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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이 또한 지나가리(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12. 3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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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

박여라*

지난 여름 노아의 홍수보다 더 긴 나날 동안 이어진 장마와 때론 겁이 덜컥 날 정도로 쏟아지던 폭우가 마침내 그쳤을 때, 우산 없이 집을 나서며 든 낯선 느낌 때문인지 문득 노아는 방주 안에서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이 세상을 덮을 만큼 많은 비가 내리고 하나님이 뭍에서 숨 쉬는 모든 것을 없애시는 동안 방주는 150일 동안 그렇게 물 위에 떠 있었다. 노아는 40일 밤낮으로 비가 올 줄 알고 있었다. 방주를 다 짓고 들어갈 때 하나님이 미리 알려주셨으니까. 비가 그쳐 물이 잦아들고 땅이 말라 노아와 들짐승과 집짐승들이 방주 밖으로 나왔다.

노아는 알았지만 우리는 장마가 그렇게 길 줄 몰랐다. 폭우에 소들도 떠내려갔는데 그 가운데 몇은 어느 지붕 위에, 또 다른 몇은 높은 곳 사찰 앞마당에 옹기종기 살아남았다. 비가 그치니 커다란 어려움도 걱정도 끝나 홀가분하고 기뻤는데, 아뿔싸. 폭우에 휘둘려 거의 잊었던 코로나가 여전히 곁에 있었다. 그제야 찬찬히 둘러보니 여름이어도 햇볕을 제대로 쬐지 못한 마당에 포도송이가 익을 시기를 놓치고 여전히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초여름 포도나무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리고 알이 커질 때 나중에 새에게 잘 익은 열매를 너무 많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준비해둔 주머니망 여러 개가 다 쓸모없게 됐다. 익지 못한 포도송이는 가지에 달린 채 그대로 말라버려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속상했다.

가을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산불 소식이 전해졌다. 그곳의 건기 끄트머리엔 해마다 크고 작은 산불이 찾아오지만 요 몇 년은 재앙 같은 대형산불로 이어졌다. 올해 피해면적은 2018년에 세운 역대 최고기록의 두 배(남한 면적의 16%)였고, 서른 명 이상 사망했다. 특히 나파 지역에서 시작된 ‘글래스 화재'로 명성이 자자하거나 예전에 방문해서 기억이 생생한 여러 와이너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손실을 보았다. 불이 꺼지고도 오랫동안 남은 재와 연기는 다가올 그곳의 미래에까지 큰 상처를 남겼다. 늦은 가을까지 추수의 제때를 기다리던 포도송이들이 그만 불에 다 타버린 포도밭 사진을 보았다. 우리집 마당에는 포도나무가 고작 한 그루지긴 하지만 긴 장마에 익지 못하고 말라버린 포도송이나 불에 타버린 너른 포도밭의 포도송이는 모양이 비슷했다. 마음이 아프기도 매한가지였다.

올해 세계 와인 지역에서 날아든 와인 뉴스 가운데 흥미로웠던 것도 있다. 코로나 확산을 줄이기 내린 유럽 나라들의 이동금지령 같은 제재가 완화됐을 즈음이었다. 이탈리아에는 1630년경 ‘이탈리아 역병'이라 부르는 역병이 돌았는데, 토스카나 지역 특히 피렌체에서 ‘와인 구멍’(buchette del vino)을 통해 비대면으로 와인을 팔았다고 한다. 벽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출입문이나 창문을 열지 않고도 와인을 낼 수 있게 한 그 방법을 코로나19로 다시 쓰기 시작했다. 와인은 물론 커피, 젤라토, 샌드위치 등을 사고판다.

몇백 년 전 쓰다 위기가 지나가며 잊힌, 존재 이유도 몰랐던 벽에 뚫린 자그만 구멍이 의미를 되찾았듯이, 코로나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또 다른 무엇이 오리라!) 185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 포도밭을 초토화한 병충해 필록세라도 결국 자연적으로 내성이 강한 미국산 뿌리에 유럽산 가지를 접목시키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아내 극복했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음주로 인한 폭력, 정신질환, 경제적 손실 등 사회적 폐해를 막고자 지난한 입법 운동으로 어렵사리 만든 미국 금주법은 의도도 선했고 긍정적인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양조, 판매, 운반을 제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밀주 유통 등을 장악한 범죄조직을 키웠다. 금주법 이전과 이후,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으로 상황이 나빠진 뒤에야 -몰아친 대공황 타개책이기도 했지만- 다시 헌법개정으로 금주령 시대는 지나갔다. 

하나님은 사람이 악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지만, 노아가 땅에 발을 내디디고 올린 첫 번제물 향기를 맡으시고는 다시는 홍수로 쓸어버리지 않겠노라 다짐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캄캄한 장마 속에도, 불벼락이 쏟아지는 화재에도,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가운데에서도 벽에 난 작은 구멍 같은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하나님께서 계속 돌보시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필자소개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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