]
  3.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다시 ‘자본론을 읽자’고 제안한다. 맑스를 그 어떤 이데올로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접어두고 순수의 자리에서 다시 맑스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불어판 서문에서 그의 학문적 지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반쯤은 방향 감각을 잃은 상태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했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과거로부터 오직 우리의 현재를 밝혀주고 우리의 미래를 비추어줄 그 무엇인가를 찾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글을 쓰고있다.” [본문으로]
  4.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우리는 맑스의 청년기 저작들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불꽃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불타는 정열을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흥에 겨워 맑스의 성숙기 저술들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맑스를 위하여, 24) 여기서 맑스의 청년기 저작은 ‘유대인의 문제’, ‘경제 철학 수고’, ‘신성가족’ 등을 말하며, 정확히는 ‘독일이데올로기(1845-46)’ 이전의 맑스철학과 저술들을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청년기와 성숙기의 분기점을 ‘독일이데올로기’로 구분한다. [본문으로]
  5. 맑스를 위하여, 서문 [본문으로]
  6. 맑스를 위하여, 67. [본문으로]
  7. 이 개념은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의 역사는 일련의 지속적 단절을 통해서 진보하는데, 이 단절을 통해 기존 과학은 폐기되고 새로운 이론 체계가 그것을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콩트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유사한듯 보이지만, 전혀 반대되는 개념이다. 콩트에게 역사는 진보의 과정으로서 연속성을 가지지만, 바슐라르에게는 역사는 불연속성이라는 단절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의 전환 Paradigm shift’과 같은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본문으로]
  8. ‘독일이데올로기(1845-46)’가 ‘인식론적 단절’의 전환점이 되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이데올로기’를 집필하는 당시까지만 해도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많은 집단과 경향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는 맑스주의의 당면 과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맑스주의를 자유주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와 쁘디 부르주아 사회주의와 대비시키는 것임을 함축한다. 한편으로, 과학적 공산주의만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현실적인 길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지는 영도이념으로 확신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문으로]
  9. 맑스를 위하여, 116. [본문으로]
  10. 알튀세르는 ‘중층결정 Surdetermination’이라는 용어를 다른 영역에서 빌어온 것이라고만 말하지만, 사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알튀세르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헤겔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담고있는데,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들과 절대지의 도래에서 경험되는 모순들은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본문으로]
  11.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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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5]


알랭 바디우와 민중사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근대철학을 넘어서려는 탈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대체로 ‘동일성과 차이’, ‘주체와 타자’, ‘진리와 상황’의 양자 대립적인 개념들 안에서 제기되어 왔다. 탈근대의 철학자들은 두 개념들에서 후자를 선택함으로서 근대철학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즉, 동일성의 철학이 아닌 차이의 철학을, 일자로서의 주체의 철학이 아닌 타자의 철학을, 고정불변의 진리의 추구가 아닌 상대적인 상황을 철학의 소재로 전환하는데에서 근대철학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근대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인류진보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앞서 살펴본 철학자들을 간단히 되짚어 보자면, 푸코는 주체를 지식과 권력의 작용의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고, 라캉은 주체를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욕망의 문제로 환원하였고, 들뢰즈는 경험을 인식하는 초월적 주체를 부정하는 대신 경험에서 발생하는 차이의 반복 자체를 존재의 힘으로 규정하였다. 플라톤과 일자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들의 비판들은 분명히 다른 서술방식을 가지지만, 이성의 주체에 대한 확신이 전체주의적 세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주체와 진리와 같은 근대적 개념들에 유보적이 거나 과감한 포기를 선호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즉, 우리가 마주하는 주체란 왜곡된 존재이며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비판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근대철학이 주장해온 주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은 전통 형이상학의 획일성과 전체성의 폐해를 들춰내고 그러부터 탈피하는 데는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폐기된 주체가 또다시 변형된 왜곡된 주체, 지배자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반드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데 있다.   

    이 점에서,알랭 바디우는 지금까지 살펴본 철학자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바디우는 근대철학의 주체가 극복되어야 한다는데 동의 하지만, 폐기하지는 않으며, 탈근대적 주체를 지향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다. 반플라톤 정서가 지배적인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 진영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바디우의 행보는 분명히 이례적이다.물론, 바디우가 근대적사유에 근거를 둔 주체나 초월적 범주로서 진리의 개념으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주체와 진리에 대한 맹신이 초래하는 결과와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이점에서 그는 포스트모던을 지향하는 철학자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그의 존재에 대한 논거를 근대적 성찰의 출발이라고 불리는 데카르트에서부터 전개하기를 거리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반플라톤주의 정서를 거스르고 오히려 플라톤의 재해석으로부터 존재론을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바디우는 합리주의적인 모더니즘을 발판으로 삼고 있는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러면, 왜 바디우는 모두가 폐기시키기에 여념없었던 진리와 주체의 개념들을 다시 주워담는가? 모두가 해체, 다양성, 차이, 타자라는 화두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보성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마당에, 그는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받는 낡은 개념들에 미련을 두는가?


바디우가 주체와 진리를 다시 꺼내든 이유


    바디우가 주체와 진리를 철학이 다뤄야할 주제로 꺼내든 이유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그의 대표작인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이 어떤 상황에서 저술되었는지 볼 필요가 있다. 물론, The Concept of Model(1969)과 Theory of Subject(1982)는 ‘한 시대를 닫고 다음 새 세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각주:1] 바디우의 초기 저작들이다. 특히 ‘주체의 이론’은 ‘존재와 사건’의 예고편이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집합이론에 입각한 존재론, 사건과 개입, 일반 집합, 그리고 바디우의 네가지 ‘조건들’ 에대한 예시들, 즉 ‘시’, ‘정신분석’, ‘수학’ 그리고 ‘혁명’에 관한 유사한 주제들이 등장한다.[각주:2] 그렇다면, ‘존재와 사건’은 초기 저작들의 재판일 뿐인가?그렇지 않다면, ‘존재와 사건’은 ‘주체의 이론’이 저술된 초기 바디우와 무엇이 다르고, 어떤 점이 추가되었다는 것일까? 두 저작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바디우의 주체에 대한 철학적인 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존재와 사건’은 앞선 저서들에 무언가가 추가되고 업그레이드 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무언가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재와 사건’을 기준으로 하여 바디우는 더 이상 역사와 정치를 분석하기 위해 맑스주의의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사적유물론,당과 프롤레타리아, 혹은 역사변혁의 변증법적 과정과 같은 맑스주의적인 용어와 거리를 둔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존재와 사건’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바디우는 맑스주의의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의 상황에 대해 주목하였다.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68년 프랑스학생운동 후 의회민주주의의 후퇴의 상황들 가운데서, 맑스주의를 비롯한 혁명을 위한 거대담론은 해체되었고 철학에서 진리의 문제는 자리를 잃어갔던 것이다. 철학이 미시담론의 소소한 승리안에서 자족해야 했던 현실을 바디우는 위기로 파악했다. 맑스주의자로서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바디우의 지적인 반발은 맑스주의적 혁명 프로젝트를 위한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그 시도로서 철학에서 밀려난 진리와 주체의 문제를 다시 공론화시키고 제기히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존재와 사건’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철학의 해체와 파편화에 맞서기 위한 바디우의 지적 투쟁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존재와 사건’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근본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진리와 그것의 가능성으로서 사건, 그리고 사건의 담지자로서 주체에 대해 서술해 나간다. 이제, 바디우의 ‘존재-진리-사건-주체’로 이어지는 도식을 따라 그의 주체가 오늘 인간의 해방의 요구에 어떤 대답을 제시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자는 없다


    주체의 문제는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바디우 역시 오래된 질문이지만 비켜갈 수 없는 물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존재하는 것은 일자(the one)인가, 아니면 다수(the multiple)인가?’에 대해 먼저 답해야 했다. 그리고, 바디우는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일자성은 항상 하나로 카운트하기(count-as one)의 결과일 뿐”[각주:3]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일자는 비록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로 세기로 한 것’의 결과이지, 실제로 존재가 일자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는 존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로 인정하려는 어떤 작용의 결과물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일자는 하나로 셈하기의 결과일뿐, 존재하는 것은 다수이다’라는 사실은 집합의 기초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알파벳 a, b, c를 원소로 하는 집합 E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E ={a, b, c} 라고 표시된다. 왼쪽 항의 E는 오른쪽 항의 세개를 원소로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오른쪽 항의 ‘다수’는 왼쪽의 E집합이라는 ‘하나’로 현시(presentation)된 것이다. ‘현시된’ 집합 E는 a,b,c가 ‘현시되는’ 것으로 만든다. 만약, 집합 E로 카운트되어 지지 않는다면 a,b,c는 불안한 형태로 남게 될 것이고, 존재가 드러나지않을 위험에 빠진다. 그래서 ‘하나로 카운트 하기’는 ‘있는 것들’을 ‘있게 하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현시된 것’을 ‘현시되는 것’인 냥 동일시하는 것이다. 집합E를 통해 a,b,c라는 원소들이 드러나긴 했지만, 결국 현시되는 것은 E가 아니라 각 각의 a,b,c라는 원소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왼쪽항의 ‘일자’가 아니라 오른쪽항의 ‘다수’이다 

