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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정우, 나에게서 당신에게(심정용)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11. 25.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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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나에게서 당신에게

심정용*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김목인의 공연을 보려다가 매진으로 인해 못 가게 되었고, 아쉬운 대로 그가 공연한 공간을 한 번 가본 뒤 마음에 들어 종종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거기서 정우의 공연을 처음 보았다. 이후 정우의 공연을 찾아다니다가 함께 공연하는 박소은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김목인과 박소은을 거친 이제서야 정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이전에 말했듯 김목인의 노래는 늘 잔잔하게 나를 위로해 주었고, 박소은의 노래는 그 강렬한 솔직함으로 아주 선명하게 다가왔다. 반면, 정우의 노래는 무엇이 왜 좋은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날 해방촌에서, 리허설부터 기타 소리와 목소리와 가사로 나를 사로잡은 그때로부터, 숱한 공연과 팟캐스트 방송과 정규 1집 발매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랬다. 그러다가 얼마 전, 그가 왜, 어떻게 노래를 써왔는지를 듣고 나서야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우울의 천적’은 정우가 음악을 시작한 계기부터 현재까지 걸쳐 있는 변곡점들을, 그의 곡과 관련된 몇 편의 일기와 함께 낭독하며 공연하는 AOD 방송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생긴 물집을 걱정하며, ‘가끔 누군가의 스무 몇 살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다던 정우는 첫 곡으로 <외로움>을 부른다. ‘여기에요 여기 이곳에 있어요’ 라는 가느다란 외침은 ‘나는 네 외로움이에요’라는 고백을 거쳐, ‘나아가 ‘넌 나의 외로움이에요’라는 발견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스스로의 외로움을 마주한 뒤, 정우는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되뇐다. 이전까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추켜세우던 단순한 수사를 접어두고 문득,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화해에 도달한다.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는 그 화해로부터 나온 노래이다. ‘당신이 늘 깨어 있었으면 좋겠어요/그럼 나는 걱정 없이,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흥미로운 점은, 그는 늘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뭐든 될 수 있는 조건은 ‘당신’이 깨어 있는 것이며, 자신의 외로움을 마주하는 과정 역시 외로움을 의인화하여 ‘나’와 ‘너’를 상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단순한 일기가 가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정우는, 단순히 무엇을 했는지를 넘어 무엇을 느꼈는지를, 한층 정제된 언어로 일기에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우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음악의 방향을 정한다. ‘나’가 ‘너’에게 ‘필요한 말을 정확한 자리에 꽂아 넣는 것’. 그리고 그것은 ‘너’의 입장이 되어 볼 때에야 가능하다.

‘누구나 좋은 이야기와 좋은 문장을 찾는 것을 안다. 내 노래가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 밤새 생각한다. 버려 둔 어제와 지친 그 방 안에 늙은 달빛을 따다 둥글게 우리를 안는다.'

아마도 무언가가 되는 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너’가 되어 보는 일이 아닐까? 일기를 쓸 때, 정우는 묘하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독백처럼 보이던 '나'의 언어는 조금씩 일기 바깥의 '너'를 향한다. 아울러 그의 가사 역시 ‘나’와 ‘너’, ‘우리’를 아울러 시점을 넘나든다. 한 해의 끝에서 여섯 번의 토요일을 앞둔 어느 날 정우는 위와 같은 일기를 썼고, 이는 <여섯 번째 토요일>의 배경을 이룬다. 여섯 번째 토요일은 한 해의 황혼이 되기도 하고, 생의 황혼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분리된 줄로만 알았던 존재를 건너뛰어 상상할 때에 은유(meta-phor)가 시작되고, 은유는 시공간을 이야기로 유연하게 엮는다.

