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근대의 문턱에서 스피노자는 중세의 미몽과 대결한다. 중세의 신은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의 대체물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 인간은 필멸의 두려움으로 신을 찾는다. 종교는 기복과 불멸의 희망을 선포하는 장치이다. 신이 절대 인격자가 되고, 종교가 구원의 방주가 될수록 인간은 비참해진다. 인간은 스스로 원인(自由)이 되지 못하고 예속된 삶을 살 뿐이다. 스피노자는 인격신을 거세하여 신에게 자연이라는 제 이름을 돌려주었다.

 

 

탈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중세의 미망에서 해방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신을 내동댕이쳤고, 누구는 더욱 집착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신을 발명한다. 세속화된 종교적 의례는 일상이 되었고, 위안의 담론은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비참은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렌즈를 통해서 묻고 싶었다. 부유하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꿈꾸고, 기다리고, 노동하며 살아가는가. 그대들의 신은 어디 있는가?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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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동안 쉼 없이 물어 날랐다. 

인공의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 

인간과 더불어. 여기가 내 집이다. 

진흙으로 바람을 막고 서까래를 올려 

허허둥실 우리집이로다.  


    


눈바람 깃을 여미고 털들도 모았다. 

새로운 생명을 부화해야 한다. 

높다란 도심 인큐베이터. 우리 집이다. 

생존과 번식의 업보 속으로 

만물은 허허로이 순환한다.  


      


그런데 사라졌다.

인간의 전망을 위해서

베이고 상처입고 무너졌다.


     


연둣빛 희망은 주저리 주저리

땅을 헤매고 있다.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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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102살 창호네 할매. 15살 시집와서 한곳에서 근 90년을 살고 있다. 

아들 혼인식 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졌을 때 꼬맹이들도 얼마나 신났는지를 할매는 기억하고 있을까. 

할매와 홀로 남게 된 손주 창호를 동네 아이들이 은근히 놀렸다는 것은 알까. 

손주도 객지로 나가자 할매는 매일 우리집에 찾아와 엄마와 말벗이 되었다. 

마을에 예배당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유일한 우리동네 교인이 되었다.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이제 우리집에 찾아올 기력이 없다. 

찾아와도 수다 떨 엄마는 집에 없다. 그래도 100년 삶의 기억들은 곳곳에 퍼져 있다. 

모든 할머니들은 역사의 기록 저편에 삶의 기억들이 있다.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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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향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함. 수업 시간 철저한 예복습과 효과적인 질문을 통해 수업 분위기를 주도하여 교과 교사가 원활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의도한 학습 목표를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함. 아침에 가장 먼저 등교하여 학교 자습실이 종료될 때까지 철저한 시간 관리를 통해 자기주도적 학습에 매진하는 등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는 모범적인 학교 생활을 지속함...”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 [사진에세이]는 한백교회 사진동아리 '눈숨' 회원들의 작품을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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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촘촘하게 사로잡힌 한 해 동안의 여정에서도 일상은 계속되어야 한다. 사내아이들의 투박한 놀이와 연인의 다정한 손길, 누군가의 유머로서 삶은 지속된다, 되어야 한다.

 

 

3

 

비계를 만들기 위해서 두 인부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 허공에 매달려서 손발을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아래에서는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내딛는 보폭이 있기에 작업은 진행된다. 리노베이션은 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지지해주고 받쳐주어야 한다. 건물이 비계를 필요로 하듯, 청춘의 길 또한 이끌고 받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해체되어야 건물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듯, 자신을 무화(無化)시킬 수 있는 청춘의 비계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 [사진에세이]는 한백교회 사진동아리 '눈숨' 회원들의 작품을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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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내 마음의 이중성을 마주하기


도홍찬
(면목고 교사)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서 화자가 존경하던 ‘선생님’은 평생 은둔의 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세상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까지 증오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는데, 이유는 그의 불행한 인생 경험 때문이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큰 걱정 없이 공부를 하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황이 바뀐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의 숙부가 성심껏 그의 뒷바라지를 해준다. 그는 숙부를 아버지처럼 따랐지만, 숙부가 재산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서 그와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 쫓겨나면서 다시는 고향땅을 찾아가지 않게 된다. 배신감에 인간을 믿지 못하던 그의 마음은 동경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다. 하숙집 안주인의 보살핌에 다시금 가족의 평온함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 하숙집 딸에 대한 사랑이 싹트면서 그의 마음은 다시금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다시금 비극이 찾아온다. 그의 친한 친구가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지자 하숙집 주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나누어 같이 하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보다 더 세상에 대한 벽을 쌓고 살아가던 친구가 어느날 고민을 털어 놓는다. 하숙집 딸을 몰래 연모한다고. 그는 내심 당황한다. 친구에게 자기 마음을 말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서 있지도 못해 안절부절 한다. 친구와 하숙집 딸의 일상적 관계도 이제 예민하게 바라보게 된 그는 결국 조바심에 친구 모르게 하숙집 여주인에게 딸을 달라고 청혼을 하고 허락을 얻게 된다. 그는 사랑을 얻게 되지만 친구를 잃게 되고 만다. 친구는 이 일의 충격으로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의 비밀은 오직 그만 알 뿐이기에 하숙집 딸과 결혼을 하였지만, 평생 그는 홀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과 절연한 채 살다가 결국 자살하게 된다.  

