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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포도나무가 말라버려 마실 포도주가 없을 거라고(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8. 4. 2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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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가 말라버려 마실 포도주가 없을 거라고

 


박여라*




주변을 돌아보니 지금 내가 건사하는 생명체는 네 개다. 회사 책상 위에 놓은 화분 두 개, 그리고 집 마당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랑 포도나무. 회사에 있는 스투키와 자미오쿨카스는 크기가 작기도 하지만 그저 지겨운 일과에서 딴눈 팔게 하는 게 목적이자 존재이유다. 집에 있는 고양이와 포도나무는 존재감도 훨씬 무겁고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게 희노애락을 준다.


고양이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하는 것으로 하고 포도나무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 해 전 서울 강남 어느 와인학교에서 분양한다고 하여 하필 그날따라 종일 쏟아지는 비를 뚫고 가서 가져왔다. 그때 두 그루를 받아왔다. 화이트와인 만드는 샤르도네는 수도관 묻는 공사 와중에 땅 파는 삽에 뿌리가 패여 죽었고, 남은 하나는 까만 메를로인데 고맙게도 해마다 계절 따라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음을 뽐낸다.


그러던 지난겨울. 영하 10도를 훨씬 밑도는 날들이 여러날 계속되기를 몇 번 거듭하더니 봄이 오기도 전에 어느날 마당에 있는 대나무가 푸른빛을 잃었다. 추위가 심해지면 고양이가 자기 집에서 잘 지내는지 아침저녁으로 살피고 물그릇에 물이 얼어있으면 바지런히 새로 물을 떠다 주기만 했지 지난가을 잎이 다 떨어진 뒤 포도나무는 돌볼 일이 없었다. 청청하던 대나무가 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아, 포도나무도 얼어 죽겠구나.. 했다.


구약성서 요엘서는 무서운 심판이 온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요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에게 전한 말씀이다. 너네 계속 이딴 식이면 메뚜기떼가 다 쓸고 지나간다. “포도 농사가 망하였으니, 새 술을 만들 포도가 없다… 포도송이가 말라 쪼그라들고 포도나무가 말랐다.” 딸랑 세 장뿐인데 요엘서처럼 무서운 경고가 또 있을까. 마실 포도주가 없다니. 으어.


내 포도나무가 죽었다는 절망에 늦겨울까지 망설이다 3월 첫 주말이 되어서야 가지치기를 했다. 작년에 새로 난 가지에 하나, 둘, 마디를 세고 싹뚝 싹뚝 잘랐다. 혹시 모르니까. 그런데 가지를 자르며 단면을 만져보니 말라 있었다. 에고.. 얘 진짜 얼어 죽었네. 여러 해 키웠는데 이렇게 끝이라 생각하니 몹시 섭섭했다. 그래도 뿌리까지 얼어버린 게 아니면 한두 해 있다 어디서라도 순이 나오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날이 풀리고 봄비가 내리니 그때마다 가지 몇 개 끝에 물이 올랐다. 너무 늦게 가지치기를 하면 이럴 때 감염위험이 있다고 하던데 모든 가지가 죽은 건 아니라서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무가 살아있었다.


마실 포도주가 없다며 너네 다 망했다는 요엘의 경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바꾼다. 근데,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혹시 마음과 뜻을 돌리실지 누가 아냐? 그리고 마음 아파 하시고 너희를 불쌍히 여겨 비를 내리시고, 포도나무에 다시 열매가 맺고 포도주가 넘칠 것이라고. 그리고 심판의 때에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너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며칠 전 포도나무에서 새순이 하나 나왔다! 가진 것도, 알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참 보잘것 없으니 맡길 뿐이다. 내가 건사한다는 생명체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 뭐가 있나. 비를 내리는 대신 물을 주는 정도다. 그냥 작고 볼품없지만 소박하게 흉내 내는 일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포도잎은 또 부쩍 자라겠지.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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