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선의 힘] 삶의 고백(도홍찬)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2. 29. 20:05

본문

삶의 고백

도홍찬(한백교회 교인)

원래 몸이 유연하지 못하고 뻣뻣한 편이었는데, 테니스, 골프 등 한쪽 부분만 활용하는 운동을 계속하다 보니 몸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조금만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를 다시 곧추 펴는 데 힘들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요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 여성회원들인데, 안면몰수하고 계속 다녔습니다. 다른 회원들 동작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였지만 비슷하게 흉내 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묘한 마력이 있어서 동작 자체는 힘들지만, 마치고 나면 무엇인가 몸이 정렬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대학교 시절 소박한 요가를 해본 경험이 있었는데, 요즈음 요가는 무척 세련된 것 같습니다. 비슷한 동작인데, 매번 할 때마다 변형을 만들어내어 지루하지 않게 하고, 수준도 다양한 레벨로 구성되어서 항상 신체의 한계를 느끼도록 만듭니다. 혼자서는 하기 힘든 동작도 짝을 지어서 몸을 서로 기댈 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는데, 요가가 개인 수련을 넘어서 공생의 정신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생각에 찌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한테 내 몸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몸의 꼬임과 변주 속에서, 내 몸인데도 결코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이 무력한 몸의 놀림 속에서 적나라하게 내 육체의 한계를 새삼 느꼈습니다. 그동안 정신으로 몸을 평가하고 대상화하였는데, 거꾸로 신체를 통해서 정신을 바라봅니다. 신체의 절박함 속에서 한없이 움츠려들어 있는 정신의 옹색함. 요기들은 꾸준한 수련을 통해서 신체를 해방시키고, 더불어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합니다. 몸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욕망에서 많은 사람들이 요가 매트를 펴지만, 원래 요가는 몸의 한계에서 정신의 궁핍함을 발견하고, 몸의 초월을 통해서 정신 해방을 맛보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21세기, 인공지능이 인간의 정신을 대체하려는 탈인간주의 시대에 몸의 수행, 정신의 구원은 퇴화된 언어가 아닐까요. 아직까지도 이 시대착오적 언어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서 올 겨울 깜짝 놀랐습니다.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한 번 서원을 하면 평생 수도원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봉쇄 수도원이 경북 상주에 있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십여 명의 수도사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지내고 있더군요. 고령의 수사로부터 젊은 수사들까지 그들은 매일 하느님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젊은 수사 둘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묵언과 기도, 예배로 보냅니다. 소박한 노동으로 먹거리를 재배하지만 식탁은 빈곤합니다. 그들은 반찬없이 맨밥으로 대부분 끼니를 해결합니다. 신에 붙들린 사람들. 같은 신을 부르지만 이렇게 나와 삶이 다를 수 있다니. 먹방 프로그램이 온갖 채널을 장식하는 이 식도락의 세계에서, 말의 성찬으로 먹고사는 민주주의 시대에 왜 그들은 입의 욕구를 포기하였을까. 그들이 만난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일까. 

절간에서도 비슷한 인간이 있었습니다. 테오드르 준 박, 한인 2세대인데,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하였지만, 삶의 무의미함을 느껴 한국으로 왔습니다. 10 년 간 묵언수행을 하였다는 송담스님 밑에서 환산이라는 법명을 받고 근 30 년 간 수행을 하면서 그의 수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참선에 빠졌고, 무엇보다 선승인 송담스님을 쫓아 삶의 진리를 구하였습니다. 나와 얼추 나이가 비슷한데, 젊음을 그는 절간 안에서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를 세상과 단절하게 만들었을까. 그가 수행을 통해서 깨우친 진리는 무엇일까. 그는 최근에 다시 환속하였는데, 그가 바라보는 속세의 삶은 어떠한 것일까. 

골방에 스스로 유폐한 삶, 세상을 부정하고 자기 정신 속에 사는 사람, 사회와 역사의 구원, 민중의 삶을 무시하고 정신적 자위 속에 살아가는 사람. 영성을 철저하게 개인화시킴으로써 총체적 관계로서 인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예전에는 쉽게 이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화살이 거꾸로 나에게 날아옵니다. 세상에 대한 논리는 더욱 치밀해졌지만, 나 자신의 내면은 엉성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이 학생들한테, 다른 사람들한테 계몽의 언어를 늘어 놓았지만, 내 마음을 훈련시켜 나를 다스리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지만, 그것이 나의 이익과 관련이 될 때에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세상에 분노하지만, 나 자신에게도 자주 화를 냅니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전에, 내가 더 불행감에 허우적거립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믿어 왔는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삶을 마무리지어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을지 다시금 묻게 됩니다.

요즈음 학교 동료가 이끄는 소모임을 통해서 명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자인데, 그를 따라서 선원에도 다녀왔습니다. 불교식 참선 센터인데, 전혀 불교의 색채가 나지도 않았고, 부처님도 무척 세련된 자태로 앉아 계시더군요. 식사 등 모든 것이 구성원들의 자발성으로 운영되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곳곳에서 종교가 세상과 만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상은 불교에서는 선불교 전통의 참선입니다. 경전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님의 진리에 다가간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수도사들이 깊은 기도 속에서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시도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씩 명상을 해봅니다. 머리 속에서 온갖 잡념이 끊이지 않고 일어남을 느낍니다. 몸을 내려놓고 생각까지 내려놓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로 뇌가 번잡한 번뇌 속에서 살아왔구나 느낍니다. 서툴지만 명상을 계속하다 보면 모든 것에 대한 욕구가 조금씩 중화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생각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무심히 바라보는 여유도 생깁니다. 하여튼 의도적으로 멍때리는 이 시간이 요즈음 저한테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제가 세상 속에 치이다 보니 요가니, 개인 명상이니 하는 것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성과 속은 그렇게 분리되지 않는데도 말이죠. 봉쇄 수도원의 젊은 수사 역시 하느님만 바라보지 않더군요. 그에게 소망을 묻자, 세상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세상 각지에서 온 편지들이 있더군요. 기도를 요청하는 편지입니다. 그는 매일 고통받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산 스님 역시 절간의 권력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참선도 권력이 되는 것에 스스로 경계를 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익숙한 것은 낯설게 하고, 낯선 것들을 친구로 삼고자 그들 모두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갈 수는 없고, 내 길 위해서 작은 실험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 실험들이 한백에서 서로 만나 새로운 길들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길을 찾아 나섰고, 그 길 위에서 행복하셨고, 그 길로 유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