    이렇게, ‘현시된 것’과 ‘현시되는 것’ 사이의 구별은 하이데거가 존재(being)와 현존재(existence)를 구별하는 형식논리와 같다. 비록 바디우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존재의 차이에 대한 사유방식을 수용하지만, 현존재를 존재론적 사유의 중심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하이데거가 존재와 현존재를 정확하게 구별하고 현존재를 사유의 중심대상으로 부상시켰듯이, 바디우는 다수를 ‘일관적인 다수’와 ‘비일관적인 다수’로 다시 구별시켜야 한다는 점을 제기한다는 논리구조는 유사하다. 바디우가 다수면 다수지 ‘일관적인 다수’와 ‘비일관적인 다수’로 구별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존재론은 ‘존재로서 존재(being qua being)’에 관한 이론이라는 정의에 충실해야 하는데, 일정한 상황의 구조적인 작용을 통해 드러난 ‘일관된(consistent)’ 다수는 이미 ‘존재로서 존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가 아닌게 된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존재’는 하나의 구조나 상황안에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음’이 긍정되기 위해서는 그 다수가 어떠한 구조적인 상황 속에 속하지 않았음을 밝혀져야 하는데, 이는 ‘다수’가 상황에 귀속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해야하는 조건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디우가 제시하는 상황의 구조안에서 현시되지 않는 다수를 ‘비일관적인 다수(inconsistent multiple) 혹은, 순수다수(pure multiple)’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다수’라고 말할 때, 그 다수는 ‘비일관적인 다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일관적인 다수는 어떤 형태로 확인되는가? 다수가 상황안에서 구조의 작용을 받지 않은 채 현시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무(nothing)’ 또는 ‘공백(void)’의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황에서 발생되는 구조의 작용으로부터 예외의 상태로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없음’, ‘공백’의 형태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일관적 다수성의 예외적인 조건으로 인해, 바디우는 “존재의 적당한 이름을 ‘공백void’”이라고 부른다.[각주:4] 마침내, ‘존재하는 것은 공백이다!’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바디우의 존재론은 일자로 셈하여진 존재는 물론, 일자에 의해 포섭된 일관적인 형태를 띠는 다수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존재론이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론과학이라면, 존재의 대상은 오로지 ‘비일관적인 다수’가 되어야 하고, 공백은 존재의 자리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부딪힌다. 비일관적인 다수성은 공백과 무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은 어떻게 증명가능한 것인가?술어적인 표현과 설명을 거치는 순간 ‘비일관성’은 ‘일관성’을 가지게 되며, 일자의 규정성안으로 또다시 갇히게 되고 만다. 언어의구조를 통과하지 않고서 존재를 설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디우가 수학을 존재의 논리과학으로 대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디우는 존재의 규명에서 인위적인 규정과 간섭이 순수한 논리과정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를 위해 집합이론을 끌어온다. ‘존재와 사건’의 56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상당부분을 수학의 집합이론을 세세하게 증명하는데 할애하는 데에서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할 수있다. 이제, 바디우는공집합의 이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존재론이 진리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증명해 나간다. 


러셀의 역설과 공집합


    집합이론은 칸토어(Georg Cantor, 1845)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합론은 다음의 직관적인 집합이론(intuitive set theory)에서 출발한다.


    “x에 의존하는 어떤 명제 p(x)에 대해 p(x)가 참이 되게 하는 x들의 집합은 존재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뻔한 명제이다. 어떤 조건을 달아도 그 조건에 해당하는 집합은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의 집합론은 이 명제를 기반으로 확고하게 세워졌다. 적어도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이 이의를 제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러셀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였고, 무신론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저술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로 잘 알려졌다.) 러셀은 오류가 없다고 믿었던 집합론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를 러셀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대상들의 집합을 R이라고 할 때, R이 R에 포함된다면 R의 정의에 위배되므로 R은 R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R이 R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R의 정의에 의해 R은 R에 포함된다.”[각주:5]

    이 러셀의 역설이 문제가되는 것은, 칸토어의 집합이론에 따른다면, X의 집합에는 조건문이 제시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대상들의 집합 R을 만족시키는 원소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러셀의 역설은 예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예외가 존재하는 한 칸토어의 집합이론은 성립될 수 없는 수학체계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러셀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수학자들이 연구하였고, 마침내 새로운 수학의 집합의 공리체계를 아홉가지로 제시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제일 첫번째의 공리는 ‘공집합이 존재한다( )’이다. 공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집합이 존재한다(Axiom of exsistence)’는 기본적인 공리로부터,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가장 중요한 집합론의 공식이 되는 “공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 집합이다”[각주:6]가 파생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공집합의 존재와 그 공집합이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라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  

    공집합이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는 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집합을 구성할 수 있는 원소가 없는데, 그 없는 것을 집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어떤 집합이든지 그 안에 있는 원소를 확인하면 공집합은 셈해질 수 없으나, 셈할 수 없는 공집합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서, X={a, b, c}라는집합이 있다고 할 때, X라는 주머니 안에는, a, b, c도 들어있지만, ‘없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다. 이 수학적 논리를 바디우의 존재론으로 대입하면, 집합은 ‘상황’이다. 모든 상황에는 현시되는 다수성의 이름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아래에서 안정되게 현시되는 다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다수는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로 남게 된다. 반면, 존재하는 것은 하나로 셈하기를 거부함으로서 구조화 작용안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공집합 처럼 모든 상황(집합)에 부분으로서 현시불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공백’인 것이다. 따라서, 구조화된 상황에서 ‘있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없음’이며, ‘없음’이라고 간주되어 것은 오히려 ‘있음’으로 긍정되는 것이다. 언어에 의해 설명되지 않고 구조에 의해서도 포섭되지 않는 현시의 영역 외부에 ‘없음(nothing)’ 혹은 ‘공백(void)’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비일관적인 다수성’이 존재론의 출발점이 된다.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공백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백은 일자에 의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설명되고 파악될 수 없으며, 경험에 의해 감각되거나 인지될 수도 없는 돌발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때문에, 공백은 일관적인 다수의 상황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요소가 된다. 보이지는 않으나 반드시 존재의 사실은 부정할 없기 때문에, 공백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황의 안정성과 통일성의 구조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결국, 일자의 형이상학에 의해 구조화된 획일적인 세계는 바로 ‘공백’의 존재를 통해 반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진리, 사건 그리고 주체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공백 혹은 순수다수가 존재규명의 원리로 되는 것은 차이,다양성, 혹은 타자와 같은 테마들을 탈근대의 화두로 제시해왔던 데리다, 레비나스,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적잖은 도전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들뢰즈에게 존재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차이가 없다면 존재도 없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레비나스 역시 존재론과 윤리학의 출발은 타자이다. 주체는 자기의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이다. 데리다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런데, 근대적 주체를 일자의 영역이 아닌 차이의 영역, 즉 다수의 영역에서 존재의 근거를 발견하려 했던 일련의 시도들에 대해, 바디우는 상황의 구조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다수는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는 주체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차이, 상대주의, 다양성, 타자와 같은 테마들은 탈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적 주체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역사적 문화적 상대주의가 확대되는 것이 결코 오늘의 상황안에서 자유가확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시장의 끝없은 욕망의 증상일 뿐이다”[각주:7]라고 지적한바 있다. 타자는 자기 동일적인 주체에 의해 상대화된 또다른 형태의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탈근대를 주창하는 이들이 근대주체를 비판하는 것이나 차이와 타자의 문제를 철학의 화두로 삼는 것이나 사실은 동일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존재는 일자도 다수도 아닌 공백에 있다는 말은 ‘일관된 다수’안에서는 존재에 대한 진리가 발현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구조에 의해 장악된 다수 안에서 벌어지는 차이와 다양성은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문제와 무관한 것이다. 상대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에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라는 이름으로 존재의 보편성이 간과되고 부정되는 현상을 문제삼는 것이다. ‘일자의 진리’는 부정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존재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차이와 다양성으로 부정하지는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탈근대 혹은 해체의 이름으로 부정되었던 보편적인 진리는 바디우에 의해 다시 복원된다.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는 공백이라는 자리를 통해 출현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면, 보편적인 진리는 공백이라는 자리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가? 진리가 드러나는 자리가 공백이라면, 그 방식은 사건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진리가 사건의 형식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상황의 구조에 속하지 않고 언어와 사유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상황의 외부로부터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에서 바디우가 헬라의 법과 유대의 법 모두에게 귀속되지 않는 새로운 예외적인 법의 형식을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보았던 이유는 이것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상황은 구조와 법에 의해 지배받는 어떠한 것도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직 돌발적이고 예측불가능하며 우연적인 계기로만 주어져야 하기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면서 보편진리가 도래할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사건’이다. 따라서 공백은 진리가 나타나는 자리이며 사건은 진리가 드러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은 진리를 드러내는 필요조건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진리가 항상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그 자체로 진리와 관계하고 개입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 사건이 발생하는 것만으로는 사건은 스스로 상황안에서 관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결정권자가 되지 못한다. 사건이 진리와 관계 맺기위해서는 사건은 사건이 상황에 관계할 수있어야 하고 모든 안정적인 구조를 초과하여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방식을 지속시켜야 한다. 이것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y)’이라고 하는데, 사건에 대한 충실성은 상황에 속하지만 상황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공백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대하는 주체의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바디우에게 주체는 이처럼 ‘상황-공백-진리-사건-충실성’과 치밀하게 얽혀있고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지,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잠재된 진리의 가치에 대해 충실하려는 결단과 실천이 없다면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사건에 충실하려는 주체만이 진리를 드러낸다. 이렇게 주체는 진리와 사건과 유기적으로 관계하면서 하나로 통합된 안정적인 질서를 지향하려는 지배질서에 균열을 내고 보편적인 대안적 질서를 제시하는 힘으로 출현한다.