한 개인의 노래가 다른 이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주고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이로 말미암아 서로는 서로가 건네는 위로와 경청의 가능성을 더욱 믿게 되고, 각자가 더욱 각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서 당신에게>라는 또 다른 노래의 제목은 큰 의미를 가진다. 오롯이 개인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로 나아가고 연결된다는 것. 내가 누군가의 위로와 기쁨이 됨으로써 관계한다는 것. 그렇게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의 ‘천적’이 된다는 것. 정우는 자신만의 것인 줄로만 알았던 '외로움'마저 누군가와 공명할 수 있음을 느끼면서 더욱 용기내어 솔직해지고, 그만큼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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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작조차 못한 내 논문은 그 구체적인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문제의식만은 일찍부터 나와 있었다. 나는 늘, 언어라는 기호로 이루어진 문학의 내적 형식이 텍스트 바깥의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문학을 단순히 그 자체로 완결된 '도자기'로만 보지 않고, 그렇다고 현실을 비추는 투명한 렌즈 정도로만 여기지도 않으면서, 구조와 역사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는 일이 그것이다. 지도 교수님은 박사 논문까지 끌고 갈 만한 좋은 주제의식이라 하셨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석사 과정에서는 제대로 다룰 수 없을 만큼 크고 넓고 흐릿한 주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마 나는 앞으로도 오래 모호하게 궁금해하리라.

이런 문제의식은 언어가 가진 물질성에 대한 흥미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의 물질성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러니까 마음 속에서부터 질량과 부피를 입어 공기의 떨림으로든, 빛의 반사로든 나타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 기호로서의 언어는 사회적이다. 온전히 나로부터 기인한 문장도, 전적으로 모두에게 걸친 문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은 늘, '나'와 '너' 사이를 번갈아 오가며 일렁인다. 그 움직임, 혹은 일렁임 때문일까. 이 '사이'라는 연결점을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언젠가, 어디선가 일종의 도약이 일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기가 노랫말이 되어 울려퍼지고, '나에게서 당신에게' 나아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듯이.

한창 공부를 할 때에 얻고 벼린 인식론은 여전히 귀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언젠가는 공부만을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요새는 또 공부만 빼고 온갖 재미있는 일들을 벌인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고 또 만났다. 나는 그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관계를 위해 노력해왔다. 거기에는 늘 술이 함께했고, 나는 괴롭거나 즐거워서 술을 마셨으며, 그래서 즐겁거나 괴로웠다. 결과적으로는 괴로움이 조금 더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시기가 지나려는 걸까.

공교롭게도 정우의 위 일기는, 글을 시작한 오늘을 기점으로 1년 전인 2018년 11월 18일에 쓰여졌다. 그리고 오늘, 어김없이 올해에는 여섯 번의 토요일이 남았다(절대 노린 것이 아니다!). 20대의 마지막에서, 올해는, 또는 나의 20대는 무엇이었나 돌아본다. 봄에는 방황했고 여름에는 뜨거웠다. 그리고 가을은 더없이 다채로웠다. 선연한 단풍부터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빚어내는 몰락의 소리까지. 그 모든 시간들은 결국, 나를 생각하고 발견하고 설명해내려는, 그래서 결국 내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서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의 수많은 순간들이 빼곡하게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는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와 함께 얽힐 때에야 비로소 구성되어 왔다. '나'가 '너'와 관계할수록 나는 더욱 외로워졌으며, 나는 그 외로움으로 말미암아 다시 나를 다졌다. 그리고 그런 후에야, 나는 더 넓고 다양한 경험들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아마도 더 유연해졌고, 그래서 더 단단해졌다.

작년 12월 31일, 기나긴 노원역의 환승 통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한껏 불만에 차 있었다. 왠지 다음 해 12월 31일에, 30대를 앞두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듯한 꿀꿀한 기분으로 비슷하게 그 길을 걸을 것만 같았고, 정말이지 그러기 싫었다. 아직 여섯 번의 토요일이 남은 지금, 이미 그런 꿀꿀한 기분과는 멀어진 것 같다. '아픈 것은 아픈 대로/예쁜 것은 예쁜 대로/이제 모두 충분'하다. 동시에,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여섯 번의 토요일 동안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정말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기쁘게 맞이해보려 한다. '나는 햇살의 바다, 구름의 강으로 가노니/남은 말은 바람에 속삭이세요.'

 *필자소개 

비교문학은 대관절 뭘 공부하는 건가요? 늘 질문받지만 매번 잘 대답 못하고 나도 모르고 심지어 아무래도 계속 모를 것만 같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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