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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비평] 다 너를 위한 일이야(박규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20. 5. 1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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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너를 위한 일이야

자기 반성: 코로나19 사태 이후 목회자의 길

박규진*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속으로 되뇌인다. 그리고 말하기도 한다. “다 너를 위한 일이야.” 그런데 정말 이것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최선인가? 1927년 하버드대학교 캐드홀이 “Universal”(보편성)이라는 주제로 누가-행전(Luke-Acts)을 이야기하면서 던진 말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우주의 모든 하나하나의 개별체에 관심을 가지는 행위와 정신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비교적으로 관심 밖의 대상인 가난한 자와 이방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기에 누가복음을 가난한 자의 복음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만을 위한 복음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복음서이다. 

보편이라는 말은 한쪽 손을 들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몸을 거칠게 다루는 운동일수록 양선수 가운데 심판이 서서 마지막에 누가 이겼는지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 아테네부터 전해오는 레슬링도 그렇고, 권투도 그렇다. 이종격투기 또한 그렇다. 한쪽 손을 들어준다는 것은 정당한 방법에 의해 손이 올려진 사람이 어떤 기준에 더 효과적으로 도달했다는 표시이다. 조금 더 미화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승자와 패자의 표식이 아니라 이 사람이 동시대에서는 그 기준의 이상적인 자리에 조금 더 먼저 갔다는 표현이다.

결국 승리와 패배는 우리가 그 당시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나누어서 보는 이분법적 결말이다. 아직 COVID-19로 인해 논란이 있지만 영국 프리미어리그 2019/20시즌이 리버풀이 우승한다고 해서 2020/21시즌도 2021/22시즌도 리버풀이 우승팀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 때에는 또 누가 기준에 먼저 도달하는지 늘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삶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 승자의 장막에 거할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 심지어는 불법과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면 승패를 없애고 등수를 지우고 과정으로만 봄이 해결점이 되는가? 어린 생각이요 지나친 낭만주의다. 1등도 없고 2등도 없고, 하릴없이 빈둥빈둥하는 내 아이에게 “괜찮아. 이건 널 위한 시간이야.”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다른 아이들이 수학이며 국어며, 열심히 선행수업을 하며 달려가는데, 늘 그들의 손이 세상에 들려지는데도 내 자녀에게 “괜찮아. 이게 진정 널 위한 일이야.”라고 가만히 앉아 있겠는가? 물론 이런 보편성의 세상이 옴은 즐거운 일이다. 각자의 가치관과 기준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면 정말 괜찮은 세상이다. 살맛나는 보편적인 세상이다. 그러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나에게도 너에게도 개별적 관심이 주어질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다. 결국 “나를 그리고 너를 위한다”라는 말은 너와 내가 가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편적이라는 말은 개별체에게 방해받지 않을 시공이 생기는, 주어지는 현실이다. 그 시간과 공간이 확보가 되면 개별체들이 살아날 수 있다. 원래 우리 앞에 시공은 늘 공평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늘 이 시공을 가지기 위해 무언가에 대해서 힘을 겨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우리는 이 시공에 던져진 존재라고 슬프게 이야기했다. 이 말은 누군가가 우리의 시공을 제한하고 있다는 확언이다. 그래서 기투(企投)된, 던져진 자로 “지어야 거주함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던져진 목적에만 맞추어 살아간다면 새로운 가능성의 출구를 열지 못한다. 누가 내 인생의 귀한 보편성을 재단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인생이 녹록치 않다. 현실에서는 나만의 시공을 짓기 위해 타인이 시키는 일을 해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생체리듬상 자야한다. 그러면 또 내일이다. 그러니 늘 새로운 시공에 거주함은 꿈만으로 끝난다. 꿈이라도 꾸면 다행이다. 지배자의 시공을 만드는 부품으로 나의 시간과 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도 많다. 기계 속의 찰리 채플린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런 세상은 불가능한 신기루의 세상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세상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연대를 해야 하는가? 무지한 이들을 교육시켜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기존체재의 견고함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시여(施與)적인 과제를 주면서 견제해야 하는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생각이 점점 더 약자와 소외된 자에 대해서 눈을 돌리고 있다는 현실이다. 정치적 약자든, 경제적 약자든, 힘없는 자들, 시공이 빼앗긴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은 좋은 변화이다. 그러나 이런 시여(施與)적인 일들로는 보편성의 세상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처음 창조의 시공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누구에게나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이 주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희망은 있다. 신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창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찰나(剎那)를 창조하며 연결해 나가고 있다. 당(唐)나라 영가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에서 말하는 손가락을 튕기는 탄지(彈指)의 짧은 시간 안에도 팔만개의 문을 열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수많은 개별체들이 900번의 생멸을 반복하는 일이 일어난다. 아무 의미없이 쓱 지나가는 일상의 단면이 너무 중요하다. 팔만개의 새로운 문이 열리고 한 생명이 900번의 생멸을 경험할 수 있는 그 값진 찰라의 순간을 신과 함께, 신의 마음으로 볼 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신의 음성을 듣고 전할 자가 필요하다. 그래야 개별체가 살아나는 보편세상이 온다. 너무 문학적인가?   