사건과 민중


    바디우는 진리, 주체와 같은 메타담론들이 철학의 주제안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한편,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거대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은밀한 방식으로 억압적인 착취적인 경제를 가속화시키는 현실로부터 그의 진리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 해방의 길은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의 사건에 대한 충실성과 실천안에서 발견됨을 보여주고자 했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가 그리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한국의 역사안에서 변화발전의 주체로 호명되었던 ‘민중’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한때 민중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체계화시키고 규정함으로서 사회학적인 논리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할 때에도 민중은 그렇게 쉽게 규정당하지 않았다. 또, 시대의 변화안에서 민중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었으며 퇴색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등한시 될 때에도 민중은 그렇게 쉽게 역사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민중을 바디우처럼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해명해 낸 적은 없었지만, 민중은 쉽게 정의될 수 없고 정의하려고 시도한다면 민중은 민중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분별해 냈다. 누가 민중이고 누가 민중이 아닌게 따로 있는게 아니라 주어진 사건이 자신과 어떻게 관계인지를 스스로 결단함으로서 민중의 실체는 드러나게 되고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혹독한 역사를 통해 통찰할 수 있었다.

    4.19, 5.18. 6월항쟁을 거쳐서 지금 탄핵정국의 뜨거운 촛불의 항쟁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혹자는 이전의 미완의 혁명을 돌아보며 오늘의 항쟁 역시 실패의 역사가 재현될 수 있을 가능성을 논하고 있을 지 모른다. 어찌보면, 군사독재 정권보다 훨씬 더 후진 상황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낄 때, 민중의 저항, 변혁과 같은 말들이 무색하게 들려지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바디우의 주체철학은 변혁의 변곡점마다 실패를 거듭해온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한가지 중요한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다. 바디우에게, 보편적인 진리사건이라는 것은 정의가 승리하고 불의가 패배하는 객관적인 결과로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사건이 드러나는 것은 사건에 충실성을 가지고 달려드는 주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이다. 질서의 구체적인 변화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 즉 주체화의 과정이 한 사회안에서 진실성있게 발현되고 신뢰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공산주의 혁명이든, 민주주의 혁명이든, 또는 기독교적인 진리의 변화이든 결국 잠재적인 진리사건을 실재화시키는 힘은 주체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건의 의미는 혁명이 성공했는가의 여부에 있지 않다. 사건을 통해 주체가 조직되었는가,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경험이 전개될 앞으로의 사건에 대한 높은 수준의 결단과 실천을 제시해 주었는가, 공고하게 보이는 체제에 맞서 보이지 않는 공백의 힘으로서 주체를 신뢰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확실한 태도와 입장을 확립하는 것이 변혁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임을 바디우는 말하고 있으며, 후퇴하는 듯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져야할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Oliver Feltham, Alain Badiou: Live Theory (Bloomsbury Academic, 2008), 32. [본문으로]
  2. Theroy of Subject, 143. [본문으로]
  3. Being and Event, 24. [본문으로]
  4. Ibid., 55. [본문으로]
  5. 러셀의 역설은 유명한 ‘이발사의 역설’로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에 의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야 하고, 역으로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서는 안 된다. [본문으로]
  6. ‘공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다’에 대한 증명은, 간단히 말하면 ‘공집합의 원소를 x라고 할 때, x는 어떤 집합 A의 부분집합이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이후의 모든 명제는 어떤 경우에도 참이된다. 공집합의 원소 x는 이미 잘못된 조건이기 때문에, 조건에 대해 어떤 명제를 붙여도 거짓일 수 없게 된다. [본문으로]
  7. Alain Badiou, Ethics: An Essay on the Understanding of Evil (Verso; Underlining edition, 2001), 2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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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4]


들뢰즈의 주체의 재구성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들뢰즈의 ‘다시쓰는 서양철학사’ 


      서구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뒤흔들기 위한 탈근대주의 철학자들의 프로젝트는 다양한 진영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때로는 푸코와 같이 지식과 담론의 계보학을 통해서, 때로는 무의식과 욕망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서구 존재론적 관념주의 철학에 대한 도전은 이어졌고, 그 결과 서구의 장구한 역사 안에서 존재론적인 형이상학을 떠받치던 개념의 파편들은 해체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해된 파편들의 흔적들을 바라보는 동안 얼마동안의 승리감에 도취될 여유는 주어졌지만, 이제는 잔해물 더미위에 올라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결국 남겨진 문제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의해 구조된 세계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 들뢰즈는 해체론에 의해 파괴된 전통적 개념들의 장치들을 재구성하기 위한 기획을 매우 종합적으로, 또한 정교하게 구현한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이 곧 탈형이상학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발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오히려 고전적 형이상학으로의 회귀와 재해석으로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전통의 그늘 아래에서 조명되지 못했던 비주류에 속하는 형이상학의 전통을 발굴해 내는 데로 시선을 돌린다. 말하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서 주목받지 못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를,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대신 둔스 스코투스를, 데카르트 대신 스피노자를, 칸트와 헤겔 대신 니체와 베르그송을, 무너진 형이상학적 토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축하기 위해, 시대의 전면에 재등장 시킨다. 이러한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을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초월적 경험론의 이름하에 그가 내세운 철학사의 재구성 전략은 매우 획기적이다. 그는 초월적 주체라는 형이상학적 건물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데에 힘을 소진하는 대신 초월적인 주체는 다름 아닌 경험이라는 내재성이었다고 선언한다. 물론, 지금까지 경험 역시 경험을 인식하게 하는 또 다른 주체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들뢰즈는 세계를 능동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같이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경험의 차이와 반복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경험을 관찰자나 주체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그 자체를 바로 초월적 원리로 간주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즉, 경험을 초월적 주체를 대신할 개념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초월적 경험론이 된다. 이렇게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기본 골격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존재론적 형이상학에서 배제된 전통들을 재구성하여. 니체로부터 시작되어 해체론에 이르기까지 탈/반플라톤적인 철학을 완성하고자 한 것이다.


차이와 반복

  

    그렇다면, 이 시리즈가 애초에 던졌던 물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들뢰즈에게서 탈플라톤적인 철학체계를 향한 전복적인 시도는 주체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었는가? 들뢰즈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시대 안에서 어떤 주체의 가능성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복잡한 그의 철학체계를 모조리 경유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기 보다는, 들뢰즈의 철학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인 ‘차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편이 수월하겠다.

