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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정작 본인은 구하지 못한' 메시아가...온다(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20. 1. 1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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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본인은 구하지 못한' 메시아가...온다*

이상철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 1: 21)

 

00. 

요즘은 신분증 좀 봅시다, 라는 질문을 잘 받지 않죠. 저는 귀국해서 한번도 신분증을 요구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간간이 신분증을 보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신분증 역할을 하는 것이 운전면허증이고, 그 안에는 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보가 들어있습니다......Class: D, Rest: B, Type: ORG, BRN Eyes (☞ Rest: A 안경, 렌즈 사용하는 눈 나쁜 운전자. / Organ Doner 시체사후기증/ Brown Eyes)

  미국운전면허상으로 저를 평가한다면 저는 영주권자 혹은 시민권자가 아닙니다. class가 D로 표시된 것을 보니 수입이 변변치 않은 사람. 이 말은 미국사회에 세금 혹은 기타의 이득을 발생시키지 않는 잉여인간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저는 사고 후 사망한 경우 시신기증을 허락한 갈색눈의 안경 쓴 운전자, 입니다. 여러분, 저의 미국에서의 위치가 그려지시나요? 

  간혹 운전하다가 속도를 초과, 건널목 stop 사인 위반, 자동차 등이 켜지지 않거나, 자동차가 퍼졌을 때  경찰이 저를 발견하고는 신분증을 요구할 때, 저는 이 면허증을 보입니다. 경찰이 저를 어떻게 대할까요? 일단은 별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감지할 경우 저는 다른 신분증 하나를 살며시 내밉니다. 학교학생증이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시카고신학대학원) 학생증입니다. 그러면 경찰의 얼굴이 풀어져 저에게 말도 시키고 농담도 하고 하면서 분위기가 좋게 바뀝니다. 그때 기분이 드럽습니다. 

  왜 나는 신분증을 두 개 갖고 다녀야 하는지, 왜 나는 운전면허증을 내보일 때 마다 긴장해야 하는지, 나보다 못한 사람들, 불법체류자, 난민들은 미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저는 유감스럽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세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에 있을 때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 당할 때가 제일 싫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저는 한국으로 돌아와 매주 예배 광고시간 마다 한백을 방문하신 분들에게 where are you from을 묻고 있네요.  

 

01.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흔히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죠.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세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리어왕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대사는 근대성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된 주체성의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믿음의 주체(루터), 생각하는 주체(데카르트), 선험적 주체(칸트), 종합하는 주체(헤겔), 세상에 던져진 주체(하이데거) 등 일일이 열거하기 불가능한 다양한 주체성의 서사가 근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흔히 한 사람의 정체는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총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는 항상 부분의 합을 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정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그 사람 너머에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정체성은 영어로 identity입니다. 이 단어는 ‘확인하다, 찾다, 발견하다’를 뜻하는 동사 identify에서 파생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체성은 과거와 현재에 드러나고 나타나고 고정된 그것이 아니라, 계속 확인해야 되고 찾아야 되고 발견되어져야 하는 무엇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정체성은 ‘고정된 불변의 그것(Being)’이 아니라 계속 ‘형성중인, 변화하는(becoming)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저(이상철)는 누구입니까? 미국에서 저는 [Status: F1, Class: D, Rest: B, Type: ORG, BRN Eyes] 의 identity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목사, 교수, 원장으로 불립니다. 주초에는 원장으로, 주중에는 교수로, 주말에는 목사로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으나, 세 가지 호칭 어디에도 제가 속하지 않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정체성의 혼란이죠. 만나는 사람들도 겹치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지금 교회일 때문에 이 사람을 만나는 건지, 아카데미 일 때문에 이 사람과 약속을 한 건지, 학교일 때문에 이 분과 만나는 건지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많습니다. 한참을 수다를 떨고 본론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아, 내가 목사로, 교수로, 원장으로 이 자리에 온 거지’라고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02. 

문득 한 사람의 정체성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타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와 타자가 알고 있는 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타자는 또 내게 우호적인 사람과 내게 적대적인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겠고, 내게 우호적인 사람을 친구라 한다면 내게 적대적인 사람은 ...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내게 우호적인 친구의 카테고리에는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 나와 함께 자란 자매 형제들, 그리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 나와 함께 성장하고 자란 학교와 교회 친구들, 내가 목회했던 교회의 교인들,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 나의 제자들, 함께 활동하고 있는 동료들일 수 있겠죠. 이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물으면 뭐라고 말할까요? 어쩌면 이들이 알고 있는 이상철이 내가 알고 있는 이상철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다가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철이 내가 알고 있는 이상철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차이를 설명해보라 한다면, 잘 전달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요즘 저의 정체성에 혼란을 끼치는 요소가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자 중에서도 내게 적대적인 타자입니다. 비교적 제게 우호적인 타자만 만나왔던 저로서는 충격입니다. 근래 이런 저런 채널을 통해 전광훈 반대 관련 기사, 보도, 인터뷰가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이름으로 나가고 난 후에 저에 대해 욕하고 비난하고 음해하는 소식을 직.간접적으로 듣습니다. 