보편시대가 이 세상에 이루어짐에 대한 방법은 너무 중요하지만 결론은 교회로 가 보자(나는 보편세상을 다룰 깜냥이 아니다. 목회자다). 사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걱정이다. 왜냐하면 이 보편성을 무지막지하게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교회가 하고 있는 발상이 참으로 미성숙하다. “다 너를 위한 일이야.” 정말 목회자로서 부끄럽다. 시공과 가장 반대되는 말이 통제이다. 시공은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시공을 자신 안에 통제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돈이든 권력이든, 이성으로 지식으로 감성으로 기술로 통제하려 한다. 게다가 이제는 종교까지 심하게 한몫을 거들고 있다.

원래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새로운 빛이 비춰짐으로 내가 알게 되는 것이다. 교훈의 수업이 아니다. 그 빛에 대한 고백은 나의 의도와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는 결과물이 아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아내도(복음서에 장모가 나온다) 생업도 제쳐두고 예수를 따름에서 시작한다. 예수와 함께 고민하고 부딪히면서 화도 내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나온 고백이다. 베드로만의 시간과 공간이 녹아져 있는 산물이다. “당신은 진짜 괜찮은 사람이요, 그러니 하나님 아들쯤이라고 합시다.” 정답이 아니라 그순간 최고의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순간을 창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소리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창조의 소리들음이다.

그러나 창조의 소리들음에 대한 통제가 일어나고 있다. 고백이 통제당하고 있다. 이 현실이 교회의 타락이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종류의 다가감을 허용해야 한다. 기도하면 이뤄지고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들음도 맞다. 그러나 이전에 보지도 듣지도 행하지도 못한 수많은 문들을 열어야 한다. 답답한 시공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빛이 있으라. 이 말을 지금도 듣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다른 문을 볼 것이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고한다. 제발 성도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자. 교회 건물을 넓혀서 쉴 시간과 편한 공간을 주는 게 교회의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멋진 말씀으로 새삶을 도전하는 것으로 목회자의 임무를 다했다고 하지 말자. 건물로 위로하고 성경으로 통제하지 말자. 사람들이 고민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자. 고민과 반성없이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니 이렇게 하세요 하지 말자. 교회의 유지를 위해 무엇을 통제할지 고민을 멈추어야 한다. 왜 이 말씀으로 함께 살아내야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너와 내가 같이 살아나는 공간과 시간이 되는지 알려주어야 한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의 7연을 보면 이렇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교회는 그동안 나비와 제비의 천국이었다. 그들은 저들 혼자 빛을 보았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의 시공간에 함께 피어있는 맨드라미와 들마꽃은 그들의 공간을 꾸미는 한갓 장식용 풀이었다. 그리고 김매는 아낙들은 그들의 통제를 따라야 하는 초라한 모습의 일꾼들이었다. 늘 그렇게 풍경으로 존재하는 부속품과 같던 그들이 인사받아야 하는 예쁜 꽃들로, 아주까리기름 바른 어여쁜 여인네들로 드러나는 공간과 시간이 와야 한다. 

그런데 벌써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시공간에서, 우리가 설교하지도 시키지도 않는 일들 속에서 꽃으로 어여쁜 아낙들로, 진정한 교회로 잘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부터 모임예배를 시작했는데 한 성도가 이리 이야기하면서 지나간다. “교회가 없어도 교회는 되던데요.” 부속품의 독립선언이다. 만세. 

*필자소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사람 안에 장막을 세우신 하나님께 관심이 많은 목회자. 서울 충무교회를 섬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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