    초월적 경험론으로 요약되는 들뢰즈의 사상의 전모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텍스트는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 1968)’이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들뢰즈가 겨냥하는 문제의식은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사유의 정점에 있는 ‘재현representation’의 개념이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차이와 반복이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통해, 재현의 방식으로 세계를 차등적으로 서열화시켜온 플라톤적 사유체계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구체화시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는 영원불변하고 자기 동일적인 최고의 존재이며 모든 것의 원형이 된다. 이데아는 존재하는 가시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준거점이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본으로서 이데아를 상정할 때에, 모든 자연과 사물을 이데아라는 원형의 모사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세계는 이데아의 재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재현된 세계는 또 다시 원형과의 유사성에 따라 고급과 저급으로 분류된다. 인간이 동물보다, 남자가 여자, 백인이 유색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식의 차별적인 가치평가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근거가 된 것이다. 결국 원본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의 해결은 따라서 간단하다. 원본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면, 애초부터 원본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면 재현으로 표상되는 세계의 질서도 동시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재현에 상응하는 대응개념으로서 ‘차이’를 제시한다. 차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세상은 원본에서 파생된 모사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곧 ‘차이’이다. 동일성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의 근거를 와해시키는 차이를 의미한다. 마치 실존철학에서 실존이 존재에 우선한다는 형식논리와 같다. 동일성이 차이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동일성에 우선하며 이것은 사실상 동일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차이’ 개념의 발견은 존재론적 철학의 사유구조를 역전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사물의 존재는 원본을 통해서만 확인되었지만, 차이로서 존재하는 사물은 그 사물자체 안에 있음의 잠재성이 내재하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 재현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내 사물은 ‘있다(현실)-없다(부정)’의 문제로 이분화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가 ‘드러났느냐(실재)-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냐(잠재)’의 문제로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차이로서 드러나는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의 힘을 생성하는 개체로 인정받는다. 시뮬라르크에 지나지 않은 사물의 세계는 이로서 차이가 생성하는 힘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차이의 생성원리를 무인도의 비유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무인도의 원인과 이유’에서 들뢰즈가 던지는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즉, “어떤 섬이 무인도가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그리고는 무인도에 우연히 표류하다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입도의 순간에 그 무인도가 유인도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비록 무인도에 최초로 사람이 발을 딛게 되었지만, 누구도 그 무인도를 유인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조차 무인도라는 관념 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인도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한 사람이 섬에 있다는 사실을 복수의 형태로 경험하는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섬은 여전히 무인도일 뿐이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사실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험되는 차이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타자와의 차이는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겨진 무인도라는 이름을 사실상 생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를 통한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한, 나는 지각의 주체 혹은 경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식의 초월적 주체는 자기의 스스로의 부정할 수 없는 인식의 주체를 발견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주장을 뒤집는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같은 마릴린 먼로이지만 다른 색상으로 채색되었다. 감상 포인트는 이 네 그림 중 어느 것이 진짜 먼로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것도 사실 먼로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네 초상은 먼로라는 인물의 원형이 빚어낸 시뮬라르크가 아니므로 부정되어야할 모조가 아니라, 시뮬라르크의 차이 그 자체가 먼로라는 캐릭터를 주조해 내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즉, 차이는 부정되어야하고 동일성으로 동화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차이와 차이의 반복은 그 자체가 존재를 생성하는 역능이며 힘의 의지로 인정된다.

    따라서, 생성하는 힘인 차이의 반복은 동일성의 조명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시뮬라르크의 재현과 전혀 다른 정치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플라톤 이래 동일성의 철학은 세계의 사물을 유사성으로 배열시켜 놓고 유사성들이 공통으로 지시하는 하나의 일의성만이 존재한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들뢰즈가 주목한 것은 영토 안에 배열된 사물들의 집합을 연결시켜 주는 코드화된 규칙성이다. 마치 푸코가 파놉티콘의 감옥이나 군대 학교 병원의 개별적 구조가 감시와 자기검열의 권력효과를 발생시키듯이 사물이 영토를 이룰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사물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힘이 발생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코드화라고 부르며, 보이지 않는 관계방식은 결국 억압의 구조를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관심하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영토성과 코드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느냐를 철학의 기본문제로 돌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때,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물의 차이에 대한 긍정이 존재의 초월성으로 인정된다면, 서구철학의 주류전통이 동일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구축해온 층화(stratification)된 세계의 경계는 무너지고 뒤섞이게 되고 만다. 그리고 층을 형성하여 일종의 아성과 같이 분리된 독자적 영토를 형성하는 것을 당위적으로 받아들여 온 세계관은 일시에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정된 배치에는 일정한 변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들뢰즈는 이것을 탈층화 또는 탈영토화라고 명명한다. 


들뢰즈의 주체는 어떻게 새로운가?


    재현을 부정하는 차이의 생성하는 힘에 근거한 들뢰즈의 사유는 동일성의 원리에서 발생하는 권력으로부터 탈주를 꾀하는 리좀(rhzome)적 주체, 혹은 노마딕(nomadic) 주체로 연결된다. 두 개념이 지시하는 바는 동일하다. 리좀은 뿌리는 땅에 있어야 하고 줄기는 뿌리로부터 땅위로 솟아 나와 있어야 한다는 식의 경직된 각 기관 사이의 획일적인 관계방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제약 없이 뒤섞이는 방식으로 사물 사이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재결합시키려는 사유방식이다. 리좀적 주체는 위계적인 지배와 피지배라는 현실의 영토화된 구조로부터 탈주하여 탈영토화하는 정치적 행동의 주체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파악하는 인간의 욕망이 플라톤과 그것과 대척점에 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인간의 욕망이란 이데아에 비추어 결핍된 것으로서 배제되어야할 부정적 대상이다. 헤겔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욕망은 자기의식의 절대정신이라는 목적을 위해 반드시 지양되어야하는 미성숙에 불과하다. 욕망은 결국 이성에 이해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서 다뤄져왔을 뿐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통제되어야 했던 욕망의 담론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시대 안에서 자본의 질서에 포획된 욕망을 욕망하게 하는 지배구조 아래에 놓이게 만들었다.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효과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종속된 것이다.   

    들뢰즈가 보는 욕망에 대한 플라톤에 대한 비판지점은 욕망은 플라톤식으로 결핍이 아니라 생산적인 욕망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욕망을 도리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보유한 원인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가라리와 함께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 들고나온 ‘생산하는 욕망’의 개념이다. 욕망은 영토화되고 코드화를 고착시키는 분절선들을 뚫고 나와 탈주하는 에너지의 원천이고 역량이다. 따라서 욕망은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직접적인 변혁의 분출시키는 모든 사회의 부분속에 편재되어 있는 힘이며 창조의 자유로운 힘으로 이해된다. 차이와 반복으로 귀결되는 리좀적 주체는 생산하는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들뢰즈는 사회 안에서 주체의 의미를 해명하는데 기여해 온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기능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다소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획기적인 대발견의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너무나 쉽사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고정된 관념 안에 가둬버렸다고 비판한다. 억압된 욕망으로부터 인간의 주체는 왜곡된 채 항상 다다를 수 없는 환상을 향해 길들여지는 존재로 묘사될 때 욕망하는 주체는 욕망을 통제하는 자본주의의 억압적 시스템을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라캉과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라캉에게서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이다. 주체는 결핍을 메우기 위한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 욕망과 주체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나눌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욕망하는 주체’가 아닌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욕망이란 사물들의 관계와 접속을 통한 생산적 활동안에서 이뤄지는 순수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공장의 기계가 어느 특정 부품이 상품을 찍어낼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계의 개별적 관계의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욕망의 주체’라는 이름은 특정 사물이나 개체에 특권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들뢰즈의 주체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성의 철학을 배제하고 현실세계를 동일자에 환원시켜 해석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거부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의 관계 안에 내재한 탈주본능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억압적 시스템은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들뢰즈의 ‘철학 다시쓰기’는 자본주의 시대 안에 어떠한 주체의 상을 남겨놓았을까? 그의 전략은 어떤 유의미한 돌파구를 열어주었는가? 이러한 물음으로 돌아갈 때,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영화 한편이 있는데, 다름 아닌 ‘아바타’이다. 부족한 지구자원을 채석하기 위해서 지구와 닮은 또 다른 행성 판도라를 식민지로 개척하려는 지구의 다국적 기업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족과의 싸움을 그리는 판타지 영화이다. 이미 유명한 영화이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을 듯 하다. 들뢰즈의 주체를 말하면서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이유은, 나비족이 지구의 다국적 기업의 총공세로 열세에 몰릴 때, 이 행성을 구원하는 주인공이 여타 영웅소재의 영화처럼 혜성처럼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다만, 아바타를 조종하는 제이크 설리는 나비족처럼 판도라 행성의 자연의 얽혀있는 그물망에 촉수를 통해 연결하여 교감을 이루는데 성공하고 그들과 일체가 되어 지구인의 폭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들뢰즈가 말하려는 리좀적이고 노마딕한 주체의 모습은 아마도 아바타가 행성의 모든 자연의 개체들과 촉수를 통해 교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단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자연의 모든 차이는 생성의 힘을 발휘된다. 마침내 자본주의의 욕망을 꺾어버리는 변혁의 주체는 어디에선가 메시아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존재의 힘을 믿고 획일화되기를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때로는 ‘동물이 되고’ 때로는 ‘식물이 되기’도 하는 자유롭고 탈주하는 변칙적 삶 안에서 해방은 도래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들뢰즈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가 재현으로 굳어져온 사물의 표상을 차이와 반복으로 대체하고, 개체 각각이 지닌 생성하는 힘에 주목하여 마침내 생산하는 욕망을 자본주의의 대항할 주체의 탈주본능으로 규명한 것은 대단한 그의 통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탈주가 항상 해방지향적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점을 들뢰즈도 간과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리좀적이고 노마딕한 주체의 유동성은 동시에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자유로운 탈영토화와 탈주는 광기의 위험과 죽음의 위험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탈주를 위한 재영토화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탈주선이라는 개념은 삶의 새로운 양식과 창조하는 전복적 흐름이다. 억압적 코드의 관성적인 운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클리나멘을 통한 새로운 창조라는 차원에서 탈주이며 탈영토화이다. 그러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탈주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혹여, 탈주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선험적 관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그의 ‘다시쓰는 철학사‘의 전략이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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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3]