  그들을 정확히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타자 2’라 표시하겠습니다. ‘타자 2’도 나를 알고 있는 셈입니다. ‘타자2’는 나에 대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악의를 가지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이 언급하는 내가 객관적인 나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어쩌면 ‘타자2’가 친구나 나 자신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자2’로 인해 영향을 받아 반응하고, 당황하고, 열 받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생경한 나와 대면하면서 나는 또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저와 만납니다.    

 

03.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예수님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같은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친구들, 곧 예수님의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제자들의 평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평가가 있겠지요. 일단 예수는 그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에게 괴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태생부터가 그랬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 절인 마태복음 1:20 에 보면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 아기 예수가 나중에 온백성의 죄를 구원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제가 요셉이었으면 그 결혼을 다시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꿈이 아닌 실제로 이번에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알립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존재는 사람입니까, 신입니까?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닌 존재를 서양에서는 유령(Specter), 혹은 괴물(Monster)로 불러왔습니다. 데리다와 지젝이 유령론(hauntology)과 괴물성(Monstrosity)를 말하면서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과 그리스도(Christ)를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서구인들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수는 이러한 미스테리한 출생의 비밀이 있는 아들입니다. 그러한 불안은 성장과정에서 열 두 살의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선생들과 성전에서 토론하는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장면에서 현실화 되기 시작합니다(눅 2,52). 나중에 예수가 성장하여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을 때, 어머니 마리아와 가족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습니다(마가 3,21). 그동안의 불안이 드디어 터진 것이죠. 결론적으로 가족들에게 예수는 문제적 인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돈키호테 같은, 어쩌면 프랑켄슈타인 같은,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하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태 16,13-16).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엄명하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태 16,20). 

  이 대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를 바라보는 자의식입니다. 예수는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이 문제는 신약성서 학자들이 지녔던 오래된 문제의식이었는데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지는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했던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자 요한이거나,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봤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고백한 그 그리스도가 당시의 기득권 세력에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마태 16,21). 제자들도 예수님을 정작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다툰 것이나(마가 9,33-34),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나(마가 10,37),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뿔뿔이 다 흩어진 것으로 보아, 제자들도 사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04.

여기까지가 예수님의 친구들이 예수의 정체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라면, 다음은 예수의 ‘타자 2’들이 예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타자2’는 크게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귀신들, 악귀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죽였던 당시 유대교 집권세력들입니다. 어쩌면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아보았던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서 엎드려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마가 3,11). 그렇다면 예수님의 또 다른 적대자들은? 

  예수님은 공식활동을 시작하면서 부터, 아니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살해의 위협 속에서 사셔야 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2살 이하의 아기들을 죽이는 헤롯의 광기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했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부터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에 의해 불순분자로 찍혀 죽음으로 몰렸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립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의 정체성은 율법을 파괴하는 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자, 정결 법을 지키지 않는 자, 하나님을 모독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은 자로 비치셨다면, 로마 총독에게 있어 예수는 민중의 소동을 부추기는 ‘정치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적대자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에게 퍼부었던 비난입니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마가 15,29-32). 

  저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했던 말 중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구나!”라는 말에 눈길이 갑니다.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 자!’ 저는 이것이 예수의 정체성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적대자들이 규정한 예수님의 정체성이 예수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회상해보면 적대자들의 발언은 예수의 어록을 충실히 검토한 이후 내려진 공부의 소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 2,17).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마태 20,28).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눅 19,10). 

  맞습니다!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입니다. 우리 한백교회 신앙고백으로 바꾸면 예수는, 가려지고 잊혀지는 희생양을 위하여 오신 분이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우리 한백교회 신앙고백으로 바꾸면 예수는, 우리를 섬겨 우리로 하여금 내일의 희망을 향해 달려갈 기운을 회복하게 하는 분이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게 하시는 분입니다.

 

05.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 저는 이런 예수의 정체성을 사도바울이 말했던 다음의 구절을 통해 부연하고자 합니다: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후 6, 8-10)

  천지 만물 안에 우리와 더불어 살아계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쫒아내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며 생명 넘치는 세상을 우리와 함께 만드시는 분! 

  죽음의 그늘 속에서 신음하는 아우성으로 가득 찬 세상에 가려져있는 차별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찾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우시는 분!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 메시야, 바로 이 분이 내일 모레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하는 날이고, 아울러 그런 예수처럼 새롭게 다시 살겠다고 가열차게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한백 교우님들께 미리 기쁘게, 그리고 가열차게 인사 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2020년 1월 26일 예배 원고를 수정 보완하였음을 알립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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