  타인의 욕망으로 상처를 받지만, 똑같이 타인에게 악한이 되는 우리 마음의 이중성을 나쓰메 소세키는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드러내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소설에서도 이렇게 우리의 불편한 내면을 끄집어낸다고 한다. 소세키는 유학의 처절한 경험을 통해서 강자의 논리를 따라서 승리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서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문학 원리를 체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기본위’의 삶을 위해서는 우리 안의 허위와 가식을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응시가 세상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관념적인 자기 결백성에 치중한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선악이 자명하고 이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저쪽 편이 되는 옹졸한 현실에서 우리가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기실 근대의 윤리학은 순수한 인간의 선의지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선악이 자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도덕법칙을 수립하고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선악의 대립보다는 양자의 침투와 뒤섞임, 상호 혼종을 경험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천사나 악마가 된다기보다는 경계선에서 양자를 오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애매모호함’의 윤리적 상황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 바로 자기 응시일 것이다. 선함의 이면에 위선이 숨어있을 수도 있고, 악역 속에 정의가 내재함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악이 일상의 안주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변혁 또한 작은 자존심 하나 지켜내는 것에서 촉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한다는 것 역시 마음에서 악을 몰아내고 순수한 선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에서 선과 악이 고투하는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자기 정당성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확신에 물음표를 붙이는 과정이 아닐까.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 기도하는 시간이 내 욕망을 확인하는 동어반복의 시간이라면 차라리 기도에서 잠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평생 상처받고 상처주는 삶이 반복되겠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책하겠지만, 세월을 통해서 최소한의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나와 타인을 응시하는 눈길이 깊어지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다. 선한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이었기에 고민하였고, 그러한 갈등과 고민으로 이른 새벽 자주 기도를 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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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과 '이익'의 관점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보는 용기


도홍찬
(중학교 교사)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의 단편소설 <코>에 한 스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코가 너무 길어서 고민이었던 스님은 코를 작게 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서 어떤 각도로 보이면 코가 작게 보이는지 연구를 하기도 하고, 민간요법으로 만든 약을 먹어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시도를 남몰래 하였지만 결국 코는 작아지지 않습니다. 스승의 말 못하는 고민을 눈치 챈 한 제자가 멀리서 코를 짧게 하는 비법을 배워오자 스님은 처음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가, 넌지시 자신한테 그 비법을 실험하게 합니다. 이 비법이 성공해서 스님의 코는 짧아졌습니다. 스님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치가 이상해졌음을 직감합니다.

코가 길었을 때에도 수군거린다고 느꼈지만, 막상 코가 짧아지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 심해졌다고 스님은 생각합니다. 스님은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나름대로 자신만의 설명을 합니다. 곧 사람들은 타인이 불행에 빠지면 동정심을 가지지만, 그 불행을 극복하면 오히려 허전함을 느끼며, 더 나아가 다시 그러한 불행에 빠지기를 원하는 이중적인 심보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님은 이것을 ‘방관자의 이기주의’라고 명명합니다.

물론 스님의 이러한 해석은 부분적으로만 정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웃은 것은 방관자의 이기주의라기보다는 스님의 위선적인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외모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면서, 결국 외모 때문에 온갖 해프닝을 일삼는 스님에 대한 야유가 더 큰 이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님이 느낀 마음의 불편함 또한 이해가 됩니다. 타인의 불행에 동정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그 고통과 공감하는 것일까요. 타인의 고통이 나의 상대적 행복을 확인시켜주는 만큼만 나는 그것에 동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고통의 해결이 나의 일상의 삶을 흔들지 않을 때라야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만, 내 삶의 어떤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면, 더 나아가 내가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다면 그래도 과연 나는 상대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경쟁적인 세상에 살면서 점점 타인의 행/불행을 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나의 이익과 관련하여 평가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친한 친구가 석연치 않게 교수임용에 탈락하면서, 무엇보다 안타까웠습니다. 너무 힘들게 준비해왔고, 본인과 친구들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는데 임용이 유보되면서, 모두들 실망하였고 우리들은 진심으로 친구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마음의 한 귀퉁이에는 그렇게 단 번에 임용되지는 못해, 저 친구가 안 되고 다른 사람이 된다면 혹 그 자리에 내가 갈 수도 있지 않을까 등 애초의 동정심은 사라지고 엄정한 객관주의와 이기심이 나타났습니다. 동정심으로 사회 윤리의 기초를 삼으려는 사람들이 동서양에 있었지만, 분명 동정심이 그렇게 순진한 도덕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친구의 불행을 단지 친구라는 이유로 동정한다든지, 아니면 나의 이익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모두 사건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가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이 공정하게 인정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친구를 제대로 동정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동정심과 공정성을 결합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남을 무조건 동정하다 보면 정의로운 제도를 생각할 수 없고, 기계적 공정성은 구체적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쉬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고통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행여 그 고통을 나의 행/불행과 연관 지을 때에는 나의 이기심을 넘어서 정의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나의 동정심 속에 있는 불순함을 바라보고, 경쟁 사회 속에서 나도 모르게 병들어가는 마음을 돌아보게 되기를, 그리하여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고, 불행은 줄어든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체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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