라캉 : 주체의 파괴자인가, 해방자인가?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라캉을 읽는 두가지 시각 


      프로이트를 통해 시작된 정신분석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 뿐더러, 여전히 누군가에는 생소할 수도 있는 분야이다. 그래도 프로이트만큼이나 라캉이라는 이름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큼 잘 알려진 대중적인 인물이다.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었고, 대중적인 연설가와도 거리가 먼 “고집스런”[각주:1] 정신분석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름이 유명세를 탄 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라캉이 20세기의 주목받는 사상가로 떠오르는 데에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서 급진적인 정치담론을 꾀하였던 조력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바디우나 지젝과 같은 학자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라캉이 말하는 ‘욕망하는 주체’를 반자본주의를 향한 이론적 무기로 활용하는데 앞장 서왔다. 그리고 최대한 라캉을 좌파스럽게 채색하는 작업이 완성에 다다를 즈음에 라캉은 체제 순응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저항의 주체를 키워내는 배후 정도로 대중들에게 각인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치료중심의 과학이라는 정신분석학의 통념을 깨고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들고 정신분석학계에 새 전환기를 연 혁신적 인물일진 몰라도, 반자본주의 기치를 들고 정치적인 진보성을 뒷받침하는 이론가로 우대되는 상황은 석연찮아 보인다. 여느 흔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력처럼, 68학생운동에 가담한 전력도 없고 마오주의에 한눈 판 적도 없는, 그저 개인적인 정신분석학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했던 그의 ‘비정치적인’ 행보안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담론을 뽑아낸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충분하다. 바디우나 지젝도 그러한 라캉의 비정치적 노선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놓으라는 맑스주의자들이 라캉으로부터 반자본주의적인 정치적 변혁을 꿈꾸며 그로부터 사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라캉의 주체이론은 그러한 정치변혁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안고 라캉의 주체이론에 접근할 때에, 우리가 참고할 텍스트는 매우 제한적이다. 주체는 기표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의식했던 탓일까, 그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그의 유명세를 고려한다면 그가 평생에 남기 책 ‘에크리(Ecrits)’[각주:2] 한권은 매우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책안에 그의 지적유산을 아낌없이 남겨주었고, 그의 사상적 구조를 거의 완결된 짜임새로 소개해 주고 있다. 목차를 언듯 보면 다양한 주제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목차 안에는 나름의 질서가 잡혀있는데, 그 목차들의 배열이 함의하는 바를 친절하게도 색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각주:3] 크게 분류해 본다면, ‘상징질서’, ‘에고와 주체’, ‘욕망의 해석’, ‘임상실험’, ‘인식론과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체를 이해하는 그의 이론전개방식에 따라 핵심개념들을 논증적인 순서대로 배열해 놓은 것이다. 에크리 안에서 소개되고 있는 주요 개념들은 이미 잘 알려진 것들이다. 가령, 주체의 삼단계 형성이론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와 욕망, 향락, 환상과 같은 주요 개념들은 라캉식의 주체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용어들이며, 다양한 활자경로를 통해서 보급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 라캉은 주체를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근대적인 주체의 해체를 위해 어떤 방법론을 구사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주체이론으로부터 어떠한 실천적인 담론이 도출될 수있는지를 평가해 보기로 한다.


데카르트의 <에고>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라캉이 정신분석학을 통해 세우고자 했던 주체이론의 핵심은 근대계몽주의에 기초한 절대주체 개념을 허물고 주체를 새롭게 규명하고자 한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 라캉은, 의심없이 수용되어왔던 절대 주체의 이면에 무의식이라는 공간이 있었음을 발견해낸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점을 근대 서양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의식 주체의 절대성의 위상을 흔드는 동력으로 사용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개인의 의식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자기동일성의 철학의 시대를 열었고, 사유의 주체(Cogito)가 절대 주체로서의 권위를 행사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결국 데카르트가 개인의 절대주체성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진리에 대한 판단을 보증함으로서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판단주체의 확실성을 판명하기 위해 요구되어진 조건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철학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의식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판단의 주체로 세우는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근거가 되었다.  

    라캉이 공략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유주체의 절대성에 근거하는 철학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데카르트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에고(Ego)’ 가 형성되는 과정을 ‘거울단계(Mirror Phase, 1936)’에서 설명한다. 거울단계란, 신체를 파편화된 상태로 인식하던 신생아가 거울에 투영된 자신을 경험함으로서 자신을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는 데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거울은 유아에게 형태를 부여하고, 발달을 인도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뤄진다. 유아가 자신을 최초로 통일된 형태로 경험하는 순간은 사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인식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인간의 주체가 형성되는 첫 시도는 허구와 소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셈이다. 거울의 투영을 통해 인식된 허구적인 자신의 정체를 라캉은 자아(Ego)라고 부르는데, 이는 진정한 주체로 발전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형태의 주체라고 볼 수 있다. 라캉은 거울단계를 통해서, 에고는 애초에 허구적인 이미지에 의해 잘못 인식된 자기동일화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오인,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하는 에고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서, 데카르트의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인식의 동일성으로서의 주체가 실제로는 취약한 근거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밝혀내려 한다. 자아에 대한 의식은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에 자신을 스스로 투영하고 동일시함으로서 구성된 거짓된 주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어왔던 인식의 주체와 판단의 주체 사이의 동일성이 라캉의 입장에서는 고작 유아적인 판단착오, 착시현상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없는 주체로서 에고를 발견하고 환희에 찼을지 모르지만, 라캉은 사실 그 에고란 걸음마도 떼지 못했으며 여전히 발달과정중에 있는 미성숙한 주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축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울단계는 허구적인 주체만을 생성하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주체의 원초적인 형태가 결정되는 단계이므로 거울단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시말해서, 거울단계를 거칠 때에만 사유의 주체와 사물은 어떠한 식으로든 관계 맺어질 수 있다. 비록 오인과 왜곡에 근거하지만, 현실세계를 인식하는 불가피한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라캉의 주체는 데카르트의 주체와는 정반대의 명제에 다다른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각주:4] 이로써 라캉은 거울단계 이론을 통해 데카르트적인 ‘에고’로서의 절대주체의 권위를 박탈시킨다. 그 대신 라캉은 자아의식이 내준 ‘생각하지 않는’ 공백의 정체는 프로이드적인 ‘무의식의 주체’였음을 보여주려한다.

    거울단계를 통해 라캉은 데카르트 철학 위에 세워진 절대주체의 개념을 비판함과 동시에, 두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타자)에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외부(타자)를 통해 투영(욕망)된 자신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실재와 다른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체의 원초적인 형성이 이러한 조건위에서 시작되었다면,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다음 단계에서도 결국 이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거울단계의 다음 단계로서 기표가 지배하는 상징계의 질서에 주체가 들어가면, 끊임없이 기표 위를 배회하는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 채 결핍의 형태로 무의식이라는 공간에서 남아 욕망하는 주체를 구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말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라캉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짚어 엎으려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고스란이 수용하고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으로 의심을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볼 때에, 라캉은 반 데카르트적이지 않고 오히려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더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생각하는 주체’가 진실이라는 확신에서 멈춰섰지만, 라캉은 그것이 정말로 의심없는 사실인지 프로이트를 무의식을 끌어와 한번 더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울단계이론은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는 진원지에 대한 라캉의 일차적인 반격의 장이 되었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에 대한 유용한 공격의 수단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주체 형성에 결정적인 무대가 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무의식의 본질을 적절히 파헤지지 못한 한계를 동시에 지적한다. 이에, 라캉은 기표가 사물들을 언어의 법칙에 종속시켜 기의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 추가하여,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는 무의식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질서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주체>에서 헤겔의 <욕망하는 주체>로


    라캉이 주체 개념의 정립을 통해 도달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지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전복이다. 이 전복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통하여 시도되었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그대로 차용하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하기를 선택한다. 라캉은 언어의 구조를 도입하여 주체가 어떻게 무의식이라는 공간안에서 언어, 즉 기표(significant) 에 의해 지배되는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이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의 재해석의 핵심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언표 안에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기표라는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는 순간 무의식은 자신의 결핍을 무수한 기표로 끊임없이 대체하는 순환구조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 함축돼 있는 것이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기표의 자리바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실재(Real)이지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주체는 실재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실재는 환상이라는 형태로만 주어질 뿐이다.  

