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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장애 수용 렌즈로 바라본 장애인 당사자의 삶(유진우)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20. 9. 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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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수용 렌즈로 바라본 장애인 당사자의 삶

유진우(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김원영 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은 자신의 장애 경험을 토대로 본인의 서사와 장애인 당사자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 책을 써 내려가고 있다. 장애를 실격한 것으로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비판, 노련한 장애인, 장애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기호화된 인간, 장애인의 입장에서의 권리 등 다양한 주제로 자신의 서사를 풀어내고 있다. 이처럼 김원영은 자신이 경험했던 현실을 통해 사회의 시선과 장애의 긴장 관계를 지적한다. 그의 논점은 다양하지만, ‘장애 수용’에 초점을 맞추어서 장애인 당사자인 나의 서사를 써 내려가면 어떨까?

김원영에게 ‘수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수용한다(accept)’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 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있다.”(139p)

 요컨대 장애인으로서 삶을 선택한다는 말은 장애인 ‘당사자의 의지에 달려있다’라는 것이다. 내가 장애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영향을 받은 학문이 있었다. ‘장애학’이라는 학문이다. 나의 의지로 장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장애학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 즉 ‘의료적 장애 모델’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학문이다. 그럼 장애학에서 장애를 어떠한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바로 ‘사회적 장애 모델’로 장애를 이해하고 있다. 사회적 장애 모델이란 장애를 개인의 손상, 개인의 문제, 즉 극복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고, ‘사회가 문제다’라는 것을 지적한다.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수화통역이 되지 않고, 점자블록이 없는 상황은 장애인 당사자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상인의 입장에서 건물을 설계한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와 장애학의 만남은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바울의 다마스쿠스의 사건과도 같다. 장애를 의료적 장애 모델 관점에서 바라보는 눈이 이제 사회적 장애 모델로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었고, 장애인 당사자로 삶을 영위하기로 했다.

또한 김원영은 정체성의 수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나의 몸과 정신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으니 몸과 정신에 따른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고, 책임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 몸이 자유롭고, 존엄하고, 가치 있어야 한다는 책임을 지기로 ‘결단’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만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153p)

 김원영은 장애로 겪는 문제는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장애는 ‘극복’에 대상이 아니다. 장애를 수용하고, 장애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장애로 겪는 문제의 책임은 책임질 수 없는 문제이다. 필자는 걷는 것이 불가능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누군가가 ‘책임지라’고 한다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또 김원영은 장애로 인한 삶의 결과는 책임질 수 있다고 간주한다. 존엄하고, 가치 있어야 하기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김원영의 말에 동의한다. 이 말의 요는 장애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장애를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기고, 장애인 당사자를 ‘기호화’해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 

 나는 뇌병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부모님께서는 심히 좌절감과 무기력에 휩싸여서 한 달 동안 술을 마셨다고 한다. 장애 자식을 둔 부모님은 장애인으로 ‘키우자’라는 선택을 하고 어릴 때부터 재활 운동, 수술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해서 장애를 ‘극복’하고자 했다고 한다. 필자는 장애를 ‘수용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사춘기 시절에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이성에게 눈이 뜨일 시기에는 장애를 ‘거부’했다. 이유는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좋아하는 스포츠를 못 하고, 이동이 제한적이고,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애를 수용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장애로 인한 자존감 하락, 자존감 하락으로 인한 여러 번의 자살 시도, 부모와의 다툼, 왕따, 사람들의 시선 등이 장애 수용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현실들이 점점 집안에서 머물도록 작용했다.

 필자는 존엄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장애로 인한 결과에 책임을 지기로 다짐했다.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사회’로부터, 시혜적으로만 장애인 당사자를 대하는 ‘사회’로부터 한 발자국 나아가고 있다. 

 장애 차별에 대한 글을 쓰는 것, 장애로 인한 불합리함을 목격했을 때 참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임은 대학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학원에 필수 커리큘럼 중 하나인 ‘현장목회실습’이라는 과목이 있다. 현장목회실습은 교회의 현장에 나가서 미리 목회를 경험하는 것이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선택하는 선택권에 대해 ‘배제’를 받았다. 총 스물 여 곳에 선택권이 주어지는 가운데 장애 당사자인 나는 선택지가 두 곳밖에 없었다. 사실 다른 장애를 가지신 원우님도 있어서 선택지가 ‘한 곳’뿐이었다. 이에 불합리성을 느껴서 교역지도목사(이하 교목)에게 제안했다. 두 가지의 제안을 했는데 내용은 “현장목회실습지 선택권을 세 곳으로 넓혀주어라, 이것도 안 되면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주라”라는 것 제안했다. 교목은 나의 제안에 승낙하였고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필자는 장애로 인해 나타난 결과에 이야기하고, 타협점을 찾아내어서 존엄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책임을 지고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을 읽고 지금까지 장애 수용을 넌지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애인을 향한 무수한 차별, 혐오가 난무해도 장애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수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연대하여 차별과 혐오를 부수는 날이, 차별과 혐오가 없어지는 그 날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장애에 대한 ‘서사’가 많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장애를 개인의 고통이라 치부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글, 장애를 수용한 글 등 수많은 장애인 당사자들 본인의 서사를 쓰길 소망한다. 이 세상에 차별과 혐오가 없어질 때까지 ‘장애의 서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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