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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4대강 삽질과 그 대응에 관한 단상 (정혁현)

시평

by 제3시대 2010. 6. 18.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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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삽질과 그 대응에 관한 단상

정혁현
(한살림교회 목사 | 본 연구소 운영위원)


이 땅을 흐르는 가장 큰 네 개의 강이 온통 파헤쳐지고 있다. 이른바 ‘4대강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공사판 때문이다. 삽질이다. 토건행위로서의 삽질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삶의 환경을 구축해온 인간에게는 앞으로도 일정하게 필수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삽질이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정도로까지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4대강 살리기’란 강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강의 죽음, 혹은 심각한 질환이란 무엇인가? 또한 강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대체 강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녹색성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진행되는 4대강 사업의 핵심은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강 자체를 관광 생태 사업의 소재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 강의 생명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물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강의 능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산업자본, 나아가 강의 풍광을 상품으로 만들어 낼 관광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는 강의 능력이다. 강이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여 어서 건강해져서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부응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좋다. ‘4대강 살리기’가 그간 강이 우리에게 제공해왔던 것을 초과하여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면 왜 공연히 시비를 걸겠는가?

그런데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주체인 MB정부가 정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지 말이다. 정말 그들은 믿고 있는 것일까? 강의 환경이 좋아져 깨끗한 물이 넉넉하게 흐르게 될지, 그리하여 온 국민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하여 기꺼이 찾을만한 환경상품이 될지를 말이다. 그들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할 만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결정적 증거’는 사업의 졸속성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4대강을 살리는 사업은 좋은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면 얼마든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4대강은 한반도의 생명줄이라고 할 정도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물론 다양한 생명들에게도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하더라도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물은 더 깨끗해질지, 이 사업의 결과가 미치는 인간의 삶의 질과 다양한 생명체들의 환경 조건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따지고 또 따져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수정되고 또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바람직한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면 그들이 확신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이 세운 계획이 조금도 수정되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삽질이다. 여기서 삽질이란 허튼 짓, 곧 뻘짓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이 ‘무대뽀’ 확신과 뻘짓거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이러한 판단이 생태적 판단에서도, 산업이나 복지적 판단에서도 심지어 경제적 판단에서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확신은 오직 정치적 판단에서 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4대강사업은 MB정권에게 결코 삽질이 아니다. 다시 말해 4대강 사업의 진정한 성격은 MB정권의 성격 그 자체로부터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전선의 강화이다. 신자유주의는 투기적 금융자본의 무한자유와 노동자 저항의 분쇄를 통해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노동자 착취동맹이자 축적위기 대응동맹으로서의 정체체제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4대강사업은 20조가 훨씬 넘는 세금을 건설자본에 이양하는 폭력적 축적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자금은 다시 부동산을 비롯한 다양한 투기산업으로 넘어가 또 다시 인민의 재산을 손도대지 않고 등쳐내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다. 투기적인 금융활동이 경제지표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사회, 부가가치의 대부분이 성실한 노동과 열정적인 연구개발에서 오지 않고 투기활동에서 오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남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재산을 후려내는 정신성이야 말로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칭송될 것이다. 즉 4대강 사업은 MB정권과 같은 반민주적 신자유주의 정권의 지속을 위해 가장 적절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적 조건을 창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MB정권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사업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4대강사업을 되돌릴 수 없도록 저질러 놓으려는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정치환경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4대강사업은 ‘자연환경파괴’가 아니라 ‘정치환경파괴’ 사업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업의 목적은 온 국민의 정치의식을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에 포섭 혹은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 사업의 문화적, 생태적 측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결정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이들의 구호가 온통 환경과 생명의 문제에 집중되어있는 현상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4대강사업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살생금지’를 주요계율로 받아들이는 불교인들을 중심으로 종교인들이 포진해있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또한 진보적인 매체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기 위해서 취하는 주요 선전 전략은 지금 현재의 4대강이 ‘있는 그대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리는 것이다. MB정권은 4대강사업의 진정한 성격을 감추고 있고, 반대세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읽지 못하고 있다. 이래저래 4대강사업의 진정한 성격은 애매모호한 자연과 영성이라는 주제의 한계 속에서 은폐되고 있다. 자연과 영성이라는 이슈의 탈정치적 성격이 결국에는 현실타협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의 아름다움, 즉 강의 의미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할 수 있을까? 생활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강의 아름다움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인간의 환경조건을 결정하는 강은 결코 ‘있는 그대로’ 아름다울 수 없다. 강은 어떤 이에게는 마실 물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공장이나 농장에서 활용할 공업 및 농업용수이다. 또 매년 범람을 겪어야 하는 어떤 이에게는 끔찍한 재앙이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경치이자 휴식의 공간이다. 또한 생명 그 자체의 절대적 무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이들에게 강의 의미는 종교적인 것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강의 의미는 다양하며 이 의미들 사이에는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성이 가로 놓여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강이 그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정치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자연으로서의 강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4대강사업은 바로 강이 가지고 있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정치적으로 독점하여 배타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로 파악되어야 한다. 결국 4대강문제는 자연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에게 전개되어야 할 사회적 정의의 문제이다. 즉 강의 다양한 의미를 일정한 보편성을 갖고 분배하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조금 더 복잡한 문제로 들어가 보자. 4대강사업으로 파헤쳐지는 강과 연안에서 다양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그 곳을 떠나간다. 만일 4대강사업이 정부원안대로 완성된다면 강과 그 주변의 종다양성은 분명 빈곤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생명체들의 생명권을 위해서 이 사업에 반대하는 것인가? 우리는 강을 생명의 어머니, 초월적인 신화적 존재로 모시기 위해서 환경파괴에 반대하는 것인가? 나는 인간의 인권과 생명체들의 생명권을 평등이라는 동일한 지평에서 파악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문명은 혼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 인간의 혼란이 회복불가능한 생태계 파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문명은 바로 이러한 자연과 문화의 폭력적인 단절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프로이트가 『문명과 그 불만』에서 통찰한 바가 아닌가?