    라캉이 주체를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주체에 머물지 않고, 욕망하는 주체로 보는 데에는 헤겔이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 이해하는 헤겔의 욕망론에서 발견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 이해하는데,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인정을 받아 자신을 확인하려는 욕망이며, 이는 모든 주체들의 욕망이므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이 논법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보여준 방식과 그대로 일치한다.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얻으려는 투쟁에서 승리자는 주인이되고 패배자는 종이 된다.투쟁의 결과에 따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갈려지지만, 자리가 결정된 이 후에 더 이상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타자로 인정되지 않기에 주인은 인정받을 수 있는 욕망을 노예로부터 얻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위치의 역전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인간은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게 됨으로 욕망하는 주체이기를 부정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헤겔의 욕망론이 ‘자기 동일성의 확보’라는 변증법의 최종 목적만을 제외한다면, 욕망의 주체로서 인간을 설명해 내는 적절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라캉의 근대적인 절대주체를 흔들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 드러난다. 헤겔은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인 긍정적인 ‘합(Synthesis)’을 자기 동일적인 주체성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 단계로 사용하지만, 역으로 라캉은 변증법적으로 놓인 타자 사이의 욕망 관계가 결국은 충족될 수 없는 부정적인 ‘합’으로 결론지어 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라캉은 헤겔 자신의 변증법을 오히려 인간의 절대주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용한 것이다. 헤겔의 자신의 칼로 헤겔 자신의 목을 겨누도록 만든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라캉은 데카르트의 절대주체 개념을 허물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판단 의식의 주체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끝까지 밀고나간 것을 그대로 자신의 거울단계이론에 적용하여 마침내 인식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절대주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데카르트의 주체를 공략하는 데에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도적이고 주도면밀한 전략적인 방법론의 선택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체의 포기인가, 해방인가?


    라캉은 거울단계(상상계)와 상징계를 통해 자아 의식의 절대주체의 탄생을 직접 주도하였고 이를 되돌릴 없게 못박아 두었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헤겔의 변증법을 그들의 무기로 하나씩 제압해 나가는 독창적인 싸움의 기술을 선보였다. 마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제갈량의 빈 배로 쏜 엄청난 수의 화살을 그대로 회수하여 이를 반격의 기회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면, 라캉은 근대적인 주체의 개념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오히려 데카르트와 헤겔을 경유하여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있다. 다시 말해, 라캉은 반 근대적인 급진적 해체주의라기 보다 근대를 적절히 후기근대의 발판으로 사용할 줄아는 안목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라캉은 근대적 주체로 구성된 세계관을 탈중심화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그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라캉이 주체를 기표의 결과물내지 대타자의 효과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극단적인 해체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편견중의 하나이다. 주체를 공중분해시키고 상징질서의 파생물로 전락시킨다면 주체를 역동적인 해방역량으로 수용될 수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차단되고 말것이다. 또한,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욕망하는 주체를 기정사실화 하게 될 때에는 국가나 지배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주체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회의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가 라캉을 비판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들뢰즈의 비판의 잣대로 보자면, 라캉은 인간의 저항적인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노예로 길들이는 반동분자에 다름없을 것이다.  

    라캉의 주체이론의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그를 섣불리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또한 욕망이 가지는 이중적인 성격때문이다. 라캉의 주체이론에서, 기표에 의해 연기되는 무의식이라는 구조에 갇혀있는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핵심으로 파악한다면 라캉은 반동이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달려듦으로서 상징화되는 주체에 대해 물러서지 않고 저항하는 인간을 라캉의 매력으로 볼 수있다면 라캉은 반대로 급진주의적인 혁명이론가로 재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라캉을 볼지는 결국 해석자에게 달려있는 문제이다.  



ⓒ 웹진 <제3시대>

  1. 라캉은 죽기전에, “고집스러웠던 저는 이제 갑니다”라는 유명한 말로 생애를 마친다. 68혁명의 고조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초연한 채 주체의 결핍을 응시하는 태도만이 변혁의 진정한 출발점임을 ‘고집스러운’ 태도로 일관해온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2. Jacques Lacan, E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tans. Bruce Fink (W.W. Norton: New York &London, 2006) 라캉의 저작에는 ‘에크리’ 이외에 ‘세미나(The Seminar)’ 시리즈도 있지만 녹취된 강의를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에크리’만큼의 정교함은 덜하다고 평가한다. [본문으로]
  3. J. Lacan, Ecrits, 851 특이한 점은 색인이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주제를 기준으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라캉이 에크리를 그의 사상을 한 장의 도면에 완전히 그려내려는 의도에서 공들여 집필구성되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본문으로]
  4. Ecrits, 430. 라캉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표현한다. “나는 나의 생각이라는 장난감( plaything, 데카르트의 ‘사유’를 격하시켜 표현: 필자 주)이 있는 곳에 없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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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2]

푸코는 주체를 부정하는가?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미셀 푸코가 1984년에 사망하기 직전 남긴 가장 마지막 글은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단편 에세이였다. 이 에세이는 같은 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UC 버클리에서 개최된 ‘근대와 계몽’이라는 세미나에 보내졌는데, 이 세미나에는 하버마스, 찰스 테일러, 리차디 로티, 허버트 드레이푸스 그리고 폴 라비노우와 같은 세계적 석학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미나는 푸코의 죽음으로 돌연 취소가 되었고 푸코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푸코의 이 마지막 에세이는 푸코가 계몽과 근대의 시대를 향해 남긴 일종의 유언장이 되고 말았다.[각주:1] 물론 이 에세이는 그가 죽음을 맞이한 병상에서 쓴 것이 아니라, 6년전에 발표한 강의의 글을 다시 구성한 것이기에 그의 최후의 유고작이라는 지나친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럼에도, 계몽에 대한 물음과 그의 답변은 푸코 자신의 철학의 근본적인 물음, 철학의 방법, 철학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저작임에는 틀림없다.  

          1784년에 칸트가 받았던 질문을 스스로 자신에게 다시 던져놓고, 계몽과 근대를 향해 푸코가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는, 근대를 낳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2세기가 지난 즈음, 또한 포스트모던 혹은 탈근대라는 용어가 이미 시대를 풍미하는 시점에서 굳이 지난 유행어를 꺼내 든 것일까? 다소 의아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자문자답 안에는 어떤 의도가 배어 있는 것일까? 그는 칸트가 말한 계몽, 즉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 그러나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사용이라는 한계에서만 가능해지는 계몽의 의미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성의 비판적인 사용이라는 점에서만큼은 푸코가 의미부여하려 했던 계몽의 해석을 위한 출발점으로는 충분한 것으로 보았다. 푸코에게, 계몽은 시간의 차이로 구분되는 고전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사이의 단순한 시차적 경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오늘의 역사안에 서있는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계몽이란 현재에 대한 비판적 태도 혹은 혹은 철학적 에토스(Philosophical ethos)’라는 것이다. 푸코는 이렇게 계몽이라는 개념을 역사적 시대의 특정한 구획점으로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구체적인 역사적 실재와 관계하는 역사 존재론적 그리고 역사 실천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탈근대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포스모더니즘은 계몽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계몽을 푸코식대로 시대의 변화 안에서 영속하는 에피스테메를 발견하는 비판적 태도라고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반계몽적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계몽의 시대의 또다른 패러다임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푸코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는 전통적 권위를 타파하고 이성의 주체를 세울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확신이 이성을 합리주의적 세계로 향하는 목적을 완성시키려는 전체주의적인 도구로 절대화시켜버린 오류로 좌절되었던 경험으로부터 경계를 긋고 이로부터 벗어나 또다른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멀다. 계몽의 시대 이후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 사고방식, 문화, 세계관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오늘의 실재의 체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또다시 등장하게 된다면 이것은 가장 위험한 전통의 회귀만을 낳았던 과거의 경험을 반복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푸코가 계몽주의에서 발견해 내려고 했던 것은, 전근대와 근대, 근대와 탈근대를 특정짓는 사실적인 기준 같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시도는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다. 다만,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 또는 우리가 역사적 실재와의 관계를 맺는 방식의 변화를 발견하고 이 변화안에 내재하는 철학적 에토스를 주체를 창조하는 원리로서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느냐가 철학이 관심가져야 할 물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몽에 대한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푸코는 결국 자신의 철학적 연구가 세가지 영역과 두개의 방법론을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려는 듯 하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푸코는 세가지 영역으로서, 지식, 권력, 그리고 윤리를 구분하는데, 지식은 사물에 대한 지배관계들을 파악하기 위한 영역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지식의 주체들로서 구성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한 범주이다. 권력은 우리가 어떻게 권력 관계들을 행사하고 또 그것에 복종하는 주체들로서 구성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서, 타인들에 대한 행위의 관계를 다루는 영역을 말한다. 끝으로 윤리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들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즉, 우리는 어떻게 우리 행위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답하기 위한 연구의 최종단계이다. 이들 세 영역의 철학적 연구의 범주들은 두가지의 방법론을 통해 검토된다. 하나는 고고학이며 다른 하나는 계보학이다. 모든 지식, 혹은 모든 가능한 도덕적 행동의 보편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사건들이 드러내는 담론의 사례를 다룬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이어야 하며, 현재의 우리의 존재형식이 과거로부터 변형되어온 것 처럼, 앞으로의 변화를 현재로부터 구분해 내어야 한다는 점에서 계보학적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들 세 영역과 두 방법이 서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푸코의 구분에 따라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지식의 고고학, 권력의 계보학,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세 가지의 영역으로 최종 구분된다.

         이와 같은 푸코의 철학적 물음과 방법, 구조에 관한 포괄적인 진술은 그의 철학적 단절점들에 대한 그의 해명임과 동시에, 그의 철학적 노정을 일관된 틀안에 재정렬하려는 포괄적인 의도라고 보여진다. 다시 말해, 계몽 혹은 근대성이 이성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켜온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주체성이 상실되어온 역사라는 그의 초기의 입장이 함축하는 인간의 자율성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어떤 희망의 여지를 남겨보려는 변화된 의도가 감지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사용’과 , 3권 ‘자기의 배려’가 그의 마지막 해인 1984년에 출간되었을 때에, 그는 1권 ‘지식의 의지’에서 보여준 주체에 대한 회의적 태도로부터 물러나, 윤리적 주체로서의 삶의 가능한 방식을 개진하였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성의 역사 1권에서 성을 억압해온 역사라고 믿어왔던 억압적 권력의 실체가 허구임을 보여주며, 성에 관한 지식과 담론의 확대가 효과적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권력의 방식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던 푸코에게서 인간의 주체적 삶의 방식에 회의적인 태도는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성의 역사 1권인 앎의 의지를 1976년에 출판한 후 8년 뒤 펴낸, 2, 3권 사이의 긴 공백은 푸코에게 전환의 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푸코는 1권이 주체를 담론이나 권력의 효과로 간주함으로서 주체를 객체화 했다면, 2, 3권은 개인이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한마디로 말해 1권과 2,3권 사이에는 푸코 철학 내부의 일대 단절이라 일컬어지는 사색의 전환 즉, ‘앎, 권력, 담론’의 주제로부터 ‘자기와 윤리’의 주제로의 급전환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제 1권 ‘앎의 의지’와 2권 ‘쾌락의 활용’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권에서 푸코는 성의 문제를 억압적인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억압가설’에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 우선, 푸코는 성의 역사를 억압 증대의 역사로 이해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가설에 정면 도전한다. 대신, 성에 대한 담론은 권력 자체가 행사되는 장에서 오히려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17세기 부르주아 사회는 성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고 검열, 통제하였던 시대였음은 분명하지만, 담론과 담론의 질서라는 차원에서는 성에 관한 담론, 형식과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특수한 담론들이 끊임없이 확산되었음을 밝혀낸다. 푸코는 이러한 성의 담론의 확산의 진원지를 기독교 정신 및 고백의 교리 안에서 찾으려 했다. 기독교의 고해성사는 육체적 성행위에 대해 절제된 언어로 숨김없이 말하도록 강제함으로서 성에 대한 담론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성의 담론이 중세에는 육신과 고해성사의 실천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단일한 담론의 형식을 띠었다면, 최근의 여러 세기 동안에는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인구통계학, 생물학, 의학, 심리학, 윤리학, 교육학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성에 관한 담론이 생산되고, 담론의 형태가 다양화되며, 담론 연결망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의 역사 1권은 성생활에 관해 말함으로써 유발된 권력효과는 무엇이고, 이러한 담론, 권력효과들에 의해 둘러싸인 쾌락 사이의 관계, 거기로부터 발생된 지식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연구는 성에 관한 전반적 담론현상과 담론화를 고찰하는 것, 담론을 따라 발생하는 권력이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의 다형적 기술, 그리고 담론의 생산에서 매체와 동시에 수단의 구실을 하는 지식의 의지를 도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금세기까지 서구인의 섹슈얼리티는 개인의 쾌락이나 자기 발견과는 무관한 권력기제로 작용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연구에서 푸코가 전제한 것은 주체가 자기에 관한 진실을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권력-지식의 치밀한 관계망을 통해 구축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근대의 주체는 개인의 신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치체제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관점은 인간의 주체는 지식과 담론, 권력에 의해 예속된 무기력한 존재라는 비관적인 결론으로 이끌고 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푸코의 이러한 관점은 2권으로 이어지는 그의 책에서 윤리적 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주체에 대한 회의로부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성의 역사 2권에서 푸코는 1권과는 다른 논조로 성에 관해 접근한다. 그는 2권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변화된 관점을 진술한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는 이러한 경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관점은 연구의 과제를 설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1권에서 권력-지식-쾌락체제의 작동과 존재이유를 결정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라면, 2권은 성과 관계된 지식의 형성, 그것의 실천을 규제하는 권력체계, 그리고 개인이 그 안에서 스스로를 이 성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해야만 하는 형태들 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 변화된 것이다. 처음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1권과 동일한 연장선에 있지만, ‘개인이 성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 방식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새롭게 추가된 것은 푸코의 변화된 관점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는 욕망과 욕망하는 주체에 관한 역사적, 비평적 작업을 통해 개인들이 욕망의 주체로 되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해왔는지를 분석하려 했고, 이 같은 실천을 통해 개인들은 자신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작동시킴으로써 그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을 해독하고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라 고백하게 되었음을 밝히려 했다. 즉, 개인은 자기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고 주체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같은 자기와의 관계가 어떤 형태와 양태들을 취하는지 탐구해야 했던 것이다.

         푸코는 이 같은 그의 문제설정이 우리 사회에서 분명 대단한 중요성을 지녔던 실천들의 총체, 존재의 기술이라 불릴 수 있을 그런 실천들의 총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 존재의 기술, 자아의 기법이 기독교의 사목적 권력행사에 통합되면서, 그리고 나중에는 교육적, 의학적, 혹은 심리학적 유형의 실천들에 통합되면서 그 중요성과 자율성을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의 사목권력을 성에대한 담론의 확산 주체로 보았던 1권과는 다른 입장이다. 1권의 입장에서 개인은 기독교, 정신분석학, 의학, 교육학 과 같은 많은 담론형성의 주체에 의해 예속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보았던 반면, 2권은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개인의 존재의 미학과 자아의 기법의 자율성과 중요성이 역사 속에서 어떤 변화를 거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둠으로써 개인이 ‘존재의 미학’의 기준을 작동시키면서, 자기의 실천을 통해 어떻게 주체화되어 왔는지에 역점을 두고 있다.이제 푸코에게 성은 담론. 권력의 통제를 받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개인이 쾌락을 도덕적으로 활용하는 매개체이자, 스스로의 도덕규범을 만들고 지키는 능동적 주체라고 그의 입장을 전환한다. 푸코에 따르면, 주체의 형성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푸코는 그것을 '자기의 테크놀로지' 혹은'자기의 배려'라고 부른다.