물론 나는 다른 생명체들의 생명가치가 인간 생명의 가치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인 반면, 자연 그 자체는 인간의 의미의 잣대로 파악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하지만 대개의 인간들은 자연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영화 <아바타>가 보여주듯이 인간과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오인한다. 이런 오인은 물론 인간의 인식조건인 ‘동일시’에서 온다. 그러나 동일시 할 수 있는 능력도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자연은 결코 인간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자연은 오직 물리화학의 법칙, 그리고 생명 그 자체의 동인에 의해 생존하고 사멸할 뿐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물학적 존재로서 생태계의 사슬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슬 안에서만 그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의미는 그 생태적 존재에서 파악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만일 우리가 이 초과분이 갖는 의미를 가볍게 여긴다면 시쳇말로 “인생 뭐있어?”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삶의 의미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는 결정적인 문제인 반면 다른 생명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시대의 웰빙 열풍이 이와 같은 인간 삶의 의미가 갖는 독특한 차원에 대한 몰인식 혹은 근원적인 회의에서 오는 일종의 허무주의라고 생각한다. 웰빙이라는 구호의 근원적인 허무주의는 그것의 관심이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과 건강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웰빙 열풍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인생 뭐있어? 건강하고 오래 살면 되지.” 물론 자본주의 시대에서 인간의 건강과 장수의 강조는 고급 상품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주체를 훈육한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이 생물학적 생명을 넘어서는 초과적 삶의 존재라는 이중성 속에서 자연과 관계 맺을 수밖에 없다. 순수하게 인간적인 삶의 의미는 바로 이 초과적인 삶에 있다. 그러나 이 초과적인 삶은 생물학적 존재로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서만 초과적인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초과적인 삶이 결코 자신을 생물학적 생명의 법칙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인간의 이중성 사이의 관계는 결코 평화롭지 못하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즉 생명의 요구가 초과적인 삶의 포기를 강요할 때, 이 둘의 관계는 적대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초과적인 삶은 자신의 근거인 생물학적 생명을 배신하거나 파괴하기도 한다. 최근 4대강사업에 반대하여 자신의 몸을 불사른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은 그 단적인 실례가 아닌가?  어떤 생명도 자의로 이렇게 하지 못한다. 물론 인간은 대체로 이 초과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연의 풍요로운 존속 가능성에 유의한다. 하지만 다른 생명체들은 자연과 이렇게 관계 맺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생명체이든 조건만 허락한다면 다른 생명의 존속 가능성에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종을 파국에 이를 때까지 확장시킬 것이다. 공룡의 멸종은 그 단적인 예가 아닌가?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지구상의 일정 지역에서 탄생하여 자신과 함께 다른 종을 파국에 이르게 한 생명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건만 되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인간이 바로 이러한 조건을 스스로, 곧 인공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점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오로지 종의 존속과 확산에 눈먼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인간과 자연의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미를 구성하는, 자연을 초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자신의 생물학적 생명을 삶의 의미를 향한 기반인 동시에 도구로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로서의 인간 말이다. 인간은 오직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존재로서만 인간이 만든 생태적인 재앙에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의미를 정의롭게 분배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을 자연의 청지기로 자리매김하는 창조신학의 본뜻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창세기의 사유를 ‘인간중심주의적’이라고 매도한다. 이러한 입장은 창조신학에 대한 사유의 빈곤이거나 오늘날 세계가 봉착한 위기의 ‘속죄양’을 찾으려는 책임회피일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을 초과하는 존재로서 생태의 폐쇄회로 속에 있는 자연의 의미를 개방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자연은 비로소 전혀 새로운 가능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배타적인 ‘인간중심주의’ 안에서는 파멸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자연의 돌출점이라는 특이성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의 통합 불가능한 이중성 안에서, 이 이중성을 부정적인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의 터전으로 인식하는데, 하느님은 이와 같은 부정이 긍정으로 변화하는 기적적인 도약의 순간에 관한 이름이기도 하다. 그 역도 가능하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적’ 긍정이 무의미의 심연으로의 전락하는 순간, 즉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깨닫는 부정적인 순간에 관한 이름이기도 하다.

파괴적인 4대강 사업은 물론, 인류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신화적 상상력이나 동일시의 환상에 기초한 자연과의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동일한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이다. 원시 혹은 고대적 사유로는 우리가 직면한 위기에 결코 대응할 수 없다. 그것이 ‘오래된 미래’라는 생각은 치명적인 망상이다. 대량파괴 테크놀로지를 가진 원시 혹은 고대인을 상상해보라. 돌아갈 길은 없다. 이 위기를 낳은 것도 인간의 지성이지만 이 위기를 돌파할 인간적 능력 역시 오직 끝까지 사유하고 행위 하는 지성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환경위기에 관한한 이러한 지성은 정치적인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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