         이렇게 푸코가 제 1권과 제 2.3권 사이에 전개시킨 논리의 변화를 모순 혹은 단절로 보아야 할것인가? 푸코 그 자신이 자본주의적인 억압적 질서안에서 무저항적 태도를 부추기는 투항주의라는 비난을 의식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그 안에서 벌어진 틈새를 메워야 할 필요가 있었음은 추측 가능하다. 결국, 계몽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합리주의적 전통에 남아있거나, 계몽을 비판하고 합리성의 원리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양자택일적인 부정적 입장을 모두 배격하고 실천적인 비판으로 돌아서려는 긍정적인 이해를 통해 ‘자기의 배려’라는 인간의 자율적인 주체의 가능성으로 그의 결론은 다다르게 된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그를 향한 의심어린 시선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푸코의 윤리적 주체란 자기에로의 테크놀로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권력과 담론으로부터 서있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개인의 높은 수준의 능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언론과 정치적 눈속임에 쉽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다수에게 푸코의 주장은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자기의 배려,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주체의 가능성을 결국 개인의 내부적 문제로 축소환원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그가 받아야할 비판중 하나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비판은 전통적인 저항의 형태를 전제할 때만 타당하다. 푸코는 전통적인 주체로서의 고정적인 실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의 저항의 주체를 생산해야 할 시점이라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와 권력’에서 다음과 같은 푸코의 진술은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오늘날 아마도 주요한 목표는 우리들이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의 존재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개별화함과 동시에 전체화하는 근대적 권력구조의 이런 종류의 ‘이중적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들이 누구일 수 있을까를 상상하고 구축할 필요가 있다. 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과제는 국가나 제도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결부되어 있는 개별화 방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푸코에게, 저항의 대상은 억압적인 시스템을 콘트롤하는 외부적 실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저항의 대상은 부재하며, 설령 존재하는 저항의 대상이 제거되는 것으로 인간의 억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저항의 거점이다. 저항의 거점으로서 자아는 자신에게 관련된 권력관계를 능동적으로 맺어나가 는 주체의 존재 방식 혹은 자아의 형성기술을 통해 마침내 윤리적 주체로서 저항의 실천적 삶으로 진입하게 된다는 뜻이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지배 테크놀로지에서 자신이 자신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지배 테크놀로지로 우리의 시선이 옮겨질 때에,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목표에 다가설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주체에 대한 푸코의 진술이 여전히 자율적인 주체가 실재와 관계하는 방식의 변화를 선언적으로 요구하는데서 멈춰버린 듯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에세이는 197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한 강연회에서 있었던 푸코의 ‘비판이란 무엇인가? :비판과 계몽”이라는 강연에서 먼저 발표된 것이었고, 그 후 1983년에 ‘계몽에 관한 칸트의 에세이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칸트의 태도에 관한 비평’이라는프랑스 칼리지에서의 오프닝 강의로 다시 발표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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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들어가며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현상은 주체의 문제가 문학, 철학, 예술, 신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시 전 분야에 걸쳐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리라. 이런 현상은 계몽주의로부터 니체에 의해 기획된 신의 죽음이 몰고온 예고된 변화이기도 하지만 굳이 니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숨 막히는 질서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던 지성사의 필연적인 흐름 이었는지도 모른다.  

          계몽주의시대 이후 ‘신의 죽음’의 선언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근대적 주체의 죽음뿐 아니라, 주체를 둘러싼 욕망, 권력, 담론, 지식과 같은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라캉이 주체를 대타자라는 환상적인 실재를 욕망하는 존재로 파악한다든지, 푸코가 지식의 계보학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밝혀낸 것이라든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개념을 통해 서구역사가 억압해온 사유의 욕망으부터 자본주의의 문제를 파헤친다든지 하는 것들은 상이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게 되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주체에 대한 관심이 최종적으로 겨냥하는 지점은 억압적인 체제질서의 그 가려진 내막을 들춰냄으로서 인간을 억압한 그 모든 것들의 허구적인 실체로부터 인간의 주체적인 삶, 즉 주인된 삶을 회복시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주체에 대한 각각의 진술들을 통해 제시되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주체의 행동의 방식은 이론가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소 부정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이 감지된다. 다시 말해, 해체론이든, 포스트구조주의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명명하든 주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전통적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내지 해체이며, 이는 근대적이고 부즈조아적인 사회구조를 넘어서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혹은 해체가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역량마저 해체할 수 있다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마저 버리는 참사는 목욕시키는 엄마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주체가 중요한 문제인가


         데카르트의 근대 합리주의 이후 서양 근대 철학은 주관적인 관념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의 사유와 인식능력은 실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지배하였던 시대였고, 윤리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이성에 기반한 자율적인 개별자들 간의 합리적인 계약에 의거하여 정치적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낙관적이 기대가 팽배하였던 시대였다. 이것은 중세시대를 지배하였던 전근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신을 밀어내고 근대의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주체가 그 자리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절대 주체는 형이상학적인 신의 자리를 탈환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주체의 자리로부터 배제된 객체를 대립적으로 구분하여 객체에 대한 차별을 기정사실화하고 정당화하고 만다. 신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는 승리의 환호 뒤에는 자연이 인간의 정복의 대상물로 전락되고, 여성은 남성에 대한 복종의 대상이 되며, 유색인은 백인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비워주어야 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개별자 스스로에게 이데아나 신에게만 부여되었던 초월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존재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서 일어난 이러한 인식론적인 변화는 인간을 둘러싼 삶의 전반을 선과 악, 주인과 노예, 문명과 야만이라는 확연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로 구조화시켰다.

         근대적인 주체의 발견이라는 인식론적 변화가 객체를 타자화 시키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통해 왕권신수설에 의거한 봉건적인 절대주의는 무너지게 되었으며, 시민이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근대적 주체의 등장이 무조건적인 비판의 문제로만 취급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전근대적인 절대주체가 봉건주의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뒤이어 등장한 근대적인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봉건주의를 몰아내고 부르주아 시민 사회를 지탱하는 새로운 사조로 전면화 되었다는 사실은,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타파하는 또 다른 새 정치사회는 탈근대적인 주체의 등장을 통해서 열려지게 되리라는 합법칙성을 말해준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을 한다는 것, 혹은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사회를 지향하는 지적 작업은, 결국 주체를 인식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고 이를 통해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안에서 논의되는 주체에 대한 이론들이 오늘의 자본주의 지배질서로부터 어떠한 변혁적인 의미를 함축하는지를 이 글은 묻고자 한다.


지젝이 말하는 주체


         이 글이 지젝을 특별히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한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지젝의 책은 읽는 속도보다 출판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유머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물량공세로 대중과의 접촉면을 다방면에서 확보해온 잘 알려진 맑스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유명세도 그렇지만, 그러나 이보다 지젝의 주체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인간의 변혁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론으로 가장 의미 있는 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는 나름의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지젝은 본 웹진에서 다뤄진 경험이 있고, 지금도 연재되는 관계로 지젝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지젝의 논의와 연류된 주변의 시선들을 참고하여 지젝의 주체이론이 가지는 차별성과 실천적 의미를 구분해 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이론가로서, 푸코, 들뢰즈, 라캉을 염두하고 있다.

          푸코의 경우, 그는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지식을 통해 담론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권력이라는 효과를 생성해내는데, 이 때 작동하는 권력은 주체에 의해 통제되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를 형성하고 주체의 자리를 결정짓는 권력임을 분석해 낸다. 정신병원, 감옥, 고아원, 학교와 같이 신체를 통해 가해지는 감시와 통제 시스템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은 곧 권력의 메커니즘이 폭력과 억압의 방식이 아닌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참여를 통해서 창출되고 과정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감시, 규율, 훈육의 통제사회에서 밀려나고 주변화된 타자들이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고고학적 계보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권력의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는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은 권력의 주체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사회의 통제시스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일 뿐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자기에의 배려’라는 모호한 답으로 얼버무린다. 푸코는 결국 인간의 개별적인 의식 안에서의 변화만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한 것일까? 푸코는 이후에 다뤄지는 주체의 철학이론에도 빠짐없이 거론되기에 짚고 넘어갈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라캉을 통해서 의도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법을 통해 정치적 주체성이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캉의 주체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고 만족될 수 없고 언제나 항상 결핍된 채로 기표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언제나 결핍된 존재로만 남아 있게 된다. 라캉에게 주체는 타자의 욕망이 거쳐나가는 장소이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체 이해만으로 정치적 주체성을 발견할 직접적인 단서를 찾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다. 물론 지젝이 읽어낸 라캉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들뢰즈가 기획한 주체는 라캉과 다른 것이다. 그가 서구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던 플라톤주의를 전복을 통해서 밝혀내려 했던 것은, 수직적이고 이분법적인 위계질서를 부여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개별자들에게는 동등한 지위에서의 수평적 차이와 그것의 반복만이 있을 뿐 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이데아를 제거한 칼로 다시 겨냥한 대상은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라캉과의 입장차이가 분명해 지는데, 욕망은 오이디푸스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욕망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의 본성에 숙명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욕망하는 주체는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를 위협하는 가능성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라캉과 들뢰즈의 욕망을 중심으로한 주체에 대한 이해는 차이로 끝날 것인가?

         마지막에 다뤄질 지젝의 주체는 욕망에 대한 해석이 푸코에 대한 비판과 라캉에 대한 변증법적인 해석을 통해 변혁적이고 실천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이론으로 어떻게 가공되어지는지를 보려고 한다.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지젝은 맑스가 설정해 놓은 계급적 혁명의 전선구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맑스가 보지 못한 혁명에서 인간의 주체의 문제를 다룸으로서 진보적인 해방역량을 담보하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이론가라는 호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비중 있게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다.

         쓰고보니 장황한 글이 될 것같다. 연재를 약속받아 놓은 것도 아니고 그저 공부하는셈 치고 글좀 써보라는 권유에 시작한 글이기에 혼자 장편 시리즈를 기획하는 것은 월권이다. 때문에, 지젝 이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매우 단촐한 소개와 더불어 실천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만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주체의 문제를 바라보는 상이한 접근방법들이 제공하는 각각의 이론들이 진보를 위한 정치변혁의 과정에서 ‘어떤 주체’가 요구되는지를 비판적인 입자에서 비교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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